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사탄실직

2023.03.30 16:3103.30

“실직했습니다.”

 

3월 29일. 4월이 얼마 남지 않은 그날은 이상할 정도로 밤하늘에 구름이 가득했고 그 사이로 엿보이는 달의 형태는 마구잡이로 이지러져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하지만 그게 특별히 어떻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 삶은 이미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폐가 같은 꼬락서니였으니까. 겨우겨우 구한 방은 천장에서 물이 새는 바람에 침수 당하고, 있는 돈 없는 돈 긁어모은 저축은 침수당한 가재도구를 처리하고 다시 사들이는 동안 놀란 참새 떼처럼 날아가 버렸다. 그나마 주인이 집을 수리해주기는 했으나 조금 있으면 전세를 구하러 다시 나가야하는 내 처지를 생각하면 반짝반짝하게 빛나는 장판이나 깔끔한 문턱은 공연히 내 화를 돋우기만 했다.

 

그렇지만 특별히 하소연할 곳이나 속내를 털어놓을 친구도 없다. 그래서 나는 그날도 인터넷에 접속하여 적당한 먹잇감이 없나 찾아보던 중이었다. 날은 적당히 시원했기에 환기도 할 겸 창문도 살짝 열어놓았다. 아마도 그것이 화근이었던 모양이다.

 

“뭐라고요?”

“실직했습니다.”

 

내가 되묻자 상대방이 아까와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근데 어떻게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을까? 그 자는 딱 어깨 죽지까지만 인간의 형체를 하고 있었고 그 위로는 검은 까마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탈일까? 하지만 그가 목을 까딱일 때마다 보이는 깃털의 움직임은 싸구려 탈로 재현했다고는 믿기 힘든 완성도였다. 나는 갑자기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트림기를 느끼고 입을 손으로 가렸으나 뱃속에서 끓어오른 닭고기와 탄산의 기운은 힘차게도 뻗어 나왔다. 꺼어억.

 

“흐음! 저를 보시고도 놀라거나 비명을 지르기는커녕 트림이라니! 아주 멋집니다.”

“당신, 아니, 당신이… 누군데요?”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악마입니다.”

 

여름은 한참 멀었고 날씨는 아직 쌀쌀했다. 체질상의 문제로 술을 먹지 않는 나는 내가 더위를 먹었거나 술에 취한 모양이라고 변명할 수도 없었다. 코로 스며드는 향수 냄새가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아, 그러고보면 아빠가 되도 않는 멋을 낼 때에 이런 느낌의 향수를 뿌렸던 것 같아.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자신을 악마라고 소개한 자가 멋지게 한쪽 팔을 접어 인사했다.

 

“악마 가빈! 그게 제 이름입니다. 편하게 가빈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그렇게 쉽게 이름을 막 가르쳐줘도 되는 건가요?”

“물론 이건 가칭입니다. 진정한 이름은 저희가 더 깊은 밀약을 맺을 때 알려드리죠.”

 

악마 가빈은 꽤나 공손했다. 그제서야 나는 내 머릿속에 퍼진 경악과 공포의 감각을 간신히 상식적인 언어로 바꿀 수 있었다. 그건 강간과 강도였으나 눈앞의 상대는 장갑을 낀 손을 제외하면 무기로 삼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저만한 덩치를 가진 이상 주먹이나 발차기를 쓰면 또 모르겠지만. 내가 마른 침을 삼키는 사이 가빈이 말했다.

 

“제가 왜 찾아왔는지 궁금하신 얼굴이군요.”

“…….”

“자,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마시고 찬찬히 생각해보세요. 제가 처음에 뭐라고 말씀했는지 기억나십니까?”

 

처음? 처음에? 자칭 악마 가빈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나는 평소처럼 집으로 돌아와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 내가 5년 동안 사용한 노트북 앞에 앉아있었다. 꽤나 오래되었으나 아직까지는 부팅이나 키보드 입력에 문제가 없는, 내가 처음으로 마련한 모 전자회사의 노트북이다. 나는 무선 마우스를 잡고 휠을 굴리던 동작 그대로 검지를 움찔거리다가 가장 처음에 느낀 위화감을 겨우 기억해냈다.

 

“실직…했다?”

“네, 실직했습니다. 잃을 실에 직분 직. 다시 말해 저는 무직 악마인 셈이죠.”

 

그게 가능한가? 멍청하게 입을 뻐끔거리고 있자니 가빈이 손을 몇 번 움직여 생수를 손에 쥐었다. 그 뚜껑을 따서 내 손에 쥐어주는 동작이 자못 신사적이었다. 하나라도 더 익숙한 정보가 필요해 내 손에 들린 생수를 쳐다보면 틀림없이 전에 구매한 브랜드의 생수병이다. 이건 오늘 도착했는지라 전부 현관에 포장된 채로 있을 텐데 어떻게 뜯어 가져왔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나는 뚜껑이 따인 생수를 시원하게 마셨다.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갈증이 마구잡이로 날뛰며 목으로 흘러넘치는 수분을 빼앗아갔다.

 

“악마?”

“네, 악마입니다. 피할 수 없는 계약을 통해 사람의 영혼을 빼앗고, 정갈한 영혼을 타락시키고. 그런 일을 하지요.”

 

이걸 보여드리면 더 이해가 빠르시겠군요. 가빈은 손가락을 맞부딪쳐 딱 하는 소리를 내고는 (내가 가장 못하는 기술이다) 자신의 품에서 작은 직육면체 종이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인 마 물 산

 

제46부서 과장 가빈

 

그 밑에는 직통 번호나 개인 단말기 번호로 보이는 것이 적혀있었으나 도무지 내 눈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형태로 적혀있었기에 무시했다. 반사적으로 주머니를 뒤지던 나는 내가 지금 헐렁한 트레이닝복 차림임을 깨닫고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다행히도 퇴사하면서 가져온 명함 덩어리들은 노트북 근처에 누름돌처럼 놓여있었다.

 

“이, 이건 제 명함입니다. 퇴사했지만.”

“음! 감사합니다.”

 

가빈은 내 명함을 정중히 받아들고는 그 위에 쓰여진 정보를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찬찬히 읽어보았다. 고작해봐야 어느 회사 어디 부서 누구누구 정도밖에 적혀있지 않은 명함인데 말이다. 그 동작은 상대방의 정보와 직책을 최대한 존중하겠다는 뜻으로 느껴졌고 그 모습을 본 나는 놀랍게도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고 보면 누군가에게 제대로 내 명함을 준 건 이번이 처음이로군. 생각하는 사이 가빈이 명함을 품에 집어넣었다.

 

“강을현 씨. 역시 제가 찾아온 분이 맞았군요.”

“확실히 제가 강을현이지만… 대체 왜 저를?”

 

상대는 가스검침원이나 카드배달부가 아니다. 그가 한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더불어 그걸 신뢰한다면) 그는 이 세상이 만들어질 때부터 존재한 개념이자 만인의 두려움을 받는 악마였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왜 나를 찾아오지? 게다가 과장급이라고?

 

“두괄식 어법이 좋다고는 하지만, 이번엔 제가 다소 서둘렀나 보군요.”

 

가빈은 부끄럽다는 듯 자신의 부리를 긁적이고는 나에게 자리에 앉아도 될지 양해를 구했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으나, 생각해보니 이 원룸에는 지금 내가 앉은 책상 의자를 제외하곤 앉을 의자가 없다. 내가 그걸 사과하기도 전에 가빈이 능숙하게 가부좌를 틀고 자리에 앉았다. 악마가 가부좌로 앉아도 되나?

 

“한결 편하군요. 아, 을현 씨는 거기 계속 앉아계셔도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나는 내 마지막 남은 양심이 지르는 고함을 들으며 슬그머니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앉았다. 가빈은 내가 취하는 태도나 동작에는 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몇 번 부리를 까딱이다가 입을 열었다.

 

“가장 처음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실직했습니다.”

“악마가 실직하는 일이 있나요?”

“의외로 많습니다. 최근에 와서는 빈도도 늘었죠. ‘사탄실직’이라는 말을 들어보지 않으셨습니까?”

“……들어본 적은 있지만.”

 

그건 보통 일반적인 고정관념을 안 좋은 의미로 부숴버린 사람을 봤을 때 농담처럼 말하는 것일 텐데. 생각만 하고 말만 못하고 있자니 가빈이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건 인간들 사이에서 통하는 농담이었습니다. 저희 악마들도 이따금 그런 말을 들으면 웃어넘겼죠.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그 말은 더 이상 농담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가빈은 괴로운 표정으로 (내가 언제부터 그의 표정을 알아볼 수 있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을 이어나갔다. 처음에는 경영 흑자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회사들이 하나 둘 대기업에 인수합병되기 시작했다. (“악마들도 회사에 다니나요?” “네, 아무래도 인간 사회를 닮아가게 마련인지라.”) 그런 다음에는 실적을 내지 못하던 약소 회사 소속의 악마나 실적을 내지 못한 악마들이 무기한 대기 발령이라는 형태로 업무에서 제외되었다. 이에 심적 피로를 느낀 많은 악마들이 스스로 사직서를 내고 프리랜서로 전향했다고 한다. (“프리랜서 악마라는 것도 있나요?” “입에 풀칠은 해야 하니까요.”) 그러더니 이제는 기업 대규모 조정이라는 명목 하에 나름 탄탄한 기업에 다니던 가빈에게도 실직의 그림자가 몰려온 것이다.

 

“어째서요?”

“인간이 너무나 사악해졌기 때문입니다.”

 

가빈은 바로 지난 주 유지 보수가 끝나 말끔해진 전세 집 천장을 올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악마는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악의의 끝에 다다른 존재가 아니었나? 아무리 그래도 악마가 악마 본연의 입지를 잃는 일은 어려울 텐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가빈이 번쩍 고개를 내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인간의 악의는 악마를 넘어섰습니다! 이제는 100명의 악마가 있어도 한 명의 인간의 머리에서 나오는 사악한 발상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죠.”

“그 정도인가요?”

 

그 정도까지 되나? 아니, 애초에 그걸로 질 정도면 처음부터 악마라는 건 그리 대단치 않은 존재였던 거 아냐? 실례일지도 모르는 생각을 입 꾹 닫고 하고 있자니 가빈이 말을 이었다.

 

“물론 저희 악마들도 노력했습니다. 인간이 가진 원초적 욕망을 자극하고, 마음의 허무에서 생겨난 욕망을 공략하고,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환락과 쾌락의 영역으로 그들을 인도하려했지요. 그런데.”

“그런데…?”

“인간들은 악마조차 농락할 정도로 뛰어난 사악의 영역에 도달했던 겁니다.”

“예를 들면?”

“사탄을 산타로 바꿔 부르며 저희의 이미지를 친숙하게 만든다던가.”

“…….”

“악마에게 홀린 자의 행동을 효율적이고 이성적인 생활양식으로 받아들인다던가.”

“……….”

“아무런 악의도 없는 자의 의견을 사악하고 몰상식한 것으로 몰아가는 등!”

“…………허어.”

“그래서 제가 을현 씨를 찾아온 겁니다.”

 

갑자기 이야기의 포커스가 나한테 돌아온다. 가빈이 이야기를 이어가는 동안 긴 물병에 물을 담아올 정도로 그에게 친숙함을 느낀 나였으나 이렇게 변화구로 훅 들어오면 곤란하다. 내가 눈을 껌벅거리고 있자니 가빈이 가부좌를 튼 자세 그대로 물병 속 물을 콕 찍어마셨다.

 

“을현 씨는 SNS를 하시죠?”

“네, 하죠.”

“실례지만 계정이 여럿이시구요.”

“그건 어떻게 아시는 거죠?”

“악마니까요.”

 

참고로 각각의 계정으로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지도 저는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습니다. 가빈이 태연하게 말했고 나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경악에 빠졌다.

 

“이거 개인정보 침해 아니에요?”

“사업상 비밀로 다뤄지고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애초에 실직했다면서요!”

“사실 조건부 실직이지요.”

“사기꾼아!”

“악마입니다.”

 

가빈은 담담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사실 악마들이 소속된 회사도 무작정 구조조정을 진행하지는 못했다. 인간에게 악의를 외주 맡긴다고 해도 공급이 불안정하고 질이 고르지 못하다는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사 수뇌부는 악마들에게 한 가지 지령을 내렸다.

 

「양질의 악의를 공급받을 수 있는 인간을 찾아라! 못 찾으면 너희는 모가지다!」

 

“가차없네요.”

“악마니까요.”

 

그래서 많은 악마들이 악의를 가진 인간을 찾아 각자의 방법을 고안해냈다. 어떤 이는 현대 문명 속으로, 어떤 이는 오래전부터 애용되는 오컬틱한 방법으로…. 그 모든 방법이 성공하진 않았으나 전부가 실패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가빈이 눈여겨본 방식은 SNS에서 이루어지는 악의의 흐름을 포착하는 것이었다. 그는 SNS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흐름에 주목하여 일정한 도표를 작성했다. 이를테면 어느 계정이 가장 많은 불화를 일으키는지, 어떤 계정의 트윗이 가장 빠르게 번져나가는지 등등이었다. 그리고 가빈은 나를 발견했다.

 

“이 모든 조건을 종합했을 때 을현 씨의 계정은 사람들의 악의를 불러일으키는 뜨거운 감자입니다. 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공급처죠.”

“그렇군요…. 잠시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가빈의 말을 모두 경청한 나는 몇 번 헛기침을 하고는 내 계정을 변호하기 시작했다. 우선 내 계정이 불화를 일으킨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 불화는 내가 의도해서 일어난 게 아니다. 내 계정은 단순히 현대 사회의 일면을 찍어서 올리는 계정이지 다른 사람들끼리 싸우고 욕하는 걸 보기 위해 만들어진 계정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눈에 띄는 이슈들이 공교롭게도 사람들 간의 의견 차를 극명하게 만드는 것이라 팔로워들이 서로 싸우게 되는 경우가 많을 뿐이다.

 

물론 사람들이 이러한 요소를 불쾌하게 여긴다면 언제든지 계정 차단이나 뮤트 기능을 쓸 수 있다는 점도 빼먹지 않고 어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계정의 팔로워는 언제나 만 명을 가볍게 넘겼으며 올린 트윗도 거진 반나절 안에 5천 알티를 기록했다. (인용 알티 포함) 그렇다는 것은 악의의 발화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인식에 있지 않겠는가?

 

“확실히 맞는 말씀입니다.”

“그럼….”

“하지만 을현 씨도 아실 겁니다. A를 보고 서로 의견이 갈려 싸우는 사람이 생겼을 때, 사태를 조정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A를 치워버리거나 더욱 과장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 트윗을 지우지 않았으니 사악하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불쾌한데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가빈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천만의 말씀. 저는 을현 씨의 도덕성이나 윤리를 꾸짖으러 온 게 아닙니다. 을현 씨가 가진 타인을 향한 영향력. 그것을 보고 찾아온 것이죠.”

“그렇다는 말은?”

“깔끔하게 결론을 말하죠. 저와 거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가빈은 그렇게 말하고는 품에서 종이를 꺼내들었다. 근로계약서와 비슷한 형태를 가진 두 장의 계약서였다. 내가 그걸 미심쩍게 쳐다보고 있자니 가빈이 첫 번째 계약서를 짚으며 친절히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을현 씨가 하실 일은 지금처럼 계속 계정을 운영하시는 겁니다. 그 외에 달리 하실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기 항목으로도 명시되어 있지요?”

“그럼 이걸로 제가 얻는 것은 뭐죠?”

 

가빈이 장갑 낀 왼손으로 엄지와 검지를 맞닿게 해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고전적인 제스쳐였다.

 

“돈입니다. 일단 기본급이 존재하고, 을현 씨의 트윗이 SNS 상에서 사악함을 더욱 많이 퍼뜨릴수록 인센티브 개념으로 더 많은 돈을 드리게 될 겁니다.”

“그걸로 가빈 씨는 뭘 얻는데요?”

“입지입니다. 더 많은 인간이 사악함에 노출될수록 저의 회사 입지는 든든해지지요. 악마들의 생태계까지 설명 드리기는 복잡하지만, 저 또한 그로 인해 이득을 얻는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계약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도움이라곤 코빼기도 바랄 수 없는 어머니, 툭 하면 내 재산을 빨아먹을 궁리만 하는 빌어먹을 아버지, 성격만 착하지 우유부단하고 아무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 남동생. 이 모든 것은 의지할 만한 든든한 존재가 아니었기에 정을 떼어버린 지는 꽤 오래 되었다. 하지만 이 계약은 어떤가. 그저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쏠쏠한 이득을 가져다주겠다고 한다. 심지어 내 계정이 유명한 것을 이용해 이상한 광고를 부탁하는 업체들보다 월등히 우수한 금액이었다.

 

“이거 나중에 무를 수 없다던가 영혼이 지옥이 떨어진다던가 하는 건 아니겠죠?”

“설마요! 이건 어디까지나 비즈니스 계약입니다. 못된 눈속임으로 상대를 속인다니 계약 위반으로 손해 배상 청구를 당해도 할 말이 없죠.”

 

가빈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계약서의 항목들이 눈에 새겨질 정도로 읽어본 나는 (이상할 정도로 피로감은 없었다) 이윽고 마음을 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빈은 약 세 번 정도 나의 의사를 정확하게 물어본 다음 내 손에 검은 깃털 펜을 쥐여 주었다. 여기와 여기에 사인을 하시고 마지막으로 두 장의 계약서를 서로 붙인 다음 중앙 자리에 사인을 해주시면 됩니다. 가빈이 사인할 자리를 하나하나 가리켜주는 동안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고양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악마가 미리 깔아둔 술수였을까? 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계약 완료입니다. 계약금액은 지정된 카드를 통해 매월 10일마다 입금해 드리기로 하죠. 세금 떼일 걱정은 마시길! 저희 회계부서는 아주 정확하게 일을 처리한답니다.”

 

가빈은 서류 한 장을 나에게 전달한 뒤 (상호계약을 맺은 자로서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한다고 했다) 남은 계약서 한 장을 고풍스러운 서류봉투에 넣고 눈 깜박할 사이에 사라졌다. 문득 시계를 보니 시간은 내가 창문을 열고 자리에 앉은 순간부터 5분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고 방 안의 공기는 아직 텁텁했다.

 

꿈이라도 꾼 건가.

 

나는 일단 몸을 일으키려다 발목에서부터 올라오는 강렬한 저림에 껙 소리를 내며 뒤에 있는 의자를 부여잡았다. 그러고 보면 난 왜 여기에 주저앉아있었던 거지? 마치 누군가를 대접하기라도 했던 것 마냥 말이야. 의문이 고통과 뒤섞여 이도저도 아닌 것이 되어가는 내 시야로 현관에 놓여있던 생수병 다발이 들어왔다. 2단으로 쌓인 생수통은 가위나 칼로 찢은 흔적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생수병 딱 하나 만큼의 공간이 귀신같이 비어있었다.

 

그 안에 놓인 검은색 카드가 보였다.

 

*

 

그로부터 얼마가 지났다. 나는 막 통화가 끝난 핸드폰의 화면을 노려보며 입술을 악물고 있었다. 아버지가 차를 운전하다가 가벼운 접촉사고를 냈는데 나더러 합의금을 좀 보태달라니. 도대체 머리에 뭐가 들어차있는 거야? 그 인간이 대체 몇 살인데! 치솟는 감정은 별다른 배출구를 찾지 못한 채 내 몸을 빙글빙글 맴돌았고 감정을 이기지 못한 나는 애꿎은 냉장고만 벌컥 열어 그 속에 들어있는 찬 물을 들이켰다. 싸한 감각이 식도를 통해 내려갔다.

 

이럴 때는 역시 그 수밖에 없지. 마음속에서 고개를 쳐드는 확신에 응한 나는 자리에 앉아 노트북의 화면을 켰다. 바탕화면이 나타나기가 무섭게 내가 누른 것은 모 플랫폼의 고민상담 게시판으로 연결되는 바로가기 아이콘이었다. 약간의 로딩을 참고 기다리면 「모두의 고민」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사람들이 가장 뜨겁게 반응하고 있는 고민글에 대한 랭킹이 나온다. 나는 가볍게 어깨를 풀고는 그 고민글 중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게시글을 클릭했다.

 

아쉽게도 내가 찾는 류의 고민은 아니었다. 이미 죽어버린 강아지가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까 어떨까에 대한 고민은 사람의 마음을 자극하긴 하지만 내가 찾는 건 이런 게 아니다. 그대로 2위 글을 클릭한 나는 서두부터 나오는 인간관계에서 심상찮은 기운을 느끼고 미소 지었다. 그래, 이거지! 이런 게 인생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야.

 

나는 그 글을 마지막까지 정독한 다음 또 다른 웹 브라우저를 켜 SNS에 로그인했다. 타 SNS와 달리 스크린샷 화면을 애써 꾸미거나 화려하게 장식할 필요가 없는 이 SNS에서는 클릭한 이미지가 너무 길어지지만 않게 신경 쓴다면 나머지는 거저먹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동안 쌓인 노하우에 따라 적정한 길이로 작성자의 고민을 재단한 나는 곧장 내가 운영하는 계정으로 들어가 해당 이미지를 붙여넣기 했다.

 

달리 제목을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운영하는 계정은 「요지경 리포터」라는 계정 이름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었으니까. 고민은 4장을 모아 3번 올리면 충분히 올라갈 정도였고 나는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의식하며 신중하게 스크린샷을 올렸다. 이제는 팔로워가 2만 가까이 치솟은 계정에 이미지를 올리자마자 30초도 지나지 않아 리트윗 수가 50을 넘어섰다. 이 정도면 이번 주 안에 1만 알티를 찍는 건 일도 아니겠어. 나는 한결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머리 뒤쪽에 깍지를 끼었다. 그 사이 알티 숫자가 80에 도달하자 슬슬 알림 창에 엉뚱한 의견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프랑스과자 @x0x0_xx

 

이 계정주 또 남의 고민 잘라 올리네

 

롤케이크캬베지 @oo_oo_ooo

 

양심도 없냐? 출처도 없이 퍼올리는 거 자제 좀!

 

마지막하나 @xo_xxx

 

제 타임라인에 이 계정 트윗 좀 안 보이게 하라고요

 

입만 새파랗게 산 것들이 어디서 선비질이야. 나는 콧방귀도 뀌지 않고 해당 계정들을 뮤트했다. 어차피 진짜로 마음에 거슬렸다면 차단이든 뮤트든 하면 된다. 그런데 내 알림창에 뻔히 뜨고 프로필도 보일 정도라면 둘 중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입방아만 찧는다는 소리다. 하여간 자기들만 착한 척 하려고 아주 독기가 바짝 올랐다니까. 나는 혼잣말을 했지만 계정의 컨셉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트윗은 하지 않았다. 이런 것을 지키는 게 인기의 비결이기 때문이다.

 

일단 큰 건은 하나 올렸고, 다음에 올릴 자잘한 사연이나 한 번 찾아볼까? 그런 마음으로 3위와 4위의 게시글을 하나하나 읽어나가던 나는 사이다 사연 하나를 찾아내고 이쪽도 신중하게 캡쳐해서 저장했다. 항상 읽는 사람의 화를 돋우기만 하는 사연을 올려서야 글을 올리는 나도 스트레스를 받기에 원수에게 속 시원히 복수를 해준 이야기도 섞어줘야 한다.

 

한참을 사연 찾기에 열중하던 나는 10위까지 오른 랭킹 고민을 모두 일독한 뒤 키워드에 후일담을 넣어 검색했다. 고민상담으로 유명한 이 게시판에는 고민을 토로한 다음 그대로 사라지는 사람도 있지만 고민을 적고나서 통쾌한 후일담을 추가로 올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런 이야기를 찾아 올리면 계정의 트윗이 알티를 타고 번져나가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거기서 누가 올바르고 누가 나쁜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그걸 읽는 사람도 객관적인 상황 판단이 불가능하다) 얼마나 통쾌하고 속이 시원한가. 오로지 그것만이 중심이었다.

 

가빈에게 궁금해서 물어본 적도 있다. 단순한 복수 후일담을 올리는 것도 사람들 사이의 사악함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도움이 될까? 가빈의 대답은 몹시도 명쾌했다.

 

“물론이죠! 통쾌하면 통쾌할수록 사람들은 복수를 숭상하고 갈망하게 될 겁니다. 마구 올려주세요! 을현 씨 덕분에 저도 아주 통쾌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가빈이 그렇게 말해주는데 점잔빼고 있는 것도 웃긴 일이다. 나는 여러 가지 사연들을 고르고 골라 엄선한 다음 오늘 올릴 분량의 사연을 정리하고, 나머지는 다음날 올릴 고민 분량이 없을 때를 대비해 별개 폴더에 저장했다. 일련의 작업을 끝낸 뒤 「요지경 리포터」 계정에 다시 들어가 확인해보니 오늘 올린 트윗은 벌써 2천 알티를 넘어 3천에 닿을락 말락하고 있었다. 이 기세라면 이번 달에 정산 받게 될 사악요금 (나는 가빈이 카드를 통해 보내주는 금전을 이렇게 부르고 있었다) 도 더욱 몸집을 키우게 될 것이다. 학자금대출과 전세대출을 틀어막고도 한참이 남는 금액이다. 나는 그 입금일을 즐겁게 기다리며 잠시 모니터를 껐다.

 

올리려던 고민에서 위화감을 느낀 것은 다음 날의 일이었다.

 

아버지가 차량 접촉사고를 당했는데 차량 운전자가 안하무인으로 군다. 어떻게든 좋게 좋게 넘어가려해도 아버지와 자신에게 보인 무례한 태도 때문에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골자의 내용이었다. 작성자가 공개한 정보에 따르면 운전자는 환갑을 넘긴 남성이었고 꼴에 패션이라고 화려한 무늬의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아빠도 나이가 그 즈음이고 화려한 셔츠를 좋아하는데. 수상한 일치에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이내 그런 생각을 날려버렸다.

 

만약에 백보 양보해서 이 사연의 가해자가 우리 아버지라 해도 나와는 일체 상관이 없다. 왜냐면 이 사람이 아버지의 상세 정보를 올린다 하더라도 그 멍청이는 지금 내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적당히 조르다보면 돈을 토해내는 마법의 상자. 아버지는 나를 딱 그 정도로만 여기고 있을게 분명했고 그 이상의 정보를 말해보라고 해도 고개만 갸웃거릴 터였다. 게다가 누가 열 받아서 아버지를 후려패주기라도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행복하다. 마음을 정한 나는 사연을 순서대로 잘 정리한 다음 계정에 올렸다. 반응은 역시나 폭발적이었다.

 

다음 날은 주말이었으므로 사연을 3개 올려도 무방했다. 나는 이번에도 계정에 시비를 걸어오는 자들을 뮤트 처리한 다음 (어차피 그들도 슬쩍슬쩍 내 계정을 구경하고 있을 테니 인도적인 차원에서 차단은 하지 않았다) 또 다른 고민과 사연을 사냥하기 위해 조용히 게시판으로 들어갔다. 회원 등급이 존재하지 않는데다 글을 쓰거나 덧글을 다는 데에 별도의 자격이 필요하지 않은 게시판은 오늘도 많은 사람들의 감정으로 흘러넘쳤고 일부는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었다.

 

그러면 오늘은 또 어떤 사연을 낚아볼까.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화면을 훑어보던 나는 갑자기 집중을 깨는 진동 소리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 이 시간에 도대체 누구야? 핸드폰을 뒤집어 화면을 확인하면 「엄마」라는 두 글자가 선명했다. 바로 어제 하소연을 하고도 모자라서 또 연락을 하는거야? 머리로 확 오르는 열기를 느끼며 수신거부 단추를 누른다. 하지만 전화는 아무리 거부를 해도 끊임없이 걸려왔다. 마치 뭘 작정이라도 한 것 같았다. 그런다고 내가 져줄 것 같아? 악에 받쳐 거부 단추만 누르고있자니 마침내 핸드폰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을석ㅇl가 아빠 찔렀다」

 

나는 당장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의 엄마는 심하게 떨고 있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울먹이는 엄마의 목소리는 심하게 비현실적이고 그럼에도 내 코끝에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떠돌게 만든다. 엄마가 더듬더듬 놓아둔 말을 하나하나 해석하면 다음과 같았다. 어제 합의금 관련해서 을석이한테도 전화했는데 오늘 식당일 하고 돌아오니까 글쎄 을석이가 칼을 들고 아빠를…. 그게 무슨 소리에요, 그게 무슨 소리냐구요. 나는 한 가지 말 밖에 말할 수 없는 얼간이처럼 굴었고 엄마의 전화는 어느 대형병원의 이름의 남기고 끊어졌다.

 

거짓말이지.

 

나는 끊긴 통화목록을 바라보다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윗옷을 걸쳐 입었다. 어떤 정신으로 도착했을지 모르는 병원에서 엄마는 몸을 웅크린 채 아무 것도 하지 못했고 아빠는 중환자실에서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사건 조사를 위해 찾아왔다는 경찰은 아버지의 일에 유감을 표하면서도 동생의 평소 성격에 대해 지긋이 캐물었다. 나는 내 동생이 어떤 모습인지 정확히 표현하려 했으나 결국 상투적인 소리 밖에 내지 못했다.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한 애였어요. 우유부단해서 거절도 제대로 못했다고요.”

 

경찰은 동의하는 것 같지 않았다.

 

“동생분은 아버님의 신체를 총 13군데 찔렀습니다. 혹시 아버님과 동생분 사이에 사적인 원한이 생길만한 일이 있지는 않았습니까?”

 

나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으나 경찰의 취조는 그 정도로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아버지가 최근에 교통사고를 냈으며 그에 대한 합의금을 나와 내 동생에게서 받아내려 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이래도 될까? 이래도 되는 걸까? 의문이 소용돌이 쳤으나 경찰들은 아무런 확답도 주지 않고 떠나갔다. 남은 건 상해죄와 살해죄의 차이를 검색하고 있는 어머니 뿐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병실을 나와 병원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통화 목록을 검색해 어떤 번호를 눌렀다. 인간의 인지로는 접할 수 없는 영역, 그러나 나에게로 걸려온 번호로 되걸면 신기하게도 곧장 연결되는 악마의 전화기로.

 

“을현 씨, 무슨 일이신가요?”

“갑자기 미안합니다. 조금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을현 씨의 질문이면 뭐든지 답해드려야죠.”

“제 동생이 아빠를 찔렀어요.”

 

의자가 끼익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가빈이 만약 사무실(로 비유할 수 있는 공간)에 앉아있다면 어디 다른 곳을 바라보다가 책상으로 몸을 돌렸으리라 추측했다. 어쩌면 그 반대일수도 있었지만, 나와 오랜 기간 신뢰의 거래를 반복해온 악마가 그 정도의 성의는 보일 것이라 믿고 싶었다.

 

“저런.”

“갑자기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어요. 걘 너무 순하고, 멍청할 정도로 착해빠졌고, 우유부단하고…. 아무튼 이런 짓을 벌일 베짱이 있지도 않다고요.”

 

이제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몰라 입술을 핥던 나는 문득 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느끼고 입술을 꽉 다물었다. 눈알이 시큰해진다. 숨이 거칠어진다. 코를 훌쩍거리며 울먹이는 나를, 가빈은 가타부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본래의 호흡을 되찾은 나는 그에게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갑자기 울어버려서….”

“괜찮습니다. 그래서 무슨 용건으로 전화주신 건가요?”

“시, 실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요. 전에 가빈 씨가 그렇게 말했었잖아요. 제가 계정을 운영하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

“네, 분명 그렇게 말했죠.”

“이게, 이게 혹시 상관있는 일인가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상관있습니다!”

 

너무나 맑은 목소리여서 나는 하마터면 안심할 뻔했다. 그러다가 말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상관이 있다? 근데 그걸 이렇게 밝게 말한다고? 거기에 정신이 쏠린 나머지 이어진 질문에 제대로 된 반응도 하지 못했다.

 

“을현 씨, 제가 왜 SNS를 주목했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요즘 악마라서?”

 

바보 같은 답변이었다.

부리가 딱딱 부딪치는 소리.

 

“그건 SNS만큼 인간의 영혼과 밀접하게 닿아있는 장소가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일어나는 사악함의 소용돌이는 때로 현실의 유혹보다 강렬하게 뇌리에 각인되죠. 저는 그걸 노린 겁니다.”

“노렸…다…?”

“네! 악마가 하는 일이 뭐겠습니다. 사람을 타락시키고, 이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거죠.”

“그… 럼 저 때문에 제 동생이 타락한건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마치 택배 물품이 중간에 차가 밀려 늦게 도착할 수도 있다는 투였다. 내가 입만 벌리고 침묵하는 사이 가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간의 운명은 오묘하니까요.”

“그, 그런 말로 넘어갈 일이 아니라고요!”

“의외로군요. 가족 분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으시는 줄 알았는데.”

“전에는 그랬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요!”

“이런, 헷갈리지 말아주세요. 을현 씨.”

 

핸드폰 너머에서 가빈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전해져왔다. 어디서는 벌써부터 에어컨을 돌리는지 실외기가 요란하게 굴러가고 있었고 또 어디서는 열심히 환풍기를 돌리고 있었다. 요란한 소음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비스듬하게 내 발치로 밀려오는 풍경을 보며 나는 내 정신이 현실에서 유리되는 감각을 느꼈다.

 

“저는 을현 씨의 동생을 타락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럼 내가 그랬다는 거예요?!”

“저희의 계약은 을현 씨와 저 사이의 계약이지만 그 영향력이 돌고 돌아 을현 씨의 동생에게도 닿았을지도 모르겠군요.”

“이런 무책임한!”

“혹시 후회하시나요?”

 

당연한 거 아니에요? 그렇게 외치려던 내 눈에 누군가가 버린 장난감 손목시계가 들어온다. 그 순간 5년 전의 손목시계가 벼락 같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첫 회사에 입사했을 무렵 동생이 축하한다며 사준 손목시계. 그러나 명품도 수제 브랜드도 아닌 손목시계를 본 선배들은 나를 차갑게 비웃으며 지나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내 손목에 쏟아진 카페라떼는 볼품없는 시계를 더 보잘 것 없게 만들었고 열이 치솟은 나는 얼룩덜룩해진 시계를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물에 빠뜨렸더니 시계가 금방 고장났다는 거짓말에 우물쭈물거리던 동생의 모습도 같이 떠올랐다.

 

(미안해 누나. 내가 다음에 더 좋은 시계 사줄게.)

 

“후회하시나요, 을현 씨?”

 

목소리는 상쾌하고 나는 그 목소리에 이끌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아니, 충동이 아니다. 그때 나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모든 상황을 정립하고 있었다. 내게는 동생이 있다. 부모님이 있다. 동생은 아버지를 찔렀다. 아버지는 의식불명이고 어쩌면 오늘 내일 사이에 죽을 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말 그대로 정신이 나가기 직전이다. 동생은 과연 내가 알던 동생일까? 그리고 아버지의 병원비는 과연 얼마나 나올까? 어머니는 미쳐버릴까? 미친 사람은 어디로 보내야할까? 만약 이 사건으로 집주인에게 피해보상을 해줘야한다면 얼마를 줘야하지?

 

(화난 거 아니지?)

 

뒷골목에서는 쓰레기가 굴러다니고 참기 힘든 악취가 난다. 지금도 내 계정에서는 자극적인 사연이 리트윗되고 사람들이 그걸 보고 각자의 울분과 짜증을 느낄 것이며 몇몇은 그 짜증을 현실에서 터뜨릴 것이다. 그럼 그 파동은 고스란히 돈이 되어 내 카드의 적립액으로 쌓이겠지. 나는 그 무수한 파문과 돈의 냄새에 대해서 생각한다. 카드를 통해 긁혀나가는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한다.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동생의 목소리에 대해서 생각한다.

 

(진짜 미안해.)

 

“후회하면 어떻게 되죠?”

“계약을 파기하실 수 있죠.”

“그럼 돈을 못 받겠네요?”

“정확하십니다.”

 

나는 그 밤을 생각한다. 3월 29일의 밤은 이상할 정도로 밤하늘에 구름이 가득했고 그 사이로 엿보이는 달의 형태는 마구잡이로 이지러져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천천히 골목을 나가보면 오늘의 밤하늘은 무척이나 맑으며 구름 한 점 없고 동그랗게 떠있는 달은 마치 유리구슬처럼 눈부시다. 누군가의 눈동자라 해도 통할 것 같았다. 나는 그 빛을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후회가 밥을 먹여주진 않겠죠.”

“그 말씀은?”

“안부 차 전화 드린 거예요.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네, 저도 잘 부탁합니다. 을현 씨.”

 

통화가 끊어진다. 마침 금액을 정산하는 날이었는지 카드에 돈이 입금되었다는 알람이 들어왔다. 그 금액은 대출금을 갚고 당장 급한 구멍을 메우기에는 조금 부족할 것 같다. 나는 그 알림을 바라보다가 핸드폰 액정을 킨 채로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내 신발이 병원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점점 크게 울렸다.

 

이제 동생은 나에게 손목시계를 사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지 못할 것이다. 그럼 뭐 어떻단 말인가. 사람들의 악의는 나에게 돈을 준다. 그 돈으로 내 앞으로 청구될 아버지의 병원비와 수술비를 내면 된다. 어머니가 미친다면 어머니의 요양병원비도 내자. 그리고 다른 모든 비용도 여기서 충당하자. 돈이라면 얼마든지 벌 수 있는데 무엇을 걱정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그래. 나에게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이 나를 구원해줄 것이다. 이 사람들의 악의가 나의 생활을 구원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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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글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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