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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강철의 왈츠

2009.04.29 21:2004.29

강철의 왈츠

0 프롤로그

하늘은 끝없이 높고 푸르렀다.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들이 잎을 물들인 덕택에 산은 불이라도 지른 듯 온통 붉었다. 수확이 끝난 밀밭은 군데군데 황금의 언덕 같은 낟가리를 쌓아 올랐다.
가을. 사람들의 마음이 가장 너그러워질 때이다. 여느 때 같으면 추수가 끝난 들판에 경쾌한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짝을 찾는 젊은이들이 폴카나 요즘 유행하고 있는 이국적인 왈츠실력을 뽐내고 있었을 것이다. 부인들은 겨울을 준비할 두툼한 누비옷들을 만들며 곧 들이닥칠 페테르부르크 산맥의 거친 겨울바람을 걱정하거나 하루 종일 술집에 틀어박혀 있을 남편들에 대해 그네들의 거친 욕설을 섞어 농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산 구석 촌 동네에는 경쾌한 음악소리도, 대낮부터 술에 취해 포커를 치다가 시비가 붙은 격한 사내들의 고함소리도 울려 퍼지지 않았다. 오히려 통나무를 켜는 톱의 단조로운 소리와 땅을 파는 사내들의 노동요가 가을의 흥겨움을 대신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마을을 감싸는 목책(木柵)을 만들고 있었다. 마을의 가장 높은 공터에서 주변 사내들보다 약간 좋은 옷차림을 하고 있는 한 사내가 양피지를 펼쳐 들고는 연신 사람들에게 지시를 하고 있었다. 그 사내는 연신 초조한 듯 입을 달싹거렸다.

"큰일이네. 작업이 절반도 진척이 안 되었으니. 3일 뒤에 자작님이 친히 순시를 나오신다는데 도저히 이 속도로는…… 어이! 거기 빨리 안 움직여!"

사내의 초조함과는 상관없이 마을 농부들의 작업속도는 느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들에겐 빠르게 하거나 느리게 하거나 상관없이 일 년에 육십일 동안 해주게 되어 있는 영주 댁 노역의 하나일 뿐이었다. 요즘 공국을 괴롭히고 있다는 고블린 약탈자들의 소문은 그네들에게 너무도 뜬금없었다. 그 옛날이야기 속에 나오는 조그만 악동들이 무슨 힘이 있어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인단 말인고? 거칠고 차가운 북풍이 휘몰아치기 전 지금이 가장 놀기 좋은 때인데, 그저 높은 것들은 우리 쉬는 꼴을 잠시도 못 본당께. 일을 하던 도중에 서로의 시선이 오고 갈 때마다 사람들은 작게 노곤거리다 불만에 찬 얼굴을 돌렸다.


마지막 도끼질 소리가 멈췄다. 숲은 고요해졌다. 새들은 한참 전부터 지저귀지 않았다. 도끼질 소리가 멈춘 곳에서부터 늑대 두 마리가 빠르게 숲을 헤쳐 나왔다. 늑대 위에는 작은 체격의 소인들이 타고 있었다.
소인들의 온몸은 갑옷으로 감싸여 있었다. 갑옷은 강철처럼 단단하지만 강철보다 절반 정도 가벼운 페더스틸 나무로 된 칠흑 같은 등갑이었다. 그들의 손에 들린 도끼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들이 향한 곳엔 동일한 갑옷을 입은 소인들 수십 마리가 전원 늑대를 타고 있었다.

"숲은 정리되었습니다."

보고를 받은 것은 주위의 소인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소인이었다. 호랑이 머리 모양으로 생긴 하얀색 투구는 얼굴 주위를 개방해 쭈글쭈글한 푸른 피부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황금색 미늘 흉갑은 검은색 갑옷들 사이에서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페더스틸 나무가 아닌 강철로 된 갑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그가 주위의 다른 소인들보다 힘이 세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가 턱을 앞으로 움직였다. 그의 턱이 가리킨 방향은 폴카가 사라진 작은 마을이었다.


최초의 희생자는 공사를 감독하던 자작의 측근 볼트로였다. 놈들은 번개처럼 빠르고 악마처럼 교활하게 움직였다. 이 작고 교활한 악마들은 주민들에게 공포심을 주기 충분한 숫자의 사람들을 학살한 후 재빠르게 양과 소, 돼지들을 강탈해 달아났다. 주민 몇 명을 말에 태워 그들이 끌고 가는 가축들을 몰게 한 점(그 주민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이나 곡물창고와 방앗간, 집 몇 채에 불을 질러 추격의지를 빼앗은 것은 여지까지 그들의 행동과 동일하다.
여지까지 우리는 적들이 사건을 일으킨 지 한참 시간이 지난 마을들을 방문했다. 이렇게 하루도 지나기 전에 적에게 당한 마을을 방문하기는 처음이다. 미트라 신이시여. 저들의 악행을 벌하려는 우리들의 무기에 축복을 내리소서.


발터벨트 수도회의 수사 표트르 넬 루데센코는 수첩을 덮었다. 엄마를 잃은 아이가 엄마 곁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간신히 곡물창고의 불을 끈 사람들은 화재를 피한 곡물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차지하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표트르"

표트르는 뒤를 돌아섰다. 한 청년기사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단정한 금발을 가진 준수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빅터 ‘서’ 스포르겐차. 성황의 망치로 불리는 성흔(聖痕) 기사단에 속해있는 젊은 기사이다. 그 옆에는 로브를 걸친 한 소녀가 따라오고 있었다. 안나 ‘솔’ 유센스코. 그녀는 수정의 계시회 소속의 젊은 마법사로 빅터의 소꿉친구였다. 이 셋은 작년부터 우랄 공국과 그 주변 공국들을 괴롭히고 있는 고블린들의 약탈을 조사하기 위해 빅터의 아버지가 만든 작은 모험자 파티였다.

"적을 추적한다. 지금이라면 끌려간 사람들이 죽기 전에 그들을 구할 수 있어."
빅터는 빠르게 말하고 애마에 올라탔다. 표트르는 당황했다.
"서 스포르겐차. 잠시만 기다리시오. 우리 세 명이 감당하기엔 적의 숫자가 많소이다. 근처 요새에서 지원을 받은 다음에 추격해도 늦지 않을 것이오."
"늦어. 당신의 말대로 하면 고블린들은 확실하게 토벌하겠지. 하지만 끌려간 미트라 신의 자녀들은 구해낼 수 없다. 고블린 따위에게 더 이상 우리 동포들을 죽게 할 수 없어."

빅터는 그대로 말에 박차를 가해 뛰어나갔다. 안나는 둘 사이에서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빅터를 따라 말에 올라탔다. 빅터의 성급함에 표트르는 고개를 설래 내저었다.
괜찮을 것이다. 상대는 고작해야 고블린들이다. 원래 깊은 산 속에서 길 잃은 광부나 사냥꾼을 상대로 포위공격이나 하는 것들이다. 작년부터 뭔가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원래 초보 모험가들이 쉽게 경험을 쌓을 수 있는 하급 몬스터. 빅터는 정식 기사단에서 검을 익힌 정통파 기사이며, 그 귀한 마법사가 둘이나 따라붙는다. 조금 어렵더라도 정리는 할 수 있겠지. 그 과정에서 적을 경시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빅터가 알 수 있다면 좋은 경험도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표트르는 빅터를 따라 말을 몰기 시작했다.

저항이 심한 포로 한두 명을 살해하자 나머지는 얌전히 따라왔다. 그래도 가축과 민간인이 섞인 무리는 느리기만 했다. 아그니는 슬쩍 땅거미가 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느린 속도도 다 그의 계산 안에 있었다. 불과 5년 전에 카자크 제국의 침략을 받은 이 공국은 고작 고블린의 망동 따위에는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몇 달 째 이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 처음에 느꼈던 가벼운 흥분도 일이 반복되면서 사라진 지금 의무적인 지루함만이 지금의 그를 지배하고 있다. 그래. 의무지. 하지만 여기의 인간들은 날 지루하게 만들 정도로 약하군. 그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석양조의 울음소리가 그의 귀에 들어왔다. 새는 짧게 세 번을 울었다. 단 세 명. 근처를 지나가던 모험가 무리가, 공명심에 이끌려 죽을 자리로 오고 있나 보군. 아그니는 조용히 네 명의 심복을 불렸다. 그가 가리고 가려서 뽑은 친위대 중에서도 그 넷은 특히 믿을 만했다.
아그니는 산악고블린 7개 부족의 대추장이었다. 보통 고블린보다 기골도 장대하고 힘이 강한 산악고블린은 늑대를 부리며 기니피그의 유목과 약탈로 살아가는 종족이었다.
아그니의 어린 시절은 7개 부족을 통합시키려던 아버지 밑에서 도끼를 옆에 끼고 돌아갔다. 7개 부족을 통일한 시점에서, 마왕도 분열된 마족을 통일한 후 다른 몬스터 부족들을 마왕의 깃발 아래 합류시키려 했다. 아그니의 아버지는 마왕에게 저항했고 패배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 뒤로도 3년이나 더 산악고블린을 다스렸다. 그러나 자유로운 산악고블린의 대추장이 아닌 마왕의 지시에 따르는 속국의 대추장으로 전락한 뒤였다. 마왕에게 장난감처럼 다뤄진 울분, 산악고블린을 통일하느라 바친 자신의 일생이 결국 마왕의 마족 통일계획에 봉사한 꼴이 된 것에 대한 불만은 항상 무겁게 잠겨 있었다. 마왕이 산악고블린의 다음 후계자를 아그니로 세웠을 때 그 결정에 반발해 동생을 후계자로 세웠던 것은 그 울분과 불만의 표출이었다.
아그니는 마왕에 의해 산악고블린 대추장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이유로 자살을 강요받았다. 별안간 아버지의 정적이 돼버린 셈이었다. 그가 아버지의 강요를 받아들여 애병(愛兵)인 도끼를 자신의 목에 가져갔을 때 마왕친위대가 유목지로 난입해 아그니의 아버지와 동생을 끌고 갔다. 아버지와 동생, 그리고 아버지의 편에 섰던 다른 부족의 추장들과 무장들을 침묵의 탑에 유폐시킨 마족에 의해 아그니는 황금늑대부족의 추장이자 산악고블린의 대추장이 되었다.


아그니와 4명의 근위대원이 매복한 수풀 주위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아그니는 그 소리를 듣고 일행이 중무장한 한 명의 남자와 중무장하지 않은 일남일녀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아차렸다. 늑대들은 훈련을 받은 대로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이름이 싱 그루인 근위대원이 돌연변이로 인해 고리처럼 생긴 그의 다섯 손가락에 화살을 하나씩 걸었다. 소리가 급속도로 가까워왔다. 말의 두레질이 들리며 여자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매복입니다!"
아그니는 신호했다. 작전변경의 신호. 적 중에 빛의 삼 학파 중 음파학파를 익힌 마법사가 끼어 있다. 파동에 대한 강력한 지식을 가진 그들은 아무리 완벽한 매복도 주변 공기의 흐름을 통해 알 수 있다. 매복이 실패한 이상 그 다음 작전은 강공이었다.
싱 그루의 화살이 제일 먼저 날았다. 시간차 없이 발사된 다섯 발의 화살은 안나를 노리며 살무사처럼 쉬식거렸다. 안나가 빠르게 어금니를 부딪쳤다. 어금니끼리 따닥거리며 부딪치자 마력의 파동이 형성되어 화살들의 행로를 방해했다. 본래라면 다 맞았을 화살이 안나의 옆으로 빠져나갔다. 마드나가 기병창을 꼬나들고 달려들었다. 그의 늑대, 하얀 털의 비궐은 몸집이 좀 작은 반면 다른 늑대보다 훨씬 빨랐다. 게다가 그 가속력은 최고속도에 도달하는데 다른 늑대들보다 3~4배 빨라 적은 거리를 달려도 최고속도에 이르곤 했다. 그렇게 튀어나온 쾌속의 나선 창이 빅터를 노렸다. 빅터는 방패를 들어올렸다. 방패가 창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났다. 그 사이를 6개의 차크리가 날았다. 핫, 표트르가 신의 권능을 빌었다. 차크리는 신성마법에 막혀 모두 떨어졌다.
'기사 하나, 음파 학파 하나에 수도사 하나라.'
아그니의 도끼가 빅터의 검과 맞부딪쳤다. 둘은 서로 어울려 몇 합을 겨루었다. 기본은 충실하군. 하지만, 아그니의 도끼가 창공을 갈랐다. 빅터는 아연한 표정으로 잘린 왼팔을 바라보다 가슴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경험이 없군. 방패는 마드나에게 이미 깨졌거늘. 그 때 안나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빅터의 위급함을 보고 도우려다가 에테르 마법의 카운터를 맞은 것이었다. 음파와 에테르, 신성과 암흑, 정령과 사령, 이렇게 서로 앙숙이라 할 수 있는 두 개의 계열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서로에 대한 무수한 카운터마법과 역 카운터 마법들을 만들어냈다. 이 경우는 주변에 에테르마법사가 있던 것을 몰랐던 그녀의 패착이었다. 하기는 어둠의 삼 학파 마법들이 단절된 것으로 알고 있는 저들에게 주변에 에테르마법사가 있으리라는 상상은 어렵겠지만. 표트르는 검을 뽑아 든 마드나의 쾌속의 찌르기에 주문을 외울 틈도 없이 밀리고 있었다. 그 뒤를 싱 그루의 두 번째 오연시(五連矢)가 허공을 갈랐다.
아그니는 세 명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모험가는 변수가 많아서 직접 나섰지만 부하들에게 처리하라 했어도 결과는 별반 차이 없었으리라. 몇 달 째 이런 지루한 임무만 반복하고 있는 것인지. 이번 작전이 전체 전쟁에 미치는 중요성만 아니라면 당장에 때려 치고 싶을 정도로 지루했다. 그래도 멀지 않았다. 이제 침묵의 탑에 갇힌 동생과 아버지는 평생 경험하지 못할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럴 것이다. 그래야 자신이 그 날 마왕의 뜻을 받아들여 산악고블린의 대추장이 된 보람이 있을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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