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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겨울색 정원 #1

2009.01.10 14:4301.10

타샤 튜더는 꽃을 가꾸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다 쓰는 부지런한 그림 작가다. 그럼 우리의 [줄리오]는 도대체 어디에 들어가는 부류일까?
본명 로버트 스미스. 직업: 변호사
취미는...
원예. 라고 해야할까? 그걸 원예라고 부를 수 있을 때 이야기겠지만.

“줄리오.”

오늘의 인터뷰를 위해서 MP3 플레이어와 녹음기, 그리고 수첩까지 철저하게 준비한 나는 그의 별명을 불렀다. 도대체가 왜 자기 이름에 그런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지, 원.

“줄리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또 그 끔찍하기 짝이 없는 겨울 정원에서 [구근]을 심고 있는 모양이다. 정말...
[줄리오]는 지금은 몰락했지만 한때 잘나가는 미국 사회의 상류층이었다. 물론 그 증거로 무너져가고 있지만 나름 웅대해보이는 이 저택도 소유하고 있고.
그는 현재 이 무너져가는 저택을 살리기 위한 하나의 계획을 준비 중이다. 그것도 그의 특징인 [원예]를 통해서.

“알리샤!”

우렁우렁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굵고 힘찬 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리는 걸 보니 또 그 [전화기]를 쓸 때가 온 모양이다.

“잘 안 들려! 전화기를 써서 불러! 왜 전화기를 안 쓰는거야?”

살풍경한 이 저택을 살풍경하다 못해서 정신병자의 호텔처럼 보이게 한 건 그 [전화기]탓이 컸다. 저택을 중심으로 1M 간격으로 종이 전화가 설치 되어 있다. 흔하디 흔한 종이컵에 구멍을 뚫어서 실로 연결한 전화 말이다. 비록 돈이 없다고는 하지만 핸드폰을 사면 될 것을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내가 그 전화기를 한번도 안 썼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결국 못 이기는 척 전화기를 들었다.

“줄리오!”

“그래. 알리샤. 무슨 일이야?”

내가 줄리오를 만난 것은 대학교때의 일이다. 한번도 친구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애인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는데 어쩌다보니 엮인 것이 8년이 넘게 사귀게 되었다.
도대체가 정신병적인 이런 광태를 보면서도 말리지 못한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문제는 내가 항상 설득당한다는 데 있었다. 줄리오의 전화기는 언제나 완벽하게 기능했던 것이다!

“나랑 이야기 좀 해.”

“무슨 이야기? 좀 바쁜데? 오늘 심는 [구근]은 무척 중요한 거라 움직일 수가 없어.”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줄리오는 무척 정상으로 보였다. 컴퓨터에 과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피자와 교내 신문 편집에 열성을 올리는 모습만 빼면 무척 평범했다.
학과 점수도 그럭저럭 상위권에 들었다. 옅은 갈색 머리에 황색 눈동자는 그가 무척 진지하고 소박한 성품인 것을 드러내주었다.

“줄리오. 그럼 내가 갈게.”

“으음...중요한 건데. 그래? 건너와.”

그러던 것이 먼 친척에게서 무슨 상자같은 것을 상속받더니 변해버린 것이었다. 수염을 기르고 목이 다 늘어진 갈색 모직 스웨터를 입고, 발에는 운동화 대신 무슨 풀로 만든 것 같은 신을 신었다. 그리고는 저택의 정원을 다 밀어버리고는 그 살풍경한 곳에서 뭔가를 계속 캐고, 심고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몇백년 전의 농노가 일하던 모습과 거의 흡사한 모습이었다.
줄리오가 작업을 하는 곳은 아마도 저택의 가장자리, 숲에 가까운 곳일 것이다. 겨울에 그는 항상 그곳에서 작업을 했다.

이 저택의 정원은 정말 거대했다. 붉은 돌과 여러 가지 빛깔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이 정원은 아마도 처음 설계했을 당시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을 의도했던 게 틀림없었다.
물론 의도와는 다르게  이 정원은 그저 메마르고 살풍경하게 보일 뿐이었다.
갈아 엎기 전에는 그래도 푸른 빛이 돌아서 그럭저럭 정원같았는데, 그나마도 줄리오 때문에 지금은 더욱 황폐해보였다.
부서진 돌에 발을 채여가면서 걷는데, 뭔가 갈색 쥐같은 것이 쪼르르 달려갔다.

“앗!”

쥐에 놀라서 뒤로 물러선 순간 무엇이 밟혔다. 항상 밟는 돌부스러기의 느낌이 아니라 크고 부드러운 느낌의 무엇.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밟힌 그것은 마치 꼬리라도 말 듯이 내 발끝에서 사렸다.
순간적이었지만 쥐는 아닌 듯 했다. 뭔가 기묘한 느낌. 쥐보다는 크고, 고양이보다는 작은...? 쥐가 언제 저렇게 컸었나? 그리고 또 뭔가가 뒤에 서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


소설가나 동화작가라면 줄리오의 이야기를 하나의 판타지나 로맨스, 혹은 사회비판 소설로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듣고는 [아름다운 정신]의 [존 내쉬]를 연상하기도 한다니까 말 다했지. 그 사람들은 무례하게도 내게 [당신이 그 알리샤인가요?]라고 묻기도 한다. 정말. 유감인지 다행인지 난 알리샤 내쉬가 아니고, 줄리오도 존 내쉬가 아니라 로버트 스미스다.

줄리오가 그 상자를 물려받고나서 4년이 넘도록 원예에 몰두한다는 건 우리  동문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이야기였다. 그의 저택에 놀러가 본 적이 있는 친구들은 그의 새로운 취미가 그 살풍경한 저택을 되살리는 것이 될거라면서 기대도 많이 했다.
그런데 그것이 4년이 넘도록 전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다가 줄리오는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건지 친한 친구들과 차례로 절교했다. 결국 남은 건 나 하나뿐으로, 매년 계절마다 줄리오에게 영국에서 오는 원예 정보지를 가져다주게 되었다. 절대로 보지도 않으면서 그걸 보는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줄리오는 날 계속 불렀다. 뭔가 변화된 것을 보여주려는 행동같지만, 난 뭐가 달라졌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줄리오 말에 의하면 내 눈이 탁해져서 그 변화를 전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알리샤! 어서와.”

근 3개월만에 보는 나를 줄리오가 반갑게 맞이했다. 잘 생겼던 얼굴은 햇빛과 흙에 찌들려 다소 거뭇거뭇해졌고, 악수하는 손에는 자잘한 물집이 잡혀 있었다.

“그 동안 잘 지냈어?”

“그래, 뭐 여전히 실패만 하고 있긴 하지만.”

나는 내 옷속에 들어있는 자동녹음기에 신경쓰면서 대화를 시작했다.

“구근은 잘 심기고 있어?”

“여전하지 뭐. 바로 잘 태어나질 않아. 물을 잘 빨아먹질 못하거든.”

그의 말대로 매년 구근과 화초들은 전혀 자라지 않았다. 이곳은 마이애미나 캘리포니아가 아니기 때문에 겨울이 되면 무척 추웠다. 구근이 얼어죽지 않으려면 좀 더 일찍 심던가. 라고 하고 싶었지만 뭐, 구근도 겨울에 심는게 있고, 여름에 심는게 있고, 가을에 심는 게 다 따로 있다니까 할 말은 없었다.

“그래도 겨울은 겨울 나름대로의 아취가 있어.”

줄리오가 빙긋 웃었다.

“너한테 보여줄 것이 있었는데...네 맘에 들는지...요...저...”


“로버트.”

그 말꼬리를 누군가가 잘랐다. 냉정하고 현실적인 목소리였다.

“말하지 마.”

금발에 푸른 눈, 모직셔츠에 축 늘어지는 갈색 쇼올을 두른 그 남자는 무례하게도 자기 소개는 생략한 채 내 옷깃에 달린 휴대용 녹음기를 빼버렸다.

“아, 데븐. 언제 오셨어요?”

“방금 전에.”

데븐이라고 불린 그는 젊었지만 완고한 입매를 하고 있었다. 줄리오처럼 그런 분야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면 다소 로맨틱하고 망상주의일거라는 내 생각과는 달리 그의 눈매는 마치 경영 컨설턴트나 회계사처럼 냉정했다.

“자아, 아가씨는 저리로...”

“데븐, 알리샤는 내...”

“알고 있어. 방해돼.”

그는 정말 방해된다는 것처럼 가볍게 내 등을 밀어냈다.

“숙박하는 건 봐주지. 내일 떠나.”

마치 주인이 줄리오가 아니라 그인 것 같은 태도였다.



줄리오는 늘 그랬던 것처럼 신사적인 태도로 손님방에 늘 그랬듯이 침대 바로 옆 책상에 커피와 내가 좋아하는 향긋한 과자를 얹어두고 갔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건 좋은 상황이었다.
내 의뢰인이 원하는 상황과 딱딱 맞아떨어졌으니 말이다. 난 친한 친구라 의심도 받지 않았고, 내쫓기지도 않았다. 모레면 나가라는 데븐이 있긴 했지만 그는 주인이 아니었다. 나는  데븐 포트가 내팽겨치다시피 문앞에 던져놓은 내 가방에서 꾸물꾸물 노트북을 꺼냈다. 영국에서 미국까지 오느라 피곤한 나머지 침대에 거의 눕다시피한 상황이지만 일은 일이다. 무선랜을 조정하고 나는 메신저를 켰다.

[대디. 늦어서 죄송해요.]

[알리샤.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지? 친애하는 줄리오는 잘 지내고?]

[여전히 똑같은 상태예요. 상속후견인이라는 사람을 데려왔는데 그 사람은 한술 더 뜨는 사람이더군요. 눈치챘는지 녹음기를 뺏기고 말았어요. 적어도 1주일은 있어야 증거를 확보...]

거기다가 쳤는데 침대 베개쪽에 얹힌 손을 뭔가가 기어오르는 느낌이 있었다. 미끌미끌한 느낌! 이건 개구리다!
아니, 개구리가 아니라 도마뱀!!

“으악!”

노트북이 엎어지면서 책상위에 있는 커피가 노트북 위로 쏟아졌다. 젠장!  피쉬식...하는 소리와 함께 노트북이 망가지는 소리가 들렸다...개구리, 도마뱀보다 더한 사건이었다.

“알리샤! 뭔 일 있어?”

“도...도마뱀...개, 개구리...”

논리적으로 두 사람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나에게 데븐은 냉정하고 차분하게 비꼬았을 뿐이었다.

“언제부터 도마뱀, 개구리가 피해야 할 대상이 되었는지 모르겠군. 그렇다고 자기가 개구리나 도마뱀보다 더 이쁜 것도 아니면서 말이야.”

그렇게 비꼬고 돌아가는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그 말만 하고 절뚝거리면서 걸어갔다. 얼마나 운동을 안했으면 그 나이에 관절염이...(그 상황에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니.)라고 생각하던 나는 그의 발밑에 꾸물거리는 뭔가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귀...귀신...”

“알리샤, 왜 그래! 정신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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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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