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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마녀엄마

2012.02.08 15:4902.08

                                                마녀엄마

  “흰머리?”
  진한 갈색의 탁자 위에 굵고 건강한 흰 머리카락 하나가 윤기를 내며 놓여있었다.
  인호는 방금 꽁지머리에서 뽑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렇게 노려보고 있으면, 흰 머리카락이 살아날 것처럼.
  “그런 건 새치라고 하는 거야!”
  옆에서 안경을 쓴 채 책을 보고 있던 지영의 목소리에 답답함이 묻어나왔다.
  “그래? 새치하고 흰머리하고 차이점이 뭔데?”
  빤히 쳐다보는 인호의 눈빛에 지영은 가슴 한 쪽 구석부터 서서히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맑고 깨끗한 그 눈빛 속에는 어떤 잡념도 흐르지 않았다. 풍덩하고 빠질 수 있는 깊은 심연. 한 번 빠지면 절대 헤어 나올 수 없는, 아니 빠져나오고 싶지 않은........
“지영! 지영!.......엄마!”
  그제야 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아들 인호를 바라보았다. 이 아이가 태어난 지 이십 구 일째. 인간의 나이로 치면 스물아홉 살의 청년으로, 그 나이에 맞는 젊음이 느껴졌다. 지영도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서른 한 살의 인간 나이가 오히려 조금은 과한 듯했다. 실제로는 백스물두 살인 그녀는 마녀가 되면서 노화가 늦춰졌고, 현대 의료기술이 더해지자 더욱 젊어졌다.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이 둘 사이에 ‘엄마’라는 호칭은 이상한 것이었다.
  “엄마라고 하지 말라고 했지?”
  지영은 냉정했다.
  “그럼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지 뭐라고 불러?”
  “그냥 이름 부르라고 했잖아!”
  매서워지는 지영의 눈매에 인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장난이야. 지영, 지영! 됐지? 그러니까 새치하고 흰머리하고 다른 점이 뭔지 말해줘.”
  “너처럼 젊은 사람한테 나는 머리는 새치라고 하고, 나이가 들어 머리가 하얗게 세면 흰머리라고 하는 거야.”
  “아, 그럼 새치가 나면 아직 살날이 많은 거고, 흰머리가 나면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은 거네?”
  지영은 장난스럽게 받아들이는 인호의 태도에 한숨을 쉬며 보고 있던 두꺼운 마법 책을 탁 닫았다. 몸은 성인이었지만, 인호는 아직 어린애 같았다. 지영이 아무리 교육을 열심히 시켜도 이십 구 년간의 경험에서 오는 교육까지 모두 다 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지금처럼 장난과 순수한 호기심 사이의 경계에서도 인호는 항상 엉뚱한 시각으로 지영을 당황스럽게 했다.
  손을 내젓자 책이 저절로 휙 하고 책꽂이에 날아가 꽂혔다. 다시 손을 내젓자 인호의 앞에 있던 새치가 붕 떠올랐다. 인호는 가볍고 날랜 동작으로 탁자에 뛰어 올라 머리카락을 향해 몸을 날렸다. 마치 고양이 같은 몸놀림이었다. 하지만 머리카락은 공중에서 사라져 버렸다.
  “어, 뭐야? 좀 더 보려고 했는데!”
  안타까워하는 인호를 보며 지영은 팔짱을 끼고 여느 엄마들처럼 엄하게 말했다.
  “기초마법입문서는 다 읽었어? 낼 사바트에 참석해야 한다고 했지? 거기에서 여러 마녀들이 질문을 하고 내 능력을 보고 싶어 할 텐데.......”
  길어지는 지영의 잔소리에 인호는 혀를 길게 빼고 자신의 목을 조르며 장난스럽게 죽어가는 표정을 지었다. 인호를 흘끗 째려본 지영은 주방으로 들어갔다. 물론 잔소리를 쉬지 않은 채.
  주방에 놓여있는 요리책을 펼쳤다. 몇 장 넘기고는 마음에 드는 음식이 나오자 주문을 외우고 손가락을 부딪쳐 탁탁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식탁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프랑스 코스 요리가 차려졌다. 스프와 신선한 과일 샐러드. 잘 구워진 연한 스테이크까지. 음식을 보호하듯 반원을 그리자 투명한 막이 생기며 음식에서 나는 김이 밖으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세상과는 차단된 듯 안에서 흩어졌다.
  “점심 먹고, 엄마가 준 책마저 읽어. 그래야 낼 가서,”
  그 때, 방 한쪽에 드리워진 커튼 쪽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인호의 표정이 급히 밝아졌다.
  “엄, 아니 지영! 사무실에 누가 왔나봐!”
  커튼 뒤는 지영이 다니는 회사의 사무실이었다. 사실 사무실은 시내에 있었고, 그녀의 집은 한 시간정도 차를 타고 와야 하는 한적한 시골의 전원주택이었다. 마법을 써서 사무실과 집을 바로 옆방처럼 옮겨 다닐 수 있도록 연결해 놓은 것이다. 하지만 사무실에서 이쪽으로는 외부인이 넘어 올 수 없을 뿐더러, 일반인이 보기에 커튼 뒤편은 그저 탕비실 정도로 보일 뿐이었다.
  그 사무실에 누군가 들어오려 하는 것이다.
  “너, 회사 갔다 와서 보자! 그 때까지 책도 다 읽어 놓고, 마법기출문제까지 다 연습해놓지 않으면 혼날 줄 알아!”
  “에이, 너무해! 그 많은 걸 언제 다해?”
  “왜 못해? 이게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잖아! 죽도록 열심히 하면 못 할게 뭐 있어?”
  “하지만 엄마!!”
  사무실에서 참지 못한 누군가가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지영은 급히 사무실로 들어가기 위해 커튼을 들췄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확답을 받으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인호를 노려봤다. 인호는 꼬리를 바짝 내린 강아지가 깨갱 거리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도 인호는 지영을 사랑해."
  막 몸을 돌렸던 지영은 놀라서 인호를 바라보았다. 아까의 풀 죽은 모습은 금세 사라지고 환하게 웃고 있는 인호가 그녀를 따뜻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녀석은 걸핏하면 저 말을 했다. 지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커튼 뒤로 사라졌다.

  지영은 손에 오렌지주스 잔을 들고 재빨리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무실에 들어온 사람은 회계 팀의 김 과장이었다. 어수룩하고 잔뜩 주눅 든 중년의 김 과장은 지영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뭐죠?”
  재무부 이사로서의 권위가 느껴지는 차갑고 도도한 지영의 목소리. 김 과장의 어깨가 더욱 축 쳐졌다.
  “2시까지 보고를 하라고 하셔서.......”
  자신감 없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지영은 살짝 눈을 찌푸리며 서류를 쳐다봤다. 내가 그랬던가? 사실 지영은 내일 있을 마녀 집회인 사바트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이번 사바트에서 지영은 그 누구도 도전하지 않은 내용을 발표할 계획이었다. 마녀는 주술과 여러 약초를 통해 마법을 부렸다. 하지만 생명을 창조할 수 없었고 또한 창의적인 일을 할 수 없었다. 물론 마녀들은 자가 수정을 통해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할 수 있었지만, 짐승을 만들어 내거나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없었고, 마녀의 머릿속에 없는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도 없었다. 때문에 마녀도 누군가가 죽으면 슬퍼했고, 인간들처럼 공부하고 연구해야 했다.
  그런데 지영은 ‘마녀의 생명 창조 가능성’에 대해 이번에 발표를 하려는 것이다. 그 증거로 아니 증인인가? 그 증인이 바로 인호였다. 임신이 아닌 주술과 여러 약초 그리고 실수로 빠져 죽은 고양이 엘키에 의해서 태어난 아이. 모든 것이 실패라고 포기했던 그 순간 엘키의 뜻하지 않던 죽음이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죽은 엘키를 떠올리자 지영을 마녀로 만들어준 어머니 마녀 소니아가 생각났다. 당시 소니아는 유럽의 가혹했던 마녀 사냥에서 조차 살아남은 삼백 살이 넘은 백인 마녀였다. 그녀는 고양이 엘키를 데리고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동양의 작은 나라 조선에 처음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지금의 지영 당시에는 정옥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여인을 구하게 된다.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고 살 희망을 빼앗겨버린 정옥에게 소니아는 마녀라는 새로운 세계를 안내한다.
  당시 지영은 정옥이라는 이름으로 근대문물을 접한 신여성이기는 했어도 마법은 그녀에게 새로운 아니 마치 귀신들린 무당의 세계처럼 무섭고 괴이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세계에 대해 알아 갈수록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능력과 경이롭고 신비하기까지 한 결과물들이 지영에게 새로운 삶을 주었다. 특히 여성으로서 마녀의 세계는 꿈과 기회가 있는 신세계였다.
  마녀 세계로서 당당한 일원으로 인정받고 지위를 얻는다는 것! 그것은 새로운 삶을 사는 지영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가 되어 버렸다. 그렇기에 이번 사바트에서의 발표는 중요했다. 무사히 발표한다면, 이번 논문은 마녀 세계에서 획기적인 연구임이 분명했고 마녀로서 지영의 위치가 비스카운티스 단계에서 카운티스나 아니면 마퀴스까지도 가능했다. 마퀴스 작위를 받는다면 마법으로 아이들을 홀려 영어를 가르치는 그 얄미운 마녀 선영이가 더 이상 지영을 향해 무시하고 약 올리는 표정을 짓지는 못할 것이다.
  “흠흠.”
  서류에 푹 빠져 있는 상사 지영의 모습에 불안해진 김 과장이 헛기침을 했다. 사내에서는 얼음귀신이라고 소문난 자신의 상사가 이번에 또 어떤 잘못을 잡아낼 지 내심 불안했던 것이다. 지영을 상사로 둔 직원들은 조금만 잘못해도 냉혹하게 대가를 치러야했다. 소리를 지르거나 혼을 내지는 않았지만,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사람을 압도하고는 근무 평가서에 곧바로 반영시켰다. 누군가 본 바로는 상사의 첫 번째 책상 서랍에는 직원들의 신상명세서와 근무 평가서가 항상 비치되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직원들은 새파랗게 젊은 재무부장인 지영을 두려워했고, 인사조차 꺼려했다.
  “어떻게, 서류는 맘에 드십니까?”
  김 과장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나름 아부를 하려고 억지웃음을 지어보였다. 지영은 깜짝 놀란 것처럼 고개를 들어 김 과장을 쳐다보았다. 지영의 표정에서 놀람이 냉혹한 얼음귀신의 눈빛으로 서서히 굳어져 갔다. 김 과장은 안색이 창백해지고 훌러덩 벗겨진 이마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비품 관련 각 부서 및 팀별 총계가 다르잖아요. 요즘 같은 전산 시대에 이런 간단한 계산이 틀린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김경철 과장님?”
  “저, 그게, 죄, 죄송합니다.”
  김 과장은 고개를 푹 숙여 자신의 무서우면서도, 수십 개의 부서와 팀들의 비품비용을 머릿속으로 계산해낸 뛰어난 여상사에게 사죄를 올렸다. 가만히 서 있는 김 과장의 두 다리가 바들바들 떨려왔다.
  “전체 항목에 대해서 모두 다시 검산하고, 결과는 퇴근 전까지 올리세요. 나가봐요.”
  상체를 든 김 과장은 지영이 던진 서류철을 집어 퉁퉁한 배가 흔들릴 정도로 부리나케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지영은 그 모습을 못마땅한 듯 바라보았다. 어리석은 인간들이란! 특히 저 남자라는 족속들은 능력도 없으면서 폭력으로 얻어진 지위를 이용해 세상에 전면으로 나서고 있었는데, 그것은 이 지구와 우주 전체에 대한 피해였고 불행이었다.
  남자! 인호는 생물학적으로 남자였다. 처음 아이 울음소리를 듣고 지영은 연구가 성공했다는 걸 알고 날아갈 듯이 기뻤다. 실제로 바닥에서 일 미터 정도 붕 떠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사내아이라는 걸 안 순간, 지영의 기쁨이 사그라졌다. 이왕이면 여자아이였다면, 뛰어난 감수성과 포용력을 가진 아름다운 여자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을 텐데. 아무래도 엘키가 수놈이었기 때문에 남자아이가 된 것 같았다.
  뭐, 그래도 연구는 성공이라는 의미였기 때문에 지영은 가슴이 벅차서 아이를 안아 올렸다. 다음에는 여자 아이를 만들겠다고 다짐하면서.......


  오전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가고 어느새 오후가 되었다. 회사에서 충남 당진에 새로이 공장부지 매입을 추진하면서, 대지 평가와 매입절차에 따른 자금과 서류들을 준비하느라 재무부 전체가 정신이 없었다. 숫자를 맞추는 회계 영역은 마법으로 계산하고 서류를 완성할 수 있었지만, 인간을 상대하는 일은 마녀인 그녀로서도 한계가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기억을 조작하고 마음을 부릴 수 없었기 때문에 지영도 인간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했던 것이다. 처음에 회계팀에 지원했던 이유는 마법으로 쉽게 업무처리를 할 수 있어서였는데, 그녀의 뛰어난 업무처리 능력과 승부근성이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다.
  잠시 밖이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곧 조용해졌기 때문에 지영은 별거 아닌 걸로 여겼다. 잠시 후, 똑똑 소리가 들렸고 문이 벌컥 열렸다. 누구도 지영의 방문을 그렇게 연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인상을 쓰며 고개를 들었다.
  문 앞에는 인호가 귀여운 중절모를 쓰고 붉은 장미 한 다발을 든 채 웃으며 서 있었다.
  ‘세상에!’
  지영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당황한 지영의 모습에 인호는 더 환하게 웃었다. 인간들의 차편을 이용해 사무실에 오는 것이 피곤했는지 인호는 평소와 달리 약간은 어른스럽고 멋진 남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영은 기뻐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인호의 뒤편에 보이는 직원들이 목석같은 자신들의 여상사에게 이런 멋진 남자가 찾아왔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특히 김 과장은 자신의 눈을 연신 문지르며 지영과 인호를 번갈아가면서 보고 있었다.
  “이 꽃을 보니까 자꾸 지영이 보고 싶어서.”
  인호는 반은 수줍게 반은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꽃다발을 건넸다. 지영은 멍하니 꽃을 받아 들었다. 인호는 지영을 그 큰 품에 살포시 안고는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지영이 너무 바쁜 것 같아서 내가 놀아주려고 왔어.”
  다정한 인호의 모습에 사무실 밖의 여직원들이 꺄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정신이 번쩍 든 지영은 서둘러 인호를 안으로 끌어당기고 문을 닫았다.
  “너 도대체 제정신이야?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밖에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지영은 작게 웅얼거리듯 말했다.
  “어디긴? 지영의 직장이지. 옛날부터 지영이 일하는 곳을 보고 싶었거든.”
  만약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인호의 사무실 출입은 철저히 금지 당했다. 바로 커튼하나만 올리면 볼 수 있는 사무실이었지만, 인호는 이 사무실에 손가락하나 내밀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해맑게 웃는 인호의 모습에 지영은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인호를 잡아끌어 커튼 뒤 집으로 들어갔다. 소리라도 지르지 않으면 폭발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집으로 들어간 순간, 마음껏 인호를 혼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달리 지영은 온통 어질러진 집을 보고 까무러칠 듯 놀랐다.
  책들이 모두 바닥에 쏟아져 있었고, 전화기가 코드 채 뽑혀 회백색의 나무 기둥에 초록빛의 가시 잎사귀를 가진 노간주나무분재에 걸쳐 있었다. 한쪽 구석에 놓여있던 이 미터 가까이 되는 캣타워는 모양이 뒤죽박죽 엉망이었고, 고양이들은 자신들의 새로워진 집에 호기심을 보이며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었다. 주방도 엉망이었다. 냉장고 문이 열리고 몇몇 반찬 그릇들이 바닥에 쏟아져 있었고, 그릇과 요리 도구들이 싱크대며 식탁에 널려있었다.
  “내일 사바트를 위해서 실전마법서를 보다가 그만 실수해서. 헤헤헤.”
  인호는 미안했는지 지영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지영은 열기가 확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인호는 아직 실전마법서를 읽을 수 없었다.  실전마법서를 읽기 위해서는 인간들의 언어로 씌어 진 책을 마녀들이 쓰는 언어로 바꾸어야 했는데, 그것을 가르쳐 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인호가 할 수 있는 마법이라고는 보통의 마술사들이 하는 카드 마술이나 모자에서 비둘기를 꺼내는 것 같은 마술 같은 마법이 전부였다.
  생후 일주일이 채 안 되어서 그러니까 인간나이로 장난기가 많은 여섯, 일곱 살쯤 되었을 때도 집을 이렇게 엉망으로 해놓은 적이 없었다. 오늘로써 스물아홉 살이라 할 수 있는 다 큰 녀석이 이런 짓을 저질렀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할리도 없었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결계를 쳐놓았기 때문에 누군가의 침입이 불가능했고, 들어오려면 그녀의 허락이 있어야 했다.
  '이 녀석, 사춘기인가?'
  인호의 거짓말 때문인지 아니면 어질러진 집안 때문인지 화난 지영이 두 손을 위로 확 펼치자 평소와 달리 거센 바람이 일어났다. 옆에서 바라보고 있던 인호가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바람이 집안을 돌며 책도, 전화기도, 고양이 집도 순식간에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마지막으로 오른손을 쭉 뻗자 주방도 깔끔해졌다.
  방을 한번 살펴본 지영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지로 누르고는 시계를 보며 급하게 말했다.
  "너 이따 회사에서 돌아와서 보자!"
  인호의 강한 손이 사무실로 몸을 돌린 지영의 팔을 붙들었다.
  "지영, 오늘은 회사 가지 말고 함께 있자. 같이 하고 싶은 게 있어."
  지영은 그 말을 무시하고 팔을 빼려했지만, 인호는 지영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시간이 별로 없잖아. 그러니까 회사고 사바트고 모두 잊고..."  
  마녀엄마들도 아이를 키우면 여러 가지 면에서 힘이 들었다.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교육까지. 마녀엄마들도 직접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집안을 치우고, 음식을 만드는 일 같은 것은 마법으로 쉽게 처리했다. 오로지 회사일과 아이를 상대하는 일만 신경 쓰면 되었기 때문에 여느 인간 엄마들보다는 훨씬 수월한 편이었고, 자신의 아이들에게 인자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 보여준 인호의 말과 태도는 지영의 평정심을 깨트려버렸다. 더욱이 사바트를 잊어버리고 자신과 놀러나 다니자는 무책임한 말은 지영을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지영의 손이 스윽 하고 올라가더니 인호의 뺨을 후려쳤다. 찰싹 소리가 나며 뺨이 붉게 물들었다. 티끌이 틔어 상처라도 생길까봐 입김조차 닿지 않게 조심했던 인호의 피부에 지영의 손바닥 자국이 난 것이다.
  방금 일어난 일에 지영도 인호도 모두 놀라 한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때 사무실에서 전화벨소리가 들렸고 지영은 애써 인호를 보지도 않은 채 사무실로 돌아왔다. 전화를 받고 일을 처리하고, 그렇게 지영은 방금 있었던 충격은 시간이 지나면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원들이 한창 바쁠 때, 마법으로 싸구려 볼펜을 인호의 환영처럼 보이게 해 사무실을 나가게 만들고, 서류에 잔뜩 파묻혀 오후를 보냈지만 충격의 앙금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허기를 느껴 시계를 보자 저녁 여덟 시였다. 지영은 옷과 가방을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책상에 앉아 졸거나 게임을 하고 전화를 하던 직원들이 일제히 벌떡 일어나 지영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처럼 지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했다. 그 때 지영은 직원들이 예전과 다른 눈빛으로 자신을 본다는 것을 알았다. 뭔가 기대하는 듯 반짝이는 눈빛. 그 동안 한 번도 받은 적 없는 눈빛에 지영은 당황했고 얼굴에 홍조가 피는 것이 느껴졌다. 그 홍조를 본 직원들의 얼굴에 그녀도 결국 사람이었다는 걸 느끼고 감사해하는 미소가 더욱 커졌다. 지영은 마치 자신이 부끄러운 일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이 모든 것이 인호의 방문 탓이라고 생각하면서.


  지영은 주차장에서 차를 끌고 바로 옆 주차타워에 들어갔다. 사람들에게 출퇴근을 보이기 위한 연극이었기 때문에 귀찮아도 거를 수 없었다. 차를 세워놓고 집중해서 주술을 외우자 한순간에 지영은 집 거실에 서 있었다.
  지영은 성큼성큼 걸어 인호의 방문 앞으로 가서 손가락을 튕겼다. 문이 저절로 휙 하고 열리자 화가 난 목소리로 인호를 불렀다.
  “인호! 너 정신이 있는 거야?”
  화가 나서 빽 소리를 질렀던 지영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침대에는 아기 천사처럼 잠든 인호의 모습이 보였다. 옆으로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편안한 표정의 인호를 보자 지영의 분노가 스르르 녹아내렸다. 그래도 혼을 낼 건 내야 한다는 생각에 인호의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엄마.”
  잠을 자면서 아이처럼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지영은 인호를 깨울 수가 없었다.  
  ‘내 아기.’
  인호에 대한 애정이 샘솟았다. 그리고 녀석 같은 자식을 가진 자신이 자랑스러워졌다.
  발꿈치를 들고 조심스럽게 침대에 걸쳐 앉은 지영은 손으로 부드럽게 인호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인호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더니 몸을 똑바로 누웠다. 인호의 머리 군데군데 새치가 보였다. 지영의 눈을 더욱 끈 것은 인호의 얼굴에 난 눈물 자국이었다. 아무래도 또 슬픈 영화나 책을 보고 운 모양이었다. 생명을 탄생시키는 마법의 용액 속에 지영의 피가 들어갔기에 인호는 그녀의 여러 특성들을 지니고 있었다. 녀석은 예전에 정옥이었을 때의 지영처럼 감정이 풍부했다.

  눈물. 그 날도 지영은 아니 정옥은 자신의 얼굴 위로 떨어지는 비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어둔 밤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는 차가웠고 막 아이를 잃고 피를 흘리는 정옥의 아픈 몸을 마비시켜 통증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 통금 시간이었기 때문에 거리에는 도움을 청할 이가 아무도 없었다. 어쩜 그 사람들도 그걸 알고 그 시간에 그녀를 거기에 버렸을지도 모른다.
  “저주받은 년! 파렴치한 도둑년!”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오장육부를 도려내려는 듯 순정은 매섭게 정옥을 바라보았다. 검은 자동차 내부와 더욱 대비되는 흰 피부에 쪽진 머리 그리고 동그란 볼 살과 앙 다물어져 있는 입에서 본처로서의 자존심이 보였고, 그것은 순정을 당당하면서도 거칠게 만들고 있었다.
  자동차 운전사는 백미러를 통해 뒷자리를 흘끗 보고는 못들은 척 자동차 앞 유리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전까지 수술대 위에 있던 다리 아래로 따뜻한 무언가가 줄줄 흘러내리는 걸 느낀 정옥은 정신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우린 사랑했어요.”
  정옥이 자신도 놀라만한 말이 바싹 마른입에서 툭 튀어 나왔다. 순정은 눈이 뒤집어져 아픈 정옥의 머리채를 쥐어흔들며 소리쳤다.
  “사랑? 넌 이걸 사랑이라고 부를지 몰라도 내 눈엔 추잡한 성교처럼 보일 뿐이야.”
  “사랑이에요.”
  지지 않고 우기는 정옥의 말에 순정은 반 미쳐서 자동차가 흔들릴 정도로 마구 날뛰었다.
  “사랑이라고? 그래, 저 모습을 보고도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던? 응? 똑바로 봐!”
  머리채를 잡힌 정옥의 얼굴이 자동차 유리창에 으깨지듯 밀착되었다. 유리창 너머 환하게 불을 밝힌 주점이 보였고, 주점 안에서 한 쌍의 신식 커플이 나오고 있었다. 회색 양복을 입은 한 신사가 흰색 블라우스와 하늘거리는 치마를 입은 신여성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꼭 껴안고 있었다. 그 모습에 정옥은 눈을 동그랗게 떠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다름 아닌, 수철이었다. 저 신여성을 안고 바라보듯 정옥이를 안고 사랑하다고 죽어서도 함께 하자고 했던 그 남자였다.
  “아니야. 아니야.”
  부정하는 정옥의 모습에 순정은 몸을 흔들며 깔깔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는 외진 골목에서 충격에 휩싸인 정옥을 쓰레기 버리듯 던져놓고 떠났다.

  ‘으음.’ 인호가 몸을 뒤척였다. 지영은 지긋이 인호를 바라보다가 방을 나왔다. 인호는 다시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지영이 같은 마녀들에게 희망이었다. 불임은 마녀가 되기 전에 있었던 일인데다가 생명과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에 마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영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마녀들뿐만 아니라 보통의 임신을 못 하는 여자들도 가능할 것이 분명했다. 지영은 어쩌면 세상을 구원한 건지도 몰랐다.

  
  중세시대에 마녀들의 사바트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사람들이 쉽게 오지 않는 숲 속 깊은 곳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마녀들만의 경건한 선서로 시작되었다. 물론 오늘날에는 숲 속 대신 조용한 시골에 위치한 고급 펜션으로 위치가 바뀌었고, 모닥불을 돌며 하던 의식은 강의실 같은 곳에서 프로젝트 빔을 켠 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시작한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차이점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그들만의 집회를 할 수 있다는 거였고, 때문에 스무 명 남짓 소규모로 이루어지던 집회는 백 명 가까이로 커지게 되었다.
  마녀들의 열창이 끝나가고 있을 무렵, 문 밖에서 짙은 고동색의 챙이 넓은 고깔모자와 외투를 걸친 지영은 사바트에 참석하지 않으려는 인호의 팔을 억지로 끌고 있었다.
  “엄마, 아니 지영! 잠깐만 다녀오자. 그러면...후우...저기에 들어가서 지영이 원하는 대로 뭐든지 할게.”
  아까부터 인호는 숨이 차는지 말하다가도 숨을 크게 내쉬었다. 마치 기력을 다한 노인처럼 보였지만, 지영은 단순히 긴장해서 그러리라 생각했다. 백 년 이상을 산 자신도 이렇게 긴장되는데, 불과 한 달밖에 안 산 아이이니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하지만 큰일일수록 강하고 흔들림이 없어야 했기에 지영은 엄하게 말했다.
  “발표가 곧 시작될 텐데, 어디를 갔다 온다는 거야?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마법을 부리면 되잖아. 그럼, 후....지구 반대편에도 뿅뿅 하며 갈 수 있잖아. 응? 제발!”
  인호는 고집을 피우며 막무가내로 버티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힘이 약했기에 지영이 가벼운 마법으로 집회장으로 이끌 수 있었다. 하지만 마법을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당당하고 멋진 발걸음으로 인호가 직접 들어가 주기를 바랐다. 동물이나 물체가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 결국 지영은 포기를 하고 인호가 가고 싶어 하는 곳을 물어보았다.
  지영의 물음에 인호의 표정이 환해졌다.
  “거기가 어디냐면, 지영의 사무실 옆 건물 일층에 있는 사진,”
  “어머, 지영 마녀님. 여기서 머하세요? 이제 고 마녀 하케가 시작 되 거에요.”
  친절한 미소를 짓고 있는 흑인 마녀 켈리가 지영과 똑같은 옷을 입고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수련을 위해 미국에서 온 마녀로 한국에 와서 원어민 강사를 하고 있었다. 온지 얼마 안 되었지만 상냥한 말투와 친근한 태도에 지영은 켈리와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방금 도착한 듯 켈리에게서는 하늘을 날기 위해 바르는 연고 냄새가 은근히 베어나고 있었다. 켈리의 등장에 인호는 결국 어린아이 같이 조르던 행동을 멈추고 조금은 슬픈 눈으로 지영을 바라보았다. 지영이 눈에 살짝 힘을 주자, 인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 사람은 누구?”
  켈리는 호기심을 드러내며 인호를 바라보았다. 그 때 심술궂은 마녀 선영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설마, 이 남자의 지방으로 연고와 독약을 만들려는 건 아니겠지?”
  어느새 그들 곁에 서 있던 선영은 얄밉게 까르르 웃었다. 웃음소리에 맞춰 모자 끝에 달아놓은 어울리지 않는 핑크색 리본이 흔들렸다. 그녀는 중세시대에 사바트에서 신참마녀가 갓난아이를 죽여 그 지방으로 마법의 연고와 독약을 만들었다고 민간에 잘못 알려진 속설을 이야기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섬뜩한 말에 놀란 지영은 걱정스럽게 인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인호는 특유의 잡념 없는 눈빛으로 선영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엄마와 대립각을 세우는 선영의 존재가 그의 호기심을 끈 것 같았다.  
  선영은 처음에 인호의 눈빛을 보고도 여전히 얄밉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곧 웃음기가 사라지고 마치 빠져들 듯 인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영은 눈치 빠른 선영이 연구 발표도 하기 전에 인호의 존재를 눈치챌까봐 두려워졌다.
  “인호야,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인호의 팔을 낚아채어 집회장으로 끌고 들어갔다. 아까와 달리 인호는 순순히 따랐다. 켈리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도 모른 채, 지영과 인호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뒤에서 멍하니 있던 선영은 한 차례 부르르 몸을 떤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집회장에서 들리는 마녀 협회장의 큰 소리에 그녀도 재빨리 안으로 쏙 들어갔다.

  “마녀의 생명 창조는 수백 년 전부터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아니, 금기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녀들의 넘을 수 없는 한계였기에 스스로 울타리를 치고 넘어가면 안 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 이 자리에서 우리 마녀들도 생명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자 합니다.”
  연단에 서서 또박또박 발표를 하던 지영은 자신감 있는 얼굴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몇몇이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자 옆에 앉은 마녀들이 그녀들을 끌어 앉히면서 아수라장이 되었다. 연단 한 쪽에 자리를 잡고 있던 마녀들의 협회장 발로나비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오백 살이 넘었다고 알려진 협회장은 백발에 허리를 잔뜩 구부린 노인마녀였다. 때문에 앉았을 때와 일어났을 때의 키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 마녀들은 협회장이 일어난 걸 알지 못했다. 협회장이 천천히 앞으로 나와서는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게 큰 소리를 질러서야 마녀들은 앞을 바라보았다.
  “조용! 조용!”
  썰물이 빠져나가듯 장내는 금세 조용해졌다.
  “마녀 소니아 벨리타의 딸 비스카운티스 지영 님은 그 증거를 가져오신 거겠죠? 내 생각에 이 뒤에 있는 청년이 마녀님 연구의 증거인 것 같은데, 맞나요?”
  지영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뒤로 손을 뻗자 장막의 어둠 속에 서 있던 인호가 그 손을 잡더니 앞으로 걸어 나왔다.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힘차게 마녀들의 앞에 서는 모습에 지영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느새 앞머리와 옆머리가 근사하게 흰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발표준비로 긴장해서 인호가 염색을 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한 것이 내심 미안했다.
  젊음과 중후한 멋을 동시에 풍기는 인호의 묘한 모습에 많은 마녀들이 자지러지듯 숨넘어가는 탄성을 내질렀다.
  “안녕하십니다. 제 옆에 있는 지영 마녀님의 마법으로 태어난 창조물 인호입니다.”
  인호는 당당하고 멋진 모습으로 마녀들을 향해 인사했다. 그러나 단상을 꽉 진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다는 걸 눈치 챈 마녀는 아무도 없었다.
  생명의 실체를 확인한 마녀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을 든 채 벌떡 일어나 질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대부분 어떤 마법과 약초를 사용했는지. 그리고 그 약초는 어디서 구했는지 등등이었다.
  모두의 찬탄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지영은 자신 있게 대답해 나갔다. 물론 질투에 빠져서 손수건을 물어뜯고 있는 선영도 빠지지 않고 챙겨보았다.

  마녀들의 발표가 무사히 끝나고 이별을 아쉬워하는 연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단연 오늘의 주인공은 지영이었다. 연회장에서도 지영은 많은 마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 때 인호가 조용히 마녀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시간이 별로 없어, 지영. 우리 그만 가자.”
  마녀들은 중저음의 듣기 좋은 인호의 목소리에 감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마녀들을 보고 있자니 지영은 떠나기가 싫었다. 집회장 앞에서 사무실 근처 어딘가로 가자고 했던 인호의 말이 생각난 지영은 적당한 핑계거리를 찾았다.
  “사무실 근처 가게들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까 거기는 사바트가 모두 끝나면 가자.”
  한 마녀가 지영의 어깨를 두드리며 또 질문을 해대기 시작했고, 지영의 머릿속에서 인호의 존재는 잊혀졌다.
  인호는 벽을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연회장 구석으로 걸어갔다. 머리는 더 하얗게 변해 있었고 세상이 빙빙 돌듯 어지럽기까지 했다. 그 때 협회장 발로나비쉬가 인호 곁으로 스르륵 다가왔다.
  “아가야, 괜찮니?”
  늙은 마녀의 인자한 미소에 인호도 미소로 화답하려고 했지만, 숨이 차고 입꼬리가 바르르 떨려오기만 했다.
  “시간이 별로 없는데...허억...엄, 아니 지영은 그걸 몰라요.”
  “그래, 시간이 별로 없구나. 내 눈에도 다 보이는 걸 왜 너의 어머니는 그걸 모르는 걸까?”
  모든 것을 아는 듯 말하는 늙은 마녀의 말에 인호는 눈가가 촉촉해졌다. 늙은 백발의 마녀는 품에서 작은 은색 통을 꺼내 인호에게 주었다.
  “이걸 몸에 바르면 하늘을 날 수 있단다. 그러면 네가 원하는 곳 어디든지 갈 수 있지. 가서 네 남은 시간을 맘껏 즐기려무나.”
  발로나비쉬는 인호에게 작은 통을 쥐어주고 왔을 때처럼 스르르 가버렸다.
  인호는 통증이 느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서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자신의 손에 있는 연고와 멀리서 즐겁게 웃고 있는 지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지영은 헐레벌떡 집으로 돌아왔다. 연회가 모두 끝나고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인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법을 써서 집에 돌아왔을 때 집안은 어둡고 고요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인호의 방문을 열자, 넓은 창으로 지고 있는 석양의 붉은 노을이 방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조금은 높은 창턱에 앉아 밖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던 검은 실루엣의 인호가 방문 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지영을 바라보았다.
  “지영...... 참 예쁜 날이지?”
  어둠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인호가 웃고 있다는 것을 지영은 느낄 수 있었다. 인호를 잃어버린 줄 알고 느꼈던 불안감이 사라지고 안도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지영은 화를 내며 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가버리면 어떡해?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또 집에는 어떻게 왔어?”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지영의 모습에 인호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어둠 속에 잠기던 햇살이 인호의 깨끗하고 하얀 치아에서 마지막 빛을 내고 있었다.
  “미안. 해야 할 일이 있었거든. 이걸 지영에게 주고 싶어서.”
  인호는 창턱에서 훌쩍 뛰어 내렸다. 착지를 잘못했는지 인호는 몸을 휘청거렸다.
  “인호야.”
  걱정스런 마음에 지영은 두 손을 뻗었고, 인호는 주저 없이 지영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걱정하지 마. 지영. 모든 것은 잘 될 거야. 저 지는 태양을 보면서 깨달았거든. 나에게도 지영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것을.”
  그제야 지영은 인호의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머리가?”
  “새치가 나면 아직 살날이 많은 거고, 흰머리가 나면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은 거라며. 나 아무래도 흰머리가 난 것 같아.”
  지영은 인호를 급히 침대에 눕혔다. 이미 노인처럼 자신의 육체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인호의 몸은 기력이 없었다. 호흡도 거칠고 숨 쉬는 것도 힘들어 했다.
설마! 인호가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 오늘로서 한 달, 정확히 삼십일일 밖에 살지 않은 아이였다. 성장이 남달랐기에 아이의 하루가 인간의 일 년과 갔기는 했어도 한창 젊은 나이였다. 사바트가 끝나면 아이의 성장을 늦추는 약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죽음이 다가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왜일까? 약이 잘못된 걸까? 혹시 누가 마법이라도 걸었나? 아님...엘키 때문에?'
  지영은 엘키의 나이를 떠올려보았다. 마지막 나이는 대략 스물다섯 살 정도 되었다. 아홉 개의 목숨을 가진 마녀의 고양이들은 마녀의 마력과 보살핌에 따라 한 번의 생명마다 십오 년도 삼십년도 오십년도 살 수 있었다. 그동안 엘키는 여러 번 죽었다 살아났다. 하지만 대부분 사고로 죽었기 때문에 예상수명을 가늠해 볼 수 없었다. 마지막 죽을 때는 여덟 번째 목숨을 사용하는 중이었다. 한마디로 인호는 마법 용액 그릇에 빠져 죽은 엘키의 아홉 번째 목숨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 아홉 번째 목숨이 다한 인호가 죽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인 인호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지영은 믿을 수 없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몰려오던 통증이 온 몸으로 번져 나갔다. 아주 먼 옛날, 그 아이를 잃고 바닥에 버려졌던 때처럼.
  ‘사랑? 내가 이 아이를 사랑했다고?’
  지영은 뇌리를 스치는 깨달음에 크게 놀랐다. 사랑이라는 것은 그 때 그 사람의 품에 다른 신여성이 안겨 있는 것을 보고 떠났다고 생각했다. 바닥에 버려져 차가운 비를 맞으며 그 사람을 보내고 사랑도 떠나보냈다고 생각했다. 정옥의 집안이 독립운동 자금을 댄다고 순사에게 밀고한 게 그 사람이라는 걸 알고 사랑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던 그녀였다.
  인호가 호흡을 몰아쉬며 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차마 버리지 못하고 간직했던 그 사람과의 사진. 검은 리본이 달린 하얀 블라우스에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긴 치마를 입고 한 손에는 양산을 든 채 자신이 사랑하고 또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남자 곁에서 지영이 수줍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눈빛은 순수했고 사랑으로 뜨거웠다. 평소 인호가 지영을 바라볼 때의 눈빛처럼.
  하지만 지영의 옆에 있던 수철의 얼굴은 달라져 있었다. 인호가 자신의 사진에서 얼굴만 오려 그 위에 붙였던 것이다. 마치 지영과 인호가 함께 사진을 찍은 것처럼. 사진 속 두 사람은 열정이 가득한 눈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서로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사랑에 들뜬 연인들처럼, 애정과 믿음이 두 사람과 함께 하고 있었다.
  “멋있지? 헉헉. 같이 가서, 헉헉, 찍고 싶었는데. 허억. 이런 사진 말고 근사하게,”
  "인호야, 잠깐만 기다려. 엄마가 금방 약 만들어서 올게. 그러니까,"
  지영은 손가락사이로 빠져 나가는 한줌의 모래 같은 인호의 마지막 숨을 붙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무엇이든지 해야 했다. 내 아이가 죽어 가는데, 어떤 엄마가 포기하겠는가? 어머니 마녀 소니아가 살아계셨다면 물어볼 수 있었을 텐데. 소니아는 오랜 삶에 지쳐 모든 마법과 지식을 지영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눈을 감았다.
  연구실로 달려가 쓸 만한 약초가 있는지 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인호가 지영의 팔을 붙잡았다. 미약한 힘이지만, 지영이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인호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어 지영은 차마 뿌리치지 못했다.
  "지영...허허...사랑해!"
  지영은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인호에게 늘 들으면서도 무심하게 흘려보냈던 말이었다. 자신은 한 번도 해주지 못한........
  "행복해야해. 엄마."
  그 말을 끝으로 인호는 눈을 감았다. 엄마의 행복을 빌어주는 말이 마지막 숨결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인호야, 안 돼! 눈 떠봐! 엄마 좀 바라봐!"
  지영은 차차 온기가 식어가는 인호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사바트의 발표를 위해 인호를 닦달하기만 한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쌓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마지막으로 사랑한다고 말해 주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인호야, 사랑해! 엄마는 인호를 정말 사랑해."
   사진이 툭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인호가 죽어가면서도 지영에게 주려했던 사진. 지영은 사진을 쥔 채 인호를 끌어안고 오열했다. 인호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한 미안함과 죽어가면서도 지영에게 사랑을 주고 떠난 고마움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눈을 뜨자 햇살이 방안에 가득했다. 너무 밝은 빛에 지영은 눈을 감았다. 인호의 웃는 얼굴이 스쳐지나갔고, 지영은 벌떡 일어났다.
  "인호야."
  침대 주변을 살펴보고 이불을 들춰보았지만 인호는 보이지 않았다. 방 밖으로 달려가 집안 구석구석을 찾아보았지만 인호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그 동안 있었던 일은 모두 꿈인 것처럼 인호는 사라져버렸다.
  다시 방으로 들어온 지영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발밑에 걸리는 게 있어 집어 보니, 인호가 준 사진이었다.
  "인호야."
  그랬다. 인호는 꿈이 아니었다. 이렇게 순수하고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지영은 마치 인호인 것처럼 사진을 꼭 껴안았다.
  "응애."
  갑자기 들려오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지영은 화들짝 놀랐다.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힘찬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침대 발치 쪽 이불을 들추자 갓난아이가 바동거리며 울고 있었다.
  '인호다.'
  한 달 전, 인호를 처음 보았을 때 그 모습 그대로의 아이가 있었다. 지영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아이가 배가 고픈지 울음을 터트렸고, 지영은 아이를 안아 올렸다.
  "아가야."
  말을 알아들었는지 아이가 방긋 웃었다. 그 맑은 눈 속에 햇살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제야 지영은 어제 황혼 속에서 인호가 했던 말이 이해되었다.
  '걱정하지 마. 지영. 모든 것은 잘 될 거야. 저 지는 태양을 보면서 깨달았거든. 나에게도 지영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것을.'
  인호는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인가, 자신이 다시 태어날 거라는 걸?
  엘키는 여덟 번째 생명을 쓰고 있었다. 때문에 인호는 고양이의 아홉 번째 생명을 받아 태어난 아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의 현실은 엘키의 여덟 번째 생명으로 인호가 태어나고, 이 아이가 아홉 번째 목숨을 받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영은 마지막 기회를 주신 신에게 감사해하며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꼼지락거리는 아이의 조그마한 몸에서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마치 인호가 자신을 안아줄 때의 느낌이었다.
  "인호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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