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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푸른 종이의 아이

2010.01.28 14:5001.28

  푸른 종이의 아이












고종 22년 (1885)

서울에 전염병이 돌았다. 두 집에 한 명 꼴로 병자가 나오자 사람들이 집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갔다. 한성부는 포졸을 시켜 도망친 사람들을 때려잡았다. 한성부 판윤은 임금의 신하들이 다니는 종로 거리에 감히 불결한 것이 나오지 않게 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대관들의 가마가 종로 대로를 지나고, 골목에서는 시체 썩는 냄새와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가까스로 전염병의 기세가 꺾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유례없이 혹독한 겨울이 찾아왔다. 병과 싸우느라 미처 논과 밖에 소출을 올릴 겨를이 없었던 사람들은 이제 멀건 죽과 풀뿌리로 목숨을 연명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도성의 거지들이었다. 빌어먹질 못해 거지들은 주려죽고 얼어 죽었다.
김대감집 노(奴) 삼명이 새벽에 일어나 대문을 열었을 때, 오른편 처마 밑에서 한 거지 모자가 몸을 맞붙인 채 자고 있었다. 쫓아낼 요량으로 다가가서 소리를 지르자 비몽사몽한 아이의 얼굴만 뾰족 튀어나왔다. 어미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감께 아이를 보였더니 너무 어리고 약해서 노비로 삼지 못하겠다고 했다. 삼명은 지게에 여자 거지의 시체를 짊어지고 집을 나섰다. 아이가 누렇게 뜬 얼굴을 하고 뒤를 따랐다.
광희문 바깥에는 푸르게 얼어버린 시체 몇 구가 바람에 살랑이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고 또 워낙 추운 날이라 인적이 드물었다. 삼명은 주위를 슬그머니 살피다가 지게에서 시체를 떨구고 위에 거적 하나를 내렸다. 아이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아침밥을 놓칠까봐 급한 마음에 삼명은 종종걸음으로 성문에 들어갔다.    
아이는 어미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배가 고파서 움직일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언제 입에 먹을 것을 붙였는지 가물가물하다. 아이에게는 제 어미가 죽은 것을 서러워할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흙을 조금 먹어 보았다. 그때 대여섯 걸음 너머에 무언가 반들거리는 것이 보였다. 나무껍질이면 벗겨먹을 셈으로 아이는 느적느적 발을 옮겼다.
가까이서 보니 나무껍질이 아니었다. 매끄러운 가죽으로 된 제 손만한 크기의 네모난 물건이었다.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이는 아마 높으신 양반님네들만 쓰는 귀한 물건이겠거니 짐작했다. 갖다 팔면 돈이 생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먹을 것이 아니다.
풀 죽은 아이의 귀로 무언가가 땅을 박차고 오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아이는 몸을 웅크렸다. 엄마가 항상 말했었다. 큰 길을 지날 때에는 가마나 말을 조심해라. 말 다리에 무엇이 퍽 치이는 소리가 나고 험한 욕설 소리가 들렸다. 모든 게 순식간이었다. 관리가 탄 말이 아이의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아이가 구부정히 고개를 들었다. 엄마의 시신이 원래 있던 자리에서 두 보쯤 떨어진 곳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었다. 말이 걷어찬 흔적이 선명했다. 덮어두었던 거적은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 있었다.
아이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네모진 그 이상한 물건을 쥔 오른 손에 꽉 힘을 주었다.



고종 25년 (1888)

여름이라 장이 일찍부터 섰다. 노(奴) 복만은 아까부터 옹기장수 앞에서 똥장군의 값을 흥정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전에 여기서 샀던 오줌장군이 넉 달 만에 깨져버린지라, 물건이 형편없어서 그런 것 아니냐며 일문이라도 더 깎아보려고 시비를 거는 중이었다. 옹기장수는 장군 주인이 자발이 없어서 넘어진 것을 왜 옹기 탓을 하느냐고 귓등으로도 안 듣는 눈치였다.
결국 두 문 밖에 못 깎은 장군을 지게에 짊어지고 복만이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앞에서 웬 비쩍 마른 꼬마 녀석이 비칠거리며 다가온다. 못 보던 거지 아이다 싶어 한 번 쳐다보고 말았는데 복만과 스쳐지나갈 때의 아이의 거동이 심상치가 않았다. 허리춤에 매단 전대가 없어진 것을 보고 복만은 잽싸게 아이의 팔뚝을 잡아채었다. 아이는 발버둥을 쳤지만 오십 평생 들일로 살아온 복만의 손아귀 힘을 이길 수 없었다.  
“이런 거지새끼! 후레자식 같으니라고! 어린 게 할 짓이 없어서!”
복만이 소리를 지르며 아이를 바닥에 내치자 장 보던 사람들이 구경삼아 주위에 모여들었다. 아이는 오들오들 떨면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복만이 다시 아이를 잡아 흔들었다.
“내놔! 이 염병 들어 뒈질 놈!”
아이가 울며 복만이 차고 있던 전대를 내밀었다. 구경꾼이 점점 몰려들었다. 복만은 화가 삭히지 않아, 이제는 아이의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너 같은 도적놈은 또 누구의 돈을 훔쳤는지 몰라. 오라질 놈. 당장 관아에 끌고 갈……”
복만이 소년의 바지춤에서 이상한 물건을 꺼내었다. 복만의 손에 들린 그것을 보고 포기한 듯 늘어져 있던 아이가 다시 팔다리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그런 것에 아랑곳없이 복만은 그 이상한 물건을 곰곰이 살펴보았다.
“이게 뭐여?”

이십년 전만 해도 어디 내놔도 빠질 것 없는 훌륭한 기와집이었을 것이다. 기왓장이 깨지고 허물어져 이엉을 인 지가 벌써 오래되었다. 군데군데 무너진 울을 어설피 묶어놓은 티가 역력하고, 한때 솟을 대문이 섰을 자리에는 아귀가 맞지 않는 사립문짝이 흔들리고 있었다. 다 쓰러져가는 행랑채가 한 칸 있고 사랑채는 아예 무너져 주춧돌만 남았으며 안채만이 겨우 자리를 보존하는 참이었다. 문간 옆의 배롱나무 한 그루만이 올해도 붉은 꽃을 틔웠다.
복만이 아이를 데리고 대문에 들어섰을 때 며느리 김 씨가 사랑채 터에 일궈놓은 텃밭에서 김을 매고 있었다. 아이를 보고 김 씨가 추켜올린 치맛단을 잡아 내리며 일어섰다. 아이는 잠자코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밥이 없는데?”
아이의 행색이 초라해 빌어먹으려고 온 것이라고 김 씨가 어림짐작한 것이었다. 복만이 말을 꺼내려는데, 안채에서 의관을 갖춘 노인이 나타났다.
“웬 아이냐?”
노인의 목소리는 허옇게 센 귀밑머리에 어울리지 않게 강강했다. 두 눈이 좁쌀같이 작고 단단한 매서운 인상의 노인이었다. 그의 등장에 아이는 더더욱 몸을 움츠렸다.
“저, 이 녀석이 장에서 전대를 훔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노인이 아이를 훑어봤다. 열 살 겨우 넘었을까한 왜소한 체구였다.
“아직 어린 아이인데 적당히 꾸짖어 돌려보내지 않고는. 쯧.”    
“저, 그게……, 녀석이 이상한 물건을 갖고 있었습니다요.”
복만이 아이에게서 뺏은 물건을 노인에게 내밀었다. 아이가 힐끔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숙였다. 매끄러운 재질의 네모난 물건이었다. 노인으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다. 반으로 접혀져 있어 펼쳐보니 전체적인 재질은 겉과 같은데 특이하게도 마치 물처럼 투명하고 도자기처럼 매끄러운 좌우 두 치가량의 얇고 납작한 것이 붙어있었다. 그것을 한참 보다가, 위쪽이 서로 떨어져 있어 주머니와 같이 무언가를 넣을 수 있는 구조임을 깨닫고 손을 넣어보았다. 아마 종이 같은데 기름을 바른 것처럼 미끄러운 것이 잡혔다. 여섯 치 정도 되는 푸른색의 그것을 꺼내어 보고는, 노인은 소스라치게 놀라 두 손으로 물건을 받잡고 마루에 엎드렸다.
왕의 영정이었다.
당황한 김 씨와 복만이, 그리고 토끼눈이 된 아이가 노인을 쳐다보았다.

노인 최을신은 남평 최 씨의 39대손으로 정조 때 우의정에 올랐던 최진의 7대손이다. 대대로 이 영산지방에 터를 잡고 살았던 유력한 양반 가문인데 최을신의 고조부 때부터 벼슬길이 막혀 가세가 점차로 기울었다. 그러던 와중에 최을신이 17세에 진사시에 합격, 20세에 문과에 급제하면서 잠시 집안의 셈이 트이나 했으나 세도가의 전횡 속에서 임시직만을 전전하다 변변한 벼슬자리 하나 못해보고 낙향하게 된다. 그것이 40년 전의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살림살이가 최을신의 과거 뒷바라지로 인하여 더욱 빈한하여 졌으나 그래도 대대로 물려받은 논밭을 성실히 일구며 살았다면 지금의 신세는 면했을지 모른다. 외아들 최기정이 어릴 때부터 총명한 기색을 보여 생원시에 합격하자 최을신은 다시 한 번 관직에의 꿈을 안고 아들과 함께 상경한다. 그러나 이때의 과거는 이미 최을신이 합격했던 그때의 과거가 아니었다. 시험관 매수와 대리시험, 문제 유출 등 온갖 부정행위로 과거시험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더러워져 있었다. 결국 그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 사이 노비들은 도망가고 전답은 남의 손에 넘어갔으며 집은 다 쓰러지게 되었다. 이듬해 최을신의 처 홍 씨의 상까지 겹쳐 집안은 더욱 곤궁하였다. 그나마 주위의 도움과 아들 최기정의 부지런함으로 지금은 다섯 두락이나마 제 논이 있고 남의 땅도 부치며 최을신과 아들 내외, 손자 네 식구 겨우 입에 풀칠하며 사는 중이었다.
최을신이 제 방에서 정좌한 채로 그 푸른 종이를 들여다본 지 벌써 반나절이 지났다. 며느리가 가져온 점심도 물리고 계속해서 그것만 붙들고 있었다. 여모저모 살펴봐도 당최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크기는 옆으로 여섯 치 아래로 세 치쯤. 색은 전체적으로 푸른데 부분별로 조금씩 다르다. 양면 모두에 알 수 없는 표식들과 동그라미와 언문이 적혀 있었다. 언문이 이르는 바는, 만원, 한국은행, 한국은행 총재. 글은 글이로되 알 수 없는 글이로다. 거기에 지팡이 모양의 작대기 하나와 그 뒤로 동그라미를 네 개 붙인 것이 종이 양면에 네 개나 쓰여 있다.
가장 해괴한 것은 각 면에 그려져 있는 그림이었다. 한 쪽에 기구처럼 생긴 그림은 그렇다 쳐도, 딱 가슴께까지만 그려진 임금의 영정이 문제였다. 감히 임금의 몸을 절단하여 그리다니. 또 비록 반절일지언정 귀중하게 모셔야할 임금의 영정이 한낱 거지 아이의 손에 들려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고?    
양인의 물건이 아닌가 생각을 해 봤지만 아무래도 언문과 임금의 영정이 마음에 걸린다. 양인의 물건이 아니라면 조선 사람의 것이라는 말인데, 만일 그러하다면 임금의 영정을 함부로 그린 데다가 또 그것을 절단하여 보관한 죄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것이다. 최을신은 푸른 종이를 무명 조각에 싸서는 위패를 모시는 함 속에 같이 넣었다. 어째서 이런 불충스러운 물건이 나에게로 왔는고.
“아버님.”
내다보니 며느리가 말끔해진 아이를 데리고 서 있다.
“말씀하신 대로 먹이고 씻겼습니다.”
최을신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아이를 살폈다. 몹시 말랐으나 팔다리가 겅중한 것이 잘 먹이면 튼실한 장정이 될 것 같기도 하다. 둥글넓적한 얼굴에 콕 박힌 작은 눈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차분한 빛이었다.
“어디에서 왔느냐?”
아이가 말이 없자 김 씨가 대신 답했다.
“서울에서 왔답니다. 어미와 함께 빌어먹으며 살았답니다.”
최을신의 눈썹이 슬그머니 위로 치켜 올라간다.
“왜 가만히 있어? 벙어리는 아닐 테고. 이름이 무어냐?”
아이가 가까스로 소리를 내었다.
“갑상입니다.”
“그 물건은 어디서 났느냐?”
“길에서 주웠습니다.”
“오갈 데가 없느냐?”
대답 없이 아이는 고개를 숙였다. 최을신이 며느리더러 말했다.
“일 시켜보고, 쓸 만하면 밥이나 두어 끼 챙겨주거라.”
며느리와 아이가 물러가고 최을신은 다시 방에 들어 앉아 책을 펼쳤다. 독서를 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마침내 책을 덮고, 수염을 쓰다듬으며 최을신은 생각에 잠겼다.


영산지방에서는 하지 이후로 가뭄이 계속됐다. 논바닥이 나무껍질처럼 갈라지고 기껏 심어놓은 모들이 노랗게 말라갔다. 아들 최기정은 매일같이 논에 나가 물을 지켰다. 메마른 위쪽 논에 물을 트려고 밤을 새기도 예사였다. 삽질 한 번 물 한 줄기 때문에 농군들은 눈이 벌겋게 되어 주먹을 휘둘렀다. 최기정도 며칠 전 이웃한 논의 일꾼과 시비가 붙어 큰 싸움이 날 뻔 한 적이 있다.
그날도 저물녘에 최기정이 논에서 돌아왔을 때,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밥을 먹고 있는 아이를 보고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최을신이 아이를 데리고 와서 오늘부터 부릴 갑상이라는 애라고 소개하자 그저 피곤한 듯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는 어쩌면 자기 아버지만큼이나 늙어보였다.
행랑채에서 복만 옆에 누워 잠을 청하며 아이는 내일부터 손발이 닿도록 일을 바삐 하겠다고 다짐했다. 열심히 일해서 주인 나리의 마음에 들면 밥도 잘 주실 거고, 언젠가는 아까 뺏어갔던 네모난 갈색 물건을 돌려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까 주인 나리가 어딘가에 넙죽 큰 절을 했던 이상한 일은 이미 아이의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낯선 잠자리였고 복만이 코를 심하게 골았지만 한데서 자기에 익숙했던 아이는 금세 깊은 잠에 들었다.
다음날 최기정과 아이가 대문을 나서기 전부터 아이에 대한 소문은 이미 온 마을에 퍼져나가 있었다. 최기정은 처로부터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짐짓 모른 체를 했지만, 아이는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이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최기정이 성큼성큼 앞서나가고 아이가 쭈뼛거리며 뒤를 따랐다.
“아버님께서는 당신께 말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어젯밤 잠들기 전 처는 그날 일었던 일을 설명하며 아버님의 행동과 언뜻 보였던 그림의 모습으로 보아 그것이 임금님의 영정이 아닌가 싶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최기정은 매우 놀라고 걱정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리 임금의 영정이로서니 처와 종과 거지 아이가 지켜보고 있는데서 그리 넙죽 절을 하실 것은 무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처가 가져다놓은 새참을 먹다가 아직도 논에서 김을 매고 있는 아이를 힐끔 쳐다보면서 또,
‘네 식구 끼니 잇기도 어려운 형편에 무에 저 애는 또 잡아두셨는고?’
하고 생각했다. 맘만 같아서는 그 이상한 물건과 아이를 몽땅 관아로 넘겨 버리면 시원할 성 싶지만, 몇 해 전 환곡 때문에 마찰이 있은 이후로 관아가 이 집안을 질시하던 터라, 자칫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얻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담 종이는 태워버리고 아이는 내쫓으면 될 것을. 이 지경이 되었어도 양반은 양반인지라, 왕의 반쪽짜리 영정을 귀히 모시는 것은 그렇다 쳐도 대체 아이까지 거두는 속내란 무엇이란 말인가.
아이의 발갛게 상기된 얼굴이 웃자란 모 위를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쉬지 않고 일하건만 아이는 아직 고양이 이마만한 논의 반 이랑도 다 나가지 못했다. 서울에서 빌어먹던 거지 아이라 하니 농사일에 익숙하지 않고 그렇다고 힘이 센 것도 아니다.
하기야, 자신도 한 때 이 일이 서툴었던 적이 있었지. 부드러운 손으로 붓을 잡거나 책장을 넘기는 것을 일삼아 하던 시절이었다. 최기정은 어느새 거친 농군의 것이 되어버린 제 손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바지춤에 손을 탁탁 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야속하게도 푸르기만 한 하늘에 뜸부기 한 마리가 길게 날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에 대한 소문은 점차 잦아들었다. 소문이라는 게 본시 언젠가는 사그라지기 마련이지만 그 속도를 더욱 재촉한 것은 영산에 두 달 째 이어지는 가뭄이었다. 하루 또 하루 작열하는 태양을 바라보며 사람들의 얼굴은 꼭 그만큼으로 노래졌다. 위쪽 논으로는 아예 손을 놓아버린 것들이 태반이었다.
심각한 한재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래서 더욱 아이의 일솜씨는 날로 늘어갔다. 이제는 이 집의 열다섯 먹은 손자 순우보다도 일을 척척 해 내었다. 밥그릇 부시기도 계면쩍은 가난한 살림이건마는 빌어먹을 때보다는 나았는지 아이는 그새에 혈색도 좋아지고 살도 조금 붙었다. 김 씨가 아들의 헌 옷을 고쳐 입혀주니 어느 부유한 농가의 막내아들 같은 화기가 돌았다.
그날 아이는 저녁을 일찍 먹고 나와 마당 서편의 무너진 울을 세우는 일을 했다. 한나절 내내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날이었기에 저녁노을이 몹시도 고왔다. 이 빛깔이 붉은색에서 자줏빛으로 변하고, 또 완전히 검어지기 전까지 일을 마쳐야하기 때문에 아이의 손놀림이 바빴다. 울타리를 새로 세우는 것도 아니고 넘어져있던 것을 임시방편삼아 올려 묶는 일이니 맘만 먹으면 금세다. 어제 동네 개가 무너진 새로 넘어와 뜰 안의 텃밭을 망쳐놓는 바람에 급히 손을 쓰는 것이었다.
그 때 노을을 등에 지고 한 사내가 이편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키가 작고 어깨가 떡 벌어진 험상궃은 사내였다. 그냥 지나가는 객이거니 했는데 사립문 앞에서 걸음을 딱 멈춘다. 아이가 이 집에서 머물게 된 이후로 마을 사람이 아닌 낯선 이가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사내는 얼굴이 검고 수염이 더부룩하게 났으며 특이하게도 왼쪽 눈 위에 커다란 사마귀가 있었다. 사내가 아이에게 ‘나리께 오두병이가 왔다고 일러라.’고 말했다. 아이가 미처 고하기 전에 큰 나리가 먼저 밖을 내다봤다.
최을신의 표정이 굳어졌다. 오두병이라는 사내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뒤이어 나온 아들 내외가 오두병을 보고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이윽고 최기정이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간 잘 있었는가. 어서 안으로 들어감세.”
그리고 최을신을 올려다보고 말했다.
“아버지. 오서방네 두병이가 왔습니다.”
최을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 씨가 바빠졌다. 손님이 묵고 가려나 보다. 아이도 덩달아 허드렛일로 분주했다. 논에 가 있는 순우와 복만을 대신해 최기정이 급히 술을 사러 나갔다. 김 씨가 새로 지은 밥을 뒤섞고 있는데 최을신의 방 쪽에서 큰 호통 소리가 들렸다.
뒷마당에 있던 아이가 놀라서 김 씨 옆으로 뛰어왔다. 김 씨가 마당으로 나가니 오두병이 허둥지둥 신발을 꿰차고 있었다. 벌써 가시냐고, 식사 들고 가시라고 김 씨가 말을 걸었지만 오두병은 고개를 젓고는 황급히 문을 나섰다.
술을 가지고 돌아온 최기정이 손님이 가버린 것을 알고 김 씨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최을신은 방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이는 작은 나리가 애꿎은 마님에게 성을 내는 것을 이상하다 생각했다.



“예령, 군천, 진월, 허천 지방에서 수천의 무리들이 뜻을 하나로 모아 오직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험한 종이를 가진 아이가 이 집에 있다죠? 요긴하게 써 먹을 수 있을 겁니다. 아마 정감록보다도 더…….”
이 놈! 이 나라를 말아먹을 놈! 천벌을 받을 놈! 썩 꺼지거라! 최을신의 호통이 더해질 수록 오두병의 몸집이 점점 부풀어 올랐다. 마침내 방을 가득 채울 정도로 커진 오두병이 최을신을 내려다보며 우레와 같은 소리로 말했다.
“몇 해 전 난리 때, 농민들을 거짓 감언으로 선동했던 인물이 누구였지요?”
“사건의 주모자라는 죄를 몽땅 뒤집어쓴 채 패가망신하고 객지를 떠돌게 된 사람은 또 누구였지요?”
“누구였지요? 누구였지요? 어르신, 대체 누구였지요?”
이놈!
최을신이 눈을 떴다. 말매미가 세차게 울고 있다. 열어놓은 들창 사이로 아이가 놀란 눈을 하고 서 있었다.
“어디 편찮으셔요?”
최을신은 끙, 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괸 자리에 식은땀이 흥건하다. 뜨거운 한낮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주룩주룩 긴 땀이 흘러내린다. 아이가 매서운 햇볕을 받으며 마당 한 가운데 서 있었다. 최을신도 진이 빠져 그대로 앉아 있었다.
한참 후에 최을신이 입을 열었다.
“더우니 와서 앉아라.”
여느 때 같았으면 동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을 시간이었다. 가뭄 때문에 집집마다 난리가 나서 아이들이 모여들 겨를이 없었다. 덕분에 최을신은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아까처럼 이따금 오수에 빠졌다. 아이가 툇마루에 앉는 것을 보고 최을신은 읽던 책을 다시 펼쳤다.
서둘러 나가봐야 하지만 아이는 잠시 앉아있기로 했다. 아이는 최을신의 방에서 나는 먹 냄새를 좋아했다. 그것은 씁쓰레하면서도 편안한 향이었다. 덥고 고요한 와중에 이따금 책장 넘기는 소리와 먼 곳의 휘파람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발끝을 햇볕에 담고 흔들었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모른다. 최을신도 아이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가을은 무섭게 찾아왔다. 수확은 참담하였다.
그러나 수취는 오히려 더욱 심해졌다. 그해 여름 영산부의 아전 김일수가 환곡 2만냥을 횡령하고 도망하였기 때문에 환곡의 부족한 양을 채우기 위해 토지마다 6냥 5전의 결렴이 붙었다. 농민들은 분노했다.
이윽고 마을의 우두머리격인 농민 몇이 최을신의 집에 찾아왔다. 최을신은 그들을 단호하게 물리쳤다. 다음 날 최기정이 그들의 집으로 찾아갔다.
5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아전이 빼돌린 환곡을 매우기 위해 농민들의 토지에 과도하게 세를 부과하자 최을신이 농민들 몇을 이끌고 직접 관아에 가서 소장을 올렸다. 부사는 그럴듯한 말로 세제를 개선할 것을 약속했지만 그들이 물러가자 없던 일로 해 버렸다. 이어 최을신과 농민들이 감영에까지 가서 징수의 부당함을 호소했지만 문제는 조금도 해결되지 않았다. 최을신은 비변사까지 나아가서 끝까지 상소를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두 번의 배신으로 이미 상투 끝까지 화가 차 오른 상태였다. 성난 농민들이 관아를 점거하고 아전을 죽이는 등 난을 일으키자 그제야 부랴부랴 구제책이 내려왔다. 도결이 폐지되고 부사가 파직되는 한편 난의 주동자들이 가산을 빼앗기고 유배를 당했다. 최을신은 상소를 올리던 초기 과정에서의 주도는 확실하나 무력봉기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주동자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관아에서는 이들 집안을 특별히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대낮에 길을 거닐던 최기정이 느닷없이 병졸들에게 잡혀 들어갔던 것이 바로 이레 전의 일이다. 양반의 이름을 이용하여 상민 부녀자를 능멸했다는 죄목이었다. 최기정은 자신에게 능멸 당했다는 부녀자가 누군지도 모른 채 형장을 맞았다. 최기정이 농민 우두머리들과 내통하고 있음을 관아에서 눈치챈 것이었다.
작은 나리가 형장을 맞고 비틀비틀 돌아와 자리에 눕자 아이의 일이 더욱 많아졌다. 수확은 반타작이지만 일거리들은 예년이나 다름없이 많았다. 더욱이 아이로서는 처음 해보는 일들이라 매일이 고될 따름이었다. 하루 종일 일하고 들어오기만 하면 곧장 잠이 드는 생활이 반복되다보니 집안 분위기가 자못 험악해지고 있다는 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마지막 마당질을 끝내고 일꾼들이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다. 안채에서 큰 소리가 나서 모두 뒤를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작은 나리가 큰 나리에게 성을 내고 있었다.
“공자님 맹자님 말씀 읽고 있으면 다 양반입니까? 이 꼴이 되어서도 아직 양반입니까? 책을 읽으면 밥이 나옵니까, 국이 나옵니까? 무엇 하나 해결하지 못하는 공부가 무슨 소용입니까?”
최을신이 몸이 채 낫지 않아 쉬고 있던 최기정에게 이럴 시간에 책을 읽으라는 핀잔을 한 것이 일의 시초였다. 더불어 요즈음 독서를 게을리 하며 양반의 본분을 잊음을 꾸짖었던 것인데, 그 말에 최기정이 발연하여 일어난 것이다.
“무어…….”
“무엇을 믿고 공부를 합니까? 무엇을 바라고 공부를 합니까? 당장 겨울을 날 양식이 곤궁한 처지에 웬 양반이요 웬 독서입니까? 제가 지금껏 아버님처럼 방에만 틀어박혀 글만 읽었다면 우리 식구는 진즉 길에 내 앉았을 겁니다!”
최기정의 얼굴이 이글이글 붉어졌다. 최을신의 얼굴은 하얗게 굳어갔다. 이윽고 최기정이 성치 않은 걸음으로 비틀비틀 일어나서는 일꾼들을 외면하며 사립문을 나갔다. 김 씨가 서둘러 뒤쫓아 갔다. 최을신이 휘청거리며 제 방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복만이 달려가서 부축했다.
아이는 무슨 영문인지를 알 수 없었다. 다만 방으로 들어가는 큰 나리의 얼굴이 오래 앓은 사람마냥 푸르스름해 진 것을 보았을 따름이었다. 텅 빈 마당에서 일꾼들은 눈을 꿈뻑이며 서로의 얼굴을 보다가 다 뜨지도 않은 밥술을 주섬주섬 놓고 헤어졌다.
그날 밤에는 늦도록 달이 뜨지 않았다. 산 위에서 부엉이가 부흐부흐 울며 제 짝을 찾았다. 최을신의 방에서는 호롱불이 꺼질 듯 꺼질 듯 타오르며 침침한 노인의 눈을 밝혀주었다. 그는 닳아빠진 천자문을 펼쳐놓고 있었다. 맞은편 방에서는 김 씨가 삯바느질에 여념이 없다. 어딘가에서 들리는 여우 우는 소리에 김 씨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든다. 그리고 반쯤 타들어간 심지를 보며 여우울음만큼이나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믐의 달이 떴다. 들도 산도 숨을 죽이는 깊은 밤에 한 사내가 두루매 고개의 주막으로 뚜벅뚜벅 걸어온다. 단잠에서 깬 개가 왈왈거리고 주모가 졸린 눈으로 등불을 쥐고 밖으로 나왔다. 뉘시오? 남자가 말한다. 한잠 묵으러 왔소. 등불에 비친 남자의 얼굴에는 왼쪽 눈 위로 커다란 사마귀가 나 있었다.



오두병은 몇 해 전 환곡 사건 때 농민들을 몰고 가 관아를 습격했던 인물이다. 그 후 난의 주동자로 몰려 남해의 섬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2년의 유배생활을 끝내고 뭍으로 돌아왔건만 부모, 처자가 뿔뿔이 흩어져 서로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 그는 품팔이꾼으로 머물렀던 군해와 함정 지방에서 두 차례의 민란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는 용수, 고주 지방에서 주도적으로 민란을 일으킨 후 지역적으로 한정된 소규모 민란의 한계를 느끼고 활동범위를 넓히며 거사를 계획하고 있는 중이었다.
주막을 찾아온 최기정에게 오두병이 이러한 자신의 내력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최기정의 눈에는 고양된 빛이 감돌았다.
“허천의 김 부자가 자금을 대고 있지요. 허천을 포함해서 예령, 군천, 진월, 석원에서 함께하기로 미리 약조한 인원을 따지면 줄잡아 이천은 될 것입니다.”
“이천? 충분히 많구먼 그려. 굳이 나의 도움을 받아야하는 이유가 있을 테지?”
“영산은 작은 고을이지만 수원으로 곧장 들어갈 수 있는 길목에 위치한 요지요, 최 씨 집안은 영산에서 마을 사람들의 두둑한 신망을 얻고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게다가?”
오두병이 목소리를 슬그머니 낮췄다.
“이천이 많다고 하지만, 관군을 상대하기에는 터무니없습니다. 봉기를 거듭할수록 우리 편을 계속 늘려나가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려면 부정한 탐관오리를 벌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한다는 우리의 대의만으로는 아무래도 충분치 않더란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사로잡을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항간에 떠도는 정감록이나 비기 같은, 아니 그보다 더욱 강력한!”
오두병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최기정이 불안해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침 주막에는 사람이 없었다. 최기정이 목을 가다듬으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런 것이 있단 말인가?”
오두병이 따라서 목소리를 줄였다.
“제가 들은 소문에 말입니다, 해괴한 종이를 가진 아이가 나리 댁에 숨어들었다지요?”
“그것!”
“왕의 영정이라지 않습니까?”
최기정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오두병이 최기정을 보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늘이 주신 계시를 여태 왜 모른 척하셨습니까? 이 기회를 놓치는 것이야말로 하늘의 뜻을 어기는 짓입니다. 학정에 몸 둘 곳 없는 이 나라를 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수천수만 백성의 원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라.”
최기정이 고개를 떨구었다.



아이는 갑자기 안채에서 자게 되었다. 작은 나리가 엄한 얼굴로 다가와 오늘부터 너는 행랑채 말고 우리 방에서 자라고 말한 후로다. 안채 방이라고 해봤자 행랑방보다 조금 넓다 싶을 뿐이요 그것도 작은 나리와 마님, 순우 도련님 사이에 끼어 새우잠을 자려니 차라리 코고는 복만이 아저씨 곁이 더 나았다. 그러나 작은 나리가 워낙 매서운 눈을 하며 명했기 때문에 아이는 그저 눈치껏 안채 방에 붙어있어야 했다.
달라진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이가 늘 도맡아하던 뒷간 청소와 퇴비 만드는 일을 복만이 아저씨가 대신하게 되었다. 마침 보리 심기를 마친 후라 한가한 터인데 제가 늘상 하던 일까지 빼앗기니 정말로 일이 없어 심심할 지경이었다. 마당이라도 쓸라 치면 어디선가 작은 나리가 뾰족한 눈을 하고 나타나 빗자루를 뺏었다. 아이가 해야 하는 집안의 온갖 잡일이 순우 도련님의 몫이 되었다. 그래서 작은 나리가 집을 비우기만 하면 순우 도련님이 아이에게 이만저만 골을 내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이따금, 아니 자주, 전에 봤던 사마귀 달린 사내가 찾아왔다.
아이가 가져온 종이를 한 번 보여 달라는 청을 최을신은 고집스레 거절했다. 벌써 사정을 하러 찾아온 지 다섯 날 째이다. 오두병이 조근조근 설득하는 것을 듣다 못한 최기정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버님께서는 제가 억울하게 매를 맞고 다니는 것이 분하지도 않으십니까?”
오두병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보고 있던 최을신이 최기정을 돌아보았다. 일자로 다물렸던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분하다. 허나 이 방법은 아니다.”
“나리께……”
오두병이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저희 계획에 참여에 주십사하고 바로 요구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나리께서 천천히 생각하실 문제입죠. 다만 지금 이 자리에서는, 그 아이가 가져왔다는 종이를 그저 잠깐 보았으면 하는 뜻입니다.”
“혹세무민이로다!”
“대체 누가 혹세무민을 한단 말입니까.”
최기정이 언성을 높였다. 오두병이 눈짓으로 그를 진정시키려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혹세무민이라뇨, 저들이 바로 혹세무민이 아닙니까? 농사지으면 뺏어가고, 맘에 안 들면 끌어가 노비로 삼고, 딸자식은 훔쳐가고, 굶주린 백성들이 길가에서 죽어가고 있어도 안에서는 기름진 쌀과 고기로 매일같이 상다리가 휘어집니다. 백성들을 사고팔며 관직을 사고팔고 이제는 나라까지 팔아넘기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선비의 도를 얘기하시지만, 저는 선비로써 죽기 위해 이 거사에 끼어든 것입니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모른 체하는 것이 선비입니까? 위기에 처한 국가를 외면하는 것이 양반입니까? 아버지!”      
최을신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말이 없었다. 무릎에 놓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최기정은 차마 고개를 숙였다. 오두병은 숨소리마저 죽이며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최을신이 몸을 일으켰다. 최기정과 오두병이 서로를 보며 무언의 눈빛을 나누었다.
흰 무명천 안에서 나온 푸른 종이는 암만 봐도 진괴한 것이었다.
“이것이 대체 무슨 뜻일까요. 영정 옆에 적힌 만원이라는 언문이……?”
“제가 잠깐 좀 보겠습니다.”
오두병은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눈이 퍽 좋았다. 두 손으로 종이를 받잡더니 실눈을 뜨고 종이를 살피기 시작한다. 더듬더듬 글씨를 짚어 내려가더니 영정 옆의 아주 작은 글씨에서 눈이 멈췄다.
“……세종대왕?”
“세종임금이시라고? 이 영정이?”
최을신이 놀라 반문한다. 세종임금은 지금으로부터 사백년 전 조선 땅에서 선정을 베푸셨던 성왕이 아니신가. 이 영정이 그렇게 오래된 것이라고?
“믿기 어렵지만…… 그렇게 적혀있습니다요.”
오두병이 글씨 부분을 짚으며 최기정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최기정이 한참 찌푸렸다 폈다하며 그것을 보다가 자기 눈에도 이것이 세종대왕으로 보인다고 답했다. 참으로,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최을신이 연신 중얼거렸다.
다음날부터였다. 세종임금의 현신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영산지방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아이가 머리에 혹을 달고 다니기에 최기정이 알아보았더니 아들 순우가 때린 것이었다. 자초지정을 물으며 꾸짖었더니 내일 모레 장가갈 나이가 되는 사내아이가 엉엉 울음을 터트며 말했다. 아버지는 항상 거지 아이만 위하시고 그냥 저는 죽어버리렵니다. 김 씨가 말하기를 제 종으로 부리던 아이와 한 방을 쓰고 아이가 하던 일을 제가 하려니 부아가 난 모양이라고 했다. 어르기도 하고 혼내기도 했지만 아이와 같은 방을 쓸 바에야 자기가 집을 나가 거지가 되겠다고 하니 최기정으로서도 난감하기만 했다.
그 때에 최을신이 아이를 자기 방에서 재우라고 말을 해 왔다. 최기정은 은근히 그렇게 되면 딱 좋겠다고 생각은 했으나 아버님께서 직접 그 말을 꺼내실 줄은 몰라 놀라면서도 반색하였다. 최기정 저도 좁은 방에서 네 명이 끼어 자려니 이만 저만 불편했던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오두병과 상의 끝에 이 아이를 세종임금의 현신으로 추켜세우기로 결정한 이상, 예전처럼 하대를 할 수도 없고 막부리던 아이를 갑자기 모시기도 어려워 이래저래 대하기가 난감했던 상황이었다. 아버님께서 맡아주신다니 여러모로 좋은 일이다. 말이 나온 그 날로 아이의 몇 안 되는 옷가지들이 최을신의 방으로 옮겨갔다.
아이는 또 얼떨결에 잠자리를 바꾸게 되었다. 아이가 먼저 눕고 최을신은 불을 켜 놓고 책을 읽었다. 기름이 다 떨어져 책을 덮으니 삼경에 접어든 시간이었다. 이불을 들추고 아이의 옆에 누웠다. 야금도 울지 않는 고요한 밤이었다.
아이가 불쑥 말을 꺼냈다.
“나, 나리. 제가 여기서 자게 되서 화 나셨죠.”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으흠”
최을신이 아이의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나, 나리께서 저를 요새에 잘 부르지도 않으시고 보려고도 안하시기에 화, 화가 나셨구나…….”
서늘한 가을밤이었다. 최을신은 제 몸에 덮인 이불을 치켜 올렸다. 마당에서 귀뚜라미 여러 마리가 울다가 그쳤다.
아이가 물었다.
“저, 나리. 세종임금이라는 분이 누, 누구셔요?”
“…….”
“사람들이 저더러 세종임금이 다시 태어난 것이라고 해서.”
최을신이 대답을 않자 아이가 불안한 음성을 높였다.
“저, 저희 아버지는 도성의 거지 대장이었어요. 키가 이따만큼 크고 힘도 무지 셌어요. 내로라하는 양반님네들도 울 아버지를 무서워했어요. 우리 어머니는ㅡ”
울먹임이 튀어나온다.
“배가 고파서 처마 밑에서 굶어 죽었어요. 우리 엄마가 나를 지켜주려고 저 이상한 주머니를 나에게 준 것이야요. 우리 어머니가 주신 것이야요.”
아이가 조그맣게 훌쩍였다. 최을신은 아이의 울음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밤안개처럼 잦아든 아이가 다시 물었다.
“나리, 세종임금이라는 분이 누구세요?”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분주하게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장시에서 우물가에서 길가에서 이 암울한 세상을 구제하려고 다시 나타나신 세종임금에 대해 수근거렸다. 이에 맞춰 오두병 역시 발 빠르게 움직였다. 미리 약조를 해 두었던 사람들에게 다짐을 받고, 새로운 인물을 끌어들였다.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못하여 불만이 쌓여있던 향촌 양반들이 속속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한편으로는 각 고을에 ‘세종 임금의 은혜 아래 가난하고 굶주린 자들이 오면 먹을 것을 주고 일이 성공하면 상을 내린다’는 말을 알리고 다니며 병사들을 모집했다. 땅 없는 농민들이나 하루살이 일꾼들이 이 말을 듣고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다 쓰러져가는 최을신의 집은 밤만 되면 남의 눈을 피해 찾아드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이는 그 사람들이 자기를 ‘동자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견딜 수 없이 이상했다. 그래서 밤에 누가 찾아온 것 같으면 재빨리 최을신의 방에 들어가 숨었다. 최을신은 아이를 ‘동자님’이라고 부르지도 않았고,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존댓말을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미처 피신하지 못할 적에는 최기정에게 잡혀가 사람들 앞에서 맹하니 구경거리로 앉아 있어야 했다. 점차 아이가 최을신에 방에 틀어박혀 있는 일이 많아졌다. 최을신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최기정은 손님이 찾아올 적이 아니면 이제 거의 집에 붙어있질 않았다. 최기정의 바깥일이 잦아질수록 김 씨가 느끼는 불안감은 더욱 커져 갔다. 드나드는 사람들의 면면이나 나누는 이야기들로 보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김 씨도 직감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위험한 일은 하지 말라고 애원을 해 보았지만 최기정은 들은 척 만 척을 하거나 도리어 성을 내었다. 최기정은 날로 얼굴빛이 탁해지고 눈이 퀭하였다. 눈빛만이 예리하게 살아 연신 주위를 희번덕거렸다.  
오두병이 동자님께서 글을 아시는 편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아 아이의 고달픈 일이 하나 더 늘고 말았다. 최기정이 따라다니며 천자문을 가르치는데 아이는 머리가 아프고 괴로워서 자꾸만 도망치고 싶었다. 최기정이 아이의 공부를 최을신에게 맡겼다. 최을신은 아이의 글 읽는 양을 잠자코 보더니 천자문을 덮고 그날로 언문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거사 날짜가 삼월 초하루로 잡혔다.
조금 다급하지만 용한 무당이 길일이라고 잡아준 날이라 했다. 사실 최기정에게는 촉박할지언정 오두병으로서는 근 8년을 준비해왔으니 기다릴 만큼 기다린 것이었다. 세종임금의 현신에 대한 소문이 더욱 부풀어 떠도니 여기저기서 민심이 술렁였다. 때가 무르익은 것이다.
최기정이 도원수를, 오두병이 선봉장을 맡고 석원에 사는 허희창이라는 선비가 모사를 자처하고 나섰다. 오두병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각지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는 무리들이 이천 오백이었다. 영산 관아를 습격한 후에 진월을 거쳐 수원성을 함락시킨다. 그때쯤이면 여기저기에서 호응하는 세력이 늘어나고 단사호장으로 문을 열어주는 군현들이 속출할 테니 파죽지세로 동대문까지 올라가 수도를 빼앗는다. 이것이 그들의 작정이었다.
거사 하루 전의 아침이 밝았다. 여느 때처럼 늘 하던 일들을 한다. 관현에 수상한 낌새를 비치지 않기 위해 그들이 정한 약속이었다. 최을신은 동네 아이들에게 동몽선습을 가르쳤고 김 씨는 오랜만에 나온 햇빛에 서둘러 빨래를 널고 순우와 복만은 논에 나갔다. 최기정만이 평소의 일을 잊고 방에 틀어박혀 주역으로 점을 치고 있었다. 한편 아이는 아무도 자기에게 일을 시켜주지 않아 하릴없이 집 안을 돌아다니다가 뒷마당으로 가서 김 씨가 구해다준 언문소설을 읽었다.
정오가 지나자 김 씨가 아이를 데려다가 깨끗이 씻기고 좋은 옷을 입혀 방에 앉혔다. 방 안에는 아이뿐이었고 한참을 기다려도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아이가 가만히 앉아있으려니 밖으로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기색이 나고 부엌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가지고 놀 것이 없어 아이는 제 손가락을 꼬불락거리며 장난을 친다. 날이 어두워지고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는데도 부르는 말이 없었다. 고픈 배를 쥐고 아이가 슬그머니 문을 열었더니 바로 앞에 흰 옷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최기정이 서 있었다. 아이와 시선이 맞은 최기정이 말없이 눈을 부라리며 턱을 까닥여 들어가라는 명령을 한다. 아이는 다시 방에 틀어박혔다.      
눈앞에서 손가락을 까닥여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이 된 후에야 아이는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달도 뜨지 않은 밤이라 흐릿한 별빛으로나마 아이는 제 주변에 사람들이 꽤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었다.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불도 들지 않은 채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이도 끌고 떠미는 손에 따라 비틀거리며 무리 중을 걸었다. 불쑥 한 손이 내려와 아이의 손목을 잡았다. 아이는 그가 큰 나리임을 알았다.  
일행은 두룡산을 오르고 있었다. 산 중턱에 다다라서야 선두가 횃불을 올렸다. 두룡산 정상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산 밑에서 대기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합류한다. 새벽 동이 트기 전에 관아를 습격한다. 오두병이 세운 계획이었다.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어둡고 딱딱해서 아이는 겁이 났다. 한편으로는 뒷사람들이 지고 오는 짐에서 음식 냄새가 나서 배가 고파왔다. 그래도 아이는 최을신의 손에 이끌려 묵묵히 걸었다. 노인의 손은 쭈글쭈글하고 따뜻했다.
선두에 선 오두병이 아까부터 자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정상 근처의 널따란 바위 위에 제사상을 차리고 모두가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늘어섰다. 최기정이 제일 먼저 나서 절을 올렸다.
“천지신명께 고하나이다. 지금 조선은 가련한 백성들의 신음소리로 가득하나이다. 이에 저희가 하늘의 명을 받잡고 위대하신 성군 세종임금의 뜻을 이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고 탐욕에 찌든 관리들을 벌하려 하나니 부디 천지신명께서는……”
이글거리는 횃불에 최기정의 얼굴이 발갛게 빛났다. 사람들이 마치 무엇에 홀린 듯하여 아이는 무서운 마음에 최을신의 옷깃을 꽉 붙들었다. 부엉이가 성을 내며 부우부우 울었다. 스산한 산바람이 불어와 횃불과 제사상에 밝힌 촛불을 쥐어흔든다.
“동자님.”
최기정이 말을 맺고 물러나며 아이를 불렀다. 아이가 목을 움츠렸다.
“동자님. 앞으로 나오시지요. 성스러운 표식과 함께.”
최기정이 최을신더러 눈짓을 주었지만 그는 못 들은 척 미동이 없었다. 오두병이 옆에서 헛기침을 했다. 아이만 혼자 당황하여 앞으로 나가야할 지 그대로 있을 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대었다. 최기정이 다시 한 번 말했다.
“동자님은 앞으로 나오시고 아버님께서는 성스러운 표식을 꺼내 주십시오.”
최을신이 마지못해 하듯이 천천히 소매에서 비단 주머니를 꺼냈다. 지켜보고 있던 무리가 모두 숨을 죽였다. 최을신이 주머니를 아이의 손에 들려주고 등을 떠밀었다. 아이가 더듬더듬 발을 옮기었다.
그것을 맨 처음 알아챈 것은 뒤쪽에 서 있던 소나무골의 박 서방이었다. 작은 물방울이 코에 떨어진 것이다. 그가 하늘에 손을 들어올렸다. 또 한 방울.    
점차 나무 밑에 있던 사람들도 이 물방울을 알아채게 되었다. 아이가 채 제사상 앞으로 나아가기도 전이었다. 촛불이 꺼지고 횃불이 가물거렸다. 사람들이 모두 하늘을 쳐다보았다. 탁하고 검은 하늘에서 물방울이 화살촉처럼 떨어졌다. 아이도 고개를 들었다.
“모두들 진정하시오! 비는 하늘의 은혜요. 의식을 계속하시오!”
오두병이 성난 음성으로 외쳤다. 빗방울이 거센 빗줄기가 되어 내리기 시작했다. 최을신은 떨어지는 빗줄기를 망연히 올려다보았다.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뜻이다.’
사람들이 우왕좌왕 비를 비하려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혼란한 와중에 최을신이 아이의 손을 찾아 붙잡았다. 그리고는 길을 되돌아 내려가기 시작했다. 최기정이 그들의 모습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아니 됩니다. 아버님!” 사람들의 헛발질에 제사에 올린 음식들이 엎어져 흙 위를 뒹굴었다. 최기정이 거듭 넘어져가며 달려가 둘에게 다다랐다. 최을신의 노성이 빗줄기를 갈랐다.
“어리석은 놈! 하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도 모르겠느냐!”
등을 돌려 내려가는 최을신과 아이의 뒷모습을 최기정은 그저 보고만 있었다. 벌어진 입으로 비가 들어왔다. 오두병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일단 내려갑시다. 그저 날이 안 좋았던 것뿐이니.”
뱀의 아가리처럼 축축한 산길이 최기정의 눈 앞을 적셨다.



최을신은 몸져누웠다. 최기정은 그날 돌아오지 않았다. 시아버지의 약을 구하러 나가서 김 씨는 여러 가지 소문을 들었다. 어젯밤 갑자기 들이닥친 비 때문에 거사가 미뤄지자 불길한 징조라 하여 무리 중에 도망치는 자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마을 사람 둘만 모이면 모두 이 이야기로 불안하게 수군거렸다. 종적을 확인하기 힘든 지아비 걱정에 김 씨의 마음이 거세게 술렁였다.
이제 아무도 제 행동에 간섭하는 사람이 없어진 아이는 이따금 간단한 집안일을 하며 대개는 최을신 옆에서 심부름을 했다. 예전부터 아이를 불편해하던 순우와 복만이 도망치듯 논으로 나가버려 집 안에 병구완을 할 사람이 아이밖에 없었다. 최을신은 줄곧 눈을 감고 누워있었는데 잠이 든 것 같아 보이다가 갑자기 말을 해서 아이를 놀라게 했다. 주로 차가운 물이 먹고 싶다든지 문을 열라든지 하는 말이었지만 한 번은 아이에게 언문 소설을 읽어달라고 했다. 아이가 잔뜩 긴장한 채 더듬더듬 글을 읽어나가고, 최을신은 가만히 누워 그것을 듣고 있었다.    
욕심꾸러기 주인공이 마침내 골탕을 먹게 되는 우스운 장면을 읽던 중이었다. 최을신이 손을 들어 아이를 제지했다. 아이가 어리둥절하여 고개를 들었다. 너무 서툴게 읽어서 답답하셨던 걸까? 최을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문 밖의 기척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면서도 아이도 따라 귀를 기울인다. 먼 곳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 흐릿한 웅성거림을 뚫고 하나의 발소리가 다급하게 집 쪽으로 다가왔다. 김 씨가 방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아버님. 어서 도망치세요. 사람들이…….”
와락 눈물이 쏟아져 말을 잇지 못한다. 최을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놀란 아이가 김 씨를 멍하니 보고 있다.
“사람들이 집을 불태우겠다며 오고 있어요.”
최을신이 눈을 지긋이 감았다.
“종이와 아이를 뺏겠다고…… 흐흐흑……”
입을 질끈 다물고 최을신이 일어났다. 순간 몸이 휘청거려 아이가 부축을 했다. 자신의 팔을 붙들고 있는 아이를 최을신이 내려다본다.
함으로 걸어가 푸른 종이가 든 비단 주머니를 꺼내 아이에게 건넸다.
“본래 네 것이었으니.”
주머니를 받아든 아이의 얼굴이 울상이다. 최을신이 성큼성큼 댓돌에 내려섰다. 김 씨가 눈물을 흘리며 최을신에게 말한다.
“아버님 뒷문으로 가셔야 해요. 앞에서는 사람들이 볼 지도…….”
“일단 뒷산으로 가셔요. 노동 고모님댁에 가 계셔요. 난리가 진정되면 꼭 다시 모시러 갈게요. 꼭.”
“아버님. 아버님. 흐흐흐흑……”
뒷마당에 선 김 씨가 길게 길게 울었다.


산의 초엽에 접어드는데 최을신을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나리!”
아이였다. 최을신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저도 같이 가요!”
아이가 숨을 헐떡이며 다가왔다.
“종이는 어찌하고?”  
“두고 왔어요.”
최을신이 바삐 주변을 살폈다. 누군가가 더 쫓아오는 기색은 없다.
“빨리, 빨리 가자.”
아이를 한 팔로 감싸고 최을신은 걸음을 서둘렀다.



“그 요망한 늙은이를 잡아라!”
급기야 최기정이 외쳤다. 그러나 그 말이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흥분한 장정들이 다 쓰러져가는 최을신의 집에 들이닥쳤다. 밤새 찬비를 맞으며 산 밑에서 대기하다가 결국 허탕을 치게 된 이들이었다. 여름에 아이가 고쳐놓았던 울타리가 마른풀 눕듯 무너졌다. 집 안에서 김 씨가 까무러칠듯하며 달려 나왔다.
“아이고, 왜 그래요. 왜 그래!”
다리를 부여잡으며 막는 김 씨를 내팽겨 치고 사람들이 안채로 들어갔다. 닥치는 대로 때리고 부순다.
“늙은이는 어디 있나!”
“동자님은!”
문짝이 떨어지고 벽이 무너져 내렸다. 가마솥이 바닥을 뒹굴고 마루는 갈라져 큰 구멍이 났다. 어쩔 줄 몰라 하던 김 씨가 집을 뒤지고 있는 사람들 틈에서 최기정을 발견하고 달려가 매달렸다.
“여보! 이 사람들 왜 그래요. 좀 말려요!”
“어디 있어? 아이는? 종이는?”
최기정이 김 씨의 어깨를 부여잡고 흔들었다. 김 씨는 남편의 눈이 마치 짐승처럼 빛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모르는, 모르는 사람이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설움이 복받친다. 끓는 물처럼 새어나오는 울음을 누르며 김 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집에 오니까 없었어요. 아무도 없어요.”
“종이는? 종이는 어디 있어?”
“제가 챙겨놨어요.”
품 안에서 비단 주머니를 꺼내는 김 씨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최기정이 거칠게 빼앗아 서둘러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다.
“성스러운 표식을 찾았다!”
최기정의 옆에 있던 사람이 외쳤다.
“이 더러운 여자가 성스러운 표식을 더렵혔다!”
그 옆의 사람이 외쳤다.
이편에서는 김 씨가 뭇매를 맞고 다른 편에서는 횃불을 든 사람들이 지붕에 불을 놓기 시작했다. 최기정은 어느 편에도 가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오직 제 손에 들린 비단 주머니만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산 중턱을 오르고 있던 최을신과 아이가 마을에 치솟은 불길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간밤에 내린 비가 무색하리만큼 불은 크게 솟아 보잘것없는 집을 꾸역꾸역 주워 삼켰다. 최을신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못 이기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애야.”
불이 간신히 잦아들고 쓸쓸한 잿더미만이 남았을 때, 최을신이 메마른 입을 열었다.
“왜 날 따라왔누? 저들에게 있었으면 왕도 시켜줬을 것을.”
아이의 눈이 흔들렸다. 바싹 마른 입술을 축여 말을 고른다.
“세종임금이라고 하는데……,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매캐한 불의 흔적을 산 중턱에 뿌렸다. 최을신이 고적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도 묵묵히 최을신을 마주 보았다. 거멓게 번들거리는 아이의 눈동자. 아이의 눈가는 젊었으나 입가는 쇠약했다. 손은 거칠지만 볼은 부드러웠다. 바람처럼 가벼운 몸에 쇠추처럼 무거운 발이 달렸고 꺼질듯이 약한 숨이 바위처럼 단단한 이마를 스쳤다. 최을신은 아이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네 이름이 뭐라고 했느냐?”
“갑상이요.”
다시 일어나려는 최을신을 아이가 부축했다. 해가 지기 전에 산을 넘으려면 어지간히 서둘러야 한다. 갑상이 최을신의 어깻죽지를 받쳤다. 최을신이 갑상의 등에 손을 올렸다.
그날 이후 한동안 영산 갈뫼마을 사람들의 사랑방에서는 이야깃거리가 그칠 줄을 몰랐다. 사람 둘만 모이면 모두 최가네 집 이야기로 입이 바빴다. 행방이 묘연한 노인과 아이에 대한 소문을 나누다 나누다 지치면 화재 즉후 자취를 감춘 최기정과 오두병에 관한 풍문을 또 한아름 풀어 놓았다. 끝에 가서는 반쯤 미쳐버린 김 씨 이야기를 두어마디 하고는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고종 29년(1892)

10월. 함양에서 변란을 모의하던 무뢰배들이 같은 편의 신고로 적발되었다. 자금을 대던 양기순이라는 상인이 그 자리에서 잡혔고 모의의 주도자인 오두병이란 작자와 최기정이라는 몰락한 선비가 도주 중에 거창에서 검거되었다. 이 중 최기정이란 선비는 관군에게 잡히게 되자 품 안에서 웬 종이를 꺼내 마구 씹어 먹는 등 이상 행동을 보여 서울로 호송되는 동안 특별 엄호가 붙었다. 변란의 두 주도자는 참형에 처해지고 시체는 광희문 밖에 버려졌다. 처형당하기 직전 최기정이라는 자가 하늘을 원망하며 길게 울부짖었다는 이야기가 구경꾼들의 목격담으로 남아있다. 두 시체는 그로부터 일주일간 광희문 밖을 구르다가 야음을 틈타 나타난 어느 노인과 소년에 의해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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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숙하지만 평을 받고 싶어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많은 지적 부탁드립니다.

귓도리
댓글 1
  • No Profile
    Dominique 10.01.28 23:15 댓글 수정 삭제
    조선시대 말기의 신앙숭배에 대한 적절한 풍자군요. 재밌게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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