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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섬]

2010.07.05 20:2707.05













0.

섬에 병이 돌았다.





1. 함장

일그러진 밤이었다. 태양은 졌지만 바다는 여전히 한낮의 열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끓고 있었다. 표단은 어둠 속에 가려진 섬이라도 찾고 있는 듯, 바다를 응시하며 부관의 점호보고를 듣고 있었다. 힘차고 바르나 단조로운 부관의 목소리는 막힘없이 보고를 끝마쳤다.

“이상입니다.”
“특이사항은 없나?”
“없습니다.”
“아닐 텐데.”

밤은 짙어지며 바다와 하늘을 뒤섞고 있었다. 표단은 이제 자기 얼굴이 비치기 시작하는 창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저기, 낮에 섬 이곳저곳에서 나무 몇 그루가 잘리는 것을 보았는데.”
“알아 봤습니다만 도민이 나무를 몇 그루 자른 것이지, 별 다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별 다른 것이 아니었다고?”

표단은 부관을 돌아봤다. 그는 차렷 자세로 서서 15도 위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표단은 그에게 다가갔다. 표단도 키가 작은 것은 아니었지만, 부관의 키는 표단을 훌쩍 넘어 머리 하나쯤은 높았다. 그런데도 표단의 손길이 옷깃을 스치자 그의 어깨가 풀잎처럼 떨었다.

“나무를 베었다는 것은, 나무가 필요하단 뜻이겠지? 나무가 필요하다면 어디에 필요한 걸까?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거라면 집을 짓는 거지. 그런데 병으로 빈집이 넘쳐나는 유령 섬에서 집을 지을까? 그게 아니라면, 그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배아닌가? 뗏목 같은 것. 옷차림이 흐트러졌군.” 표단은 부관의 앞가리개를 정리해주고, 삐져나온 상의 뒤쪽을 바지에 넣어주었고, 벨트의 위치를 조종하여 상하의의 선과 맞추었으며, 안으로 말려 들어간 바지 주머니 덮개를 빼주었으며, 부관의 어깨에 붙어 있던 머리카락과 먼지까지 떼어주었다. 그리고 자기 자리에 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부끄러움에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내일 당장 뗏목작업이 벌어지지 않았는지 수색하겠습니다!”

표단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면서 말을 이었다.

“면도를 귀 아래쪽 까진 못했군. 게다가 입술은 찢어져서 딱지가 얹혔고. 방금 전에 보니 목 아랫부분에도 손톱자국이 남아 있던데, 자네는 아마 스트레스 받을 때 마다 자기 몸을 심하게 긁곤 했었지. 그리고 절대로, 단 한번도, 내가 아는 바로는 자네 복장이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네. 그런데 지금은 엉망이야. 왜일까?”
“그건…….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야.” 표단의 눈이 점점 가늘어지며 부관을 보는데, 그 시선은 마치 부관의 가슴을 거칠게 뜯어 그 안쪽에 있는 것을 훑어 삼키려는 듯 했다. “내가 묻는 건, 그런 현상이 ‘왜’ 벌어졌는가를 묻는 거야. 신상에 별 다른 일이 있나?”
“그냥, 오늘 해양우편으로 편지가…….
“빌어먹을.”

표단이 부관의 말을 끊고 눈을 감았다. 그의 이맛살이 찌푸려지고 있었다.

“난 보고 받은바 없어. 내가 출항하기 전 분명 말했을 텐데, 난 너희들에 대한 모든 정보를 원한다고.”
“보고 할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너무 개인적인 일…….”
“없어, 그런 건, 적어도 이 함대에선! 설마 아직까지도 그런 생각을 하는 선원이 있는 건가? 아니지, 부관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아직도 많이들 그러겠군. 안 그런가?”
“그건…….”
“내가 명확히 말을 안 한 탓이겠군. 지금 명료하게 말하겠다. 오늘부터 모든 소포와 편지는 내가 우선 열람한다. 그렇게 전하도록. 아, 자네의 우편물도 마찬가지야. 항명이나 반대 따윈 없어. 이로서 자네를 비롯해 모든 선원이 똑바로 알길 바라네. 지금 이 함대가 누구의 것이고, 자네들의 주인이 또 누구인지. 그리고 당장 그 편지를 내 놓던가, 정확하게 편지에 대해 내용 보고를 하도록. 어서. 내가 그걸 원한다.”
“……그냥, ‘그 사건’ 피해자를 합장묘에 묻었고, 유가족들은 보상금을 수령할 수 있다는 공문서였습니다. 긴 목록, 42번째 줄에 제 어머니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곳에 동그라미를 쳤습니다. 알아보기 힘들어서…….”
“아, 그래. 벌써……. 며칠 안 지났는데, 참 일처리가 빠르군. 어지간히 지우고 싶었나 보군. 어머니 이름이 아마 강자 민자 화자를 쓰고 계시지 않던가.”

부관이 순간 어깨를 떨더니만, 잠시 후 목이 멘 소리로 말했다.

“강민화……. 예. 맞습니다. 함장님.”
“그러니 만큼, 더 열심히 임무를 수행하게.”
“더 이상 어떤 병도 창궐치 못하게 하겠습니다. 저 섬에서 난 병, 섬에서 죽게 하겠습니다. 단 한명의 보균자도 남기지 않을 겁니다. 세균 하나라도, 제 어머니를 죽인 대가를 받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임무입니다.”
“맞네.”

표단이 부관을 쳐다보았다. 부관의 등자락은 식은땀으로 흥건했고, 석상으로 변한 것처럼 온 몸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 속에 불타는 증오는 쉬이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검은 불꽃같아 그 무엇으로 가려도 암광暗光을 뿌리며 드러난다. 표단은 슬픔을 달래는 방법으로 증오 밖에 모르는 병사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잠이 오나? 난 아직 잠이 안 오는데, 괜찮다면 체스나 한판 두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표단과 부관은 체스판을 깔고, 말없이 체스를 두었다. 그것이 부관에 대한 표단의 말 없는 위로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체스가 모든 것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준다는 것은 확실했다. 뱃전에 부딪히는 파도소리와, 기물과 체스판이 부딪히며 나는 달그락 거리는 소리만이 가끔 정적을 깰 뿐,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그들은 그렇게 한참이나 서로의 머리를 맞대고 수를 섞었다. 그러던 중, 부관이 표단의 퀸을 잡으며 말했다.

“여전하시군요.”

표단의 게임 스타일은 과격하고 공격적이었다. 그는 말의 손실에 상관 하지 않고 공격을 가 했으며, 그가 노리는 것은 단 하나, 왕 이었다. 그는 단 한 가지 전략을 세우고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과감한 수를 즐겨 썼다. 그 전략이라는 것은 워낙이 교묘하여 정확하게 알기가 힘들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와중 그가 던지는 미끼들은 알면서도 물어야 하곤 했다. 지금도 부관은 표단의 퀸을 먹는 것이 함정임을 알면서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전략을 알아차렸을 땐 이미 늦었고, 이미 체스판 전체는 표단이 지배하고 있었다. 부관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이런 것은 유리 검이죠. 날카롭지만 측면을 맞는다면 너무 쉽게 부셔질 겁니다.”

표단은 그의 말에 비죽이 웃으며 비숍을 집어 들어 깊이 찔러 넣었다.

“그럼 해봐.”
“……이거, 정말 골치 아픈 수로군요.”

표단은 기다려주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부관은 체스판 위로 고개를 숙이고 장고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순간 문득, 표단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갑작스러운 졸음을 느꼈다. 시야가 흐릿해지면서 눈꺼풀이 내려왔다. 그는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체스판에 정신을 집중하려 고개를 숙였는데, 그 순간 그는 잠들어버렸다.










2. 섬사람

“깜빡 졸았니?”

표단은 잠에서 깼다. 희미한 전등 빛에 흔들리는 부엌에서 어머니가 물을 마시고 있었다. 표단은 한참동안이나 의자에 앉아서 자기 손에 들린 수저를 바라보았다. 아직 밥이 따뜻했다.

“밥 먹다가 깜빡 졸다니, 많이 피곤하니? 이리 더우니 쉽게 피로해지겠지, 목이 마르네…….”

표단은 멍한 눈으로 한참동안이나 어머니의 얼굴, 주변, 그리고 자기 손을 쳐다보았다. 그는 바로 눈앞의 식탁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체스 말이 아닌 밥과 반찬이 놓여 있었다.

“……엄마? 나 긴 꿈을 꿨어. 아주 긴 꿈을.”
“긴 꿈?”

표단은 잠시 머리를 싸맸다. 희미한 전구가 자구 껌뻑였다. 미광은 곧 끊어질 듯이, 그러나 간신히 이어지면서 부엌을 밝히고 있었다.

“잘 모르겠어. 그냥, 40년 정도, 정확히 말하면 46년, 내가 해군이 되어서 함대의 함장이 되는…….”
“함장? 섬이니, 네가 배 꿈을 꾸는 게 뭐가 이상하겠니. 그런데 왜 이렇지, 엊그제부터 자꾸 목이 마르네. 피곤하고. 난 이만 가서 자야겠다.”

어머니는 커다란 물통 하나를 들고 안방으로 갔고, 표단은 식탁에 앉아 점점 식어가는 밥상머리 앞에서 지금 자기가 앉아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힘겹게 알아내고 있었다. 꿈? 태어 날 때부터, 학창 시절의 친구들, 그리고 해군사관학교입학과, 군생활의 훈련들, 그리고 배의 함장이 된 그 46여년의 인생이 모두 꿈이라고? 표단은 거실에 걸려 있는 거울로 다가가 자기 얼굴을 바라보았다. 스무 살의 앳된 얼굴은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분명 오늘 어머니와 밥 먹기 전에 보았던 자신의 얼굴이면서, 방금 전 까지 배의 유리창에 비춰지던 자신의 얼굴이 아니었다. 스물다섯 해의 모든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오르며, 다시 마흔 여섯 해의 기억들이 선명하게 기억나고 있었다. 머리가 아파왔다. 하지만 시간이 십분, 이십분이 지날수록 함장 표단의 기억은 정말 꿈이었던 듯, 빠른 속도로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섬을 포위하고, 부관과 나누었던 대화는 여전히 생생했다. 표단은 지금 겪는 망각이 덧없이 스러지는 꿈의 망각인지, 아니면 오래된 추억의 자연스러운 망각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혼란스러워 아무것도 정리 되지 않았다. 표단은 식탁에 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필사적으로 지금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머리 아픈 내가 누구인지 그것 하나만을 확실히 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멀리서 희미하게. 그녀는 목마르다 청하고 있었다. 물 컵에 물을 들고 가며, 표단은 그제야 떠올렸다. 이 병을.

방안에 널브러진 어머니는, 10분 전에 비해 너무 달라져 있었다. 표단의 머릿속에 병의 첫 희생자인 정씨 아저씨의 시체와, 작전회의에서 모니터링 한 낯모를 환자가 떠올랐다. 불 꺼진 방안에서 어머니는 표단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목이 마르구나. 표단아, 물, 물을 좀…….”

표단은 그녀에게 물을 건네주며 이부자리를 더듬고, 코로 방의 공기를 마셨다. 요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방안은 습해져 있었다. 그리고 쓰다듬어 본 어머니의 손- 벌써 갈라지고 있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물 한 컵을 다 마시고, 아니 입에 쏟아 붇고는 다시 신음했다.

“목이 말라. 목이 말라…….”

표단은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지만, 방금 입안으로 들어갔던 물이 그녀의 피부를 통해 다시 나오는 것을 보고는, 그냥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하지만 눈을 감으니 한번 내쉴 때 마다 더 심하게 갈라지는 어머니의 숨소리가 들렸다.

“예, 어머니. 물을 가져올게요. 물을, 많은 물을…….”

표단은 부엌에서 대야를 꺼내 물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안방에 가져다 놓고, 도망치듯 나왔다. 식탁에 앉은 그는 최대한 아무 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으려 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지금 방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물을 마시고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손으로 떠먹겠지만, 곧 얼굴을 박고 마시겠지. 한 대야의 물을 모두 마시는 데에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분량의 물이- 아니 더 많은 분량의 물이 순식간에 온 몸을 통해 빠져나올 것이다. 끊임없이 땀을 쏟아내면서도 피부는 갈라질 것이고, 갈색으로 변색되었다가 마지막엔 검은 색이 되리라. 혈액은 수분이 없어지면서 점점 더 진해지고, 끈적거리게 될 것이다. 탈수 증세는 멈추지 않는다. 혈액이 더 이상 흐를 수 없을 정도까지, 피부가 가루가 될 때까지, 뇌수조차 증발해 버릴 때 까지. 그건 빠르고, 죽음과 함께 끝난다. 처음 병의 증세를 보이고서, 길게는 사흘에서 짧게는 만 하루 정도……. 표단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안방으로 갔다. 그녀는 대야의 물을 거의 다 마시고 있었다. 하지만 몸은 몇 분 전 보다 훨씬 여위어 있었고, 방 안은 대야의 물을 그냥 쏟은 것처럼 물로 흥건했다. 그는 어머니를 안아 들고, 화장실로 가 욕조에 담갔다. 그리고 물을 최대한 틀었다. 물탱크의 물이 다 없어질 때 까지 물을 틀어 놓을 생각이었다. 적어도 하루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수도에 입을 대고 물을 벌컥 벌컥 마셔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온 몸에서 나오는 땀이 욕조를 채우고 있었다. 표단이 화장실에서 나와 지끈 거리는 머리를 감싸 쥘 때,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 보니, 초승이었다. 밤벌레 우는 소리가 달밑에서 발을 이루고, 그녀는 그 사이에 서 있었다. 보통 때라면 반가이 맞았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야.”
“내일, 어떻게 할 건지 궁금해서.”
“내일?”
“마을 회관에 모이라고 했잖아. 촌장님이. 정부가 대책발표를 약속했다고…….”
“아, 아아…….”

표단은 촌장의 말이 기억나며, 정부가 ‘어떤’ 대책을 취했는지도 함께 기억이 났다. 아직 섬은 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고, 폐쇄 되지도 않은 상태였다. 표단은 초승의 손을 부여잡았다. 그녀의 손은 크고 거칠었지만 따뜻했다.

“초승.”
“으, 응?”
“지금, 도망쳐. 이 섬에서. 내일이면 늦어. 오늘 당장, 지금 할머니를 모시고 도망쳐. 뭍으로 가.”
“뭍?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 섬은 병이 돌고 있고, 이제 내일이면 나가지 못하게 될 거야. 내 말을 믿어. 정부는 이 섬을 폐쇄 해 버릴 거야. 절대로,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그리고 병은 섬을 빠른 속도로 말려 죽여 버릴 것이고. 초승. 기회는 지금 이 순간뿐이야. 얼른, 가!”
“병……. 그렇지만 그래도 아직은……. 정부에서도 의사를 보내 줄 거고……. 섬이 폐쇄 된다니, 누가 그래?”
“누가 그랬냐고? …누가? 내가 봤어! 내가, 그 함대의 함장…….”
“함장? 표단아, 꿈꿨니?”
“꿈? 아, 그래 꿈……. 그래, 꿈을 꾸었지…….”

표단은 문득 참을 수 없을 정도의 피곤함을 느꼈다.

‘나는 꿈을 꾸었을 뿐이다.’

섬이 폐쇄되지 않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무리 그가 명령을 받고, 출 항식을 하고, 뱃전에서 선원들과 취임식을 한 기억이 생생하다 할지라도, 그건 다만 꿈일 수도 있었다. 표단은 말없이 문전에 기대었다. 여름 모기가 빛과 피에 모여 들어 그들의 주변을 맴돌았다. 초승이 자기 팔뚝에 앉은 모기를 때려잡고, 표단의 귓가에 윙윙대는 모기를 내쫒으며 물었다.  

  “게다가 그럼 넌 왜 안 떠나는데?”
  “나? 난…….”

그때까지도 꿈속에서 다 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표단은 그 질문을 받고서야 정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그제야 표단은 자기가 서 있는 곳이 섬이며, 무언가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동시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역시 깨달았다. 어머니의 신음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안 돼, 지금은……. 미안하다, 초승아. 그러면 내일 보자. 아니, 나를 믿는다면 지금 당장 탈출해. 내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제 그만 돌아가 줘. 난 너무 피곤해…….”

초승이 무언가 못 다한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는 것을 보았지만, 표단은 못 본 체 문을 닫았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서 나가보니, 초승이 아직 가지 않은 채 서 있었다. 표단은 그녀를 바라봤고, 초승은 땅을 바라보며 한참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한마디 했다.

“물 좀, 줄래?” 초승은 스스로의 말에 스스로 놀란 듯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아니,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냐. 그냥, 혜원이가 밤중에 일어나서 물을 달라는데 집에는 물이 없어서…….”
“……있어. 잠시만.”

혜원이는 초승의 나이차 많이 나는 여동생으로 이제 열 살이었다. 표단은 집에 들어가 작은 생수병 하나를 들고 나왔다.

“너무 작아. 좀 큰 거 없니?”

표단은 1.5리터짜리 생수병을 꺼내 주었다. 초승은 그것조차 조금 작게 느끼는 것 같았지만, 표단은 일부러 아는 체 하지 않았다. 그녀는 물을 들고 돌아가기 전에 몇 번이나 그에게 다짐했다.

“비밀이야.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마. 절대로, 절대로.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표단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친 동생처럼 여기던 혜원이였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이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 다만 또 누군가 물을 찾고 있다는 정도의 생각뿐이었다. 표단은 초승이 가자마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그곳에 계셨다. 누워 수도꼭지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을 끊임없이 벌컥 벌컥 들이키며. 거의 모든 물을 받아 마시고 있건만, 수도는 가득 차고 넘쳐흐르고 있었다. 어머니의 몸은 그 수조 위에 둥실 둥실 떠 있었다. 숯이 물에 뜨는 것처럼, 그 피부는 젖지 않았다. 표단은 욕조의 물을 조금 찍어 맛보았다. 아주 희미하게 짠 맛이 느껴졌다. 이렇게 아주 천천히 그녀의 몸속에 있는 모든 염분과 영양분이 배출 될 것이었다. 그녀를 욕조에 담가 놓은 것이 죽음을 늦추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물을 마시는 그녀의 입 안에 소금 한 움큼을 집어넣었다. 표단은 말없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식탁에 앉아, 팔에 얼굴을 묻었다.

밤은 깊어지고, 그는 날짜를 보며 꿈을 떠올렸다. 또 시간을 보았다. 새벽 3시였다. 달도 지고 해도 없는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다. 불 꺼진 집 안은 이미 그저 어둠의 한복판이었을 뿐이었다. 들리는 것은 물 쏟아지는 소리. 그리고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소용돌이 소리뿐이었다. 표단은 다시 화장실로 갔다. 발병 한지 몇 시간이 안 되었건만, 이미 어머니는 인간이 아니라 숯이었다. 검고 앙상하게 말라비틀어진 숯처럼 욕조에 둥실 둥실 떠서 입과 목구멍만을 움직이며 물을 들이켜고 있었다. 표단은 어머니를 번쩍 들어 안방으로 옮겼다. 물의 공급이 끊어지자마자 그녀가 목을 부여잡으며 신음하기 시작했다.

“ㅁ…….”

표단은 물을 주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안구의 수정체는 이미 말라붙어 눈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으나, 그런 만큼 깊은 곳을 바라보기 쉬웠다. 표단의 어금니가 조금 바스러졌다. 그는 베개를 꺼냈다. 그리고 허락을 구하듯 어머니를 바라보았고, 아마도 착각이었겠지만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표단은 어머니의 얼굴을 베개에 묻고, 눌렀다. 표단은 신음도 없는 적막 속에서 어머니를 죽일 때, 야밤에 불려 나가 섬의 폐쇄를 명받았다.








3. 섬사람



마을 회관은 이 섬사람들의 쉼터였다. 여름이면 나와 있는 나무 그늘 아래 평상에 나앉아 장기를 두거나 담소를 나누었고, 겨울이면 지하에 마련되어 있는 목욕탕에서 시원하게 목욕하고 나와 2층 회관에 둘려 앉아 고구마를 까먹었다. 그 회관은 그냥 널찍한 장판에 TV와 비디오 하나만 달랑 있는 곳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섬사람들의 휴게소가 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하루해가 뜨기도 전에 바다와 맞붙어, 해가 지고 나서야 대지에 발 딛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곳에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떠들었다.

그러나 오늘은 아무도 웃지 않았고, 아무도 떠들지 않았다. 올 수 있는 섬사람들은 다 모이니, 그리 넓지 않은 회관이 빼곡하게 가득 차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더웠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들의 눈은 모두 TV로 향해 있었다. 섬에 병이 돌고, 벌써 수많은 사람이 손도 못 쓰고 죽어나갔다. 최 씨와 그 마누라가 도시로 후송되었지만, 여전히 아무 연락도 없는 상태였고, 다만 오늘 정부대책이 있을 거란 이야기뿐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사람들은 새까만 숯처럼 말라 비틀어져서 숱하게 죽어나갔다. 단 하루 만에. 매일 매일 새로운 이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그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묵직하고 투박해 보이는 군용 보트가 섬에 도착했다. 병사는 방독면을 쓰고 무균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부둣가에 조그만 소포 하나를 놓아두고는, 다시 바다를 가로 질러 사라졌다.

소포는 비디오 테이프였다. 아무도 그것이 무어냐고 묻지 않았다. 모두들 불안이 말을 타고 튀어나올까봐 침묵했다. 그들은 침묵 속에서 비디오를 틀었다. 표단은 늦게 들어왔다. 하지만 모두가 비디오에 몰입하고 있어서 그가 들어오는 것도, 나가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표단은 문을 닫고 나와 부둣가에 앉았다.

그는 비디오 내용을 알고 있었다.

“조악한 다큐멘터리, 그러나 생생한. 그리고 무서운…….”

그 다큐멘터리는 일관된 감독이 없었다. 이곳저곳에서 장치된 CCTV들의 영상과, 끝까지 찍지 못한 이들의 개인 홈비디오의 영상들을 모아 놓고 짜깁기 한 것에 불과했다. 그 파편화된 영상들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찢겨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카메라를 들고 있던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첫 영상은, 병원이다. 새까맣게 변한 병자가 물을 달라고 헐떡이고 있는 장면인데, 그 영상이 끝날 때 까지 별 다른 조치가 취해지진 않았다. 그냥 환자가 원하는 대로 물을 줄 뿐이다. 그 다음에는 멀리서 찍은 장례식 굴뚝이다. 화장할 때 나오는 연기가 허공을 향해 뿜어지고 있었는데, 그 색이 보통 때와 같이 검은 색이 아니라 연초록의 푸르딩딩한 연기였다. 그 다음 부터의 영상은 딱히 볼 것이 없었다. 구도와 희생자만 다를 뿐, 모두 똑같았다. 미친 듯이 물을 마시는 환자, 검게 탄 나뭇가지들을 쌓아 놓은 듯 이곳저곳 서로 포개져서 죽어가는 환자들, 공원에 하나 있는 식수대에 달라붙어 있는 깡마른 군중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카메라가 비추는 텅 빈 거리. 그리고 다음 장면은 정부에 직접 찍은, 한 사람의 발병 시기부터 사망 시기까지의 기록 테이프를 빠르게 돌린 것이고, 친절하게 내레이션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영상은, 누군지도 모를 대변인이 나와 이런 이유로 섬 일대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섬을 폐쇄하기로 한다는 일방적 통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섬에서 불을 피우는 것 역시 엄금한다. 아마 이거였지.”

표단은 작전회의 시간에 저 테이프를 보았다. 아니, 꿈 속에서였던가? 무어래도 좋았다. 그는 그때의 공포를 피부로 기억하고 있었다. 거대한 누군가가 도시에서 사람만을 빼내어 말려 버린 것 같았다. 그 해안 도시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적어도 5만 명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단 이틀 만에 모든 인간이 절멸해버렸다. 첫 하루 정부는 그저 그런 전염병이라고 생각했지만, 미처 대책을 세우기도 전에 도시 하나가 ‘없어져’버리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 섬의 폐쇄와 긴급 계엄령은 엄밀한 조사 이후에 발동한 것이 아니었다. 정부는 우선 폐쇄를 명하고, 그 후 그 어떤 세균도 침투할 수 없는 복장의 조사단을 파견하여 병을 조사했다. 그러나 그들이 판단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저 다큐멘터리에 있는 내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의 섬사람에 비하여 한 가지 더 알게 된 사실이라면, 이 병으로 죽은 시체를 태울 경우에는 그 전염력이 몇 천배로 증폭된다는 점이었다. 그냥 놔 둘 경우에도 무서운 전염력이지만, 만약 그 시체를 태우기라도 하는 날에는, 보다시피 이틀 만에 도시 하나가 없어질 수 있었다. 불을 피우지 말라는 명력이 맨 마지막에 어설프게 추가 된 것은, 그것이 저 비디오가 만들어 진 후에 발견된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부관이 그 마을 출신이었지.’

표단이 아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정부는 필사적으로 백신을 만들려고 하고 있지만, 그 전에 이 병의 정체조차 알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표단은 바다를 응시했다. 적어도 이로 확실해진 셈이었다. 모든 것은 꿈이면서 꿈이 아니었다.

그의 곁에 창백하게 질린 초승이 와 앉았다.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에 앉아 있기만 하였으나, 그는 그녀의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웃으며 말했다.

“네 말이 맞았네.”
“떠나라고 했잖아.”
“혜원이가 병에 걸렸어.”
“…….”
“지금이라도 떠날까?”
“늦었어.”
“잠깐, 봐! 저 사람들은 그리 생각하는 것 같지 않은데?”

초승이 벌떡 일어났다. 부둣가를 따라 정신없이 달려가는 대여섯 명이 보였다. 그들은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자기들의 배에 시동을 걸었다. 단호한 사람들이었다. 성격이 급하다고 해야 할지, 결단력이 있다고 해야 할지, 섬에 남아 있는 그 무엇도 가져가지 않고 오로지 자기 몸만 빠져나가겠다고 결심한 자들이었다. 세 척의 배에 시동이 걸리고 있었다. 어차피 이 작은 섬, 배로 가면 1시간이면 뭍에 닿았다. 그 모습을 본 초승은 벌겋게 얼굴이 상기 돼서 그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저씨! 기다려요! 저도, 저도 태워줘요!”

배에 탄 사람들은 곁눈질로 초승을 바라보았지만, 짐짓 못 본 듯 출항 준비를 한층 더 서둘렀다. 표단이 그녀를 따라 잡았다. 초승은 표단의 품 안에서 발버둥 치면서 떠나는 배를 바라보았다. 표단은 말없이 그녀를 잡아 눌렀고, 배들은 떠나 버렸다. 배가 떠나는 것을 본 초승은 더 이상 무언가를 참지 못하고 모래사장에 쓰러져 오열을 터트렸다.

“죽었어……. 우린 모두 죽을꺼야…….”

그런 그녀의 옆에서 표단은 다만,

“저들 역시 죽을 거야.”

라고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표단은 출항 하자마자 뭍을 향해 나가는 통통배 3척을 침몰 시킨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해풍과 태양에 그을려 거무스름한 초승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작아져 가는 통통배들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들은 좋은 선택을 한 것일 수도 있었다. 약 한 시간 정도만 더 빨리 출발할 수 있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테이프를 전해준 순간부터, 이 섬에서 도망가기란 불가능했다. 표단은 바다 건너편을 응시할 때, 섬을 향해 출항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저 곳에 내가 있다.’

그리고 표단은 표단을 죽일 것이다.






4. 섬사람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수도에서 왔다는 몇몇 젊은이들이 섬에 들어와 산을 기웃거린 적이 있었다. 그들은 무슨 건설업체라고 했는데, 이곳의 자연풍경이 좋다며 그럴듯한 펜션 하나 세우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제들끼리 수군거리더니만, 순식간에 산을 사고, 배로 포클레인을 끌고 와 산을 중턱을 깎아내기 시작했다. 섬사람들은 기대라기보다는 호기심에 그 작업을 보았지만 공사가 얼마 진척되기도 전에 포클레인은 멈춰버렸고, 인부와 장비들 역시 모두 뭍으로 돌아가 버렸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본사가 부도가 났다고 하는데, 그 덕분에 섬에 남은 것은 흉물스러운 공사 터와, 터무니없이 깊이 파 놓은 구덩이 여러 개뿐이었다.

그리고 그 버려진 구덩이는 요즘 들어서 아주 잘 재활용되고 있었다. 죽어나가는 사람이 하도 많으니, 구덩이 파는 것도 큰일이었는데, 누군가 그 폐공사장의 구덩이들을 생각해 낸 것이다. 1년 동안 잡초가 우거졌긴 했지만 구덩이는 그대로 있었고, 그건 쓸 만한 공동 묘가 되 주었다.

표단이 이곳에 올라온 것은 이것으로 두 번째였다. 처음은 깊은 야밤에 어머니를 위함이었고, 지금은 타는 듯 한 정오에 혜원이를 위함이었다. 그녀의 집에 들어갔을때, 욕조 에는 혜원이었던 시체가 물 위에 둥둥 떠 있었고, 초승은 시체에 손도 대지 못하고 울고만 있었다. 방 구석의 할머니는 손자가 죽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각처럼 앉은 채 초승을 바라보고 있었다. 표단은 말없이 혜원이를 꺼내 들어 어깨에 들쳐 업고 산을 올랐고, 그녀는 울며 따라왔다.

구덩이에 이르러 거리낌 없이 시체를 버렸다. 시체는 수 없이 많은 검은 작대기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어머니 때에도 마찬가지였지만, 그것이 살아생전 밝은 웃음이 귀엽던 혜원이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병이 수분과 함께 혜원이라 부를 수 있는 무엇인가 역시 함께 빼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 이 섬에서 누구도 무덤 같은 사치를 부리지 않는지도 몰랐다. 구덩이에라도 버린다면 다행이지, 집 안에 챙겨줄 가족이 없는 이는 죽은 뒤에도 집 안에 내팽개쳐 있었다. 마을의 심씨 아저씨도 딸과 아내를 보내더니만 혼자가 되어 막상 그의 시체를 치워줄 사람이 없었다. 그는 그저 방안에 썩지도 않고 굴러다니고 있었다. 초승이 곁으로 와 구덩이를 바라보았다.

“혜원이는…….”
“저거.”

표단은 손가락으로 가리켰지만, 초승은 여전히 찾지 못했다. 실제로 표단조차 사흘 전에 버렸던 어머니의 시체가 어디 있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으니……. 표단이 덧붙였다.

“저기, 제일 작은 거.”

가장 위쪽에 쌓여 있는 가장 작은 막대기. 초승은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가 견디지 못하고 뒤를 돌아 내달렸다. 표단은 천천히 그녀의 뒤를 쫓았다. 산 중턱에서 얼마 안 내려가니 그녀가 앉아 울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그녀 곁에 앉아 점점 더 심하게 떨리는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상한 일이다. 어째서 그 작은 떨림은 영혼까지 함께 뒤 흔드는 것일까? 겁이나 동생의 시체조차 만지지 못했으면서, 또 이렇게 동생을 잃은 슬픔에 우는데? 표단은 꿈까지 합쳐 80평생을 살아오면서도 언제나 이런 인간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러면서 매료되곤 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마음의 울림도 이해할 수 없었다. 초승의 떨림이 조금씩 잦아들고, 그녀가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담배 좀…….”

표단은 담배를 꺼내 그녀의 입에 물려주고, 지포라이터로 불까지 붙여주었다. 그녀는 어색하게 입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는데, 그녀만큼 맛없이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없었다. 연기가 표단 쪽으로 오자, 그는 조금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그가 담배와 라이터를 항상 들고 다니는 것은 다만 초승 때문이었고, 초승은 표단에게 받는 담배가 아니라면 피우지 않았다. 그녀는 담배를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그건 아주 오래전부터 그들 사이에 맺어진 계약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한참동안 그렇게 말없이 앉아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그녀였다.

“……촌장님은 지금 막 떠나신대.”
“백기를 올리고 말이지.”
“나도 가려고 했는데, 못 갔어. 나는 혜원이를 만질 용기도 버릴 용기도 없었어. 지금 쯤 출발했을 것 같아. ……그들이 항복을 받아줄까?”

그는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태양빛에 번뜩이며, 뭍과 섬을 날카롭게 가르고 있었다. 며칠 전만 해도 바다는 섬과 뭍을 이어주는 다리였는데, 함대가 자리를 잡으니 칼이 되었다. 그리고 그 함대의 함장이 바로 자신이었다. 그래서 표단은 대답할 수 있었다.

“아니.”
“하, 하지만…….”
“그들은 죽을 거야.”
“그리고 사람들이 이 선생이 오늘 새벽에 몰래 도망친대.”
“그들도 죽을 거야.”
“만약 이 선생님이 출발하는 게 정말이라면, 난 오늘 밤 갈 거야. 할머니랑 같이…….”
“가지 마. 죽을 거야.”
“넌 할 줄 아는 말이 그저 죽는다, 죽는다, 그것 밖에 없니! 그럼 어쩌란 말이야! 여기서 그냥 죽을까? 표단아, 혜원이가 죽었어! 혜원이가. 그런데 나는 살고 싶어! 난 살고 싶단 말…이야…….”

초승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다시 울음을 터트렸고. 표단은 다시 바다만을 바라보았다. 저 산 아래에서는 지금 백기를 단 배가 표단을 향해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고, 밤에는  이 선생이 출발할 것이다. 표단은 적어도 백기를 올린 배가 어떻게 침몰했는지 기억한다. 그는 가슴을 쥐어뜯고 싶었다. 촌장은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처럼 표단을 귀여워 해 준 사람이었고, 이 선생 역시 섬 유일의 선생으로 표단에게 아버지 대신인 존재였다. 당장이라도 달려 가 그들을 부여잡고 말리고 싶었다. 특히 백기를 올리고 출발하는 배에게 당장 내려가서 외치고 싶었다. 당장 그 미친 짓을 그만 두라고. 확성기로 항복이라는 말을 할 시간도 없을 거라고. 하지만 그래서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고, 모두 죽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되는 것인가…….’

표단은 그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이를 알았다. 그들은 그의 이웃이었다. 그는 그들이 어떤 성격이고, 어떤 사람이며, 자신에게 어떻게 대했는지도 다 기억했다. 그리고 배를 침몰시킨 순간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그는 저 배를 향해 발사 명령을 내리기 전에, 저 얼굴들을 보았었다. 그때는 저 들이 누구인지 몰랐었으나, 지금은 알고 있다. 꿈속의 낯선 이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순간처럼, 그는 자신이 그때 죽였던 이가 자신의 이웃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표단은 여전히 그 일을 반복할 것이었다.

“가지 마. 다 죽을 거야.”

그는 그저 그 말 외엔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말없이 산을 내려가는 것을 말릴 수도 없었다. 다만 그녀가 남기고 난 담배꽁초에 불을 완전히 꺼주는 것 외에는. 그녀가 사라지고, 표단은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표단은 그 누구보다 바다 앞에 떠 있는 함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함대의 레이더망은 이 섬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정부는 그로도 불안하여 이동식 레이더까지 해변에 설치해 놓았다. 작은 통통배 보다 큰 것은 무엇이든 저 바다 위에 떠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뗏목이나 드럼통 등, 부유물이 남는데, 뗏목은 뭍으로 가는 해류가 필요했다. 하지만 섬에서 뭍으로 향하는 해류는 오전 3시부터 5시까지, 딱 두 시간만 생겼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난바다로 흩어진다. 표단은 이 모든 것을 어렸을 때부터, 작전 회의 때 상세하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뭍과 섬 사이의 해협을 모두 통제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선택한 사람도, 어렸을 때부터 통통배를 타고 섬 주변에서 고기를 잡으며 온 몸으로 해류를 느끼던 사람도 표단이었다.

“덥군…….”

뙤약볕이 대기를 으그러뜨리고 있었다. 솟아오르는 아지랑이에 해송도 모래언덕도 뒤섞이며 춤을 추고 있었다. 표단은 참을 수 없는 더위에 땀을 흘리며, 사방에 드리워진 나무 그림자에서 시체들을 연상했다. 이곳저곳 삐죽 솟아 나온 검은 시체들, 구덩이에 서로 덤불처럼 엉켜 있던 시체들. 혜연이와 어머니가 구분되지 않았다. 그들도 이 더위 속에서 흔들거리며 서로 섞이고 있을까? 수분 한 방울 없이 메마른 그들은 이 태양 볕에도 타지 않을까.

그 순간, 표단이 걸음을 멈췄다.

“그거라면…….”

표단은 섬에서 탈출할 방법을 떠올린 그 순간, 백기를 들고 다가오는 어리석은 배를 향해 발포명령을 내렸다. 배는 침몰했다.









5. 섬사람





섬의 밤은 시끄럽고 더웠다. 풀벌레와 매미도 초승처럼 잠을 잊었는지 끊임없이 울고 있었다. 정작 초승은 자기 발걸음소리에도 깜짝 깜짝 놀랄 정도로 조용히 걷고 있는데 말이다. 그녀는 최대한 빨리 부둣가로 가려고 했으나, 짐이 무거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의 등 뒤에는 조그마한 괘나리 봇짐 하나가 얹혀 있었지만 그건 가벼웠고, 무거운 것은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할머니였다. 안방구석에서 할머니가 고는 시끄러운 코골이 소리가 도저히 그녀의 귓가에서 떠나질 않고 있었다. 이미 집은 먼 어둠에 가려져 보이질 않는데, 그 소리는 시끄러운 밤벌레 소리 안 들릴 정도로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등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할머니는 분명 그녀의 등 뒤에 따라오며 코를 골고 있었다.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그녀는 애써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 선생은 새벽 3시에 출발한다 했다. 아직 두시지만, 더 이상 늦으면 자리가 없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하며 그저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그녀였으니 갑자기 표단이 그녀를 불렀을 때 귀신이라도 본 듯 소스라치게 놀라며 엉덩방아를 찐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그녀가 새된 비명을 질렀는데도, 표단은 놀라지도 않았다.

“어디가.”

표단은 처음 물었던 질문을 다시 반복했다. 초승의 얼굴은 어찌나 새하얗게 질렸던지 달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희미했고, 부끄러웠다.

“그냥 산책…….”
“짐을 지고, 땀을 흘리며, 새벽 2시에, 부둣가를 향해, 그렇게 조심조심?”
“나, 난…….”
“가지 마.”

표단은 초승을 일으켜 주었으나, 그녀의 길을 막고 있었다. 달빛에 반사되는 그의 눈매는 단호했다. 그 눈매를 보자, 그녀는 문득 억울함이 가슴 속에서 북받쳐 올라 소리쳤다.

“비켜! 네가 뭔데!”
“가면 안 돼.”
“너도 할머니랑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그 분은 뭐라고 하셨는데.”
“오늘 저녁 이 선생님이 오셨어. 그리고 새벽 3시에 부둣가로 나오라고 하셨지. 배가 떠난다고 했어. 조용한 배가, 그래서 뭍으로 갈 수 있는 배가. 오늘 백기를 올리고 바다로 나간 촌장님은 바다 밑바닥에 있고, 이제 방법은 그것 밖에 없다고. 살 수 있는 방법은. 그러니까 할머니는 그냥 소리 없이 웃으면서 이 선생님에게 말했지.

‘나가면, 안 죽나?’

이 선생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집을 나섰어. 떠나기 전에 선생님은 내 손을 잡고 말하셨지. 새벽 3시라고. 혼자라도 나오라고……. 난 그럴 수 없다고 말했어. 나, 난 분명 그럴 수 없다고…….”

초승의 할머니는 이 섬에서 가장 나이 많은 노파였는데, 아무도 그녀의 젊은 시절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다. 초승조차도 할머니가 과연 할머니인지, 증조할머니인지, 고조할머니인지 알지 못했다. 그녀의 말은 옳았다. 그녀로서 섬에서 죽으나 뭍에서 죽으나,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었다. 표단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중얼 거렸다.

“안 나가면 죽지 않나…….”

초승은 치맛자락을 움켜잡으면서 다급하게 말했다.

“그렇지? 하, 할머니는 오래 사셨어! 그렇지, 표단아. 그렇지? 할머니는 오래 사셨어! 하지만 난……. 할머니는 안 간다고, 다 죽을 텐데……. 나, 난……. 모두 새카맣게……. 난 혼자라도…….”

표단은 그녀가 우는가 싶었지만, 창백한 달빛에 비치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 눈물은 없었다. 푹 숙인 고개를 통해 볼 수 있는 건 떨리고 있는 그녀의 속눈썹이었다. 이상하리만치 길었다. 표단은 그런 그녀에게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는 착하다. 선량하며, 잘 웃고, 다정하며, 할머니를 정성을 다해 모신다. 섬사람들은 사교성 없고 항상 겉도는 표단과는 달리 초승에 대해서는 입이 닳도록 칭찬하곤 했었다. 그녀의 활발한 웃음과 함께 건네는 호의와 친절은 과연 그 누구라도 거절할 수 없었다. 하지만 표단은 예전부터 어렴풋 짐작하고 있었으며, 알고 있었다. 초승의 선함은 소심함에 약간의 지혜를 더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초승이 딱히 지혜로운 아이는 아니었다. 어쩌면 보통사람 보다 조금 못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보통 사람 보다 더 겁이 많았다. 그뿐이었다. 초승 스스로도 자신의 선함을 믿고 있었다. 사실 그것을 진짜 선함과 구분하기는 어렵고, 실제로도 거의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똑똑한 겁쟁이들이 어떤 상황에 닥쳤을때 놀라울 정도로 대범한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굳이 악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절대로 선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그런 종류의 일들을……. 표단이 생각하기에 그건 다만 조금 인간다워 질뿐이다. 그는 그런 초승을 익히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지금 고개 숙이고 있는 초승을 탓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말했다.

“가지 마.”
“너도 내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거야? 너도?”
“살아있고,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 하나는 확실해.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알아. 초승아. 난 네가 상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혼란스러워. 이런 상황에서 난 오로지 그거 하나만을 부여잡고 움직이고 있어. 다른 건 생각하지 않고 있지 하지만 나는 이 섬사람 다 죽어도 오로지 너만은 같이 살고 싶다. 잘 들어봐, 밤의 배는 침몰할거야. 엔진 달린 것 그 무엇도, 뗏목 이상 큰 그 무엇도 바다를 건널 수 없어. 조용하던, 시끄럽던, 아무것도 상관없지. 내일 나랑 같이 가자. 내 생각은 간단해. 매일 3시가 되면 섬에서 뭍으로 향하는 해류가 생기지. 거기에 아주 작은 뗏목- 아니, 뗏목이랄 것도 없지. 그저 작은 부유물을 해류에 띄우고 그곳에 매달려만 있으면 되는 거야. 조용히 뭍으로 향하게 될 거야. 너랑 나랑, 다만 그렇게 내일 낮에 탈출하자.”
“내일 낮…….”
“아마, 별 다른 어려움은 없을 거야. 그리고 이미 뗏목을 만들어 놨으니까.”
“이 선생이 네가 미친놈처럼 전기톱을 들고 섬의 나무를 벤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 때문이었구나.”
“그래. 자, 집으로 돌아가. 내가 내일 부를 테니.”

그러나 초승은 쉬이 결정내리지 못하고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저 멀리 아래에서 희미하게 사람 소리와 배의 엔진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팽팽하던 천칭 한쪽에 놓인 깃털 하나와 같았다. 초승은 생각하다기보다는 도리어 반사적으로 부둣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두워 길이 잘 보이지 않을 텐데도 거침없는 그 발걸음이 놀란 새끼사슴 같이 빨랐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표단은 씹어뱉듯 투덜거리고는 그녀를 쫓아 내달렸다. 곧 방파제 위에서 배를 바라보며 얼어붙은 듯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6. 부관




“함장님 말이 맞았군.”

고무보트는 파도 뒤에 숨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부관은 방독면에 장착된 야시경을 조절하여 어둠 속에 가려진 배를 응시했다. 보균자들은 벌써 30분이 지나도록 소란만 떨 뿐 배에 다 타지도 못하고 있었다. 배는 10여명이 타도 북적거리는 작은 통통배인데 해변에 모인 이는 어림잡아도 오십여 명이 넘어 보였다. 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은 사람들의 실루엣이었고, 그 누구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아우성은 조용한 밤을 거칠게 찢고 있었다. 거칠게 쉬는 숨소리, 불안한 눈동자들. 서로 팔과 다리가 얽혀 있는데도 거침없이 다른 사람을 떠밀고, 팽개치면서 배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누구든지 그 작은 배에 들어가기만 하면 최대한 구석에 몸을 밀착시키고, 아무거나 온 힘을 다해 부둥켜안았다.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어머니들은 한 손으로는 아이의 입을 막고, 한 손으로는 사람을 밀치며 공간을 만들고, 한 손으로는 배 난간을 붙들고, 한 손으로는 밀려오는 사람들에게서 아이를 지키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이 이를 악문 침묵 속에서 일어났다. 결국에서 배는 배라기보다는 삼십 여명이 전부 한 덩어리로 합쳐져 있는 거대한 덩어리가 되었다. 아직 해변에 몇 명이 남아 있어서 소리 없이 악다구니를 쓰고 있었지만, 그곳에 바늘 하나라도 더 들어갈 수 있을 성 싶지 않았다. 배는 너무 무거워 흘수선까지 가라 앉아 있었다.

“그래도 총알은 들어가겠지.”

배는 사람을 다 태우고도 속 터질 정도로 출발을 안했다. 사격준비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  저 배가 출발하는 순간 곧바로 공격하라는 것이 함장의 명령이었지만, 그는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증오로 지금 이 순간이라도 저 배 전체를 날려 버리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한 대를 맞으면 세대를 때려야 직성이 풀리던 그였다. 그에게 있어 증오를 동반하지 않은 슬픔 따윈 없었다. 병이 어머니를 앗아갔다면, 병을 증오해야했다. 그는 이 섬의 폐쇄 작전에 필사적으로 자원했었다. 그는 병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을 살리겠단 생각도 없었고, 심지어 어머니에 대한 생각조차 희미했다. 그의 가슴 속을 채우고 있는 것은 ‘보균자’들에 대한 증오, 더 자세하게는 바로 눈앞에 있는 저 배에 대한 잔인한 증오였다. 확실히 증오는 슬픔에 비하면 차라리 흥겹다.

드디어 배의 엔진소리가 밤바다를 모두 깨울 듯 커지고, 배가 출항했다. 배는 어두운 바다로, 삶이 기다리고 있는 뭍을 향해서 나아갔다. 그리고 그 순간 부관도 움직였다. 그는 부하들에게 속삭였다.

“작전을 변경한다. 내가 K3로 최대한 빨리 보균자를 섬멸할테니, 김중사와 이하사가 배에 올라 남은 보균자를 처리하고 하고, 남은 병력은 곧바로 해변에 상륙하여 남은 보균자들을 소탕한다.”

표단은 부관의 성격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임무를 맡기곤 했지만, 완벽한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의 증오는 크고 무서웠으며, 눈이 멀어 있었다. 그의 명령은 어떤 항명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표단과 비슷했지만, 훨씬 더 포악하다는 점에서는 달랐다. 부하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최 대령님, 저희는 섬을 탈출한 보균자만을……. 섬에 남아 있으면 원칙적으로 국민 아닙니까? 함장님 명령은 분명…….”
“작전 변경이다. 저들은 배를 타지 않은 게 아니라, 배를 못 탄 것이다. 마을 안 까지 들어가지는 않더라도 탈주를 시도하려 한 해변에 있는 이들은 모두 소탕한다. 항명할 생각인가?”
“아닙니다.”
“가자.”

그들은 새카만 밤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목을 물어뜯는 흑표 같았다. 작은 배에 뒤엉켜 하나의 살덩어리가 된 이들은 기관총 소리가 들리고 총탄이 쏟아지기 전까지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 눈앞에 놓인 다른 사람의 장딴지 외에는 볼 수 없었다. 부관은 훌륭했다. 파도에 흔들리는 발치, 무거운 K3의 반동, 거추장스러운 무균복, 답답한 방독면, 짙은 어둠과 야시경 때문에 수십 배로 확대되어 눈을 어지럽히는 총열의 불꽃 등 악조건 속에서도 부관의 솜씨는 노련했다. 요란한 비명소리 바다를 찢고, 파도 소리를 짓눌렀지만 그것도 순간이었다. 비명은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던 배는 총알을 말없이 모두 받아들이는 더미로 변했다. 가끔 가다가 들리는 비명 소리를 제외하고는 총알이 살 속에 막히는 퍽퍽 소리 밖에 나지 않게 되는데 걸린 시간은 채 1분이 넘지 않았다. 부관이 명했다.

“올라가. 침몰 시켜라. 우린 뭍으로 간다. 그리고 절대로 엔진부분에 총을 쏘지 말고. 저들은 모두 보균자다. 조그만 불꽃이라도 닿았다가는 섬은 물론이고 배에 있는 이들까지 전멸 할 수 있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폭탄이다. 아주 위험한. 그리고 상륙조는 나와 함께 움직여 해안의 보균자들을 소탕한다. 움직여!”
“옛!"

간헐적인 총 소리와 간헐적인 비명소리를 뒤로 하고, 그들은 아직 상황파악을 하지 못해 멍하니 서 있는 이들이 있는 해변에 배를 댔다. 물론, 부관의 총열이 가장 먼저 불을 뿜었다. 얼어붙은 정신을 깨는 데에는 핏방울이 최고인지, 바로 곁에서 이웃이 총에 맞아 쓰러지고서야 도민들은 천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에는 표단과 초승도 있었다.

부관은 해변에 내리기도 전에 그곳에 서 있던 보균자들의 위치와 숫자를 전부 파악하고 있었고, 제방 위에 있는 두 명의 실루엣도 당연히 인지하고 있었다. 야시경으로 보이는 기묘한 명암의 세계에서 그들은 유독 특이한 것은 아니었다. 부관은 그들도 염두에 두고 차분하게 근처에 있는 한명씩 사살할 때, 그들은 서로 함께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이라도 한 듯 양 갈래로 찢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호오…….”

여자는 정신없이 도망가는 듯하였으나, 남자는 조금씩 뒤를 돌아보면서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마을 쪽을 향해 도망가는 것이었다. 마치 유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여자 쪽으로 병사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부관이 흥미롭게 본 것은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 침착하게 꾀를 짜냈다는 것인데,

“어차피 새들도 쓰는 방법이지.” 부관은 무전기를 통해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저기 도망가는 여자를 노려라! 나는 도망간 놈을 잡고 오겠다.”

어차피 해변은 벌써 거의 청소가 되어가고 있었고, 부관은 방금 전에 도망간 남자를 쫓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그에게는 단순한 변명 거리가 필요했을 수도 있었다. 마을로 들어가기 위한 변명거리가. 어차피 무균복에 방독면을 입은 채로 빠르게 달릴 수는 없었고, 집들 가득한 곳으로 도망가 버린 얼굴도 모르는 사내를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찾지 못한다면, 그냥 아무나 쏘면 되는 것이다. 보균자를, 병을 품에 안고 있는 자들을. 부관은 그리 빠르게 사내의 뒤를 쫓지 않았다.

‘숨어라…….’

충분히 시간을 주듯……. 그런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예상 밖의 광경이었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떡 하니 보라는 듯 거리낌 없이 길 한 복판에 당당하게 버티고 부관을 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당당하였는지, 부관이 잠시 당황하여 총을 겨누지 못할 정도였다. 정신을 차린 부관이 총을 들어 조준하였을 때, 그는 재빠르게 옆집으로 들어갔다. 너무 노골적인 유인이었다. 하지만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쥐를 몰아가는 족제비처럼 증오의 쾌감으로 부글거리던 가슴은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어차피 녀석은 그냥 도민이고, 무장도 빈약하다. 최대한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봐야 문 옆에 숨어 식칼을 들고 덤비는 것 정도의 얕은 수 뿐일 것이었다. 하지만,

‘이 더러운 느낌, 분명 어디선가…….’

  부관은 문을 박차고 들어가 재빨리 좌우를 훑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집은 무서우리만치 조용하고 또 어두웠다. 문 바깥에서는 별빛 아래에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데,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숨 막힐 듯 내려 앉아 있었다. 방독면 때문에 거친 호흡이 훨씬 더 힘들게 느껴졌다. 그때, 밝은 빛이 부관의 눈에서 번쩍였다.

“음!”

어두운 한 구석, 문 틈 사이로 빛이 새나온 것이었다. 눈이 멀 정도로 밝은 빛은 아니었지만, 야시경으로 보기에는 불편한 정도의 빛이었다. 부관은 야시경을 껐고,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보는 집안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새카맸다. 문 건너편에서 아주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질 더러운 녀석. 누가 항명을 허락한댔나, 부관.”
“……함장님?”
“당장 총을 내려놓고, 모든 인원을 철수해서 퇴각해. 분명 너희에게 내려진 명령은 탈주자만을 처리하는 거였지, 이렇게 마을 까지 들어오는 게 아니었을 텐데.”
“아니, 그럴 리가 없지. 함장님은 지금 체스판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실 텐데……. 넌 누구냐!”

부관은 불빛과 목소리가 새어나오는 방문을 박찼다. 그리고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너…….”
“손도 까딱하지 마.”

그곳은 주방이었다. 문 밖으로 새어나오던 불빛은 가스레인지 불빛이었다. 주방에 있는 렌지에는 네 곳 모두 불이 켜진 채 힘차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서 함장과 너무 흡사하게 닮은 젊은이가 무언가를 꼭 끌어안고 서 있었다. 커다란 마네킹을 뒤에서 안은 것 같은 자세로. 화톳불 같은 가스불꽃은 이글거리면서 ‘그 것’의 모습에 짙은 명암을 던져주고 있었다. 표단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인사해. 심 씨 아저씨야.”
“이 미친…….”
“조심해. 쏠 생각이야?”

표단은 새까맣게 말라붙은 미라의 손목을 잡고 천천히 가스레인지 불꽃 위로 옮겼다. 부관의 숨 멎는 소리가 났다. 표단이 노래 부르듯 흥얼거렸다.

“총알이 몸에 박히면, 난 죽어요. 죽으면 힘이 없어져요. 힘이 없어지면 팔이 떨어져요. 숯 보다 잘 타는 이 손목이 가스레인지에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네가 지금 뭘 하는지 알고 있나? 싹 다 죽는다. 싹 다!”
“제발, 말 많이 하지 마. 나는 약해서, 벌써부터 손에 힘이 빠진다고……. 이렇게.” 표단은 시체의 손목을 놓아버렸고, 손목은 불꽃을 향해 곧바로 떨어졌다. 부관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표단은 시체가 불꽃에 닿기 전에 잡아 올렸다. “거봐.”
“아, 알았다. 알았어.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

부관은 조심스레 총을 내려놓았다. 표단이 말했다.

“좋아. 그리고 이건 명령이 아니라 충고인데, 어서 무전기로 사람들을 부르는 게 좋을 거야. 해변에서 여자를 따라간 병사들도, 배에 남아 있는 병사들도, 그리고 저 멀리에 떠 있는 고속정도. 왜냐하면……. 아, 이제야 냄새가 나네. 이 냄새 안나? 방독면을 쓰고 있어서 그런가?”
“냄새?”
“타는 냄새.”
“……뭐?”
“옆집에 불을 질렀었거든. 그런데 네가 너무 빨리 와서 그 집에도 이런 시체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단 말이지. 마을 사람들은 네가 워낙 난리를 치는 바람에 모두 산 쪽으로 도망갔으니, 누가 불을 끄겠어? 의심나면 확인해보던지.”

부관은 생각이고 뭐고 할 겨를도 없이 집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바로 옆집에 불이 붙어 타오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화염은 벽 한쪽을 잡아먹으면서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

“…이 미친 새끼…….” 부관은 무전기로 급히 긴급 상황을 알리고 불난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표단은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집에서 나와 불속에서 정신없이 시체를 찾고 있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자리를 옮겼다. 벌써 병사들이 이곳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으나 정신없는 그들을 피해 마을을 빠져나가기는 수월했다. 해안 모래 언덕에서 조금 더 내려가자, 웅크려 떨고 있는 초승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말도 못할 정도로 겁에 질려 있긴 했지만 다행이 상처는 없는 것 같았다. 표단은 초승을 부축했다. 우선은 안전한 곳으로 가야했다. 그는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밤의 배가 출발하기도 전에 배는 와서 기다렸다. 언제 어디서 출발할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듯. ‘저 놈’이 내가 아는 것을 안단 말일까? 만약 그렇다면 분명 내가 이곳에 있는 것도 아는 것일까? 난 ‘그’를 모르는데, ‘그’는 날 아는 건가? 그러면 계획을…….’

그 순간, 표단은 갑작스레 느껴지는 뜨거운 통증에 놀랐다. 손끝을 바라보니 화상자국이 나있었다. 바로 방금 불에 덴 것처럼. 근처에 불은 커녕 뜨거운 것도 없었다. 표단은 무엇에라도 홀린 듯 모래사장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화염으로 붉게 물들어 있는 마을을 쳐다보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바로 그가 불을 지른 집을 바라보았다.

불꽃은 집을 잡아먹고 표단의 마음까지 잡아먹고 있었다. 심장은 터질 듯 두근거렸고, 온 몸의 피가 아주 뜨겁게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온 몸이 너무 뜨거워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그 불꽃이, 혹은 불꽃 속의 무언가가 표단을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 끌림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고, 그래서 두려웠다. 표단은 단 하나 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설마…….”

초승이 떨리는 손으로 그의 옷깃을 잡아끌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뛰쳐나갔을 것이다. 그는 끓어오르는 가슴을 억지로 누르며, 모래언덕에서 내려왔다. 그는 초승에게, 그러나 너무나도 작아서 스스로에게도 별로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계획을 바꿔야겠어. 나는 내가 아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는 마지막으로 모래 언덕 너머, 불꽃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곳에는 분명 그가 있었다. 표단이 표단을 바라 볼 때, 표단도 표단을 바라봤다.







  7. 함장




“함장님 차롑니다. 아무리 제가 우스워도, 게임 중에 조시다니요.”

잠에서 깬 표단은 한참동안 체스판을 노려보았다.

“비숍이 그대로 있구나.”
“예. 마지막에 비숍을 깊이 쑤셔 넣으셨죠.”
“……내가 얼마나 잔거지?”
“잤다고 하기보다는 그냥 깜빡 조셨습니다. 30초정도? 제가 한참동안 생각할 때에도 함장님은 눈을 뜨고 계셨으니까요.”
“꿈을, 긴 꿈을 꾸었어.”
“꿈을요? 그 잠깐 동안? 하하, 얼마나 긴 꿈을 꾸셨습니까?”
“……한 25년 정도.”
“정말 길군요.”

허공에 있는 무엇을 바라보는 듯, 표단의 시선은 한참동안이나 공허하게 허공을 헤맸다. 그러다가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지금, 몇 시지?”
“23시 05분입니다.”
   “……너무 늦었군. 아니, 너무 이른가. 부관. 미안하지만 물러나보게나. 그리고 불침번에게, 한시 반 쯤 깨워달라고 하고. 그때 내가 부를 걸세. 가서 몇 시간이라도 자 두게.”
   “예.”


부관은 얼떨떨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충실히 명령에 따라 물러갔다. 그가 나가고, 표단은 창밖을 바라봤다. 어둠에 가려진 섬은 보이질 않았다. 꿈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이것저것 많이 노력하고 증명도 했지만, 그 역시 꿈속에서 한 것에 불과했다. 정말 그것들은 꿈, 그저 놀랍도록 생생하고 소름 돋으리만치 길고 긴, 스물다섯해의 꿈에 불과했던가? 처음 섬의 초등학교를 들어갔을 때, 처음 초승을 울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고등학교 졸업식, 병에 걸린 어머니와, 그 숨을 틀어막은 베게의 감촉, 초승의 떨림, 부관을 소탕, 내가 품에 껴안고 부관을 위협했던 심 씨의 시체, 그리고 어둠을 밝히는 불빛과, 가슴을 휘어잡던 그 끌림, 그리고 마지막으로 잠을 청했던 초승의 방…….

‘꿈? 그 모든 것들이?’

머릿속과 가슴 속에서 벌레 떼가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결국 모든 것을 다시 증명할 수밖에 없었다. 3시에, 그 밤의 배가 정말 있다면 그것은 꿈이 아니리라. 하지만 꿈 때문에 전 병력을 깨워 배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결국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작은 수의 인원을 고무보트에 태워 보내는 것뿐이었다.

표단은 체스판을 다시 배치하고는 대국을 다시 시작했다. 대국 상대는 없었다. 표단이 혼자 두 편의 기물들을 모두 움직이며 게임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혼자 두는 체스는 상대방이 있는 경우와 판이하게 다르다. 한수를 둘 때 마다 최선을 다해 전략을 짜면, 바로 그 전략을 파괴하기 위해 절묘한 한 수를 둔다. 한 수 한 수가 남기는 사고의 잔재들이 계속 모여 들어 정말로 있는 상대방을 만든다. 그 실력이 높건 낮건 상관없이 자신의 생각을 모두 꿰뚫어보는 상대를. 그리고 모든 전략이 보이는 상대를. 표단은 반칙을 하지 않았다. 백을 둘 때에는 흑을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흑을 둘 때는 백을 이기기 위해 방금 전에 짜냈던 전략을 부쉈다. 체스는 몹시 더디게 진행되었다.

  체스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어느새 한시 반이 되었다. 부관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 그는 함장의 갑작스러운 명령에 의아함을 숨기지 않았지만, 표단이 정확하게 몇 시에, 바로 어디에서 보균자들이 탈주를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명하니,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긴급대기조 다섯 명과 함께, 부관이 고무보트를 타고 출발했다. 출발하기 전, 표단은 부관에게 몇 번이고 당부를 했다.

“우리는 오로지 섬에서 탈출한 보균자만을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 절대로 섬 안에 있는 이를 죽여서는 안 돼. 적어도 그들은 아직도 우리나라 국민이다. 이 말 명심하게나. 절대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쳐 과잉진압을 하려 하지 말도록. 알겠나?”
“옛!”
“…과연, 내가 본 것이 변할 수 없는 미래인지, 아니면 뭣도 아닌 꿈에 불과했는지…….”
“예?”
“아니다. 출동해라.”

부관이 가고, 시간이 흘렀다. 표단은 계속 체스를 뒀다. 체스가 결말이 날 때 쯤, 그는 불침번을 불러 명령했다.

“갑판으로 가서, 섬에서 불꽃이 일어나면 곧바로 긴급 상황 발동하고, 곧바로 전 함선에게 섬으로 향하게 하라. 그리고 소화도구를 확실히 챙기고.”
“예!”
“……하지만, 불이 안날 수도 있어. 그러니 미리 준비는 하되, 사람들을 깨우지는 마.”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배에 붉은 비상등이 번쩍이며 사이렌이 울리는 것을 들을 때, 표단은 가슴 한 구석 작게 피어오르는 희망이 꺼지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어야했다. 배는 소란스럽지 않고 차분하게 섬으로 다가갔고, 병사들은 상륙하여 소화에 나섰다. 표단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섬사람들을 건드리지 말라고 명령하였고, 스스로 섬에 내려섰다. 방독면과 무균복을 입지 않은 그를 보고 병사들을 기겁을 하며 말렸지만, 표단은 듣지 않았다.

시체로 가득한 해변을 가로 질러, 그는 불타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 소란스러웠다. 모두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불이 그 중 가장 시끄럽게 소리치고 있었는데, 똑같이 생긴 병사들이 뿌려대는 물들과 만날 때 마다 시끄러운 단말마를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불이 침묵해도 물이라고 딱히 조용한 것은 아니었다. 표단은 불과 물로 얼룩져 무너지기 직전인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병사들은 막 탈진한 부관을 끌어내고 있다가, 맨 몸으로 들어가는 표단을 보고 소란을 피웠다. 하지만 그는 모든 소란을 뒤로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발 딛고 있는 공간은 오로지 침묵뿐인 듯, 그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열기가 그의 온 몸을 휘감고 있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불과 물로 얼룩진 집안에서, 그는 자그마한 지포라이터 하나를 발견하고 주워들었다. 그러나 라이터는 불덩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손에 화상을 입고 떨어뜨렸지만, 곧 다시 옷깃에 싸 주워들었다. 반쪽 녹아 버린 지포라이터였지만, 그 모습이 익숙했다.

“……내거네.”

그는 고개를 돌려 표단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불꽃과 벽들은 방해가 되지 않았다. 표단은 표단이 있는 곳을 기억하고 있었다. 표단이 표단을 바라 볼 때, 표단도 표단을 바라봤다.  진화대가 그를 거의 강제로 끌어내기 전까지 표단은 서서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대에 돌아온 그는 아직 진행 중인 체스판 곁에 라이터를 놔두었다. 체스판은 여전히 그 상태 그대로 있었다. 백의 차례였다. 그는 흑의 입장에서 생각했던 전략을 원초에 봉쇄하기 위해 말을 움직였다. 승패는 점점 기울고 있었다.

‘어째서 혼자 두는 체스에 승패가 꼭 있는 것일까…….’

혼자 두는 체스에 스테일메이트는 일어나지 않는다. 다른 때 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렸을 뿐, 이번에도 승패가 갈렸다. 창 밖을 보니 어느새 한밤의 어둠이 새벽의 어슴푸레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킹을 쓰러뜨리고, 무전실로 향했다. 그가 들어가자 무전병이 잔뜩 긴장하며 경례했다. 표단이 그에게 명했다.

“나가. 그리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

무전병은 군소리 없이 복종했다.











8. 섬사람



표단은 꿈 없는 잠에서 깼다. 그는 말없이 옷을 걸치고 초승의 집을 빠져나왔다. 아직 초승이 일어나기 전에 할 일이 많았다. 그는 아침 햇살에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해변으로 내려갔다. 해변의 시체들은 어젯밤에 일어났던 일이 꿈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시체들은 벌써 모래에 반쯤 파묻히거나, 파도에 씻겨가고 있었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데도, 자연은 그들의 존재를 조금씩 지워가고 있었다. 표단은 그 시체들 사이를 가로 질러, 섬에서 가장 빠른 배로 향했다. 섬에 있는 유일한 파출소에서 간혹 경비정으로 쓰긴 했었으나 이제는 그 주인도 죽어 버려진 배였다. 너무 작아 네 명도 타기 힘든 배였지만, 적어도 통통배나 오징어잡이 배 보다는 빨랐다.

표단은 조타실로 들어가 무전기를 찾았다. 한동안 아무도 쓰지 않았는지, 무전기에는 희뿌연 먼지가 쌓여 있었다. 그는 우선 먼지를 털어내고, 무전기 전원을 켰다.

“이상 없고…….”

만약 함대의 자신이 자신의 생각을 모두 알고 있다면, 해류를 타고 유유자적하게 섬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계획을 바꾸어야했다. 표단은 함대의 주파수 주소를 모두 알고 있었고, 경비정의 무전기면 충분히 그들에게 연락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무전기 상태가 이상 없음을 다 체크하고, 주파수 주소를 맞추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무전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군가 경비정을 향해 무전을 날리고 있었다. 표단의 몸이 얼어붙었다. 눈앞에 유령이 튀어나왔다 하더라도 그리 놀라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표단을 정말 놀라게 한 것은 그 목소리였다.

“거기 있나.”

그건 표단의 목소리였다. 나이가 들어 많이 변하긴 했지만, 평생 동안 사용하지만 평생 동안 들을 일 없이 낯선 목소리, 자신의 목소리였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기 있다.”

그리고 긴 침묵이 흘렀다. 표단의 혀끝에서는 수 없는 말이 맴도는데, 그것이 바깥으로 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간신히, 함장이 말했다.

“체스를 뒀는데, 백이 이겼어.”
“그럼 누가 이긴 거야?”
“그걸 모르겠어…….”

다시 침묵.

“어쩔 셈인가?”
“나에게 질문하는거야? 내가? 우리가 서로 질문을 할 필요가 있을까?”
“혼자서도 자문자답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
“섬을 탈출할거야.”
“해류를 타고? 난 막을거야. 이미 독수리호에 해류로 떠오는 부유물은 가리지 말고 전부 사격하라고 명령을 내렸어.”
“그렇다면 초승이라도.”
“불가능해.”
“가능해.”
“……죽을 생각인가?”
“다른 수가 없으니.”
“미쳤냐? 내가 자살하게? 무슨 소동을 피우던 상관없이, 나는 해류를 떠가는 초승에게 총을 쏠 것이고, 나를 죽이지 않을 거야. 이리와.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묻는 것은 무의미하겠지, 내가 모르는 걸 내가 알 리 없으니. 뭐가 되었든 우리는 같이 살아간다.”
“정말로 내가 날 안 죽일 수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지만, 난 절대 자살 따윈 하지 않아. 하지만 동시에 그 누구도 섬에서 나갈 수 없다. 난 내 일을 한다.
“나도 내 일을 한다.”

무전기를 통해 들리는 표단의 목소리가 어렴풋 기억이 날 것도 같았다. 방금 전에 나는 그를 꿈꾸었던가……. 표단이 말했다.

“……이리 와.”
“곧 간다.”

표단은 무전기를 껐다. 경비정에서 나오는데, 아마 갑판의 난간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쓰러져 버렸을 것이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잠시 동안 그렇게 난간에 기대어 있어야 했다. 그는 애써 기운을 차리고 초승의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니 초승이 일어나 불안스레 표단을 찾고 있었다. 그녀에게 말했다.

“갈 시간이야.”







9. 함장




  표단은 독수리호에게 직접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시간은 3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해류를 타고 뭍으로 가는 모든 부유물을 향해 크기를 가리지 말고 발포하라. 그리고 조금이라도 특이 상황이 있을 경우 모선으로 보고하도록.”

표단의 명령에 따라 모선을 비롯한 모든 함대는 전투태세로 들어가 있었다.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표단의 명령에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군인답게 아무 말 하지 않고 따랐다. 그들은 텅 빈 바다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무엇이라도 수상한 것이 나오기만 하면 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태양은 바다를 달구고, 열기는 파도소리마저 잠재웠다. 뜨거운 오후의 햇볕 아래 바다는 한 점의 그림자도 없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시간은 코끝에서 떨어지는 땀방울 속에 있었다. 시계는 조용하게 3시를 찍고, 다시 거리낌 없이 흘러갔다. 3시가 지나고 한 30분 정도 흘렀을 무렵, 독수리 호에서 무전이 왔다.

“당소 독수리, 독수리. 부유물이 하나 떠오고 있다. 하지만 그냥 쓰레기인 것 같다.”
“모니터 연결해.”

그러자 모니터에 독수리 호에서 보내온 영상이 떴다. 아무것도 없는 바다에 해류를 따라 부서진 뱃머리가 떠 오고 있었다. 그건 영락없는 쓰레기, 해류를 떠다니는 부유물에 불과했다. 안 그래도 이 근처에 요 며칠 사이에 부셔지고 침몰한 배가 한 두척이 아니니, 저런 바다 쓰레기를 상대로 일일이 총알을 낭비할 수 없었다. 하지만 표단은 단호했다. 그는 무전기를 붙잡고 명령했다.

“사정거리까지 충분히 접근 시킨 후……. 사격하라. 최대한 빨리, 아무런 고통도 없도록……. 그리고 독수리 호를 제외한 함대는 바다에 별 다른 움직임이 없는지 각별히 경계하라.”

표단은 모니터를 응시하려했다. 그러나 그 부유물이 점점 다가올수록 가슴이 너무 아프게 뛰어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자기 가슴을 갈라 심장을 끄집어내고 싶었다.

‘한쪽에선 살리겠다고 보내고, 반대편에서는 죽이겠다고 발사를 명하니, 이래서야 장난감이잖은가. 초승아…….’

분명 그는 그녀의 어깨의 떨림이 뒤흰들었던 영혼의 울림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어색하게 담배 피우던 그녀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미 잊었다 생각했던 스무 살의 그 뜨거운 감정이 그의 심장을 옥죄고 있었다. 그는 차마 모니터를 다 응시할 수 없어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군복 단추가 뜯어질 정도로 강하게 가슴팍을 움켜쥐었지만, 고통이 덜하진 않았다. 그래서 그는 모니터의 화면이 격하게 바뀌는 것을 보지 못했다. 붉은 비상벨이 울리고, 무전기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잠깐, 레이더에 이상한 게 잡힙니다……. 불, 연기입니다! 바다 위에서 무언가 타면서 떠내려 가고 있습니다. ……빌어먹을, 시체, 시체입니다!”

모니터에서는 저 먼 바다에서 피어오르는 한 줄기 연기를 볼 수 있었다. 표단은 무전기를 부여잡고 소리쳤다.

“동작 그만! 미끼다! 떠오고 있는 부유물을 공격해!”

그러나 독수리 호는 그의 말을 전혀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무전기에서는 응답은커녕, 소란스럽기 짝이 없는 소리만 들려왔고, 레이더에는 독수리호가 해류를 이탈하여 엉뚱한 곳으로 가는 것으로 표시되었다. 곧 모니터에 불길에 휩싸인 뗏목과, 그 한가운데에 누워있는 검은 시체가 보였다. 불길은 아직 시체를 태우는 것 같지 않았으나, 금방이라도 불이 붙을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병사들은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뒤에서 부관이 조심스레 말했다.

“함장님. 저희도 방독면과 무균복을 착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다려! 저 시체가 진짜일리도 없고, 진짜라 할지라도 타게 만들어 두진 않았을거다. 자, 잘 봐. 불길이 안쪽으로 번지지 않고 있지 않나!”

그러나 표단의 말을 듣고 안심하는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 모니터에서는 방독면과 무균복을 착용한 병사들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고, 표단은 불안이 함대 전체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부관을 비롯한 병사들은 말을 하지 않는다 뿐이지 모두 창백하게 질린 채 떨고 있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표단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병사들 사이에 불안과 긴장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이…….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안 좋은데…….’







10. 섬사람





출발하기 전, 초승은 거듭 묻는다.

“표단아, 너도 오는 거지? 그렇지?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같이 오는 거지?”
“할머니?”

표단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 깃들어 있는 불안한 공포와 두려움을 발견했다. 그는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 너 가고 나면 바로 다음 날 똑같이 보내줄게.”
“정말이지? 할머니도, 살 수 있는 거지? 만약 안 오시겠다고 해도 네가 억지로 보낼 거지? 그리고 너도 올 거지?”
“응……. 걱정하지 마.”

초승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할머니는 고집을 꺾지도 않을 것이고, 표단이 그녀를 억지로 끌어내지도 않을 것이고, 모든 게 다 잘 된다 하여도 벌써 아흔 살에 가까운 노파가 저런 뗏목 아래에 매달려 두 시간 이상을 버틸 수 있을까? 아니, 불가능한 일이었고, 초승도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대답은 진실 같은 것이 아니었고, 표단은 그녀가 원하는 말을 해준 것뿐이었다. 착할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착함을 믿을 필요는 있고, 악해서 안 될 것은 없지만 자신이 악하단 것을 깨달아선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표단은 따지고 싶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초승을 재촉했다. 초승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담배 좀 줘.”

표단은 담배를 꺼내 그녀의 입에 물리고, 불을 붙여 주었다. 그녀는 표단의 라이터를 보더니만 말했다.

“이 라이터 네 거 아니잖아. 네 거 어디 있어?”
“잃어버렸어.”
“……나 그거 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그럼 그거라도 줘.”
“안 돼.”
“왜? 그냥, 부적 삼아서…….”
“아직 쓸 곳이 있어. 뭍에서 줄게.”
“뭍에서…….”

초승은 말을 삼켰고, 입담배를 아주 천천히 피웠다. 그건 피운다고 하기보다는 불꽃이 담배를 태우는 것을 초조하게 지켜보았다고 하는 게 옳았다. 그녀는 거의 담배를 빨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시간은 그리 길 수 없었고, 담뱃불이 꺼지자 표단은 그녀를 뗏목으로 재촉했다.

뗏목은 그저 합판 아래쪽에 스티로폼을 붙여 놓아 가라앉지 않게 만들고, 그 위에 배의 부서진 이물조각을 붙인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해초류, 찢겨진 그물 등, 해안가에 떠밀려오는 온갖 쓰레기들을 이어 붙인 그것은 멀리서 보나 가까이서 보나 그저 부셔진 배의 조각일 뿐이었다.

초승은 숨 쉴 수 있는 구멍으로 얼굴만 내밀고 아래에 달라붙었다. 표단이 그녀를 묶어 주었다. 그는 말없이 일어서 ‘뗏목’을 바다로 밀었다. 파도에 되밀려오지 않고 해류에 배를 실으려면 최대한 멀리 떨어뜨리는 것이 좋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초승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는 뗏목을 힘껏 밀며 외쳤다.

“다시 보자!”

해류를 탄 뗏목은 빠른 속도로 바다를 향해 나아가 순식간에 작아졌고, 곧 태양빛에 번뜩이는 파도 사이로 숨어버렸다. 하지만 뗏목의 궤적은 곧고도 바랐다. 표단은 그 뗏목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돼서야 바다에서 나왔다. 큰 일 하나를 치룬 후 밀려오는 피곤함이 그를 덮쳤지만,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다.

아마도 초승을 죽이고 표단 혼자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면, 표단은 그것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해류에 밀려오는 모든 부유물에 총을 갈기라고 명령했다. 그 누구도 아닌 표단 자신이. 그렇다면, 결국 누군가는 ‘그러지 못하게’ 만들어야 했고, 그것은 표단 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선택은 둘이 같이 죽느냐, 초승만 살아남느냐 뿐이었고, 그 어디에도 표단이 살아날 구멍은 없었다. 그가 이제 노리는 것은 스테일메이트뿐. 사실, 초승 역시 살아날 확률이 높은 것이 아니지만…….

그는 새벽부터 쉬지 않고 만들어 둔 ‘미끼’ 에게 걸어가며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 자꾸만 초승의 얼굴이, 실망과 두려움으로 얼룩진 그 얼굴을. 하지만 초승의 부탁을 들어주고 라이터를 하나 새로 찾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지금 당장 미끼를 출발시켜야했다. 그러고도 할 일이 많았다.

보트 엔진 하나를 달아 놓은 널찍한 뗏목에 불과했다. 그 뗏목 한가운데에는 검은 시체 한구가 놓여 있었다. 표단은 살짝 고개를 끄덕여 시체를 향해 인사했다.

“죄송해요, 심씨 아저씨. 많이 부려 먹네요.”

그는 뗏목에 불을 붙이고, 엔진에 시동을 걸었다. 불길은 미리 기름을 먹여두었던 가장자리를 따라 번졌고, 금세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길이 시체까지는 닿지 않을 것이었다. 사실 시체는 뗏목에 놓여 있다기보다는 끈에 묶여 떠 있는 셈인데, 파도가 치는 대로 잠겼다 떠올랐다를 반복 하고 있었다. 어차피 중요한건 시체가 아니라 연기였다. 표단은 뗏목이 불안하게 난바다로 향하는 것을 잠시 지켜보았다. 연기는 점점 심하게 피어올랐고, 곧 저 멀리에서 고속정의 모습이 보였다. 표단은 그걸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도 할 일이 많았다.

준비를 모두 끝내고, 이제는 출발만 하면 됐다. 그는 미리 준비해둔 경비정에 타 이것저것 다시 한 번 확인하고는 초승이 사라져 간 방향을 바라봤다.

‘만약 바다에서 웅크리고 있는 이가 내가 아니었더라면 나도 살 수 있었을 텐데…….’

보트에 시동을 거니 계기판에 기름이 반절 정도 있었다. 약간 모자란 감이 있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도중에 기름이 없어 바다에 서 있게 된다 해도 괜찮았다.

“상관없지. 돌아올 것도 아닌데.”

모든 준비가 끝나고 출발만 남은 시간. 그런데 무슨 일인지, 표단이 이제 막상 바다를 건너 표단을 만나러 간다 생각하니,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초승을 떼밀어 바다로 내보냈을 때부터 조금씩 부글거리던 웃음이었다. 이제 살아남을 확률이 전혀 없는 곳으로 향하는데 왜 이렇게나 즐겁게나 웃음이 나오는 것일까. 웃음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배와 가슴을 간질이며 뒤흔들었다. 사실 표단이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표단을 만나는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표단은 문득 날이 미치도록 맑고 쾌청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봄날처럼, 그는 까닭을 알 수 없는 유쾌함으로 가득 찼고, 보트를 출발시키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11. 함장




“전 함대 위치 사수하라! 내 명령이 안 들리나!”

통제가 안 되고 있었다. 섬을 둘러싸고 있던 고속정들이 다 제각각 움직이기 시작했다. 표단은 무전기를 들고 미친 듯이 소리를 쳤지만, 함선들은 표단의 말을 무시해가면서 움직이고 있었다. 섬을 둘러싼 바다 이곳저곳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배들은 표단의 명령보다도 연기의 명령에 더 충실하게 따르는 것 같았다. 그들은 명령 없이도 신속하고 정확하게 연기의 근원지를 찾아가 철저히 진압하였다. 표단은 이제까지 자신이 과연 쓸모 있는 존재였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연기의 정체는 뗏목이었고, 처음에 독수리 호를 긴장 시켰던 뗏목을 제외하고는 시체가 실려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배들은 연기가 올라오는 족족 기계처럼 움직였고, 그 거대한 톱니바퀴는 표단이 멈출 수가 없었다. 불길은 바다에서만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섬에서도 올라왔는데, 표단은 당장에 그 곳이 자신의 집임을 알았다. 그는 그곳을 진화할 필요 없다고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근처의 고속정 한 척이 자체적으로 섬에 상륙하여 진화작업을 시작했다. 표단은 그 모습을 보고 소리를 지르며 무전기를 집어던졌다.

“빌어먹을! 이놈이나 저놈이나……!”

체스 말들이 제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래서는 게임 자체를 할 수 없었다. 그는 레이더를 응시했다. 함선들은 본래 대형을 짜지 못하고 제 멋대로 흩어져 있었다. 어느 배는 서로 너무 가까웠고, 어느 배는 서로 너무 멀었다. 어느 배는 상륙해 있고, 어느 배는 연기를 따라서 난바다까지 나가 있었다. 그때 진화 작업을 위해 상륙작전을 펼치던 배에서 긴급 무전이 왔다.

“경비정 한 척 발견! 보균자인 것 같습니다. 발포 하겠습니다!”
“잠깐! 사격중지! 발포하지 마라!”
“이쪽으로 다가옵니다. 아니, 잠깐……. 총? 피격, 피격입니다! 보균자가 함선을 향해 총을 쏘고……. 도망가고 있습니다. 추격하겠습니다!”
“쫒아! 하지만 절대로 사격은 하지 마라! 필히 생포하도록! 사살하지 마라!”
“상륙중이어서 회선이 더딥니다. 최대한 신속히 쫓겠습니다.”

표단은 레이더를 바라보았다. 작은 점 하나가 빠른 속도로 바다를 질주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바로 근처에 있는 참수리 호를 향하고 있었다. 곁에서 창백하게 질린 부관이 중얼 거렸다.

“죄, 죄송합니다. 저건 제 총…….”
“신경 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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