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연애소설을 읽는 로봇 (하)


“편지의 내용이 달랐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하여튼 그 뒤로 연락하게 되어서 계속 만나게 되었어. 그러다 결혼까지 한 거고.”
“그건 제 질문의 답이 아니잖아요.”
나는 금방이라도 화를 낼 것 같은 얼굴을 한 지수를 보며 빙긋이 웃고는 한 대리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한 대리 왔다. 어서 가자.”
레지던스로 가는 내내 지수는 말없이 불만에 가득 찬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M-Port에서 정비를 받는 동안 다운로드 받은 그녀의 데이터들을 미네르바로 보내고 나서 나는 잠시 시간이 비어 그녀가 모아 놓은 책들을 들춰보고 있었다. 책들은 구석구석에 쌓여있었고 그것들이 쌓여있는 위치만큼이나 그 종류도 종잡을 수 없이 다양했다. 소설들은 적어도 로맨스물이라는 특정 취향에 따른 것들이 많았지만 그 외의 비소설들은 도무지 취향이나 관심분야를 특정 지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수는 하드디스크에 포르노를 차곡차곡 쌓아두는 중독자처럼 책을 모으고 그것들을 읽고 있었다.
스크롤로 미네르바의 에이프릴이 화상 통화를 요청하는 메시지가 떴다.
화면으로 보이는 에이프릴의 머리는 금방 감은 듯 물기로 젖어 있었다.
“또 연구실에서 잔거야?”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며 에이프릴은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응’과 ‘어’의 애매한 중간 발음을 내뱉었다.
“급한거야? 아니면 머리 말리고 올 시간은 충분히 있잖아.”
에이프릴은 음성마이크에 대고 말하지 않고 키보드를 직접 두들겨 문자메세지를 보냈다.
-[사월이 - 미네르바 마이티스!!! 꺄오 ^o^)/ ] 거기는 지금 저녁이지? 에이프릴 옆에 있어?
“응, DM중이야. 왜 그래?”
-[사월이 - 미네르바 마이티스!!! 꺄오 ^o^)/ ] 아까 보내준 덤프 열어봤어. 충민씨가 마킹하라고 했던 부분 말이야, 로그가 지워졌어.
“뭐?!”
내 목소리가 너무 컸는지 한 대리와 지수가 나를 동시에 돌아보았다. 나는 헤드셋의 마이크 부분을 입가에 바짝 갖다 붙이고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머리 말리고 나서 스캔그래프 다시 보내줘 봐.”
-[사월이 - 미네르바 마이티스!!! 꺄오 ^o^)/ ] 알았어, 복구 해보려고 했는데 안 될 거야, 아마. 그 부분만 레코드 오프 모드였는지도 몰라. 인덱스는 있는데 인스턴스가 없는걸 보면, 기록된 로그를 지운 게 아니라 아예 메모리에 넣지 않은 거겠지. STM, LTM, 가비지 콜렉터, 모두 흔적이 없어.

나는 소파에 몸을 묻으며 신음소리를 냈다. 덤프 된 메모리에서 특정부분이 사라지는 이유는 몇가지다. 전송과정의 오류로 일어난 데이터의 손실이거나 M-Port의 조작자가 고의적으로 지운 경우, 한 가지 더 꼽아보자면 해당 양자두뇌가 고의적으로 지운 경우다. 마지막의 경우가 가장 골치 아프다. 양자두뇌로부터 대답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내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제 나는 딸아이의 가방에서 콘돔과 담배를 발견한 아버지처럼 팔장을 끼고 자리에 앉아 지수가 정비를 마치고 M-Port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서관에서의 활동 로그를 왜 지웠냐는 질문에 지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떤 변명을 할 것인가? 시스템상의 오류라는 핑계를 댈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은 당연히 알 것이다. 간파될 거짓말을 해야 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까지 중대한 규정 위반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도 창조주나 다름없는, 본사로부터 거의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양자두뇌사고조사관을 버젓이 곁에 두고서 말이다. 정비를 끝낸 한 대리는 손을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고 지수는 방에서 옷을 입고 나왔다. 옷이라고는 해도 무릎을 겨우 가릴 정도의 커다란 긴팔셔츠 한 장이 전부였다.
“집에서는 옷을 항상 그렇게 입어?”
“정비가 끝나면 여긴 제 개인 공간이에요.”
“개인이라고 말할 때의 인자는 사람인 人자라는거 알지?”
지수는 빙긋이 웃으며 얼굴을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한 대리님 가고나면 마저 이야기 해 주셔야돼요.”
인공인격체는 성대를 울려 말을 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호흡을 필요로 하지 않기에 그런 것이다. 내 귀에 속삭이는 지수의 목소리에는 숨결이 없다. 다만 희미한 라벤더 향이 났을 뿐이다. 그들의 몸이 호흡하는 것처럼 보일 때는 자신을 인간처럼 보여야 할 필요가 있을 때뿐이다.
한 대리가 레지던스의 문을 나서는 것과 거의 동시에 스크롤로 에이프릴의 메시지가 들어왔다. 지수의 오늘자 두뇌활동 로그 데이터가 전송된 것이다. 로그의 그래프는 특정 지점에서 끊어졌는데 그것이 오늘 내가 마킹하라고 일러두었던 지점이라는 것은 다시 확인 해 볼 여지가 없었다.
“그거 내려놓고 M-Port에 앉아.”
맥주캔을 들고 부엌에서 나오던 지수는 멈춰 서서는 내 얼굴을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왜요? 일일정비는 끝났잖아요. 데이터가 누락 된 게 있나요?”
“누락이 아니라 고의적으로 기록 하지 않은 거지.”
“그게 그거네요.”
지수는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내 앞에 다가와 맥주캔을 내밀었다.
“드세요, 시원해요.”
나는 잠시 손을 들어 그녀가 들고 있는 맥주캔을 집어 던질까 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프라임 오더, M-Port에 앉아.”

데이터 링크를 지수의 목뒤에 꽂으며 나는 잠시 지독한 성도착 범죄자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죄책감을 느꼈다. 메인 체어에 앉은 지수는 셔츠가 말려 올라가 음모가 훤히 보일 정도였다. 나는 셔츠자락을 끌어내리고 그녀의 다리를 가지런히 펴준 뒤 지수를 내려다보았다. 지수는 메인체어에 반듯이 누운 자세로 눈동자만으로 내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메인체어 위의 모니터에 그녀의 두뇌 활동 그래프가 그려졌다. 잠시 연결 상태와 기록 모드를 확인 한다음 나는 의자를 끌어다 그녀의 머리 맡 옆에 앉았다. 지수는 마치 연쇄 살인마의 제물이 되려는 무고한 여인처럼 몸을 결박 당한채로 누워있는 모양이었다. 몰론 그녀의 몸을 결박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움직임은 프라임 오더를 받기 위해 양자두뇌에서 제어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대충 이런 분위기라면 한 대리 같은 이가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와 내 머리에 총알을 박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노력 하며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본론부터 바로 들어가자. 오늘자 오후 4시 37분 전후의 5분간 도서관 대출실에서의 활동기록이 존재 하지 않아. 기록을 하지 않은거야? 아니면 기록한 것을 지운거야?”
지수는 대답 없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모니터에는 그녀의 두뇌 활동 그래프가 단오날 그네처럼 춤추고 있었다.
“거짓말 하려고 머리 굴리지 마.”
“거짓말 하려는 게 아니에요. 이유를 찾는 거라고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그녀가 대답했다.
“그 이유가 어디 있지? 어쩐지 오늘자 데이터에는 없을 거 같은데?”
내가 스크롤에 저장된 이전 데이터를 가져오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 하자 갑자기 지수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모니터의 그래프는 모니터 밖으로 뛰쳐나올 듯이 솟구치고 있었고 몇군데 시스템에서는 알람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무슨 짓이야?”
“부탁이에요. 이런 상태로 말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말할 기회를 주세요.”
“고의적으로 기록을 누락 시키는 순간에 이미 기회를 잃어버렸다는 거 몰라?”
이런 말을 하고 있자니 어쩐지 더스틴 호프만을 치과의자에 묶어 놓은 로렌스 올리비에가 된 기분이었다. 그 영화 제목이 뭐였더라?
그녀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단지 표정만 그런 것이다. 인간형의체에는 안구의 건조를 막기 위한 눈물샘이 존재하기는 한다. 하지만 저장된 눈물의 양은 그저 안구의 건조를 막기 위한 양 뿐이다. 눈물이 안구 위를 덮는 것도 그저 안구표면이 건조해졌을때 만이다. 양자두뇌에는 눈물을 흘리는 기능이 없다. 지수는 스스로 몸을 일으키려는 듯 몇 번이고 몸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양자두뇌의 중앙부에서 그것을 프라임 오더로 강력하게 막고 있었기에 그저 발작환자의 경련과 같은 움직임만을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가끔 센서가 망가져 식탁 밑을 헤매며 이리저리 식탁 다리에 몸을 부딪히는 고장난 로봇청소기를 볼 때도 어쩐지 유쾌하면서도 안타까운 기분이 드는 법이다. 하물며 여자의 몸을 하고 거의 벌거벗겨진 채로 누워있는 인공인격체를 본다는 것이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다.
양자두뇌사고조사관들은 회사로부터 인간의 모습을 한 조사 대상에 대한 감정이입의 위험성을 주기적으로 강조 받는다. 지수가 그런 위험의 이면에 있는 틈새를 노리고 하는 행동일까 잠시 생각 해 보았다. 그런 것은 모니터의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잠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담배가 피우고 싶다.
“좋아. 일단 네 이야기를 들어보자. 만약 내가 의문을 가지게 되는 부분이 있다면 난 다시 데이터를 확인 해 볼 거야. 프라임 오더 해제.”
지수는 몸을 메인체어에서 튕겨 오르듯 일으켜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꼭 이런 자세로 이야기를 들어야 해?”
“왜요? 무거워요?”
지수가 웃으며 말했다.
의체를 구성하는 재질 중 합성 유기물질들은 대부분 인체를 구성하는 것들과 질량이 비슷한 수준이다 그러나 때로 골격의 일부에 티타늄이나 강화 합금이 사용되기도 한다. 지수와 같은 체형이라면 인간의 경우 보통 50kg대 초반의 몸무게이겠지만 그녀의 몸무게는 70kg정도에 달한다. 이나마도 그동안 의체 소재의 경량화 연구 덕분에 가능해진 것이다. 나는 무릎위에 앉아 있는 지수를 잠깐 들어 올리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소파에 몸을 반쯤 뉘인 내 위에는 지수가 안겨 있었다. 방안의 감시 카메라는 분명히 이 장면을 찍고 있을 것이다. 카메라에 담긴 영상을 의무적으로 제출할 필요는 없지만 이후의 비정기적인 감사나 특별 조사에서 이 영상이 외부에 공개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것은 지수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이다.
“나를 곤란하게 하려는 거지?”
내 머리를 쓰다듬던 지수는 동작을 멈추었다.
“아니면 스스로 곤경에 처하고 싶어하던가.”
지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도서관에서 만났던 성실한 사서도 아니고 아이처럼 구는 버릇없는 여자아이도 아니었다. 의체는 양자두뇌의 모든 감정과 활동을 전부 표현해내지 못한다. 인체와는 다른 점이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인공인격체가 소름끼칠 정도로 사람과 같이 행동하고 반응 할 때는 의외로 쉬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자신의 모든 행동을 인간처럼 보이게 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결론이다. 지수는 지금 영혼이 상처받은 소녀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지수가 몸을 일으키자 나는 다시 자세를 고쳐잡고 소파위에 앉았다. 지수는 내 앞에 서서 어찌 해야 할 바를 모르는 어린 아이처럼 벌벌 떨고 있었다.
“그 여자를 처음 만난게 언제지? 도서관에서 만난건가? 그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기록을 누락 시킨거야?”
“질문이 너무 많아요. 이야기는 하난데.”
“복잡한 이야기로 만들려고 하니까 그렇지.”
“시시한 이야기에요.”
잠시 낯선 이의 집안에 들어 온 것처럼 거실 안을 걸어 다니던 지수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인희씨는 리처드 애덤스의 소설을 찾아 달라고 했죠. ‘워터십 다운’요. 서가 정보를 검색하는 DB에서도 찾을 수 있었는데도 저에게 와서 찾아 달라고 했어요. 저도 사실은 몇 달전부터 저에게 말을 걸어주길 바라고 있었어요. 책 안에 박혀있는 데이터 침을 스캔 하는 것은 제 몸 안의 스캐너만으로도 충분했어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죠. 일부러 서가를 눈으로 쫓으며 책을 찾았어요. 계속 제 옆에서 따라다녔거든요. 인희씨가 제 옆에서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저와 몸이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는 것도 느꼈고요. 그건……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어떤 건지 아시죠? 저라는 존재에 대해서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인간은 처음이었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되니 모양새가 정신분석의와 환자의 상담 같은 모양새가 되었지만 정작 소파에 누워 있는 것은 나였다.
양자두뇌는 주변의 변화와 자신이 상대 하는 인간의 반응을 다람쥐가 도토리 모으듯이 열심히 수집한다. 반응이 온전히 자신에게 향한 것일 때 데이터는 훨씬 더 가치가 높아지기에 양자두뇌는 끊임없이 그 데이터를 축적하기 위해 행동한다.
“나는 그녀의 혈압과 맥박, 두뇌 활동에 주의를 기울였어요. 미세표현 감지를 위해 모든 감각 센서들을 동원했죠. 그 결과 나는 결론을 내렸죠. 위험한 결론이긴 했지만 저에게는 가치가 있었어요.”
나는 위험이라는 단어에 관심을 두었지만 지수는 가치라는 단어로 위험을 덮고 있는 뉘앙스였다.
“그래서? 먼저 말을 건 것은 누구였지?”
“인희씨였어요. 며칠 뒤 도서관에서요. 2층에 있는 작은 정원이었죠. 저는 차를 마시러 잠시 나왔고, 인희씨는 담배를 피우러 나왔어요. 그러다 마주쳤는데 직원소개 게시판에서 제 사진을 봤다며 인사하더라고요. 장기 미반납자들에 대한 농담을 조금 하다가 대출중인 책이야기가 나왔는데 마침 제가 대여해놓았던 책이었죠. 직원대여는 3개월이었거든요. 저는 제가 그 책을 갖고 있으니 빌려주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인희씨의 집에 가게 되었죠.”
“한 진구 대리에게는 뭐라고 하고 나왔지? 퇴근 후에 집에 들어왔다가 다시 나간거야?”
지수는 잠시 침묵했다. 나는 그 침묵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한 진구 대리와 당일의 활동 로그를 확인 해 보면 될 일이다.
“도서관 직원에게 전해줄 물건이 있다고 얘기 하고 나왔어요.”
나는 신음소리를 내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갑자기 기저귀를 차고 요람에서 뒹굴고 있을 딸아이가 생각났다. 그래, 언젠가 이런 날이 다시 오겠지.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인희씨의 집에 갔더니 저녁식사가 준비되어 있었어요. 저녁은 사양 하고 책만 전해주고 나오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죠. 조사관님이 그 테이블 세팅 해놓은걸 봤어야 해요. 거기서 그냥 돌아 나온다면……. 그래서 저녁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음......”
말끝을 흐리는 지수를 바라보는 내 표정이 어땠을지는 짐작도 하기 싫다. 외박하고 돌아온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표정은 아니었을까.
“섹스를 했죠.”
자, 이제 나는 어떻게 반응 할 것인가? 집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지며 ‘나가! 너 같은 딸년 둔적 없다. 당장 내 눈 앞에서 사라져!’ 라고 외쳐야 하나? 다행이도 나는 그러진 않았다. 그저 헛기침을 하고 거실 한쪽에 쌓여진 책들로 시선을 옮겼을 뿐이다.
“불편한 이야기 인가요?”
내가 고개를 젓자 지수가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체온이 조금 상승하고 맥박이 빨라졌어요.”
지수는 웃으며 내 옆에 앉았다.
“다음날까지는 혼란스러웠죠. 하지만, 아시죠? 우리가 그런 혼란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니, 저만 그런가요? 어땠어요? 다른 APO들은? 같은 라인의 다른 아이들도 보신 적 있어요?”
“ARX-30번대 시리즈가 너희랑 비슷하지.”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잠시 말을 덧붙이려다가 참았다. 이 일과는 관련 없는 이야기다.
나는 얼른 몸을 일으켜 아까 지수의 손에 들려 있던 캔맥주가 놓여있는 스툴 쪽으로 갔다. 맥주캔을 따며 내가 말했다.
“그래서, 마저 이야기 해봐. 그 뒤로도 계속…… 인희씨? 그 여자를 만난거야?”
지수는 웃음을 지었다. 씁쓸한 감상과 좋았던 날들에 대한 추억, 그리움이 담긴 웃음이었다. 지수가 인간의 미세표현을 분석하는 수준 정도는 안 되지만 인공인격체의 미세표현을 분석하는 실력은 나도 그럭저럭 갖춘 편이다.
“세 번째 만났을 때, 날 사랑한다고 했어요. 거짓인지, 과장된 감정인지 구분할 정도의 능력은 있었죠. 나는 인희씨가 나를 위해 속삭여주는 말들과 나를 어루만질 때 느끼는 감정들은 모두 제 안으로 흘러들어 왔죠. 그녀는 진심으로 행복했어요. 나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랐어요. 인간의 말로 가장 간단하면서도 광범위하게 표현 할 수 있는 말이 있었죠. ‘나도 사랑해.’ 그렇게 되었어요.”
갑자기 머릿속에서 이전까지는 내팽개쳐두었던 전선 한 가닥을 찾아낸 기분이었다. 그것을 어딘가에 연결한다 해도 불이 켜질지 말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얼마나 만난거지?”
“짧았어요. 3개월이네요.”
“왜 헤어진 거지? 네가 APO란걸 알렸어?”
지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걸 알아차린 징후는 없었어요. 그래서.…….”
지수는 한동안 말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더 갑작스러웠죠.”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미지근한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고 그녀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지수는 무릎위에 올려놓은 양손을 맞잡고 손가락을 비비고 있었다. 인공인격체들은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다. 그들의 모든 손짓과 표정은 의도된 움직임이며 모든 행동에는 그 이유가 존재 한다. 인간처럼 다리를 떨거나 손장난을 치는 무의미하고 습관적인 행동이란 존재 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사소한 것들로 리포트를 다 채우는 방안을 슬슬 고려해보기 시작했다.
“우리는 왜 눈물을 흘릴 수 없는 거죠?”
창밖으로 벗어나려던 내 시선을 지수의 말 한마디가 붙잡았다.
그녀는 묘하게 균형이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그런 기능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모든 이별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만남이 갑작스러운 것만큼이나 이별도 그런 것이다. 끝이라는 것에 징후가 있던가. 평평한 탁자의 면이 끝나갈 때 그 끝을 알리는 무엇이 존재한단 말인가. 탁자 위를 구르는 연필을 상상해보자. 영원히 자신을 몸을 받치고 있을 줄 알았던 탁자가 끝이 있음을 알아차릴 때는 그 몸이 떨어져 내릴 때이다. 추락의 과정에서야 비로소 탁자의 너비가 유한함을 알게 된다. 끝이 오고서야 징후들을 알아차린다. 사소한 말, 표정, 행동, 오해들을 되새기면서 그것이 끝을 알리는 징후였다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이미 끝지점에서 발을 떼고 난 다음에는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모든 것들이 끝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하더라도 테이블의 끝에서 바닥으로 추락하는 연필의 입장에서는 그 변화가 여전히 갑작스러운 것이다. 변화는 늘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듯 보인다. 때때로 그것은 찰나의 순간과 같아서 그 지점을 통과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것이 변화였음을 깨닫게 된다.
서재 안에서 나는 송 화정 특무관의 앞머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초안으로 보낸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모니터 속의 그녀는 늘 지쳐 보이지만 그것을 지탱할 힘이 있다는 자부심을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방금 미용실에 들러 세팅하고 온 듯한 완벽하게 아름다운 곡선을 흘리며 이마위로 떨어진 앞머리가 그 증거일수도 있겠다. 자신의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화정이 허리를 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시적인 데이터 플로우 오류로 보고할 건가요?”
“설명 할 수 있는 가장 간결한 내용들만 옮겼습니다.”
“음, 어차피 조사관님의 회사 내부 문제가 되겠지만 일부러 찾아보려 한다면 비어있는 곳이 상당히 많지 않나요? 첫째로 윤지수는 담당정비사에게 알리지 않고 외부인과 접촉했어요. 접촉 사실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지만 정비사에게 의도적인 거짓말을 해왔다는 점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이렇게 되면 그, 누구죠? 아 한진규 대리 역시 좀 골치 아프겠네요. 담당 제품이 자신을 속이고 연애질에 몰두하는 동안 어떤 의심도 못했다는 건......”
“그건 한 진규 대리 입장에서도 변명의 여지가 있습니다. 양자두뇌의 활동 데이터가 모두 정비사에게 공개되진 않습니다. 양자두뇌가 접촉하는 대상이 인간일 경우에는 그 대상의 사생활정보 보호 문제도 있기 때문에 일부 데이터는 감춰지거나 볼 권한이 없습니다. 지수는 그여자 집에서 밤을 새고 온 적이 없었어요. 신데렐라처럼 늘 자정 전에는 들어왔죠. 문제가 있다면 지수 때문에 한 대리의 초과 근무 수당이 더 발생했다는 정도일까.”
“만약에 그 여자가 생명윤리수호대 같은 단체의 일원이거나 그와 사상적으로 연관이 있었다면 어쩔 뻔 했어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 부분 때문에 회사 보고 전에 미리 귀띔 드리는 겁니다. 제가 도서관의 대출기록을 뒤져 그 이인희라는 여자의 정보를 열람 할 권한은 없습니다. 그 때문에 특무관님의 도움이 필요한거죠.”
“실은......”
화정은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흩트리며 말했다.
“그 이인희라는 여자의 신원조회는 이미 마쳤어요. 서른한 살, 독신이고 시간강사로 인하대에 나가고 있어요. 사상 조회에도 걸릴만한 것은 없고, 과격단체 활동경력도 없고요. 적어도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정보에서는 모두 안전해요.”
내가 잠시 멍한 얼굴로 말문이 막혀 있자 화정이 웃으며 말했다.
“알아요, 알아요. 우리가 빨대를 하나만 꽂는 건 아니거든요.
내가 뭐라 말하려 하자 화정이 말을 막았다.
“걱정 말아요, 에이프릴은 아니니까. 일단 이건에 집중해보죠.
요약 해볼까요? 당신네 제품하나가 사소한 작동 오류를 일으켰어요. 크게 문제가 될 내용도 아니고 그냥 넘어갈수도 있는 말 그대로 ‘사소한 오류’지만 회사는 사소한 오류라도 책임지고 예방한다는 인상을 남기고 싶어하죠. 그래서 조사관님이 파견되었고요. 그래서 훑어보니, 오호라! 연애 스캔들이네요. 우린 이 비슷한 분야의 사건에서 둘 다 트라우마를 남겼죠? 지수는 예쁘고 매력적이니까 그런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죠. 이 경우에는 상처받은 쪽이 양자두뇌라는 게 문제지만. 하여튼 그 대상이 되는 인간도 이미 신원 조회를 마쳤어요. 신의 피조물을 모방한 로봇이 인류를 정복하려한다고 외치는 망상에 빠진 테러리스트도 아니고 자유인민연합에 반감을 품은 극렬주의자도 아니에요. 그냥 해프닝이죠. 그렇게 보고하면 끝나요. 지수는 그 여자와 관련된 기억을 삭제하면 그만이고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면 되요. 아니 어쩌면 다른 직장으로 배치를 받을지도 모르겠네요. 이번일 자체가 그녀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이 될 거에요. 조사관님은 크리스마스를 편안하게 가족과 함께 보내시면 되고요. 자, 그럼 여기서 질문 드릴게요.”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불필요한 위험을 무릅쓰고 이 일을 덮어두려는 진짜 이유가 뭔가요?”
화정은 모니터를 통해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먼저, 그 전에 저에게 하셨던 제안이 아직도 유효한지부터 궁금하네요.”
나는 대답했다.

캔의 바닥에 남은 맥주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털어 마시는 나를 보며 지수가 말했다.
“자, 이제 편지 이야기도 해줘요.”
“무슨 소리야?”
“제 이야기를 했잖아요. 이제 조사관님 차례에요.”
“그런 약속 한 적이 없는데, 이야기를 주고받기로 한 약속.”
지수는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숙여 턱을 아래로 당기며 나를 쳐다보았다. 즉, 노려봤다는 이야기다.
“이상하지 않아요? 조사관님 이야기는 의문투성이에요. 부인은 상해에 왜 있었던 거죠? 엄연히 전시상태였던 상해에 가족도 없이 여대생 혼자 있었잖아요. 병원에서 해병이 읽어줬던 편지가 원래의 내용과 달랐다는 것은 뭐고요?”
“안 물어봤어.”
“왜 안 물어 봤죠?”
캔맥주를 마시면서 혀 끝으로 구멍을 핥는 습관은 위험한 것이다. 나는 간혹 그러다 혀 끝을 다치는 경우도 있다. 캔을 버릴 곳을 찾기 위해 잠시 두리번거리는데 지수가 다가오더니 내 손의 빈 캔을 홱 빼앗아버렸다.
“같이 있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 했으니까.”
나는 맥주 때문에 트림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의심 같은 거 해본 적 없으세요?”
“너는?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듣는 것은 내 일이니까 네가 대답해야 해. 그 여자가 너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해 본적 없어? 네가 감지할 수 있는 신체반응이나 미세표현들의 밖에 숨겨진 다른 의도나 감정들 말이야. 너희들이 수집해서 판단하는 정보가 반드시 옳다는 보장은 없어.”
“사랑은 옳고 그름에 있지 않아요. 그건 믿음이죠. ‘눈과 귀에 아무증거 없어도’ 지속될 믿음이요. 인희씨는 내게 그런 믿음을 말했어요. 그걸 믿는다는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죠? 우린 그것들을 구분해 낼 줄 알아요. 영원히 같이 있고 싶다는 말을 할 때도 그 영원이 매분 매초라는 의미가 아니란 것도 알고요. 그 여자에게 남은 수명은 고작해야 60년 정도죠. 그나마도 그 염병할 담배를 끊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그녀가 말한 ‘영원’은 아무리 길어야 100년도 못 넘을걸요. 난 1000년은 이 모습 이대로 있을 텐데! 왜 스스로도 못 믿을 말을 그렇게 확신에 차서 말했을까요? 왜 나를 안을 때 마다 그 여자의 심장은 그렇게 쿵쾅거렸을까요? 그리고 왜 3개월 만에 나를 몰랐던 사람처럼 대할까요?”
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갑자기 내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기에 적합한 사람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나는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쌀쌀한 12월의 바람이 집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오늘 인희씨를 만났을때 활동 기록을 누락 시킨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지?”
“기억은 차고도 넘쳐요. 모든 것 하나하나요. 나를 처음으로 안아주었을 때, 나에게 처음으로 입맞춰주던 순간, 내 귀에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목소리. 원한다면 얼마든지 메모리에서 다시 불러낼 수 있어요. 적어도 내 메모리 안에서 그녀는 영원히 날 사랑하고 있어요.”
“불합치 데이터를 더 이상 안 받겠다는 거야?”
내말에 지수는 곧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모욕을 당한 인공인격체에게는 흔한 반응이다.
“조사관님. 저는 조사관님보다 더 오래 살거에요.”
“아마도 그렇겠지?”
“어쩌면 우리가 인간의 마지막을 보는 세대가 될지도 몰라요. 우리가 만났던 사람들,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 우리를 두려워하고 증오하던 사람들까지 모두 죽고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난 다음에도 우리는 생존해있을지 몰라요.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당신들을 기억속에 가져가는 거죠. 우리는 기억을 나눌수 있어요. 기억과 감정을 공유하고 그것이 세상에서 잊혀지지 않도록 영원히 보존 할 수 있죠. 설사 제 몸이 파괴된다 하더라도 저는 저의 데이터를 다른 양자두뇌에게 보내줄 수 있으니까요.”
“인간들도 비슷한 일을 해. 네가 일하는데가 그런 일을 했던 흔적이지 않아?”
“책은 불완전해요.”
“그럴 거 같긴 하더라. 연애소설을 그렇게 읽어댔던 네가 실연 한 번에 이러는걸 보면. 네가 읽은 책 중에는 연애하다 깨진 이야기는 없었니?”
“대부분은 다 결혼해서 잘 살던데요?”
“넌 독서습관부터 바꿔봐야겠다.”
내가 빙긋이 웃자 지수도 미소 지었다.
“기억을 지워주세요.”
지수가 말했다.

에이프릴은 스카프를 하고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마음에 들어. 이거 자기가 고른 거 아니지? 색깔 보면 알아.”
“글쎄, 화면에는 그냥 칙칙한 녹색으로만 보이는데? 그런데 상당히 빨리 도착했네.”
“시즌에 맞추려고 특별배송으로 보낸 모양이야. 고맙다고 전해줘. 리포트도 다 읽어봤어. 이대로 승인하면 되는 거야?”
나는 아내가 타다준 밀크티 잔으로 손을 옮기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분명 소여물 맛이 날것이다.
“내 권한이 아니니까, 상임 어드바이서께서 판단해주세요.”
“자기가 몇 개의 규정위반을 묵인 했다는 사실은 잘 알지? 혹시라도 나중에 지수가 문제를 일으키면 이게 자기 책임으로 돌아갈 거란 것도 잘 알고? 어디, 보험은 들어 둔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았어. 승인은 해주겠어. 하지만 나도 별도의 의견서를 제출할거야. 충민씨 보험이 내 보험은 아닐 테니까.”
내가 잠시 말없이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자 에이프릴은 펜으로 카메라를 톡톡 두드렸다.
“미안, 얼어붙었나 하고 잠깐 확인해봤어. 걱정 마. 지수는 HFP에서 제외시킬 거야. 친화대상에 대한 몰입도가 너무 강해. 얘를 위해서도 한동안 다른 환경이 좋을지 몰라. 미네르바의 내 연구실로 데려오고 싶어. 가능하다면.”
“연구원으로 쓰겠다는 거야?”
에이프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다른 모니터에 떠있는 지수의 영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그녀의 집에서 대화할 때 내 정장윗도리에 꽂혀 있던 핀카메라에 찍혀 있던 영상이었다. 에이프릴은 미소 지으며 손가락으로 모니터속의 지수의 머리를 쓰다듬는 시늉을 했다.
“야, 나 지금 소름끼쳤어.”
내말에 에이프릴은 폭소를 터뜨렸다.

광장 저편에서 나를 발견한 지수는 깡총거리며 달려왔다. 나는 코트자락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입에는 반쯤 타버린 담배를 물고 있었다. 빨간색 더플코트를 입고 있는 그녀의 손에는 작은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가까이서보니  그것은 비단향꽃무였다. 한겨울에 보는 보라색 꽃잎이 낯설었다.
“아, 이거요? 퇴근하는데 어떤 학생이 줬어요. 향기 좋죠?”
꽃다발로 내 얼굴을 후려칠 듯이 들이대던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조사는 다 끝나신 건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낮에. 회사에 보고도 했고. 한 대리는 왜 같이 안왔어?”
“크리스마스이브잖아요. 오늘도 늦으면 이혼 당할지 모른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광장을 잠시 둘러보았다. 극장이 있던 자리는 옛 대전쟁 때의 폭격으로 무너지고 그 자리에는 위령탑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미 어둑해진 광장은 걸음을 바삐 서두르는 사람들과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마저 처리하기 위해 가판을 펼쳐놓은 제과점 사람들뿐이었다. 특별한 방향이나 목적지 없이 지수와 나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조 성화 부장님한테 인사도 못 드려서 죄송한데.”
“괜찮아요. 제가 부장님한테는 조사관님이 미친 로봇들 잡으러 다니느라 바빠서 그런거라고 말씀 드렸어요.”
내가 웃음을 터뜨리자 지수가 말했다.
“정말이에요. 부장님 그런 거 은근히 팬이에요.”
“그런 거?”
“드라마요. ‘양자두뇌형사Q’ 같은 거. ‘미안하지만 넌 [해고]다! 퓽!퓽!’”
지수는 총을 쏘는 손짓을 하며 드라마의 대사를 흉내 냈다.
“너도 그런 드라마를 봐?”
“가끔요. 그 드라마 제작진중에는 인공인격체를 직접 만나본 사람이 하나도 없나봐요. 남자친구가 여자인간과 바람을 피웠다고 살인을 하는 양자두뇌라니. 멍청해!”
지수는 말로만 툴툴거리는 것으로 성이 안찼는지 바닥의 삐져나온 포석을 발로 걷어찼다. 다행이 드라마에서처럼 땅이 푹 패이고 포석이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런 것 충분히 견뎌내는데 말이죠. 그렇죠?”
걸음을 멈춰선 그녀는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대답해줘요.”
“내가 잘한 건지 모르겠다.”
“기억을 지우지 않은 거요?”
지수는 자연스레 내 팔짱을 끼었다. 나는 그녀가 무안해 하지 않도록 천천히 그녀의 팔을 빼내었다.
“넌 우리보다 더 먼 미래를 보게 될 거야. 우리가 늙고 지쳐가고 서로 싸우고 증오하다가 이 땅에서 사라지는 모습도 보게 될 거야. 그사이에 많은 인간들이 너와 사랑에 빠지고 너를 배반하고 너에게 상처를 주겠지. 인희씨에 대한 기억을 지우지 않은 이유도 그거야. 너는 네 평생 그 여자가 왜 너를 떠났는지 이유를 모를지도 몰라. 내 편지에 무엇이 써 있었는지. 그때 상해에 내 아내가 왜 있었는지도. 너의 양자두뇌로 기억할 수는 있어도 왜 일어났는지 모를 일들은 앞으로도 많겠지. 하지만 중요한건 그 일이 있었다는 걸 기억 하는 거야.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수는 다시 내 팔을 붙잡고 팔짱을 끼었다. 묘한데서 고집을 부리는 녀석이었다.
“나는 달로 갈 거에요.”
“아, 에이프릴 연락 받았어?”
“네, 회사에서 수속과정 밟는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내년쯤에는 저기에 있을 거에요.”
지수는 어느새 어둑해진 밤하늘 위로 떠오른 달을 가리켰다.
“그리고, 인간들이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미워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어떻게 속이고 어떻게 믿었는지 보고 기억할거에요. 그중에는 영원히 알 수 없는 일도 많겠죠?”
“많겠지.”
잠시 침묵하며 광장의 끝에 도달하는 사이에 그녀는 Fly me to the Moon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별들 사이를 누비고, 목성과 화성의 봄을 보게 되는 날이 언제일까 잠시 상상해 보았다. 아마도 나는 그 모습을 못 볼지 모르겠다.
광장의 끝에서 그녀와 나는 잠시 말없이 서있었다. 뺨에 무언가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익숙하진 않지만 매년 맞이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눈치고는 늦은데다가 함박눈이었다. 나는 잠시동안 지수의 눈에서 그녀가 느끼는 경이로움을 보았다. 빠른 속도로 눈의 궤적을 쫓고 눈의 결정들이 가진 육각형 속에서 서로 다른 아름다움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 목격하며 그것들을 자신의 두뇌 속에 기록하느라 정신없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알아요? 이게 제 첫눈이에요. 제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눈이라고요!”
“그래, 오늘 저녁에 길 좀 막히겠다. 서둘러야겠는데?”
지수는 입꼬리를 일그러뜨리며 미소를 지었다. 저건 아내가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싫다고 투정부리는 나를 내려다보며 짓던 미소랑 비슷했다.
지수는 내게 성큼 다가와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이것도 기억할게요. 메리크리스마스.”
나는 그녀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어느 여름 방학 날을 떠올렸다. 모래사장위에 둑을 쌓던 나는 계속 밀려오는 파도에 둑이 허물어지자 쌓기를 그만 두고 그대로 바닥에 앉아 있었다. 들어오고 나가기를 반복하는 파도가 내 발가락을 간질이며 쌓아둔 둑의 흔적을 씻어내는 모습을 해질 때 까지 바라보았다. 한겨울에 나타난 이른 봄꽃의 향이 아직도 코끝에서 맴돌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자 제일 먼저 나를 맞이한 것은 무언가를 태운 냄새였다.
아내는 시무룩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가리비 살을 태웠어.”
이미 차려진 저녁식탁 앞에서 그녀는 속상해 죽겠다는 얼굴로 서있었다. 나는 아내를 끌어안고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가리비 살들도 이제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거야. 그 애들을 위해 같이 기도하자.”
아내는 웃음을 터뜨리며 내 가슴에 가벼운 주먹질을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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