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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학교의 비밀(8)

2008.12.31 02:1512.31

8.
정아는 결국 오후 일곱 시에 학교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경찰서에서 나온 정아가 집으로 돌아갔더니, 집은 경찰서에서 걸려온 전화로 인해 뒤숭숭했다. 정아는 물론 전화에 대해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은 엄마아빠가 집을 비울 것이니 같이 작은 엄마 집으로 내려가 잘 것인지 아니면 친구 집에서 자도록 할 것인지 라는 선택지에서 선뜻 친구 집을 골랐다. 학교로 숨어들어가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정아는 거짓을 공모하는 데 도움을 줄 만한 친구들을 하나하나 따져보았다. 제일순위로 떠오른 것은 미선이었지만 미선이는 지금 이곳에 없다. 정아는 최종적으로 이 학교에 오기 전 학교에서 친하게 지냈던 지애라는 아이를 생각해 냈다. 집은 정아랑 가까웠지만 학교 발령이 다른 곳으로 나서 주말이나 생일정도 되어야 가끔 만나는 사이였지만 통화는 자주 했었다. 정아는 휴대폰으로 지애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하루 정도는 재워 줄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정아의 부모는 정아에게 그 집까지 데려다 준다고 말하고는 정아를 차에 잡아넣고 집의 문을 잠근 뒤 열쇠를 자신들이 가지고 갔다.
정아는 지애 집에 도착해서는 수다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든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집도 비어서 모처럼 남자친구랑 놀러가고 싶은데 지애 부모님한테 좀 둘러대 줄 수 없겠냐는 부탁이었다.
“남자친구 있었어?”
“사귄지 얼마 안됐어.”
“어떤 사람이야?”
“응............. 대학생인데.......”
“우와! 깽판한번 놔봐?!”
지애는 남자친구가 없었다.
“부탁이야. 남자친구랑 요새 위태위태해서 그래. 파르페를 한 턱 낼게.”
삼십분 뒤에 정아는 학교 근처의 놀이터에 있었다. 놀이터는 아파트 단지에 딸려있는 것으로 학교 뒤편에 있었는데, 담장 하나로 학교와 분리되어 있었다. 학교의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퇴근하는 선생들 눈에 띠일 염려도 있었고 무엇보다 선생들에게 범죄지령을 내리는 것으로 생각되는 교장이 늘 교장실에서 운동장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아직 선생 몇 명은 학교 안에 남아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문들은 잠기지 않았다. 정아는 낑낑거리며 담장을 넘어가 매점과 이어지는 학교 뒷문을 통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학교 내로 들어갔다.
교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뒷문과 앞문, 창문을 통해 교무실 안을 샅샅이 조사한 정아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문을 열고 교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교무실의 형광등이 꺼져 있어 어두컴컴했지만 노을빛에 의지해 사물을 식별할 수는 있었다. 당직을 서는 선생이나 경비가 올지 몰랐기 때문에 정아는 재빨리 과학선생의 자리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과학선생의 자리를 뒤진 다음엔 음악선생, 미술선생, 사회선생의 차례로 쓸 만한 물건을 긁어모을 생각이었다. 과학실도 들어가 보면 좋겠지만 과학실에는 화학약품이 있는 관계로 문이 잠겨 있었다.
과학선생의 서랍을 열어 보니 사진이 있었다. 정아는 얼른 가방에 챙겨 넣었다. 하지만 벌레의 신비는 보이지 않았다. 역시 미선이가 집어온 책이 그 책인 듯 했다.
과학선생이 서랍 안에 놓아 둔 책이나 편지, 서류 등을 읽느라 시간이 많이 소비되었다. 사진 말고 어느 것이 단서로 작용할 수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글씨처럼 보이는 것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훑어보기라도 해야 했다. 책도, 책갈피에 무언가 끼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꼼꼼히 페이지를 살펴보았다. 거기다 정아는 장갑을 끼고 있어 손놀림이 더뎠다. 정아는 문득 이런 방법이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으로 계획을 굴릴 때는 무심코 지나친 부분이었지만 직접 겪어 보니 실감이 되었다. 결국 정아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종이쪽이란 종이쪽은 모조리 긁어 가방 안에 쏟아 부었다. 표지 때문에 부피가 큰 것만 눈으로 훑어보았다. 과학선생의 소지품만 끌어 모으는데 가방의 반이 차버렸다. 정아는 급하게 교무실 안을 돌아보았다. 복사지를 담아 놓은 봉지가 눈에 들어왔다. 정아는 가방이 포화상태가 된다면 복사지를 쏟아 내고 봉지를 사용할 생각을 했다. 일단 시작한 일이므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전부 가져가야한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적당한 것을 선별한 다음 미리 써 둔 편지와 함께 경찰서로 보내는 것이다.
정아가 과학선생의 자리를 발칵 뒤집어 놓은 다음 음악선생의 자리로 향할 때였다. 복도에서 급박하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교무실과 가까운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정아는 깊이 생각할 새도 없이 가까이에 있는 대형 철제 수납장 뒤에 숨었다. 서류 등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수납장은 다행히도 부피가 커서 교무실 밖에서는 숨어있는 정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할 수 있었지만 만약 사람이 교무실 안으로 들어온다면, 교무실내의 1/2의 범위에서는 꼼짝없이 들켜버릴 상황이었다.
그런데 숨죽이고 숨어있던 정아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처음엔 멀찍이서 철제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 심장이 떨어질 뻔 했는데 다행히 그 소리는 운동장에서 들려왔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정아의 학교 운동장 한쪽 구석에는 조립식으로 만든 저장고가 있었다. 무엇을 저장하는 곳인지는 정아도 몰랐다. 체육선생이 학생들에게 저장고 옆에 쌓아 둔 체육 장비를 가져오라고 시킬 때 마다 그 조그만 건조물을 ‘저장고’라고 불렀기 때문에 저장고라고 불리는 것뿐이다. 낮 시간에 학생이 학교에 있는 동안에는 저장고의 문은 언제나 커다란 금속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정아는 학생이 그 저장고 안에 들어가 보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만약 그런 이야기가 돌았다면 소문이 빠르게 도는 학교의 특성상 지금 시점에서는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학생 대부분이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육상부는 예외적으로 그 저장고에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방과 후 훈련을 하다가 체육선생이 육상부에게 무언가를 시키면 육상부가 저장고의 자물쇠를 따고 안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체육선생에게 가져다주는 모습은 많은 학생들이 본 적이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육상부는 수업에 거의 출석하지 않는데다가 대부분의 시간을 훈련을 하거나 육상부실에서 자기들끼리만 지내는 데 보내기 때문에 저장고에 대한 정보가 밖으로 새 나간 적은 없는 듯 했다.
운동장에 시선을 돌린 정아는 예의 저장고 건물에서 성인 남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남자는 발을 심하게 절고 있었다. 뼈가 부러진 것처럼 오른쪽 다리가 무릎 아랫부분에서 기괴한 추처럼 흔들렸다. 거리가 멀긴 했지만 정아는 그 남자가 저장고 밖으로 빠져나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장고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정아가 운동장을 통해 학교로 잠입했었다면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확인해 볼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정아가 숨어 있는 각도에서는 저장고 안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만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발을 저는 남자는 한쪽 발로 깽깽이를 뛰며 운동장으로 빠져 나왔다. 그때였다. 저장고 안에서 다른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뛰어 나왔다. 경비복을 입고 있었으므로 아마도 학교의 경비일 것이다. 경비는 삽을 들고 있었는데, 발을 저는 남자에게 뛰어가서는 그대로 삽으로 뒤통수를 내려쳤다. 남자는 무력하게 앞쪽으로 넘어졌다. 쓰러진 남자는 명백하게 항거불능상태로 보였지만 경비는 쓰러진 남자를 계속해서 삽으로 가격했다. 때리는 부위는 주로 머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경비는 그렇게 한참을 구타하다가 멈추었다. 그리고 재빠른 동작으로 삽을 쓰러진 남자의 하의에 끼우고는 남자의 두 다리를 잡고 저장고 안으로 질질 끌고 갔다. 남자가 끌려간 자리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 저장고 안에서 다른 남자가 뛰어 나왔다. 정아의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반응했다. 뛰어나온 남자는 정아반의 담임이었다. 그리고 불행히도 경비와 한패인 듯 했다. 담임은 시체를 끌고 오는 경비를 보고는 저장고 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았다. 마치 빨리 쓰러진 남자를 저장고 안으로 끌고 오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정아는 새삼 담임의 결혼상대가 음악선생이라는 것을 상기했다. 계단참에서의 대화로 추정하자면 미선이를 납치해 간 것은 분명히 음악선생이었다. 그리고 정아 자신은, 대책을 강구하지 않는다면 아마 사회선생에 의해 납치될 것이다.
교장 패거리는 학교 밖에서만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었다. 살인은 학교 안에서도 충실히 저질러지고 있었다. 도대체 이렇게 노골적으로 저질러지는 살인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교장과 과학선생, 사회선생, 음악선생, 미술선생, 경비, 그리고 심지어 담임까지 한패거리에 속해 있었다. 이 일곱 명 말고도 얼마나 많은 교직원이 이 일에 관계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지금, 저장고 안에는 다른 패거리가 있는 것 같았다. 경비와 담임이 쓰러진 남자를 저장고 입구까지 끌고 갔을 때였다. 정아는 저장고 안에서 기묘한 실루엣이 노을빛이 닿는 부분으로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전체 모습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지만 절대로 지구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물체였다. 비록 전체 형태를 보지는 못했지만 정아는 검은 바탕에 은색의 빳빳한 털이 잔뜩 나 있는 것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곤충과 비슷한 모습이었지만 그 크기가 담임과 경비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으며 움직이는 모습으로 보아 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정아의 머리에 과학선생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거기에다 너희는 솔직히 지구생물도 아니잖아!’
경비와 담임은 쓰러진 남자를 저장고 안으로 완전히 끌고 간 다음 저장고 문을 닫았다. 이제는 운동장에 남겨진 기다란 붉은 자국 외에는 방금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을 나타내는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잡혀온 사람들은 저렇게 흉측한 괴물에게 넘겨지는 것인가? 정아는 그 끔찍스럽게 불경한 모습을 보고는 급작스런 공포감에 빠져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일부만 보았을 뿐인 형태가 머릿속에서 온갖 기괴한 모습으로 부풀어 올라 허공에 투명한 모습으로 떠올랐다. 정아는 자신이 숨어 있는 다소 어두운 공간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절박한 마음이 들었다. 정아가 숨어있는 곳도 어둡고 저장고 안도 똑같이 어둡다는 사실이 저장고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상상을 정아가 숨어있는 곳에 대해서도 똑같이 일어나도록 만들었다. 온몸이 근질거리는 듯한 극한의 혐오감을 억누르며 수납장 밖으로 나오려 할 때 정아는 과학선생의 모습을 보았다. 거리는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정아가 과학선생을 볼 수 있다면 과학선생도 고개만 조금 돌린다면 정아의 모습을 충분히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과학선생은 정아가 그랬던 것처럼 악마적인 잔학이 저질러진 운동장을 망연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정아가 숨어 있는 장소 바깥으로 나간다면 그나마 정아를 숨겨주고 있는 어둠으로부터 벗어나 꼼짝 없이 들키고 말 것이다. 공포감과 억울함, 분노와 절망을 뒤섞여 느끼다 보니 어느새 눈물이 흘러나왔다. 울고 싶지 않더라도 제멋대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과학선생이 창가에서 멀어지려는지 정아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다가 정아를 발견했다. 정아는 수납장을 빠져나오려 했지만 좁은 공간에 들어 있는 정아보다는 넓은 공간을 마음껏 휘젓고 다닐 수 있는 과학선생이 더 빨랐다. 과학선생은 정아가 숨어있는 공간의 입구를 가로막았다. 정아는 창문을 열고 소리를 질러볼까도 생각했지만 운동장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버린 이상 시도조차 해 볼 수 없었다. 과학선생은 정아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정아는 고개를 들어 과학선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과학선생의 눈은 정아가 느끼는 만큼의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너도 봤니?”
과학선생이 말했다. 정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난 널 도와주려는 거야. 운동장을 봤니?”
정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네가 말을 해야만 해. 내가 만약 너에게 해를 끼칠 사람이라면 이런 걸 물어보기 전에 벌써 일을 벌였을 거야. 나를 한번만 믿고 대답해 줘. 운동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정아는 과학선생을 믿는 것은 아니었다. 과학선생이 이런 식으로 물어보는 것이 정아의 눈에는 위선 혹은 나약한 사람을 가지고 놀려는 것으로 비춰졌다. 그런 장난에 놀아나지 않겠다는 생각, 상황을 진전시키려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자신이 입을 열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여차하면 자신이 호리호리한 체격의 과학선생을 피해 학교 밖으로 빠져 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복잡하게 얽혀 정아의 입을 열었다.
“사람이... 죽었어요.”
과학선생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한동안 정아를 빤히 바라보더니 결의에 찬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도 이제 벗어날 수 없어. 저들은 이제 너도 죽일 거야. 살고 싶으면 내 얘기를 똑바로 들어.”
Mad Ha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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