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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지평선 너머

2014.12.21 22:0112.21

01. 
 전부 꿈이야. 
 네가 그렇게 말했던 적 있다. 

02. 
 환하게 웃는 네 모습에 난 꿈에서 깬다. 너무 짧다. 이곳에는 네가 없는걸. 옆에 놓인 수면제 통을 잡는다. 한 알 더 추가해야지. 그런데 그동안 몇 알씩 먹어왔더라? 잘 모르겠다. 수면제를 손 위에 쏟는다. 한 움큼 쥔 뒤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는다. 컵에 담긴 물 한 모금을 마신 뒤 다시 눈을 감는다. 
 이번에는 좀 더 오래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 

03. 
 저기서 누군가 우릴 보고 있어.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04. 
 칠흑 같은 어둠, 그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지평선 하나. 그 너머에 네 모습이 보인다. 백몇 년 만에 세상에 나타난 천재로서, 아름다운 여인으로서 모두의 시선 한가운데에 있는 너. 그 옆에 내가 있다. 행복해 보이는 두 사람, 언제까지나 행복하면 좋을 텐데. 
 영원히 행복할 것이다. 내 꿈속에서는 네가 사라지는 일이 없을 테니까. 

05. 
 "혹시 나한테 바라는 거 있어?"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연다. 
 "그냥 언제까지나 이대로 내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이거 프러포즈야?"
 너는 킥킥거리며 내게 말한다. 아니, 그런 거 아니야, 나는 얼굴이 빨개진 체 조용히 말한다. 
 "아니야?"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짓는 너, 어쩔 줄 모르는 나. 
 "아니, 그게, 어……."
 "장난이야."
 그런 나를 보며 싱긋 웃는다. 
 "진짜로 그것밖에 없어?"
 맑고 푸른 눈동자, 그 속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보며 대답한다. 
 "응."
 "그래, 그러면 약속할게."

06. 
 미안. 그때의 약속, 지키지 못할 것 같아. 
 네 곁에 있어줄 수는 있어, 하지만 이대로 있어주진 못할 것 같아. 
 내게 입 맞춘 뒤 너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는 사이, 너는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07. 
 "피곤해 보여."
 "그래?"
 너는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으며 웃는다. 
 "뭘 그렇게 열심히 연구하는 거야?"
 너는 조용히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 말한다. 
 "미안. 말해도 너는 이해 못할 거야."
 "알겠어."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게 맞는 거다.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너니까. 
 "아니, 그런 뜻이 아니야. 너 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누구도 이해 못할 거야."
 입술을 깨물며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더니 내게 말한다. 
 "그래도 너한테는 말해줄게."

 "전부 꿈이야."

08. 
 아니, 내 꿈 속의 너는 그런 생각을 해선 안된다. 나를 떠나서는 안된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했는데도 너는 전부 꿈이라고 말한다. 

09. 
 전부 꿈이야. 
 직감적으로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두면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 이대로 두면 안될 것 같아, 어떻게든 반박하려 했지만 너는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미안, 헛소리같은 거 알아. 하지만 곧 이해할 거야. 

10. 
 "저기서 누군가 우릴 보고 있어."
 너는 그렇게 말한다. 

11. 
 어째서 내 꿈인데도 너는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왜 너는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걸까. 

12.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도통 알 수 없는 소리만 하는 네게 짜증을 낸다. 그러는 날 조용히 바라보며 넌 말한다. 
 "미안."
 그리고 내게 입맞춘다. 
 "그 때의 약속, 지키지 못할 것 같아."
 안 돼. 그런 말 하지 마.  
 "네 곁에 있어줄수는 있어, 하지만 이대로 있어주진 못할 것 같아."
 무슨 소리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는 사이, 너는───
 ───지평선을 넘어 내게 다가온다. 

13. 
 이제 이해하겠어?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전부 내가 꾸는 꿈이었어. 
 너는 고개를 젓는다. 
 아니, 너는 나를 네 맘대로 제어하지 못했어. 내가 제어했지. 그 순간부터. 
 네가 환하게 웃으며 말한다. 
 이건 내가 꾸는 꿈이야. 
 환하게 웃는 네 모습에 난 꿈에서 깬다. 

14. 
 꿈에서 깼나?
 아니, 아직도 나는 꿈속이다. 
 지평선 너머 맑고 푸른 눈동자, 그 속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보며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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