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노인이 쓰러진 나무 위에 앉았다.
백발수염이 무성한 그는 중무장한 전사였다. 뾰족한 투구를 썼고 납작한 고리를 엮은 사슬갑옷을 입었으며 흙처럼 새카만 개가죽을 어깨 위에 걸쳤다. 허리엔 검을 찼고 손과 발의 맨살도 검은 가죽용품으로 감췄다. 가죽에 가느다란 철판을 박아 팔목을 보호하던 방어구는 몽땅 박살이 나서 대롱거렸으며, 녹색과 노란색의 세로줄무늬 바지는 왼쪽 가랑이가 너덜너덜하게 찢어져 피로 물들었다.
부상을 입은 노인은 자루까지 쇠로 만들어진 괴상한 도끼를 지팡이 삼아 그 끝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숨을 몰아쉬었다. 입가에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회백색의 액체가 수염을 타고 조금 흘러내렸다.
“어이, 대장.”
익숙한 목소리에 노인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몇 년째 자신을 따라다니는 충실한 붉은 머리 부하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전투도끼를 들고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앉았다. 마개가 전부 열린 채 벨트에 주렁주렁 매달린 화약통들, 옆에 놓인 화승총이 조금 전까지 그가 전투를 벌였음을 증언했다.
“괜찮은 거야?”
부하의 질문에 노인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부하는 안심했다는 듯 씩 웃으며 노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맛이 간 줄 알았잖아. 하긴, 괴물늑대는 보통 늑대가 아니지. 축하해, 대장.”
부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뒤로 돌아섰다. 그의 오십 걸음 앞에는 거대한 회색 늑대가 죽어나자빠져 있었고, 그 주변엔 병사들이 와글와글 모였다. 평범한 늑대와 달리 집채만 한 크기를 자랑하는 괴물늑대의 시체는 완전히 피투성이였는데 총탄구멍만 수십 개가 넘었다. 몸에 박힌 창촉과 도끼 자국의 숫자는 셀 수도 없었다. 찌그러졌다는 말이 더 어울릴 몰골이었다.
한 노인에게 덤볐다가 도리어 그 부하들에게 포위당한 늑대의 최후는 화약과 쇠 냄새가 진동했다.
“내가 잡았다고?”
겨우 입을 연 노인의 말에 부하는 다시 뒤로 돌아섰다. 그는 양팔을 활짝 벌리는 과장된 포즈로 선언했다.
“혼자서 저놈 턱주가리를 쪼개놓을 사람은 북부가 아니라 대륙을 통틀어도 대장 밖에 없어.”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약 덕이지. 그리고 나 혼자선 절대 못 이긴다.”
부하는 웃으면서 팔을 내렸다.
“알면 혼자 다니지 마. 놀라서 심장 멈추는 줄 알았어.”
노인은 오른손을 도끼에서 놓고, 긴 줄을 달아 왼쪽 어깨에 대각선으로 멘 여러 개의 작은 수통들 중 하나를 집었다. 뚜껑이 안 닫힌 그 수통의 입구에는 그의 입가에 묻은 것과 같은 회백색의 액체가 조금 묻었다. 그 수통 안을 들여다본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거의 다 흘렸군. 뚜껑을 닫을 겨를만 있었어도 좋았을 텐데.”
“장로님들한테 또 만들어 달라고 하면 되잖아?”
“당장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나.”
노인은 고개를 높이 들어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린 다음, 내용물을 그 안으로 탈탈 털어 넣었다. 몇 방울의 회백색 액체가 바로 흘러나왔다. 수통이 완전히 비었음을 확인한 뒤에야 노인은 수통의 뚜껑을 닫았다. 부하는 어깨를 으쓱해보이곤 대장에게 부탁의 말을 꺼냈다.
“기왕 약 마신 것, 늑대 가죽 좀 벗겨줘.”
노인은 그 말에 늑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동안 무언가 생각하던 그는 결론을 내렸다.
“태워라.”
“뭐?”
“발톱 하나 뽑지 말고 태워라.”
“어, 왜? 엉망이지만 나름 쓸모 있을 텐데?”
“모피는 죽여서 벗기는 게 아니다. 저 따위여서야 가치가 없어. 게다가 시간이 없다. 늦으면 지점장 녀석이 개처럼 짖겠지.”
“그렇다 해도 시체를 태우면 죽은 자의 왕이 싫어할걸. 가치가 없어도 기념은 되지 않겠어?”
“기념 따위엔 관심 없다. 그리고 저건 푸줏간의 돼지와 같아. 내가 죽인 것을 처분할 뿐, 그의 권리를 침범하진 않지. 다시 일어서기 전에 태워라.”
“분명 왕이 시시콜콜 따지진 않겠지. 하지만 아까운데.”
부하가 미련을 못 버리자 노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긴 북부가 아니라 자유도시의 세력권이다. 시체가 멋대로 돌아다니면 곤란하지. 죽은 자와 결탁한 북부 놈들이란 소릴 듣고 싶나?”
북부의 아킬레스건이 지목 받자 부하의 안색이 당장 변했다. 거래처의 영역에서 안 좋은 소문이 따라다니면 장사는 물론이고 목숨의 보전에도 치명적이다. 그렇잖아도 북부인은 살아있는 주제에 죽은 자의 왕과 동맹관계라 시선이 좋지 않다.
“그걸 미처 생각 못했군. 당장 태우지.”
부하는 잽싸게 늑대 시체를 향해 뛰어갔다. 잠시 뒤 병사들 사이에서 약간 불만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노인과 부하의 대화와 같은 과정을 밟더니, 잠시 뒤 발톱이나 이빨을 뽑던 병사 몇 명이 물러났다. 곧 화장 준비가 끝났다. 화약과 기름을 약간 부은 뒤 화승을 던져 불을 붙이자 당장 불길이 치솟았다. 병사들은 그 위에다 잔가지와 나무토막 몇 개를 던져 넣어 불길이 더 잘 살아나게 했다.
괴물늑대의 시체는 한번 꿈틀거리지도 않은 채 조용히 타들어갔다. 그 광경을 주시하던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등 뒤의 누군가를 향해서.
“늑대는 현명하다지.”
대답은 없었다. 노인은 계속 말을 이었다.
“현명한 늑대는 지금 이를 드러내지 않아.”
서늘한 숲 속에 도사린 입김이 목덜미로 느껴졌다. 노인은 도끼 자루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넌 덤비지 마라.”


<1막>

자유상업도시 투키의 하역부두는 늘 그렇듯 오늘도 외국인과 다양한 선박으로 붐볐다. 그 중에서도 특이한 건 다소 구식의 북부 군선들이었다. 가늘고 긴 모양새를 가졌고 갑판은 없으며 한 척에 서른 명 정도가 탑승한 이 배들은 모두 세 척. 전부 하나 같이 노란 세로줄무늬가 그려진 녹색 돛과 깃발을 걸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 배들이 누구의 소유인지 금방 알아챘다.
미치광이를 뜻하는 색깔 배합의 돛을 단 그 선박들은 용병이자 도적이며 상인인 미친 빌의 무장상선대였다.
상선대라고는 하지만, 미친 빌의 배들은 흘수선이 얕아 많은 양의 짐을 싣기가 글러먹은 구조였다. 때문에 그 안에 실린 교역품은 작아도 비싼 물건들, 또는 약탈품일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하역장의 사람들은 약간 불쾌하면서도 호기심 섞인 눈빛으로 무장상선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처음엔 북부 상선을 보고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물건들만이 쏟아져 나왔다. 대륙 중부의 마법왕국에서 만든 공예품과 판화들, 화약과 총, 증류주, 장로들이 엄선한 약초 꾸러미…….
사람들이 불쾌해하면서도 은근히 보길 바랐던 것들은 미친 빌과 함께 나타났다.
다른 신발과 달리 튼튼한 굽을 달아놓은 가죽 장화가 나무 바닥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의 시선은 곧 소리가 난 곳으로 몰렸다.
허리춤에 장검을 찬 다섯 사내가 짐을 내리는 선원들과 인부들을 지나쳐 도시 방향으로 걸어갔다. 제일 뒤에선 흰 피부에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전형적인 북부 사나이 둘이 커다란 가마를 짊어졌다. 그 가마에는 황금빛이 새어나와서,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던 죽은 자의 황금임을 알 수 있었다. 주인 잃은 보석과 황금의 찬란한 빛.
가운데에서 나란히 걷는 둘은 대머리 노인과 중년사내였다.
노인은 늘어진 주름살과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백발수염, 그리고 머리카락 한 올 없는 대머리를 가졌다. 갖가지 보석반지를 손가락마다 둘씩 꼈는데, 펑퍼짐한 흰색 로브와 그 위에 걸친 갈색 가죽 가방들은 대개 낡아서 색이 바랬다. 그 불균형적인 모습은 그가 청렴을 강조하면서도 별나게 반지만은 광적으로 좋아하는 북부 장로회의 한 사람임을 알려주었다.
그 옆의 사내는 짧은 붉은 머리와 사각턱수염을 갖고, 주먹코에 남자치곤 약간 큰 눈을 가져 다소 순박해 보이는 인상을 가졌다. 하지만 어지간한 용병대의 간부들이 그러하듯 살벌한 무기들로 무장했다. 건장한 체구 위에는 원형 고리를 무수히 엮은 사슬갑옷과 둥그스름한 투구를 착용했으며 전형적인 양손 전투도끼와 북부製 총을 들었다. 사슬 갑옷 위에는 왼쪽 어깨부터 허리띠 오른쪽까지 가죽 띠를 둘렀는데, 그 가죽 띠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화약통이 줄줄이 매달렸다. 겉보기엔 평범한 북부 총병이지만, 그가 걷는 위치를 생각해볼 때 그는 대장이 가장 신임하는 부하다.
가운데 두 사람보다 두 걸음 앞에 서 걷는 흰 수염의 노인이 바로 상선대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코가리개가 달린 뾰족한 투구를 쓰고, 팔꿈치와 무릎까지 내려오는 사슬갑옷과 검은 개가죽 망토를 입었다. 그 사슬 갑옷의 몸통 부분은 납작한 고리를 대갈못으로 박아 연결해놓았는데, 소매와 허리 아래 부분은 평범한 원형 고리를 그냥 엮어놓았다. 갑옷소매 밖으로 나온 팔목은 가늘고 긴 철판 몇 개를 가죽보호대 위에 고정시킨 방어구로 보호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크게 파손되었다. 손에는 장갑까지 끼워져서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피부는 별로 없다. 흉흉한 두 눈과 덥수룩한 백발수염만이 그의 전부처럼 보였다. 갑옷에 파묻혔다는 말이 어울린다.
“빌 대장님, 오랜만입니다.”
긴 검은색 옷을 멋지게 차려 입은 남자가 이 오인조의 앞에 서면서 입을 열었다. 자유도시 상인들의 전형적인 정장으로, 그의 자리를 상징하는 옷이었다. 빌은 그를 보자마자 본론부터 꺼냈다.
“기일은 지켰다.”
“그래야죠. 요즘 남부 제국이 화약을 많이 찾거든요. 물론 죽은 자의 황금도 중요하지만.”
“화약 외에도 팔 게 있다. 지점장은 어디 있나?”
“지점에 계십니다.”
빌은 몸을 반쯤 돌려 황금이 가득한 가마로 시선을 돌리곤 다시 입을 열었다.
“가자.”

*
투키 시의 치외법권인 북부인 거주구역은 투키 시 안의 다른 지역과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다만 북부재단에서 고용한 남부 흑인 용병 몇 명이 커다란 투창과 2연발총을 들고 진입로를 지킬 뿐이었다. 하지만 도시민들은 잘 보이지 않는 구석에 새겼거나 세워졌다는 해골조각상들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이 구역에 쉽게 접근하질 못 했다.
죽은 자의 왕이 축복한 자들이 사는 곳.
30년 전 이디아 대륙 북서부에 아무런 예고 없이 나타난 죽은 자의 왕은 한 반도 국가를 저주했다. 그 나라는 곧바로 멸망했고, 왕은 영향력을 그 밖으로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대륙 전체의 시체를 일으켜 세워 각지를 피로 물들였다. 그의 저주가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땅에선 작물들이 시들었고, 우물마다 독이 끓어 넘쳤으며, 독충이 하늘을 뒤덮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미 그 저주는 잦아들었건만, 그 사건은 추억되기도 끔찍해 그저 대학살이라고만 불려졌다.
북부인의 파롤 왕국은 진원지로부터 가장 가까운 왕국 중 하나였지만, 죽은 자의 왕이 그들에겐 별 관심이 없었던지 그 와중에도 무사했다. 때문에 북부인 중 일부는 죽은 자의 왕을 질병과 의학의 신이자 행운과 재물의 신으로 추앙했다. 북부인의 서해 진출에 방해가 되던 반도 국가가 멸망하면서 황금어장과 해로를 손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구과잉에 시달리던 파롤 왕국은 저주가 잦아들자마자 빈 땅으로 개척민과 모험가, 귀족들을 떠나보내면서 그 영향력을 하루가 다르게 늘렸다.  
끓어 넘치던 증오가 잦아들고 어느 정도 이성을 찾자, 죽은 자의 왕은 새 주민이 된 북부인들에게 주목했다. 그는 처음부터 북부인들을 친구로 대하기로 작정했는지, 천지를 격동시키는 검은 가루약을 가르쳐주고 멸망한 국가의 재산 중 적잖은 양을 북부에 선물로 안겼다. 그에게 돈은 많았다. 그 어떤 시체도 빈 손일뿐이니까. 이젠 이런 배경을 등에 업어 떼돈을 벌고 금융업으로까지 진출해 북부 편력상인의 편의를 봐주는 북부재단이란 단체까지 등장했다.
남의 죽음이 곧 나의 기회.
다른 지방 사람들은 북부인들을 싫어하거나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장로님, 대장, 다들 오랜만입니다.”
“그 소리, 스물네 번 들었다.”
빌은 자신을 마중 나온 사내와 똑같은 차림새를 한 투키 시의 젊은 북부재단 지점장 그라스 모리의 인사말에 볼멘소리로 답했다. 그 말에 뒤에 서 있던 동료들이 킥킥 웃어버렸다. 모리 지점장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을 아는 사람들은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했을 테니 말입니다. 대장은 반갑지 않습니까?”
“별로.”
모리 지점장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황금이 실린 가마를 곁눈질하곤 말했다.
“앉으시죠. 예정대로 가져오셨습니까?”
장로가 고급스런 장식으로 치장된 긴 나무 의자에 먼저 엉덩이를 붙이자 빌은 그 옆자리이자 가운데 자리를 차지해 앉으면서 답했다.
“그래. 배달하기로 되어 있던 화약을 뺀 화물 나머지. 그리고 미리 얘기한 죽은 자의 황금 약간.”
모리 지점장은 부대장이 의자에 앉을 때까지 뜸을 들이다 질문했다.
“예. 죽은 자의 황금은 밀알그릇을 통해 들었죠. 나머지 화물은 뭐가 있습니까?”
“종류는 미리 전해준 이야기와 별로 차이 없다. 북부 증류주와 중부 판화, 호박 약간. 자세한 수량이나 품질은 네 부하한테 물어봐라. 말하기 귀찮다.”
장사하는 사람의 언행이라고는 좀 생각하기 어려운, 짜증 섞인 말투였지만, 모리 지점장은 전혀 불쾌해하지 않았다. 하루 이틀 대한 사이가 아닌데다, 무장상선대를 이끌고 있다지만 빌 대장은 상인이라고 하기엔 몇 가지가 결여되어 있으니까.
그의 공식적 신분은 파롤 왕국의 準상비군 총병중대장이었고, 본질은 떠돌이 약탈자에 가깝다. 그리고 그가 가져온 물품은 대개 위탁판매로 팔린다. 모리 지점장이 빌의 고객은 아니다. 오히려 빌이 모리 지점장의 고객이라 봐야 한다. 게다가 미친 빌은 질서 밖으로 한 발을 걸친 사람이다. 질서 안 사람에겐 위험한 폭탄과 같다. 빌은 신경을 써서 다뤄야 한다. 그라스 모리 지점장은 빌의 파손된 방어구를 곁눈질했다.
‘또 무슨 일 있었군.’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증류주는 좀 팔기 어렵습니다.”
“왜?”
“신대륙에서 값 싼 럼주가 대량으로 들어오고 있으니까요. 가격 경쟁력에서 밀립니다.”
빌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가격경쟁력을 비롯한 여러 면에서 북부 증류주가 다른 경쟁상품에  밀린다는 사실은 익히 아는 이야기다.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래서 우리도 가격을 확 깎지 않았나. 세금을 피해서 밀조하고, 중고 술통을 재활용하고…….”
“그것만으론 부족합니다. 서양 놈들이 대체 무슨 재주를 부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상대가 안 됩니다.”
빌은 자신답지 않게 꽤 긴 푸념을 늘어놨음에도 불구하고 모리 지점장이 고개를 젓자 믿기 힘든 결론에 도달했다.
“설마 그 사이에 럼주 가격이 더 떨어진 거냐?”
“예.”
빌은 애꿎은 천장으로 시선을 돌린 채 잠깐 동안 침묵했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씹어 내뱉듯이 말했다.
“빌어먹을 서양 놈들.”
사탕수수로 설탕을 만들고 남은 폐당밀로 만든다는 럼주는 파괴적인 증류주였다. 그것은 이디아 대륙에 상륙하자마자 그렇잖아도 ‘술에 취한 사회’였던 대륙을 더욱 술독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곡류가 원료인 북부 증류주나 과일이 원료인 타 지역 증류주를 가격에서 압도했다.
“이주민 덕택에 꾸준히 팔리긴 합니다만, 신대륙 럼주와 경쟁하려면 더 낮은 가격을 부르셔야겠습니다. 원가 이하로 팔더라도.”
“알았다.”
“이제 북부 증류주는 갖고 오지 않으셔야겠습니다.”
“그건 안 돼. 술 빼면 북부는 화약이나 양모, 호박 빼곤 정말 팔만한 물건이 없으니까. 이익이 적어도 반쯤 빈 배로 내려오는 것보단 낫겠지.”
“이익이 적어도? 그쪽 원가도 상당히 내려간 모양이군요.”
빌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정보를 밑바닥까지 보이진 않는다. 위탁판매 수수료와 운송비를 제하더라도 이익이 조금은 남는다는 이야기만이 지점장의 손에 쥐어졌다. 지점장은 어느 동네 양조장인지는 모르겠지만 비용 절감에 목을 맨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보다 더 큰 이익 이야길 하지.”
빌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오른손을 들어 뒤의 부하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황금 가마가 단번에 앞으로 튀어나왔다. 모리 지점장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순간적으로 떴다가 사라졌다. 빌은 그의 눈치를 보곤 웃으며 말했다.
“이건 어떤가?”
“역시 멋지군요.”
모리 지점장은 영업용 미소로 그 말만 했다. 약간의 해골 몇 개가 섞였다고는 하지만, 상자 하나가 금은보화로 가득 찬 모습은 엄청난 단위의 돈을 수시로 움직이는 북부재단 지점장조차 보기 어렵다. 금화 수천을 장부에서 움직이는 것과 같은 양의 금화를 직접 보는 것은 그 느낌이 전혀 다르다. 저주 받아 죽은 자들이 미처 수습하지 못한, 불길한 재산이란 점은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
“메티오즈 백작령을 뒤져서 건졌다.”
“그 동네, 아직도 나옵니까?”
“실은 도굴꾼 패거리도 좀 털었지.”
“도굴꾼? 설마 북부 개척민을 공격한 겁니까?”
“아니. 대학살의 생존자 놈들, 그 머저리 병신들 말이야. 웃기게 생긴 주제에 실낙원기사단 문장을 가졌더군. 놔두면 개척민이나 시체들을 공격할 것 같아서 박살내버렸어.”
“잘 하셨습니다. 생존자들은 죽은 자의 왕만이 아니라 우리까지 증오하니까요. 거기다 실낙원기사단은…….”
빌은 모리 지점장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 덕택에 왕의 대리인이 황금을 더 얹어주더군. 개척귀족 놈들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꼴을 자네가 봤어야 했어.”
“아쉽군요. 여하튼 저건 위탁판매가 아니라 북부재단에서 매입하겠습니다.”
“왜?”
“귀금속과 보석의 시세가 오를 테니 황금을 비축해두라는 명령이 위에서 내려왔습니다.”
그 순간 빌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귀금속 시세가 오르는 상황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당황스러운 이유는 바로 분쟁이다. 북부 군인으로서 분쟁을 기피할 생각은 없다. 다만 슬슬 선원을 보충하려는 그에겐 분쟁이 안 좋은 소식이란 것이 문제다. 재단이 주목하는 이번 분쟁은 꽤 크리라. 그렇다면 적어도 이 근방은 선원이든 병사든 몸값이 크게 뛴다.
“안심하십시오. 분쟁이 터질지 안 터질지는 아직 모르는 일입니다. 터진다는 소문만으로도 가격은 춤추니까 미리 귀금속을 비축해둘 뿐입니다. 그리고 약속한 석궁병 10명은 이미 준비되었습니다. 다들 북부인 자치구 출신입니다.”
몇 수 앞을 읽어본 모리 지점장의 말에 빌은 입가를 씰룩였다. 그에게 남쪽 상인의 약삭빠름은 익숙하지 않다.
“좋아. 그리고 매입 건 말인데.”
“예.”
“아직 남쪽으로 갈지 북쪽으로 갈지 못 정했어. 적당히 싸고 잘 팔리는 걸 먼저 사둘까 하는데.”
“결정 못 하셨다고요?”
모리 지점장이 의아하다는 듯 묻자 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밀알그릇에서는 이야길 못 했다. 이번 겨울엔 남쪽으로 가서 제국총독의 용병 노릇이나 한 1년 하며 보내고 싶군. 헌데 아직 그럴듯한 구인 소식은 안 들려.”
“대장의 명성이라면 큰 문제는 없을 텐데요.”
빌은 손사래를 쳤다. 지점장의 말은 전형적인 아부였다. 빌이 그런 말에 혹할 리가 없다.
“명성은 얼어 죽을. 제국에선 동네 강아지 취급도 안 해준다. 거기다 느닷없이 달려가서 고용해달라고 조르기도 이상하잖나. 자네가 말한 대로 분쟁이 터진다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그렇군요.”
“여하튼 당분간 이 근방에서 머무르다 항로를 정할 거다. 이도 저도 못마땅하면 대륙 서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돌아가던가.”
“그렇다면 남쪽에서든 북쪽에서든 잘 팔리는 교역품을 먼저 구매해둬야겠군요.”
“값 오르기 전에 시세 낮은 것부터.”
“그럼 양홍으로 염색한 적색 직물, 대청으로 염색한 청색 직물, 상티부스 염전의 소금, 서양 성냥과 방한구…….”
지점장이 읊는 목록을 듣던 빌은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했다.
“그 정도는 금방 준비하겠지?”
“물론입니다.”
“좋아. 서적도 이 종이에 적힌 대로 준비하게.”
종이는 빌 대장의 주먹 속에서 나왔다. 모리 지점장은 구겨진 종이쪽지를 받아들어 펼쳐보았다. 품속에서 코걸이 안경을 꺼내 낀 그는 잠시 뒤 말했다.
“건강법, 양생훈 보론, 외과대요 비판본, 삼각법 전서, 기하학 원론, 문명의 역사, 시간의 승리, 상상세계……신간정보를 귀신 같이 알아내셨군요.”
“장로회가 신간정보에 혈안이 되어 있으니까. 선원들 주게 럼주도 좀 챙겨둬.”
“럼주는 재단에서 만든 놈들로 채워도 되겠습니까?”
지나치게 단순한 질문이었다. 빌은 모리 지점장이 원하는 대답을 건네줬다.
“서양 럼주를 이 도시에서 사려면 관세가 붙잖나. 그렇잖아도 이 도시는 럼주에 매긴 관세를 미친 듯이 올린다던데.”
“사실입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모를 게 뭐 있어. 여기 놈들도 자기네 증류주가 럼주에 밀릴까봐 겁먹은 거지.”
“그런 것 치곤 좀 극단적으로 높은 관세입니다. 투키는 예속도시들이 증류주를 소량 만들뿐인데 말이죠. 여하튼 저희야 좋죠. 저희 럼주도 그럭저럭 경쟁력을 얻으니까요.”
“그래. 기왕이면 같은 북부인끼리 거래해야지.”
“세금이 때론 득이 되는군요. 빌 대장과 거래하는 밀주양조장에겐 해당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만.”
모리 지점장이 웃으면서 말하자 빌은 손사래를 쳤다. 그는 남의 귀를 조심하란 의미로 창밖에 힐끗 눈길을 주며 말했다.
“떠들고 다니지 마라. 관리 놈들이 알면 귀찮아져.”
지점장은 기어이 소리 내어 웃었다.
“예. 럼주는 일 할 할인해드리죠.”
“좀 더 깎지?”
“저희도 먹고 살아야죠.”
“엄청 벌면서 엄살은. 아, 이건 락토 개척촌의 브롬 장로님 요구인데, 이번에 가져온 약초 값은 별도로 취급해서 환어음으로 달라더군. 북쪽으로 가는 재단 선박 편에 전해드리게.”
“그 어르신, 현물과 금화 밖에 모르시더니 이젠 어음도 쓰시는군요.”
“이젠 지점들과 거래해도 될 만큼 개척촌이 성장했단 이야기겠지.”
“시대가 변한단 이야기가 정확하겠죠. 북부인이 남쪽에서 이렇게 장사와 돈놀이로 번영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장로회도 좀 덜 완고해졌으면 좋겠습니다만.”
빌 대장의 옆에 있는 종군 장로 들으라는 소리였다. 30년 전의 대학살은 타 지방과 달리 한 세기는 뒤떨어져 살던 북부인에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줬지만 아직 장로회는 보수적이었고 비밀스러웠다. 장로는 콧방귀만 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빌 대장이 짧게 변호했다.
“첨단을 달리는 사람이 있으면, 전통을 지키는 사람들도 필요한 거야. 좋은 서적이나 몇 권 추가해주게. 인기 있는 녀석으로.”
“하긴, 대장도 보수파니 이런 말은 쓸데없겠군요. 책은 제가 직접 골라보죠.”
“싸게 해주면 고맙겠군. 브롬 장로님 드릴 것은 따로 포장해주고.”
“예. 신입은 오늘 저녁시간까지 보내겠습니다. 아, 노예와 권총도 마침 좀 들어와 있습니다만. 권총 몇 자루 보시겠습니까?”
권총이란 말에 빌은 흥미를 보였다. 총은 많을수록 좋았다. 화승총을 두 자루 가지면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권총이라면 그렇게 큰 부담이 가질 않아 여러 자루를 더 장비할 수 있다. 보조무기로는 그런대로 쓸 만한 것이다.
“길이는 어느 정도인가?”
“한 뼘 정도 됩니다.”
빌은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적어도 그의 기준에 의하면 한 뼘 길이의 권총은 지나치게 작은 권총들이었다.
“2뼘 이상은 되어야 써먹을 수 있지. 애들 장난감 같은 총으로 뭘 잡겠나. 우린 그보다 강력한 총이 많다.”
“뇌관총입니다만.”
“진작 말하지.”
빌은 당장 입장을 뒤집었다. 화승식보다 간편한 뇌관식 총은 비싼 물건이었다. 뇌관의 생산량이 아직 적은 탓이었다.
“내가 볼 것까진 없고, 신입들에게 몇 정 들려서 보내라. 뇌관도 좀 주고. 노예는 나가는 길에 보겠다. 하역창고에 있지?”
“예. 신경 써서 준비하겠습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그래, 더 이상의 추가사항은 없다.”
사전에 밀알그릇을 통해 정해진 대로다. 사업이란 본디 이야기가 많지만, 적어도 그에 관한 말은 다 했다. 이젠 빌에게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나올 때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아, 응접실엔 불편한 적막이 흘렀다.
빌은 한숨을 내쉬어 침묵을 깨곤 말했다.
“반가운 소식은?”
“죄송합니다.”
모리 지점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과했다. 빌은 어깨를 늘어뜨리곤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상품에 대해 실망했을 때보다 더 심각한 모습이었다. 지치고 슬픈 노인의 얼굴. 순식간에 그의 체구가 왜소해지는 것 같았다. 게드 장로만이 혀를 찰 뿐, 다른 사람들은 그의 침울함에 끼어들지 못했다.
빌은 다시 가슴을 폈다. 그는 고집 센 노인의 얼굴을 회복하곤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알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다. 그게 자네 잘못인가.”
“반가운 소식은 들어오는 대로 전해드리겠습니다.”
“고맙다. 이만 일어나겠다.”
“예. 편히 쉬시길.”
의자를 차지하는 특권을 가진 사람들은 동시에 일어섰다. 응접실을 나서는 순간 지점장과 빌은 서로 반대방향으로 돌아서 걸어갔다. 부하들은 붉은 머리의 부관에게 요청의 시선을 보냈지만, 가장 고참인 그는 대장이 말하지 않는 것을 캐묻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그는 동료들의 기대와 다른 질문만을 꺼냈다.
“대장, 다리는 괜찮아?”
빌은 고개만 끄덕였다. 바지의 꿰매놓은 자리에 약간 얼룩이 지고 있다. 대답은 대머리 게드 장로가 대신했다.
“할퀴었을 뿐이야. 약을 바르고 붕대를 매놨으니 괜찮을 거다.”
“그냥 할퀴었다고만 말하기엔 꽤 깊었잖습니까. 그 상태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걷고 다니니 괜찮을 리가 있습니까.”
“괴물늑대를 상대로 싸우고 그 정도면 죽은 자의 왕이 가호한 거야. 죽음이 알아서 피한 거라고.”
“쓸데없는 말.”
빌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원래 그의 몫이었던 자리를 차지한 뒤에도 그는 전쟁 특유의 철학 한 토막만 내놓았다.
“모든 것은 운명일 뿐. 승리도, 패배도, 삶도, 죽음도.”
“또 나오는군. 그 구닥다리 숙명론.”
“장로 옆에서 구닥다리 소리 하면 맞는다?”
낄낄거리며 서로 싸우는 시늉을 하는 시론과 게드를 향해 고개를 돌린 빌은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로 자기 할 말만 꺼냈다.
“노예나 보고 가자.”

*
“숱한 가정의 재앙 같은 도적놈들!”
빌의 징 박은 장갑이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던 소녀의 뺨을 호되게 때렸다. 그녀가 쉽게 나동그라지자 주변의 여성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녀들은 악명 높은 미친 빌이 자신들을 모두 저 자루까지 쇠인 이상한 전투도끼로 찍어 죽여 버릴지도 몰라 벌벌 떨었다. 뺨을 맞은 여성만이 불꽃같은 눈빛으로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다짜고짜 저주하다니, 뭐 이런 게 다 있어?”
시론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이에 게드 장로는 어깨를 한번 으쓱해보였다.
“뭐, 북부인을 이렇게 싫어하면 생존자들에겐 꼬리칠 수 있겠지. 아, 남쪽으로 간다 했던가?”
빌과 그 동료들은 노예만이 아니라 신입들도 만났다. 활대를 강철로 만든 염소 발 장전식 석궁을 하나씩 가진 그들은 지점의 하역창고에서 노예들과 같이 있었기에 느닷없이 벌어진 사건 앞에서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빌은 그들의 표정에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시끄럽긴 하지만 이 정도 여자들이면 북쪽이나 남쪽이나 나쁜 값은 안 받겠지. 사자. 그리고…….”
빌은 가장 중무장한 젊은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젊은이는 철판 위에 가죽을 덧붙인 구식 중부 갑옷을 입었다 챙이 달린 개방형 투구는 짧은 길이의 검과 함께 벨트에 매달아 놓았는데, 무장과 분위기로 보아 이 젊은 패거리의 지도자급임을 추측하기는 쉬웠다. 빌은 그에게 질문했다.
“자네, 모리 놈이 말한 신입 석궁병인가?”
“아, 예. 틸리라고 합니다. 빌 대장이십니까?”
지목 받은 병사는 당황했지만 즉각 대답했다. 빌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공식 명칭은 빌 사이커 보병대위다. 자네가 이 애송이들의 대장인 모양이군.”
“예.”
“자네 빼곤 다들 무기가 좀 빈약한데. 시론.”
“왜?”
“규율 읊어봐.”
시론은 고개를 끄덕이곤 눈을 감은 채 규율을 하나씩, 차례대로 읊었다.
“西파롤의 국왕에게 충성한다.”
“다음.”
“십오세 미만 미성년자와 오십세 이상 노약자 입단 사절. 간부 제외.”
“다음.”
“사람 잡는 실력 보고 채용한다.”
“다음.”
“적의 수가 적은데 도망가는 놈은 대장 손에 뒈지기 전에 내 손에 뒈진다.”
“다음.”
“우리 중 누가 당하면 나머지가 까러 간다.”
“다음.”
“주둥아리 함부로 놀려서 사기 떨어뜨리는 놈은 맞는다.”
“젠장. 생각보다 많군. 무장 부분만 읊어.”
“대장 허락 없이 무기나 방어구를 팔아먹는 놈은 내 손에 뒈지기 전에 대장 손에 뒈진다.”
“그것 말고.”
“검이나 도끼, 투구, 단총이나 창을 갖춘다. 방패나 갑옷은 있으면 좋다. 석궁 사수는 석궁, 화살 서른, 도끼나 검, 투구를 갖춘다. 방패나 갑옷은 있으면 좋다.”
빌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검은 비싸니까 손도끼라도 하나씩 장만해줘. 꼭 검을 사고 싶다면 사도 상관없지만. 그리고 무기 값은 월급에서 제해.”
첫날부터 돈 뜯기게 된 젊은이들의 표정은 결코 좋지 못 했다. 석궁만 해도 돼지 이상의 가격을 부르는 비싼 물건인지라 목돈을 들였는데 말이다. 하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원래 계약금은 무기와 방어구 값으로 사라지는 운명이다. 빌은 다음 사안으로 넘어갔다.
“실전경험은?”
“저는 오르트만에 종군했습니다.”
당장 빌의 얼굴이 “거기가 어디야?”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에 당장 부연 설명이 따라붙었다.
“동북쪽으로 걸어서 보름 거리에 있는 요새입니다. 두 백작이 통행세 문제로 한판 붙었죠.”
“요즘은 어딜 가나 통행세가 문제군.”
“그 통행세 문제 때문에 유명해지셨잖습니까.”
빌은 오물이라도 본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로서는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이었다.
“그건 실패했어.”
“하지만 역사에는 남을 겁니다. 도시 하나를 공략하려고 마음먹은 북부 병대의 지휘관은 빌 대장이 유일하니까요.”
“그게 지원 동기라면 포기하게. 다신 안 해.”
북쪽으로 갈수록 도시는 남부의 대도시들에겐 비교도 안 되게 작아져서, 인구가 일만 명만 되어도 상당히 큰 편이다. 하지만 엄연히 도시다.
그 도시를 상대로 백 명의 전투원이 싸움을 걸었다.
싸움은 곧 북부인 무장선대 몇 개와 다른 용병대가 합류하면서 그 규모가 조금 더 커졌다. 하지만 끝내 도시의 일부만을 포위할 수 있었던 빌은 도시의 보급로를 차단하지 못했다. 결국 빌과 그의 동료들은 지루한 공성전 끝에 물러나야만 했지만, 마법왕국의 귀족들과 기사들이 시퍼렇게 눈을 뜬 땅에서 치고 빠지기도 아닌 2달이 훨씬 넘는 기간의 공성전을 펼쳤다는 사실은 미친 빌의 명성을 드높였다. 西파롤의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다른 사략수적들도 엄두를 못 내던 일에 홀로 도전했으니 실패했다 한들 전설이 안 될 리가 없었다. 지금도 그 도시에서는 미친 빌이란 말이 최고의 악몽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런 모험담을 떠들 기회가 언젠가 오겠지요. 때론 돈도 만질 수 있겠고.”
“안 한다니까.”
신입은 별로 상관없다는 뜻인지 아니면 언젠가 그런 날이 꼭 온다는 뜻인지 모를 웃음을 흘리곤 그의 옆에 서 있던 여자 노예들로 시선을 돌렸다. 모두 6명이었는데, 다들 뛰어나진 않더라도 꽤 쓸 만한 얼굴이다. 잘 골랐다는 말이 적절했다.
“이걸 어디다 파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올해는 남쪽으로 가는 항로를 생각 중이니, 거기서 처분할 수 있으면 해야지. 노예 시세가 안 좋으면 선단에서 대충 부려먹다가 북쪽에 팔아도 돼.”
“북쪽? 개척민은 건장한 남자만 산다고 들었습니다만.”
“개척민 노총각에게 팔아치워도 된다. 하지만 더 비싸게 팔려면 생존자 놈들에게 팔아야겠지.”
“사자의 왕이 저주한 기형아들 말입니까? 본 적은 없지만, 소문대로라면 여자가 너무 아까운데요.”
긴 설명은 게드 장로의 몫이었다. 그는 낄낄 웃으면서 신입에게 설명해줬다.
“그러니까 비싸게 팔리는 거야. 돈은 있는데 신체가 불완전한 놈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나? 사지 멀쩡한 여자들을 씨받이로 쓰면 좀 더 나은 후손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그 생각만 해. 팔 2개, 다리 2개, 얼굴 하나 달린, 가능하면 치열도 가지런한 자식을 말이야.”
신입은 당장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고, 노예들 역시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생존자 놈들은 북부인을 싫어할 텐데 거래가 됩니까?”
“이 동네 사람들은 남부 제국과 왜 무역을 하지? 툭하면 싸움박질 나기 일쑤인데?”
장로가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자 신입의 입이 닫혔다. 바다 건너 이교도들과의 거래는 투키 시를 비롯한 여러 도시들에게 있어 부의 원천이었다. 역시 자유도시의 고객 중 하나인 성태양기사단은 성전에 방해가 된다며 입에 게거품을 물겠지만 말이다. 휴전과 개전을 거듭하면서도 남부 제국과의 교역만큼은 끊을 수가 없었다.
“세상사는 돈과 피로 굴러가는 법이지. 시론. 노예들을 끌고 가. 제2회관에 놔두도록.”
시론은 빌의 명령에 즉각 행동했다. 그는 빌에게 뺨을 맞고 쓰러진 여성의 턱을 잡곤 중얼거리듯 말했다.
“대장. 얘는 입 안이 터졌는데.”
“그쯤은 금방 낫는다.”
“알았어. 곱게 처박아두지.”
시론은 쓰러진 여성의 오른팔을 붙잡아 강제로 일으켜 세워서는 끌고 갔다. 아무 저항 없이 끌려간 그녀를 뒤따라 노예들은 스스로 걷기 시작했다. 황금 가마를 지고 온 총병 둘이 그들의 뒤에서 따라갔다. 이젠 신입들과 장로, 빌만 남았다. 빌은 신입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환영회는 저녁이다. 그때까지 재단 제2회관에 모여라. 해산.”
신입들은 잠시 주저했으나 빌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곧 짧은 인사말을 건넨 다음 흩어져버렸다. 빌은 그제야 몸을 돌려 건물 밖으로, 번화가를 향해 걸어갔다. 게드 장로는 그의 옆을 따라 걸으며 질문했다.
“또 헤매러 가냐?”
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북부재단도 못 찾는데 자네가 찾을 순 없어.”
충고에도 불구하고 빌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장로는 다시 말했다.
“좀 쉬지 그러나?”
“쉴 수 없다. 20년이 넘었어. 이제 그만 끝내야지.”
“그렇긴 하지만, 자넨 더 이상 젊은이가 아니야. 쉬지 않으면 큰일 나.”
“그래. 장로가 아니고서야, 후임자에게 계급값 받고 은퇴해야 정상인 나이지.”
게드 장로는 답답하다는 듯, 머리카락이 다 빠져나간 두피를 벅벅 긁어댔다. 빌의 동향 친구인 게드는 빌의 성격을 잘 알았다. 빌에게 군대 일은 별로 안 맞다. 그는 빠른 은퇴를 누구보다 고대한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찾아야하니까.
“그럼 이번엔 어디로 갈 건가? 홍등가? 도박장? 시장바닥? 거지소굴?”
“언제나 그렇듯, 닥치는 대로.”
그다운 대답이다.
남쪽 대륙의 사막에서 좁쌀을 찾아야 한다면, 빌은 그 넓은 사막을 전부 뒤진다. 사막의 주인에게는 협력을 요구한다. 사막을 넘어 말로만 듣던 숲의 나라에 닿더라도. 그를 방해하는 놈은 모두 쓰러뜨린다.
장로는 빌을 말리길 포기했다.
“적당히 해두게. 싸움 내지 말고, 비약 좀 쓰지 말고.”
“내가 쓰고 싶어서 쓰나?”
“젠장. 첫 단추가 잘못된 거야. 이건.”
자신이 잔소리꾼 역할을 해줄 유일한 사람이라는 현실은 별로 달갑지 않다.
“제발 온전히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그래야지.”
“자넨 항상 대답만 그렇지.”
빌의 대답에 게드 장로는 몇 마디를 더 투덜거리고는 다른 길로 발걸음을 돌려버렸다. 빌은 그 뒷모습을 보고 웃었다. 그는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묵직한 투구가 머리를 짓누르는 가운데 더 없이 밝은 햇빛이 빌의 얼굴을 때렸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번화가의 공기를 만끽했다. 사람이 붐비는 장소는 숲이나 촌과는 전혀 다른 공기를 가진다. 그 공기를 좋아해 찾아다니는 건 않지만, 오랜만이라 반갑다. 이 공기 속에 반가운 소식이 있길 바라면서 행하는 산책은 정신건강에 그럭저럭 괜찮은 행위다.
찢어지는 목소리의 저주만 빼면 기분이 한결 편할 텐데.
“명성 높으신 전사님.”
생각지도 못 한 가늘고 고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빌은 누군가 하여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그러자 지점 건물 벽에 기댄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생머리에 검은 드레스를 입은 하얀 피부의 소녀가 킥킥 웃고 있다. 상체에 착 달라붙어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그녀의 옷은 목선이 사각형으로 깊게 파여 있어 가슴 윗부분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목걸이 하나 없이 흰 피부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젊은이들 혼을 빼놓기엔 더할 나위 없이 자극적이다.
“여인네를 대하시는 태도가 너무 거칠지 않은지요?”
유창한 북부 언어였다. 빌은 그녀가 방금 후려친 노예를 보고 하는 말임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녀의 정체까진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빌은 그녀가 매춘부인지 아니면 숙녀인지도 헷갈렸다. 옷이 간소한데다 장식품도 별로 화려하지 않다. 돈 있는 집 숙녀는 아니다. 북부 여행자에게 말을 거는 모습을 보면 매춘부일지도 모른다. 빌은 자신이 아는 투키 시의 매춘부 복장규제 등을 여러 가지 떠올려봤지만 곧 이를 단념했다. 지난번에 이 도시를 왔을 때만 해도, 매춘부에 대한 여러 규제는 유명무실해져 조롱거리가 된 지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그 규제가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지켜질리 없다.
“무슨 볼일이냐?”
“가련한 소녀가 말을 거는데 겨우 그런 말 밖에 못하시나요?”
“북부인 거주지는 매춘부 출입금지 구역일 텐데.”
소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그런 규정 안 지킨 지 오래 되었다던데요.”
빌은 그녀의 대답과 복장을 보아 그녀가 돈 없는 외지 매춘부라 생각했다. 이 근방만을 돌아다니는지도 모른다. 빌은 코웃음을 치곤 그녀에게 충고했다.
“난 바쁘다.”
“그럼 도와드리죠.”
요것 봐라? 빌은 다른 대답을 돌려줬다.
“관심 없다.”
“말 상대도 필요 없으신가요?”
포기하질 않는 모습에 빌은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충고는 둘이면 충분하다. 협박의 때다.
“살다 살다 미친 빌의 말 상대를 자처하는 매춘부는 처음 봤군. 돌았나?”
북부인에겐 드높은 명성일지라도, 다른 지방에선 미친 빌을 악몽의 대명사처럼 쓴다. 부하들이 가끔 “대장 때문에 여자들이 다 도망간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투덜거릴 정도였다. 호기심 등에 의해 빌에게 접근했던 여자들은 빌의 무뚝뚝함이나 주먹, 때론 도끼날만을 직시해야 했다.
“소중한 사람들을 헤어지게 하는데 재주가 좀 있으시다는 이야길 듣긴 했지요.”
소녀는 물러서질 않았다. 오히려 빌에게로 한 발짝 다가왔다. 그 순간 빌의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그건 본능이다. 사냥꾼이 아니라 사냥감이 느끼는. 위장에 익숙한 사냥꾼을 뒤늦게 발견했을 때 느끼는 종류다.
“소녀를 벌써 잊으셨나요?”
온 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투구와 갑옷의 무게마저 잊어버렸다. 사슬갑옷에 눌린 모직 옷에 다 흡수되어야 할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착각이 들었다.
도끼나 검을 잡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녀가 빌의 곁에 선 시점에서.
“너는…….”
빌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부하들이 본다면 기겁할 일이다. 실제로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서 소녀의 안전을 염려하던 몇몇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빌이나 그들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녀가 빌의 더딘 발걸음보다 빨리 움직였다.
“가요. 좀 더 즐겁고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곳으로.”
소녀가 빌의 왼팔을 낚아채 팔짱을 끼며 배시시 웃어보였다. 그녀의 눈은 웃지 않는다.
빌의 입이 거칠게 닫히면서,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작게 새어나왔다.

*
“당신 고향은 어디야?”
“그 동네는 이름 없어.”
“개척민 출신이야?”
“아니다.”
“정말 구석진 동네인가 보네. 북쪽 끝에서 여기까지 오가는 거야?”
“북쪽 끝? 연옥 입구까진 안 가.”
“뭘 싣고 오는데?”
“작아도 좋은 것.”
“상세하게 말하면?”
“길어져.”
“그 사슬갑옷의 고리, 왜 허리 아래부턴 다르게 생겼지?”
“가격이 달라서.”
“뭐가 더 비싸?”
“위.”
“납작해서 비싼 거야?”
“튼튼해서 비싼 거다.”
완전무장한 건장한 체구의 북부 노인이 훨씬 작은 체구의 예쁘장한 여성에게 끌려 다니는 건 희귀한 볼거리다. 그 북부 노인이 악명 높은 용병 미친 빌임을 알아보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희귀한 볼거리다.
일정은 다 헝클어졌다. 빌은 어느 사이엔가 말을 놓은 소녀의 거침없는 질문에 일일이 답변하면서 힘없이 끌려 다녔다. 처음엔 긴장해서 온 몸에 힘이 들어가 뻣뻣하기 그지없었지만, 길고 긴 문답과 도시 구경 속에서는 탈진할 수밖에 없었다.
“바쁘다고 그랬는데, 무슨 일 있어?”
‘이제 물어보냐?’
빌은 퉁명스레 대답했다.
“개인적인 일이다.”
“급해?”
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급하지. 아주 급하지.
“흠. 무슨 일인데?”
“별로 말하고 싶진 않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일까?”
빌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에 소녀는 코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거절이야? 난 궁금한데. 미친 빌이 명성에 안 어울리게 쫓아다니는 일이라니.”
“악명과 본질은 다른 법이지.”
“그 악명을 이용하기 위해 줄무늬를 상징으로 삼은 사람이 할 말일까?”
빌은 입을 다물었다. 소녀는 빌이 더 이상 말을 꺼내려 하지 않자 한숨을 내쉬었다.
“오해를 풀지 않고 역으로 이용하다 보면 결국 발목을 잡히는 법이야. 냉철하고 교활한 제독님.”
빌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럼 할 수 없네. 계속 걸을 수밖에.”
그냥 놔주진 않는다. 언젠가 부하 하나가 “쇼핑하는 여성의 에스코트가 모든 고역의 으뜸”이라고 했던 말을 실감한 빌은 세상 모든 노점에 저주를 내렸다. 어찌하여 그놈의 법칙은 틀리는 법이 없단 말인가.
“그건 그렇고, 배고픈데.”
“아까부터 계속 먹고 있잖나.”
사람이 모이는 곳엔 먹을거리가 많다. 다양한 간식거리는 물론이고 식사거리도 존재했다. 소녀는 빌의 돈으로 이것저것을 사먹었다. 하지만 세 끼 식사는 될 분량을 단 한 시간 만에 해치우고도 그녀는 네 끼 째의 식사를 요구했다. 빌은 그녀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무슨 변덕인지는 모르나 유예가 주어졌다. 그걸 일부러 끝장내는 바보짓을 왜 하겠는가.
“이번엔 저기.”
발걸음을 멈춘 소녀가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파스타를 판매하는 음식점이 보였다. 닭고기와 야채를 삶은 수프와 곱게 간 치즈, 소스를 미리 익혀둔 굵고 긴 면에 끼얹어서 파는 형식이었다.
“이 다음엔 과일 몇 개 더 먹으러 갈래.”
“여기서는 별미로 취급할 뿐이지만,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파스타는 풍요의 상징이라더군.”
“그런데?”
“풍요의 상징을 먹고도 또 먹을 거란 말이냐?”
빌이 어이없다는 듯이 묻자 소녀는 킥킥 웃었다.
“그리고 다시 질문하고 구경해야지. 이런 기회는 흔치 않거든.”
“이 도시의 파스타 값은 빵 값보다 비싸다.”
“흠. 그래도 먹어야겠어.”
“내 돈을 다 거덜 낼 작정이군.”
“숲에 파묻을 돈은 많으면서 여자 입에 쓸 돈은 아까운 거야?”
그 순간 빌은 입을 다물었다. 부하들을 물리치고 혼자서 숲 같은 곳을 돌아다니는 이유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며 말하고 싶지도 않다.  
쇠도끼가 운다. 검이 떼를 쓴다. 하지만 함부로 휘두를 상황이 아니다. 여자가 북부인의 손에 죽으면 도시가 가만히 있지 않는다. 여자가 대중 앞에서 본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문제의 북부인은 도시에 저주를 몰고 온 셈이 된다.
‘이 계집아이, 대체 어디까지 알며 무엇을 생각하는 건가.’
소녀는 여전히 웃는 얼굴을 한 채 빌의 허리띠에 매달린 돈지갑을 손가락으로 꾹꾹 찔러댔다.
“이 정도로 보상이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겠지?”
“보상이라.”
빌은 잠깐 과거를 회상해보았다. 고향을 떠나기 전에는 남을 크게 해한 적이 없었고, 당연히 기억에 남을만한 보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고향을 나선 후로는 숱한 사람들을 죽이고, 안 죽은 녀석은 몸값을 요구하거나 노예로 팔아치웠다. 역시 보상을 해본 기억은 드물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이 정도로 야만적이었군.’
빌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노예 말이 맞아.”
소녀가 혼자서 대화를 이어갔다.
“당신은 남의 소중한 것을 사라지게 하는 데는 탁월한 재주가 있는 거야.”
결국 빌은 지갑을 열어야 했다. 빌이 먼저 식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녀는 그 뒤를 바싹 따라오며 말했다.
“그래도 목숨 값치곤 싸지?”
“네 생각도 그런가?”
“응. 그러니 죽어도 사과하지 마.”
빌은 간신히 대답했다.
“그럴 생각 없다.”
“그럼 됐어.”
소스를 끼얹은 면발이 가득한 나무그릇, 그리고 전용포크가 없는 자들을 위한 싸구려 나무포크를 요리사에게서 각각 받아든 둘은 빈 테이블 하나를 차지해 마주 앉았다. 소녀는 아까보다 더 밝고 기대에 찬 얼굴로 말했다.
“처음 보는 음식이야. 삶는 것과 굽는 것은 봤는데.”
“죽과 빵?”
“응. 이 포크도 본 적 있지만, 이렇게 흔한 건 아니었어.”
“이 도시는 좀 많이 쓰는 편이다.”
“그래?”
“파스타 먹을 때는 그래.”
“흠. 포크는 파스타 전용 도구란 건가?”
그녀의 말에 빌은 약간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파스타는 확실히 이질적인 존재다. 빵처럼 반죽하지만 죽처럼 삶기 때문에 손으로 먹기엔 뜨겁고 미끄럽다. 이 때문에 곧 포크라는 놈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고 들었다. 물론 포크가 다른 음식을 먹는데 안 쓰이는 건 아니지만.
빌은 먼저 포크를 이용해 면을 감아올렸다. 소녀는 빌이 면을 먹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더니 포크에 면을 둘둘 감으면서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재미있는데.”
처음 보는 언행일치의 표본에 빌은 반응하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고, 동조할 필요도 없었다. 소녀의 감상과 달리 그로서는 파스타가 메뉴인 식사가 꽤 익숙했다. 노상에서 부순 건빵을 시든 양배추, 새카매진 고기조각과 함께 끓여먹을 때와 마찬가지로 침묵 속에서 식사할 뿐이다.
소녀는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 조용해.”
“난 시끄러워.”
“당신 입이 조용하단 이야기야.”
빌은 고개를 저었다.
“별로 할 말 없다.”
“그럴 리가.”
소녀는 빌의 말을 부정했다.
“일을 방해 받으니 짜증나지 않아?”
분명 짜증나긴 하지만 상대가 비범하니 드러낼 수가 없다. 빌은 대답하지 않고 얼굴만 찌푸렸다. 소녀는 다시 포크로 면을 감아올리며 말했다.
“당신은 역시 대단해. 비명도 안 나오다니, 의외야.”
“비명?”
“전에 압착기에 팔이 낀 사람의 비명을 들은 적이 있어.”
빌은 쉽게 그 장면을 상상했다. 포도주나 올리브유의 압착기 따위에 팔이 낀 사람을. 그에 대입된 자신조차.
“꽤 시끄러웠지. 당신이라고 예외가 되진 않을 텐데.”
“내 비명을 듣고 싶나?”
빌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소녀는 빌의 도끼를 힐끗 보곤 대답했다.
“내가 작정했으면 사냥감은 비명을 지르지 못해. 그리고 지금 듣고 싶지도 않아. 그냥, 당신이 왜 비명을 지르지 않는지가 궁금했지.”
사람을 습격하는 늑대는 대개 어린아이, 여자, 노인을 노린다. 저항할 힘이 없는 상대를 노려 목을 문다. 그러니 비명이 들릴 리가 없다. 빌은 자신이 바보 같은 질문을 했음을 깨달았다. 긴장한 탓이 분명하다.
“그럼 뭘 듣고 싶나?”
빌이 반문하자 소녀는 성의 없어 보이는 대답을 꺼냈다.
“아무거나.”
성의 없는 대답에는 성의 없는 대답만이 쓸모 있을 뿐이다. 빌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막막하군.”
“그렇지만도 않아. 모르는 세계란 아는 세계보다 넓은 법이거든.”
미친 빌에겐 자길 죽이러 온 귀신늑대가 뭘 듣고 싶어 할지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그는 목이 졸린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해야만 했다.
“예를 하나 들어주겠나?”
“오늘은 북부 교회의 예배일이 아니야. 태양교회의 예배일도, 제국 교회의 예배일도 아니지. 근데 왜 당신은 갑옷을 입은 걸까? 검을 풀거나 투구를 벗기는커녕 도끼도 손에서 먼 곳에 놓지 않았잖아?”
소녀는 빌의 생각보다 훨씬 빨리 질문을 내놓았다. 빌은 예상외의 질문에 잠깐 당황했지만 곧 그 질문을 이해했다.
아무 위협도 없는데 갑옷을 입기도 한다. 교회의 예배일이 좋은 예다. 그 날에는 사람들이 모두 좋은 옷을 입는다. 비쌀 수밖에 없는 갑옷도 좋은 옷이란 범주에 포함된다. 하지만 오늘은 예배일도 아니고, 특별한 날도 아니다. 소녀는 그걸 묻는다. 사실 빌을 포함한 일부 북부인은 그 경우가 좀 달랐다.
빌은 테이블 옆에 비스듬히 세워둔 자신의 양손 도끼를 힐끗 보곤 대답했다.
“원수가 좀 많거든.”
간결하지만 정확한 대답이었다. 거짓말이나 농담이 아님은 둔감한 사람도 쉽게 알 수 있는 분위기가 흘렀다.
“그렇게 많아?”
소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다시 질문했다.
“이렇게 두꺼운 성벽과 많은 인간들이 있는 곳에서 어떤 원수가 그렇게 두려운 걸까?”
“성벽과 대중이 나와 너 사이에 있지는 못하더군.”
“어라, 그러네?”
소녀는 깜빡했다는 듯 포크를 들지 않은 왼손으로 자기 이마를 짚었다. 연극의 한 장면 같은 그 모습이었다. 빌은 여전히 도끼를 곁눈질하며 파스타를 삼켰다.
만약 때마침 요란한 개 짖는 소리가 안 들려왔다면 빌은 접시까지 씹어 먹는 경지에 도전했을지도 모른다. 고개를 돌려보니 수많은 개와 늑대들이 갇힌 수레가 보였다. 빌은 수레가 어디로 가는 지 안다. 소녀도 알고 있을까. 궁금해진 빌은 슬쩍 고개를 들어보았다.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기네. 당신 등에 걸친 개가죽 망토 같은.”
빌이 고개 들자마자 소녀가 말했다. 그 순간 빌은 면발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분간을 못할 만큼 당황했다. 어느 사이엔가 웃음이 사라진 그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본 빌은 다시 마차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그렇군. 안 구하나?”
혈족일까, 짝일까, 아니면 친구일까. 여하튼 그 원수를 쫓아 인간의 도시까지 들어온 소녀를 향해 상식적인 질문이 던져졌다. 소녀는 빌의 생각과 달리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이미 틀렸잖아. 저대로 데려가서 거꾸로 매단 다음 산 채로 가죽을 벗겨내겠지. 그런 장소에 내가 끼어들 곳은 없고.”
“위험을 피하겠단 소리군.”
“생판 남이거든. 그리고 왕족이 백성을 위해 일일이 싸우진 않아. 당신들도 분명 그럴 텐데?”
안다. 어째서 그런지도 안다. 무시당한 사람들의 비극도 안다. 빌의 도끼에 죽은 희생자들 중 적잖은 숫자가 그랬기에.
빌은 결국 죽은 자에 대한 질문을 꺼냈다.
“내게 죽은 놈은 뭐냐?”
“내 짝. 좋은 녀석이었지. 다만 멍청했어. 당신을 상대로 싸울 정도로.”
대답은 시원스럽게 나왔다. 최악이다. 빌은 그렇게 생각하며 포크로 그릇 속 면발을 휘저었다. 범인이 죽으면 재판이 열리지만 왕족이 죽으면 전쟁이 터진다. 늑대가 전쟁을 일으킬 리야 없겠지만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 된다.
“왕족의 짝이라.”
소녀는 저 죽음의 행렬에서 동족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이 위험해지기 때문에. 복수를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역으로 말하자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빌을 죽이겠다는 선언이다.
“앞으로 두 발 뻗고 자긴 글렀군.”
빌의 작은 투덜거림에 소녀는 상상 외의 답변을 주었다.
“뭐, 적어도 하나는 감사하고 있어.”
“뭐?”
“시체, 태웠잖아.”
빌은 무슨 말인지 즉석에서 이해하지 못했다. 잠시 뒤에야 그는 소녀의 표정에서 한 감정을 읽었다. 그는 터무니없는 판결을 들은 사람처럼 멍청한 표정을 짓더니 간신히 말했다.
“늑대에게도 시체에 대한 감정이 있나 보군.”
“이미 죽은 새끼의 시체를 콧등으로 밀쳐보는 어미를 본 적 없어? 다 똑같아. 당신들이나 우리나.”
빌은 입을 꾹 다물었다. 죽은 자의 왕을 위해 풍장을 하는 북부인이지만 시체에 대한 감정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눈앞의 소녀가 그러한 감정을 품었다. 소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새끼가 벌떡 일어설 때, 불가능을 알면서도 어미는 일말의 희망을 품지. 하지만 새끼가 어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북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하면 다시 좌절해.”
죽은 자의 왕.
위대하고 경이로운 군주. 북부의 기회, 대륙의 악몽, 모든 시체의 소유자.
빌의 등을 떠민 자.
소녀의 웃음이 쓰디쓴 것으로 바뀌었다.
“난 그런 꼴을 안 당해서 다행이야.”
“그 답례가 이 유예인가?”
“글쎄.”
소녀는 처음으로 애매한 대답을 꺼냈다.
“그보단 어떤 녀석인지 알고 싶어졌다고나 할까.”
“적전정찰인가.”
“과연 군인. 괜찮은 말이네.”
소녀는 웃어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 봤던 그 웃음이었고, 포크에 감기는 파스타를 볼 때 외엔 항상 짓고 있던 웃음이었다. 빌은 표정을 구겼다. 그는 커다란 포크에 찍히지 않을 정도로 작은 건더기만 남은 파스타 국물을 마저 마셔버리곤 말했다.
“웃지 마라.”
“뭐?”
“거북하다. 거짓으로 웃지 마라. 아까부터 계속 웃고 있잖나.”
계속 안 좋은 대화가 지나간 참이다. 빌은 계속 걸리던 문제를 이번에 해결해야겠다는 투로 말을 꺼내들었다. 그러나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짓든 내 맘이야.”
“소름 끼친다.”
이번엔 빌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속내를 들춰 보여줬다. 그러나 소녀는 그의 노골적인 불쾌감을 무시해버렸다. 순전히 그녀의 마음대로다. 빌은 휘둘릴 뿐이다. 재판장의 피고인이 이런 심정일까. 자신보다 높이 올라선 피해자의 추궁. 빌은 난생 처음 당하는 일이다. 빌이 다음 말을 고심하여 고를 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홱 돌리더니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 짓 했잖아?”
빌은 다시 한 번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
시론은 빌 대장이 지시한대로 행동했다. 그는 노예들을 북부재단 제2회관에 던지다시피 몰아넣고는 먼저 와서 쉬고 있던 몇몇 병사들에게 그녀들을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그 다음부터는 할 일이 없었다. 그는 남는 시간을 자신을 위해 투자하기로 했다. 그는 갑옷을 벗고 장갑을 벗어던진 다음, 짐짝에서 나무판을 꺼내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곤 광포하게 울부짖었다.
“체스하자!”
“그 말을 기다렸다, 부대장!”
“걸어, 걸어! 부중대장이 이기는데 투키 금화 하나!”
곧바로 호응이 뒤따랐다. 오른쪽 이마의 화상흉터가 인상적인 대장장이 마누크가 일어나 시론의 상대를 자처한 직후 그 옆에 있던 다른 병사가 일주일 봉급을 내기에 걸었다.
시론은 간만에 체스를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는 도저히 체스를 둘 수 없다. 게다가 흔들리는 선상에서의 주사위놀이가 시빗거리가 되는 꼴을 본 빌은 ‘선상도박 적발 시 판돈 몰수 및 3개월 감봉’이라는 무시무시한 규율을 만들었다. 체스에 대해선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지만 빌 대장의 성격이라면 체스까지 주사위놀이와 동급 취급할지도 모른다.
즉, 시론에게 있어 육지만큼 체스 두기 좋은 곳은 없는 셈이다.
순식간에 상대까지 정해지자 시론은 즐겁게 말들을 꺼냈다. 언젠가 약탈한 중부 태양교회의 대리석기둥 파편을 그가 직접 깎아 만든 흑색과 녹색의 인형들이 즉각 전투태세를 갖췄다. 제2회관이 도박판으로 변신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체스를 시작으로 온갖 잡다한 도박과 게임과 내기가 회관 바닥을 휩쓸었다.
시론은 왕후귀족이 즐기며 부중대장 직위에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이 지적인 게임을 주사위놀이와 동급취급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만까지 이번 기회에 해소할 생각이었다. 그는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했다. 마누크는 좋은 체스 친구였고 오랜 적수이지만 시론의 날카로움은 그를 고전시켰다.
“아, 부중대장. 여기 있었군.”
시론과 마누크는 회관 입구에서 들려온 갑작스런 호출에 둘 다 짜증을 느꼈다. 그러나 시론을 호출한 사람은 모리 지점장이었다. 함부로 짜증을 낼 상대는 아니다. 시론은 고개만 슬쩍 돌려보았다.
“웬일이슈?”
“쉬는 중에 미안하지만 빌 대장에게 제안할 사업이 하나 생겼네. 모험대차교역 건이야.”
“항로는 잘 모르겠는데, 그거 이 시기엔 좀 위험하지 않나? 제국 출신 해적들이 극성이라고 들었는데?”
“무사히 돌아오기만 하면 그만이야. 처음 하는 사업도 아니잖나.”
돈 많은 상인이 돈 없는 젊은 상인에게 돈을 빌려주어 시작하는 사업. 대개는 해상교역을 말하며, 일회성의 모험이다. 많은 자본을 댈수록 많은 이익을 얻는다. 시론은 누가 모험가이고 누가 자본가일지 저울질해보았다. 빌과 그 동료들은 언제나 모험가 쪽에 가깝다.
“대장에게 시키려고?”
“아니. 빌 대장이 내 지점과 함께 자본을 댔으면 하네.”
“어, 대장이?”
“빌 대장과 투키 지점, 그리고 날 포함해서 한 20명쯤 자본을 댔으면 하네.”
“지점장 나리까지 사비로? 그거 꽤 거창한 모양이네?”
“남부제국에서 비단을 대량으로 입수해올 예정이지. 배가 무사히 돌아온다면 큰 이익이 날 거야.”
실패하면 큰 손해를 본다. 하지만 교역이란 원래 다 그런 법. 산적과 해적과 도적기사의 위협 따윈 일상이다.
일단 이건 빌이 결정할 사안이다. 자신은 전달만 하면 된다. 상선대의 최고결정권자는 누가 뭐래도 빌이니까. 시론은 이해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이 오면 전달하지요.”
“빠를수록 좋네. 흥미 있으면 내일까지 지점으로 다시 좀 와 달라 전하게.”
지점장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홱 돌리더니 성큼성큼 돌아갔다. 심부름꾼을 시키지 않고 직접 오다니 정말 큰돈이 오가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시론은 체스보드를 내버려둔 채 잠깐 고민하더니 주변 부하들에게 묻기 시작했다.
“대장 어디 갔는지 아는 사람?”
“알 리가 있나. 자유 시간엔 언제나 혼자 돌아다니잖아. 뭐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마누크만이 홀로 대꾸하곤 불리한 게임만 주시했다. 그는 빌이 찾는 반가운 소식의 정체를 몰랐다. 시론도 대장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돌아다닌다는 이야기만 알 뿐이다. 몇몇 병사들이 이에 해석을 달기 시작했다.
“대장에게 반가운 소식이라. 게드 장로님이나 모리 지점장님은 아는 모양인데.”
“하지만 안 말해주잖아.”
“들은 이야기론 대장이 사람을 찾아  다닌다던데.”
“어떤 놈인지 몰라도 정말 불쌍하군. 미친 빌이 쫓고 있단 뜻 아냐?”
“누군지 모르겠지만 대장의 철천지원수란 이야기도 들었어.”
“내가 듣기론 외뿔악마랬어.”
“악마를 왜 쫓아?”
“대장이 태양교도의 저주에 걸렸는데, 그 악마의 뿔이 특효약이래.”
“무슨 저주?”
“낸들 알아?”
쓸데없는 유언비어의 난무 속에 시론은 한숨을 내쉬었다. 경애하는 대장에 대한 이런 중상모략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전체에 이롭지 않다. 그것이 과묵한 빌에게 붙는 경외감에서 비롯된다 하더라도. 그는 단호한 자세로 선언했다.
“야, 그럼 우리가 저주 걸린 배에 타고 있단 말이야? 재수 없는 소리 집어치워. 그리고 주둥아리 함부로 놀려서 사기 떨어뜨리는 놈은 좀 아프게 된다.”
마지막에 중대규율이 언급되자 유언비어는 즉각 잦아들고 다시 도박판의 호기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책임회피를 위한 시도였다. 시론은 한번 웃어 보인 다음 다시 체스보드로 시선을 돌렸다. 은근히 생각할 시간을 더 원하던 마누크만이 양손으로 머리를 싸맬 뿐이었다.
“보진 못 했습니다만.”
“뭐야?”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시론이 다시 고개를 돌리면서 마누크를 약간 기쁘게 했다. 시론의 눈에 신입 석궁수가 들어왔다. 어느 사이엔가 들어온 그는 석궁을 회관 한 구석에 내려놓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같이 어울리려고 찾아온 모양이었다. 시론은 눈을 껌뻑이더니 질문했다.
“어, 틸리라고 했던가? 뭘 봐?”
“빌 대장 말입니다. 누군가 시내에서 봤다더군요. 여자랑 같이 있다던데.”
고심 끝에 체스 말을 옮기려던 마누크는 굳어버렸다. 회관에 모여 있던 모든 병사들의 시선이 틸리에게 쏜살같이 박혔다. 심지어 도박판에 끼지 않고 졸던 병사들조차 악몽을 꾸다 깬 표정으로 틸리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경악과 의문, 공포가 떠올랐다.
“무슨 소리야? 대장이 여자를 끼고 시내를 돌아다닌다니?”
시론이 먼저 어이없다는 말투로 반문했다. 단단히 굳어버렸던 마누크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시론의 말을 긍정했다.
“잘못 봤겠지. 미친 빌이 여자를 찾는다면 그건 세계의 종말이 다가왔단 거야.”
곧 마누크는 자신이 나이트를 어디로 옮기려 했는지 까먹어버렸다는 사실에 소리 없이 절규했지만 틸리는 그에게 신경 쓰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저도 들었을 뿐이긴 합니다만.”
틸리가 항변하려했지만 병사들은 전부 그를 무시했다. 도박판들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확고한 믿음을 격파하기엔 역시 확고한 믿음이 필요했다. 신입은 자신이 아는 사실을 하나 더 꺼내놓았다.
“자루까지 쇠로 만들어진 도끼를 들고 다니는 북부 노인이 대장 빼고 또 있습니까?”
도박판이 다시 얼음호수 같은 정적을 찾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빌의 부하들은 세계관이 통째로 붕괴되는 감각을 맛보았다. 하지만 시론은 간신히 부정하는데 성공했다.
“어이, 신입. 대장은 절대로 여자를 안지 않아.”
“왜요? 혹시 고자입니까?”
폭발적인 웃음이 도박판들 위를 휩쓸었다. 지나치게 경직되었던 분위기 속에서 예고 없이 터져 나온 웃음이었기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풀어졌다. 가장 크게 웃은 사람은 마누크였기에, 시론은 그의 웃음 때문에 체스보드가 뒤집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며 설명해주었다.
“그건 아냐. 소원을 비는 대신 신에게 맹세했다더군.”
“그런 맹세는 언제든 깨지지 말란 법이 없죠. 오늘이 그날 아닐까요? 아니면 여자가 대단한 마녀라던가.”
둘 다 가능성 없는 일이다.
시론은 다시 고개를 젓더니 체스보드로 시선을 돌렸다. 게임은 아직 결판이 나지 않았고, 중독성은 여전히 그 위력을 발휘하는 중이다. 다른 도박판의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바탕 미친 듯이 웃고 난 뒤였기에 병사들은 다소 긴장을 풀고 원래 하던 일에 복귀했다. 돌 같이 굳어 있던 마누크가 특히 그러했다.
“마녀라. 웃기는 말이군. 잘못 봤거나 오해일 거야. 미친 빌을 쥐고 흔들 마녀는 이 세상에 없어. 오늘이 대장 죽는 날이 아니라면.”
체스보드로 시선을 내린 마누크가 작게 중얼거렸다. 시론은 그의 말에 동의했다.
“내 생각도 그래. 게다가 이 대도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 원수 진 사람도 별로 없는데.”
“그렇겠지?”
마누크가 답례로 긍정해주었다.
하지만 체스보드의 말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도박판들도 움직임이 멈췄다. 다들 잡아먹을 것처럼 자신들의 게임을 지켜볼 뿐이었다. 간신히 카드를 집어 그걸 섞기 시작한 병사는 자신의 손놀림을 배신하고 자꾸만 떨어지는 카드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주사위는 흔들리는 컵 속에서 그만 꺼내달라고 비명을 질렀지만 주사위놀이패는 그 요청을 당연하다는 듯이 묵살했다.
가능성 없는 일이다.
그것이 실제로 나타났다면, 무슨 중대한 문제가 생겼단 이야기가 아닐까?
병사들은 게임이란 게임을 전부 뒤엎어버리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급히 무기를 챙겨들었다.
“총원, 전투준비! 아무래도 이건 예삿일이 아니야! 당장 대장을 찾아!”
허겁지겁 갑옷과 장갑을 찾아 착용하던 시론의 외침에 놀란 틸리가 황급히 내려놓은 석궁을 집어 들었다. 동시에 마누크가 갑옷도 입지 않고 전투망치만 든 채 제일 먼저 뛰쳐나갔다. 신속히 입을 수 있는 사슬갑옷의 특징에 감사하며 시론은 그 뒤를 이었다. 그는 다시 외쳤다.
“보라색 신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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