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어린 신 이야기(4-완)

2010.02.02 12:2602.02


  아라가 비틀거리면서 모든 책들의 도서관에 들어서자, 사서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따뜻한 차를 타서 내밀었습니다. 아라는 찻잔을 받아들고도 마시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되었니.”
  아라의 어깨가 살짝 떨렸습니다. 찻잔 안으로 물방울이 퐁! 하고 떨어졌습니다. 곧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지만 아라는 찻잔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꽉 움켜잡았습니다. 헐떡거리면서 가까스로 말합니다.
“주... 죽... 죽어버렸어요. 며칠 뒤에 다시 와 달라고 말하면서... 바보... 죽지 말라고 했는데. 죽지 말라고 했는데...”
사서 선생님이 손을 뻗어 아라의 눈물을 닦아 주었습니다.
“막사를 떠나서 싸움이 시작 될 때, 흰 새로 변해서 마늬 위에서 날고 있었어요. 사람들은 ...아라의 가호가 마늬 위에 있다고 말하고... 나, 난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마늬가 사람들을 이끌고 돌격해서- 전부 어지럽게 뒤섞일 때에도 마늬 위를 날고 있었는데- 자... 자기가... 죽을 곳인 줄 알고, 죽을 데로 일부러 들어간 거에요-”
  하면서 아라는 정신없이 울었습니다. 사서 선생님은 마구 떨리는 아라의 어깨에 손을 얹었습니다.
“바보- 땅에서 있던 아이는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누, 누, 누가 바다 너머에서 오기라도 했었나! ...화살을 수도 없이 맞고... 제가 가까이 가니까, 겨우 눈을 뜨고는 웃으면서 ‘너도 약속을 안 지키는구나. 이걸로 똑같네.’ 하고는! 바보- 바보- 마지막으로 한다는 말이...”

“이제 됐다. 그만 울거라, 마늬는 자기 길을 택해서 너와의 약속을 지키려 한 거야.”
  아라는 입을 다물었지만 계속 훌쩍이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네가 잘못했다고는 하지만, 마늬라는 아이를 보면 그 애만큼이나 너와의 약속을 잘 이해한 사람도 없는 것 같구나. 네가 그 아이와 처음으로 약속했다면, 그 아이는 너와 다시 약속을 했어.”
  아라가 선생님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그건 너한테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면서, 자신들이 아라가 되도록 노력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단다. 신이 만들어낸 세상이, 자신을 만들어낸 신한테 울지 말라고 말하면서 눈물을 닦아 주고 있는 거야.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지.”
  아라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습니다.
“... 그럼 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지막에 그 아이가 말했던 것처럼, 파도가 몇차례 들어갔다 나간 후에 다시 세상에 가 보렴. 그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며칠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라는 눈 뜬 채로 자는 것처럼 걸어다녔고 밤에는 눈만 감은 채 자지 않고서 누워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일어났을 때 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아라는 자기만의 바닷가로 갔습니다. 덩어리의 색은 한결 차분했습니다. 저번에는 기분 나쁘게 꿈틀거리는 진한 푸른색이었다면, 이번의 색은 쉬지 않고 흐르는 깊은 바다의 푸른 색이었습니다. 세상 안으로 들어갔을 때, 바람에서는 여전히 약간의 연기 냄새와 피 얼룩이 묻어났지만 저번처럼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검댕으로 깃털이 조금 더러워진 새들도 하늘을 날고 있었고, 회색빛 구름들은 조금쯤 기운을 찾은 바람과 함께 헤엄쳤습니다. 그 사이에 갓 태어난 바람이 조심스럽게 아라에게 다가와서 어리광부리며 아라의 옷깃을 펄럭였지만, 아라는 잠시 바람 너머 먼 곳에 눈길을 주었다가 도로 거두었습니다. 다른 큰 바람들이 어린 바람을 위로하면서 데리고 가자, 이윽고 아라의 몸은 단숨에 높디 높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갔습니다. 한 마리 흰 새가 되어서 미끄러지듯 잿빛 도시들 위를 날아갑니다. 막 비가 내린 듯, 돌담에서는 젖은 재 냄새가 나고 다리 밑에는 탁한 강물에 맑은 물줄기들이 뒤섞여 콸콸 흘렀습니다. 담 위에 앉아 나란히 검댕을 떼내고 젖은 깃털을 다들던 다른 새들이 아라에게 쉬어가라고 지저귀었습니다. 아라는 약간 날개를 들어서 미안하다는 뜻을 전하고 계속 날아서, 잎사귀가 다 져 버린 나무들로 가득한 숲으로 갔습니다. 나무들은 크고 오래되었지만, 젖은 껍질은 차갑고 새 순은 나이테 깊숙이 어딘가에 숨어 있을 뿐 옹이들만 큰 눈처럼 드고 쳐다보고 있습니다. 마늬의 무덤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아라는 무덤 앞의 나무 가지에 내려앉아 물끄러미 무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마늬의 석상은 칼을 들어올리고 호령하며 앞으로 발을 내딛는 자세를 한 채 움직이지 않습니다. 발 밑에는 맹렬히 휘몰아치는 파도가 새겨져 있고, 등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데, 머리 위에는 한 마리 새가 빛에 감싸인 채 날고 있습니다. 석상 밑에 새겨진 비명은 오랜 시간 동안 비를 맞아서인지 닳아서 무슨 글씨인지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마늬의 석상도 여기저기가 닳고 얼룩진 데가 많은데, 무표정한 얼굴만은 이상하게도 또렷하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커다란 무덤 주위에는 쇠창살을 둘러놓았고, 옆에 선 안내문에는 이백여년 전에 처음으로 자유와 평등을 외치며 마늬 제국을 일으켰던 마늬의 업적에 관해서 간략하게 써 있었습니다. 영주 연합의 함정에 빠져 목숨을 잃고도 전투에서의 결정적인 승리로 온 대륙이 하나가 되었으나, 후계자들이 권력 다툼을 하는 사이 다시 농부들과 어부들, 목수들, 직공들이 뭉쳐서 일어섰습니다. 아직도 영주님의 아들들이 다시 영주님이 되는 나라도 있고, 사람들이 모여서 대표를 뽑는 나라도 있지만, 이 모든 것이 다 마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는 쓸쓸한 무덤가에서, 아라는 울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안내문과 석상과 무덤을 바라보았습니다.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와 아무 말 없이 옆에 와 앉을 때에도, 아라는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었습니다. 밤이 인사하고 떠나갔을 때에야 아라는 신들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땠니?”
  사서 선생님이 부드럽게 물었습니다.
“잘 모르겠어요.”
  아라는 멍하게 허공을 쳐다보았습니다.
“제가 세상을 잘못 만들었기 때문이란 건 알아요. 하지만 완벽하게 세상을 만드는 게 가능한 일이기나 할지... 아무리 모든 걸 다 내다보더라도, 신이 예측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면 그건 그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 너무 끔찍한 일이에요.”
“말했잖니, 세상은 진열장에 놓인 예쁜 장식품이 아니란다. 세상은 스스로 살아있어서, 신이 실수했다고 해도 그것을 바로잡기도 하고, 혹은 슬퍼하는 신에게 손을 뻗어 눈물을 씻어주고 위로하기도 하지. 네가 만든 세상의 마늬처럼 말이다.”
“마늬의 무덤을 봤어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무덤... 마늬가 스스로 택한 거란 걸 알지만, 아직도 세상의 바람에서는 재 냄새가 완전히 씻겨지지 않고, 나무는 새 싹을 숨기고 내놓지 않던걸요. 세상을 만든다는 일은 원래 그런 걸까요?”
사서 선생님은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습니다.

"세상을 만드는 게 이런 일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아름다운 것들, 조화로운 것들, 보기 좋은 것들만 생각했죠. 그런데 그런 것들의 뒤편에서는 너무나 많은 슬픔들이 있어야 해요. 아름다움을 위해 없음에서 다른 슬픔들, 괴로움들까지 꺼내야 한다면 세상을 만드는 게 무슨 의미가 있죠? 차라리 신들의 땅 너머에 가득한 없음들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게 나을지 몰라요."
"왜 세상을 만드는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면, 너도 더이상 무작정 세상을 만들고 싶어만 하는 어린 신은 아니란다. 세상의 슬픔의 무게가 어떤 건지 알고, 세상을 만드는 재료가 뭔지 알게 되면 이미 그 신은 세상을 만들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자, 이젠 네게 세상의 가장 중요한 비밀을 알려 줄 때가 된 것 같구나."
"... 그걸 안다고 해도, 이젠 더 이상 세상을 만들고 싶지 않은 걸요."
  하고 아라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사서 선생님은 아라가 우는 동안 아무 말 없이 아라를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가끔씩은 그냥 실컷 우는 게 나을 때도 있으니까요. 아라가 훌쩍거리며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자 사서 선생님이 아라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습니다.
"아라야, 며칠만 더 기다리거라. 파도가 몇차례만 더 들고 나면 때가 될 게다. 그 때가 되면 내가 직접 찾아가마."
  아라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살짝 고개만 끄떡였습니다.


사서 선생님이 아라를 찾아온 것은 며칠 후의 밤이었습니다. 사서 선생님은 아무 말도 않았지만, 아라도 아무 말 없이 사서 선생님을 따라갔습니다. 둘은 아무도 없는 바닷가를 따라 걸었습니다. 조용한 밤입니다. 조용하고 깊은 밤입니다. 멀리서부터 밀려온 파도는 별빛에 희게 부서지면서 얇은 거품이 되었습니다. 별빛은 눈을 부시게 하지는 않지만 수천개의 별들이 한꺼번에 별빛을 쏟아내기 때문에 그 아래에서는 그림자가 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깊디 깊은데 오직 별빛으로만 희게 빛났습니다. 모두가 곤히 잠든 밤 문득 혼자 깨어나 본 일이 있는 사람은 모든 밤이 그처럼 신비롭다는 걸 알 겁니다. 멀고 먼 우주의 어둠을 별빛이 밝혀 밤은 완전히 검지 않고 깊은 남색 혹은 보라색으로 빛납니다. 그런 밤을 자기만 올려다 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 나면 숨소리조차 죽인 채 우주 너머에서 바람이 불어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지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밤에만 일어나는, 또 밤에만 일어나야 하는 그런 일들이 있는 법입니다.

  아라와 사서 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었습니다. 파도 밀려오는 소리와 자박자박 모래 밟히는 소리 뿐인 밤은 마치 꿈결 같습니다. 어째서 걷는 건지, 어디까지 걷는 건지도 모르지만, 그런 걸 궁금해하거나 알고 싶어하지 않고 그냥 나란히 걸어가는 그런 꿈. 파도는 밀려오고, 다시 밀려오고, 발자국 소리는 지치지도 느려지지도 않습니다. 별들만 눈을 크게 뜨고 빛나고 있고, 흰 모래와 흰 거품은 하얀데, 바다 하늘 그리고 밤은 그래서 아득하게 깊고, 멀고, 넓습니다. 언제까지고 걸어만 가는 꿈처럼 닿을 수 없는 저 너머에서는 별빛만이 여기까지 와닿을 겁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거나 멈춰서 귀기울여 듣거나 숙여서 손으로 쓸거나 냄새 맡거나 집어 혀에 갖다대지도 않습니다. 그저 걸어만 가고 있으면, 별빛에 어둠 속은 더 환히 보이고 멈추지 않는 소리들은 귓 속에서 메아리치고 바닷바람은 숨을 따라 들어와 바다와 밤의 냄새를 뿌리고 발가락에는 모래와 바닷물의 촉감이 입에는 짠 맛이 감돕니다. 모든 것이 아득히 멀지만 마음만은 도리어 또렷해지고 자기 안에도 잠들지 않는 별이 빛나고 있는 것처럼 점점 분명해지는, 그런 꿈입니다. 눈을 감아버리거나 고개를 돌리거나 꿈속에서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는 꿈, 밤과 잠의 성에서 모든 꿈들이며 밤 안에만 사는 신비로운 것들이 나와 가장 귀중한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속삭이는 꿈.
  끝없이 계속될 것만 같던 꿈은 별안간 끝났습니다. 다른 선생님들과 나이든 신들이 바닷바람에 펄럭이는 흰 옷을 입고서 엄숙히 서 있던 것입니다. 아무 말도 없이 입을 꾹 다문 채 눈을 뜨고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주 중요하면서도 비밀스럽고, 기쁘지만 야단스럽지 않은 아주 엷은 미소 같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라와 사서 선생님이 다가오는 걸 분명히 보았을텐데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처럼 바다 쪽만 똑바로 바라봅니다. 빛나고 있는 별들이나 밀려드는 파도 처럼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수평선과 하늘의 끝이 맞닿은 틈에서부터 불어온 바닷바람이 흰 옷자락들을 한번씩 건드려보고 지나갑니다. 사서 선생님이 끝에 가서 서자 아라도 따라서 섰습니다. 갈매기들만 둥지를 틀러 찾아오는 절벽 위에서 파도를 내려다 보며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그대로 서 있는 오래된 사원의 기둥들처럼 보입니다. 아마 그렇게 하고 퍽 오래 기다린 모양입니다. 아라는 서서히 꿈에서 무언가 다른 것으로 넘어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꿈은 아니지만, 잠들어버리거나 깨어나는 것이 아닌 꿈 너머의 것입니다. 젊은 바닷 바람이 소금냄새 나는 웃음을 뿌리며 지나가자 아라는 그제야 눈을 깜빡였습니다. 걷기 시작한 뒤로 눈을 깜빡인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파도 소리가 감자기 화악 커졌다가 뒤로 물러섰습니다. 별빛이 치렁치렁 빛나 점점 밝아집니다. 신이 그렇다면 좀 이상한 일이겠지만, 아라는 써늘한 느낌이 허리에서부터 등을 타고 올라오는 걸 느끼고 몸을 살짝 떨었습니다. 꿈의 끝자락이 가까이 다가오고 이제껏 꿈들이 숨겨왔던 비밀스러운 너머가 드러나려 하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꿈들은 숨기려고 한 적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빨리 따라오라고 손짓하면서 앞서가다보면, 따라오던 사람은 잠에 겨워 더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잠들어버리고 비밀을 알려주려고 하던 꿈들만 안타까워서 그 주위를 맴돌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이번만은 잠들지 않고, 그 기나긴 밤의 성 잠의 복도의 두텁고 편안한 어둠을 지나 꿈의 끝까지 다달았습니다. 꿈들은 기뻐서 아라의 주위를 빙빙 돕니다.

  처음에 그 소리는 파도 소리, 혹은 그 위를 나는 바람 소리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두세차례 파도 소리가 흰 모래 위에 부딫혀 사라지고 나서 또다시 울림이 들려왔을 때는 무언가 다른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희미하게 웅얼거리는 것 같지만 소리의 꼬리는 쉽게 사라지지 않고 마음속 깊이까지 전해오는 떨림이 있습니다. 그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바다를 사랑한 나머지 깊숙한 밑바닥까지 뛰어든 별이 울리는 소리, 막 태어나 처음으로 숨을 들이쉬는 아기의 갸날프지만 꿋꿋하고 쉬지 않는 심장 뛰는 소리, 저 하늘 높은 곳 켜켜히 쌓인 구름 꼭대기에서부터 떨어져 내려온 빗방울이 바싹 마르고 먼지 덮힌 채 가뭄에 시달린 풀잎을 때리는 소리. 분명치 않던 소리가 점점 커지자 아라는 그게 노래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바다가, 하늘이, 밤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발 끝을 적시는 파도도 옷깃에 휘감기는 바람도 노래합니다. 노래가 커질수록 주위의 모든 것들이 따라서 분명해지고 뚜렷해졌습니다. 별빛은 점점 강해지고 깊은 밤에 매달린 주먹만한 별들이 일제히 떨면서 울리고 있습니다. 흰 빛 혹은 검은 빛으로 번뜩번뜩하는 파도의 골 사이 사이에서 서서히 빛이 치밀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노래가 커질수록 바다 전체가 볓빛으로 일렁입니다. 그 속이 전부 별로 가득차 있기라도 한 것 같습니다. 노래를 실어나르는 바람들은 늙고 굼뜬 아주 오래된 바람들조차 갓 태어난 바람처럼 신나서 윙윙 노래하며 펄럭이는 옷자락과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헤집고 다닙니다. 노래소리는 자꾸만 커져서 별들이 진동하고 있는 밤하늘 전체에 메아리 치고 있습니다. 끝없이 멀고 텅 비어 있는 우주조차 노래에 공명합니다. 이래서 하늘은 점점 더 높아지고 바다는 점점 더 깊어지고 밤은 점점 더 멀어집니다. 온 세상이 눈부신 노래로 꽉 차 눈을 뜨기도 힘들 지경입니다. 새로 태어나는 모든 것들의 노래가 세상에 발을 들여 놓는 기쁨을 담아 세상을 흠뻑 적시고 있습니다.

  마침내 빛나는 파도들 사이에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한 발 한 발 바다에서 걸어나왔습니다- 얼굴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지혜로워보였고, 환한 빛무리에 감싸여서도 그 안에서 솟아오르는 빛으로 눈부셨습니다. 어깨에는 새로 태어난 이들을 위해 바닷바람으로 짜여진 소매 긴 옷을 걸치고, 발치에는 처음으로 발을 내딛는 이들을 위해 얇은 파도 거품으로 만든 부드러운 신을 신고서. 나이든 신들은 팔을 벌리며 환영한다는 표시를 해 보였습니다. 사서 선생님이 아라에게 속삭였습니다.
"어린 신이 태어나는 광경이란다.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비밀이지... 수백번이나 세상을 만든 지혜롭고 나이든 신들만이 새로 태어나는 어린 신들을 맞이하는 자리에 참석할 수 있어."
"제가 여기에 와도 되나요?"
"아직 네게는 세상을 만들 자격도 없을지 모르지만, 세상을 만드는 것이 어떤 일인지는 알고 있잖니. 주의깊게 보려무나."
  마지막 어린 신이 바다에서 걸어나오고 나자, 노래소리가 약해지면서 빛도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빛이 사라지고 난 뒤 새로 태어난 어린 신들은 이제 그냥 보통의 어린 신들처럼 보였습니다. 아라보다는 조금쯤 어린, 세상을 만드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어린 신들처럼요.

그러나 아라의 눈은 곧 어느 한 곳에 멈춰 섰습니다. 믿을 수 없어서 눈이 둥그래지고 입이 벌어졌습니다. 천둥이 머리 끝부터 뚫고 지나간 느낌에 굳어버렸지만, 가슴 속 깊은 곳부터 시작된 떨림이 온 몸으로 번져갔습니다. 겨울이 녹아내리는 봄의 폭포처럼 그리움이 터져나와 기쁨이 됩니다. 저도 모르게 한 발 나섰다가, 그게 두 발, 세 발, 그리고 달리기가 되었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이 제지할 틈도 없이 달려나가서 와락 끌어 안았습니다.
"마늬- 마늬- 마늬!"
  새로 태어난 어린 신은 아기가 처음 세상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아라를 쳐다보다가, 마치 '엄마'하고 옹알이를 하는 것처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아-라?"
  아라는 기뻐서, 기뻐서, 그리고 기쁘다고만 하기엔 부족한 뭔지 모를 것에 북받쳐서 바다처럼 눈물을 쏟았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의 마늬를 꼭 닮은 어린 신을 안고서 울었습니다.



  얇은 파도가 하늘을 맑게 씻어내고 거품이 조각조각 흘러 굵은 모래 사이로 스며드는 바닷가에서 아라와 사서 선생님은 마늬를 닮은 어린 신이 파도와 뛰어노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수평선 너머에서 불어온 바람이 길게 자란 머리를 헝크러뜨리고, 미끄러지는 물결은 부드러운 발가락을 살짝 살짝 적시며 장난쳤습니다. 아라 만의 바닷가에 덩어리는 간데 없었습니다. 하늘을 향해 손짓하며 부풀어오르는 바다처럼 웃는 어린 신만 찰박거리고 있었습니다. 사서 선생님이 입을 열었습니다.
"다시 마늬를 만나서 기쁘겠구나."
  아라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로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저 아이는 마늬에요. 그건 선생님이 제 옆에 서 있는 것만큼이나 분명해요. 하지만 제가 마지막으로 본 마늬가 아니라, 제일 처음 만났을 때의 마늬에요. 저를 알아보기는 하지만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구요."
  모래와 거품 위를 뛰어가던 마늬가 이쪽을 돌아보고는 활짝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습니다. 아라는 웃으면서 마주 손을 흔들어 보였습니다.
"저러는 걸 볼 때마다 제 가슴 속에서는 바다 위의 모든 파도 만큼이나 이 아이는 마늬다, 이 아이는 마늬다 하고 기쁨이 밀려오죠.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선생님들이 가르쳐주신대로, 한 번 사라져 버린 걸 다시 똑같이 만들 수는 없어요. 제가 만들었던 세상의 시간으로 마늬가 죽은지 천년이나 지났는걸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사서 선생님은 조용히 미소지었습니다.
"선생님은 새로 태어난 어린 신들 중에 마늬가 있을 거란 걸 알고 계셨죠? 그래서 저를 데려가서 그 광경을 보여주신 거에요, 제가 언제까지고 슬픔에 빠져 있지 않도록. 이제 얘기해주세요, 선생님. 이 모든 게 어떻게 된 일이죠? 선생님은 어떻게 마늬가 새로운 신으로 태어날 거란 사실을 미리 알고 계실 수 있었나요?"

   햇빛이 흰 눈썹 위에 내려앉아 반짝이자 사서 선생님은 눈썹을 치켜올렸습니다. 이윽고 사서 선생님이 말하기 시작하자 나른하게 흔들리는 수평선이 시원한 바람을 불어 보냈습니다.
"난 그저 네가 해 준 얘기만 들었을 뿐이다. 그 아이는 아마 나도 곧 만날 수 있겠구나, 하고 말이지. 특별한 건 없지만, 이게 바로 세상의 가장 큰 비밀이란다. 그리고 우리가 모든 것이 될 수 있지만 아직은 아무것도 아닌 없음으로 세상을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고."
"제가 마늬를 만들어낸 건가요?"
"만든다고 말하기는 너무 간단하구나. 네가 세상을 만든 건 맞지. 그 안에 마늬가 있었고. 하지만 마늬는 네가 만든 것만이 아니야. 그건 가능성들에 떠밀려 다시 솟아오르는 가능성, 모든 씨앗들의 꿈, 슬픔과 기쁨과 아름다움과 아픔 사이에서 피어나는 희망이란다. 많은 신들은 마늬가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신들의 땅 너머로 향하지... 그러나 모두가 마늬를 만나지는 못해. 그 모든 걸 배우고도 신들은 실수투성이란다, 수없이 잘못하고 잘못하고, 마음이 급해져서는 두 손을 걷어붙히고 세상 속에 들어갔다가, 결국에는 처음 세상을 만들었던 진흙으로 범벅이 된 채로 울음을 터뜨리기 일쑤야. 하지만 너는 누군가가 네 눈물을 닦아주었고- 그게 바로 마늬란다. 새로운 어린 신, 없음으로 만들어진 있음, 그래, 우리가 세상을 만드는 이유지."
"그러면... 덩어리가 결국에는 마늬가 된 거군요."
"그런 셈이지. 마늬 안에는 모든 게 다 있어. 네 손 끝에 묻어 있던 모래알과 바닷물에서 시작된 그 모든 것이 다. 그 수많은 눈물과 웃음이 모두 마늬가 된 거야."
"... 저도 그렇게 만들어진 건가요?"
"그렇게 태어났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구나. 너 뿐 아니라 네 친구들이며 다른 젊은 신들, 나도 그렇고. 신들의 땅 자체도 우주 전체에서 보면 없음의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는 조그마한 거품이나 다름없어. 우리가 만들어내는 세상은 그 주위에 달라붙은 더 작은 거품들이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거품들은 더 많아지고 새로운 어린 신들이 태어나게 되지. 없음 속에서 있음이 태어난다, 중요한 건 이거야. 알겠니? 없음 속에서 쉼없이 흔들리고 뒤섞이고 끓어오르고 부풀어오르는 꿈 말이다. 우주는 끝이 없고, 기껏해야 한 줌도 안 되는 있음에 비하면 없음도 끝이 없겠지만, 그 모든 것이 마늬를, 너를 꿈꾸고 있는 게다."
  아라는 완전히 이해가 가지는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였습니다.
"세상을 만드는 게 마늬 같은 아이를 태어나게 하는 일이라면, 그건 충분히 할 만한 일이에요... 그것만큼은 틀림없어요."
그 말만 하고 아라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바람이 둘 사이를 스쳐지나갔습니다. 바다는 변함없이 노래하고, 파도는 꼭 같은 모양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서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할 거니?"
"또 세상을 만들어야죠. 그러고 나서 또, 그 다음에도 또...제 눈물을 닦아 주는 것 말고도 함께 웃음지어줄 세상을 만나기 위해서요."
  하고 아라는 입술을 오무렸습니다.
"넌 아직 수업을 다 받지는 못했지만, 세상의 재료가 뭔지 알고 있고 세상의 비밀이 뭔지도 알지. 그것도 아주 힘든 수업을 거쳐서 말이다. 어쩌면 너가 지금 막 신들의 땅을 떠나는 젊은 신들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 이미 세상을 한번 만들어 보았으니까. 우리 선생님들은, 만일 네가 원한다면, 이제 신들의 땅을 떠나는 신들과 함께 떠나서 세상을 만들어도 될 거라고 생각한단다. 어떻게 하겠니?"
  사서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아라는 사서 선생님을 돌아보았습니다.
"수업을 더 들을 거에요. 마늬가 아니었다면 세상은 도로 진흙 범벅으로 돌아가고 저는 진흙 투성이가 되어 울고 있을 거니까... 그보다는 마늬하고 같이 학교에 다니고 싶어요.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은지 이야기하고, 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배우고 싶어요. 언젠가 그 세상을 만들고, 거기서 새로운 어린 신이 태어날 때 까지요."
  사서 선생님은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습니다. 그러고 둘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말 없이도 바다는 끝없고, 파도는 멈추지 않고, 바람은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마늬만이 햇빛에 빛나는 모래 위를 타박 타박 뛰어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 웃음은 바다를 내려보는 하늘처럼 아득하고 별처럼 반짝입니다.


  어린 신들이 신들의 학교에서 모든 걸 다 배우고 신들의 땅 너머로 떠나가는 날, 아라와 마늬는 함께 신들의 땅을 떠났습니다. 저 먼 우주의 어디쯤에선가 세상의 재료인 없음을 떼내서 반죽하고 둘이 만들고 싶은, 파도가 밀려오는 세상을 만들기 시작했지요. 둘이 만든 세상은 하나 뿐이 아니고, 세상을 만들면서 겪은 일들도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둘의 몫으로 남겨두고,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내야 할 것 같군요. 왜냐하면 아라와 마늬는 더 이상 어린 신이 아니고,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어린 신 이야기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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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보다는 설명조로 이야기를 맺게 된 것은 부족한 글심 탓입니다. 혹은 글심이 부족한데도 다 닦을 생각을 않고 빨리 마무리 지으려는 조급함 때문이거나.

글투는 꽤나 동화적이지만, 주제는 '어린 신'이라는 단어대로 영지주의를 나름대로 해석한 것입니다.. 물질의 창조주인 데미우르고스이자 유치한 신인 얄다비오트는 영지주의적 관점에서 일종의 구약에 해당하는 신으로, 이 글에서는 아라나 아헤가 속하는 범주입니다. 원래 대부분의 영지주의에서는 단순한 물질의 창조주에 지나지 않는 구약의 신과는 대조적으로 영적인 단계로 이끌어줄 신약의 구원자를 내세웁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런 더 상위의 개념(외부로부터의 구원=바다에서 온 아이)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잉태하는 신, 데미우르고스 내부로부터 솟아나는 우르고스, 자신을 구원하는 자기 자신을 내세웠습니다. 굳이 아라의 '종교'를 일종의 혁명교회로 설정한 것도 '혁명이 가장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혁명가'를 반영하기 위해서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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