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학교의 비밀(4)

2008.12.22 19:4712.22

4.
담임이 결혼했다. 음악선생이랑. 담임은 이 비보를 어느 요일 종례시간에 뜬금없이 말했다. 아이들이 야유인지 환호인지 모르는 것을 질렀다. 하지만 정아는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담임은 신혼여행을 가서 1주일간 휴직을 한다고 한다. 담임이 싱글벙글하는 모습이 정아는 어쩐지 싫었다. 미선이가 정아를 위로해 주었다. 정아에게 좋아하는 케이크를 사주기 위해 미선이의 지갑에서 많은 돈이 빠져나갔다.

정아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들렀다가 교실로 돌아가는 와중이다. 그런데 교실 앞에서 이상한 것을 보았다. 교실문 밖에 사람들이 의식을 잃은 모습으로 더미 져서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정아는 이 광경을 보고는 무서운 생각이 들어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교실 안에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교실 안으로 들어가던 아이들이 저런 식으로 기절할 수가 있을까?  
하지만 교실 안에서 특별히 위험한 소리가 나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다른 교실에서는 한창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도중이었기 때문에 여차하면 쉽게 도움을 청할 수 있다는 사실에 호기심이 공포를 억누르게 되었다. 정아는 정말로 위험한 일이 일어난 거라면 서둘러 정황을 살피고 도움을 청하는 것이 더 온당한 일이라고 생각되어 조심스럽게 교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의외로 별 것은 없었다.
지수였다. 교실 한복판에 잔뜩 움츠러든 채로 서 있었다. 방금 나쁜 일을 저지르고 부모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처럼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두 손에는 무언가 기묘한 물체를 단단히 쥐고 있었다. 검은색의 광택이 나는 물체였는데 이상하게도 그 형태에 대해서는 기억도 인상도 불확실했다. 분명히 눈앞에서 마주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정아는 그 물체의 색다른 형태와 질감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을 빼앗겼다. 정아는 아마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것을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그 안에 무언가 있었다. 무언가 형태가 불분명하고 검은 것이. 이 세상과는 무관하게 보이지만 편재라는 원리에 의해 바로 가까이 접하고도 있는. 검은 행성...
정아는 눈앞이 아찔해 지는 기분이었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까무라칠 뻔 했지만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렸다. 어려운 일이었다.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의식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저기.. 정아야.”
지수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를 듣기로는 지수도 가까스로 버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과학 선생님 좀 불러다 줄래?”
과학 선생? 왜? 의문은 컸지만 정아는 지수의 말을 듣기로 했다. 어쨌든 이런 이상한 결과를 초래하는 정체불명의 물건은 정아보다는 지수와 더욱 가까울 테니 그 처리방법도 지수의 말을 따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정아는 미적미적 교실에서 빠져나왔다. 갑자기 큰 긴장에서 풀려나서인지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정아는 혼자 있는 지수가 걱정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과학 선생은 아마 교무실에 있을 것이다.
얼마 가지 않아 정아는 미술선생과 마주쳤다. 미술선생도 교실문 앞에 기절한 아이들을 보았을 것이다.
“너, 어디 가니?”
정아는 과학선생을 부르러 간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불필요하게 설명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양호선생님이요.”
미술선생은 교실로 들어갔고 정아는 다시 과학선생을 찾으러 교무실로 향했다.
미술선생은 교실로 들어섰다. 한 쪽 손으로 눈을 가려 지수가 들고 있는 물체를 보지 않으려 애쓰면서 지수의 곁으로 다가갔다. 미술선생이 지수에게 물었다.
“니가 그 선생을 불러달라고 했니?”
정아는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한창 수업이 진행되는 시간이라 교무실은 한산했다. 과학선생은 자기 자리에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정아는 과학선생에게 다가가서 지수가 급히 찾는다는 얘기를 전했다. 하지만 과학선생은 아무 말 없이 근심하는 표정으로 땅바닥만 보고 있다. 그러더니 한숨을 한번 쉬고는 말했다.
“아마, 이젠 내가 필요 없게 되었을 거다. 교실로 돌아가라.”
정아는 교실로 돌아가면서 양호선생을 데려갔다. 하지만 그 둘이 교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몇몇 아이가 의식을 차린 상태였기 때문에 양호 선생이 개입할 여지는 별달리 없었다.
물체는 사라진 채였다. 지수도 그 자리에 없었다. 하지만 한 시간 후에 지수는 황망한 표정을 하고는 돌아왔다.

물체와 관련된 사건이 일어난 바로 다음 날 양호선생이 죽었다. 시립 공원의 연못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경찰이 사건을 싸고도는 바람에 미선이도 정아도 자세한 내막은 몰랐다. 경찰이 이 사건을 비밀리에 수사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부검 결과 양호선생은 공원 연못의 물, 즉 담수가 아닌 해수에 의해 익사한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담수와 해수는 익사에 이르는 기전에 있어서 법의학적인 차이를 보인다. 실질장기에 대한 플랑크톤 조사에서도 일련의 실종사건과의 관련성을 암시하는 동일한 종류의 플랑크톤이 현미경 하에서 발견되었다. 경찰은 사건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며 좋아했지만 사실 바뀐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담임이 일주일간의 휴가에서 돌아왔다. 어쩐지 야위어 보였다. 정아는 이상하게도 담임을 보고서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물체에 의해 영향을 받은 이후에는 모든 것이 흥미가 없어졌다. 그 때 다른 아이들도 영향을 받았지만 물체에 의한 이야기나 지수에 대한 이야기를 화제로 올리는 일은 없었다. 일부러 그러지 않는 다기 보다는 자신이 그런 일을 겪었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다른 아이들은 평소와 똑같았다. 물체에 관한 사건을 역사에서 지워버리더라도 아이들의 생활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을 것 같았다. 바로 그저께 일어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아이들에게는 아무런 여파가 없었다. 오직 지수와 정아만이 온몸의 기운이 전부 빠져나가 버린 듯이 흐물거리며 생활할 뿐이었다. 사이가 틀어진 것은 아니었다. 정아는 자신이 확실히 이해하지도 못하는 일로 남을 비방하는 타입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둘이 마주칠 때마다 서로 희미하게 웃어주는 것만으로 사교의 지평이 축소되었기는 하지만 말이다. 미진이는 이에 대해 딱히 캐물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약간만 후퇴했다.

“왜 우리가 이런 일을 해야 하지?”
미선이가 투덜거렸다. 미선이는 미화부장으로 자기가 원하지 않더라도 학교 환경미화에 깊숙이 관련이 되어야만 했다. 방금 전까지는 교실을 청소하던 중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의자가 딸려있지 않는 책상이 나왔다. 몇 달 전에 전학간 아이의 자리인데 치우지 않고 내버려 두었던 것이다. 책상을 밖으로 치울 것인지, 아니면 신관에서 다른 의자를 가져와 메꿀 것인지 사이에서 번민하던 미선이는 결국 신관에서 의자 하나를 갖고 오는 방법을 택했다. 그래서 미선이와 정아는 신관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신관은 아직도 페인트 냄새가 가시지 않는 것 같았다. 겉보기에는 멀쩡해서 청소만 좀 하면 바로 옮겨 쓸 수 있을 터인데도 어째서 아까운 건물을 방치해 두는 건지 의아했다.
쓸 만한 의자는 1층에 있었지만 미선이가 2층으로 올라가 보자고 해서 둘은 2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2층도 1층과 마찬가지로 별로 흥미로운 것은 없었다.
“그런데 왜 2층까지 올라온 거야?”
“재미있잖아. 우리 옥상까지 올라가볼까?”
옥상! 정아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복도를 휘젓고 다니며 창문으로 운동장을 구경하던 미선이가 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찾은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아야. 일로 와 봐!”
미선이는 정아를 2층의 교실 한 곳으로 데려갔다. 낮인데도 어두침침한 방이었다. 창문이 북향으로 나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강렬한 곰팡이 냄새가 밀려왔다. 정아는 재빨리 손수건을 꺼내 코와 입을 막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곰팡이가 내뿜은 포자가 실내에 가득 차 있을 것이 분명해서 공기를 들여 마시는 것이 꺼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교실에는 둘의 눈을 사로잡을 만한 물건이 있었다. 천장까지 닿는 엄청난 규모의 책더미였다.
“우와...”
정아는 무심코 탄성을 내질렀다. 이렇게 많은 책이 한 곳에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광경은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둘은 책더미 주위를 빙빙 돌며 서명을 구경했다. 대부분 오래전에 출판된 책이었다. 촌스러운 표지에서부터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도서관에서 논술수업 고무를 위해 신간들을 들여오면서 낡은 책을 대량으로 방출한 것 같았다.
“나중이 이 책을 전부 태워 버릴건가?”
“그렇지는 않을걸. 아마도 폐지장수한테 넘길 거야.”
그때 미선이의 눈이 반짝였다. 미선이는 묘하게 웃으며 책더미에서 낡은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정아는 얼른 미선이 곁으로 가서 어깨 너머로 책을 구경했다. 그 책은 정아도 미선이도 잘 알고 있는 책이었다. 도서관에서 사서의 기묘한 태도를 이끌어 낸 책, 벌레의 신비였다.
미선이는 열정적인 손짓을 곁들여가며 책을 가져가자고 말했지만 정아는 그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사서가 그렇게 귀중하게 여기는 책이라면 나중에 분명히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다 버려놨잖아. 그러면 별로 중요한 책이 아닌가 보지. 어쩌면 실수로 이곳에 섞여 들어온 걸 수도 있어. 여기다 놔뒀어도 태워지거나 다른 식으로 처리되었을 거야. 어차피 버릴 건데 가져가면 어때?”
미선이는 막무가내였다. 주은 걸 가진다고 한 것은 미선이였고 정아도 딱히 강경하게 반대해야 할 이유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둘은 벌레의 신비를 구해서, (어쩌면 빼돌려서) 신관에서 가지고 나왔다. 둘은 무언가 잊은 것이 있다는 막연한 느낌이 들었지만 무시했고, 결국 미선이는 의자를 가지고 가기 위해 한 번 더 신관으로 가야했다.
Mad Ha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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