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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촛불

2005.11.17 16:4511.17

[남사당] : 남사당패라고도 하며, 일종의 유랑예인 집단이다.
이들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는 계급으로 광대·장인·
상인보다도 못한 집단이었지만 특별히 볼거리가 없는 민중
들로부터 환영받았다. 사회에서 격리되어 자기들만의 남색
사회를 이루었다. 초급자인 '삐리'는 잔심부름부터 시작
하여 연기의 능력을 인정받으면 가열이 되며, 여장女裝
하는 것이 상례이다.   - 네이버 백과사전 발췌



이 덧없는 세상에서
허수아비도
눈과 코를 가지고 있다.    -正岡子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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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촛불
      Appear Bef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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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감은 별채로 향하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대장부라면 술 세동이는 비워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말하며
왠만한 술로는 취한 기색도 안내는 장대감이지만 걸음이 비틀거리
는 것을 보니 오늘은 좀 거나하게 마신 듯 하다.
어느덧 50세. 천명天命을 안다는 나이가 되었으니 술을 마시는
것도 힘들 때가 되기는 했다. 반백半白으로 물들기 시작한 수염을
만지며 쓴웃음 짓던 장대감은 신발을 벗고 별당으로 올라서서
아직 노쇠하지 않은 손힘을 과시하듯 문을 거칠게 열었다. 그리고
는 입가에 흐믓한 미소를 그렸다.
대감이 여름에 책을 벗하기 위해 만들어진 별당인 만큼 학이
그려진 4폭 병풍 하나와 휴식할 책상 하나뿐인 방이지만 오늘은
좀 다르다. 책상이 있어야 할 자리에 조촐한 주안상이 놓여있고
부드러운 침구와 두 개의 베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주안상의 앞에 앉아있는 이가 있었다.
연붉게 칠한 입술과 하얀 연분을 바른 얼굴의 연지는 촛불의 색조
를 받아 더욱 붉어보였다. 그런 얼굴과 화사한 붉은 색으로 곱게
차려입은 상의와 치마가 어우러져 마치 한떨기 꽃처럼 보이도록
만들고 있었다.
누구라도 보면 초야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규수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남자였다.
젊은 시절 함흥부사로 있던 장대감은 무료한 시간을 소일하기
위해 광대 놀음을 자주 보았고 어느덧 사당패의 놀음을 보는 것도
취미로 즐기게 되었다. 그래서 50세의 생일이었던 오늘도 여흥
으로 -다른 양반집이라면 잡스럽다고 기피할- 남사당패를 불러
몇가지 놀음을 보았다.
그리고 남사당패는 자신들을 불러준 분에 대한 언제나의 예禮에
따라 삐리 -소년 광대- 중 하나를 대감에게 보낸 것이다.
젊을 때부터 색色에 절륜하다고 소문이 나 있던 장대감에게는
생일의 마무리로 이만한 즐거움도 없다.
육덕 좋은 몸을 상석에 앉히면서 장대감은 소년을 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장대감은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올해 몇이냐?
-열넷입니다.

대감은 놀란 듯한 어조로 말했다.

-목소리가 참으로 곱구나. 마치
  산속의 황조黃鳥가 지저귀는 소리
  같이 들리니 내 귀가 즐겁도다.
  고개를 들어보거라.

소년은 수줍은 듯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뚜렷한 이목구비를
산수화 감상하듯이 찬찬히 살피던 대감이 감탄한 듯이 말했다.

-네 얼굴과 네 자태와 네 목소리가
  나에게 선녀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킴이라. 너를 두고
  설부화용이라는 말이 나온 것
  같구나.
-송구하옵니다.
-술을 따를 줄 아느냐?
-네.
  대감의 천수를 위해 한잔 올리지요.

하얗고 긴 소매 속에서 나온 소년의 새하얀 손이 술병을 짚었다.
대감은 소년의 손에 자신의 커다랗고 검은 손을 얹고 흡족한 표정
으로 가까이에서 소년의 얼굴을 보았다. 대감의 술냄새 섞인 입김
을 맡으면서도 소년은 싫은 기색을 하지 않았다. 소년의 손을
놓고 술을 한잔 비운 대감의 입가는 계속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늘 밤은 매우 즐거울 것 같다고 생각하며 대감은 고개를 돌리
다가 문득 붉게 타고 있는 초를 보게 되었다.
장대감의 얇은 눈꼬리가 작게 움직였다.

-괴이한 일이로다.
  바람 한점 없는 방 안에서
  촛불이 흔들리다니..

장대감의 시선이 의구심을 담고 소년에게로 향했다.
소년은 조용히 비어있는 잔에 술을 채워놓고는 다시 손을 소매로
숨겼다. 그때까지도 말없이 자신을 보고 있는 대감의 시선을
느낀 소년은 연붉은색 입술을 움직였다.

-대감님.
  다미라는 여인을 기억하십니까?

장대감의 눈꼬리가 살짝 움직였다.

-..어찌 사대부가 여인의 이름을
  함부로 듣고 외우겠느냐.
-그렇지요. 영웅은 호색이라..
  한번 품은 여염집 아낙의 이름을
  기억하실리 만무하겠지요.
-무슨 해괴한 말을 하느냐.

장대감의 눈썹이 노기를 띄고 흔들렸다. 일갈을 하려던 장대감은
소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을 보며 미묘한 의문이 생겨 멈칫
하였다. 그리고는 약간의 성이 담긴 어조로 말했다.

-소상히 말해보거라.
-열여섯해 전 일이옵니다.

소년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어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미라는 여인은 행복했지요.
  양반의 피도 아니고 돈도 없으니
  좋을 것도 없지만 행복했지요.
  하지만 한남자의 씨를 가진 것을
  복으로 아는 평범한 아녀자였지요.
  함흥부사에게 겁劫을 당하지 않았
  다면 그리 삶이 평안했을 것입니다.

장대감의 입에서 얕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소년은 말을 이었다.

-남편은 실성한 아내의 배가 부르는
  것을 보면서 눈물만 흘렸다지요.
  그리고 아내의 태胎속에서 자신의
  씨가 태어나는 날에 자기 양물을
  낫으로 갈라 자살했다 합니다.
  여인은 미친 정신으로도 아이는
  살리고 싶은지 구걸하고 몸을 팔며
  아이가 엽전을 셀 수 있게 될 때까지
  키웠지요. 그리고 아이를 놓아두고
  물에 빠져 죽었답니다.
  그 아이는 사당패를 따라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자신의 고향을 다시
  가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귓동냥으로
  듣고서야 다미라는 이름을 알았지요.
  그리고 오늘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
  니다.

소년은 입을 다물었다. 장대감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대감은 손을 뻗으며 주변을 살폈다. 평소에 침소하는 방과 달리
이곳에는 검이 없다.
별채 밖에서도 아무런 인기척이 들리지 않는다.
대감은 잠시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움직이다가 갑자기 멈추
고는 소년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아비도 이름을 주지 않았고
  어미도 이름을 주지 않았으니
  무슨 이름이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이아怡兒라고
  부르나 뜻은 모르겠사옵니다.
-좋은 이름이구나.

장대감은 한숨을 내쉬며 촛불을 보았다. 촛불은 아직도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깨달았도다.

장대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눈동자에 불이 담겨 있음을
  진작 보지 못한 것을 보니 천명이
  다했구나.
  촛불을 흔드는 것은 너의 살기였구나.

장대감의 실눈이 앞에 앉은 소년을 응시했다. 소년은 말없이 소매
로 가려진 팔을 움직였다.
대감은 술잔을 들었다.
병풍에 그려진 학의 머리 위로 붉은 빗방울이 흘러내렸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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