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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가위

2015.04.15 23:4304.15


창문을 똑똑거리는 빗소리가 들린다. 

비가 내릴 때면  나는 언제나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것은 꽤 오래된 이야기였다. 


나는 그날 따라 특이하게 그 아이가 눈에 띄었다. 하루종일 내리고 있는 빗소리 때문에 창가에 눈이 돌아가서 일수도 있었고, 우연히 친 번개 때문에 그 아이의 얼굴이 조금 더 섬뜩해 보여서 일지도 모른다.

몰래 훔쳐본다는 생각은 갖고 있지 않았지만 어느새 우리 둘의 눈이 마주쳤고 나는 살짝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어, 안녕?"


겨우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럴 것이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많이 이야기를 나누어 본 것도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거라곤 이 아이는 나와 달리 활발했고 친구들도 많다는 것이었다.


"으응. 안녕."


또다시 번개가 쳤다. 작은 목소리라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인사를 받아주면서 웃어주었다. 그러나 웃음에는 힘이 없었다.


"무슨 일 있어?"


막상 질문을 던지고 나자 무슨 오지랖을 떠냐며 후회했지만 다행이도 그녀는 친절하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요새 자꾸만 가위에 눌려서.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어."


그녀는 그냥 그렇게만 말했다. 그리고 다시 수업이 시작됨과 동시에 책을 펴야만 했고 더이상 말을 이을 수는 없었다.

처음 인사는 어색했지만,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나는 그녀와 종종 대화를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인기가 많은 것이 이해가 될 정도로 따분하지 않고 재미있게 이야기 할 줄 아는 아이였다. 게다가 공부도 잘했고, 운동신경도 꽤나 좋았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완벽한 행동과 달리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얼굴은 핼쑥해졌고, 다크서클이 짙게 내리 깔린 눈은 볼때마다 깜짝 놀랄 정도로 퀭해져만 갔다.

점점 말라가는 모습이 눈에 띌 정도로 안쓰럽기 시작하자 나는 그녀에게 한 번 더 물어 볼 수 밖에 없었다.


"아직도 가위에 눌려?" 


그녀는 힘없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거 그냥 무시하고 자버리면 되는거 아니야?"


"처음에는 그랬는데...." 


그녀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꾸만 다가와. 말도 하는데 그게 소름이 끼쳐서 잠이 확 깨버려. 움직이지는 못하지. 옆에서 무언가 중얼거리는 건 선명하게 들리지. 그러다가 보면 어느샌가 아침이고...."


가위라곤 눌려본적 없던 나는 그녀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꽤나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그런 것을 드러내 놓고 이야기 할 수 는 없으니, 나는 인터넷에서 찾아본 '가위 깨는 법'에 대해 그녀와 한참을 대화했다. 그녀는 그 중 몇 가지는 해본 적이 있다고 말했고, 다른 것들은 처음 들어본다고 했다. 우리는 시간이 가는 줄 몰랐고, 중간중간 섞어서 말하는 내 농담에 웃는 그녀는 약간이나마 두려움을 떨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중간고사를 거치느라 그녀에게 신경 쓸 틈도 없었고, 그녀도 한동안 학원에 나오지 않았다. 비는 더이상 내리지 않았지만 어둠이 내리깔리는 시간은 점점 빨라졌고 날씨도 조금씩 쌀쌀해져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나는 다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녀는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기분도 훨씬 좋아보였고, 들떠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이제 그녀가 더이상 가위에 눌리지 않게 되었거닐 이라고 생각하고 굳이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진 않았다.


그리고 내 기억속에서 한동안 그녀가 피폐해지던 모습은 점차 지워져만 갔다.


시간이 또다시 흘렀다. 낮에 있던 체육시간 때문이었는지 그날 따라 피곤해서 일찍 드리 누웠지만 어설픈 잠결에 깨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아무리 몸을 뒤척이려고 해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 가위에 눌렸구나. 


그때서야 처음 가위가 눌린다는게 뭔지 알게 되었다. 무섭다기 보다는 체력적으로 많이 약해졌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은 피곤했고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얼핏 열린 방문틈 사이로 거실의 불이 새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역광이라서 까맣게만 보일 뿐이었다. 

덩치로 보아 동생인 것 같았고, 나는 지금 내 상태를 전달하고 싶었다. 가위에 눌렸을 때 누군가가 건드리면 깨어난다는데, 동생이 나를 건드려주기 바랐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입이 움직이기는 커녕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오히려 애쓰려 할 수록 피곤할 뿐이었다. 어쩌면 동생은 발버둥치는 내 모습이 웃겨서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찮다. 


나는 피곤함에 지쳐 그냥 다시 눈을 감았다. 반쯤 엎드린 몸이 불편했지만 그래도 잠은 잘만 쏟아졌다.

다음날이 되었을 때, 간밤에 깼기 때문인지 피곤함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아침을 먹기 위해 부엌으로 갔을 때는 이미 졸린 눈으로 하품을 하는 동생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밤에 내 방에는 왜 온거야?"


내가 앉자 마자 불쑥 그렇게 묻자, 하품을 하던 동생은 인상을 찌푸렸다.


"나? 언제?"


"몰라. 어제 밤에 나 자고 있을 때 말이야."


"무슨 소리야. 들어간적 없는데."


나는 놀라지 않았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심령현상이라는 생각에 신기하면서 무언가 재밌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히죽거리며 그 이야기를 동생한테 해주자 동생은 아침부터 무서운 소리 하지말라며 소리쳤다. 생각해보면 나는 앞으로는 이런 경험을 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그냥 들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날 밤이 되었다.


나는 깊은 잠에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아무것도 움직여지지 않는 불편한 상태가 되자 눈을 떴다. 몸은 똑바로 뉘어 있었고 눈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실의 불도 꺼져 있었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적막만이 있는 것이 한밤중인 것 같았다. 그런데 누군가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돌리고 싶었지만 전혀 보이지 않았다. 괜한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졌고 차라리 눈을 감는게 나을 거란 생각에 그렇게 했다. 그것은 문을 넘어 내 가까이로 천천히 다가왔지만 끝까지 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자는 척을 하기로 했다. 웃기는 일이었다. 곰도 아닐텐데 말이다.

그 상태 그대로 시간은 흘렀다.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초침이 똑딱거리는 벽시계의 소리는 점점 크게 들렸고 잠은 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는데, 다시 깨어났을 땐 얼마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처럼 굉장히 피곤했다. 그러나 며칠 동안은 다시 푹 잘 수 있었기에, 이날 까지만 해도 나는 이 일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큰 실수였다.


그 이후로 가위는 주기적으로 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맨 처음 연속 이틀로 눌린 것을 제외하면, 그 다음에는 일주 뒤에 눌리기 시작했고, 한달이 지나자 점차 조금씩 짧아지기 시작했다. 5일, 4일, 3일. 그리고 매일.


그리고 그 검은 존재는 한 발작씩, 점차 가까이 다가왔다.


사람처럼 느껴지는 그 존재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만 보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도대체 무언가 싶었는데 가까이 다가갈 수록 얇은 쇳소리 같은 거슬리는 웃음소리를 내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가 무척이나 기분이 나쁘고 소름이 돋았다. 더이상 듣고 싶지 않아 귀를 막고 싶어도 할 수 없었고, 미리 귀마개를 끼고 자도 그 소리는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그 존재가 나와 완전히 맞닿은 옆에 서게 되었을 때, 이제는 다른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직 있네?"


정확하게 귓가로 파고드는 소름끼치는 한 마디였다. 나는 식은 땀을 흘렸다. 경각심에 머리카락이 쭈뼛솟는 기분이었다. 그리고는 똑같았다. 그것은 계속해 나를 내려보는 것 같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사라지고 말았다.

이것이 계속해서 반복되니 새벽부터 잠에 깨버리곤 했다. 게다가 방금까지 벌어진 일이 너무나 생생해서 마치 리얼한 악몽을 꾼 것 같았지만, 악몽이라기엔 피곤하기만 할 뿐이었다.

체중은 이미 5키로나 빠져 있었다. 수면은 언제나 부족해서 학교에서 잠들기 일수였고 학원은 가지도 못했으며 성적은 계속해 내려갔다.

걱정은 집으로까지 번졌다. 점점 말라가는 내 모습이나 수척해지는 내 외양이 행여나 학교에서 따돌림이라도 당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긴 커녕 나는 학교에서 부족한 잠을 자느라 여념이 없을 뿐이었다.

밤에는 도저히 잠에 들 수 없었다. 부모님께 호소하고 병원에서 약을 타왔지만, 이제는 매일 가위에 눌릴 때마다 잠에서 깨었고 그 존재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떠올랐다. 내가 그녀에게 떠들곤 했던 가위를 깨기 위한 방법. 그 모든 것을 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시간이 흐를 수록 초조해지기만 했고 손톱을 깨무는 버릇은 점점 심해져갔다.



그 아이는 대체 어떻게 해결한거지?



그녀를 만나기 위해 오랜만에 학원에 나갔다. 그만두지는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다행이도 그녀가 보였다. 그녀의 상태는 이제 완전히 원래대로 돌아왔었다. 나는 마른 입술을 겨우 열어 그녀를 불렀다. 오랜만에 만난 탓일까. 둘이 마주하는게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너, 가위에 눌리던거 어떻게 해결했어?"


그녀는 내 질문에 살짝 놀란 듯 하면서도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너 지금 가위에 눌리고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말한대로 이상한 것이 다가와서 나를 보고 이렇게 말해. '아직 있네.' 라고. 도망 갈수도 없어. 방을 옮겨도 똑같아. 너가 그랬던 것처럼 그 소리 때문에 전혀 잠을 잘 수 없어. 이대로가단 미칠거야. 넌 대체 어떻게 한거야?!"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내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자그맣게 '나랑 똑같아.' 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그것이 그녀가 피폐해지던 때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어떻게 해? 어떻게 해서 빠져나온거야? 나좀 도와줘."


당장이라도 울듯이 그녀에게 매달리자, 그 아이는 진정하라는 듯이 내 손을 잡곤 말했다.


"걱정마. 내 말대로 하면 돼."


그녀가 살짝 웃었다. 그 미소는 두려움에 떨고 있던 내 감정을 진정 시켜주는 미소였다. 그동안 대화가 뜸했다는 이유로 그녀의 존재를 잊고 있던 것이 억울할 정도였다.



*



나는 그녀가 말한대로 두 가지를 준비했다. 소금물에 적신 솜인형 하나와 그 안에는 내 머리카락을 넣어놨다. 그리고는 그것을 내가 안심이 되는 장소에 놓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부모님 방이어도 좋고, 동생의 방이어도 좋다고 했다.

그것은 일종의 영혼의 매개체가 된다고 했다. 내가 자는 동안 유체이탈처럼 내 영혼은 그쪽으로 옮겨가게 되고, 끔찍한 가위를 경험할 필요 없이 편히 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 그 인형을 동생의 방에 놓으려고 했으나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다. 맨날 몸을 움직일 수 없어서 두려움에 눈을 감거나 천장을 볼 뿐이었는데, 지켜보는 입장이 된 이상 도대체 내 주변에서 무엇을 하는 건지 알고 싶어졌다. 맨날 눈을 감곤 하던 겁쟁이었지만, 마치 공포영화에 조연들이 헛짓을 하는 것처럼 나 역시 지금만큼은 오기가 생겼다.

나는 그것을 책상위에 쌓아놓은 책들 사이에 올렸다. 그리고 방향은 침대쪽을 향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되었다.

며칠동안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항상 잠은 빨리 들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내가 깨어있다는것을 인식했을 때에는 침대 위에 누워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정말로 꿈은 아니겠지?'


마치 그녀가 말한 것에 최면이라도 걸린 것 같아 놀라웠지만 그런 것을 확인할 여력은 없었다. 

비록 육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본능적으로 오싹함이 느껴졌다. 불이 모두 꺼진 어두운 밤에, 무언가 거무스름한 것이 다가왔다. 그것은 여전히 긁는 쇳소리를 내며 내가 자고 있는 침대 옆으로 바싹 다가왔다. 어디서 솟아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그것은 방 밖에서부터 천천히 들어왔고, 그것은 기이하게 목이 꺾여있는 사람의 형체였다. 


제대로 볼 수 는 없었지만 느끼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천천히 나의 몸에 다가왔고, 언제나처럼 나를 빤히 내려다보며 한마디를 뱉었다. 이번에도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



"이제 없네?"



그다음은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며 침대 근처를 배회하던 평소와 달랐다. 녀석은 쇳소리로 그륵거리며 웃기 시작했고 그의 손을 내 몸 가까이 다가갔다.



그래. 그것이 내가 존재할 적 나의 마지막 기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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