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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노인과 청년

2015.06.17 18:1906.17


우리는 약 50년 3개월 24일을 항해할 일정을 잡고 우주선에 올랐다.
13살 때 처음 항해를 해본 후로, 이정도로 긴 항해를 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 마지막 항해가 될 이번 항해가 이렇게 긴 기간인 점은 조금 꺼림칙하다. 물론 일정이 짧았다면 이번 항해가 마지막 항해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악의가 느껴지는 항해기간이다. 이번 항해에서 뼈를 묻으라는 의미인가 싶기도 하다. 허용할 수 있는 대로 정말 최대로 늘린 항해기간의 법적 한도가 70년이니, 이번 항해는 통상적인 명분으로 가장 길게 잡은 장기간 항해였던 것이다.
우주선은 외부에서 볼 때 짐작했던 대로 내부도 넓었다. 선원 여섯 명 각자의 개인공간도 충분히 여유 있게 존재했고, 조타실 같이 직무를 수행하는 방들도 쾌적했다. 여가공간도 있었다. 긴 일정동안 선원들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마련된 것들이지만, 최근에 와서는 있을 필요가 없어진 것들이다.
나는 우주선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예상외네. 이젠 몸을 누일 수 있는 한 평 공간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건 예전이랑 다를 게 없잖아.”
“그야 뭐, 그런 법률이 생겼다고 우주선을 바꿀 필요는 없으니까 이런 거 아닐까. 기계야 빈 공간에 장착만 하면 되니까.”
내 말에 대답한 건 상훈이었다. 그는 2094년 생으로, 22세기 사람인 나보다 십년 넘게 일찍 태어났다. 그러나 나이는 비슷해서 친구 사이로 지내고 있다.
상훈 외에 나머지 다섯 명과도 나는 안면이 있었다. 모두 같이 항해할 사람들로서 손색없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질적인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다 큰 소가 들어가도 될 정도 크기의, 흰 색 달걀 같은 물체였다.
이질적일 뿐, 뭔지 모르는 건 아니다. 버튼을 누르자, 매끄러운 표면에 네모난 금이 생기더니, 좌우로 갈라졌다. 안에는 사람이 누울 수 있는 매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푹신해 보였지만, 사실 무중력 상태에 들어가면 저 매트는 별다른 쓸모가 없다.
나는 그 안에 들어갔다. 문을 닫자 눈앞에 어둠이 드리웠다.

지평선 끝까지 뻗어있는 녹색 초원에서 여섯 명의 동료들을 다시 만났다.
모두 흰색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의자는 덩굴이 얽혀있는 듯한 모양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 위로 의자의 날씬한 다리가 뻗어 있었다.
나는 몸을 숙여 손을 뻗었다. 풀들이 손가락 사이를 간질였다. 이런 장소에 실제로 와본 적은 없지만, 분명 진짜 이런 장소에 와있다고 해도 이곳과 별 차이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평선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현실이 아니었다. 가상현실 기계가 만든 풍경이다. 그 풍경 안에서, 넷으로 연결된 우리 여섯 명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어때? 다들 소감은.”
신수영 함장님이 입을 열었다.
대답을 한 건 상훈이었다.
“뭐, 가상현실이야 신기할 건 없죠. 다만 이런 상황까지 왔어야 했나 의문스럽긴 합니다만.”
나는 자리에 앉았다.
함장님은 몸을 뒤로 젖힌 채 의자의 두 다리로 균형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시선이 강하에게 향했다.
지금 이 초원에는 6명이 원을 그리며 앉아 있다. 함장님의 왼편에 상훈이 앉아 있고, 오른편에는 박강하였다. 강하 다음이 나였고, 내 옆으로는 손씨 남매가 앉아 있었다. 오빠의 이름이 중호고, 동생의 이름은 단풍이었다.
“함장님은 어떠신가요?”
상훈이 물었다. 강하에게 향했던 함장님의 시선이 다시 상훈에게 돌아갔다.
“나? 나야 반대하는 입장이지. 나랑 비슷한 나이였던 사람들 늙은 거 보고 우월감 느끼는 게 광속항해의 묘미 아닌가?”
너무 당당히 말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함장님을 제외하고 나를 포함한 다섯 명 모두 할말을 잃은 듯 보였다.
사실 이런 얘기를 나눠보는 건 처음인지라, 설마 같이 항해하던 사람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일단, 나는 그랬다. 어이가 없어서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한 명씩 돌아가면서 소감을 말해야 할 분위기였으므로, 나는 먼저 내 입장을 못박아두기로 했다.
“저는 상황이 이렇게 됐지만 별로 달라진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휴가라고 생각하고 즐길 겁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강하가 입을 열었다.
“저는 함장님처럼 이런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그러면서 남매를 바라보았다.
“뭐, 이 배에서 50년 동안 있어야 한다는 게 조금 꺼림직 하긴 하네요.”
그렇게 말한 건 중호였다. 옆에 앉아있던 단풍도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다 달랐지만, 모두 공통적인 부분이 있었다. 이 사태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확실히, 가상현실에 50년 동안 있어도 되는 걸까?”
“게다가, 결국 느낌 차이긴 하지만, 1, 2년 항해하는 것과 50년 동안 여행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예측외의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을지 생각하면 왠지 후자에 손을 들어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
상훈과 강하가 말했다.
바람이 한 차례 우리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우리들이 탄 우주선은, 방금 출발한 행성에서 24광년 가량 떨어진 우주상의 한 지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별들 사이에 위치한, 이라고 하기엔 빈 공간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넓은 지역은, 별이 발산하는 어떤 미지의 에너지 같은 것이 미치기에는 서로 간의 거리가 너무 먼데도 불구하고 이상현상이 일어난다고 보도된 지역이었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갑작스레 이상현상이 생긴 것이다.
그 지역을 관측한 사람 말로는, 뭔가가 있는데 그게 뭔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 말로 이 현상을 정리할 수는 없기에, 우리 팀은 그 현상을 조사하러 항해를 시작한 있다.
우주선은 대기권을 나오고 나서 점차 속도를 올려, 우주를 나온 후 몇 시간 뒤에는 광속의 99.9%의 속도에 도달했다.
그러면서 가상현실기기의 특수한 기능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원래 가상현실은 현실과 1대 1로 시간이 흐른다. 사람이 너무 가상현실에 빠져들지 않도록 그렇게 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법에 예외가 하나 생겼는데, 그것이 아광속행해, 통상적으로 광속항해라고 부르는 속도로 이동 중일 때에 한해서 시간 비율을 바꾼다는 것이다. 항해 중에는 가상현실의 시간을 수십 배 빨리 흐르게 설정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시간비율을 바꾼 것은 아니다. 광속항해 중인 우주선 안은 바깥과 시간이 눈에 띄게 다르게 흐른다. 바깥 시간보다 훨씬 느리게 시간이 흐르는 것이다. 그런데 가상현실에서는 우주선 안의 시간보다 빠르게 시간이 흐른다. 그 비율은 우주선 바깥과 우주선 안의 차이와 같다. 
어느 날 이런 항의가 들어왔다고 한다. 자기가 아는 사람이 광속항해를 하고 와서 보러 갔는데, 그 아는 사람의 우주선이 출발한 게 50년 전 일이라 자기는 청년이었던 그때와는 달리 세월의 힘에 의해 늙어 노인이 되었다.
그러나 50년 만에 다시 보게 된 그 사람은 50년 전과 다른 게 없었다.
자기는 노인인데, 왜 저 사람은 지금도 젊고 아름다울까.
원망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상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저 말은 별에서 사는 사람과 광속항해자 사이의 소외감 이라는 논제를 부상하게 만들었다. 비단 별에서 사는 사람이 광속항해자들에게 느끼는 감정뿐만이 아니었다. 광속항해자들도 한 번 항해를 하고 오면 자기가 아는 사람이 모두 죽어 만날 수 없게 된다는 슬픔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막기 위해 최대 항해기간을 정해둔 것이지만, 이런다고 나이차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과연 이 소외감은 무시되어야 할 감정인가, 아니면 해결되어야 할 문제인가.
결론은 해결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고안한 방법이 가상현실을 이용한 시간 동일화, 즉, 뉴턴 역학에서 이름을 따온 ‘절대시간’이다. 지금 들어와 있는 가상현실 속 시간은 우주선 안의 시간보다 30배가량 빠르게 흐른다. 이것은 우주선 밖의, 행성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이 겪는 시간의 속도와 거의 오차가 없다.
우주선 밖과 같은 속도로 시간이 흐르는 가상현실. 해결방법은, 극히 생생한 가상현실을 통해 뇌의 착각을 유도해, 가상현실 속에서 우주선 밖과 같은 속도의 시간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가상현실 속에서 몸을 늙게 함으로써 현실의 몸도 늙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주선 밖의 사람들이 늙는 속도와 거의 같다. 이런 장치를 써야 된다고 법으로 정한 것이 절대시간법이다.

구십이 넘은 한 노인이 관객석에 앉아 있었다. 서커스가 한창 공연 중이었다. 그는 아이처럼 얼굴 가득 웃음을 띤 채로, 둥그런 철창 안에서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이나, 수십 미터 공중에서 그네를 타고 나비처럼 이리저리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긴장감 넘치고, 아슬아슬하기 그지없었다. 사고가 나지 않을까 두근거려 진땀이 흘렀다. 손에 쥔 땀이 진땀이었다.
“우와, 서커스 재밌다.”
이렇게 재밌을 줄은 몰랐다고 생각하며, 노인이 천진난만한 얼굴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다음 공연을 위한 준비시간이었다.
처음 오시나 봐요?
간식거리를 파는 사람이 노인을 보고 인사했다. 그녀는 노인의 옆에 앉아 있는 10살 쯤 되어 보이는 꼬마아이를 보며 물었다.
귀엽네요. 손자인가 봐요?
“아뇨, 아들입니다.”
그때 손목에 찬 시계에서 신호음이 울렸다. 노인은 손목을 들어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시계에서는 빨간색 불이 반짝이고 있었다. 서커스를 보고 있는 중에도 전쟁은 실시간으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은하연합군과 우주연방과의 전쟁은 아직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이 전쟁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까. 노인에게는 그것도 또한 방금 본 서커스 같은 즐거움 중 하나였다.
노인은 출구에서 잠시 무대를 한 번 뒤돌아본 후, 걸음을 옮겼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부관의 보고가 들려왔다. 노인은 손목시계에 달려 있는 통신기능을 켜고 말했다.
“그래, 그곳에서 원인모를 이상현상이 일어났다고?”

우주선의 속도가 안정권에 들어서자 이윽고 가상현실 속 시간과 우주선 밖의 시간의 싱크로 수치가 99.9999%를 가리키게 되었다. 나는 가상현실 안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항해 내내 가상현실 속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항해 중에 해결해야 하는 업무는 모두 가상현실 안에서 해결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그 외에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이 기기 안에서 수행 가능했다. 가상현실뿐만이 아니라, 지금 타고 있는 이 가상현실 기기도 상당히 잘 만들었다.
우리들 여섯 명은 자기 세계에 틀어박혀 있었다. 50년가량 항해해야 하는 이 가상현실에는 그 기간동안 즐길 수많은 콘텐츠가 마련되어 있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봐도 되고, 게임도 있고, 가상현실 속 도시에서 제 2의 인생을 살 수도 있다.
앞으로 뭘 하면서 지내야 할까.
나는 그런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읽고 싶었던 책이나 읽을까. 나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가상현실에서 30년이 흘렀다.
“예목!”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주위를 둘러볼 요량으로 자장면 그릇에서 고개를 드니, 눈앞에 홀로그램이 떠 있었다. 메시지 창이었다.
나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2000년대 초반 문명이 배경인 이 세계에서, 거기에 더욱 어울리지 않게 시골마을 당구장에서 왜 저런 게 나타난 거지? 이 세계의 장르는 그게 아닐 텐데? 이 마을은 사실 겉보기완 달리 첨단과학으로 업그레이드되어 있는 건가? 유비쿼터스인가? 외계 과학문명의 도움인가? 개발자가 게임 안에다 숨겨두는 히든 스테이지 같은 건가?
메시지 창에서 화상이 떠올랐다. 모르는 아저씨가 나타났다.
아니다. 그렇군, 아는 사람이군.
상훈이었다. 20년 전에 동창회 같은 느낌으로 마지막으로 만났던 때가 사십 대였으니, 지금은 60대다. 얼굴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져서 몰라봤다. 60대라기엔 젊어 보이지만, 그건 지금 내가 있는 세상에서의 기준이고, 미래의 기술로 노화가 느려진 시대를 살아온 사람의 관점에선 저 얼굴은 스트레스에 찌들어 있는데다 살아온 삶도 결코 평탄지 않았겠구나 싶은 얼굴이다.
그제야 나는 내가 우주선을 타고 항해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나저나 상훈이 녀석, 비정상적으로 늙었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거야, 라고 묻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큰일 났다!”
상훈이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영문을 모르는 나로서는 자장면 그릇과 젓가락을 각각 한손에 쥐고 태평하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신수영 함장님이 돌아가셨다!”
“뭐?”
나는 어이가 없어서 벌떡 일어섰다.

우리는 네트워크를 연결해 한 곳에 모였다. 인원은 한 명이 줄어 다섯 명이 되어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단풍이 물어왔다. 나에게 물어본들 나도 아는 게 없다.
시선들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로 옮겨가다가 곧 안정을 찾고 모두의 시선이 상훈에게로 모였다. 상훈은 이 상황에 대해 생각중인 듯,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흘끔 주위 사람들을 둘러봤다. 지난 세월동안 다들 패셔니스타가 된 듯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이윽고 상훈이 고개를 들었다.
“함장님이 돌아가셨네. 아니, 돌아가셨다.”
아까 전부터 아무도 말이 없었지만, 상훈의 말 한 마디로 주위를 둘러싼 침묵은 한층 무거워진 듯 했다. 진지하기 짝이 없는 얼굴에, 함장님이 돌아가셨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별로 슬프지는 않았다. 몇 십 년 동안 못 보던 사이라서 그런 것이리라. 내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단지 그 원인. 어째서 함장님이 돌아가신 걸까 라는 점이다.
내가 그 의문을 입에 담자, 나를 포함해 네 명의 시선이 상훈의 얼굴로 다시 모여들었다.
상훈은 다시 눈을 감았다. 어쩌면 저 행동은 생각에 잠긴 것이 아니라 가상현실 기기가 수집한 정보들을 받아들이는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상훈의 입이 열렸다.
긴장한 탓일까, 1초를 몇 번이나 쪼개서 인식하는 듯, 음절이 입술이 열리는 것보다 조금 늦게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연사라네.
“뭐?”
듣고 나니 어이가 없어졌다.
나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다시 물었다.
“뭐라고?”
“자연사라고 했네.”
다들 눈앞의 아저씨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들 나와 같은 심정인가 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짧게 잡아도 지난 30년 동안 자연사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가상현실 콘텐츠 개발자들은 죄다 자연사라는 단어를 잊어버렸단 말인가?
“쉽게 말하자면 늙어죽으셨어.”
쉽게 말하지 않아도 돼.
그나저나 왜 사람이 그 나이에 늙어죽은 걸까. 가상현실에서의 30년을 더한다고 해도 함장님은 70세도 안 되셨다. 늙었다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나이다. 늙어죽었다는 말보단 차라리 젊어죽었다는 말에 더 가깝다. 물론 젊다고 할 나이는 아니지만, 평균수명의 반밖에 못 사셨는데 어쩌다가 그렇게 되신 걸까.
“같이 게임을 하다가 갑자기 접속이 끊기셨어.”
“사람이, 그렇게 일찍 자연사할 수 있나?”
중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그게 이상한 점이야.”
상훈이 침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다들 이 이해 못할 상황에 표정이 굳어 있었다.
모두 이 사건의 원인이 뭘까 궁리하는 듯 했다. 가설과 반박이 머릿속에서 난전을 거듭한다.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말을 꺼내보기로 했다.
“일단 밖으로 나갈까.”
나의 말에 시선이 나에게로 모였다. 나는 그 이유를 밝혔다.
“이대로 놔두면, 함장님의 시신이 썩을 거야.”

노인은 우주연방군의 총사령관이었다. 그의 전략으로 우주연방군은 은하연합군을 상대로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래, 저곳인가.”
노인은 화면을 통해 우주공간을 바라보며 물었다. 옆에 있던 부관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우주공간에는 거대한 뭔가가 있었다.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잡히지 않지만, 정체불명의 에너지가 밀집되어 있는 게 측정되고 있었다.
예전에 저런 것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지.
노인은 과거의 기억에 빠지려는 것을 멈추고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항로에 저런 구간이 있어서야 출전이든 물자이동이든 멀리 돌아가야 해서 제대로 될 리가 없다.
함선이 그 공간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함장님의 시신은 냉각시켜서 보관하기로 했다.
“역시 가상현실 때문일까?”
기억 속 20여 년 전과 비교해보니 다들 나이를 먹었다는 게 느껴졌다.
“역시 그런 게 아닐까요.”
강하의 말에 단풍이 동의했다. 옛날부터 냉철하게 생각할 줄 알던 강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정리했다.
“함장님은 가상현실에서 나이를 먹어 돌아가셨다. 이의 있는 사람?”
“꼭 노화가 아니라 다른 것 때문일 가능성은 없는 걸까.”
중호의 말이었다.
“예를 들면?”
강하가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예를 들면 쇼크사 같은 것 말이야.”
쇼크사라. 나는 속으로 동의했다. 가상현실 내에서 큰 충격을 받아서 죽을 가능성이야 없지 않다. 이 가상현실 자체가 현실의 몸에 영향을 끼치기 위한 것이니까.
중호는 깍지 낀 손을 아래로 내린 채 다음 말을 입에 담았다.
“가상현실 내에는 여러 가지 게임이 있지. 서바이벌 게임 같은 것도 있고. 나는 그런 게임은 영 취향이 안 맞아서 안 해봤지만, 거기서 심장을 찔린다거나 그런 식으로 죽을 수 있는 게 아닐까?”
강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닐 거야. 게임 내에서 여러 방식으로 죽어봤지만, 난 멀쩡히 살아있어.”
나도 강하의 말에 동의했기에 첨언했다.
“맞아, 나도 마찬가지야. 이런 점에선 이 가상현실 기기는 잘 만들어졌지. 쇼크사 할 정도의 전기신호를 차단하는 장치가 있는 걸까?”
상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자, 애초에 함장님의 죽음은 쇼크사나 다른 게 아니네. 컴퓨터가 자연사라고 규정했잖은가.”
평범한 사람이 그 나이에 자연사 한다면 그건 그 사람이 병이나 정신적인 문제 때문에 몸이 쇠약해져 있었다는 의미이다.
“가상현실 때문인가.”
“그렇다 해도 이렇게 일찍 돌아가시다니.”
잠시 술렁였다. 가슴속에 공포감이 피어올랐다.
그 공포감을 흩어버리기 위해 나는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큰 소리가 울렸다.
“어쩐지 처음 이런 걸 시행한다는 걸 들었을 때부터 예감이 안 좋았었어. 사람을 30배나 빨리 늙게 하는 게 신체에 부담이 안 갈 리가 없었던 거야.”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가상현실 접속을 그만두자.”
잠시 주위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래, 그게 좋겠지.”
강하가 동의했다.

항해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린 건 가상현실에 접속하지 않기 시작한 지 10일이 흘렀을 때였다.
오랜 가상현실 생활 때문에 다들 한동안은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때였다.
“앞으로 20년이나 남은 건가.”
우주를 바라보며 강하가 말했다.
“그게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대답한 건 나였다. 그렇다. 경악할 만한 문제의 처음 발견자는 나였다.
“무슨 말이야?”
주위에는 강하와 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거 봐봐.”
나는 모니터를 가리켰다. 강하가 다가와 모니터에 떠오른 수치들을 바라보았다.
“이게 뭐였지?”
강하가 머리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30년이나 못 보던 것이니 이런 정보들을 잊어버릴 만 했다.
이윽고 강하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진지를 구축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어둠을 휘감고 적군의 함대가 몰아쳐왔다.
드디어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이길 수 있겠죠?”
부관이 물었다. 그러나 끝의 물음표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에겐 신무기가 있다네. 저들은 먼지가 되도록 얻어맞게 되겠지.”
노인이 칼을 높이 빼들며 말했다.
“승리의 여신이 우리에게 미소 짓고 있다!”
노인 쪽 전력의 7할이 사라졌다는 점이 걸리긴 하지만 결국 그 전투에서는 우주연방군이 승리했다.

나는 사람들을 소집했다.
“무슨 일이야?”
중호가 물었다.
나는 숨을 고르고, 대체 지금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명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간결하게 말할게.”
강하가 먼저 말을 꺼내주었다.
“우리 우주선이 우주에 표류하게 된 것 같아.”
다들 그게 끝이냐는 듯, 더 설명해보라는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실이야.”
나는 동료들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우주선이 항로를 잃고 표류하고 있는 중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우린 5년 전에 도착했어야 했어.”
다들 이해를 못하는 눈치였다.
“가상현실에 너무 오래 있어서 모두 멍청이가 된 것 같네.”
일부러 신랄하게 말하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테스트는 해 본 건가? 가상현실에서 30년 쯤 살면 바깥세상 일은 거의 다 잊어버린다는 결과를 알았다면 절대시간법은 절대 통과되지 않았을 텐데.”
“절대시간법 제안자가 나타난 게 우리가 출발하기 5년 전쯤이야.”
강하가 말했다.
나는 재차 설명하기로 했다.
“다들 항해시간이 50년이라는 건 알지? 근데 여기서 반전인 건, 그 항해시간이 왕복했을 때의 시간이라는 거야. 도착하는 데에는 25년이면 충분했어.”
“근데 지금은 30년이 지나도록 항해만 하고 있지.”
“무슨 소리야, 가는 데만 50년이라고.”
상훈이 말했다. 나는 멈칫했다.
“뭐? 정말?”
“그래, 그렇지 않으면 30년이나 항해했는데 도착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야 이 멍청한 놈아. 그러니까 우리가 표류하고 있다는 거잖아!”
나는 호통을 치고 난 후, 과연 내 생각이 착각이 아니었다는 것에 안도할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기분이 나빠졌다.
둘러보자 다들 얼굴이 굳어지고 있었다.
“그럼, 우린 미아가 됐단 소리야?”
단풍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구조신호는 보내봤어?”
“그래. 보내고 있어. 아직까지 대답이 없지만.”

그 후로 며칠이 지났지만, 근처에서 항해하고 있는 우주선은 없는 듯,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고 우리는 계속 표류했다.
어째서인지 현재 위치가 어딘지도 잡히지 않고, 어느 방향에 뭐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탈출할 생각을 못하고 가만히 구조만을 기다렸다.
“그거 알아? 절대시간법이 땅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광속항해자들에 대해 가지는 불만 때문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거.”
강하가 말했다. 나도 알고 있는 말이었다.
“그래, 광속항해자들이 너무 오래 해먹으니까 신입들이 들어올 자리가 없어 서지.”
그 말은 절대시간법이 발표되고 시행되기 까지 5년 사이에 나타난, 광속항해자들 사이에 떠도는 농담 같은 것이었다. 아니, 농담이라기보다는 자학개그였다.
광속항해자는 일반적으로 수백 년, 길면 천 년 넘게 현역으로 활동한다. 그만큼 세대교체의 간격이 길다. 대체로 사람이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기간보다 더 길다. 그래서 열정이 있고 재능도 있는 사람이 광속항해에 발도 못 디뎌보고 꿈을 접기도 한다.
“우린 이미 5년 전에 목적지에 도달했을 거야. 우리가 조사할 이상현상이란 이런 항로이탈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확실히, 아니라곤 못 하겠네.”
“그리고 광속항해자들을 빨리 교체 시키려는 사람들은 항해자들이 죽건 말건 위험한 곳에 막 보내는 거지.”
불편한 침묵이 감돌았다. 이렇게 죽어야 하는 건가. 구조도 기다리지 못하고?
“희망은 있어. 별에서 수십 년이 지나고, 사람들도 생각이 바뀌어서 우리를 구조해줄지도 모르잖아.”
“그때쯤이면 우리에 대해선 완전히 잊어버렸을걸. 이미 죽었다고 판단하거나, 자원낭비라고 생각하거나.”
강하는 냉정했다. 아니라곤, 그렇지 않을 거라곤 못하겠다.
찻잔을 일부러 달그락거리며,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우리끼리 얘기할 게 아니라, 모아서 어떻게 할지 방침을 정해보자. 식량문제도 있고.”

“그렇군. 그것도 문제야.”
노인은 부관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차례 승리했음에도, 상대 쪽 전력이 이쪽보다 훨씬 많았다. 이번 전쟁은 상당히, 아니, 말도 안 될 정도로 난이도가 높은 것이다.
“하지만 이기지 못하는 전투는 아니야. 이기지 못하는 전투는 없어.”

“그래서 문제가 뭐야?”
선원들을 소집해 모인 자리에서 상훈이 말을 꺼냈다. 나는 일단 세 가지 문제가 있다는 뜻으로 손가락을 세 개만 폈다.
“하나는 우리가 이상현상, 알기 쉽게 말하자면 우주의 미로에 갇혔다는 거지. 얼마나 있어야 여기서 나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일단 기다리다 보면 구조가 오겠지.”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둘째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 미아 상태로 인한 식량과 산소문제.”
“아, 확실히.”
중호가 손바닥을 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해보니 여유롭게 30년 치 남아있었어. 여기에 돌아가신 신수영 함장님의 할당량을 뺀다 하면 더 남겠지.”
주위를 둘러봤다. 다들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상당히 많이 남았지. 사실 이정도 양이면 아마 다 떨어지기 전에 구조될 거야. 그러나 그래도 이게 사람의 평균수명보다는 적은 양이지. 구조되지 못한다면, 우린 고통스럽게 아사하겠지. 콘텐츠 중에 살아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는 내용의 게임도 있더라.”
이제 검지 하나만 남았다.
“그리고 마지막 문제는 우리가 이대로 광속항해를 유지할 것이냐, 아니면 정지할 것이냐.”
나는 손을 내렸다.
“이대로 계속 광속항해를 유지한다면, 우린 바깥 시간으로 천 년 정도 기다릴 수 있어. 혹시나 만약 우리가 표류하게 된 것이 바깥에서 일부러 조작한 거라면, 천 년이 지난 후에는 시류가 바뀌어 우릴 구조하러 오겠지.”
“일부러 그랬다니, 그건…….”
“만약이야 만약.”
“그러나 현상유지로 광속항해를 계속한다면, 인류의 거주지와 가까워질 수도 있으나 반대로 구조선으로부터 빛의 속도로 멀어질 수도 있어.”
강하가 조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되면 우린 영원히 구조 받지 못하겠지. 이곳에 정지한다면 뭐, 구조대가 방금 출발했기를 바라야겠지.”
나는 입을 열었다.
“첨언하자면, 현상유지의 이점은 우리가 갇혀있는 우주의 미로를 아마 천 년 후에는 풀 수 있으리라는 거지.”
“그러다가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게 되면 어떡하지?”
단풍이 불안해하는 어조로 물었다.
“실패했을 때 돌아오지 못하는 건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야.”
나는 단호히 말했다.
좌중에 침묵이 깔렸다.
정부를 믿는다면 가만히 있을 것이고, 믿지 않는다면 광속항해를 계속 할 것이다.
물론 이런 곳에 갇힌 이상, 그쪽에서 구하려 해도 우리들이 구출되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는 광속항해를 계속하기로 했다.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는 생활이 계속됐다.
그런 나날이 3개월 쯤 지속되다, 어이없게도 심심함을 주체하지 못하고 가상현실로 들어가는 사람이 나타났다.
상훈이었다.
“무슨 짓이야.”
나는 따지듯이 말했다. 상훈은 영혼이 빠져나간 표정으로 대답했다.
“심심해 죽을 것 같아.”
“그래도 이건 아니지. 빨리 죽으려고 한다면 광속항해를 하고 있는 이유가 없잖아! 최대한 오래 살아서 바깥에서 올 구조선을 맞아야지!”
“아니지, 우주선이 멈춰있는 상태로 가상현실에 들어갔었다면, 바깥보다 시간이 빨리 흐르니 구조될 가능성이 훨씬 줄어들었을 거야.”
나는 상훈을 노려보았다. 어찌됐든 지금 그가 하는 짓은 자살행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상훈은 씁쓸해하는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난 알겠더라. 우리가 인간인 한 예술을 잃어버리면 이 넓은 우주선도 감옥이 된다는 걸.”
“가상현실이, 예술이라는 거야?”
“이 우주가 조물주의 걸작품이라면, 가상현실의 우주 또한 예술품이 아니겠나? 나는 우주에서 노니고 싶네. 나는 아무것도 즐기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어.”
상훈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궤변처럼 들렸다. 저 논리가 마약을 하는 사람들과 뭐가 다르냐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그곳은 가짜, 이곳은 진짜다.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진짜 중요한 것이 뭔지 보지 못하고 일부러 죽음을 재촉하다니.
“게다가, 식량이 우리가 평생 먹을 분량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했지 않나? 그러나 내가 가상현실로 들어간다면 다르다네. 빨리 죽으니까, 죽기 전에 식량이 떨어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네.”
“그래, 빨리 죽지. 오래 살아남아야 구조 받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그러려면 가상현실에 들어가면 안 돼.”
상훈은 고개를 저었다.
“난 이미, 그래, 중독자라네. 자네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네.”
“아, 그래, 함장님처럼 원인모를 자연사를 할 수도 있어. 그래도 갈 거야?”
“그래.”
대답에서 한 치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상훈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너무 오래 가상현실을 바라본 사람의 눈이 저럴까. 상훈은 서글픈 눈을 하고 있었다.
“가상현실 안에서 흐르는 시간을 조절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어쩌면 현실보다 더 느리게 흐르게 함으로써 수명을 더 늘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군. 그럼 우리는 몇 개월 동안 휴가를 즐기는 기분으로 지내다가, 벌써 구조 받을 때가 됐나 싶은 기분으로 밖으로 나왔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래, 더 바랄 게 없을 만큼 완벽하군.”
나는 상훈을 노려보았다. 의미 없는 질문이란 걸 알고도 한 번 더 물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들어가려고?”
“그래.”
대답은 뒤에서 들려왔다. 돌아보니, 중호와 단풍이 서있었다. 저 둘이 말한 건가? 경악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었다. 한 명이면 몰라도, 저 둘까지 가상현실로 들어간다면, 지금 우주선 내의 인원 중 과반수가 들어가는 것이 된다. 내가 옳다고 믿는 일은 전체의 절반도 동의하지 않을 만한 것이었나?
그런데 거기에 한 술 더 떠 강하까지 나섰다.
“나도 들어가겠어.”
“왜?”
나는 화내듯이 물었다. 강하는 눈을 내리깔고, 할 말을 찾는 듯, 혹은 대답하지 않겠다는 듯 침묵을 지켰다.
아니, 상훈이 이미 할 말을 다 말해버렸기 때문이리라.
나는 맥이 풀려버렸다.
“뭐야, 다들 나 빼고 얘기 끝났던 거야?”
“너만 따돌리려고 했던 건 아니야. 그저 우리들끼리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유유상종인 탓인지 우연히 이런 식으로 얘기가 진행되었을 뿐.”
나는 포기하기로 했다. 나만 따돌리는데, 저들을 붙잡아둘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주공간에서의 오랜 생활 때문에 정신이 지친 것일지도 모른다.
“두 생각이 조화가 불가능 한 건 아니지.”
나는 입을 열었다.
“가버려.”
손을 휘휘 저었다.
“너희들이 어떤 행동을 하건 나는 여기 남을 거야.”
다들 나를 남겨두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가상현실 기계에 몸을 맡길 생각인 듯 했다.
고개를 드니, 한 사람 남아 있었다.
단풍이 말했다.
“나도 여기 남아.”
나는 의문이 담긴 시선을 보냈다.
“왜?”
“오빠가 죽을 길을 선택했으니, 나라도 살아남으려고.”
입에서 웃음이 비집어 나왔다.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허리를 펴고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전쟁이 끝났다. 노인은 서커스를 바라보았다. 이제 서커스를 보면 되는 것이다.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하기엔 자신은 너무 늙어서, 머리도 안 돌아가고, 체력도 따라주지 않는다. 게다가 전쟁은 질렸다.
이제는 그냥 이렇게 가만히 보기만 하는 것을 즐길 나이다. 기껏 며느리가 낳은 쌍둥이 손자도 생겼는데, 놀이공원에 가는 게 아니라 서커스만 보고 있는 것이 조금 걸리긴 한다.
노인은 양 옆에 앉은 두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노인의 어깨에 누군가가 손을 얹었다.
돌아보니, 얼굴이 익숙한 청년이었다.
참 늙지도 않았구나. 괜히 내가 초라해지네.
“구조대가 왔어. 돌아가자.”
상훈은 침묵을 지켰다.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생각하고 있을 시간 없어. 여기선 그 시간도 아까우니까.”
상훈은 무시하듯 자기 할 말을 내뱉었다.
“왜 사람들이 이런 가상현실 시스템을 도입했는지 알겠어. 별로 변하지 않은 너를 보니 부러워 죽겠군.”
상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애들은?”
“네가 맨 마지막이야.”
“그런가.”
눈을 감았다가 뜨자, 문이 열리고 있었다. 가상현실기기의 문이다. 오랜만에 보는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세계란 것이 이렇게 쉽게 변하는 것이었구나. 몇 십 년 만에 그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상훈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그는 가상현실 내에서도 잘 걷지 못했다.
예목의 부축을 받으며 상훈이 허탈해하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난 분명 50년을 살아왔을 텐데, 널 보니 내가 살아왔던 게 하나도 생각나지 않아. 시간차라는 건 사람의 인생을 농락하는군.”
둘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런 와중에도 상훈은 계속 자신의 허탈한 심정을 토로했다.
“처음 이런 상황에 대해 항의했던 사람은, 자기 어머니를 보고 이런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처음 느꼈다고 하네. 그래서 오랜만에 뵙는 어머니께 말을 건네지 못하고 그 자리를 뒤로 했다더군. 확실히, 부모보다 자식이 먼저 더 늙는다던가, 이상한 상황이지. 절대시간법이 항해사의 세대교체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소문 들어본 적 있지 않나? 지금 내가 보기엔 그거 그냥 음모론이라네. 그나저나, 아무도 없잖아?”
“중호랑 강하는 각각 1년 전, 네 달 전에 의문의 자연사로 죽었어. 단풍도 여섯 달 전에 자연사로 죽었고.”
“뭔가 그럼. 아까 내가 맨 마지막이란 말은 거짓말인가?”
“충격을 받을까봐.”
“이미 셋 다 너무 오래 안 보다 보니까 별 감흥 없다네.”
그때 상훈으로서는 처음 보는 젊은이가 둘에게 다가왔다. 예목이 소개했다.
“저 사람이 우릴 구조해준 친구 중 한 명이지.”
“나름대로 빨리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상황이군요.”
젊은이가 침울한 시선으로 상훈을 바라보았다. 예목이 위로하듯 말했다.
“괜찮아. 내가 보기엔 얘는 그냥 한순간의 어리석은 선택 때문에 확 늙어버린 바보로밖에 안 보여.”
“뭔가 그게. 가혹한 평가로군. 내가 가상현실에 들어간 걸 후회하니까, 이제 입장이 반대가 되었다고 기고만장한 건가?”
“30배속 가상현실입니까.”
젊은이가 예전에 들었던 뭔가를 들었다는 듯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순간 대화를 멈추고, 예목과 상훈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서로가 한 가지 동일한 의문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리고, 두 걸음 정도 앞에 서있는 젊은이에게 물었다.
“절대시간법은 아직 유지되고 있나?”
동시에 튀어나온 그 물음에, 젊은이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뭔지 알았다는 듯이, 아하, 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 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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