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학교의 비밀(6)

2008.12.29 03:4512.29

6.
과학선생에 대해 말하자면 요즘 들어 정아반의 담임과 비슷한 처지가 되어 가는 것 같았다. 담임처럼 몸이 마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신적인 면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 신체적인 면과 행동적인 면에서 뚜렷이 드러났다.
정아는 과학선생이 아름이의 살해와 무언가 연관성이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런 의구심을 그대로 경찰에 까바치기에는 지나치게 걱정이 많았다. 앞서 말한 살해현장에서의 위협하는 듯한 위구심 같은 무형적인 면에서부터 기묘한 태도를 보이던 경찰에게서 받은 실제적인 위기감, 잘못된 신고를 이끌어 내어 무의미한 소란을 유발하는 것에 대한 걱정 등등의 이유로 정아는 아름이의 그림에 그려진 남자와 과학선생과의 연계점을 고발하는 것을 주저했다. 경찰은 자력으로는 아름이의 그림에 그려진 남자의 정체를 알아낼 수 없었다.

그 일은 정말로 우연에 의한 일이었다. 적어도 정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름이의 일로 끌려간 경찰서에서 빠져 나온 이후로는 정아는 애써 그와 관련된 일들을 잊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근래에 받은 격심한 스트레스는 정아의 생리주기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고 덕분에 정아는 수업시간에 예기치 못하게 생리혈이 흐르는 불상사를 겪어야했다. 하필이면 미선이가 병으로 결석을 해서 도움을 받을 수 없는 터라 어찌어찌 화장실에 간다고 무마해 놓고 텅 비어있는 복도로 나온 정아는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양호실로 가서 생리대를 받았다. 이전 양호선생이 죽고 나서 새로 온 양호선생은 여자였다. 아직은 낯이 설은 상태였기 때문에 정아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며 한참을 뜸 들였는데 양호선생이 눈치를 채고는 대뜸 ‘생리?’라고 물어 와서 양호선생이 개인적으로 쓰는 생리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정아는 화장실에서 뒤처리를 하고, 젖은 팬티를 돌돌 말아 휴지로 싸서 상의의 속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는 잰 걸음으로 교실로 향할 때였다. 정아의 눈에 계단으로 향하는 모퉁이로 향하는 음악선생과 과학선생의 모습을 보였다. 정아는 과학선생을 보자마자 자기도 모르는 새에 반사적으로 남자 화장실로 숨어 들어갔다. 과학선생이 눈치 채지 못했는지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아 정아는 한동안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숨죽인 채로 숨어있었다. 하지만 남자 화장실에 마냥 숨어있어도 될 만한 처지가 아닌지라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정아는 머리를 남자 화장실 밖으로 빼고 과학선생을 목격한 모퉁이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과학선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서 설령 정아가 숨는 모습을 과학선생이 보았다고 하더라도 무엇이 그리 대수란 말인가?
정아는 남자 화장실에서 나와 스스로에게 아무 일 아니라는 것을 광고하기라도 하듯 최대한 자연스러운 태도로 교실로 걸어갔다.
“약은 거의 다 돼가.. 조금만 기다려 줘.”
갑작스럽게 모퉁이의 사각에서 과학선생의 목소리가 들려와 정아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추어 굳어버렸다. 이미 과학선생 앞에서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자고 결심하기는 했지만 방금 전 들려온 과학선생의 목소리에서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급박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과학선생과 그 얘기 상대는 아마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비밀스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일 것이다. 정아는 이 은밀한 대화가 과학선생과 관련이 있다면 분명 아름이의 경우처럼 무언가 범죄적인 일과 연계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아는 이러한 상황에 끼이면 좋지 않은 일에 말려들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조심스럽게 남자 화장실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그 말이 들려왔다.
“양호선생이 너 대신 죽지 않았으면 네가 죽었을 거야. 교장은 그 녀석을 차원 밖의 우주로 데려갔었지. 지금은 소강상태이긴 하지만 네가 빨리 성과를 내지 않으면 다음은 정말로 네 차례야.”
정아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음악선생이었다.
“말했잖아. 시간이 더 필요해. 웨스트 박사가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않아서 데이터를 처음부터 매워야 해. 이건 너희가 생각해도 진짜 어쩔 수 없는 거잖아. 또, 시약은 속이 다르면 배합방식도 달라진다고. 그리고 거기에다 너희는 솔직히 지구생물도 아니잖아. 약은 반드시 만들 수 있어. 문제는 시간뿐이라고.”
이렇게 말한 것은 예의 과학선생이었다.
“교장은 너에게 3개월의 시간을 주었다. 네가 자초한 거야. 교장의 딸을 꾀어서 트라페조헤드론을 빼내려 했잖아. 교장이 네가 하는 일을 모를 것 같아?”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음악선생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책. 조광욱박사가 편집한 ‘벌레의 신비’. 네가 가져간 거 다 알아. 어디에다 숨겼지?"
의외로 즉각 대답이 이어졌다.
“말했잖아. 신관에 숨겼는데 없어졌다고.”
“찾아내. 태울 생각 하지 마. 그 책이 없어지는 날이면 너는....”
“여기 있었어? 교장이 말을 전하래.”
음악선생과 과학선생이 있는 계단참 방향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아는 그 목소리도 식별해 낼 수 있었다. 미술선생이었다.
“무슨 일이야?”
음악선생이 말을 받았다.
“그 때 네가 죽인 아이 있잖아.”
“양호선생?”
“아니, 걔 말고.. 학생 말이야. 이름이 뭐더라...”
“최아름이?”
“어, 맞어. 걔.”
순간 정아는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 흉악한 대화가 끝난 후 누군가가 정아가 있는 쪽으로 나온다면 꼼짝없이 도청을 의심당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인기척을 내는 것이 두려워 움직이기를 주저했지만 오랫동안 같은 자세를 유지하려니 약간 짜증도 났고 앞서 말한 위기감도 마음 속에서 점차 증폭되어 결국 행동에 이르게 된 것이다.
“네 남편 반에 이정아라는 애 하고 김미선이란 애 있지?”
정아의 발걸음이 불가항력적으로 멎었다.
“응, 있어. 얼굴도 알지. 잡아 오래?”
“걔네들이 지수랑 친했다나 봐. 혹시 이야기가 흘러나갔을 수 있으니까 일찌감치 처리하재. 이번이랑 다음 차례가 너랑 지선이니까...”
정아가 생각하는 지선이가 이들이 말하는 지선이와 동일한 인물이라면 그 지선이는 바로 사회선생을 말하는 것이다. 몸에서 생선 비린내를 풍기던 사회선생 말이다.
“일단 더 활발한 년부터 없애야지.. 알았어. 지선이한테는 네가 말할 거야?”
“응.”
“그럼, 과학선생. 난 할 일이 있으니까 이제 바로 과학실로 가서 실험을 하도록.”
정아는 두 여자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를 들었다. 둘이 끊임없이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아래쪽으로 사라져갔다. 아마 과학선생도 둘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과학실은 통풍이 잘 되고 출입이 용이한 1층에 있기 때문이다.
정아는 추운 곳에 나온 것처럼 떨리는 몸을 가누며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 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목소리가 먼 곳으로 가버리자 조심스럽게 계단참을 내 보다가 과학선생의 모습을 보았다. 순간 정아는 놀란 마음에 몸이 바짝 굳어져 버렸지만 다행히도 과학선생은 정아를 등지고 계단을 올라가는 도중이어서 정아를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정아는 천천히 얼굴을 몸 쪽으로 거두어 들여 사각으로 들어갔다. 순간 의혹이 들었다. 과학실은 1층에 있는데 어째서 과학선생은 3층으로 올라가는 것일까?

미선이가 사는 아파트는 학교에서 30분 거리에 있었다. 정아는 뛰어가는 도중 전화를 걸어볼까 생각했지만 휴대폰은 교실에 있었다. 미선이의 부모님은 두 분 다 맞벌이를 하시는 분이시라 집에는 미선이 혼자 있을 것이다.
정아는 아파오는 배를 부여잡고 어찌어찌 미선이가 사는 층에 도달했다. 초인종을 여러 번 눌렀지만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문을 세게 두드려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정아는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공중전화를 이용해 집 안으로 전화를 걸어 볼 생각으로 아파트 밖으로 뛰어 나왔다. 미선이 집의 전화를 종류별로 한 번씩 걸어 보았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미선이의 휴대폰도 불통이었다. 정아는 경비실로 뛰어가서 미선이가 집에 혼자 있는데 병 때문에 기절했을지도 모른다고 둘러댔다. 경비가 다행히 심각하게 받아들여 주어서 정아는 곧 미선이네 집 안으로 들어가볼 수 있었다.
집안은 텅 비어있었다.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경비는 투덜거렸지만 정아는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정아는 미선이의 방에 들어갔다가 아름이의 방에서 본 것과 똑같이 수북이 쌓여 있는 노란색 분과 문 안쪽에 그려진 빨간 별을 목격했던 것이다. 노란색 분은 미선이의 침대 위에 집중적으로 뿌려져 있었는데 적어도 분이 뿌려질 당시에 사람이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는 것을 분이 떨어지지 않은 부분을 통해 유추할 수 있었다. 경찰과 정아는 이에 대해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무래도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랐다.
Mad Ha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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