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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강철 도시

2021.12.14 20:0912.14

강철 도시

 

 

그는 국도변 거친 연석 위에 걸터앉아 바지에 무수히 달라붙은 도둑 갈고리들을 천천히 떼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자동차들이 날벌레 사체를 가득 뒤집어쓴 채 그의 앞을 고속으로 지나쳤지요. 그럴 때마다 돌풍에 맞은 그의 몸은 위태롭게 휘청였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안타깝다고 해야 할지, 그가 저수지 둑의 가파른 경사를 따라 미끄러져 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차량을 향해 자진해서 달려들 생각도 없어보였죠. 그는 오로지 도둑 갈고리들을 떼어내는 데에만 전념했고, 그곳을 지나는 자율 주행 자동차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차선을 정확히 준수했습니다.

 

그는 다시 걸었습니다. 겨우 그의 왼쪽 다리만 깨끗해졌을 뿐인데 말이에요. 귀사의 담당 직원분들께도 잘 알려졌듯, 그에겐 오른팔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돌발 행동에 대한 전임자의 (본인의 입맛에 따라 때로는 실증적이고 때로는 고전 철학적인, 학자의 권위만을 근거로 하는 무책임한 인용과 학문 조류의 역사적 연속성을 무시하고 논리적 비약들로만 도배시킨, 오로지 박약한 뇌과학적 지식을 감추기 위해 여러 원어들-심지어 그들 중 몇 단어는 원어도 아니었다-을 얄팍하게 동원한, 결과적으로 현란하기만 할 뿐 실상은 조악하기 짝이 없는) 인수인계용 보고서에 의하면 합리적이지 못한 그의 행동들 각각을 광인적 혐의의 근거로 파악해볼 수 있습니다. 왼손으로 오른쪽 다리도 충분히 청소할 수 있었고, 어차피 모두 청소하지 못할 것이라면 굳이 걷던 도중에 주저앉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글쎄요. 그는 그저 오른팔이 없었을 뿐인데요.

 

그는 집에서 30km나 떨어진 곳의 그 변두리 납골당을 매일 걸어서 방문합니다. 돈이나 연고가 없는 사망자의 유골을 무료로 보관해주는 낡지만 감사한 시설이죠.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저수지 근처에 펼쳐진 갈대밭을 지난 뒤 산길을 조심히 헤쳐 20분을 더 걸어야만 합니다. 비포장도로가 있기는 하지만 찾는 이가 없어 온통 아카시아 나무와 잡초들로 뒤덮여 있죠. 고인들은 대부분 채무자들이에요. 하지만 차용증을 들이밀며 강제로 유골함을 열어본들 돈을 돌려받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그 안엔 어떤 귀금속도 없습니다. 고인은 오로지 노동할 수도, 팔아먹을 가치도, 죽을 쒀 먹을 영양도 없는 잿가루가 되어버렸으니까 말입니다.

 

납골당에 도착한 그는 우선 지하 봉안당으로 향해 어딘가의 모빌랙 레버를 돌립니다. 대형 도서관 고서 보관실에 가면 있는 이동식 책꽂이처럼, 그가 레버를 돌릴 때마다 안치된 유골함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죠. 그곳엔 소형 유골함이 겨우 들어갈 만한 크기의 공간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는데, 그의 어머니는 키가 닿지 않는 높이의 봉안함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그는 굳이 사다리를 가져다가 들여다보지 않아요. 대신 그 어둠 속에서 모빌랙 벽면에 기대앉아 30분간 잠을 청하죠. 그 뒤엔 밀걸레를 서른 개쯤 수레에 담아 가지고 와서는 그 넓은 봉안당 바닥을 끝없이 닦기 시작합니다. 그의 왼팔은 귀사의 공장 생산부에서 오랫동안 다져져 하루종일 바닥을 닦아도 끄떡없는 상태가 되었죠. 물론 그 다부진 왼팔도 공업용 글라인더 앞에선 두부와 다를 바 없게 되겠지만 말이에요.

 

유능한 저의 전임자는 그의 이 기행에 대해서 ‘예측이 불가능한 담즙질의 청년’이라고 평가했더군요. 물론 납골당에는 쓸 만한 자동 클리너가 세 대나 있지만, 그는 매일 30km의 통근길을 순례하듯 왕복하고 지하 17층 깊이의 봉안당을 고행하듯 청소합니다. 지하 철길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산지에 지어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게 근거 없는 헛소리라는 것도 알 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죠. 그저 돈이 안 되는 유해한 망자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파묻을 수 있는 지형이 산지였을 테니까요. 그들이 불태워져 매장된 납골당은 오로지 무수한 채무만이 가득한 지하 벙커로 그 자리에 공고히 ‘처박혀’ 있을 뿐입니다. 한 사람이 어떻게 광인인 동시에 담즙질일 수 있는지, 그 심오한 사유의 깊이를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이상 전임자의 결론을 도둑처럼 훔쳐 쓸 수는 없겠습니다. 그의 고용 노동과는 달리 그의 추모는 단순히 합리적으로 무가치할 뿐이다, 현재로서 제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뿐입니다.

 

저는 귀사에서 일전에 산업재해보상심의 결과 얻어낸 비용 절감에 대해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일은 일개 노무사인 제게는 적합하지 않은 업무 같군요. 귀사를 불쾌하게 했던 뇌과학심리연구소의 연구팀이 그의 ‘우완행동환각’에 대한 연구를 강행하기 위해 의료진을 포함한 법적 변호 팀을 구성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드리면서, 귀사의 이익에 더욱 큰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할 것을 재차 건의 드립니다.

 

*

산 인근 저수지 공원에는 부서진 나무 벤치가 하나 있다. 남자는 그곳에 앉았다. 그 자리에선 그 거대한 납골당의 한 귀퉁이를 멀찍이 내다볼 수 있다. 남자는 벤치에 눕듯이 앉아 시간을 보냈다. 이름 없는 납골당 귀퉁이를 바라보며 남자는 더 이상 일지를 작성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A4용지 세 쪽 분량으로 대충 적어낸 그 마지막 일지는 청년의 전 직장이자 남자의 현 고용주인 강산중공업의 본사로 전송되었다. 그러나 수기로 작성된 그 일지는 아마 산업복지담당관의 문턱도 넘지 못하고 보관 처리될 것이었다.

 

일지를 전송할 때 남자는 뭐랄까, 어떤 제의를 치르는 심정이었다. 계란으로 바위는커녕, 상상의 계란으로 용광로의 무쇠를 때리는 일이나 다를 바 없었으니까. 하지만 거친 손글씨로 적힌 원색적인 문장들을 본사의 책임자에게 들이민다고 생각하면 청년 앞에 조금 당당해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외로운 등대지기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는 것도 같았고, 패색 짙은 시위대의 숭고한 투쟁에 참여하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시위란 남자와 거리가 먼 단어였다. 남자는 5년 전, 마지막 일반노조 ‘교련(교육인일반연대)’ 해산의 주역이었다.

 

남자는 이제 자신의 직장이나 다름없는 그곳에 완전히 누워 오랫동안 잠에 들었다. 교련 해산 이후 남자는 노무법인을 퇴사했다. 그때까지 남자를 지독히도 괴롭혔던 교련의 슬로건은 ‘인문학 재고’, 구호는 ‘학문 앞에 정답 없다’였다. 왜 학문‘에는’ 정답 없다도 아니고, 학문 ‘상의’ 정답 없다도 아닌 학문 ‘앞에’ 정답 없다였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청년의 어머니는 교련의 그 기조를 근본 삼아 활발하게 활동하는 조합원에 속했다. 교육용 로봇 ‘메가 아이’의 수업을 참관하면서 기계적 오류를 잡아내는 것이 업무의 전부였던 교육인들은 교육청과 개발사 ‘커먼소프트’와의 논쟁을 지능적으로 이끌어내지 못했다. 대부분 완성된 학습체인 메가 아이와의 개별적 토론에서 각개 논파당할 뿐이었다.

 

근본적으로 이차원적인, 기본적으로 이진법적인, 결과적으로 이항대립적인 기계적 교육은 교실을 무사유 객관성의 구현이자 실존 증명 기능이 탑재되지 않은 기계 생산라인으로 전락시킨다고 그녀는 주장했다. 그녀의 주장을 메가 아이에 입력시키면 모나드로부터 시작해 데리다 차연론에 이르기까지 관련도 순으로 분석한 뒤 그것을 반박할 수 있는 철학적 유산들을 논리정연하게 출력해냈다. 모나드론으로 이를테면 그것이 라이프니츠의 원시적 개념을 이르는 것인지, 후설 식의 초월적 자아를 의미하는 것인지, 하이데거식의 해석학적 관점에 입각한 것인지를 모두 고려해 적합하고도 교묘한 쟁점을 다시 도출하는 식이었다. 메가 아이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가정은 그 자체로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이 결론은 요약된 것이었다. 최종 시험을 상정한 교육계에서 엄밀한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 것은 해당 교육과정에 기능적 모순이 있음을 ‘critic’하게 지시한다는 교육학적인 문제 제기나, 지나친 주관성과 해석학적 세계관의 결합은 유아 퇴행적 사고방식과 유사하다는 불쾌한 비판까지 포함하면 메가 아이의 반박문은 그녀가 충분히 미치고 펄쩍 뛰고도 남을 만했다. 이후 모나드는 존재의 엄밀한 근거가 아니라 의문사로서의 존재론적 결론이라고 보충했지만 그녀의 주장은 인용되지 않았다. 그 주장엔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해질녘, 누군가 남자를 흔들어 깨웠다. 트레이닝 바지에 후드티 차림의 낯선 누군가가 남자를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었다. 50대 쯤 되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피부가 하얗고 잘 관리된 상태였다. 남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자 그는 명함을 건네며 물었다. “혹시 사측 노무사분 되십니까?”

 

명함은 총 두 장이었다. 하나는 모 의과대학 전임교수 신분을, 나머지 하나는 뇌과학심리연구소의 임상연구센터 연구원 신분을 밝히고 있었다. 하나같이 읽을 수 없는 알파벳 이름이었다. 그. 외국분이세요? 그는 웃었다. “닥터 최라고만 부르시면 됩니다. 그냥 최씨라고 해도 좋구요.”

 

최씨의 ‘최’ 발음은 국어 교과서의 오디오 파일에서나 들어볼 수 있을 만큼 정직했다. ‘최’가 아니라 차라리 ‘취’로 들렸다. 무서울 정도로 모범적인 그 사소한 교양에 남자는 절로 기가 죽었다. 하지만 최씨는 마치 남자를 유명인사 대하듯 했다. 어느정도 유명인사이기는 했다. 남자는 최씨의 입에서 노무법인 ‘범고래’라는 이름을 오랜만에 들어볼 수 있었다. 교련 해산은 남자에게 성공가도의 끝이 된 동시에 유능함을 대외적으로 입증한 사건이기도 했다. 그 일로 강산중공업에 선임된 셈이었다. 남자는 씁쓸했지만 생각보다 견딜 만한 자기 모순이었다.

 

“그땐 그렇게나 악마 같아 보이시던 분이……. 아, 저도 교련 조합원이었습니다. 별로 열성적이지는 못했지만.” 최씨는 또 웃었다. 적의를 감추는 데에 탁월한 사람이었다.

 

최씨는 교련에 대해 연상할 수 있는 그 어떤 말도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수다스러웠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수다스러웠던 데에 비해 묻는 말에는 비교적 정확하게 답변했다. 최씨는 청년의 건강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방문했다고 밝혔다.

 

“저희 연구소는 노조가 아닙니다. 사측에서는 저희 연구에 어떤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오해하고 계시지만, 조금만 바꿔 말하자면 저희는 사측 주장에 설득력을 실어주고 싶을 뿐입니다.” 최씨는 들고 온 캐리어를 열었다. 정체불명의 장치가 들어 있었다. 의학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인 남자도 그것이 꽤 비싼 의료장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버블 검진 기구입니다. 작년에 3차원 뇌활동 조영장치가 개발됐을 때 사측에 적용 제안서 보내드렸는데, 기억하시죠? (기억에 없었다.) 답신이 없으셔서 급한 대로 휴대용으로 제작해온 겁니다. 저희는 조금 절박한 심정이거든요. 나름 검증도 끝냈고 비싼 겁니다, 이거.”

 

최씨는 새로 산 신발이라도 자랑하듯 즐겁게 웃었다. 그는 관련 기술력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덕분에 해가 지고 청년이 퇴근할 때까지 그의 기술적 설명을 듣고 있어야만 했는데, 누구보다도 이 일을 그만두고 싶은 남자 입장에서는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취고의 기술력!” 최씨는 난데없이 외쳤다.

 

청년은 산을 힘없이 내려왔다. 그리곤 멀찍이서 남자의 얼굴을 손전등으로 비췄다. 청년이 남자를 감시하는 유일한 때였고, 남자는 그 불빛에 자주 잠에서 깨곤 했다. 이번엔 조금 달랐다. 청년은 남자와 최씨의 얼굴을 번갈아 비춰보고는 얼마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최씨는 조금 기다려주는가 싶더니 결국 청년에게 빠르게 다가가 섰다. 기존의 것들보다 월등히 많은 정보를 직관적으로 스캔, 출력할 수 있다는 3차원 뇌활동 조영 장치와 함께 남겨진 남자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 상상해보았다. 최씨는 무의미한 서두로 정신을 쏙 빼놓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뇌를 3차원으로 조영해보자고 제안할 것이다. 청년은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뇌에 종양 같은 병변이 없는지 X레이 찍듯 검사만 하는 거라고 설득할 것이다. 청년은 귀찮아 할 것이다. 몸에 칼 하나 대지 않는 작업이며,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퇴직 근로자들을 위해 뇌과학연구소에서 제공하는 무료 건강검진 같은 거라고 덧붙일 것이다. 청년은 혹하지 않는다.

 

청년은 남자에게 다가왔다.

 

“잘 잤소?”

 

청년은 남자 앞을 신발코로 쿡쿡 찍어 작게 구덩이를 만들었다. “깜빡하고 불을 안 끄고 와서. 난 지금 피곤하니 내 대신 올라가서 불 좀 끄고 오쇼. 돌아와서 열쇠는 여기 묻어두시고.”

 

남자는 갑자기 자신에게 내던져진 한 꾸러미의 열쇠 다발을 들고 멍청히 청년을 바라보았다. 청년은 남자의 대답도 듣지 않고 퇴근길을 걸어나갔다. 어느새 벤치 앞으로 돌아온 최씨와 남자는 멀리 납골당을 내다보았다. 등대처럼 환한 빛이 능선을 비추고 있었다.

 

 *

청년이 근무했던 생산라인은 자회사 강산하이텍의 공장단지에 있었다. 그곳은 꿈의 도체라고 불리는 서머늄을 작게 잘라낸 뒤 첨단산업 생산부로 이동시키는 최초 공정이었다. 극저온으로 냉각된 서머늄을 쪼개지지 않도록 섬세하게 잘라내는 것이 청년의 역할이었다.

 

기계 인간들의 세상이라도 만들고 싶은 모양인지, 그들은 여러 대학 연구소의 의학, 공학 박사들을 동원한 세미나를 주기적으로 개최했다. 어떻게 하면 로봇 팔을 실제 팔과 활동 면에서 동일하게 설계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주된 논제였다. 강산하이텍에서 개발한 최초의 로봇팔은 사용자의 뇌파를 우선 감지한 후 그것이 어떤 근육에 대한 신호인지를 판별했다. 그 뒤 적합한 부분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었다.

 

잠시 위축되었던 로봇 팔 산업은 서머늄의 발명으로 인해 활기를 되찾았다. 기존의 것은 판독과 입력, 전송과 출력 과정이 모두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움직임이 정확하지 않았을뿐더러 미세하게 반응이 느렸는데, 서머늄 덕분에 뇌에서 발생하는 전기신호를 그대로 로봇팔에 전송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었다. 완전히 실제 팔과 동일하지는 않았지만 새로 출시된 로봇팔은 관련 산업의 최종이라고 불렸다. 조금 비싸게나마 상용화에도 성공한 편이었다. 사용자가 로봇팔을 완전히 자신의 팔로 여기기만 한다면 증폭 작용만 한번 거친 뒤 로봇팔로 신호를 전송할 수 있었다. 더 빠른 로봇팔은 상상할 수 없는 듯했다.

 

문제는 결과물이 아닌 제작 공정 자체에 있었다. 공장 노동자들의 절단 사고가 자주 발생한 것이었다. 뇌과학연구소에서는 글라인더 마찰에 의해 가열된 서머늄이 불안정한 가스 형태로 인체에 흡입되면 만성적인 환각 증세를 유발할 수도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해당 문제에 대해 직접적인 반박은 없었다. 대신 강산중공업에서는 작업 간 저온의 환경이 유지되어야 하는 소재 특성상 작업자들의 근육 활동이 저하되는 문제를 발견했으며, 작업자 보호와 생산력 확보를 위해 작업복 개선에 힘쓰겠다고 발표했다. 청년의 팔이 잘린 건 체온이 떨어짐에 따라 팔이 빠르게 반응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남자로서는 서머늄이 환각을 유발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본사에서 요구받은 대로 청년이 ‘애초에’ 이상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증거만 발견하면 되었다.

 

 *

본사 건물은 고층이었지만 무리하게 한옥풍이 시도된 형태였다. ‘행복한 일상, 첨단의 당신을 위하여- 강산그룹’ 붓글씨로 작성된 건물 간판이 편안하게 눈에 들어왔다. 중공업사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전통문화 연구소 정도로나 보이는 곳이었다. 로비엔 백색광을 잔뜩 받은 직원들이 방문자들을 맞고 있었다.

 

남자는 건물 3층에 있는 산업복지담당관 사무실에 앉아 오래 기다려야 했다. 직원들은 남자를 몰랐다. 여러 사람에게 청년의 일로 온 노무사라고 소개한 끝에 연금 담당자를 만난 게 고작이었다. 연금 담당자는 새로운 연금 지원 대상자 명단에 청년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며 웃었다. 소비자들이 교련의 우려대로 공리적으로만 판단하는 기계는 아니었기 때문에 서머늄 이슈는 강산중공업에게 위협적이기는 했다.

 

지금 연금을 주면 산재 신청자들은 자신감만 얻게 될 텐데요.

 

“그래도 좋은 일은 좋은 일이잖아요? 문제는 산재 연금이 아니라는 점이죠. 빨리 그 심의 절차가 끝나야만 연금 지급이 확정될 텐데요. 그 과정이 언제 끝날지 참.”

 

담당자는 꾸며낸 한숨을 쉬었다. 연금을 당근 삼아 청년을 포기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일은 청년이 포기하고 말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청년은 의욕이 없어보였다. 중요한 건 강산중공업 측에서 얼마나 적극적으로 뇌과학연구소와 싸울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

“선생님께서는 제가 강산하이텍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실 겁니다.”

 

최씨는 매일같이 저수지를 방문해 남자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별다른 고민은 없어 보였다. 청년의 뇌파 정보를 수집하려는 의지는 생각만큼 강해 보이지 않았다. 한 번은 추리닝 차림으로, 어느 때엔 정장 차림으로, 또 어느 때엔 연구복을 섞어 입은 채 모습을 비췄다. 생각날 때마다 빈소에 들르는 누군가의 유가족 같았다.

 

남자는 대학 시절 본 적이 있는 교수들을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그들은 학제를 불문하고 모두 공학도 같은 인상을 풍겼다. 적어도 사람 대할 줄 모르며, 과묵하면서도 발언마다 직설적이었다. 누군가를 어르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할 위인들은 절대로 아니었다.

 

“세상에 팔다리 없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기계 팔이라는 게 기술 특성상 기성화가 안되는 성질의 것인데도 비교적 저렴하게 새로운 육체를 제공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느 기업에서는 육체노동자들에게 10년을 근속하는 조건으로 기계 팔을 무상으로 서비스하고 있기도 합니다. 강산하이텍의 기계 팔 말입니다. 일의 능률을 위해 팔다리가 멀쩡한 사람들도 기계 팔을 사용한다 이겁니다. 이것이야말로 기술사회 혁신 아닙니까?”

 

최씨는 메마른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며 무언가 환희에 찬 듯 미소지었다. 해는 중천에서 지고 있었다. 남자는 최씨에게 자신에 대해 제대로 소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기업가들의 공통이해를 법적 언어로 지껄이는 번역기가 아니다. 강산중공업에 선임되었다고 해서 기계화를 찬양하는 머저리도 아니다. 나는 나름대로 정의롭고 인류애도 가지고 있다. 남자는 문득 돌아보았다. 커먼소프트사에 선임됐던 당시의 커리어는 노무법인 범고래의 영향이 너무 컸던 탓이었다. 복덩어리를 걷어찬 일이나 다름없는 사직 정도면 충분히 반성한 게 아닌가? “그런데.” 최씨는 말을 이었다.

 

“참 속상한 점은…… 이 기계 팔이 환불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판매된 기계 팔 대부분이 기능 정지 상태에 놓이게 됐는데 이게 맞춤형이다보니까요. 가격의 대부분이 동기화 비용인데 환불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충분히 이해합니다. 어쨌든. 지금의 기계 팔도 여전히 미세하게 반응이 느리다보니까 점점 그것이 자신의 팔이라는 인식이 사라지기 때문에…… 아시다시피 최신 모델들은 이전 세대 것들과는 작동 메카니즘이 판이하잖아요? 그게 얼마나 치명적인…… 지점인지 이해하시리라고 믿습니다. 모쪼록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단서가 바로 저분의 우완행동환각에 대한 면밀한 연구에 있다라는 사심도 있기는 합니다.”

 

최씨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완행동환각을 통해 기능 정지를 해소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연구는 이루어질 수 없다. 뇌과학연구소에서는 그 환각의 원인이 서머늄 가스에 있다고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우완행동환각에 대한 연구를 통해 강산중공업을 파멸로 이끈 다음 보완된 기계 팔 생산 공정 디자인을 다른 기업에 팔아넘길 셈인 것이었다. 남자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강산중공업이 어떻게 되든 남자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남자는 오직 최씨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는 데에 화가 났다. 그런 뻔한 거짓말로 자신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데에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다.

 

저분에게 건강검진이 필요하다면 저분께서 알아서 할 일입니다. 지금 이상으로 검진을 강요하는 건 곤란하죠. 더 찾아오신다면 불법 치료 종용으로 신고하겠습니다.

 

남자는 납골당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그곳이라면 남자에게 일시적인 안식을 줄 것 같았다. “참 낭만적이십니다!” 최씨가 외쳤다. 남자가 돌아보자 최씨는 떠들었다. “혁신은 예정되어 있습니다! 누가 그 주역이 되느냐가 우연적일 뿐이죠. 죽도록 싫더라도 지구는 돕니다. 운명적으로!” 최씨는 Innovation(혁신)과 Revolution(혁명)을 의도적으로 혼용하고 있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남자는 달렸다.

 

남자는 청년을 찾아 헤맸다. 어둡고 서늘한 납골당은 지하로 내려갈수록 남자의 숨통을 강하게 조였다. 땀을 흘리며 계속 달렸다. 당혹스러울 만큼 수많은 봉안당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청년은 어디에도 없었다. 봉안당과 봉안당 사이에 끼어 압사당해버린 게 틀림 없었다. 완전히 어둠에 갇히기 전에 멈춰선 남자는 사정없이 모빌랙을 돌렸다. 몇백 미터는 겹쳐진 봉안당들이 굉음을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땀에 젖은 손잡이를 몇 번이고 놓친 끝에 손가락 한 뼘 정도의 공간이 드러났다. 남자는 그 안을 몰래 들여다보았다. 그곳은 밤하늘처럼 끝없이 흐렸다.

 

 *

청년은 해가 지고 나서야 납골당을 나섰다. 청년은 정문 옆에 주저앉아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남자가 물었다. 산재 포기하면 연금 준다는데 그렇게 하실래요?

 

“그렇게 하쇼.”

 

청년은 별 관심 없는 듯 즉답했다.

 

대신 그렇게 하면 앞으로도 계속 수많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팔이든 다리든 잘라낼 겁니다. 공장이 정교해진다면 글라인더 안에 몸을 던져넣을 수도 있어요. 결국 저렇게 지하 깊숙이 쳐박혀서 발견되지도 않는 죽음이 돼버리겠죠. 사람들은 계속 죽을 거고, 또 공간이 부족해지면 아예 모빌랙을 떼고 공간마다 채워넣을지도 모릅니다.

 

“여기 제삿밥 바라는 양반 하나도 없소.”

 

상용화를 거듭하면 인간 몸보다 기계 몸이 더 낫게 됩니다. 근력도 체력도. 마지막엔 뇌까지도 전자부품으로 갈아치우게 되겠죠. 기계들만 남아서 사람 말을 지껄이는 세상을 견디실 수 있습니까? 그게 옳게 된 겁니까?

 

“그거야 배운 사람들이 알아서 고민할 일이고. 보쇼.”

 

청년은 자신의 소매를 입으로 물어 걷어냈다. 왼팔이 드러났다. 청년은 보디빌더처럼 불끈 힘을 주었다. 핏줄이 피부 바로 밑으로 도드라졌다. 근밀도가 상당한 육체노동자의 팔이었다.

 

“이렇게 멋진 팔 본 적 있소? 이게 로보캅 아니면 뭐요?”

 

청년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왼팔을 조금 감상했다. 남자는 청년이 합리적인 사람은 못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런 그를 설득하겠다는 정의감에 자신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는 사실도. 사람 말을 지껄이는 기계들의 세상이라니. 그걸 견딜 수 있겠느냐니. 이미 청년은 견디고 있었다. 그래, 참 낭만적이구나. 남자는 최씨의 평가에 뒤늦게 동의했다.

 

 *

남자는 약속대로 청년이 완전히 정년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계약서를 몇 가지 마련해 강산중공업 본사로 향했다. 연금 담당자가 아니라 산업복지담당관 부장이 직접 남자를 맞은 건 그 일로 오랜만이었다. 부장은 남자가 제시한 계약서들을 면밀히 확인했다. 그리곤 하나씩 도장을 찍었다. 어차피 곤란하면 재심의니 뭐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를 수도 있는 문제였다. 검토를 끝낸 부장은 깍지를 낀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뇌과학연구소 얘기는 뭡니까?”

 

남자의 일지가 무사히 부장에게 도착한 모양이었다. 남자는 최씨와 휴대용 조영장치에 대해 설명했다. 마치 출장 헌혈처럼, 뇌과학연구소는 청년이 마음만 대충 먹어도 바로 스캔할 수 있는 기술력을 확보한 것이었다. 남자는 보관용 계약서를 나눠갖고 사무실을 떠났다. 그들이 대응팀을 꾸리든 용역을 동원해 장치를 부수든 남자의 일은 끝났다.

 

남자는 도시 곳곳 아무 데나 누볐다. 일전의 일지는 정말로 마지막 일지가 되었다. 청년을 관찰하는 일에서 벗어난 남자는 해방이라기보다는 외려 탈락한 기분이었다. 예상치 못한 바는 아니었다. 노무법인 퇴사로는 죗값이 가볍다고 여기던 차였다. 이만하면 되었다. 이제 슬슬 대기업 의뢰도 끊길 게 뻔했다. 남자는 가난한 삶도 버틸 만하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전에도 꽤 괜찮은 커리어를 가지고 있었지만 어차피 의뢰는 거의 없었다. 실력은 어디 가지 않았다. 남자는 어떤 거친 땅에든 때려박을 수 있는 뾰족한 말뚝이었지만 도시는 강철 같았다. 도시는 이제 너무 단단했다. 두드려볼 구석이라곤 없었다. 여러모로 중무장한 이곳에서 비판하고 들 모나드란 없어보였다. 하긴 그랬다. 모나드는 낭만적인 에포케였다. 그건 오래된 서정시와도 같았다. 낭만은 유행이 빨리 지나는 법이었다. 양심을 너무 싸게 사들이는가. 그렇다는 답이 머릿속에서 고개를 들 때마다 남자는 빠르게 걸었다. 남자는 30km쯤 걸었다고 생각될 때까지 계속 걸었다. 어차피 아무도 남자의 죗값을 계산해주지도, 형을 선고해주지도 않았다.

 

 *

남자는 마지막으로 납골당에 방문했을 때 사고를 당했다. 잡초들을 서툴게 피해 언덕을 오르던 남자는 청년의 비명을 듣고 달음질 쳤다. 그놈의 뇌활동 조영장치 때문이었다. 최씨는 청년의 하나 남은 팔뚝에 주사를 꽂아 조영제를 투여했다. 몸 곳곳을 뜨겁게 헤집는 열감에 당황한 청년은 머리에 스캐너를 쓴 채 난동을 부렸다. 조영장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묘한 전파 때문이라고 착각한 것이었다. 청년은 최씨의 조영장치를 걷어찼다. 조영장치는 케이블을 질질 끌며 언덕길을 굴렀고, 때맞춰 올라오던 남자의 정강이를 가격한 뒤에야 멈췄다.

 

온몸이 창백하게 질린 채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엑스레이 촬영부터 수술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마취에서 깬 남자는 조영장치가 제값을 했다는 걸 바로 알았다. 외팔잡이 청년은 납골당에 있을 게 뻔했다. 종아리뼈가 두 동강 났고 수술로 다 붙였다. 최씨는 출산이라도 해낸 사람 대하듯 웃으며 남자를 반겼다. 남자는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저리고 뻐근한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붕대에 감겨 상태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소하셔야죠?”

 

남자는 최씨의 말뜻을 바르게 물었다. 무버블 조영장치는 특허만 냈을 뿐 가격 책정은 아직 안 된 물건이었다. 부르는 게 값이라는 뜻이었다. 청년과 남자가 축구라도 하듯 그걸 걷어차다가 장치가 박살이 나버렸으니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그 돈을 내가 어디서 납니까?

 

“그러니까 고소를 하셔야죠. 고소를 해서 이겨야 저희 연구소에서도 청년에게 청구를 할 겁니다.”

 

그 청년은 저보다도 가난한 사람입니다.

 

“연구소는 선생님께 배상 청구를 해야 강산중공업에 타격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게 뻔하고, 사측에서는 선임했을 뿐 고용한 게 아니라 의무 없다고 잡아뗄 겁니다. 덤터기는 선생님만 쓰게 돼 있죠.”

 

선임도 끝났으니 뻔했다.

 

“몇억 대 금액으로 겁만 주고 연구 협조받으면 그게 청년한테 받아낼 수 있는 전부입니다. 돈이 필요하면 팔 우물 따로 있지요. 유골함에 담긴 게 어디 금가루라도 된답디까?”

 

최씨는 깔깔깔 웃다가 굳게 닫힌 남자의 입을 보곤 즉시 안색을 바꿨다.

 

 *

남자는 저수지 공원 벤치에 앉아 낮부터 청년을 기다렸다. 보호대를 한 다리로는 도저히 오르막을 오를 수 없었다. 하지만 해가 지면 남자는 예외 없이 잠들어버렸다. 최씨가 배려해준 유예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는 규칙적인 기면증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쏟아지는 잠을 참을 수 없었다. 눈을 떴을 땐 별로 밝지도 않은 달이 하늘 어디든 박혀 빛나고 있었다.

 

유예기간 마지막 날, 결국 남자는 오르막을 올라야만 했다. 사실 채무강제집행정지신청서도 가방 한편에 마련해둔 상태였다. 이젠 남자에게 정의로워질 기회 같은 건 없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오르막을 오르는 건 청년을 고소하기 전 최소한 합의라도 해볼 생각 때문이었다. 그 복잡한 과정을 청년에게 설명할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었다. 이해하기 어렵기로는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노무사인 남자는 민사 건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정말 이런 일로 천문학적인 액수를 개인에게 청구할 수 있는 것인지,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 때 강제집행정지신청서가 남자를 보호해줄 수 있는지도. 뇌과학연구소는 강산중공업에 얼마의 손배를 신청할 것인가.

 

거의 기어오르다시피 납골당에 도착한 남자는 본격적으로 청년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남자는 지금 남자와 청년이 처한 금전적 위기에 대해 어떻게 하면 쉽게 설명할 수 있을지 필사적으로 고민했다. 설명은 두 문장을 넘겨선 안 됐다. 지하 1층, 지하 2층. 납골당은 갈수록 어두워졌다. 너무 어두워서 불을 켜지 않고서는 도저히 청년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인데도 남자는 계속 ‘손해배상’이라는 단어만을 곱씹으며 미로 같은 봉안당을 누볐다.

 

청년을 찾는 건 너무 어려웠다. 그냥 고소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계속 움직이던 다리가 우뚝 멈췄다. 저도 모르는 새 남자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놓여 있었다. 고소장을 접수하려면 지금 당장 법원으로 가야 했다. 남자는 군대에서 배운 대로 정확히 뒤로 돌아 벽을 더듬어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5분, 10분. 남자가 내려온 계단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급해질 때마다 남자는 뛰었고, 무언가에 부딪혀 코가 부러지는 불길한 생각이 들 때마다 놀라서 멈췄다. 다리가 빠개질 것만 같았다. 거의 1시간 가까이 걸었을 때 남자는 자신이 며칠쯤을 걸었다고 생각했다. 틀림없이 이곳에 갇혀버린 거라고. 남자는 공포감에 힘이 빠졌다. 자리에 누워 어둠에 익숙해지기만을 기다렸다. 눈을 감고 있는지 뜨고 있는지도 모를 만큼 아찔한 어둠이었다. 남자는 눈에 힘을 주고 어둠 속 어딘가를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뭐든 보이기를 바라며. 5분, 10분, 또 한 시간 가까이 누워 있었을 때 남자는 자신이 이 어둠을 며칠쯤은 들여다봤다고 느꼈다. 이젠 어떻게 할 것인가? 남자는 그만 눈을 감았다.

 

“여기서 뒈지면 곤란한디. 여긴 죽고 오는 곳이지 죽으러 오는 곳이 아니요.”

 

어느새 잠이 든 남자는 청년의 목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청년이 남자에게 비추는 손전등은 달빛보다 강했다. 남자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전등이 덕분에 더 이상 어둡지 않았다. 남자가 달려온 통로를 따라 모빌랙 레버들이 앞뒤로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끝을 확인하기엔 시력이 모자랄 정도였다. 놀란 남자의 눈을 확인한 청년이 말했다.

 

“이까지 한 번도 내려와보도 않고 공간이 부족해진다느니 어쩌니 했던 거요?”

 

청년은 그리고 밀대가 가득 담긴 카트를 밀며 통로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다급히 청년을 불렀다.

 

당신, 왜 글라인더에 팔을 밀어넣었습니까?

 

청년은 잠시 남자를 돌아보더니 잘린 자신의 팔을 수평으로 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거기 자신의 팔이 있기라도 하다는 듯 팔을 이리저리 돌렸다. 남자의 눈에는 바닥을 향해 축 늘어진 소맷자락밖엔 보이는 게 없었다.

 

“그냥, 저기 팔을 한 번 밀어넣어봐야것다, 싶어서 그렇게 했소.”

 

환각 때문에 그런 거예요?

 

“환각 그런 건 잘 모르겠고. 그냥 그렇게 했다고.”

 

청년은 더 이상 이야기할 게 없다는 듯 다시 카트를 밀었다. 남자는 가만히 앉아서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젠 늦었다. 청구서는 내일 당장 본사에 넘겨질 것이었다. 그냥 선임한 정도를 넘어서 이젠 그 선임마저 완전히 끝났다. 이미 법적으로 책임소재가 분명해진 뒤 청년을 고소해봤자였다. 아마도 법원에서 험한 꼴만 보게 될 것이었다. 남자는 자신이 결국 제대로된 벌을 받는다고 느꼈다. 그리고 청년의 어머니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가 어떤 말이라도 하지는 않았던지. 그녀와 그녀의 교련 동료들로부터 남자가 뭐든 미리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인지. 하지만 그런 건 없었다. 청년의 어머니는 구시대의 마지막 증언자도 아니었고, 남자는 사이버 펑크 사회 같은 것의 마지막 인류도 아니었다.

 
동록개

김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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