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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슈뢰딩거의 정의

2022.02.11 04:4102.11

  형사과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계급은 형사과장으로 27년 중 23년간 강력범을 잡아왔다. 별의 별 사건들을 많이 겪었는데, 3년 전 일어난 한 사건 때문에 형사과에서의 은퇴를 포기했다.

 

  조선족 남편이 부인을 살해한 후 사체를 토막내 유기한 사건이었다. 부인은 한국인으로 조선족 남편과는 인천의 한 공장에서 만나 결혼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부인의 사체가 발견된 후 남편과 그의 노모가 사라진 점을 보아 범인은 남편으로 확실시 되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그의 흔적을 인천의 화물부두에서 찾을 수 있었다.

 

  조선족의 한국인 피살 사건으로 국내는 뜨거워졌다. 하루라도 빨리 범인을 잡으란 여론이 형성되었다. 그 당시 우린 이미 용의자를 신변을 확보한 상태였지만 한가지의 문제가 있어 상황을 알릴 수 없었다. 용의자가 인천부두의 화물컨테이너 안에서 공성전을 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컨테이너를 열면 우리 노모는 내 손에 죽어" 파란 컨테이너 안에서 용의자는 소리쳤다. 우리는 회의 끝에 컨테이너 안의 용의자가 잠들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렇게 새벽이 찾아오자 테이저건으로 무장한 형사들이 컨테이너 앞에 섰다. 그러자 용의자는 새로운 조건을 말했다. "일주일 안으로 러시아로 보내줘. 그리고 혹시 수면 가스나 내시경 카메라를 넣어도 노모는 죽어!"

  열어볼 틈도 없이 다시 회의를 하게 되었다.

 

  열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참고로 러시아와 한국은 범죄인 인도조약이 없다. 화물컨테이너의 특성상 어떤 항로를 통하더라도 일주일만에 보낼 수 없었고 컨테이너의 안에서 물과 음식 없이는 일주일을 버티기도 힘들다. 회의는 길어지고 결론이 나지 않자 먼저 물과 음식을 제공하기로 했다. 하지만 용의자는 완강했다.  "시끄러, 열지 마. 열면 죽일 거야." 인도적인 제안을 거절당한 이후 전문 협상가도 불러 인천부두를 다녀갔지만 별다른 수확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의 항쟁이 길어지자 검거가 아닌 이들을 살리는 방향으로 초점이 맞춰졌다. 한국인을 죽이고 달아나려는 조선족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 나간다면 여론에 의해 징계를 면치 못 할 것이 분명했다.

  인천부두에 모여든 형사들은, 시간이 흐르자 그제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이 계산 되었는지 불만을 뱉어냈다. "그냥 엽시다. 어차피 지 애미 뒤지는 거" 용의자 검거를 위해 죄없는 노모를 죽이자는 의견이 나왔다. 아니, 한 명은 죽이지만 한 명은 살리고 또 징계또한 면피 하자는 궤변이었다. "연봉삭감은 우리 보고 죽으란 거지"

 

  항쟁 4일째,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경찰로서 투표를 통해 의견을 모아보기로 했다. 투표는 철저하게 비밀투표로 진행되었다. 첫 번째 투표 결과는 동결. 다시 진행된 투표에서 한 표 차이로 둘 다 살려보자는 결과가 나왔다. 그렇게 나온 결과를 가지고 컨테이너 앞에 섰다. "우리는 노모가 죽지 않기를 원한다. 풀어줄 테니 나와라" 그럼에도 지금은 나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용의자 때문에 컨트롤 타워까지 철수하는 합의를 보았다. "너희가 언제 나오든 상관없어. 우리는 철수한다. 다만 추후 범행위험이 있기 때문에 널 나오는 즉시 재추적하여 잡을 거다."

 

  철수한 뒤 2일째, 다시 찾은 부두의 컨테이너 안에서 서로 부둥켜 안은 모습의 용의자와 노모를 만날 수 있었다. 노모는 언제 죽었던 것일까.

 

  토막살인 사건의 범인이 인천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운 좋게도 그간의 과정이 새어나가지 않았다. 또, 국민들은 정의가 아직 살아있다며 좋아했다. 형사 팀원들도 징계를 피해갈 수 있었다. 나는 이따금씩 그 때 범인을 처음부터 찾지 못 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하곤 했다. 이따금이 항시가 되자 더 이상 형사과에 있을 수 없었다.

  노모는 누가 죽인 것일까?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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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운칠 22.02.11 04:47 댓글

    아래 안드로기노우스의 사랑도 많이 읽어 주십사...!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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