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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까마귀의 아이-10(완결)

2010.07.02 17:2807.02

타닥타닥. 당나귀의 느릿한 발걸음이 흙길을 두드렸다. 노먼은 당나귀의 흔들림에 몸을 내맡긴 채 지도를 보는데 열중해 있었다. 노먼의 조수인 주근깨투성이의 소년이 당나귀의 고삐를 잡고 걸어가고 있었다. 선은 투덜거렸다.

“스승님. 대체 지도를 몇 번이나 들여다보는 겁니까? 그 엘칸인지 엘켄인지 뭔지 하는 데가 정말 있긴 있는 겁니까?”
“아, 글쎄. 지도 보는데 말시키지 말라니까.”

노먼은 한줌도 못되어 보이는 수염을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기며 말했다. 스승의 말에도 불구하고 선은 계속해서 말했다.

“친구분이 거기 있는거 맞긴 맞는겁니까?”
“그래. 분명히 그람 녀석이 이곳으로 전출되었다고 내 귀로 들었단 말이다. 거기 도착하면 먹을 것하고 잠자리 걱정은 없다니까?”

노먼은 먹을 것에 유난히 강조하며 말했다.

“유유상종이라 더니, 스승님 친구분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전출된 겁니까? 혹시 유부녀랑 바람난 건 아니겠죠?”
“예끼, 이놈아. 무슨 말을 해도 그렇게 하느냐. 그람은 정치적인 이유로 쫓겨난 거라니까. 현교황의 눈밖에 나서 그런 거라고.”

“누구나 말은 그렇게  하죠. 스승님도 법황청 도서관에서 백과사전을 훔쳐서 쫓겨나 놓고는 정치적 이유로 쫓겨난 거라고 둘러댔잖아요.”
“시끄럽다, 이놈아. 무슨 말이 그렇게 많으냐.”

결국 노먼은 제자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고, 그러고나서야 선은 잠잠해졌다. 겨우 제자를 조용하게 만들긴 했지만 노먼도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이러다 밤이 되기 전에 엘켄 영지에 도착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별 수 없이 사흘째의 노숙을 해야했다. 들짐승 울음소리를 들으며 밤이슬을 맞으면서 밤을 새워야하는 것이다.

“어! 스승님. 저기 저거 성 아닌가요?”

선이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호들갑스럽게 떠들면서 한 방향을 가리켰다. 노먼은 얼른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안경을 꺼내 썼다. 안경은 8자를 눕힌 형태의 것으로 양 끝에 가죽끈을 달아서 귀에 매달아 쓸 수 있었다.

선의 말대로 저 앞에 성이 하나 서있었다.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군데군데 성벽에 그을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가까이 갈수록 불길한 기운은 더해져갔다. 성은 텅 비어 있었다. 거리에 늘어선 집도 사람이 살다간 흔적만 있을 뿐,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다.

“개미새끼하나 보이지 않네요.”
“그러게 말이다.”

노먼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성은 최근에 버려진 듯 했다. 선이 빈집에 들어가 곰팡이가 슨 빵과 베이컨을 꺼내왔다.

“흠...참 이상한 일이네.”

노먼은 선이 건넨 빵을 씹으며 중얼거렸다. 불이 났는지 주춧돌과 타다 만 기둥 두어개만 남은 집도 있었다.

“전쟁이나 역병이 돌았던 걸까요?”
“글쎄다.”

두사람은 스산한 성의 분위기에 감히 목소리를 높여 말하지 못하고 소곤거리면서 말을 주고받았다. 노먼과 선은 계속 걸었고, 영주관으로 짐작되는 곳까지 걸어갔다. 영주관도 불에 타서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노먼은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친구인 그람을 만나기는 그른 일 같았다.  노먼은 영주관 근처를 천천히 맴돌았다. 이상하게도 영주관과 부속건물 대부분은 불에 타거나 조금이라도 영향을 입었는데, 헛간만은 조금도 탄 흔적이 없었다.

노먼은 제자를 이끌고 헛간으로 들어섰다. 보통의 헛간과 다를 바 없이 갖가지 농기구와 밀짚으로 가득차 있었다.  노먼은 다락으로 올라갔다. 다락에는 밀짚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밀짚사이에서 무언가 웅크린 듯한 형체가 보였다. 노먼은 이끌리듯이 그곳으로 다가갔다. 여자아이하나가 모로 누워 있었다. 노먼은 급히 아이의 코에 손을 갖다대었다. 다행히도 아이는 규칙적으로 숨을 들이 내쉬고 있었다.

“선! 이리와 봐라!”
노먼은 아래층을 향해 소리질렀다.


“결국 노숙이네요.”
제자가 한숨을 쉬면서 불을 지폈다. 세 사람은 헛간에서 밤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도 먹을 거 걱정은 덜었으니 다행이지 뭘 그러냐.”

노먼은 불에 익힌 베이컨을 선에게 내밀면서 말했다. 선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우걱우걱 베이컨을 씹어 삼켰다. 노먼의 시선이 잠들어 있는 아이에게로 향했다.

“쟤는 괜찮은 건가요?”
선이 걱정되는 지 베이컨을 먹다 말고 물었다.

“그래.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이는구나. 내일이면 아마 잠에서 깨어날 거야.”
노먼은 아이의 옆에서 발견했던 유리병을 만지작거렸다.

“이건 사흘정도 가사상태에 빠지게 하는 약인데, 어떻게 해서 저 애가 손에 넣었을까?”
“그냥 배가 고파서 아무거나 주워먹었겠죠.”
“이 녀석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이 세상 사람들 다 너처럼 먹보인줄 아냐?”

노먼의 말에 선은 샐쭉해져서는 등을 돌리고 앉았다. 노먼은 그런 제자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아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행복한 꿈을 꾸는지 아이의 얼굴에는 엷은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다음날, 세 사람은 영지를 떠났다. 아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노먼은 당나귀를 양보해야만했다. 그래서 지금, 노먼은 당나귀 고삐를 잡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 뒤에서 선이 투덜거리면서 등짐을 지고 따르고 있었다.

“얘야, 너 이름이 뭐냐?”
노먼이 상냥한 어조로 물었지만 소녀는 멍한 얼굴로 허공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실어증인가요?”
선이 또 참견했다. 노먼은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다. 시간이 좀 지나봐야 알지.”
“스승님은 맨날 모른다는 말만하시네요.”

“그럼 모르는걸 모르지, 아는걸 안다고 하겠느냐?”
“사실 아는 게 없는 거죠?”
“이 녀석이!”

노먼은 하늘같은 스승을 발등의 티끌만도 못하게 여기는 제자에게 응징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들고 있던 책을 둘둘 말아 곤봉 삼아 제자를 구타하기 시작했다. 선은 화들짝 놀라 토끼 마냥 방방 뛰면서 노먼의 몽둥이를 피해 달아났다. 얄밉게도 선은 노먼이 팔이 아프도록 휘둘러대는 매를 요리조리 피해 달아났다. 지켜보고 있던 소녀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하하하.”
소녀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방 뛰어다니던 두 사람은 순간 돌처럼 굳어버렸다.

“방금 들었냐?”
노먼이 몽둥이를 든 손을 내리고 물었다. 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들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웃었다. 그러고는 소녀가 탄 당나귀로 돌아갔다. 등짐을 진 선에게서 밝은 곡조의 휘파람소리가 울렸다. 세 사람은 햇살을 받으며 주름진 길 사이로 스며들어갔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정령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니. 정신을 차렸을 때 내가 느낀 것은 배신감이었다. 정령들이 알려준 약은 독약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들이 나를 속인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세상이 손에 잡힐 것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곳에서는 어떤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한없는 평화와 행복만이 있었다.

나는 그 세계에서 영원히 추방된 것 같아 서럽게 울어댔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노인과 소년이 머리를 긁적였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내게 질문을 퍼부어 댔지만, 나는 어떤 질문에도 대답해줄 기분이 아니었다.

지금 나는 이들과 함께 길을 걷고 있다. 앞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왠지 이 사람들과 함께 길을 걷고 있으니, 이세상도 꼭 나쁜 곳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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