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미래전쟁 (2)

2010.08.06 23:2008.06


#2

잠잘 때 보는 건 눈꺼풀 속이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에 어째서 당신 모습이 아른거리는 것일까.

  
#3

‘닥터 창, 환자의 뇌파가…… 의식이 돌아온 거 같습니다.’

‘뭐? 그럴 리가. 우리가 시체를 잘못 가져왔나? 확인해보게.’

‘으음. 차트를 보니 이 시체가 확실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끙. 별 수 없군.’

‘살립니까?’

‘뭐? 살리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 환자는 이미 가망이 없네. 뇌파가 살아있다는 건 아직 뇌가 무사하다는 증거야. 이보다 더 좋은 시체가 어디 있단 말인가. 스트레이트 재킷의 과정을 거칠 필요는 없겠군.’

‘그럼 구조 변경은 하지 않으실 겁니까?’

‘보존상태가 양호하다면 저쪽으로 넘어가도 이성이 살아있을 걸세. 우리는 할 일이 줄어드니 좋고, 그쪽도 흥미로운 케이스를 얻는 거니 나쁘지 않아. 거기 톱 좀 주게. 두개골을 열어야겠네.’

쓰윽, 쓱, 쓱, 쓱, 쓰윽―

‘뇌파는 여전한가?’

‘맥박도 약하지만 점차 돌아오는 거 같습니다. 설마 저희들을 기억할까요?’

‘킁. 알게 뭔가. 기억해도 다시는 보지 못할 텐데. 거기 스칼펄(scalpel)을 주게. 아참, 마취했던가?’

‘시체를 상대로 마취한 기억은 없습니다. 애초에 저희는 마취제를 구비하고 있지 않습니다. 손님들이 불평한 적이 없거든요.’

‘하긴 그렇군. 이보게, 시체 선생. 아파도 날 원망하지는 말게. 지금부터 자네 뇌를 도려낼 거야. 느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뇌가 잘려나가는 고통일 걸세. 그러니 되도록 잘 참아보게.’

‘방금 의사로서 매우 부적절한 문장을 사용하신 거 같습니다만.’

‘의사? 자네는 아직도 우리를 의사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아닙니까?’

‘물론 아니지. 시체의 뇌만 골라서 잘라내는 의사가 세상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어디엔가 있지는 않을까요?’

‘물론 있지. 자네 눈앞에도 있고, 바로 옆방에도 있고, 사실 이 건물 전체에 바이러스처럼 퍼져있지.’

‘아, 그렇군요. 동질감을 느끼게 해줘서 감사합니다. 어서 시작하시지요. 뇌파가 죽어가는 거 같습니다.’

‘이런! 자네 때문이잖나. 후딱 해치우고 술이나 마시러 가세. 내가 사도록 하지.’

‘통장의 잔고가 거덜 날 때까지 마셔드리죠. 잠시 기록 장치를 가동시키겠습니다. 음, 그럼 No. 2,758,001번째 적출을 시작하겠습니다. 집도의는 닥터 창, 보조의는 닥터 류지입니다.’

  
#4

희망과 달리 꿈이라는 놈이 얼마나 지독하고 지저분하고 지리멸렬한 녀석인지 알게 되었다. 루시드 드림(Lucid dream)이라고 하여, 일명 자각몽으로 통하기도 하는 이 범죄자는 사기인 줄 알면서도 당하게 되는, 잠깐 눈을 감으면 코를 베어간다는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지독한 놈이다.

설마 내가 당하게 될 줄이야. 너무 생생했던 광경이 잊히지 않는다. 가장 끔찍했던 건 톱이 두개골을 자를 때의 느낌과, 차가운 수술실의 공기와 맞닥트린 뇌에서 차갑다고 소리치던 비명이었다. 썩은 이가 지천에 널렸는데 딱딱한 아이스크림을 깨물 때의 고통이랄까. 그게 뇌의 전체에 느껴지니 정신이 혼미해지고 믿지도 않는 신을 애타게 찾을 지경으로 돌아버릴 거 같았다. 아니, 돌아버린 게 분명하다.

대체 여기가 어딘지 도저히 감도 잡히지 않으니까.

이런 방을 본 건, 그러니까, 어떤 영화, 어떤 영화냐면, 스릴러였던 거 같은데, 아마 운명론에 가까운, 자극적이고, 잔인한데, 여주인공이 원해서 갇혀있던, 죽음이라는 운명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음, 아마 2편이었던가, 제목이 운명(destiny)과 연관이 되었던 거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벽에 머리를 찍어 자살할 수는 없는 방이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온통 새하얗고, 푹신푹신한 재질로 덮여있다. 가구 하나 놓이지 않은 살풍경한 공간은 겨우 세 평 남짓한 크기였다.

손을 확인한다. 팔을 더듬는다. 다리를 확인한다. 발가락을 움직인다. 머리카락을 만져본다. 두피를 눌러본다. 수술 자국이 없다는 것에 안도한다. 그러다가 환자복으로 짐작되는 상의를 들추고 배를 봤을 때, 나는 잠깐 정신이 나가버렸다. 없었다. 고등학교 때 수술했던 자국이 없다. 옆구리에 맹장 수술을 한 자국이 있어야 했는데, 그게 없다. 아내가 잠자리에서 내가 얄미운 짓을 할 때마다 꼬집던 자리인데. 나는 볼을 살짝 꼬집었다. 고전적인 방법이지만, 그래도 믿고 싶었다. 이러면 꿈에서 깨어나는 게 아니던가?

문득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이곳에 있어야 할 게 없었다. 나는 대체로 문이라는 게 사각형이라 생각한다. 벽의 무늬는 사각형이었지만, 문이라고 생각할 정도의 크기는 아니다. 여기에 문이 없다면, 난 여기에 어떻게 들어온 걸까. 아니, 이게 정말 꿈이라면 사실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지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일단 여기서 나가야, 꿈에서 깨어날 실마리라도 잡을 거 아닌가. 일단 볼을 꼬집었다고 깨어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여기가 대체 어디야?’ 라는 생각을 입으로 꺼낼 정도로 수다스럽지 않은 자신에 대해 고맙게 생각했다. 갑자기 쏘우(Saw)라는 스릴러 영화가 떠올랐다. 감시카메라가 있으려나. 주변을 둘러봤다. 특히 천장의 모서리 부분을 주의 깊게 살펴봤지만 구멍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하긴, 여기에는 테이프도 없고, 카세트 플레이어도 없으니 적어도 직쏘에게 납치된 건 아닌가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일단 좀 앉아서 생각해보자. 벽에 몸을 기대니 차가웠던 재질이 곧 체온을 따라 따뜻해졌다. 옷감이 얇은 반면 공기는 그다지 싸늘하지 않다. 그리고 대기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불쾌하지는 않았다.

오, 맙소사.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무척 짜증나는 여름이었고, 비가 내리고, 끈적끈적한 습기 때문에 불쾌했지만, 아내가 임신했다는 소식에 기뻤고, 꽃다발을 사고 싶었고, 마지막에 본 것은 붉은 버스였다. 자동으로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뉴턴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몸이 붕 허공으로 떠올랐고, 세상이 거꾸로 보였고, 가증스럽게도 그 다음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관념 하나가 머리에 박혀있었다.

난 죽었다. 그런데 몸에는 다친 흔적이 없다. 허리나 목도 괜찮고,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지도 않았다. 게다가 맹장 수술 자국이 없어진 건, 이게 꿈이라는 증거다. 아니, 어쩌면 난 죽었기에 천국이나 지옥이라는, 그런 믿기 어려운 공간에 떨어진 게 아닐까. 어쩌면 단테가 말한 것처럼 여기는 연옥일지도 모른다. 살아있는 자들은 올 수 없는, 그런 공간. 내 영혼이 그곳에 갇혀있는 거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영혼도 볼을 꼬집으면 아플 수 있나. 아까 볼을 꼬집었을 때는 꽤 아팠다. 그리고 중요한 건, 아까 일어났을 때 왕성한 남자의 활동이 진행 중이었다는 점이다. 지금은 사그라졌지만, 아무튼 살아있는 게 분명하다.

제발 누군가가 나와서 설명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나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역시 통증이 느껴진다. 모발 하나하나의 뿌리에서 생생하게 전해진다. 이건 꿈이 아니다. 꿈일 수 없다. 이렇게 생생한 꿈은 지금껏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지, 현실처럼 생생한 꿈을 이제야 한 번 경험해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지금 어떻게든 희망을 붙잡으려는 건가.

윤경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아이도 보고 싶다. 여기서 나가야해.

역시 고전적인 방법이지만 벽을 두들겼다. 일단 들어왔으니, 나가는 방법 또한 존재할 거다. 소리로 벽을 구분할 수는 없었다. 모든 재질이 너무 부드러워 충격을 모조리 흡수했다. 이런 재질은 난생처음 접해본 것이었다. 위를 쳐다봤다. 천장에도 흠집 같은 건 없다. 만약의 경우를 가정해봤다. 저기에 있다면 어떻게든 올라가야 할 게 아닌가. 혀끝으로 이빨을 점검한다. 나는 송곳니가 조금 더 날카로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걸 물어뜯기에 내 송곳니는 종이도 자르지 못하는 녹슨 면도칼처럼 무디다.

시도는 해보자. 라고 생각했을 때, 놀랍게도 음성이 들렸다. 스피커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는 방안 가득 울려 퍼졌다.

[안녕하십니까, 하진우 씨.]

굵은 남성의 목소리였다. 일단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에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소름이 끼쳤다. 대체 저 인간은 무슨 목적으로 날 이곳에 가둬둔 것일까. 직쏘가 떠오르자, 또 웃음이 나왔다. 설마 게임을 하자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정체도 모르는 사람에게 대답할 정도로 너그럽지 않다. 게다가 이곳의 분위기는 그다지 무서운 것도 아니라서, 맘 편히 계속 앉아있을 수가 있었다.

[저는 S.E.P 프로젝트의 인원 선발 중 정신케어를 담당하고 있는 닥터 존입니다. 당신의 담당의가 되어 기쁘군요.]

닥터 존이고 뭐고, 이름이 외국식인데 한국어를 그렇게 잘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궁금하신 게 많으시겠지만 지금은 참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주 중요한 절차가 있으니까요. 일단 앞에 보이는 장치에 손을 올려주시겠습니까?]

나는 무슨 개소리인가 하다가, 갑자기 방의 중앙에서 사각형 무늬가 갈라지면서 원통형의 하얀 기둥이 올라오자 눈을 몇 번이고 깜빡였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금 전까지 방을 샅샅이 훑었는데 어째서 저런 공간을 발견하지 못했던 걸까. 농락당한 느낌이다. 눈을 비비는 전통적인 방법으로도 그건 사라지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스캐너에 손을 올려주시겠습니까? 왼손, 오른손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까닭을 묻고 싶었지만, 일단은 얌전한 양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일부러 상대를 자극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을 올리자 나는 욕설을 퍼부으며 뒤로 물러섰다. 전기배선을 잘못 만진 것처럼 짜릿한 감촉이 손바닥 전체를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손바닥 전체가 뜨거운 물에 담근 것처럼 벌겋다.

[미리 말씀드리지 않아 죄송합니다. 통증이 있다고 미리 말씀드리면 몇몇 분들이 스캔을 거부하시는 경우가 있더군요. 음, 좋습니다. 신원이 확인되었습니다. 궤도 정거장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잠시 후에 정면의 문을 개방하겠습니다. 그곳으로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목소리가 나오는 도중에 나를 깜짝 놀라게 했던 기계가 바닥으로 다시 내려갔고, 반으로 갈라졌던 타일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위로 선명한 연두색으로 화살표가 생겼다. 방향은 정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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