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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암브와트: 영혼의 상자

2011.03.23 23:0203.23

                  
          

                                                  암브와트: 영혼의 상자


1.  

가까운 미래에 인류는 산업 혁명 이후로 다시 한번 고도의 성장을 기록하게 되었다. 에너지 문제는 더 이상 인류의 문제거리가 아니었다. 태양과 중력에서 얻을수 있는 자연 에너지의 무한함은 화석 에너지를 과거의 기억, 풋풋한 시절의 추억 정도로 만들어 버렸다. 몇 년을 주기로 떠들어대던 종말설도, 위키리크스가 폭로했던 외계인의 존재도 해당 사이트와 함께 사라져버린지 오래다. 이 시대는 바야흐로 생존의 문제가 더 이상 인류의 두려움이 되지 않는 그야말로 진정한 욕망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시대 최대의 화두는 한 가지. 바로 영생이었다.


알이 처음 '암브와트'를 경험했던 것은 아주 어린시절이었다. 할아버지의 육체가 노쇠하여 결국 영혼 전이를 선택 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 동안 살아남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암과 같은 간단한 병에서 부터 scn 바이러스까지 줄 곧 앓아 온 그는, 약이란 약은 아스피린에서 부터 다른 미지의 행성에서 추출해낸 기적의 약까지 다 먹어보고, 돼지 몸에 인간줄기세포를 이식시켜 장기란 장기도 모두 갈아치워 봤지만 그의 나이 120세를 결코 넘기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뇌 때문이었다. 인간의 모든것을 다 교체한다해도 결코 뇌를 갈아치울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지난 백년 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인간 영생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실험과 논문을 내 왔지만 결국 인간의 cpu를 교체할 방법을 찾을 수는 없었다. 기껏 돈을 들여봐야 부속품들을 바꿀 뿐이지 늙어가는 뇌의 수명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생겨난게 바로 '암브와트'였다. 프랑스에서 처음 발명 되어 프랑스 식으로 불린 이 기계는 한국말로 '영혼 상자'였다.
        

이 영혼 상자는 말 그대로 인간의 영혼을 담아두는 역할을 했다. 결국 육체를 버리고 정신만 을 간직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신 속 세계는 전혀 불행하지 않았다. 단지 다른 차원의 세상일 뿐이었다.  


알의 가족들은 조금은 경건한 자세를 하고 멀티레이트를 작동시켰다. 알은 할아버지를 볼 수 없다는 것이 별로 슬프지 않았다. 아니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할아버지는 돌아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멀티레이트가   웅하는 소리를 내며 프로젝트에 빛을 쐈다. 할아버지의 얼굴이 스크린에 나타났다. 평소와 다름 없이 밋밋한 대머리에 무표정한 얼굴이 나타났다. 할아버지는 주변을 두리번 거리더니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아버지! 어떠세요. 기분은 괜찮으세요"
"아! 나 아직 살아있다...이런 기분이었구나. 좋아. 좋아. 난 아주 좋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다"

이제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와 같은 집에서 살게 됐다. 알의 가족은 한 참을 그렇게 스크린에 비친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눴다. 할아버지는 대단히 만족스러워 보였지만 나중엔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무슨 의미의 눈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건 그 후로 10년 뒤였다. 집안의 가계가 심하게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났다. 부모님은 이혼을 했고 멀티레이트는 영화나 TV를 보던가 인터넷을 사용하면 했지 더 이상 할아버지를 불러내지 않았다. 모두가 할아버지를 잊고 살았고 그렇게 A&B사에 내야하는 암브와트의 정액료가 쌓여만 가다가 결국 해지 되고 말았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소리 소문 없이 돌아가셨다.


A&B사는 글로벌 기업으로 세계 최대 기업 중에 하나다. 해 마다 수익이 늘어 올 해는 무려 6억만 세계화 달러를 넘어섰다고 한다. 알이 이 곳에 일한 지도 이제 2년이 다 되어간다. 지난 주말엔 어머니를 만나 재혼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는 50세가 넘었지만 같이 다닐때면 알의 애인이 아니냐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어머니는 얼굴에 재생피부 화장품을 쉴 새 없이 뿌려대며 말했다.

"그래도 네가 A&B사에 일하게 되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내 암브와트는 네가 정성들여 맡아줄것 아니니"
"어머니 걱정마세요. 어머니가 좋아하는 무중력 침대나 클래식 피아노 같은거 다 프로그램 해서 넣어드릴 수 있어요"
"사랑하는 내 아들. 네가 언제나 자랑스럽단다"
    
알은 어머니를 사랑했다. 아버지는 알이 대학에 들어가기도 전에 행방불명되어 주변 사람들 말로는 이미 한국을 떠난지 오래라고 했다.


A&B 사의 기계실에서 일하는 알은 사실 기업의 말단 일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기계실 안엔 수 천대의 암브와트가 빽빽하게 들어앉아 쉴 새없이 삑삑댔다. 알은 그 소리가 암브와트 끼리 서로 소근대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두운 지하의 기계실에서 행과 열을 맞쳐 끝없이 늘어서 있는 암브아트들은 사실 이 시대 최고의 산물들이었다. 이 기계들은 인간의 뇌를 감당할 수 있는 엄청난 장치였다. 그런 의미에서 알은 이 지하 깊숙한 곳에서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일을 할지라도 항상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지하 바깥으로 나가면 작업복 차림의 알과는 다른 세련된 양복을 입은 직원들이 반짝거리는 무테 안경을 쓰고 지나갔다.
복도 끝에서 여러 무리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다 들 양복 차림에 회사의 높은 간부들이었다. 그 한 가운데 2대 회장 김철웅씨가 걸어오고 있었다. 직원들은 길을 터주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알 역시 자신을 알지도 못하는 김철웅 회장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하루 일과를 마친 알은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꼭 서점에 들러 작가 민레이의 신작 소설을 사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알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였다. 6개월 전엔 운 좋게 그를 실제로 만날 기회도 있었다. 몇 년간 멀티 레이트에 수신요청을 보낸 결과였다. 그가 스크린에 나타났을때 알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멍해 있었다. 지난 수 년간 수신요청을 보냈는데 막 상 그의 얼굴이 하얀 스크린에 영사되니 머릿 속이 하얘져 버렸다. 그 역시 눈만 껌뻑 거리며 얼마간 가만 있더니 하품을 한 번 크게 하고 말했다.

"왜 아무 말이 없어요. 불렀으면 용건이 있을 거 아니에요. 아님 뭐 팬이 라든가"
"네. 팬 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와 나눈 대화는 거의 이게 전부였다. 알은 민레이 작가가 남겨준 영상 메세지를 아직도 보물처럼 가지고 있었다.
알은 책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었지만 책을 아주 좋아했다. 공대 시절엔 딱딱한 책을 보며 상상력 없는 날들을 보내왔지만 집에 있는 책장엔 그 동안 사 모은 책들이 빽빽하게 꼿혀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 다 읽은 책은 몇 권이 안됐다. 그는 단지 책 그 자체를 좋아했다. 아마 그의 이런 성향은 국문과를 나온 아버지 오비토의 유전자 덕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이 비약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오비토는 국문학과 2학년때 적성에 맞지 않아 중퇴를 했고 그 뒤로 이런 저런 장사를 시작했는데 그런 일들이 그에게 더욱 잘 맞았다는 것도 알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알이 민레이 작가를 이렇게 좋아하게 된 것은 사실 그가 독서광이기 때문이라기 보단 민레이 작가가 암브와트 속에서 창작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이기 때문이라는 거다. 그는 올 해 향년 161세였다. 영혼 전이를 한 건 50년 전이었다.  


암브와트가 생기고 나서 한 참 동안 논쟁이 많았다. 과연 기계 안에 진정 인간의 정신이 자리 잡을 수 있을까. 모든 기억과 습관, 표현부터 사고 방식까지 모든 것을 전이 한다고 해도 그것이 과연 인간의 영혼을 대신하는 것인지 아님 엄청난 인공지능의 산물인지, 많은 과학자와 철학자가 혼란속에서 수많은 토론과 실험을 벌였지만 다 들 각자의 설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진실을 명확하게 규명하기는 힘들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그 당시에 이미 유명한 대 기업의 회장들은 암브와트 속에서 기업의 운명을 결정짓는 판단을 내렸고 지금도 그렇게 수많은 기업들이 육체없는 회장이나 간부의 지시에 복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멀티 레이트 회사 pireto는 성공적인 빅딜로 일류 회사로 거듭났다. 그 결정에 가장 중요한 역활을 한 것은 암브와트 속에 살고 있는 3대 회장 위정태 씨였다. 사회는 이미 암브와트에 의해 움직이고 변화되어 갔지만 그 때 까지도 학계에서는 여전히 염세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그 때 중국의 유명한 철학자 왕 웨이 하우가 유명한 테스트를 제안했다. 그것은 과연 암브와트 속 인간들이 예술을 이해 할 수 있느냐였다. 그들은 아름다운 시를 읽고 음악을 들으며 눈물 흘릴수 있을까. 경제나 지식, 지혜라는 것은 경험과 분석 속에서 창출 될 수 있지만 예술 속에서 느낄수 있는 감동이나 전율은 어떠할 것인가, 더욱 나아가 창작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 그가 제안한 테스트였다.
그의 테스트는 예리한 구석이 있었다. 암브와트 속에 살고 있는 수많은 예술가들은 생전에 해왔던 창작의 능력을 잃어버린 것 같아 보였다. 유명한 음악가는 더 이상 작곡을 하지 못하고 똑같은 곡을 기계처럼 쳐댔고 어떤 유명 소설가의 이야기는 항상 비슷한 부류로 거기서 거기였다. 암브와트 속에 살고 있는 어떤 영화감독은 모두가 알고 있는 유명한 영화와 똑같은 영화를 만들어 놓고는 자신의 작품이라고 빡빡 우겨댔다. 사회는 충격에 빠져들었고 사람들의 믿음은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무렵 혜성처럼 등장한 이가 바로 민레이 작가였다. 그의 소설은 완전히 새로웠고 충격적이었다. 미학적 철학적으로 전보다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았고 그의 문체는 한 결 성숙함을 더해가는 듯했다. 그는 다음해에 그의 소설 '비밀 호수' 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민레이 작가는 노벨 시상식때 이렇게 말했다.

"암브와트 속에서 창작을 하는 것은 나 역시 아주 힘든일이 었습니다. 아무래도 육체를 벗어난 다른 차원에서 창작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이 매커니즘 적으로 완벽한 환경이 될 수 없다는 의미 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당하게 살아있고 생각하고 또 여러 분들께 다음 소설을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민레이의 노벨 상 소식은 세상을 다시 한 번 흔들어 놓았고 암브와트에 대한 논란은 그렇게 잠들어 버렸다.

 알은 그렇기에 더욱 기대를 가지고 서점에 들어가 그의 다음 소설을 찾았다. 아니 찾을 필요까지도 없었다. 눈에 띄는 진열대엔 이미 그의 소설이 화려한 표지를 드러내며 죽 진열 돼 있었기 때문이다. 알은 집으로 돌아가는 에어버스 안에서 참지 못하고 책을 열어보았다. '암흑 도시에 네온사인이 축축한 비 속에 젖어 더욱 침울해 보였다' 책의 시작은 이랬다. 에어버스는 몇 개의 도시의 상공을 날아 금새 착륙지점에 도착했다. 다시 갈아탄 택시로 집에 도착하기 까지 30분 남짓 걸렸다. 언제 지어 진 지 알 수 없는 회색 건물 속으로 들어가 서늘한 복도를 조금 걸으니 마치 과거로 회귀한 거 같은 낡은 철문이 보였다. 알은 문에 달린 조그만 렌즈에 손을 갔다 대고 흔들어보더니 다시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꺼집어 내 문을 열었다.

"빌어먹을 센서!"

알은 옷을 갈아입고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마셨다. 그리고 멀티 레이트의 검색기에 이름을 입력했다. '오비토' 그리고 아이덴티티 넘버와 나이, 국적 따위를 추가로 입력했다. 아무 이름도 검색되지 않았다. 알은 다시 쇼파에 꺼지듯이 주저 앉았다.

"아버지.."

알은 아버지에게 분명이 무슨 일이 생긴 거라고 확신했다. 벌써 연락이 두절된지 5년째이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지는 이가 없었다. 알의 어머니는 알이 아버지의 소식을 찾는 것 만으로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민감했다. 알의 아버지는 행방을 감추기 전에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도망갔다고 한다. 빌렸다는 표현은 그나마 점잖은 것이고 확실히 말하자면 사기를 쳤다고 해야겠다. 어머니 말로는 지구 반대 쪽에 있는 동화같은 인공 섬에서 호위호식 하며 살고 있을거라고 했다. 하지만 알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이미 아버지의 사과가 담긴 마지막 편지와 경찰의 수사결과 국내를 빠져나갔고 사건의 여부도 다 밝혀 졌지만 도저히 그는 이런 사실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알이 할 수 있는 행동이 딱히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가끔씩 아버지의 이름을 멀티 레이트로 찾아보는 것이 전부였다.  

좀 피곤했는지 맥주 한 캔에 벌써 나른해져 버렸다. 멀티 레이트들을 관장하는 슈터 메인 컴퓨터 '가브리엘'의 회선이 타버려서 고생을 했던 탓일까 알은 전원이 꺼져 버리듯 잠들어버렸다.


알이 깨어난 건 언제부턴지 모를 멀티 레이트의 삑삑거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알은 얼굴을 비비며 일어나 멀티레이트의 답신기를 작동시켰다. 그때까지 알은 재작년에 화성 바이러스에 걸려 영혼 전이를 한 친구 상희라고 만 생각했다. 하지만 멀티레이트가 영사시킨 건 분명 상희의 얼굴은 아니었다.

복잡하게 일그러지는 불꽃같은 영상들이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발신자 이름을 확인했다. 'TOBY'
알은 짜증내지도 않았다. 크게 하품을 하고 귀찮은 듯 물었다.

"toby?...너 뭐야. 민수 너냐? 이런 장난 누가 치는거야. 해킹 한 거 같은데 이런거 법에 어긋나는거 알고 있지? 회사 가서 알아보면 다 알아. 빨리 불어"

한 동안 아무 말이 없자, 알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쯤 불명확한 목소리가 울렸다.

"서랍.. 열쇠가 달린 서랍을 열어."
"뭐...뭐라고"

목소리는 마치 수세기전 라디오가 전파를 잘못 잡고 내는 소리 같았다. 시끄러운 잡음에 알은 귀를 귀울여야 만 했다.

"열쇠 달린 서랍? 그게 무슨 소리야"
"집..어머니 집에 있는 서재"
"서재? 혹시 아버지 책상에 있는 서랍을 말하는 거야?"
"그래 그래 그거"

알이 기억하는 그 열쇠 달린 서랍안엔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가 사라지고 난 뒤 경찰들이 모조리 다 가져갔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물건이란 물건은 사소한 것 까지모조리 다 회수해 갔기 때문에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너. 누구야. 너 누군데 우리 집 서재를 알고 있는거야"

목소리는 다시 잡음 속에 파묻혀 있다가 힘겹게 방향을 찾아 말했다.

"나야 toby. 기억안나? 어릴 때 우리 같이 놀았잖아."
"뭐? toby? 잘 모르겠는데"
"친구들이 도깨비라고 불렀는데"
"도깨비? 그건 더 모르겠는걸.. 뭐 어쨌든 갑자기 왠 서랍장을 열어보라는 거야. 어차피 아무것도 없는데"
"아니..ㅇ냐ㅓㅆ"

toby의 목소리는 거기서 끊겨 버렸다. 알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곧 배가 고팠는지 집에 있는 음식제조기에 돈을 지불하고 랍스타 요리를 꺼내 먹었다. 그리고 민레이 작가의 신작 소설 '피에타'를 읽으며 다시 잠들었다. 그 날 꿈 속에서 어린 시절 친구들을 봤는데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2.

"알~ 이쪽으로 오렴. 박 경위님 오랜 만에 뵙지"

박 경위는 와이셔츠 단추를 끝까지 다 채우고 있었다. 확실히 아버지와는 많이 다른 사람이었다. 사과를 깍고 있는 어머니는 흡족한 표정으로 박 경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은 어머니만 행복할 수 있다면 재혼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예외였다. 박 경위는 알이 싫어하는 모든 요소를 골고루 갖춘 상대 였다. 무뚝뚝한 말투와 메말라 보이는 표정 그리고 무엇보다 그 범인을 보는 듯한 눈초리가 맘에 들지 않았다. 알은 살면서 크게 나쁜 짓을 한 적도 없지만 경찰을 좋아 할 이유도 없었다. 아마 아버지에게 일어난 사건과 관련된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 경위는 평소와 똑같은 얼굴로 나중에 밖에서 만나 식사라도 한 끼 하자고 말했지만 알이 그에게 따로 연락할 일은 만무했다. 평소에 걸려오는 전화도 일부러 받지 않았었다. 그렇다고 알이 대놓고 그에게 싫은 내색을 한 건 아니었다. 그건 순전히 어머니를 위해서 였다.
알은 문득 어제 일이 기억났다. 대충 분위기를 봐가며 자리에서 일어나 옛 아버지의 서재로 들어갔다. 알은 주저없이  열쇠달린 서랍장을 열어봤지만 예상했던 대로 그 곳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뭔가를 조금이라도 기대했던 자신이 바보 같이 느껴졌다. 그 때 문이 열리며 어머니가 들어왔다.

"알. 여기서 뭐 하는거니"
"아니요. 뭔가 찾아 볼게 있어서요"
"뭘 찾는다는 거니 여기서"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조용한 두려움 같은 것이 느껴졌다.

"아버지에 대해서 아직도 캐고 있는 거라면 정말 실망이다. 너희 아버지도 원하지 않으실 거야. 편지 못봤니! 부탁이니 자신을 찾지 말아달라고 그러잖아!"
"전 이해 할 수 없어요. 말 한마디 없이 그렇게 사라졌다는 걸. 아버지를 만나기 전까진 이해 할 수 없을거 같아요"

어머니는 턱을 미세하게 떨며 말했다.

"알... 요즘 시대에 책임감 같은 건 없단다. 너희 아버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게 요즘 시대에 이상한 일이 아니야. 기대하면 상처만 더 커질 뿐이야."

어머니는 알에게 다가와 손을 붙잡고 말했다.

"잘 들어. 이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건 너와 나 뿐이야. 그 외엔 난 아무도 믿지 않아. 박 경위님도 마찬가지야"

"왜 그러세요. 박 경위 님이라면  간도 빼줄것 처럼 굴더니"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니. 박 경위 님이 그래도 지금까지 우리를 얼마나 보살펴 줬는데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하니"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죄송해요. 어머니"

알은 어머니의 손을 꽉 움켜 잡았다.
어머니는 눈물을 닦고는 다시 피부 재생 화장품을 얼굴에 뿌렸다. 그리고 뭔가 줄게 있다고 하고는 방에서 나갔다. 곧 어머니는 낡은 노트 한 권을 들고 왔다.

"이거 내가 간직하고 있던 아버지의 마지막 물건이다."

알은 낡은 노트를 받아들고 펼쳐 보았다. 일기장이었다.

"너희 아버지가 나와 연애하던 대학 시절에 쓴 거 같더라. 저기 저 열쇠달린 서랍장에 있던거다. 경찰이 다 가져 갔는데 나중에 내가 박 경위님 한테 부탁해서 몰래 다시 받아 온거야."

알의 심장이 쿵쾅 거리며 뛰었다.

"마지막 프라이버시는 아무래도 지켜야 할 거 같아서..."

알이 집에서 아버지의 일기장을 읽어봤을때 어머니가 왜 이 일기장을 빼 돌렸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속엔 아버지와 어머니의 연애담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 어떤 페이지는 눈물 자국에 종이가 말라붙은 흔적이 역역했다. 어머니의 눈물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 일기장에서 딱히 특이한 점을 찾을 수는 없었다. 알은 멀티레이트에서 어제 만난 toby를 찾는 시도를 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IP주소도 남기지 않는 상대라면 분명 뭔가 구린 구석이 있는 자였다(어쨌든 육체가 없는 자 이겠지만). 알은 어제 읽던 민레이 작가의 소설을 다시 펼쳐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머릿 속이 하얘졌다. 번쩍하고 뇌를 강타한 듯한 느낌이었다. 알은 다시 아버지의 일기장을 펼쳐들고 페이지를 마구잡이로 넘겼다. 알의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아무래도 난 작가의 재능이 없는 것 같다. 좋아하는 것과 잘 할 수 있는 것 사이에서 한 참을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아닌것 같다. 아~ 어머니 말을 듣었어야 했는데..>

알은 한 페이지를 더 넘겼다.

<유철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고 나에게 거듭 얘기하며 그의 소설을 보여주었다. 이 놈은 항상 엉뚱한 구석이 있는 놈인데 작년엔 교수와 싸우고는 학교에 한참 모습을 더러 내지 않았다. 이 놈은...>

알은 몇 페이지를 더 넘겼다.

<유철의 소설을 읽고 더욱 자괴감에 빠졌다. 녀석의 소설은 생각했던 대로 훌륭했다. 문체며 글을 맺고 끊는 솜씨가 나로써는 도저히 흉내도 못 낼 수준이었다. 이야기는 이랬다. 앞을 못보는 소녀와 가난한 소년의 사랑...... 사실 이 장님 소녀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지하에 있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었다........ 눈이 먼게 아니라.....그러다가 실제로 눈이 멀어 소녀는.....>

알의 숨소리가 격해졌다. 이 내용은 민레이 작가의 소설 '비밀 호수'의 내용과 똑같은 것이었다. 비밀호수가 출간된 건 20년전이고 아버지의 일기장은 무려 30년이나 되었으니 그렇다면 민레이 작가의 작품이 표절이란 말인가. 알은 호흡을 가라앉히고 아버지의 친구였던 유철이라는 사람의 정보를 검색했다.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그는 25년전에 이미 사망했다. 경제적 문제로 영혼 전이도 못하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것 같다. 유철이 쓴 책을 찾을 수는 없을까. 알은 다시 일기장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특히 유철과 관련된 내용을 찾았다. 알은 어떤 페이지에서 다시 멈춰섰다.

<유철의 소설을 읽어 본 케이는 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어느 날 학교를 그만 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케이'

알은 검색기를 쉴 새 없이 두드려 댔다.


충격적이게도 케이 역시 20년 전에 사망했다. 영혼 전이를 했다는 데 1년도 못가 암브와트가 해지 되어 사망했다고 한다. 알은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친구 유철이라는 자가 30년 전에 쓴 소설이 그 후 10년 뒤 민레이 작가의 소설로 발표가 되었다. 그리고...'

알은 문득 아버지의 일기장을 들고 있는 손 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인식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모두 사망했다?'

알이 들고 있던 일기장이 땅바닥으로 툭하고 떨어졌다. 알은 곧바로 외투를 집어들고 방에서 뛰쳐나갔다. 택시를 다급하게 잡아타고서 향한 곳은 알의 회사였다.
거대한 회사의 건물이 압도할 듯이 알을 내려다 봤다. 입구로 올라가는 계단을 재빨리 뛰어 올라가 현관을 통과해 기계실로 가는 지하에 들어서자 아이디 카드를 제시하라는 보안장치의 음성이 들렸다. 알은 다급하게 지갑에 있는 아이디 카드로 신분을 증명하고 뇌파 인식장치와 음성 식별 장치를 통과 한 후 암브와트 기계실로 내려 갈 수 있었다.
수 많은 기계들은 아직도 잠을 자지 않고 삑삑대고 있었고 천장에 있는 중앙 컴퓨터 가브리엘은 알이 회선을 갈아 준 덕분인지 번쩍거리는 LED가 더욱 밝아 보였다. 알은 아버지와 동기인 사람들을 찾기 위해 중앙 컴퓨터 가브리엘의 정보실로 들어갔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알의 손놀림이 무척이나 영민해보였다. 암브와트에 살고 있는 아버지의 과동기들을 몇 몇 찾아내 멀티레이트로 불러 보기로 했다. 처음 두 사람은 호출을 보냈지만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 그 다음 두 사람은 아버지는 물론이고 유철이나 케이라는 사람도 모른다고 했다. 다섯번째 나타난 사람 박수성씨는 다행이도 알의 아버지와 유철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박수성 씨는 특히 알의 아버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부터 친구 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실종사건에 대해서 박수성 씨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여러 번 얘기 했다.
알은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유철 얘기가 나오자 그와 벌였던 바둑판에 관한 얘기만 잔뜩 늘어놓았다. 그가 쓴 소설이나 뭐 학교시절에 관한 얘기는 잘 기억도 못하고 관심도 없어 보였다. 그는 대학시절엔 유철과 별로 친하지 않았지만 그 후 우연히 선술집에서 만나서는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들은 소위 술친구였다. 박수성씨는 유철에 관해 아는게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유철이 딸이 있다는 사실과 그 딸의 이름이 '유소미' 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유철은 딸에게 바둑을 가르쳐 평소에는 어린 딸과 바둑을 두기도 했다고 한다. 알은 박수성 씨의 말을 중간에 끊고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재빨리 일어섰다.


유소미는 도서관 사서로 일하고 있었다. 그녀의 소재를 찾는 건 알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려운 건 이제부터 였다. 무엇을 어디서 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어쩌면 이 모든게 자신의 착각이었고 지금조차 말도 안되는 짓을 하고 있는건아닐까. 우연히 유철이란 사람의 소설 내용과 민레이 작가의 소설이 일치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알은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소설의 시작과 끝이 그렇게 일치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것이다.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단추도 지퍼도 보이지 않는 매끈한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여직원이  몇 보였다. 알은 가슴가에 달려있는 금속 조각에 앙각된 직원들의 이름을 유심히 살펴봤다. 알은 천천히 복도를 가로질러 가다가 누군가의 어깨와 심하게 부딪쳤다. 앞을 보고 걷지 않은 결과다. 책들이 우수수 땅으로 쏟아졌다. 넘어진 여직원은 일어설 생각도 하지않고 알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 이거 죄송합니다'

알은 여직원의 팔을 잡고 일으키려 했지만 그녀는 팔을 거칠게 알의 손아귀에서 빼버렸다. 그리고 떨어뜨린 책들을 다시 줍기 시작했다. 알은 어쩔줄 몰라 연신 고개를 숙여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직원의 가슴에 달려있는 이름표를 우연히 보았다.
'유소미'  
머뭇거리는 찰나에 유소미는 책 몇권을 다시 집어들고 알을 스쳐지나 갔다. 알은 뒤늦게 따라가며 말을 걸었다.

"저기요. 유소미씨 맞으시죠"

유소미는 멈칫 했지만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사실 여기 일부러 찾아왔습니다. 유철이라는 분이 부친 되시죠"

그러자 이번엔 그냥 모른 척 가버렸다. 알은 당황해서는 더 이상 말도 걸지못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차라리 마치기를 기다렸다 다시 말을 걸어보기로 하고 밖으로 나갔다. 몇 시간을 기다린 후 퇴근하는 유소미를 볼 수 있었다. 걸을때 마다 끝이 웨이브로 말린 분홍색 단발머리가 찰랑거리며 튀어 올랐다. 유철이 천천히 다가가자 유소미는 이미 눈치채고 방향을 틀어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아니 잠깐만요. 왜 이러시죠! 개인적으로 부친에 대해서 몇가지 물어볼게 있어서 그런거라구요!"

유소미는 여전히 들은 체 만 체 하며 앞을 곧장 향하고 있었다.

"이봐요! 이건 좀 너무 하잖아요!"

유소미는 결국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에 대해서 뭐가 또 궁금한 거죠! 저는 더 이상 말할게 없다구요! 저에게 남아있는 아버지의 물건은 아무것도 없어요"
"누가 아버지에 대해서 묻고 다녔었나요? 전 그런 일 때문에 온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뭐죠?"

알은 심상찮은 기운을 느끼고 이 곳에 제대로 찾아왔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서 말하긴 좀 그렇군요. 가까운 카페라도 들어가죠"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변하지 않는건 책과 커피 뿐이었다. 알은 말을 마치고 진한 에스프레소의 마지막 모금을 들이 마셨다.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쓴 책을 민레이 작가가 표절을 했다는 말이죠?"
"네"

알은 진지하게 유소미의 반응을 지켜 봤지만 예상 외로 그녀의 표정은 경멸을 띄고 있었다.

"그 얘길 지금 저보고 믿으라고 하는 건가요. 저희 아버지는 평생 술 만 퍼마시다가 비참하게 돌아가신 분이에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이 시대에 술로 죽게 된 사람이 뭘 뜻하는지"

그건 가난과 함께 살고자 하는 의지조차 없음을 말한다. 술로 인한 병은 돈만 있다면 어떤 병이든 고칠수 있다. 그리고 집 거울에 설치된 자가진단 장치가 아마 수 십 번이나 건강에 대한 경고와 진단 메세지를 남겼을텐데도 죽음에 이르렀다는 건 삶에 대한 미련도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제 말은 어디까지나 저의 추론에서 나온 것이지만 물증과 심증이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물증은 아까 말씀드린 아버지의 일기장이고 심증은 유소미 씨 아버지를 비롯 저희 아버지 그리고 케이라는 사람까지, 소미씨 부친의 소설을 읽은 자는 모두 민레이의 소설이 나오기 전에 실종 혹은 사망하였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잘 안 되는군요. 그래서 민레이 작가에게 소송이라도 걸라는 거에요?"

알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래야 한다면 그래야 겠죠. 하지만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는 실종된 저의 아버지와 사망한 다른 분들이 이 일에 관련이 있냐는 겁니다"
"그럼 암브와트 속에 있는 민레이 작가가 밖으로 뛰쳐나와 사람이라도 죽였다는 건가요?"
"모르겠습니다. 소미씨 생각엔 어떻습니까."

유소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소미씨에게 찾아와서 아버지에 대해 캐묻던 사람들은 누굽니까"
"빛쟁이 들이죠. 아버지가 사기를 당해서 빛을 크게 졌었죠. 그 빛쟁이들이 빛 대신 아버지 물건들을 싹 쓸어가 버렸어요"
"뭐 저도 그런 비슷한 일을 겪었었죠. 그런데 아버지가 남긴 물건은 전혀 없나요"
"없어요. 아버지가 쓰던 펜 한자루까지 다 가져가버렸어요. 그런데 그 일기장 지금 가지고 있나요?"

알은 유소미가 조금씩 자신의 말에 관심을 갖고 있음을 느꼈다.

"지금은 없습니다. 집에 놔두고 왔어요. 보고 싶다면 지금 저희 집으로 함께 가셔도 괜찮습니다"

유소미는 조금 망설이더니 그러자고 했다.

집으로 가는 동안 알과 유소미는 어색하지 않은 침묵 속에 빠져 있었다. 아마 각 자의 기억속에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었을지 모른다.
알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일기장을 펼쳐들고 유철이 나오는 대목을 내밀었다. 유소미는 알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고는 일기장을 받아들었다. 그녀는 일기장의 여러부분을 세심하게 읽었다. 알은 그 동안 커피를 타오고 어머니와 통화도 했다.
일기장을 덮을 때 쯤 유소미의 눈 빛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당장 민레이 작가를 불러요"

유소미의 목소리에 담담함과 떨림이 섞여 있었다.

"지금부터 수신 요청을 보내도 아마 2년은 족히 기다려야 될걸요"
"그럼 어떻해야 하죠"
"증거가 더 필요해요. 아버지에 대해 뭔가 기억나는 게 없나요?"

유소미는 머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한 참을 그렇게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도저히 모르겠어요. 아버지가 그런 글을 썼다는 것도 믿기지가 않아요."

좁은 어깨 속에 파묻힌 얼굴이 미세하게 떨렸다. 숙인 얼굴에서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울지 말아요. 소미씨."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알 조차 마음 속으로 아버지의 생사가 걱정되었다.
유소미는 보기보다 강한 여자 같았다. 눈물을 슥 닦고는 다시 굳건한 얼굴로 말했다.

"할아버지 댁에 가봐요. 그 곳에 뭔가 있을지도 몰라요"

그 때 멀티 레이트가 갑자기 지지직 소리를 냈다. 그리고 이어지는  호출음. 알은 그냥 나가려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다시 발 길을 돌려 발신자를 확인했다.

'TOBY'

알은 다급하게 수신 버튼을 눌렀다. 지지직 하고 끊어지는 전파음이 들리더니 곧 미세한 울림이 목소리로 변하기 시작했다.

"ㅇ..ㅜ.ㅣ..위..ㅎ..험..해"

그 소리는 금방 식별 할 수 있는 목소리로 변했고 알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 졌다.

"위험해?"

알은 유소미와 함께 바로 집을 뛰쳐 나왔다.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알은 택시를 잡는 대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위소미의 얼굴에 잔득 긴장이 서려 있었다. 시끄러운 군중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무심하게 그들 옆을 스쳐 지나갔다.

"무서워요?"
"아니요"
"사실은 무서워요. 알씨는요"
"저도 그래요. 나중에 알고 보면 다 누군가의 장난이고 그런 건 아니겠죠"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toby는 누굴까요"
"모르겠어요. 나중에 예전 친구들에 대한 정보를 알아봐야 겠어요"
"그런데 앞으로 어떻 할 거에요"
"일단 자동 렌트카 기에서 차를 빌려서 소미씨 할아버지 댁으로 가죠"



3.

유소미의 할아버지 댁에 도착한 건 해가 다 졌을 때였다. 의외였던 건 그녀의 할아버지 집이 그럴사 한 저택이었기 때문이다.
차는 저택의 철문 앞에 일단 세워 두었다. 유철은 학생시절 이 곳에 살았었다고 한다. 알은 이 곳에 뭔가 그럴듯한 증거가 있기를 바랬다. 유소미가 다가가자 거대한 철문이 스잔한 소리를 내며 양쪽으로 갈라졌다. 어두웠지만 이 저택이 아주 오래 된 건물이고 정원 역시 자연스럽게 정돈된 영국식 정원이 아니라 그냥 내버려 둔 야생 상태 였음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유소미는 문 손잡이를 돌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캄캄하고 싸늘한 기운이 알을 더욱 움츠리게 만들었다. 이 곳에 그녀의 할아버지가 살지 않는 건 거의 확실해 보였다. 어두운 복도를 나아가다 어느 코너에서 꺽자 서재로 들어가는 문이 나왔다. 유소미는 서재 안으로 들어가 작은 등불을 켰다. 먼지가 가득 쌓인 책상과 책장이 나왔다. 오래 된 책들과 노트 같은 것들이 잔득 늘려있었다. 알은 노트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 민레이의 표절 소설 비밀호수의 원작이 이 곳에 숨겨져 있진 않을까. 하지만 노트 속엔 갈겨쓴 낙서들과 수업 시간에 필기한 흔적들 밖에 없었다. 유소미는 이 곳에 몇 번이나 와 봤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고 한다. 알은 음침한 이 저택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 때 우연히 넘긴 노트에 씌인 문장을 우연히 읽고 말았다.

  '암흑 도시에 네온사인이 축축한 비 속에 젖어 더욱 침울해 보였다'

알은 이 낮익은 문장을 보고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격한 숨소리를 내 뱉고 말았다. 알은 기억해 버렸다. 이 문장은 최근 민레이 작가의 소설 피에타에 나오는 첫 문장이었던 것이다. 알은 한 숨을 크게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말했다.

"민레이 작가의 신작 소설 피에타 읽어보셨나요"
"아니요. 도서관에 일한다고 해서 다 책을 많이 읽는 건 아니라구요"
"이 문장, 그 소설 속에 나오는 문장과 똑같습니다."

유소미는 알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유철의 노트를 내려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알의 얼굴을 뚫어 질 듯이 바라봤다.

"확실 해요"
"확실합니다.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이건 사기에요. 이건 대국민 사기극이라구요"

알은 유철의 노트를 덮고 잠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왜 그래요"

유소미가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알은 천천히 눈을 떠고 한 숨을 크게 내 쉬었다.

"생각해 봤습니다. 이런 일들을 꾸밈으로 해서 가장 큰 이득을 얻는 사람이 누군가 하구요"

"민레이 작가겠지요. 수익과 관련된 그 측근들을 붙잡으면 모든게 밝혀 질 거에요. 그 책으로 벌어들인 수익이 얼마 일까요"
"작가 개인이 이런 엄청난 일을 벌인다는 게 가능할 까요. 설령 그 측근들이 무서운 사람들이라 해도 돈 때문에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을까요"
"돈 때문이라면 인간은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유소미의 얼굴이 더욱 긴장돼 보였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고요한 가운데 불안하게 지나갔다.  

"경찰에 넘기자구요. 더 이상은 무서워서 못하겠어요"

유소미의 목소리는 이미 지쳐 있었다.
알은 잠을 떨치려는 듯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어떻게 다른 사람이 쓴 소설을 아무도 모르게 숨기고 노벨상까지 받을 수 있는거죠. 이건 뭔가 엄청난 게 있는 것 같아요."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나봐요. 육체가 없는 인간마저도 명예를 얻기 위해 이런 더러운 짓을 하다니.."
"부친께서는 왜 이 곳에 이 문장을 적어논 걸 까요. 다잉 메세지 같은 걸 까요"
"그런 건 아닌거 같아요. 원래 작가들은 소설의 첫번째 문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향이 있거든요. 그래서 이 노트에 따로 여러 시도를 해 본 것 같아요 "
"그렇군요."
"경찰에게 민레이 작가를 고발해야겠어요. 더러운 사기꾼 같은 니라구. 알씨도 이제 그만 관여하는게 좋을거 같아요. 그 toby라는 사람도 수상하고 뭔가 위험한 기분이 들어요"
"그래야겠죠. 어쨌든 이 일은 소미씨 아버지에 관한 일이니까, 소미씨가 해결해야 할 겁니다."
"네, 어쨌든 여길 빠져나가죠. 전 사실 이 집을 별로 안 좋아해요. 특히 밤에 오는 건 더더욱이요"

알과 유소미는 증거가 될 노트를 집어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갑시다. 소미씨, 잘 해결하기 빌게요. 전 여기서 그만 빠지겠습니다. 혹시 바둑 좋아하시면 나중에라도 만나서 한 판 합시다"

알이 웃으며 말했다.

"어쩌죠. 전 바둑 둘 줄 모르는데, 카드 게임이라면 좀 해요"
"그래요? 아버지가 바둑을 잘 두셨다고 하던데"

"그런가요. 저야 그런덴 별로 관심이 없어서"
"관심이 없어도 배운건 기억해야죠"

유소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네?"
"아버지가 딸에게 바둑을 가르쳤다고 들었거든요. 소미씨 아버지가 말이죠"

"뭐....그런거야. 다 잊어버렸죠"
"바둑 두는 걸 잊어버렸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보네요. 그리고 소미씨가 금방 바둑 둘 줄 모른다고 하셨잖아요. 잊어버렸다고 말하지 않았잖아요"

유소미의 얼굴이 조금씩 지푸려지기 시작하며 눈매가 날카로워 졌다.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 알 씨"
"유소미는 어디있죠"

알의 목소리가 냉기가 뿜어져 나올 것 처럼 차가워졌다.

"무슨 소리에요! 지금"
"왜 거짓말을 한거지. 당신은 민레이의 소설 피에타를 읽지 않았다고 그랬어 분명히"
"그런데요!"
"그런데 어떻게 안 거야. 그 문장이 첫번째 문장이라는 거. 난 그런 얘기 한 적이 없는데"

유소미의 얼굴이 벌게 지기 시작했다.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연신 지었다.

"그...그거야. 그렇게 생각한 거죠. 노트에 적혀 있는 문장이 왠지 그렇게.."
"일반적이라면 이 상황에서 표절이라든가 대사기극이라는 사실에 놀라기 보단 아버지에 관한 생각을 하겠지.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 까 하고 말이야. 아버지의 죽음도 관련되어 있었던 걸까. 왜 아버지는 자기가 쓴 소설을 그렇게 뺐겨버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까! 하고 말이야"
"만약 네가 진정한 유철의 딸이라면 말이지. 누구야 너!"

유소미는 코웃음을 치며 처음 만났을때의 그 차가운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너도 참 바보구나. 네 명을 스스로 줄이는 구나"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순식 간에 벌어졌고 알은 그 자리에 그대로 곤두박질 쳐 바닥에 누워버렸다. 유소미가 들고 있는 총은 방아쇠를 당겨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알은 뿌옇게 다가오는 그녀의 밤색 부츠를 본 게 그 곳에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4.

알이 가까스로 눈을 떳을 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 자신이 있고 수근 거리는 소리와 엔진소리, 바깥의 소음같은 것들이 섞여 들린 다는 것을 감지 했다.
머릿 속이 어지럽고 온 몸에 힘이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그 곳이 자동차 트렁크 안 이고 어디로 향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차 안엔 유소미 라는 여자 말고도 다른 남자가 한 명 더 있다는 것 까진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었다. 희미하게 말소리가 들렸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들을 수는 없었다.
알은 힘겹게 손을 뻗어 호주머니를 더듬어 보았다. 다행이도 휴대폰이 있었다. 하지만 알은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 조차 쉽지 않은 상태였다. 옆구리 쪽이 아파왔고 숨을 쉴 때 마다 더 심하게 고통스러웠다. 어금니를 죽을 듯 깨물고 팔 전체를 비틀어 호주머니로 손을 넣으려 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겨우 손가락이 호주머니에 닿았고 조금씩 휴대폰을 꺼집어 내려는 시도를 했다. 덜컹거리는 차안에서도 목숨을 담보로 한 고도의 집중력은 휴대폰을 조금씩 밖으로 꺼집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자동차가 목적지에 다달은 듯 천천히 정지했다. 알은 그때서야 휴대폰을 꺼집어냈고 다급하게 문자 메세지를 한걸자, 두글자, 세글자 입력했다. 그리고, 그 순간 보란듯이 트렁크가 활짝하고 열렸다. 알은 다급하게 전송버튼을 눌렀다.

"이 봐, 소라. 이 자식 휴대폰으로 뭔 짓을 한 모양인데"

유소미라고 불렸던 여자의 이름인가 보다. 남자는 투박하게 광대뼈가 튀어나온 보기에도 험한 일을 하는 사내처럼 보였다. 휴대폰을 집어들고 버튼을 꾹꾹 눌러 확인했다

"하하하 재밌는 놈이네. SOS 라고 보냈네. 지 친구한테"

소라는 무관심한 말투로 말했다.

"이 바보는 아직도 상황 파악이 잘 안 될거야. 자기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소라는 눈도 제대로 떠지 못하는 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넌 이제 절대로 빠져나갈 수가 없어. 이 세상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거야. 네 아버지나 아니면 유소미의 아버지 처럼 말이야"

"이 나쁜 자식들..."

알은 말을 이을수 없었다. 그때서야 피범벅이 된 자신의 옷을 확인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총알이 옆구리에 박힌 모양이다. 눈으로 진상을 확인하고 나니 더 아픈것 같았다. 알은 옆구리를 움켜지고 신음소리를 냈다. 험하게 생긴 사내가 알을 가볍게 들어 올려 밖으로 꺼집어 냈다. 그제야 주변을 둘러 볼 수 있었는데 이 곳은 거대한 창고였다. 속을 들어낸 기계들이 선반 여기저기에 늘려 있었고 주변은 고요하리 만치 조용했다.

"그러게 왜 여기까지 쫓아온거야. 도서관에서 적당히 떨어졌으면 이런 봉변은 안 당했잖아"

소라가 알을 조금은 애처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들 도대체 누구야.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거야!"

그 때 또각또각 거리는 구두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그 발자국 소리는 천천히 걸어왔고 어느 순간에 조용해 졌다. 알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자네 공교롭게도 우리 회사 직원이었군"

김철웅 회장은 여전히 깔끔한 양복차림에 하얀 셔츠를 하고는 깃에 A&B사의 뱃지를 달고 있었다. 알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게 있다가 곧 경멸의 표정을 지었다.

"이런 일이 오지 않기를 바랬는데  결국 이런 거 였군. 김철웅 회장 당신이 범인이었어.  A&B 사의 이득을 위해 그런건가. 민레이 작가의 표절 소설로 암브와트가 인정을 받았으니 그럴 법도 하지. 그래서 내 아버지와 유철을 죽인건가. 케이라는 사람도 당신이 죽인거지. 도대체 이 딴 일로 몇 명을 죽인 거야!"

김철웅 회장의 무미건조한 얼굴이 부서질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알을 내려다 보며 천천히 입을 땠다.

"이 딴 일이라니... 당신도 우리 회사 직원이면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을텐데. 암브와트의 정당성이 회손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건 비극이야. 암브와트 속에 살고 있는 영혼과 그 영혼을 사랑하는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상처와 슬픔이 될 것이란 말이다. 그게 사회에 얼마나 많은 혼란과 충격을 가져다 주는 지 몰라서 하는 말인가"
"나도 그렇게 믿고 있었어. 암브와트가 반드시 사람들의 영혼만이라도 간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모든 게 드러났어. 다 거짓말이야. 모두 다 거짓말이야. 암브와트도 가브리엘이 만들어내는 인공지능의 산물일 뿐이었어. 영생이란건 있을수 없어. 너희도 다 사기꾼일 뿐이었다구"

김철웅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소릴 질렀다.

"닥쳐! 네가 뭘 안다고 큰소리야! 고작 기계실에서 전선이나 갈아주는 놈이"

알의 숨소리가 거칠어 졌다. 말을 많이 할수록 숨쉬기가 더 힘들었다.

"아버지...아버지 어디있어. 아버지 어딨냐구!"

"걱정마. 곧 너도 그 곳으로 갈테니까"

김철웅 회장의 고개짓에 험악한 남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자는 샷다로 된  문을 열어젖혔다. 드르륵 소릴내며 샷다가 위로 말려 올라가자 바깥의 한기가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밖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알은 그 곳이 강이나 호수 같은 곳임을 알 수 있었다. 물가엔 작은 보트 같은 물체가 한 대 떠 있었는 데 그것은 사실 소형 잠수함이었다.
험악한 남자가 다가와 알의 팔을 잡았을 때 알은 마지막 힘을 다해 주먹을 내 질렀다. 남자는 알의 펀치를 얼굴에 정통으로 맞고도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다시 돌리더니 알의 복부를 힘껏 내려쳐 버렸다. 알은 다시 푹하고 꾸구라 졌다. 남자는 알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다시 한 번 발로 걷어 찼다. 알은 남자에게 거의 끌려 가다시피 소형 잠수함 앞까지 갔다. 그 때 소라의 휴대폰이 울렸다.

"응 뭐야.....경찰?.....보내... 여기서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걱정하지마"

김철웅과 남자도 이미 예상 했다는 듯 행동을 멈추고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

"회장님. 경찰이 왔답니다. 아마 알이 보낸 문자 때문인 것 같은데요."

"경찰이 참 빨리도 움직이는 군. 여기서 해결해. 프로그램을 써."

"네. 프로그램을 쓰겠습니다"

소라는 작은 노트북 한 대를 켜고는 분주하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알의 얼굴에서 식은 땀이 송골하게 맺히기 시작했다. 키보드 소리가 정점을 찍는 엔터 키를 누르고 멈췄다.
곧 노트북에 붙어있는 프로젝트가 누군가를 불러냈다. 암브와트 속에서 일하고 있는 경찰청 정보과 직원이었다. 프로젝트 이미지가 평소와 다르게 흐리고 색을 잃어버린 것처럼 메말라 보였다.  

"현재 A&B사로 충돌한 경찰들의 목적이 뭐지?"

"신고를 받고 충동했다고 합니다. SOS문자 메세지를 받았답니다."

"그런 걸로 여기까지 출동했다는 거야! 빌어먹을! 그럼 당장 그 메세지를 지워버리고 잘못된 정보를 송신했다고 전해. 당장 전부 철수 시켜"

"알겠습니다"

그렇게 암브와트 속 경찰은 사라졌다. 알은 그 장면을 보고 심한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의 일로도 모자라 금방 있었던 일은 더욱 충격적일 수 밖에 없었다.  
암브와트 속 인간들을 이런 식으로 부린 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그들은 물욕도 정욕도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맡은 임무에만 충실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경찰도 그들에게 더욱 신뢰를 가지고 정보과나 사이버 수사 같은 일을 맡겼던 것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곧 소라의 전화가 다시 울렸고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끊었다.

"경찰이 금방 철수했다고 합니다"

험악한 남자가 낮은 소리로 꺽꺽대며 웃었다. 아마 알의 놀란 표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거 였군. 암브와트 속 인간들은 다 인형 일 뿐이었어. 너희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 이런 걸 이용해서 살인을 하고 입막음까지 한 거군."

소라가 알의 분노에 부채 질이라도 하듯 한 마디 거들었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것을 지배하게 될거야. 너와 유철의 집이 파산한 것도 다 우연이라고 생각하겠지"

소라의 사악한 웃음소리가 알의 머릿 속을 휘저어 놓았다. 알은 구역질이 나왔지만 하진 않았다. 그 구역질을 하는 순간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김철웅은 여전히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다시 험악한 남자를 보며 고갯짓을 했다.
알은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예감했다. 온 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손목의 수갑은 아무리 비틀어도 꿈쩍 하지 않았다. 남자는 소형 잠수함의 해치를 열고 알을 그 안에 밀어넣어려고 했다. 알은 간신히 버티며 애처롭게 소리쳤다.

"아버지와 케이는 어떻게 된거야! 그것만 말해줘!"

김철웅이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너희 아버지는 잠수함과 함께 바다 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지. 부자간에 나란히 바다 속에서 상봉해"

그리고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덧 붙였다.

"그리고 케이는.... 아직 잘 살고 있다. 걱정해 주니 고맙군"

김철웅의 손에 들려있는 리모콘을 보니 이 잠수함은 원격조정이 되는 것이었나보다. 알은 순간적인 힘을 내,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험악한 남자가 말했다.

"죽여서 싣죠."

김철웅이 고개를 꺼덕이자 남자는 안 쪽 호주머니에서 총을 꺼집어 냈다. 알은 허우적거리며 어디로 헤엄 쳐야 할지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사실 헤엄칠 힘도 없었다. 손에 묶인 수갑 때문에 그냥 물에 떠 있는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 때 남자는 진중한 자세로 알에게 총부리를 겨눴고 곧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간신히 알을 비켜나갔다.  남자는 겸연쩍은 듯 웃으며 다시 총부리를 겨눴다. 이번엔 무릎 자세로 정교한 사격을 할 모양이었다.
그리고 울리는 한 방의 단발마. 총소리가 창고 안에서 이리저리 팅겨가며 울려 퍼졌다. 하지만 험악한 남자가 가지고 있던 총은 총소리가 안 나게 특수 제작된 총이었다. 박 경위의 사격 솜씨는 사내에서도 소문 나 있었다. 남자는 비틀거리며 몇 발작 걷다가 물 속으로 첨벙하고 빠져버렸다.

"넌 뭐야!"

소라도 총을 빼어 들고 박 경위를 겨눴다. 박 경위 역시 여전히 냉소적인 눈빛으로 소라를 노려보며 총부리를 향했다. 김철웅 회장은 당황했다.

"잠깐. 경찰이 왜 여기 있는거죠. 여긴 개인 사유지라구요. 이런 식으로 불법침입해도 되는 겁니까."

김철웅의 말은 너무 놀라서 나온 말이지 뭔가 설득하려거나 항의를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금방 사람이 총에 맞아 죽은 상황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알! 올라와!"

알은 마지막 메세지를 박 경위에게 보냈었다. 알의 선택은 옳았다. 박 경위라면 뭔가 무리한 행동을 해서라도 자신을 찾아낼 것 같았다. 소라는 박 경위와 서로 노려보며 대치하고 있었다. 알은 간신히 창고 쪽으로 헤엄쳐 나왔다.

"곧 이리로 경찰들이 몰려올거야. 총소리를 들었으니까"

김철웅은 슬금슬금 뒷 걸음질을 하다가 곧바로 소형 잠수함이 있는 수변으로 뛰어가 잠수함을 타고 햇치를 내렸다. 곧 시동거는 소리와 함께 잠수함이 물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때 쯤 알은 물 속에서 빠져나와 겨우 몸을 육지 위에 눕혔다. 마신 물을 바닥에 토해내고 있었다. 박 경위가 주의를 잠시 빼았기던 찰나 소라 역시 재빠르게 사라졌다. 하지만 박 경위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미 창고 밖엔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소라가 밖으로 뛰어 나갔을 때 눈부신 헤드라이트와 수많은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 경찰들은 아마도 A&B사를 지켜기 위해 충동했을 터였다. 소라는 한 손에 있는 총을 내리라는 경찰의 명령에 굴복했다. 그녀는 A&B사를 공격하러온 테러분자로 오인 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박 경위는 알의 상태를 점검하고 엠브란스를 불렀다. 알은 박 경위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봐. 알. 아무리 일이 힘들어도 회사 사장과 이렇게 싸우면 안돼지"

박 경위도 의외로 농담을 할 줄 알았다. 알이 피식하고 웃자 이번엔 진지하게 되 물었다.

"무슨 일이야"

"나중에 얘기해 드릴 게요. 어디서 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래 일단 치료부터 받아야 겠다. 뭔지 모르겠지만 김철웅 회장을 현행범으로 잡았어야 했는데 안타깝군. 그런 재벌은 그렇지 않고는 힘들다구"

알은 박 경위에게 뭔가를 내 밀었다. 리모콘이었다.

"아까 타고 도망갔던 잠수함. 원격조정 이에요"

알은 이미 장치를 이해 한 건지 콘트롤러를 조작하고 있었다. 멀리서 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잠수함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경찰들이 현장 여기저기를 분주하게 뛰어 다녔고 어디서 나타난 건지 헬기 소리가 요란하게 주변을 뒤흔들었다.


5.

알이 병원에서 퇴원 할 수 있었던 건 3주 뒤였다. 총알이 옆구리를 뚫고 지나갔지만 수술은 어려움 없이 무사히 끝났다. 뉴스에서는 연신 A&B사의 김철웅 회장 그리고 민레이 작가에 대한 기사가 화제였고 사람들은 충격과 혼란에 휩 싸였다. 하지만 그 혼란도 잠시 였다. 사람들은 곧 안정을 되 찾았다. 단지 암므 브와트의 이용자가 급격하게 감소했을 뿐이었다. A&B 사의 주가는 폭락했고 김철웅 회장은 아직도 검찰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고 한다. 민레이 작가는 그 이후 나타나지 않았고 정신이 이상해져 버린 건지 강제 소환을 시켜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 김철웅에게 가담했던 암브와트 속의 인물들은 모두 삭제 되었고 민레이 작가 역시 곧 그렇게 될 것 같았다. 소라는 살인 교사로 무기징역을 받았다.
웃기는 건 검찰 조사 결과였다. 이 모든 일을 꾸미게 된 건 아이러니 하게도 김철웅이 아니라, 암브와트 속으로 영혼전이를 한 1대 회장 김상민이였다. 김철웅 역시 암브와트 속 아버지의 말에 따른 것이라는 거다. 암브와트를 조작해서 온 갖 악행을 저질렀던 김철웅이 알고 보니 암브와트가 시켜서 한 꼴이 된거다. 그럼 누가 누굴 이용하고 조작한 것이 되는 걸까. 어쨌든 사람들은 이런 복잡한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단지 모든 것이 조금씩 거짓말이 되어 갔고 알은 덕분에 회사에서 해고 당했다.



6.

알은 얼마 전 어머니와 재혼한 박 경위를 기다리고 있다. 오후의 야외 카페는 너무나 평화로웠다. 따스한 햇살 사이로 연인들, 친구들이 모여 앉아 이 세상엔 어떤 걱정도 없는 것 처럼 웃고 떠들고 나누고 있었다. 알은 이미 박 경위에게 아버지와 유철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시신을 찾는 것 조차 불가능이라고 했다. 상념에 빠져있다가 번득 정신이 들었다. 박 경위가 언제 왔는지 자리에 앉아 있다.

"잘 지냈지. 일은 좀 알아보고 있어?"
"아 네. 곧 다시 일하게 될 것 같아요"
"잘 됐구나. 여기 커피 한 잔 주세요."

알은 박 경위의 눈매가 예전보다 더 부드러워 졌다고 생각했다.

"네 말이 맞았어. 너희 아버지 동창이었던 케이가 바로 김철웅이었더군. 자기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써고 문예 대학을 다닌 모양이야. 뭐 재벌 2세의 신분을 감추려고 이름도 바꾸고 숨어 지낸거지"
"유철에게 질투심 같은 것도 물론 있었겠군요"
"모르지. 나야 이해 할 수가 없다. 그런 사람들이 왜 그런 짓을 하는건지"

알은 기분 좋게 나온 마음을 잡치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

"어머니는 잘 지내세요"
"응. 뭐 큰 일은 없는데, 자가 건강 진단 장치가 피부재생 화장품을 써지 마라고 그렇게도 경고를 하는데도 아직도 매일 쓰고 있단다."
"박 경위님이 좀 뭐라고 하세요."
"내 말을 어디 듣니. 너의 엄마가"    

박 경위는 나온 커피를 한 번에 쭉 들이키고는 본론을 말했다. 알도 그걸 원하는 눈치였으니.

"그 사람 오늘 나오기로 했다. 지금 쯤 올 때가 됐는데"

박 경위는 이 쪽으로 다가오는 한 여자를 보고 말했다.

"저 사람이다. 유소미."

박 경위는 유소미가 오자 자리를 비켜주고 나갔다. 유소미는 얌전한 긴 생머리를 하고 있는 다소곳한 여자였다. 학교에서 국어 선생님을 한다고 했다. 민레이 작가와 표절에 관련된 아버지의 소송 건 때문에 얼마 전 학교를 그만 뒀다고 한다. 김철웅 회장과 살인 교사 혐의로 이중 소송이 걸려 무척이나 바빴던 모양이다.

"얘기는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어쨋든 감사합니다"

유소미는 슬퍼 보였다. 원래 그렇게 보이는 여자 같았다. 알은 일부러 쾌활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에게 처음 toby라는 이름으로 연락을 줬던 게 소미씨 인가요?"

유소미는 어리 둥절한 얼굴을 했다.

"toby는 어릴 적 친구였다고 했었어요. 어릴 적 별명이 도깨비였다고. 우리 어릴 적에 만난 적있죠."

유소미는 고개를 숙이고 차를 한 잔 홀짝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어릴 적 만난 적이 있다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별명이 도깨비였던 적은 없는데요. 그리고 알씨에게 먼저 연락을 한 적도 없구요. 어릴 적에도 친구라기 보단 알씨의 아버지와 제 아버지가 친구이다 보니 몇 번 마주쳤을 뿐 인 걸요"

알은 유소미를 만난 기억이 전혀 없었지만 왠지 친근감을 느꼈다. 알과 유소미는 이것 저것 다른 얘기들을 한 참 나누고는 서로 연락처를 주고 받고 헤어졌다.
알은 그 날 저녁 문득 아버지의 친구 였다는 박수성 씨를 불러 보기로 하고 멀티레이트를 켰다. 그의 가족이 정액료를 아직도 내고 있을까. 역시 박수성씨의 암브와트는 해지 되어 있었다. 알은 할 수 없이 예전에 대화한 기록을 찾아 다시 영사 시켰다.
박수성 씨의 얼굴이 나타나 말을 하기 시작했다. 무척 말이 많은 분이었다. 알은 암 브와트를 더 이상 믿지 않았지만 정보 기록의 가치는 있다고 느꼈다. 박수성 씨가 알의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하는 부분이 나왔다.

"너희 아버지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 내가 어릴 적 부터 그 놈을 잘 아는데 보기 보단 마음이 여린 놈이야. 아 참 그 놈 어릴 적 부터 유별나긴 했었지. 동네 여기 저기 안 다녀본 곳이 없었어. 그래서 다 들 도깨비라고 불렀어. 어느 날은 말이지...저기 박수성 씨 잠시만요. 혹시 유철이란 사람도 아시나요....아! 유철이라면.."

알은 멍하게 프로젝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철! 아 그 녀석. 예전에 그 놈하고 사흘이 멀다하고 바둑을 두었었지. 아 그 놈이 승부욕이 얼마나 대단 한 지...그럼 대학 다닐 때 기억은 없으신가요...뭐..대학 땐 몰랐어. 그런 놈이 있었는 지도 몰랐지.."

프로젝트에서 쏜 영상이 혼자 한 참을 지껄였다. 알은 얼이 빠진 얼굴로 일어서서 창문 가로 다가갔다. 창문에 이제 겨울이 오는 지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알은 창문에 아버지의 이름을 써 보았다.

<OBYTO>

        
                                                               끝

                                                  










댓글 5
  • No Profile
    poney 11.03.24 06:52 댓글 수정 삭제
    진지하고 재밌어요!!!! ㅋㅋ
  • No Profile
    SA 11.03.31 04:21 댓글 수정 삭제
    작가님 한국판 베르나르 베르베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 장편화 했으면 좋겠습니다.
  • No Profile
    SA 11.03.31 05:07 댓글 수정 삭제
    1장 17번째 줄 역활 -> 역할

    위키리스크 -> 위키리크스 (위키리스크같지만 위키'리크스'더군요 :) )

    앙각 -> 양각

    빛 -> 빚

    지켜기 위해 -> 지키기위해

    충동-> 출동
  • No Profile
    도토루 11.04.04 04:07 댓글 수정 삭제
    칭찬 감사합니다. 근데 제가 맞춤법을 좀 많이 틀렸군요. 부끄럽네요. 좀 늦은 감이 있지만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 No Profile
    good!. 묘사가 스토리와 잘 어우려져 읽는 글이 자꾸 그림으로 그려지는 좋은 글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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