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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뱀파이어] 침입

2006.03.31 11:57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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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입
      Der Tod und Das Madc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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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의 일에 대해 적기 전에 미리 일러두어야 할 것이 있다.
당시의 나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더 정확한 표현이 될지 모르겠
지만- 분노로 인해 이성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그 날 겪은 일에 대해 언급할 내용들이 비정상적으로 보이더라도
나 자신에게는 모두 현실로 느껴졌던 일이라는 점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이렇게까지 그 날 벌어진 일에 대해 적으려하는 것은
지금 내가 내린 결론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이고 그렇기 때문
에 최대한 가감 없이 적으려 한다.

사실상의 이야기는 그 날 오후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오전부터
이야기해야 내 상황이 설명될 것이다. 시계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 이불 밖으로 손을 뻗자 여느 때처럼 도망가는 쥐들의
분주한 소리를 들으며 -아침 식사 같은 여유로운 사치 없이-
넥타이를 매고 선반에 올려놓았던 구두를 내려 신고 방을 나섰다.
가판대에서 신문 한 장을 사서 헤드라인을 읽으며 걸어갈 때만
해도 마음은 밝은 날씨 속에 가벼웠다. 후디니 매거진...나의 첫
직장에 도착하여 사무실 문을 잡아당길 때만 해도 기분은 편안
했고 모든 일은 정상이었다.
문이 잠겨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두어 번 더 손잡이를 흔들어
보았을 때에야 나는 문 앞에 조그맣게 붙어있는 메모지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짤막하게 적혀있는 내용을 본 다음 순간 계단을
날듯이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기억하고 있다. 사정상 발행인 워스라이트씨의 집에서 면접
을 보았기 때문에 그 주소를 알고 있었다.
옆집 사람이 얼굴을 내밀고 술이 덜 깬 목소리로 그가 이사 갔다
는 말만 하고는 문을 닫았다. 나는 다시 워스라이트의 집 대문을
두들겼다. 어제만 해도, 누구도 나에게 부도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오늘 워스라이트씨가 집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나의 격노에 응답은 없었고 나는 허무한 발걸음을 떼었다.
취직을 위해 일부러 뉴버리포트에서 이곳 아캄까지 와서 면접을
보고, 급하게 방을 구하느라 쥐가 가득한 허름한 다락방을 얻었
어도 나는 일자리를 얻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 모든 악조건을
감내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일주일 만에 실직자가 되어 한낮
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점심시간의 음식점 옆을 가볍게 지나쳤다. 식욕은 중요하게 느껴
지지 않았다. 미스캐토닉 대로를 지나, 샐턴스톨 거리도 걷고,
부둣가를 터벅거렸다. 발길 닿는 대로, 아무 생각도 없이 무기력
한 걸음을 계속해서 옮겨갔다.
이스트이튼 3번가에 발길이 멈출 무렵에는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일부러 창문을 볼 생각으로 고개를 든 것은 아니었다. 하늘을
보고 싶었던 것인지 무의식적으로 올려본 것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창문이 시선에 들어왔다는 것을 인식할 무렵 나는 응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유리 너머에 어떤 장식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대리석
으로 만든 것 같은 하얀 색채의 조형물에, 얼굴 윤곽과 눈과 코와
입이 있다는 것을 차차 깨닫기 시작하면서 나는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전시회의 그림 앞에 멈추어 선 감상자처럼, 인적 없는
거리의 어느 2층 창문을 올려보며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 채
나는 석양이 지나가고 난 어두운 그늘에 서 있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로는 내가 그 집에 들어간 이유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저택의 철문이 너무도 쉽게 열렸기 때문
이라고 변명하고 싶지만 그것으로는 평소의 상식과 신조를 어긋난
대담하면서 파렴치한 행동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
나는 분명히 보았다. 더 정확히 말하겠다. 창문에 비친 소녀의
창백한 얼굴 옆에 천천히 올라오는 조그맣고 새하얀 손을 보았다.
나의 눈은 그 손끝이 나를 향해 움직이고 있음을, 나를 부르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 손의 자그마한 움직임은 내 마음에 세이렌
의 노래처럼 울렸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집에 들어갈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위에도 적었지만 녹슨 철문은 조심스럽게 미는 손끝에 너무도
쉽게 반 정도가 열렸다. 문의 아래쪽이 땅에 긁히는 소음을 듣고
얼굴을 찡그리며 조심스럽게 발을 밀어 넣었을 때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정원이었다. 밖에서 보았을 때의 을씨년스러운 풍경과는
사뭇 다르게 깔끔히 공을 들여 정돈된 정원수와 매끈한 돌길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창가의 소녀는 나를
내려보다가 정원을 반쯤 지났을 때 모습을 감추었다.
갑자기 사라진 소녀의 모습에 나는 초조해졌다. 마치 자신의 정원
에 들어온 침입자에게 흥미를 잃었다는 듯 멀어지려 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순 조급해진 나의 마음은 정원의 아름다움에
어떤 감흥을 느끼기도 전에 현관으로 달려가도록 만들었다.
현관문 앞에서 어떤 기척을 느낀 듯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햇빛이
떠난 저택 앞 정원 길에는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느낀 기척은 잠재된 의식의 경고였을 지도
모른다. 방금 전까지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정원을 다시 보았을 때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낀 그 잠깐 동안 이성을 회복하고 돌아갈
기회를 얻었지만 문고리를 잡아당기고 있는 나의 손길에 의해
숙고할 시간은 사라졌다.
어두워지는 저녁 하늘 아래를 지나온 나의 눈에 엔트랜스를 채운
불빛은 너무도 환해보였다. 그리고 그 불빛이 전기의 힘을 빌리지
않은, 수십 개의 촛불과 벽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는 거울들을
이용하여 만든 광채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심미안을 가진 자라면 오랜 역사로 유명한 아캄의 유서 깊은 저택
에서 이전 시대의 장식과 조형물들을 감상할 수 있는 소중한 여로
를 경박하게 달리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 밖에서 느끼던
일말의 불안감을 잊고 소녀를 찾아야겠다는 갈망을 되살려 내어,
촛불이 가늘게 떨릴 때마다 더욱 탐욕적으로 변하고 있는 방문객
은 낡고 지저분한 구두 자국을 붉은 카펫 위에 무례하게 남기며
나선형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붉은 카펫은 한쪽 방향으로만 이어져 있었다. 마치 그쪽으로
걷도록 안내를 하는 듯하여 당시의 나는 상당히 반갑게 생각했다.
복도를 가득 채운 불빛에 안개가 서린 듯 이지러져 보이는 문을
향해 걸으며 무심히 움직인 손등에 스친 촛불에서 어떤 감촉도
느껴지지 않는 것에 대해 나의 어리석은 마음은 경고하지 않았다.
방 문 앞에서 나의 손은 급한 마음을 충실히 표현했다. 가까이
에서 확인하고 싶었다. 나의 시선에서 숨어버린 작은 소녀를
찾아내야 한다. 내가 느끼고 있던 감정이 내 아버지와 그 아버지
가 물려준, 종족 번식을 위한 본능에서 파생된 추악한 감정이라는
것을 굳이 부인할 생각은 없다.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에는 너무도
정신이 흐려질 대로 흐려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문을 여는
것뿐이었다.
어느새 커튼을 쳐놓았는지 고풍스러운 장식의 난로 위에 놓인
촛대들로 붉게 밝혀진 방의 중심에서, 긴 흔들의자에 왜소한 몸을
앉힌 소녀는 조용히 방문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소녀에게 다가갔다. 양탄자가 구두 굽에 스치며 작은
소리로 나의 욕망에 대해 속삭였다. 나의 눈은 소녀의 얼굴로
점점 차오르고 있었다.
소녀는 내가 자신의 앞에 멈추어 설 때를 기다리다가 천천히 의자
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녀의, 단정하게
입은 하얀 드레스의 얇은 상의 앞부분이 도드라져 보였다.
핏기 없는 분홍빛 입술을 가늘게 떨고 있는 소녀의 입가에 이윽고
자그마한 미소가 만들어졌다. 자신의 공간에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에게 보내는 작은 환대에 용기를 얻은 나는 더욱 다가섰다.
가느다란 턱 선과 하얀 목, 너무도 고결한 상아빛 조각을 이루는
곡선은 나의 시선을 포로로 하여 자신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도록
명령하고 있었다. 탐욕스러운 손끝에 소녀의 턱에 닿는 순간 나는
먼 나라의 정교하게 세공된 도자기의 촉감을 떠올렸다. 매끈하고
차가우면서 부드러운 피부를 따라 움직인 내 손은 소녀의 단정한
드레스를 정숙하게 완성해주는, 목에 매인 붉은 리본을 천천히
잡아당기고 단추를 끌러 옷깃을 옆으로 펼쳤다.
나의 손길에 옆으로 드러난, 목선과 이어지는 어깨는 가녀리게
떨리고 있었다. 야수는 소녀의 입술을 훔쳤다. 가볍게 떨고 있던
몸은 내가 가냘픈 목에 키스하는 순간 고양이처럼 가늘게 경련
하고는 조용히 손을 뻗어 나의 목 뒤로 가볍게 휘감았다.
아직 여인이 되지 못한 소녀의 하얀 피부 위를 붉게 물들이고
싶다는 욕망을 간신히 추스리며 계속해서 입술로 귀와 볼과 목을
범해갔다. 내 목에 얹은 손을 가볍게 움직이며 간혹 들릴 듯 말
듯한 가는 신음소리만 내는 소녀와 나는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다시 소녀의 입술을 탐하려 할 때 나의 눈이 그 깊은
눈동자를 탐하지 않았다면 그 달콤한 애무는 계속되었을 것이다.
소녀의 붉은 눈동자. 빨갛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깊은, 마치 모든
빛을 빨아들여 그것을 타오르는 열사의 노을로 채색하여 채운 듯
한 그 눈동자를 보는 순간 나의 모든 동작은 멈추었다. 마치 중력
없는 공간에 혼자 버려진 듯 온몸이 허공에 떠오르는 나른한 기분
을 느끼며 그 눈동자에 비추는 광경 속에서 꿈꾸고 있었다.
그 꿈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너무도 힘없이 떨고 있는 나를
달래듯이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고 있는 소녀. 나의 귀에
가까이 댄 입술이 무엇인가 속삭이고 있었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웃으며 소녀 앞에 무릎 꿇었다.
소녀는 내 머리카락 사이에 손을 넣고 머릿결을 부드럽게 쓰다듬
어 주고는 더욱 손을 아래로 내려 목을 더듬었다. 그리고 소녀는
조용히 나의 이마에 키스했다. 점점 내려오는 소녀의 입술을 느낀
나는 머리를 옆으로 젖혀서 어서 그 따뜻한 세례가 목에 닿기를
기다렸다.
탐욕에 자아를 잃은 노예의 목에 닿은 소녀의 아름다운 입술이
그 더러운 살 속에 흐르는 피를 끌어내어 검붉게 맺히게 하고,
추악한 붉은 색이 흘러내려 카펫을 적시는 광경 속에서 나의 얼굴
을 한 노예는 웃고 있었다. 기쁨에 겨운 표정으로 채워진 그의 볼
위를 흐르고 있는 눈물을 보며 나의 정신은 점점 혼미해졌다.

그 날의 이야기가 여기까지로 끝맺음되었다면 현실적이라고 자부
하던 나의 논리는 단순히 기이한 꿈으로 치부하고 그 일에 대해
어떠한 고민도 없이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눈을 떴을 때 내가
보게 된 풍경의 비참함이야말로 진정한 악몽의 시작이었다.
다 헤진 양탄자 위에 웅크리고 있는 나의 몸을 겨우 일으키자,
너무도 낡아서 다 삭아버린 목재 바닥이 구두 밑에서 낮고 음침
하게 읊조렸다.
커튼에 뚫린 여러 개의 구멍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을 조명삼아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그때 문손잡이를 향해 정확히
비추는 한 줄기 빛을 따라 걸음을 옮겼으면 나는 충격의 퍼즐을
완성하는 마지막 조각을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진실
을 원하는 호기심이 나의 방향을 바꾸었고 손을 뻗어 커튼을 옆
으로 젖히도록 종용했다.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에 나는 얼굴을 가리며 주저앉았다.
눈부심을 못 이겨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너무도 환한 빛에 나의
피부가 타들어가서 재로 변하는 환각이 일순간 나의 머리 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정신을 추스리고 달빛이 가득 차오른 방 안으로 고개 돌렸을 때,
나를 맞이하는 것은 촛농이 늘어 붙은, 더 이상 타들어갈 양초가
없는 촛대들과 먼지로 장식된 낡은 난로였다.
그런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호기심은 그것보다 잔혹한
대가를 원했고 악몽의 핵심을 보는 것을 거부하는 나의 유약함을
비웃으며 서서히 눈동자를 움직이게 했다.
마침내 나의 눈은 그 의자로 향했고 확인했다.
오, 나의 잠자는 공주여...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있는 앙상한
백골은 긴 세월 동안 그 모습 그대로 휴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여러 겹의 거미줄로 덮여 있었다. 낡은 드레스와 목에
맨 붉은 리본은 생전에 그 소녀가 어떤 모습이었을지 나에게 환영
처럼 일깨워주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백골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확인했다. 백골의 입가에
묻어있는, 아직도 온기를 잃지 않은 피의 흔적을...나는 손을
뻗어 세월의 풍화에도 여전히 날카로운 그 송곳니를 만져보았다.
날카로운 감촉이 손에 닿을 때 나의 목은 서서히 통각을 되살려
내었다. 극렬한 고통에 목으로 가져간 나의 손은 너덜거리는 살점
의 굴곡에서 두 개의 깊은 구멍을 찾아내었고 그제서야 목에서
흘러내린 생명의 물에 젖은 셔츠의 축축한 질감이 느껴졌다.
참혹한 공포와 함께 이성이 겨우 깨어나고 있을 때, 나의 눈은
보고 있었다. 살점 하나 남지 않은 그 하얀 해골 위로 창백한
상아빛 미소가 그려지고 있는 환각을. 눈동자 속 가득 그 표정을
새긴 채 나는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비명을 지르며 어두운
복도를 달려 나갔다. 황망히 휘저어진 팔에 부딪힌 빈 촛대가
떨어지는 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울릴 때 나의 몸은 계단을 구르고
바닥을 기어 도망가고 있었다. 깨어진 거울의 유리 조각이 가득한
엔트랜스를 지나 이끼가 무성한 돌길과 담쟁이 넝쿨이 뒤엉킨
회색 담장 아래의 길을 기어 나오고 있는 그 모습을 혹여 누군가
보았다면 미치광이의 유쾌한 광란으로 보고 비웃었을 것이다.
정신을 어느 정도 차렸을 때는 이미 이스트이튼 3번가를 거의
빠져나오고 있었다. 잠시 멈춘 나는 손으로 무릎을 짚고 서서
격한 숨을 토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였다. 속삭이는 소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 것은...
너무도 오랜 세월을 혼자 보내온 소녀의 외로움이 담긴 부드러운
속삭임은 나를 다시 부르고 있었고 그것에 이끌리는 나의 정신을
거부한 두 다리는 인적 없는 거리를 더욱 빠르게 달려갔다.

그 날 사건에 대한 내용은 여기까지이다. 이 사실을 기술하는 일
에 대해 망설이고 있었지만 다 적고 난 지금의 기분은 예상보다
훨씬 편안하다.
나의 이 허름한 자취방을 임종의 장소로 쓰게 된 것은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연락할 수 있을 만한 처지가
아니다. 햇빛에 타버린 손을 움켜쥐며 그늘에 숨는 자의 심정을
굳이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이미 내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있고
갈증은 점점 심해지고 있는 상태이다. 나의 방에 더 이상의 쥐가
나타나지 않는다. 피를 뺏긴 동족의 사체가 쌓인 곳을 본능적으로
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태양 아래를 돌아다닐 수 없게 된 저주받은 몸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날 나의 비이성적 행동들과 저지르려던 죄악
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하니 체념도 빨라졌다. 즉, 이 저주에 대한
슬픔이 지금 나에게 이런 결정을 하도록 이끈 것은 아니다. 만약
나 자신에 대한 약간의 연민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인간의 피를
마셔서라도 삶을 유지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 자신을
이렇게 증오스러운 피의 갈망에 휩싸이게 만든 대상을 찾아내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런 행동을 할 필요도
없어졌다.
어제 저녁의 외출로, 태양을 피해 움직일 수 있는 짧은 활동 시간
을 이용하여 확인했다. 이스트이튼 3번가가 지도에만 없는 곳이
아니라, 오래 전 수해로 사라진 동네라는 것을.
새벽안개가 깔린 2번가에 가서 그 너머의, 폐허의 풍경이 너무도
완연하여 접근하여 볼 필요도 없어진 3번가를 보았을 때의 심정에
대해 길게 언급할 생각도 없다.
그 소녀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스스로에게도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분노를 쏟아낼 대상이 없다는 것에 대한 허탈함
인지, 소녀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실망감인지, 그것
도 아니면 이 세상에서 내가 존재하고 있어야 할 의미에 대한
상실감의 또 다른 확인인지는 도저히 알 수 없다. 이제 중요한
문제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모든 비참하고 치욕스러운 삶의 잘못
들로부터 도피할 생각이다.
이 글은 여기까지이다. 이제 나의 결론을 행동으로 옮길 시간이다.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권총이 나의 지난 삶을 위한 마지막 한숨을
대신할 것이다.
낡은 천정 틈새에서 이 글을 발견할, 당신에게는 행운만이 있기를.

                                                                                    fin.

                                                         ninelife18@naver.com
댓글 1
  • No Profile
    배명훈 06.04.01 17:36 댓글 수정 삭제
    이번에도 아주 깔끔한 글이네요. 문장이나 속도감.
    사소한 건 전혀 흠잡을 데가 없어서 굳이 적어 봅니다만, 제목부터 캐릭터 내면이나 문장 쓰는 방식까지 굉~장히 이국적인 느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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