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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검은 양초

2006.06.08 16:3706.08

시작

뜨거운 햇살에 녹아 내릴 듯한 온통 검고 괴상하게 생긴 건물 아래로 낡은 자동차 하나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거칠게 멈춰 섰다. 그것은 흘러내리던 검은 물감이 그대로 굳어버린 듯 한 벽, 그와 반대로 타오르는 듯 솟구치는 모양의 구불구불한 지붕을 가진 것으로 내모 반듯한 여타 건물들과는 종족이 달라보이는 상식에 어긋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벽돌과 벽돌이 만들어낸 건축물이 아닌 예를들면 무언가가 진흙 따위를 몇 번 조물딱 거리다가 만 듯한 그 건물은 굳이 비슷한 물건을 찾아보자면 양초. 고작 그정도였다. 그 커다란 양초는 해변으로부터 수평선 저쪽, 지평선 저쪽까지 내려다보이는 광야와 바다가 맞닿은 곳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었는데 이 근방에 사람의 흔적이 있는 곳이라고는 이 곳 하나뿐인 듯 했다.

낡은 자동차는 덜덜덜 가쁜 숨을 몰아대다가 시동을 꺼트렸다. 금새라도 떨어져 나갈 듯 한 자동차 문이 열리고 깔끔한 검은 신사복을 입은 남자가 뛰쳐 나왔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체격에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삼십대의 단정한 얼굴을 가진 남자. 그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차안에서 검은 가방을 꺼내고 차문도 않은 채 건물 현관으로 뛰어갔다.

검은색 페인트가 여기저기 벗겨져 녹슨 철판이 드러난 허름한 정문은 이 건물관리인의 성실성을 진지하게 의심해볼 정도로 심각했다. 검은 옷의 남자는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문고리를 거칠게 잡아 당겼지만 문에 걸린 쇠사슬이 철커덕거리며 문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고 신경질적으로 노크해봐도 다급해 보이는 남자의 행동 하나하나를 조롱이라도 하듯이 건물 안에선 한참이 지나도록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는 찡그린 표정으로 흘끗 시계를 보고 좌우로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그의 오른팔이 순간 흔들리나 싶더니 어느새 손에는 자동권총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남자는 문과 문틀 사이에 늘어진 쇠사슬에 방아쇠를 당겼다. 소음기 덕에 조용히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검은 옷의 남자는 문 옆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들어 올리고 서둘러 건물 속으로 사라졌다.

건물 안은 온통 캄캄하고 먼지투성이었다. 게다가 이런 어둡고 은밀한 곳이 흔이 그렇듯이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통풍이 안 돼서 엄청나게 달구어진 공기도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남자는 이미 건물 내부를 알고 있는지 어둠 속에서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곧 현관 반대편의 넓은 홀에 도착했는데 그곳에는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과 벽에 난 몇 개의 작은 창문, 홀 바닥엔 양초들이 그려진 거대한 양탄자가 있었다. 원래라면 눈부신 햇살을 쏟아냈을 창문은 낡고 검은 커튼으로 가려져 불투명하게 왜곡된 뿌연 빛만이 들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양탄자 중앙에 있는 커다란 양초그림 주위를 시계방향으로 한바퀴 돌고 합장한 다음 세 번 손바닥을 세게 부딪쳤다. 손바닥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울리며 홀에서 저택 전체로 퍼졌다. 그러자 어둠 어딘가에서 늙은 남자의 가늘고 길게 늘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이게 누군가! 어서 오시게나. 뭔가 또 필요해서 찾아 온건가? 아니면 무슨 문제라도?"

"문제? 뻔뻔하긴! 처음부터 이런 걸 믿은 내가 바보지! 일 만 달러나 주고 산게 고작 이런 양초 덩어리라니... 이제 한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어. 만약 일이 틀어지면..."

검은 옷의 남자가 말했다. 그는 좀 더 심한 표현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거래인의 마음이 틀어져버릴 경우 가까스로 완성되가는 일을 망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욕구를 자제했다. 그는 가져온 가방을 열고 그 안의 내용물을 하나 꺼냈다. 검은 커튼을 헤치고 나온 불투명한 빛에 의하면 그건 검은색 양초였다. 어른 손아귀에 꽉 찰 정도의 굵기와 크기를 가지고 끄트머리에 심지가 삐죽 튀어나온 의심할 나위 없는 양초다. 그는 손에 쥔 양초를 허공에 거칠게 흔들어 뵈며 소리질렀다.

"젠장! 여기 불을 붙이면 된다고 했잖아! 하지만 이 양초는 용광로에 집어 던져도 타오르지 않을 것 같단 말이다!"

어두운 실내 공간에서 홀로 바득바득 이를 갈며 화를 내는 그의 모습은 연극 무대에서 독백을 하는 배우 같기도 했다.

"어허..."

어둠 속의 늙은 목소리는 그렇게 신음하고 잠시 침묵했다. 늙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를 처음 소개 받았을 때 부터 지금까지 검은 옷의 남자는 한번도 이 건물의 주인을 만난적이 없다. 상대방의 정체를 어둠 속의 목소리만으로 인식해야 하는 상황 때문에 남자는 언뜻 이 어둠이 살아 숨쉬는 존재는 아닌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의심을 했다. 그런 생각은 그를 위축시켰다. 남자는 상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목소리의 남자를 위협하기 위해서, 혹은 자신도 모르게 잠식되고 있는 공포를 억누르기 위해 손에 힘을 줘 쥐고 있던 양초를 구겨버렸다.

"한시간 뒤 세상이 온통 어두워지지 않으면 안돼! 이러다 정말 놓친다구! 뭐라고 말 좀 해보란 말이다 이 망할 양초 매니아! 일이 잘못되면 아무리 너라 해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 이 집과 함께 저 언덕 밑 바다에 던져버리겠어!"

검은 옷의 남자가 말했다. 이렇게 위협을 하긴 했지만 뻔한 허풍이다. 이런 위협에 넘어갈 상대가 애초에 아니었고 무엇보다 저 늙은이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이 세상엔 없었다. 일을 그르쳐도 상대방이 모습을 감춰버린다면 그로서는 도저히 찾아낼 방도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검은 옷의 남자보다 어둠의 편에서 훨씬 오래 일해왔고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도 있다. 굳이 적합한 단어를 찾아보자면 '마법' 이라는 단어가 어울릴게다. 이런 위험한 인물을 상대로 싸움을 벌일 만큼 그는 멍청하지 않았다. 그때 잠자코 있던 거래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봐. 자낸 어둠이 뭐라고 생각하나?"

"뭔 소리야!"

하지만 남자는 저 늙은 목소리가 뭔가 해답을 말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곧 그 느릿한 말이 이어졌다.

"어둠은 빛 보다 우선 순위지. 밖에 선 태양이 미친 듯이 빛을 내뿜고 있지만 그건 이런 낡은 집의 판자때기도 뚫지 못해. 그래서 이 실내는 이렇게 어둡다. 빛이 없는 곳에서 비로소 어둠이라는 세상의 본질이 깨어나지. 아무것도 어둠을 내뿜지는 않잖아? 이 실내에서 자네는 그것을 배울 수 있을 걸세."

늙은 목소리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이어졌다.

"그래서. 빛은 그런 근본적이라 할 수 있는 어둠이 있어야 비소로 존재의 가치를 갖게 돼. 즉 세상의 근본이 빛이라면 사물은 어둠을 내뿜어야 했겠지... 그런데 자네 그 표정이 뭔가? 아직 잘 모르겠나? 어허, 그러니까 말이야... 그 어둠을 내뿜는 양초는 태양이 작렬하는 곳에서만 불이 붙는단 말일세..."

늙은 목소리의 마지막 말은 너무 어둡고 낮은 톤이어서 그 위압감에 검은 옷의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다소 밝아진 목소리로 남자의 거래인이 말했다.

"그런데 자네도 나 이상으로 이상한 것에 집착을 보이는군? 한 시간 뒤 세상이 어두워 져야만 한다고 했나? 그렇다면 차라리 나에게 준 만 달러로 지구 반대편으로 가면 되지 않았나?"

"당신의 어둠 애찬론 말마 따나 빛 속에서는 아무 재밌는 게 없어. 어둠 속에서야 진짜 멋진 것들이 나타난단 말이야. 그리고 그 중에 최고가 이제 막 내가 사는 도시에 나타나지. 애석하게도 지구 반대편에서는 보질 못해..."

남자가 대답했다.

"어쨌든 사람들이 깜짝 놀랄거야."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남자는 그 순간 배시시 웃었다.




결말

높은 빌딩 숲의 어느 잘 포장된 도로 가장자리에 먼지투성이 낡은 자동차 하나가 멈췄다. 바로 앞에 견인 지역 표지판이 서있고 근처에선 순찰차 하나가 막 지나치고 있었지만 낡은 자동차에서 내린 검은 신사복의 사내는 그런 건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그의 오른 손에는 검은 가방이 꼭 쥐어져 있었고 손목 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남자는 얼굴 가득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잠시 후 그는 근처 빌딩의 야외 전망대에 올라갔다. 뜨거운 여름의 햇볕을 맞으며 양초를 하나하나 꺼내 전망대 바닥 이곳 저곳에 놓고 있는 검은 옷의 사내를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모두들 어제와 똑같은 오늘의 일과에 바쁘게 쫒기었고 누구 하나 지금 이 순간을 특별한 시간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검은 옷의 남자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불만스런 표정으로 노려봤다. 이윽고 양초를 다 꺼낸 남자는 사람들이 적은 곳을 향해 사라졌다. 아마 그가 이 순간을 즐기기 위해 미리 찾아둔 최고의 장소로 가는 중일 게다.

신호등이 여러 번 바뀌고 하늘 위로 비행기가 몇 대 지나갔다.

전망대의 시멘트 바닥 위에서 뜨거운 햇볕의 공격을 받던 검은 양초들에게 신호가 왔다. 양초의 중앙이 뜨거운 액체로 변하고 심지에서는 검은 기운이 불꽃 처럼 피어올랐다. 검은 기운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하늘로 솟아올라갔다. 수십 개의 양초들이 일제히 검은 기운을 뿜어내자 전망대에 있던 사람들은 금방 혼란에 휩싸였다. 그것은 불이 나서 생긴 연기처럼 매캐하지도 않았고 불투명하지도 않았다. 빛이 어둠을 사르듯 어둠이 빛을 사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대처할 새도 없이 높은 건물 위에서 솟아오른 검은 기운은 금방 거대해져서 도시의 대기를 침식했다. 도시의 낮은 곧 밤이 되었고 사람들은 모두 한번 이상 시계를 보고 서로 시간을 물었다. 도로의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고 거리엔 네온사인이 반짝였다. 높은 빌딩들이 하나 둘 전기 빛에 휩싸였다. 어둠 속에서 태양은 달이 되었다.

여느 저녁보다 아름다운 도시의 야경 아닌 야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어떤 것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진 못했다. 사실 사람들은 제각기 소원을 비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늘에서 수많은 유성. 반짝이며 나타났다 어딘가로 사라지는 별똥별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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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6.06.27 21:55 댓글 수정 삭제
    그로테스크하게 가다가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결말이 났네요. "세상의 근본이 빛이라면 사물은 어둠을 내뿜어야 했겠지." 같은 문장의 무게에 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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