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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학교의 비밀(9)

2009.01.01 03:5401.01

9.
과학선생이 정아에게 들려준 긴 이야기 중 몇 가지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과학선생이 들려준 이야기는 긴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이것들은 전체 실상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별의지혜’라는 유해한 종교단체가 있다. 이들이 미선이 또한 납치했으며, 다음 목표는 정아였다. 그리고 이 지역에 퍼져 있는 신도들의 종교 지도자는 교장이다. 또한 이들을 없애기 위해서는 이 학교 도서관의 금서목록에 들어있는 서적들을 모두 불태우고 이들이 숭배의 매개체로 사용하는 외계의 물건을 통해 소멸자를 소환해야 한다고 한다.
중간 중간 교착계의 마법과 이형의 괴물들에 대한 설명도 뒤따랐다. 대부분 정아도 읽은 적이 있는 ‘벌레의 신비’를 답습하는 내용이었다. 과학선생은 자신은 그들에게 반대하는 입장이며, 자신이 그들 종단을 무너뜨리는 데 힘을 빌려 달라는 부탁을 정아에게 건넸다. 경찰 또한 믿을 수 없다. 그들 대부분이 종단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유로 이 이야기가 정아를 통해 바깥으로 흘러나간다면 신도들에 의해 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람들 또한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말도 있었다.
정아는 여태까지 접한 단서들에 의거해 이 사건들이 마법을 숭배하는 자들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과학선생은 지금 이 사건들이 마법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마법을 실행하는 자들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정아는 이 말에 그나마 가지고 있던 신뢰도 마음속에서 없애버렸다. 정아는 과학선생이 자기 얘기에 몰입한 틈을 타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잠깐 기다려! 운동장으로 나가면 안돼!”
물론 정아는 운동장으로 나갈 생각은 없었다. 과학선생은 어쩌면 정아보다 빨리 달릴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일단 뛰기 시작한 이상 계속해서 뛰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담장까지만 어떻게 해서든 도달한다면 담을 넘기에는 체중이 무거워 보이는 과학선생을 따돌리고 아파트단지로 숨어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이런 걱정이 정아의 뇌리를 스치기는 했지만 무섭게 달려오는 과학선생에게 쫓기는 마당이니 깊이 생각할 기회가 없었다. 정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를 미친 듯이 달리고 계단을 한 번에 세 칸씩, 필요할 경우에는 계단참에서 계단참으로 한 번에 뛰면서 날듯이 도망쳤다. 학교 정문과 뒷문은 한 복도에서 만난다. 정아는 그 복도에서 정문을 통해 학교 안으로 들어오던 담임과 마주쳤다.
“정아야, 괜찮니?”
담임이 머뭇거리는 동작을 보이며 걱정에 가득 찬 목소리로 정아를 부르는 바람에 정아는 몸을 돌려 후문 쪽으로 도망치려던 생각을 멈추고 가능한 한 태연한 태도를 가장하며 담임과 마주했다. 담임의 체격으로 봐서는 비록 과거에 비해 몸이 안 좋아지기는 했어도 기본 바탕이 있으므로 과학선생과 비교하자면 따라잡힐 염려가 더욱 클 것이기 때문이다.
“네, 사물함에 뭐를 놔두고 와서요. 친구가 기다려서 가 봐야 해요. 안녕히 계세요.”
“힘든 것 같은데 도와줄까?”
담임이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를 들으니 정아는 속이 쓰렸다. 담임은 이전부터, 그러니까 정아가 아직 담임에게 연정이 남아있을 적부터 이런 일에 가담하고 있었을까? 음악선생은 정아를 납치한다는 계획을 자기 패거리에게 말했었다. 음악선생의 남편인 담임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지금 정아를 대하는 태도는 단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교묘하게 꾸며진 위선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오, 괜찮아요. 그냥 혼자 가볼게요.”
정아는 정문쪽으로 향했다. 후문에는 수영장과 매점만이 있을 뿐 제대로 된 출입구는 없기 때문에 후문으로 나간다면 담임이 이상하게 여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정아는 일단 정문 밖으로 나가서 담임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자마자 학교 옆면을 돌아 뒤쪽의 담장으로 뛰어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정아가 계획에 따라 정문으로 빠져 나가기 위해 담임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정아가 다가오자 담임은 여차하면 정아를 부축해 주겠다는 몸짓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두 팔을 내밀고 있었고 정아는 여태까지 뛰어온 탓에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걷는 도중이었다. 정아가 지나온 계단 쪽에서 급하게 뛰어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담임과 한패거리라면 최대한 빨리 후문으로 뛰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정아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고 뛰어내려온 사람을 식별했다. 과학선생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 손으로 계단의 난간을 잡고 비틀거리면서 서 있었다. 정아의 뒤 쪽에서 담임이 중얼거렸다.
“위험해. 제거해야 한다. 별의지혜를 위해.”
담임은 정아의 뒤 쪽에서 달려와 정아의 목을 두 손으로 조르기 시작했다. 과학선생은 이 광경을 보고는 튀어 나오듯이 정아 쪽으로 와서 담임의 손을 정아의 목에서 떼어 내려고 했다. 하지만 담임의 힘이 상당히 강한 탓에 쉽사리 저지하지는 못했다. 정아는 머리가 터져 나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뜨거운 피가 머리에 갇혀 점차 근육을 압박했다. 정아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자 손톱으로 담임의 손을 할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담임의 손아귀 힘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과학선생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정아는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열심히 담임의 손을 더듬었다. 어차피 이대로는 꼼짝없이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정아는 담임의 손톱이 손에 들어오자 필사적으로 담임의 손톱을 벗겨냈다. 그러나 그 작전도 소용이 없었다. 과학선생이 갑자기 고함을 지르더니 어느새 갖고 온 소화기로 담임의 머리를 찍었다. 그제야 담임은 목을 조르던 손을 풀고 뒤로 나가 떨어졌다. 과학선생은 여세를 몰아 담임을 완전히 제압하겠다는 생각으로 소화기를 다시 한 번 휘두르려고 했지만 담임이 간질 환자처럼 버둥거리는 탓에 번번이 실패하더니 결국 포기하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정아는 혼자서 충격으로부터 회복했다. 기침을 몇 번 하니 숨은 제대로 쉴 수 있었지만 굉장히 더러운 기분에 사로잡혀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 정아는 분노에 가득 찬 눈으로 버둥거리는 담임을 바라보았다. 담임은 두 손으로 자기 머리르 부여잡고는 두 다리를 허공에 마구 휘저으며 이리저리 굴러 다녔다. 너무 아파 비명도 지르지 못하겠다는 듯이 끅끅거리는 신음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꼭 뇌혈관이 터진 사람이 보이는 행동 같았다.
한참을 구르던 담임이 갑자기 한 쪽으로 누워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선잠에서 깬 사람처럼 상체를 벌떡 일으키고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담임의 눈이 과학선생과 정아를 발견했다. 과학선생은 소화기를 다시 두 손에 단단히 쥐었다. 하지만 예상 밖으로 담임은 마구 울부짖으며 과학선생이 있는 쪽으로 아기처럼 기어왔다.
“도와줘! 사로 잡혔어! 교장이 나를 이용하고 있어!”
하지만 과학선생은 담임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피하려고 뒤쪽으로 물러났다. 담임은 그것을 보더니 기어오는 것을 멈추고는 땅바닥에 얼굴을 묻고 꺼이꺼이 통곡했다.
“사로 잡혔다니?”
과학선생이 담임에게 물었다.
“내가 바보였어. 너도 알지? 난 그저 처음에는 금서로 고대의 수학을 배우기 위한 것 뿐 이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종당했어!”
“조종당하다니?”
“벌레의 신비에 나와 있어! 정신감응! 내가 남자이니까 뇌를 이용해 먹으려고 내 정신을 조종해서 자기 일에 가담하게 만들었어. 그리고 내가 수학을 할 줄 아니까 웜홀로 들어가기 위해 12망성을 그리게 했어. 그리고 부하를 시켜서 나랑 결혼하게 하고는 계속해서...!”
과학선생은 아무 말이 없었다. 계속하고 싶으면 계속하라는 태도였다.
“도와줘! 제발!”
“난 못 도와줘.”
“제발..!”
“네가 조종당하고 있었다고 해도, 처음 시작한 건 너야.”
“제발.. 제발...”
“내가 너를 믿게 하려면 우선 행동으로 보여 봐.”
“아! 온다! 온다!”
담임은 다시 자기 머리를 감싸고는 복도를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고통이 이전보다 큰지 자기 손으로 자기 머리털을 있는 대로 쥐어뜯었다.
“와! 교장이 오고 있어!”
지옥 밑바닥에서 끌어 내오는 듯한 절규가 담임의 입을 통해 튀어 나왔다. 담임은 마지막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상체를 일으키더니 그대로 머리가 터져버렸다. 작은 뼛조각이 정아 쪽으로 날아 와서 정아는 이것들을 피하려다가 뒤쪽으로 넘어졌다. 담임의 몸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보고 싶지도 않았다.
“교장이 화가 났어. 넌 도망쳐,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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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거의 끝나갑니다....
Mad Ha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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