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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뱃속의 거지

2023.06.08 17:2106.08

배가 고팠다. 저녁을 적게 먹은 것도 아니었는데. 침대에 정자세로 누워 눈을 질끈 감고 있던 민정이 눈을 떴다.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라면…… 끓일까?

간신히 유혹을 이겨냈다.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민정이 뒤척이자 그녀의 발치에서 동그랗게 몸을 말고 누워 있던 반려묘 소피가 우우웅 울음소리를 내며 불편한 티를 냈다.

“미안해.”

어둠 속에서 소피가 꼬리를 툭툭 치는 게 느껴졌다.

민정이 몸을 옆으로 돌렸다. 허리를 동그랗게 말아 새우 자세를 해보았다. 그렇게 있으니 왠지 덜 배고픈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았다. 당장 핸드폰을 집어 들어야 했다. 배달 앱을 켜고 주린 배를 채울 무언가를 시켜야 했다. 이를테면…… 족발은 어떨까? 족발 먹은 지 좀 됐잖아.

뉴스에서 봤다. 야식이 몸을 망가뜨린다고 했다. 음식을 소화시키려면 네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그러지 않고 자버리면 위장에 무리가 간다. 실제로 야식을 즐긴 다음 날 민정은 자주 화장실을 찾았다.

그래서 늦게 먹으면 그만큼 늦게 자야 했다. 지금 시각이 열한 시쯤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족발이든 보쌈이든 시켜 먹는다면 잠은 다 잔 것이다. 아니면 먹고 바로 자서 다음 날 눈물 쏙 빠질 만큼 배가 아프든가. 출근길에 신호가 오면 큰일인데.

이겨내야 했다. 그러나 민정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무수히 많은 음식들이 스쳐지나갔다. 맛은 물론이고 기름지거나 고소하거나 맵싸하거나 달콤한 냄새, 뜨끈한 온도까지 느껴질 정도로 선명하게 떠올랐다. 후라이드 양념 반반…… 콩나물 듬뿍 올린 아구찜…… 파인애플이 다닥다닥 박힌 하와이안 피자…… 최근에 발견한 초밥 맛집의 정식 세트…… 짬짜면에 미니 탕수육 세트…… 떡볶이와 순대, 그리고 없으면 서운한 김말이 튀김…… 냉면, 그냥 냉면이 아닌 육쌈냉면…… 맞다, 야채곱창이 있었지!

뱃속의 거지, 민정의 오랜 친구인 그 녀석의 달콤한 속삭임에도 민정이 완강하게 버텨냈다.

“안 돼. 늦었어.”

민정이 말했다. 그러나 뱃속의 거지가 지칠 줄 모르고 그녀를 유혹했다.

“안 돼. 진짜 안 돼. 이런 식으로 자꾸 먹다보면 몸무게 앞자리 숫자가 바뀔 거야. 그건 진짜 안 된다구.”

민정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봐 친구, 너는 살이 안 찌는 체질이라니깐. 이틀 정도 헬스장에서 땀 좀 빼면 금방 빠질 거야. 걱정하지 말라구.”

뱃속의 거지가 다정한 말투로 속삭였다.

“아냐. 거짓말하지 마. 일 킬로 빼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 그리고 늦었다니깐. 너무 늦었다구.”

“지금 빨리 시켜 먹는 게 더 현명한 일일 거야. 어차피 배고파서 잠도 안 오잖아. 이렇게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고, 그제야 배고파서 도저히 잘 수 없단 걸 깨닫고 라면을 꺼내겠지. 새벽 두 시쯤에 라면 한 봉지를 끓여먹고, 밥까지 말아 먹을걸. 그러면 아마 세 시쯤 자게 될 거야. 그렇담 내일은 잠도 얼마 못 자 매우 피곤할 테고, 무엇보다 새벽 두 시쯤 끓여먹은 라면 때문에 얼굴이 퉁퉁 부어 있을 거야. 그것보단 지금 맛있는 걸 시켜 먹는 게 여러 모로 낫지 않겠어?”

“그, 그런가?” 일리 있는 말처럼 들렸다. 민정이 고민하다가 다시금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냐. 그냥 잘 수 있어. 자야 해. 더 이상의 야식은 안 돼.”

이렇게 버티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뱃속의 거지가 의심스러운 말투로 민정을 쏘아붙였다.

“이봐 친구, 무슨 일이 있는 거지? 그런 거지? 그러지 않고서야 돼지고기 숭숭 썰어 넣은 김치찌개를 거절할 리 없잖아. 그 찌개집 곧 문 닫을 시간인데 말이야!”

뱃속의 거지가 성화를 내자 민정이 어쩔 수 없이 사실을 밝혔다.

“일주일 뒤에 소개팅이 있어.”

“뭐? 소개팅?”

“나도 연애 좀 해보자. 응? 언제까지 솔로로 지낼 수만은 없잖아. 그러니까 협조 좀 해줘. 더 이상…… 살찌면 안 돼.”

그러나 녀석은 협조하지 않았다. 뱃속의 거지가 기어코 치이익 소리와 함께 구워지는 삼겹살에 대해서 떠들어댔다. 결국 민정은 배달 앱을 켰다. 늦은 시각까지 영업하는 삼겹살 배달 맛집을 찾기 시작했다. 어두운 방 안에 핸드폰 화면이 밝게 떠올랐다. 소피가 시위라도 하듯 어기적 걸어와서는 민정의 얼굴 앞에 대고 꼬리를 툭툭 쳤다.

그런데 삼겹살 한 점이 몇 칼로리였더라?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한 민정이 옆자리에 앉은 선배 주은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선배, 나 살쪘어요?”

“갑자기 왜?”

군살 하나 없이 매끈한 몸매를 소유한 주은이 컴퓨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요즘 살찐 거 같아서요. 오늘 얼굴도 좀 붓지 않았어요?”

주은이 고개 돌려 민정을 바라보았다.

“눈이 좀 부은 거 같긴 한데…… 살은 안 쪘어. 민정이 너 마른 체질이잖아.”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보이지 않는 데에 군살이 얼마나 많다구요. 특히 옆구리에는……. 어휴. 말도 못해요.”

그 말에 주은이 웃었다.

“너 어디 가서 그렇게 말하고 다니면 돌 맞아. 보이는 데 군살 있는 여자들은 뭐, 나가 죽어야 하니?”

몸무게 오십칠 킬로그램의, 말랐다고 하면 말랐다고 할 수 있고 적당하다고 하면 적당하다고 할 수 있는 몸매의 민정이 군살 하나 없는 주은의 몸을 부러운 눈길로 훑어보았다.

“선배는 지금 몇 킬로예요?”

“오십이? 그 정도일 거야.”

“와아.”

“너도 마른 편이야. 사실 민정이 너 정도면 남 부러울 거 없다구. 그러니까, 일하지 일. 알았지?”

좀처럼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민정이 컴퓨터 옆에 놔둔 손거울을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손거울로 자기 얼굴을 비춰보고는 민정이 입을 턱 벌렸다. 맙소사. 퉁퉁이가 따로 없었다.

“저기…… 선배, 궁금한 게 있는데요.”

민정이 의자를 끌며 주은 쪽으로 슬쩍 다가갔다.

“뭔데?”

“그…… 시술 있잖아요. 부작용, 정말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제거 시술? 뱃속의 거지?”

“네. 그거요.”

민정이 민망한 듯 고개를 푹 수그렸다.

“고민하지 말고 그냥 받아. 확실히 좋아.”

주은이 민정을 건너다보며 피식 웃었다.

어느 날 갑자기 주은이 ‘뱃속의 거지 제거 시술’을 받았다. 그녀가 말하길, 턱이 두 겹으로 겹쳐 보였다고 했다. 딱히 그래 보이지 않았는데.

제거 시술을 받기 전의 주은은 민정보다 더 많이 먹었다. 그래도 몸무게는 민정보다 덜, 아주 조금 덜 나갔다. 그게 불과 삼사 개월 전이었다. 시술을 받은 주은은 음식과 맛에 흥미를 잃었고 자연스레 몸무게가 빠졌다. 그러더니 저렇게 군더더기 하나 없는 몸매로 탈바꿈한 것이었다.

주은과 함께 다녔던 닭발 맛집과 파스타 맛집도 이제 다 옛일이 되어버렸다. 혀를 적시는 맵고 짜고 달달한, 그 다채로운 맛들의 향연! 그들은 먹는 얘기로 이야기꽃을 피웠었다. 닭발의 콜라겐이 어쩌고저쩌고, 로제파스타의 풍미가 어쩌고저쩌고…….

더 이상 주은과의 맛집 탐방이 없을 거라는 소식에 민정의 뱃속의 거지가 몹시 아쉬워했다. 그리고 동족이 제거되었다는 사실에 크게 충격 받은 듯했다. 이봐 친구, 너는 그 제거 시술인지 뭔지 받지 않을 거지?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안 그래? 우린 친구잖아. 뱃속의 거지가 슬몃 눈치를 살폈다. 아, 안 그럴 거야. 그니깐…… 적당히 먹어. 알았지? 민정이 자기 배에다 대고 말했다. 내가 나만 좋다고 먹는 줄 알아. 다 너를 위해서야. 비쩍 말라가지고 어디…….

퇴근하자마자 민정은 주은이 시술받았다는 성형외과를 찾았다. 마침 슬슬 배고파지던 때여서 뱃속의 거지가 눈을 뜬 참이었다. 그리고 민정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깨달은 녀석은 말까지 더듬으며 당황했다.

“이, 이봐. 이러지 말자구. 우리 마, 말로 해결하자구. 응? 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안 그런다며. 나한테 약속했잖아.”

“미안해. 나도 이제…… 어쩔 수 없어.”

오랜 웬수이면서 또한 오랜 친구이기도 한 뱃속의 거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 말뿐이었다.

의사와 상담하는 중에도 녀석은 쉬지 않고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우는 시늉을 했고 버럭 화내기도 했으며 마지막에 가선 함께 해치운 음식들을 줄줄이 읊으며 이 맛난 걸 더 이상 즐기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는 협박 같으면서 협박 같지 않은 협박을 했다.

민정은 양손으로 자기 배를 감쌌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창피했다.

의사가 점잖은 어투로 말했다.

“정말 난폭한 거지군요. 지금까지 이런 거지를 뱃속에 품고 어떻게 사셨습니까? 지금 몸무게를 유지하시는 것만 해도…… 대단하십니다.”

“이봐 의사 양반, 뭐라고 했어? 나랑 해보자는 거야 뭐야? 어?”

뱃속의 거지가 의사에게 성질을 냈다.

“조, 조용히 좀 해.”

“조용히 하면 뭐가 달라져? 응? 내가 조용히 암 말도 안 하면 제거 시술인가 뭔가, 그거 안 받을 거야?”

그건 아니었다. 그래서 민정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이고, 내 팔자야. 너밖에 없다느니 가장 소중한 친구라느니 그런 달콤한 말소리를 들려주던 네가 나를 이렇게 배신할 줄이야. 달콤한……? 이봐 친구, 마카롱 먹고 싶지 않아? 우리 딱 마카롱 하나씩만 먹자. 응? 시술이고 뭐고 마카롱 먹고 나서 해도 되잖아. 그러니까 마카롱 하나씩…… 아니 두 개씩 먹자. 하나론 부족하잖아. 감칠맛만 돌지. 기왕 먹는 거 세 개씩 먹는 건 어때? 내가 이 근처 마카롱 맛집을 아는데 거기가 어디냐면…….”

“힘드시겠어요.”

의사가 고개를 절레 저었다.

“네. 시술…… 받는 게 맞겠죠?”

“당연하죠. 시급합니다. 근데 예약이 많이 밀려서 한 이 주 정도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동안 거지를 잠재울 수 있는 거지 전용 수면제를 처방해드릴…….”

“저기 선생님, 당장 어떻게 안 될까요?”

민정이 저도 모르게 꽉 쥔 주먹으로 테이블을 탕 내리쳤다. 그러고는 자신의 행동이 민망해서 슬쩍 고개를 수그렸다.

“당장요?”

“말하기 부끄러운데…… 제가 소개팅이 있거든요. 일주일 뒤에요.”

민정의 말에 의사가 당황하지 않고 다 이해한다는 듯 웃어보였다. 이런 경우가 많았던 듯싶었다.

“상당히 긴급한 상황이군요. 방법이 없지는 않습니다. 비용이 좀 더 들기는 합니다만…….”

 

방법이라는 게 별거 아니었다. 비용을 더 치르고 새치기를 하는 거였다. 제거 시술은 다음 날 바로 진행되었다. 급히 반차를 써야 했다. 민정은 팀장에게 온갖 소리를 다 들어야 했다. 다행히 주은이 거들어주어 무사히 반차를 쓸 수 있었다. 팀장님, 민정이가 받는 시술은 미용을 위한 시술이 아닌 건강을 위한 시술이라고요!

수술이 아닌 시술이었다. 수면마취를 해야 했지만 메스로 어딘가를 째거나 하는 건 없었다. 대장 내시경을 할 때와 비슷한 방식으로 시술이 이뤄진다고 했다. 민정의 입 안으로 거지 제거 전용 집게-인형 뽑기 기계에 달린 집게 모양의 집게가 달린 호스-를 집어넣는다고 했다. 그걸로 거지를 포획해서 입 밖으로 끄집어낸다고 했다. 민정은 그 얘기를 듣고는 보통 크기가 아닐 텐데, 남들보다 훨씬 큰 거지가 나와서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가 깜짝 놀라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을 했다.

수면마취에서 깬 민정이 배를 어루만졌다. 뱃속에 허전한 기운이 들었다. 무언가가 없어졌다는 게 느껴졌다. 이상했다. 어떤 감각이 없어졌다는 것이. 의사 말대로 통증 같은 건 없었다. 검증받은 아주 안전한 시술입니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마취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몸이 무거웠다. 뭘 먹어야 할까.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내키지 않았다.

식욕이…… 없었다. 이런 느낌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의사가 투명 아크릴로 된 케이지를 건넸다. 딱 햄스터를 넣어다 키울 만한 사이즈의 케이지였다. 케이지 안 바닥에 폭신해 보이는 하얀 천이 깔려 있었다. 천 한가운데 병원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미니어처마냥 자그마한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거지가 불만 가득한 표정을 하고선 소파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다행이었다. 어마어마하게 클 줄 알았는데.

민정은 녀석의 실물을 처음 보았다. 신기했다. 이게…… 내 뱃속의 거지였구나. 이런 모습이었구나. 아주 자그마하게 축소한 민정 자신의 모습이었다. 다른 게 있기는 했다. 어딘지 모르게 심술궂은 얼굴 표정이 그랬다. 방금 민정에게서 강제로 떨어져 나와 화가 잔뜩 난 듯싶었지만 그걸 차치하고도 꽤나 까칠한 인상이지 싶었다. 그리고 늘 자세가 단정한 민정과는 다르게 껄렁껄렁했다. 소파 위에 드러누운 작은 민정이 마치 불한당처럼 다리를 덜덜 떨어댔다. 심지어 코를 후벼 파기까지 했다. 민정이라면 결코 그렇게 다리를 떨지 않았을 것이고 다른 사람 앞에서 코를 후비지도 않았을 것이다.

뱃속의 거지가 케이지 안을 들여다보는 민정을 보고는 콧방귀를 뀌었다.

“이제 만족하냐. 어? 이제 속이 후련해? 이 배신자야. 평생 널 저주할 거야. 네가 나 없이 잘 살 것 같아?”

민정이 흠칫 놀라며 케이지를 내려놓고 뒷걸음쳤다.

의사가 민정에게 말했다.

“육십 일 동안 거지를 어…… 폐기하지 않고 보관해야 합니다. 법이 그래요. 예전에는 당장 폐기했었습니다. 근데 이 제거 시술의 가장 큰 부작용이 거식증인데, 이거 때문에 사회적으로 이슈가 좀 있었거든요. 검색해보셨으면 아실 테죠. 거식증이 심해지면 거지를 다시 뱃속에 집어넣는 재건 수술을 해야 합니다. 재건 수술은 시술이 아니고 수술인데, 이게 보통 일이 아니랍니다. 집어넣는 거야 문제가 되지 않는데, 이게 잘못되면 식욕에 아주 이성을 잃어버릴 수가 있거든요. 거지가 본체가 된다고 할까요. 아무튼 뭐, 거식증은 아주 드문 경우이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고…….”

“근데 폐기라고 하면, 쟤를 죽이는 건가요?”

민정이 조심스레 물었다.

“죽인다라. 비슷한 개념입니다. 폐기를 꺼리시는 마음이야 당연합니다. 그래도 오랫동안 함께한, 일종의 친구이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자신의 일부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많이들 주저하죠.”

“네. 폐기는 아닌 것 같네요.”

“근데 결국엔 다들 폐기하더라고요. 특히나 환자분의 거지처럼 난폭한 경우라면…… 장담하건대 백 프로입니다.”

“왜요?”

“같이 지내보시면 알 거예요. 아아. 저희 병원에서 대신 보관해주기도 합니다. 보관 비용은…….”

이미 거금의 시술비를 들였기 때문에 비싼 보관 비용까지 치를 수 없었다. 민정은 케이지를 옆구리에 끼고 병원에서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거지가 여간 시끄러운 게 아니어서 곤혹스러웠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어?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우리 함께 먹어치웠던 그 많은 음식들을 떠올려봐. 그 영광의 순간들을 떠올려보라구. 너의 멍청한 선택으로 인해 그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렸어. 그리고 오늘은 같이 피자를 먹기로 한 날이었어. 피자데이였다구. 어떻게 이런 뜻 깊은 날에……. 이 배신자, 배신자!”

지하철에서 그리고 버스에서 그 소리를 들은 승객들이 깜짝 놀라며 민정을 쳐다보았다. 택시 탈 걸 그랬다. 울고 싶었다. 민정이 얼굴을 붉히며 죄 지은 사람마냥 고개를 푹 수그렸다.

집에 도착했다. 진이 다 빠진 것만 같았다. 민정이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케이지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장모의 삼색이 고양이 소피가 식탁 위로 올라와 케이지 안의 거지 녀석을 들여다보았다. 소피가 핑크빛 코를 들이대 킁킁 냄새를 맡았다. 앞발로 케이지를 조심스럽게 툭 건드렸다. 그러자 케이지 안의 거지가 주먹을 휘두르며 이렇게 소리쳤다.

“저리 꺼지지 못해? 멍청한 고양이 같으니라고.”

소피가 하악 소리를 내며 털을 세웠다. 얼마 간 대치 상태가 이어지다가, 결국 거지 녀석의 기세에 못 이겨 소피가 우우웅 소리를 내며 달아났다.

“둘이 싸우지 말고 지내. 제발 부탁이야.”

민정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씻고 침대에 눕고 싶었다. 민정은 우선 씻기로 했다. 뜨거운 물로 오랫동안 샤워를 했다.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케이지 안의 거지가 성화를 냈다.

“배고파. 배고프다구. 뭐라도 시켜줘. 굶겨 죽일 셈이야? 아아. 그럴 속셈이구만. 그렇게 날 보내버리면 어디 마음 편히 발 뻗고 잘 수 있을 거 같아? 이봐 친구, 근데 갈 데 가더라도 치킨 한 마리는 뜯고 가자. 그 정도는 베풀 수 있잖아. 같이 먹으면 더 좋구. 어서, 어서 시키라구.”

거지가 케이지 벽면에 붙어 서서 쉬지도 않고 떠들어댔다. 민정이 원망 섞인 눈초리로 엄지손가락만 한 거지를 쳐다보았다. 생각하건대-이렇게 떼어내고 나니까 그간 저 녀석에게 얼마나 휘둘렸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의 뱃속은 평온했다. 저녁 여덟 시에 가까워진 이 시각, 점심 이후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만 민정은 배고프지 않았다. 뭘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민정이 케이지 윗부분의 조그마한 원형 뚜껑을 열었다. 민정의 손이 들어갈까 말까 한 작은 구멍이었다. 하얀색 알약 한 알을 케이지 안에 넣었다. 알약이 병원 로고가 박힌 천 위에 툭 하고 떨어졌다.

“이게 뭐야?”

거지가 알약을 주워들고는 고개 들어 민정을 올려다보았다. 엄지손가락만 한 거지가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으니, 알약이 맘모스빵처럼 보였다.

“거지 전용 수면제야. 그걸 먹으면 잠이 올 거야. 그럼 배고픔도 가시겠지.”

민정의 말에 거지가 알약을 냅다 집어던지고 욕지기를 쏟아냈다. 그 역시, 민정이라면 결코 입에 담지 않았을 욕지기였다.

어떻게 이런 게…… 나의 일부였을까?

“그거 먹든가 말든가 마음대로 해.”

민정이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 이 거지에게 이렇게 엄격하게 군 적이 있었던가.

민정이 침대에 누웠다. 소피가 민정의 품을 파고들었다. 부드러운 삼색 털 뭉치 소피를 쓰다듬다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잠은 달콤했다. 마카롱보다 달콤했다. 뱃속의 거지가 만들어낸 ‘가짜 공복’과 그로 인한 야식 생각에 잠 못 이루는 밤은, 이제 끝이었다.

 

다행히 거식증 증세는 없었다. 민정은 점심과 저녁 두 끼를 꼬박 챙겨 먹었다. 음식이 맛있지는 않았다. 미각이 둔해진 느낌이었다. 혓바닥에 골무 같은 걸 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맛이 덜 느껴졌다. 그래서 식사 시간이 즐겁지 않았다. 그래도 먹어야 하니까 먹었다.

주은이 영양소를 고루 섭취해야 한다고 조언해주었다. 먹을 생각이 거의 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대강 먹기 십상이라고 했다. 건강을 잃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꼬박꼬박 잘 챙겨 먹어야 했고, 무엇보다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하는 식단이 필요하다고 했다. 민정은 핸드폰으로 영양소 관리 앱을 다운받아 자신의 식사를 꼼꼼히 기록했다.

하루가 다르게 몸이 가벼워졌다. 시술 후 건강이 나빠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오히려 건강해지는 기분이었다. 사흘 만에 몸무게가 일 킬로그램이나 빠졌다. 이대로 며칠만 지나면, 다이어트하면 되지 하면서 사놓고 결국 못 입었던 청바지도 입을 수 있겠지 싶었다.

기분이 좋아지려고 할 때마다 뱃속의 거지, 아니 이제 배 밖의 거지가 된 작은 민정이 민정의 신경을 건드렸다.

“좋냐. 그렇게 좋아? 살 빠져서 좋아? 남자 만날 생각에 그렇게 좋아? 어이구, 저 웃는 꼴 좀 봐라. 내가 볼 땐 피골이 상접해서는, 아주 해골이 따로 없구만. 거봐, 내가 없으니까 더 못생겨졌잖아. 너 지금 엄청 못생긴 거 알아? 분명 차일 거야. 엄청 끔찍하게 차일 거야.”

“그만 좀 해.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민정이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자기 분신을 달래기 위해 순살 치킨 한 조각을 케이지 안에 밀어 넣었다. 거지 전용 수면제는 죽어도 안 먹을 것 같았다. 그래서 거지를 위해 일부로 시킨 치킨이었다. 치킨 조각이 병원 로고가 새겨진 천 위에 툭 떨어졌다. 엄지손가락만 한 작은 민정이 순식간에 치킨 조각을 먹어치웠다. 그 모습을 보며 민정은 혐오감을 느꼈다. 예전의 내가 저렇게, 게걸스럽게 먹었을까.

식탐이란 것, 보기 흉했다.

“넌 분명 차일 거야. 거울은 보고 다니는 거야? 못 먹어서 피부가 퍼석퍼석해졌잖아. 넌 나와 함께일 때 가장 예뻤어. 너도 곧 깨닫게 될 거야. 하지만 날 폐기한 뒤에 깨닫겠지. 엉엉 울면서 날 찾을걸. 그 의사 양반의 손에 끔찍하게 죽임을 당한 나를 끌어안고 미안하다고,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며 울 거야.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을 테고.”

치킨 조각을 해치운 거지가 다시금 요란스럽게 떠들어댔다. 민정은 귀를 막고 싶었다. 저 쪼꼬만 게 목소리는 또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폐기 안 할 거야. 우린 친구잖아. 그럴 일 없어. 그냥…… 이젠 떨어져 지낼 때인 거야.”

민정이 순살 치킨 한 조각을 더 넣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의사의 말소리가 반복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장담하건대 백 프로입니다.

어찌되었든 제거 시술을 받은 덕분에 그녀는 살찌지 않았고 야식으로 인해 얼굴이 퉁퉁 붓지도 않았다. 그래서 소개팅을 성공적으로 치렀는지도 몰랐다. 아니, 제거 시술을 받은 덕분인 게 확실했다. 제거 시술을 받지 않았더라면 작은 민정이 치킨 조각을 먹어치우듯이 게걸스럽게 저 앞의 파스타를 먹어치우지 않았을까? 저렇게 마음에 드는 남자 앞에서?

남자는 아주 잘생겼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훈남 스타일이었고, 무엇보다 키가 크고 몸이 다부졌다. 꾸준히 운동을 한다고 했다. 옷도 아무렇게나 입지 않은 듯 제법 맵시 있게 입었다. 몸이 좋으니 옷태가 좋았다. 성훈 씨는 좋은 직장을 다녔고 유머 감각도 있었다. 취미는 독서. 민정과 같은 취미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한참이고 감명 깊게 읽은 책 얘기를 나눴다.

“민정 씨도 소식(小食)파이신가 봐요.”

성훈이 웃으면서 말했다.

민정 앞에 놓인 접시에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민정이 식사를 마쳤다는 의미로 식기를 내려놓은 참이었다.

“제가…… 워낙 조금 먹어요. 좀 그런가요?”

이렇게 말해도 될까. 그래도 거짓말은 아니잖아. 이렇게 먹은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이렇게 먹으니까. 앞으로도 그럴 거고. 어쩐지 긴장한 민정이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뇨. 많이 먹는 것보다 낫지 싶은데요. 소식이 몸에도 좋대요. 게다가 민정 씨처럼 마른 분이 많이 먹기까지 하면, 이거 세상이 너무 불공정하지 않나요. 그리고 이렇게 말해도 되나 모르겠는데, 참 예쁘게 드시는 것 같아요.”

성훈의 말에 민정이 얼굴을 붉혔다.

“그런데 성훈 씨도 남자치곤 적게 먹네요?”

성훈 앞에 놓인 접시에도 얼마간의 파스타가 남아 있었다. 그녀보다는 더 먹었지만.

“저도 먹는 걸 즐기는 타입이 아니어서요. 민정 씨가 소식파니까 편하네요, 괜히 눈치 볼 것도 없고.”

성훈이 자신의 차로 민정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차 안은 깔끔했다. 좋은 향이 났다. 자기 몸을 가꿀 줄 아는 것처럼 자기 물건도 잘 가꾸는 사람인 것 같았다. 성훈이 차를 정차하고는 고개 돌려 민정을 보았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지금 내리시면 안 돼요.”

그러더니 재빨리 운전석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이러실 필요까진 없는데…….”

“아뇨. 에프터 성공하려면 이 정도 매너는 기본이죠. 민정 씨, 또 만나고 싶은데 제가 에프터 신청하면 받아주실 건가요?”

얼굴이 달아올랐다. 민정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될까요?”

 

성훈과의 두 번째 만남은 첫 번째 만남보다 더 좋았다. 거지의 말대로 끔찍하게 차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어쩌면, 그와 연애를 시작할지도 몰랐다.

민정은 매일 꼬박꼬박 두 끼를 잘 챙겨 먹었다. 턱선이 살아났다. 옆구리의 군살도 몰라보게 빠졌다. 게다가 밀가루도 잘 안 먹게 되니 피부에 뾰루지도 덜 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비로소 밀가루 중독에서 벗어났다!

그런 민정에게 거지가 짓궂은 말소리를 해댔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거슬리는 건 여전했다.

“뭐? 벌써 세 번째 만남이라구? 하! 내가 볼 땐 그놈 사기꾼이야. 너한테 옥 장판 같은 걸 잔뜩 팔아넘기려고 하는 거라구, 이 바보 멍청아. 어딜 봐서 네가 예쁘니. 홀쭉하기만 해서 마치 해골이 걸어 다니는 것만 같구만. 너 지금 엄청 못생겼다니깐. 뭐? 조용히 해? 내 입을 막으려면 먹을 걸 주라고. 배고파 죽겠어. 그치. 그래 그래. 근데 인간적으로 이틀 연속 쿠키는 아니지 않아? 좀 뜨끈뜨끈하면서 매콤한 건 없어? 이를테면 떡볶이라든가 아니면…….”

이틀 연속 쿠키라고 해서 안 먹지는 않았다. 거지가 여지없이 게걸스럽게 쿠키를 해치웠다. 그런데, 저 쪼꼬만 몸으로 자기 몸뚱이보다 몇 배는 더 커다란 쿠키를 어떻게 먹어치우는 걸까. 저게 다 어디로 가는 걸까. 저게…… 가능한 일일까.

소피도 거지에게 익숙해진 듯싶었다. 이제는 별로 관심을 주지 않았다. 아주 가끔씩 케이지 안쪽을 들여다보았지만 하악 소리를 내지도 않았고 털을 세우지도 않았다. 그저 몇 분 간 케이지 안쪽을-거기서 주먹을 휘두르고 방정맞게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작은 민정을 눈으로 쫓을 뿐이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세 번째 데이트 날, 성훈이 민정에게 사귀자고 했다. 민정은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잠시 고민하는 척을 했다. 그런 자신이 여우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민망해졌다.

“좋아요. 우리 사귀어요.”

민정이 이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순조롭게, 민정은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게 얼마만인지. 성훈 씨 같은 훈남이랑.

그 황홀한 밤, 성훈이 민정을 집까지 데려다주었고 이번에도 멋들어지게 조수석 차문을 열어주었다.

민정은 신발을 벗지도 않고 마중 나온 소피를 꼭 끌어안았다.

“소피야, 엄마 이제 솔로 탈출이다!”

그러자 소피가 말했다. 어? 소피가 말을?

“참나. 내가 말했잖아. 순 사기꾼이라고.”

아니 이 말은…….

민정이 소피를 홱 밀쳐버렸다. 소피가 저만치 밀려났다. 소피는 네 발을 쭉 펴서 스케이트를 타듯이 방바닥을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소피가 아웅 소리를 내었고 그 다음에 다시 말을 했다. 정확히 말해, 소피 뱃속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놀랐어? 난 새 친구를 찾았어.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죄수 생활하는 게 억울해서 말이야. 이게 죄수가 아니고 뭐겠어. 내가 뭘 잘못했는데! 아무튼 그래서 뽀빠이처럼 탈출했지. 흐흐. 그리고 새로운 친구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했어.”

“뭐, 뭐야. 너…….”

“이 녀석, 이름이 소피라고? 나랑 참 잘 맞아. 너처럼 먹을 거 앞에서 칼로리를 따지지도 않고 죄책감이니 뭐니 하면서 그 맛 좋은 걸 거부하려고 들지도 않아. 너와 함께한 그 세월 동안 너를 설득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진작 이 녀석을 친구로 삼을 걸 그랬지 뭐야. 이 뚱뚱한 고양이는 나와 완벽하게 일심동체야. 심지어는 내가 배고프기에 앞서 이 녀석이 먼저 배고프다며 뭘 좀 먹어야겠다고 성화라니깐. 기특한 녀석이지 뭐야.”

소피가 다시 아웅 소리를 냈다.

민정은 모든 게 엉망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니, 확신할 수 있었다. 식은땀이 절로 났다. 민정이 고개를 홱 돌렸다. 식탁 위에 올려둔 케이지를 바라보았다. 케이지 윗부분 원형 뚜껑이 활짝 열려 있었고 케이지 안은 비어 있었다.

“거, 거기서 나오지 못해?”

“싫어. 난 이 뚱뚱한 녀석의 몸을 갖기로 마음먹었어. 녀석도 그걸 원한다구. 헤헤헤.”

“안 돼!”

민정이 신발을 채 벗지도 않고 집 안으로 들어가 소피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소피가 날렵하게 민정을 피하며 호다닥 달아났다. 여러 차례 시도해보았으나 날랜 소피를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민정이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숨을 헐떡이고 있는데, 소피가 놀리듯이 느긋한 걸음걸이로 그녀 앞을 지나갔다. 꼬리를 부드럽게 씰룩이면서. 소피가 사료가 든 그릇 쪽으로 향했다. 앞발로 그릇을 홱 쳤다. 그릇이 엎어지면서 사료가 방바닥에 부채꼴 모양으로 퍼졌다.

“배고프긴 하지만 이 따위 개밥은 먹지 않겠어. 녀석은 츄르를 원하는데 내 생각은 달라. 더 그럴 듯한 걸, 더 맛있는 걸 먹어야겠어. 으음. 확실히 고양이 몸속으로 들어오니 생선이 당기는군. 회 한 그릇 주문해주지 않을래? 안 그러면…….” 소피가 재빠르게 주방 싱크대 위로 올라갔다. 그러더니 식기건조대 안에 들어 있는 하얀색 앞 접시를 앞발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이 집 안을 엉망으로 만들 테야.”

결국 앞 접시가 식기건조대 밖으로 빠져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앞 접시가 산산조각이 났다. 저거, 주은 선배가 선물해준 건데.

소피가, 아니 소피 뱃속의 거지가 된 작은 민정이 화장대 위 화장품을 마구 헤집어 방바닥으로 죄다 떨궜다. 선반의 장식품도 떨궜다. 행거에 걸린 옷가지에 발톱을 박고 기어오르기도 했다. 캐시미어라고 봐주지 않고.

민정이 몸을 날렸다. 그러나 방바닥에 얼굴을 처박는 꼴이 될 뿐이었다.

“못 먹어서 그래. 몸에 힘이 없으니까 이 뚱뚱한 고양이 하나를 못 잡는 거지. 안 그래? 어서 회를 시키라고. 대(大)자, 아니 특대(特大)자로 시켜. 서더리탕 서비스로 주는 데에서 시켜. 그거 없으면 아쉽잖아. 같이 먹자구. 같이 먹고 힘내자. 예전처럼 신나게 먹어치우는 거야. 어서 시키라니깐?”

민정이 좌절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성훈이었다. 민정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벨소리가 그치더니 곧이어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벌써 자는 건 아니죠? 잠깐 나와볼래요?

민정의 집 앞에 있는 걸까? 아니 왜…….

민정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와중에도 소피가 온갖 난동을 부렸다. 집 안이 엉망이었다.

모르겠다.

민정이 현관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나왔다. 문틈 사이로 거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어디 가! 어디 가! 회는 시켜주고 나가!

그녀가 사는 오피스텔 앞에 성훈이 뒷짐 지고 서 있었다.

“무슨 일로…….”

민정의 물음에 성훈이 짠 소리를 내며 뒤에 숨기고 있던 꽃다발을 내밀었다.

“선물이에요.”

“아아. 고마워요.”

민정이 밝게 웃어보였다. 아니, 밝게 웃으려 했다.

“저…… 마음에 안 드시나요?”

성훈이 민정의 눈치를 살폈다.

“그게 아니라…….”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창피한 일이었는데. 어떻게든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일이었는데. 민정이 울음을 터뜨렸고 당황한 성훈이 그런 민정을 조심스럽게 안았다. 무, 무슨 일이에요? 성훈의 물음에 민정이 끅끅 소리 내며 울면서 좌초지종을 설명했다. 배, 뱃속의 거지가…….

창피해 죽겠다.

다행히 성훈은 실망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뱃속의 거지 제거 시술’을 받았다는 데에도, 그 거지가 아주 난폭하기 이를 데 없는데다 그녀가 키우는 고양이 소피의 몸을 사로잡아 행패를 부리는 데에도……. 그 얘기를 듣고 나서도 실망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민정은 성훈의 따뜻한 품에 조금 더 오래 머물고 싶었다.

“괜찮아요. 제가 도와줄게요.”

“어떻게요?”

“같이 잡죠.”

“네?”

“녀석…… 아니, 민정 씨 거지 분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거지 분께서 원하시는 게 회라고 하셨죠? 잠시만 기다려요.”

그렇게 말하고 성훈이 쌩 하니 달려가 사라졌다. 그러더니 이내 큼지막한 비닐봉지를 들고 나타났다.

“회 사왔어요. 거지 분께서 회를 먹고 있을 때 포획하는 거예요. 고양이 이동장 있죠? 거기에 가둬버리죠.”

성훈이 앞장섰고 민정이 뒤따랐다. 사귀기로 한 지 채 한 시간도 되지도 않았는데 집을 보여주게 되다니. 근데 집이 엉망인데. 최악이다 진짜. 아니지. 그게 문제가 아니야. 뱃속의 거지, 나의 분신이 문제지.

성훈이 비닐봉지 안에서 큼지막한 회 한 접시를 꺼냈다. 친친 감긴 랩을 벗겼다. 회에선 윤기가 흘렀다. 성훈이 스티로폼 접시를 마치 귀중한 제물이라도 되는 양 두 손으로 단단히 받쳐 들었다. 성훈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민정이 후우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현관문을 열었다.

엉망이 된 집 안 한가운데 소피가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있었다. 경계에 찬 눈길로 민정의 뒤에 서 있는 낯선 남자를 노려보았다.

“저놈은 누구지? 근데 이 군침 도는 냄새는 뭐지?”

“내 남자친구야. 그리고…… 내 남자친구가 너 주려고 회 사왔어.”

민정이 옆으로 빠지자 회 접시를 든 성훈의 모습이 드러났다.

“오호. 예의 바른 친구로군. 이런 선물을 다 준비하고 말야. 크으. 뭘 좀 아는 친구구만. 이거 특대(特大) 맞지? 그치. 이 정도는 되어야지. 이제 보니 아주 훈남인 걸? 자네 뱃속에도 거지가 있나? 으음. 자자. 일단 먹으면서 얘기하자구. 그 접시, 이쪽으로 내려놓지 않겠어?”

성훈이 회가 가득 담긴 스티로폼 접시를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성훈이 민정에게 눈짓을 주었다. 민정이 소리 나지 않게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베란다 쪽으로 향했다.

“민정이랑 연애질을 한다구? 흐흐. 민정이가 얼마나 잘 먹었는지 자네는 모를 거야. 우린 오랫동안 환상의, 아니 환장의 짝꿍이었지. 난 민정이 쟤가 환상의 짝꿍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민정이한테는 내가 환장할 놈의 거지였던 모양이야. 어느 날 불쑥 날 떼어내지 뭐야. 배신자…… 배신자! 너도 원했으면서! 흠흠. 아무튼 민정이는 엄청 잘 먹어. 가끔 보면 돼지가 따로 없다니깐. 먹을 때 꾸엑꾸엑 소리가 안 나는 게 신기할 정도야. 그러니까 잘 먹이게나. 나 대신 잘 먹여야 해. 원래 많이 먹어대던 몸이 갑자기 저리 조금 먹으니 걱정이 되지 뭐야. 나도 참, 저 배신자가 뭐가 좋다고 이렇게 걱정하고 있나 그래. 음. 근데 서더리탕은 없나? 뭐? 없다고? 이런 이런, 그거 참 아쉬운데?”

쟤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저 입을 어떻게 틀어막지. 소피가, 아니 소피 뱃속의 작은 민정이 게걸스럽게 회를 먹어치우며 끊임없이 말을 쏟아냈다.

민정이 울음을 참으며 서둘러 이동장을 찾았다.

그 많은 회를 절반이나 먹어치워 소피의 배가 위험하다 싶을 만큼 빵빵해질 즈음, 성훈이 재빠르게 소피를 낚아챘다. 그러더니 민정의 손에 들린 이동장 안으로 쑤욱 밀어 넣었다. 어어어. 소피 뱃속의 거지가 당황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성훈이 지퍼를 끌어당겨 이동장 문을 잠갔다.

“이봐 친구들, 이게 무슨 짓이야. 무슨 짓이냐고!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아직 먹고 있는 중이었잖아.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이건 진짜 아니지. 다 먹게 해줘. 다 먹게 해줘!”

이동장 안에 갇힌 소피 뱃속의 거지가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휴. 성공이네요.”

성훈이 이마를 훔치는 시늉을 하며 유쾌하게 웃었다.

민정이 기뻐하다가 이내 울상이 되어서는 성훈에게 물었다.

“솔직히 말해봐요. 저한테 실망 많이 했죠?”

“실망이요? 아뇨. 실망을 왜 해요.”

“아냐. 실망했을 거야.”

“안 그래요.”

“아닐 텐데. 제 거지 봤잖아요, 식탐이 얼마나 많은지. 근데요. 저 시술 받기 전에도 그렇게 많이 먹지 않았어요. 제 거지가 과장해서 말한 거예요. 저 돼지처럼 먹지 않았어요. 진짜예요. 이렇게 말해도 안 믿겠죠?”

“민정 씨, 괜찮아요.” 성훈이 민정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좋아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저도 솔직하게 깔게요. 그러니까 사실…… 저도 그거 받았어요, 그 시술. 반년쯤 됐죠. 그전에는 사실…… 저 좀 통통했었어요. 근데 오해는 마세요. 뚱뚱은 아니었어요. 통통이었죠.”

이 남자, 오늘부터 사귀기로 한 사이였는데 어쩐지 일 년 넘게 사귄 남자친구처럼 친밀하게 느껴졌다. 민정은 이 남자와 무척이나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도 그랬고. 그래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웃지 마요. 그래도 제 거지는 민정 씨 거지 분처럼 고양이 뱃속으로 들어가 저렇게 행패를 부리진 않았다고요.”

모든 게 엉망이 되었다가, 다시금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악몽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이윽고 민정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저 거지를 어디로 데려가야 하죠? 시술 받았던 병원으로 데려가야 할까요, 아니면…… 동물병원으로 데려가야 할까요?”

민정은 그게 궁금했다.

댓글 2
  • No Profile
    감동란 23.06.19 21:46 댓글

    재밌어요ㅋㅋ

     

  • 감동란님께
    No Profile
    글쓴이 박낙타 23.06.20 12:35 댓글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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