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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르나엘님······. 루카이제입니다.”

복도 끝에 위치한 문 앞에서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은 여성이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연다. 조심스럽다 할 수 있을 만큼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아무도 없는 조용한 복도는 그녀의 작은 목소리를 품에 안아 깊숙이 퍼뜨렸다.

어두운 보랏빛의 머리가 아주 잘 어울리는 그녀가 언뜻 본다면 짙은 감색이라 느낄 만한 청보랏빛의 눈동자를 가만히 아래로 움직였다. 그리고는 차분한 눈으로 자신의 두 손에 올려진 서한을 말 없이 바라본다. 그녀가 찾고 있는 그가 안에 없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분명히 안에 있음에도 대답하지 않는 그에게 억지로라도 서한을 보여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녀, 루카이제의 얼굴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지금 그녀가 찾아온 존재는 모든 것에 대해 간섭받는 것을 철저히 거부했다. 당연히 자신의 시간을 방해하고 있는 그녀를 탐탁지 않게 생각할 터였다.

그의 기분이 이렇게 가라앉아 있는 줄을 알았다면 조금 후에 왔을 텐데, 라는 뒤늦은 후회를 하며 루카이제는 가만히 작은 한숨을 내보냈다.

석양빛을 받아 붉게 물든 보랏빛 머리가 가만히 흔들릴 즈음, 그녀는 다시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르나엘님, 루카······”

“들어오십시오.”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목소리가 자신을 향한 것임을 깨달은 루카이제는 이내 긴장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너무나도 조용한, 그리고 깨끗하게 꾸며진 넓은 집무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 가장 깊숙한 곳에 놓인 커다란 책상에 앉아 자신의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빛도.

시리도록 차갑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루카이제는 가만히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조용히 커다란 문을 닫았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갈수록 늘어나는 위압감에 작은 한숨을 쉬는 것으로 마음을 가라앉힌 그녀가 그의 앞에 섰다.

모든 것을 꿰뚫기라도 하듯 날카로운 눈.

아무런 감정도 담고 있지 않아 더더욱 차가운 눈.

······은빛의.

그렇게 말 없이 앉아있을 뿐이었고 그런 그를 누구보다도 믿고 존경하는 그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음속에는 강한 공포만이 아로새겨지고 있었다.

절대적인 존재를 향한 동경.

그리고 두려움.

그의 어깨 위에 앉아있던 붉은 빛 새가 자신을 쏘아보고 있음을 느낀다.

붉은 깃털과 긴 꼬리. 그리고 반짝이는 황금빛의 눈을 지닌 불의 신수, 봉황.

봉황의 긴 꼬리를 따라 그녀의 시선도 그의 뒤편 바닥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미처 시선을 들어올리기도 전에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소름이 돋을 만큼의 미성이지만, 그런 그의 목소리는 오히려 더더욱 시린 느낌만을 전해줄 뿐.

“부른 기억이 없습니다만.”

자신의 방문을 정말로 탐탁지 않게 여기는 말에 고개를 든 루카이제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표정 없는 은빛의 눈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예. 하지만 급한 서한이라 여겼기에······.”

말과 함께 그녀는 자신이 조심스레 들고 왔던 서한을 두 손에 올려 그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 읽어나가던 그가 서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이만 나가달라는 의미를 담은 그의 말에도, 루카이제는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리리스님께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가 알려드릴까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바로 들려왔다. 과한 참견에 대한 불편함까지 담긴 대답이었다.

“내가 합니다.”

“······죄송합니다.”

“나가보십시오.”

그녀가 하직인사를 마치고 나간 뒤, 그는 오랜 시간동안 몇 번이고 그 서한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 문득 굳게 닫혀져있던 집무실의 커다란 문이 답답하다는 듯, 그는 작은 눈짓으로 멀리 떨어져있던 문을 활짝 열었다. 조금 전까지 복도를 물들이던 석양의 붉은 빛이 그가 앉아 있는 책상 위에까지 길게 드리워진다.

“드디어······ 입니까, 이크립스.”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의 눈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살짝 감겼다.



“······엘, 로엘.”

문득 희미하게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 그리고 뒤이은······.

“로엘! 로엘, 로엘, 로엘, 로엘, 로엘!”

시끄러운 목소리.

“······ 일어났다.”

로제니엘은 귀찮은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오랜만의 단잠에 푹 빠졌던 탓인지, 조금은 짜증도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뭐야.”

“아하하. 일어났어? 아버님께서 부르셔, 로엘.”

“황제가 왜.”

“밥 먹자고 하시던데?”

그 말에 로제니엘은 재고의 여지조차 없다는 듯 다시 눈을 감았다. 등까지 돌려버리며, 정말로 귀찮다는 듯 대답한다.

“잔다고 해.”

“아? 안 돼. 밥은 먹어야지, 로엘!”

“필요 없어.”

“안 돼! 일어나!”

“시끄러워.”

로제니엘의 그런 말을 어린아이의 잠투정 정도로 여겨버린 세이렌은 다시 한 번 로제니엘의 몸을 흔들어댔다.

“밥 먹으러 가자, 응? 응?”

“하······.”

결국 로제니엘은 길고 긴 한숨을 내뱉으며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를 본 세이렌이 다시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는다.

“황실 제일의 손님 중 하나란 말야, 로엘은.”

“대체 왜.”

“응? 그야······. 음······. 아하하, 아무튼! 그럼 준비하고 나와, 알았지?”

그렇게 말을 남긴 세이렌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밖으로 나가고, 로제니엘은 한 올 흐트러짐도 없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발을 옮겼다. 진심이 잔뜩 배인 목소리가 흩뿌려지듯 흘러나왔다.

“귀찮아······.”



로제니엘은 서른 명은 족히 둘러앉고도 남을 만한 ‘식탁’이라는 것을 보며 다시 한 번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크지 않은 목소리로 짧은 감상을 내보냈다.

“인간들이란.”

“응?”

그의 바로 옆에 서 있던 세이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고, 로제니엘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됐어.”

“아아?”

얼굴마저 비칠 듯한 반짝이는 대리석으로 치장된, 식당이라 하기엔 너무나 호화로운 곳이었다. 하긴 황실의 식당이니 어련하겠느냐마는, 벽을 따라 일정하게 걸려있는 촛대와 천장에 매달린 화려하고 거대한 샹들리에를 보다 보면 한숨이 나오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이미 이 식당의 모습에 익숙한 로제니엘이기에 한숨정도로 그치는 것이겠지만.

그런 로제니엘의 앞으로 낯익은 두 남녀가 걸어왔다.

“아버님, 어머님!”

먼저 아는 체를 한 것은 세이렌으로, 그는 얼굴에 함박웃음을 드리우며 그들을 맞았다. 그리고 인사를 받은 중년의 남성이 세이렌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는 이내 로제니엘을 향해 간단한 목례를 해 보였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제니엘님.”

그리고 남자의 옆에 서 있던, 세이렌이 ‘어머님’이라 불렀던 여성 역시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로제니엘님.”

로제니엘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군.”

한 나라의 황제에게 할 수 있을 만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황제와 황후는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로제니엘을 식탁으로 안내했다. 황제는 상석 대신 황후의 옆 자리에 나란히 앉았고, 로제니엘과 세이렌은 그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리 오래지 않아 저녁 만찬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만찬’이라는 저녁식사가 호화로운 식당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을 만큼 조촐하다 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이었다. 빵과 스프, 그리고 작은 크기의 스테이크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역시나 익숙하다는 듯, 로제니엘은 별다른 말 없이 식사를 마쳤다. 그나마 자신이 있기에 이런 스테이크가 저녁으로 나왔음을 아는 그였다.

황실의 식단이 이렇게나 소박한 이유는 간단했다. ‘적어도 식사만은 백성의 그것처럼’이라는 것이 황제의 생각이었으니까.

맑은 물이 담긴 유리잔에 손을 뻗으며, 황제가 말을 건넸다.

“앞으로 계속 이 곳에 머물러 주실 수 있는 지에 대한 대답을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로제니엘님.”

세이렌이 조르던 것과 말투만 달랐지 거의 비슷한 질문이었다. 로제니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있을 수 있는 만큼은 있도록 하지.”

“아, 정말이십니까?”

“다만.”

“예, 말씀하시길.”

버릇인 듯한 낮은 한숨과 함께 로제니엘이 말했다.

“귀찮은 일은 질색이야. 떠넘기려 하지 마.”

“아, 하하······.”

정곡을 찔린 듯, 황제가 어색하게 웃으며 물을 삼켰다.

“사실은 부탁드릴 것이 있었습니다만······.”

“싫어.”

딱 자르는 말에, 황제는 다시 한 번 웃어넘기며 입을 열었다.

“한 번만 유리에의 상태를 봐주실 수 있으실 지 부탁드리려 했습니다, 로제니엘님.”

황제의 말에 담겨있던 이름을 들은 황후와 세이렌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표정은 살피지도 않은 채, 로제니엘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대답은 오래 전에 이미 했을 텐데. 또 쳐다본다고 달라질 건 없어.”

“부탁드려요, 로제니엘님.”

새로운 목소리, 황후였다. 세이렌의 것과 꼭 닮은 푸른 눈에 슬픈 빛이 어려 있었다. 황후는 세이렌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로제니엘을 향해 간곡히 말했다.

“황자의 성인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분명히 유리에에게도 조금의 변화는 생겼을 거예요. 부탁드려요.”

“로엘, 그건 나도 말하려고 했었어. 봐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겠지? 부탁이야.”

세이렌까지 그렇게 나서니 별 도리가 없었다. 세이렌의 말대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 기대는 말도록.”

허락이었다.

황제와 황후는 밝게 웃으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 문학 커뮤니티 베스트셀러를 꿈꾸다 ( http://cafe.daum.net/Besel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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