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식인소녀

2010.03.25 02:3803.25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한 채식주의자 모임에서였다. 작은 몸집의 그녀는 처음 본 순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핏기 하나 없는 백지장 같은 얼굴과 유난히 도드라진 선홍빛 입술은 인형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어떻게 보면 10대 중반의 청순한 소녀처럼 보였고, 또 어떻게 보면 20대 중반의 요염한 아가씨처럼 보였다. 모임의 남자들은 모두 그녀에게 눈독을 들였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들의 집요한 시선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첫 눈에 그녀에게 홀려버린 나는 다른 남자들이 그녀를 바라보는 것조차 싫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그녀는 속이 빤히 보이는 남자들의 호의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다. 그때마다 나의 질투심은 더욱 불타올랐다. 나는 일부러 그녀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실수를 할까봐 두려웠다. 워낙 말주변이 없어서 바보 같은 짓을 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얻고 싶었다. 그녀가 내 말을 들어주고, 내 눈을 마주봐주고, 내 입에 키스해 준다면 무엇이든 아낌없이 바칠 수 있었다.    
우리 모임은 가끔 유명한 요리사를 초청해서 특별요리를 즐겼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좀처럼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옆사람이 억지로 권해야 겨우 한 입 맛보는 식이었다. 먹고 나서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귀여웠다.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나는 티나지 않게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사진을 찍어서 그녀의 얼굴만 따로 바탕화면으로 만들었다. 휴대전화 화면에서 웃음 짓는 그녀의 얼굴은 힘들 때마다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청량제였다.  

그녀에 대한 나의 갈망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녀 생각에 며칠 동안 잠을 설칠 지경이었다. 참다 못한 나는 모임 총무에게 송로버섯을 선물하고 그녀의 옆자리에 앉는 기회를 얻었다. 한 시간이나 일찍 모임 장소에 도착한 나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녀는 10분 늦게 나타났다. 혹시라도 안 올까봐 마음을 졸이던 나는 엉겁결에 벌떡 일어나 “오셨어요?”라고 인사를 했다.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은 사이인데 말이다. 다행히 그녀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하마터면 사람들 앞에서 큰 망신을 당할 뻔했다. 내게는 그녀가 인간들 속에 숨어지내는 천사로 보였다. 그 천사의 이름은 유미였다.  
모임이 진행된 두 시간이 꿈결처럼 흘러갔다. 내가 좋아하는 요리들이 나왔지만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은 그녀와의 대화뿐이었다. 그녀는 고맙게도 나의 시답쟎은 농담에 웃어주고, 따분한 이야기에 귀기울여 주었다. 나는 분위기에 푹 빠진 나머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개인적인 내용까지 말해버렸다. 그녀는 노총각의 신세 한탄을 때로 귀여운 동생처럼 놀리고, 때로 자상한 누나처럼 위로하며 받아주었다. 모임 내내 내 얼굴에는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낸 것이 얼마만이었는지 몰랐다. 게다가 모임이 끝날 무렵 그녀가 은밀하게 나를 집으로 초대했을 때는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다른 남자들의 부러운 시선을 만끽하며 그녀의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그녀는 귓속말로 특별한 사람에게만 알려주는 전화번호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하고 말았다. 좀 더 의젓했어야 하는데, 멍청이 같으니......  

집에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녀의 이름을 인터넷에서 검색한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3년 전인 15살 때 명문 의대에 수석 입학한 천재 소녀로 신문에 소개된 적이 있었다. 그녀에 대한 나의 호기심은 더욱 깊어졌다. 두뇌와 미모를 두루 갖춘 그녀가 왜 나처럼 별볼일 없는 남자에게 관심을 가지는지 궁금했다. 약속한 날이 될 때까지 시간은 더디게만 흘러갔다. 도통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동료들은 부쩍 밝아진 내 표정을 보고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그녀의 사진을 보여주며 새로 사귄 여자친구라고 자랑했다. 물론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최근에 데뷔한 연예인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고, 애인 대행 서비스를 받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미남도 아니고 뚱뚱한 내가 그런 미녀를 사귄다고 하니 믿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주위에서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었다. 그녀와 단 둘이 보낼 시간을 생각하면 천국의 문을 눈앞에 둔 것 같았다. 그 문 안에서 천사의 모습을 한 그녀가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빨리 그 날이 왔으면 하는 마음과, 설레임을 조금이라도 더 즐기고 싶은 마음이 교차하는 시간들이 지나고 마침내 운명의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회사에서 급한 일이라도 생길까봐 아예 월차 휴가를 내고 하루 종일 데이트 준비에 매달렸다. 욕실에서 보낸 시간만 해도 두어 시간은 족히 되고도 남았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키스라도 하게 될지 모르니 혓바닥까지 깨끗하게 닦고 치실로 꼼꼼하게 이빨 사이를 청소하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아껴두었던 최고급 정장에 새로 산 향수까지 뿌리고 나니 한결 인물이 나아보였다. 나는 휘파람을 불며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이제 한 시간 후면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지난 한 달 동안 온갖 장르의 꿈 속에서 여주인공을 도맡았던 그녀를 말이다.
그녀의 집은 고급 주택가 제일 안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혼자 살기에는 너무 큰 집이었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 정문 앞에서 전화를 걸었다.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그녀의 목소리가 전화기 저편에서 나를 반겼다. 잠시 후 육중한 검은 철대문이 미끄러지듯 열렸다. 나는 그녀가 시킨 대로 차고에 차를 대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현관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빨간 원피스가 하얀 전등 불빛 아래 유난히 도드라졌다. 그녀는 쭈뼛거리는 나의 손을 붙잡고 안으로 이끌었다. 은은한 조명이 깔린 집안은 취할 듯한 미향으로 가득했다. 어디선가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마치 영화 세트장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나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테이블에는 포도주와 두 개의 잔이 놓여있었다.  
“식사하기 전에 간단하게 한 잔해요. 괜찮죠?”
“그럼요. 미각을 돋구는 데는 포도주가 최고죠.”
나는 포도주를 따르는 그녀의 작고 예쁜 손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는 사실을 아는 듯 살짝 얼굴을 붉혔다. 나는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실없이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자, 우리의 첫 건배.”
그녀가 먼저 잔을 들었다. 나는 손이 떨리지 않도록 온 신경을 집중하며 잔을 맞댔다. 포도주의 향이 유난히 강했다. 원래 술을 즐기지 않는 나는 살짝 입술만 대고 잔을 내려놓았다.
“약속은 지켰죠?”
“무슨....?”
“우리 만나는 거 모임사람들한테 얘기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아! 그럼요! 하하! 당연하죠.”
사실 직장동료들에게 얘기하긴 했지만 모임사람들한테 한 것은 아니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더 캐물을까봐 얼른 화제를 돌렸다.
“전에는 제 이야기를 했으니까 이번에는 유미씨 이야기를 해줘요.”
“어떤 이야기요?”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혼자... 사세요?”
“네. 부모님은 대학 다닐 때 돌아가셨어요.”
“저런, 힘들었겠네요.”
“괜찮아요.”
괜히 엉뚱한 질문을 해서 분위기만 무겁게 만든 것 같았다. 빨리 화제를 돌려야 했다.
“전공은?”
“의대 다녔어요.”
“그럼 지금 졸업한 거예요?”
“아뇨. 중퇴했어요.”
“왜요?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그건 아니예요. 유산을 충분히 받았으니까. 그냥 공부하고 싶은 건 다 배워서 그만뒀어요.”
“그래요? 뭐가 공부하고 싶었는데요?”
“해부학이요.”
“해부...학이요?”
그녀의 입에서 나온 해부학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부자연스럽게 들렸다. 덤덤한 그녀의 표정이 그 어감을 더욱 기이하게 만들었다.
“개구리 해부해 보셨어요?”
“네?”
“개구리 해부요. 중학교 생물시간에 하잖아요.”
“네... 해봤죠.”
“난 그게 그렇게 재미있더라구요.”
“정말요? 저는 무서워서 쳐다보지도 못하겠던데.”
“친구들은 징그러워 죽겠다고 난린데 난 좋았어요. 개구리 심장이 얼마나 예쁘다구요. 오죽하면 과학실에 있는 개구리 표본을 훔치고 싶을 정도였어요.”
“유미씨, 보기보다 특이하시네요. 허허허.
“경수씨도 저에겐 특별해요.”
“제가요? 전 무지 평범한 남잔데.”
“아니예요. 경수씨는 아주 특별한 남자예요.”
그녀는 슬핏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의 큰 눈에서 색기라고 해야 할 요염한 기운이 비쳤다. 그녀는 내 눈을 빤히 쳐다보다가 살며시 눈을 감았다. 내가 아무리 쑥맥이라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정말로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그녀는 지금 키스해도 좋다고 허락을 해준 것이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엉거주춤 몸을 기울여 입을 맞추었다. 처음에는 살짝 입술만 맞대는 정도였다. 그 정도로도 오금이 저릴 만큼 흥분이 되었다. 그런데 그녀가 입술을 열어 나의 혀를 받아주었다. 그녀의 입에는 침이 가득 고여있었고, 그 침은 너무나 달콤했다. 내가 허겁지겁 입술을 탐하는 동안 낮은 신음소리를 내던 그녀는 가만히 손으로 내 가슴을 밀었다.
“잠깐만요. 숨이 막혀서.”
“미,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괜찮아요. 좋았어요.”
나는 금단의 열매라도 따먹은 것처럼 급히 주먹으로 입술을 훔쳤다. 그런 내 모습이 귀엽다는 듯 그녀는 웃음을 지었다. 다시 키스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일었다. 할 수 있다면 테이블 아래 까닥거리는 그녀의 발까지 핥고 싶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내 어깨를 살짝 두들겼다. 고개를 드니 그녀가 입에 포도주를 머금고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세례를 기다리는 신자처럼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곧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의 촉감이 느껴졌다. 뒤이어 입 속으로 포도주가 흘러들어왔다. 나는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포도주를 게걸스럽게 들이켰다. 기분 탓인지 유난히 술맛이 강했다. 목구멍이 저릿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나는 사랑에 만취해 있었다. 오늘 밤은 내 생애 가장 특별한 밤이 될 것이다. 먼 훗날 영원히 눈을 감기 전에 나는 이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감싸안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이 여러 개로 보이더니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손을 휘저어도 그녀의 얼굴은 잡히지 않았다. 이름을 부르려고 했지만 혀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아지랑이 같은 그녀의 얼굴을 향해 손으로 허공을 헤집다가 맥없이 쓰러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사지가 침대에 묶여있었다. 왼쪽 팔에는 주사바늘이 꽂혀있고 호스 끝에는 링거병이 매달려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고기 냄새가 풍겨왔다. 가뜩이나 고기를 싫어하는 나는 밀려오는 구역질을 억지로 참아야했다. 문제는 뒤틀린 속이 아니었다. 왼쪽 허벅지가 집게로 조이는 듯 천천히 아파오더니 급기야 억지로 잡아뜯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격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러자 잔잔하던 음악소리가 더욱 커졌다. 비명을 지를 기운마저 없어진 나는 아픈 개처럼 끙끙 앓기만 했다. 한참이나 식은땀을 흘리며 신음한 후에야 그녀가 나타났다.
“그렇게 아파요?”
“유미씨, 어떻게 된 거예요? 왜 제가 묶여있죠? 다리가... 너무 아파요. 제가 다리를 다쳤나요?”
“진통제를 충분히 넣었는데. 잠시만 기다려요. 더 넣어줄게요.”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제가 술에 취해서 넘어졌나요? 무슨 실수를 한 건 아니죠?”
“아니예요.”
“그런데 왜 이렇게 다리가 아프죠?”
“허벅지를 조금 잘라냈어요.”
“네? 허벅지를... 잘라내다뇨? 왜요?”
“먹으려구요.”
“예? 그게 무슨?”
“난 사람고기를 먹어요.”
“왜...요?”
“맛있으니까.”
순간 다시 구역질이 밀려왔다. 그녀는 헛구역질을 하는 나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괜히 구질구질하게 만들지 말아요. 토하고 오줌 싸고 하는 것들 딱 질색이니까. 맨 정신으로 살이 잘려나가는 건 싫죠? 고통을 주는 건 즐기지 않아요. 난 미식가지 도살꾼이 아니라구요.”
나는 부들부들 온 몸을 떨면서 울었다. 감정을 다스리려고 해봐도 소용없었다. 나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리질렀다.
“도대체 왜 그래요? 유미씨, 미쳤어요?”
“그냥 보통사람들하고 종이 다를 뿐이예요.”
나의 울음소리는 더욱 격해졌다. 꿈에 그리던 데이트가 이런 끔찍한 악몽으로 변할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 마음 속의 천사가 실은 식인종이었다니... 나는 분노와 공포에 사로잡혀 비명처럼 고함을 질렀다.
“왜 나한테 이래요? 왜! 유미씨를 진심으로 좋아했는데!”
“채식하는 사람의 고기는 연하고 담백해요. 하지만 당신만큼 살집 좋은 사람은 드물죠. 대개는 양이 많으면 맛이 없고, 맛이 좋으면 양이 적고 그래요. 그러니까 당신은 아주 특별해요.”
기가 막혔다. 그녀는 앳된 얼굴로 사람이 무슨 가축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헛웃음이 나올 만큼 어이가 없었다. 나는 결박을 풀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다리에 힘을 주는 순간 격한 고통이 밀려왔다. 나는 헉헉대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약기운 때문인지 고통이 잦아들면서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그대로 잠들어 버릴 것 같았다. 나는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살려줘요! 그냥 보내주면 아무한테도 말 안할게요. 정말이예요!.”
“그럴 순 없어요. 모처럼 좋은 고기를 얻었는데. 대신 당신이 원하던 걸 줄게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입고 있던 원피스를 벗었다. 안에는 흰색 팬티만 입고 있었다. 그녀의 작고 하얀 가슴과 분홍색 젖꼭지가 보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꿈틀거리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녀는 침대 위로 올라와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입에서는 비리면서도 싫지 않은 단내가 났다.
“날 가져요. 원하던 게 이거죠?”
나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겁지겁 그녀의 입술을 빨아먹었다. 그녀는 팬티를 벗고 나의 하반신을 가리고 있던 천을 발로 끌어내렸다. 이미 내 머릿속은 온통 섹스 생각뿐이었다. 나를 잡아먹든 말든 당장은 그녀를 갖고 싶었다. 모임의 모든 남자들이 탐내던 그 몸뚱아리가 지금 내 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었다. 나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침대가 내 허벅지에서 흘러내린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피바다 위에서 한 몸이 되어 꿈틀거렸다.
섹스가 끝난 후 나는 나른한 기분에 젖어있다가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칠흑 같은 어둠 속이었다. 잠시 그대로 누운 채 정신을 차렸다. 한바탕 정사를 치른 후라 그런지 아랫도리가 뻐근했다. 그토록 많이 상상했던 그녀와의 섹스는 거짓말 같은 상황에서 현실이 되었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신음하던 그녀의 앳된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바보같이 실실거릴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식인종이었고, 나는 그녀의 먹이였다. 더 먹히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망쳐야 했다. 방안 풍경이 흐릿하게 눈에 들어왔다. 침대 머리맡에 서너 개의 스위치가 있었다. 일단 불을 켜야 했다. 나는 벽을 더듬어 손에 닿는 스위치를 눌렀다. 불은 켜지지 않았다. 대신 낮은 기계음과 함께 벽이 열리기 시작했다. 벽 안에는 유리병들이 놓인 진열장이 있었다. 눈부신 조명이 유리병에 반사되어 시야를 가렸다. 눈을 비빈 후 다시 진열장을 보았다. 유리병 안에는 해부된 개구리와 고양이, 개, 그리고... 목이 잘린 사람 얼굴이 있었다. 나는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잠시 후 복도를 급히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들어섰다. 너무나 태연하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노려보는 것보다 더 무서웠다. 나는 목에 힘줄을 잔뜩 세운 채 소리쳤다.
“미친 년! 넌 제 정신이 아냐!”
그녀는 고함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사무적으로 주사액을 집어넣었다. 정신을 잃으면 또 어떤 부위가 잘려나갈지 몰랐다. 나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마구 발버둥쳤다.
“자꾸 날 화나게 만들지 말아요.”
“넌 괴물이야!”
“당신 전에 먹었던 사람도 그렇게 말했어요. 그래서 부분마취만 시키고 배를 열어서 간을 잘라먹었죠. 그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곧 죽긴 했지만 그 표정이 먹고 버리기엔 너무 아까워서 저기 넣어뒀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의식을 잃기 직전에 본 그녀의 얼굴은 잔뜩 화가 나있었다.

눈을 뜨니 문턱에 기댄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불룩한 볼을 한 채 무언가를 맛있게 빨아먹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엉엉 울기 시작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을 때 그녀가 손수건을 들고 다가왔다. 고개를 옆으로 돌렸지만 그녀는 눈물과 콧물 그리고 핏물로 범벅이 된 내 얼굴을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이제 그만 보내줘.”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제발!”
“지금까지는 에피타이저일 뿐이예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육질이 아무리 좋아도 내장이 훨씬 맛있어요. 기관마다 독특한 맛이 나죠. 그 중에서도 심장이 제일 별미예요. 그래서 항상 마지막에 먹어요.”
“그럼...... 차라리 지금 죽여줘.”
“그건 안돼요. 맛이 떨어지니까.”
더 이상 고함을 지를 기운도 없었다. 나는 언제나 포기가 빨랐다. 어차피 삶에 대한 애착도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사법고시에 연거푸 낙방하고나서 자살을 심각하게 고민했던 적도 있었다. 아마 지금 다니는 회사에 합격하지 않았다면 정말 죽었을지도 몰랐다. 이제 내 목숨은 한때 짝사랑했던 여자의 손에 달려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 살아날 길은 없었다. 그저 그녀가 산 채로 내장을 꺼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날 나는 하루 종일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서늘한 어둠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 것뿐이다. 그러고 보니 방안 온도가 항상 살짝 추울 정도로 유지되고 있었다. 말하자면 나는 지금 저온숙성 중인 셈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가만히 누워서 죽기를 기다리느니 탈출이라도 시도해 보고 싶었다. 설령 실패한다 해도 죽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문제는 무슨 약을 넣었는지 정신이 몽롱하고 기운이 없다는 것이었다. 상체만 일으켜도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다. 우선 손발을 묶은 줄부터 풀어야 했다. 바짝 당겨놓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양손이 서로 닿을 정도로 넉넉하지도 않았다. 방법은 이빨로 푸는 것뿐이었다.
한참을 고생한 끝에 한쪽 팔이 풀렸다. 급히 나머지 팔까지 풀고 다리쪽 줄을 풀려고 낑낑대는 와중에 문이 열렸다.
“왜 쓸데없이 고생을 하고 그래요?”
그녀는 천장 구석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곳에 희미하게 빛나는 작고 붉은 빛이 보였다. 그녀는 처음부터 내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맥이 탁 풀렸다.
“괜찮아요. 다들 그러니까. 당신은 그나마 얌전한 편이예요.”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침대로 털썩 쓰러졌다. 그녀는 내 옆으로 다가와 가만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체스할 줄 알아요?”
뜻밖의 질문이었다. 나는 사실 체스 동호회에서도 고수로 인정받으며 꽤 오래 활동했었다. 그러나 대뜸 잘 한다고 대답할 상황이 아니었다.
“심심한데 할 줄 알면 같이 둘래요?”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날 이기면 상을 줄게요.”
그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나 정도는 자신있다는 표정이었다.
“무슨 상?”
“원하는 걸 말해요.”
“이제 그만 보내줘.”
“그건 안돼요. 다른 거.”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곧 내장까지 먹히게 생긴 판에 원하는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이건 어때요? 날 이기면 오늘 바로 마취제로 고통 없이 죽여줄게요.”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언제일지 모르는 날까지 야금야금 먹히느니 그 편이 훨씬 나았다. 그녀는 내 마음을 안다는 듯 이미 발에 묶인 줄을 풀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아요. 그럴 기운도 없겠지만.”
나는 그녀의 부축을 받아서 거실로 나왔다. 그녀는 나를 테이블에 앉히고 방으로 들어가 체스판을 꺼내왔다. 상아로 만든 상당히 고급스런 물건이었다. 나는 억지로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머릿속이 몽롱했지만 반드시 이기고 싶었다. 온갖 내기를 다 해봤지만 죽음을 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것도 빨리 죽기 위해 이겨야 하는 체스라니.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녀의 표정에는 어린아이 같은 생기가 돌았다. 그녀는 나를 힐끗 보고는 첫 수를 두었다.
“각오해요. 난 속전속결 스타일이예요.”
“마음대로는 안될 걸.”
나는 내심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초반 진행이 이어졌다. 그녀는 말한 대로 공격적이었다. 나는 덫을 놓고 그녀가 실수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쉽게 걸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다 안다는 듯 말을 내가 원하는 곳에 놓는 척하다가 옆칸에 놓으면서 혀를 쏙 내밀었다.
“그렇게 쉽게 속을 줄 알아요?”
“쉽게 당하면 재미가 없지.”
“속으로는 아깝게 생각하면서.”
“전혀.”
그녀는 애써 부인하는 내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젖히며 크게 웃었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된 인간인지 그런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말하자면 나는 포식자와 사랑에 빠진 초식동물이었다. 내 허벅지와 눈알을 먹어치운 그녀의 입에 키스하고 싶었다. 그녀는 내 눈길을 의식한 듯 웃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얼른 고개를 떨구었다.
“키스하고 싶어요?”
나는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눈길을 옆으로 돌렸다.
“키스하고 싶냐구요?”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 옆으로 와서 무릎을 꿇었다.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그녀가 먼저 다가와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입에서는 항상 묘한 단내가 났다. 나는 눈을 감고 키스를 음미했다. 키스를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몸이 달아올랐다. 내가 격렬하게 혀를 들이밀자 그녀는 얼굴을 떼고는 입술을 닦았다.
“이제 그만.”
그녀는 자리로 돌아가 싱긋 웃었다.
“승부를 내야죠?”
“넌 처음으로 내게 먼저 키스해 준 여자야. 날 먹지만 않으면 정말 좋을텐데. 하필 식인종이라니......”
그녀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폭소를 터트렸다. 그러고 보니 어이없는 말을 한 것 같았다. 나도 같이 킥킥대다가 크게 웃어버렸다. 배를 쥐고 웃는 와중에 그녀가 갑자기 웃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눈길이 가닿은 곳은 체스판이었다. 나의 백말들 위로 붉은 핏자국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웃는 사이에 눈에서 흘러내린 핏방울들이 떨어진 것이다. 나는 못난 모습이라도 보인 것처럼 급히 옷으로 피묻은 말들을 닦았다. 모처럼 좋았던 분위기가 어색해지고 말았다.
“빨리 끝내요. 앞으로 열 수를 넘기지 않을 것 같은데.”
그녀의 말대로 승부는 아홉 수만에 끝났다. 나의 패배였다. 고통 없는 죽음이라는 상은 날아가 버렸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틀거리며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누웠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포가 심장을 옥죄었다. 그녀는 체스판을 정리한 후 방으로 들어왔다.
“무서우니까 바로 마취제 좀...”
그녀는 낮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취제를 넣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가 문 옆에 서있었다. 내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린 것 같았다. 복부에서 둔중한 고통이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끙’하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옷 어때요?”
난데없는 질문이었다.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손으로 복부를 만져보았다. 축축한 거즈가 덮혀있었다. 힘들게 고개를 드니 피에 물든 거즈가 보였다.
“이 옷 어떠냐니까요?”
나도 모르게 고함이 터져나왔다.
“야, 이 씨발!”
순간 복부에서 격렬한 통증이 밀려왔다. 나는 배를 움켜쥐고 웅크린 채 한참을 끙끙거렸다. 속에서 미친듯이 분노가 끓어올랐다. 나는 물끄러미 서있는 그녀를 노려보며 온 힘을 짜내 소리질렀다.
“사람을 이 꼴로 만들어놓고 웃음이 나와? 뭐? 옷이 어쩌고 어째? 내장이 먹혔는데 옷 예쁘다고 맞장구라도 쳐달라는 거냐? 미친 년! 사람고기가 그렇게 맛있디? 그 순진한 얼굴로 지금까지 몇 명이나 잡아먹었어? 어떻게 사람고기를 먹어? 생각만 해도 토할 것 같아. 역겨워!”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서있었다. 한바탕 소리를 질렀더니 온 몸에 힘이 쭉 빠졌다. 나는 헉헉 대며 벽에 몸을 기댔다.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없던 그녀의 어깨가 조금씩 흔들렸다. 잠시 후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럼 어떡해요? 누군 괴물이 되고 싶어서 된 줄 알아요?”
그녀는 억지로 울음을 참으며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사람고기가 너무 먹고 싶은 걸 어떡해요? 아무리 참아도 먹고 싶어 죽겠는 걸 어떡하냐구요!”
그녀는 그대로 쓰러져 아이처럼 흐느꼈다. 그녀의 울음은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나는 힘겹게 침대에서 내려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만 울어.”
그녀가 울음을 그치고 나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나도 어릴 때 친구들한테 놀림받기 싫어서 며칠씩 굶고 다이어트 약을 한웅큼씩 먹기도 하고 그랬어. 그런데 도저히 안되더라구. 밥이 너무 맛있는 걸 어떡해.”
나는 그녀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닦아주었다. 그녀는 내 손을 가슴으로 가져갔다.
“미안해요. 대신 날 가져요.”
“괜찮아.”
“아니, 하고 싶어요. 당신이 좋아요.”
그녀는 잡아빼려는 내 손을 아랫배로 가져갔다. 부드러운 음모가 만져졌다. 나는 어찌할 수 없는 힘에 끌리듯 그녀를 부둥켜 안았다. 그러나 복부의 통증이 너무 심해서 발기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입으로 한참을 애무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한 몸이 될 수 있었다. 그녀는 내 위에 걸터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움직였다. 나는 뒤범벅된 고통과 쾌락 속에서 깊은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녀는 내 배에서 흘러내린 핏방울을 손가락에 찍어서 빨아먹었다.  
“당신은 너무 맛있어요.”
“너두...”
우리의 섹스는 침대를 온통 피로 물들이면서 한참동안 이어졌다.

그 뒤로 한참 동안 그녀는 나를 먹지 않았다. 마치 착한 아내처럼 정성스럽게 간호만 할 뿐이었다. 우리는 같이 영화를 보거나 체스를 두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이제는 진통제만 제때 먹으면 어느 정도 살 만했다. 그 사이 우리는 꽤 가까워졌다.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녀는 나를 정말 좋아하게 된 것 같았다. 물론 불안감은 여전했다. 또 장기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기가 쉽지 않았다.
하루는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아서 거실로 나가보니 그녀가 소파에 앉아 헤드폰을 낀 채 음악을 듣고 있었다. 나는 몰래 주방으로 들어가 식칼을 손에 들었다. 마음만 먹으면 뒤에서 찔러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용기가 필요했다. 아니 용기 말고도 더 많은 증오와 분노가 필요했다. 분명히 내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도 그녀에 대한 사랑이 남아있었다. 그 사랑은 나를 먹어치운 데 대한 증오와 분노만큼 강했다. 그녀는 내게 괴물인 동시에 여전히 천사이기도 했다. 한참을 머뭇거리는 사이 그녀가 포도주잔을 들고 주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미처 칼을 치우지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녀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칼을 든 손이 덜덜 떨렸다. 우리는 미동도 없이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서늘한 어둠 속에서 숨이 막힐 듯한 시간이 느리게 지나갔다. 이윽고 그녀는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찔러요. 평생 사람고기에 굶주려 살다가 언젠가는 온 세상에 괴물로 까발려질텐데. 차라리 지금 당신 손에 죽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이마 위로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나는 주먹으로 땀을 훔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여전히 고요한 얼굴로 내 앞에 서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칼을 내려놓고 그녀를 지나쳐서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녀가 따라 들어왔다.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우린 아무래도 안되겠죠?”
“맞아. 처음부터 잘못되어 있었어.”
“당신의 심장이 먹고... 싶어요. 잠이 안 올 정도로.”
“그럼... 먹어.”
그녀는 진심이냐고 묻는 듯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침을 삼켰다. 그녀는 결국 어쩔 수 없는 식인종이었다. 억지로 감추려 해도 그녀의 얼굴에는 기쁜 빛이 감돌았다. 그녀는 짐짓 태연하게 마취제를 넣었다.
“잠시만 기다려요. 곧 잠이 들 거예요.”
“하나만 물어볼게. 나 사랑하지?”
“난 사랑이 뭔지 몰라요. 하지만 이상하게 미안한 마음이 드네요. 이런 적 없었는데.”
“그걸로 됐어. 그럼... 안녕. 난 널 사랑해. 네가 뭐든.”
그 말과 함께 나는 정신을 잃었다. 그녀는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끝까지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눈을 떴다. 강렬한 조명에 눈이 부셨다. 살아있었다. 이상했다. 혹시 심장이 아니라 다른 장기만 먹고 살려둔 걸까? 잠시 후 주위가 선명해졌다. 병원이었다. 나만큼 뚱뚱한 간호사가 다가와서 무슨 말인가를 지껄였다. 나는 넋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진공상태가 되어버린 머릿속을 헤맸다. 상황이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의사에 이어 형사가 들어와서 역시 알 수 없는 질문들을 했다. 도무지 사람들의 말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하긴 그런 경험을 하고도 제정신인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멍하니 며칠을 보냈다. 그 사이 기자들과 가족들이 다녀갔다. 우는 사람도 있었고, 측은하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이 나를 어떻게 보든 상관없었다. 나는 그녀가 그리웠다. 그녀와 사랑을 나누던 순간들을 잊을 수 없었다. 갈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도저히 욕구를 참지 못해서 밤에 몰래 수음을 해야 할 정도였다. 나를 잡아먹는 여자를 그리워하다니. 나는 포식자와 사랑에 빠져버린 미친 초식동물이었다.
한 달이 지나자 아무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 편이 더 좋았다. 나는 간호사에게 부탁해서 구한 전화기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리 머릿속이 텅 비었어도 그녀가 특별히 내게만 알려준다고 했던 전화번호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한참 신호가 간 후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야, 어떻게 지내?”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걱정하지마. 나 혼자야. 아무한테도 네 얘기 안 했어.”
“고마워요.”
“왜 날 그냥 보내준 거야?”
“사랑한다는 말 들으니까 식욕이 없어져서요.”
“보고 싶어.”
“......”
“만나자.”
“나 무섭지 않아요? 다시 만나면 심장을 먹어버릴지도 모르는데.”
뜻밖에 나의 대답은 쉽게 나왔다. 조금도 망설여지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상관없어. 너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볼 수 있으면 돼.”
“싫어요. 당신 보면 먹고 싶을 거고, 먹고 나면 기분이 나쁠 것 같아요.”
“괜찮다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너라도 기쁘게 해주고 죽고 싶어. 나처럼 맛있는 사람 드물다며?”
“당신은 참... 이상해요.”
“만날 거지?”
“응.”

이틀 후 나는 몰래 병원을 빠져나왔다. 약속장소는 근처에 있는 공원이었다. 혹시나 그녀가 나를 믿지 못하고 나오지 않을까봐 불안했다. 약속시간 30분이 지나도록 그녀는 오지 않았다. 나는 마른 입술을 적시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1시간이 지났을 무렵 택시 한 대가 공원 입구에 멈춰섰다. 잠시 후 선글라스를 끼고 모자를 쓴 그녀가 택시에서 내렸다.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람 속에 희미하게 그녀의 체취가 실려오는 듯 했다. 멀리 나를 보고 미소짓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아니 못 본 사이 더 성숙한 여인이 된 것 같았다. 나는 설레는 마음을 다독이며 기다렸다. 그녀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미친 사랑에 달뜬 나의 심장을 먹어치울 아름다운 식인소녀가...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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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ominique 10.04.12 21:52 댓글 수정 삭제
    구성은 나름대로 짜임새 있지만, 소재나 흐름이 너무 뻔하다는게 아쉽군요. 자칫 잘못하면 3류 카니발리즘 포르노 소설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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