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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드림스케이프(Dreamscape)

2005.09.03 03:2509.03

드림스케이프(Dreamscape) - 시전자는 육체를 가지고 대상의 꿈 속으로 들어간다.

"드림스케이프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마법이지."

티나는 고개를 가옷했다. 드림스캐이프 주문의 기초와 개념을 만든 이는 발듸문드가 아니었지만 주문을 완성시킨 이는 발듸문드였다.

"발듸문드. 그럼 왜 주문을 완성시켰어요?"

발듸문드는 한 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으로 향했다. 그의 키 두 배쯤 되어보이는 책장은 들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두꺼운 책들이 꽂혀 있었다. 가히 마법사의 책장이라고 할만 했다. 다른 점이라면 비교적 정리가 깨끗한 편이었다. 그는 어려움 없이 책 한권을 뽑아 냈다. 오래되어 광택을 잃은 가죽표지로 둘러 싸여진 두꺼운 책엔 여기저기 종이조각이 삐져 나와 있었다. 발듸문드는 책상에 책을 올려놓고 펼쳤다. 티나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책을 봤다.
문자인지 낙서인지 구분이 안가는 날림체로 짤막한 혹은 긴 문장이 쓰여있었다. 어떤 것은 바르게 직선으로 쓰여있었지만 어떤 것은 대각선으로 아예 거꾸로 쓰인 것도 있었다. 발은 짤막하게 설명했다.

"스승님의 메모장이지."

메모장이라 하기엔 꽤나 컸지만 그의 스승이란 작자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알기에 간신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일곱탑의 마법사들 중에서도 가장 괴팍했으며 말도 안되는 개념을 자주 주장해 마법사 회의를 주문의 향연장으로 만들곤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는 천재였다. 가장 많은 주문을 다룰 줄 알았고 자신의 이름을 단 - 마법사로서 자신의 이름이 달린 주문을 만들어 퍼뜨릴 수 있다는 것은 최고의 영광에 해당한다. - 주문만으로 책 한 권을 써내기도 했다. 그리고 자주 자신이 주장한 말도 안되는 개념을 현실화시기도 했다.
드림스케이프도 그랬다. 타인의 꿈 속으로 그 것도 육체를 가지고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그를 천재라고 말하며 칭송하던 이들도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주문의 개념과 성질을 규명하고 기초적인 주문수식까지 만들어냈다. 그러나 주문은 제자인 발듸문드가 완성시킬 수 있었다. 그도 나이를 피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법사 답지 않게 죽음을 택했다. 그 정도 되는 마법사가 수명을 연장하는 주문 따위를 모를리 없었지만 단지 모든 것을 제자인 발듸문드에게 넘긴다는 유언만을 하고 죽었다. 천재의 허망한 결말이었다.
발듸문드는 옛 기억이 나는지 알아보기 힘든 메모를 죽 훝어보고 있었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스승에게 시달렸기에 메모를 읽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는 몇 장을 훝어보다 바로 책의 마지막 부분으로 넘어갔다. 책의 마지막 몇 장은 의외로 단정하고 알아보기 쉽게 메모가 되어있었다. 우스꽝스럽게 그려진 사람 머리를 가운데에 두고 여러 메모가 되어있었는데 그 것들은 티나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인간의 정신과 육체 그리고 영혼은 서로 별개라는 삼원론 학설에 나도 동의한다. 정신과 육체와 영혼이 하나라면 어떻게 영혼없는 육신이 살아있었을 적의 기억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겠는가?'
'정신은 어디있는가. 가슴에 있다는 멍청이들의 이야기는 생각할 것도 없다. 가장 가능성이 있다면 머리, 즉 두뇌가 아니겠는가.'
'정신은 개개인이 각자 자신의 공간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문제는 그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일반적인 정신에 영향을 끼치는 주문은 두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마음을 움직인다는 신비로움 따위는 없다.  정신적인 것이다. 물리적인 접근방법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계속해서 정신에 대한 탐구와 갖가지 가설 등이 빽빽히 적혀있었다. 다음 장도 마찬가지, 정신과 그로 향하는 길에 대한 정리가 적혀있었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처음의 단정한 메모가 흐트러지고 있었다. 앞의 자유분방한 메모와는 달랐다. 팬을 드는 것이 힘에 부치는 듯 점점 흐려지는 모습이었다.
발듸문드는 책을 덮었다. 그리고 다시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말년에 스승님은 드림스케이프 주문에 대한 연구를 하고 계셨지. 뒤에 정리가 말끔하게 되어있는 건 내가 연구를 계속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야."
"그럼."

티나는 말을 꺼냈지만 함부로 이을 수 없었다. 죽음에 대한 예감은 말로 꺼내기 힘들다. 비록 그 것이 지나간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래 오래 살지 못하실 걸 깨달으신 거지."

그는 책을 책장에 꽂았다. 이번엔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손을 한 번 휘저었다. 티나는 그 광경을 보고 감탄을 터뜨렸다. 그의 스승이 죽음을 택한 이유 중 하나는 발듸문드 또한 천재라는 것이었다. 숙련된 마법사는 염동력 비슷한 힘을 쓸 수 있는데 발듸문드의 경우 그 힘의 사용이 아주 훌륭했다. 그리고 그의 나이는 아직 서른이 안되었다. 천재도 이런 천재가 없을 것이다.
발은 약간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스승님이 원하시는대로 나는 주문을 완성시켰지. 근데 상당히 위험한 주문이 되어버렸어."
"어째서요? 전에 당신이 드림스케이프를 써서 마스터의 꿈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을 때 당신은 멀쩡했잖아요?"
"그랬지. 하지만 그건 마스터 아니 구룬헤프가 마법사였기 때문이야."

티나는 더더욱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녀는 드림스케이프 주문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녀가 속한 학파는 드림스케이프 같은 정신적 주문이 아니라 합성 생물 따위를 연구하는 학파라 정신계열의 주문에 대해선 학파장인 구룬헤프도 잘 모르는 것이 많았다. 결국 발은 어린아이를 상대하는 심정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사람의 꿈 속이라는 건 아주 위험한 곳이야. 무지개를 따다가 먹을 수 있고 두발로 걷는 토끼가 나오는 별천지가 아니야. 꿈 속이라는 곳은 사람의 억눌린 욕망 따위가 아무렇게나 실현되는 곳이야."
"제멋대로라는 건가요?"
"비슷해. 다만 현실의 경험 따위가 뒤섞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예상을 할 수 있어. 가령 목수의 꿈 속이라면 대패나 망치 같은 연장 따위를 많이 볼 수 있지."
"와~~ 그럼 마스터의 꿈 속은 어땠어요?"

갑자기 옆으로 새어나가는 이야기를 붙잡으려 했지만 너무 늦었다. 티나는 말할 수 없다는 발듸문의 대답에 울먹이기까지 하며 보챘고 그런 것에 익숙하지 않는 발듸문드는 결국 티나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구른헤프의 꿈 속은 아주 안정적이었지. 본인이 마법사다 보니까 정신력이 강하고 어느 정도 꿈 속을 다룰 줄 알고 있었고."
"꿈 속을 다룬다구요? 힝. 나는 안되던데. 전에 하늘을 나는 꿈을 꾸는데 타고 있던 빗자루가 제멋대로 날던 걸요?"

발듸문드는 이마를 짚었다. 그녀의 마스터인 구른헤프가 매일 같이 술병을 들고 찾아와 한탄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열 다섯 살짜리 소녀는 마법에 대한 재능과 반비레하는 정신연령을 지니고 있었다. 술이 필요했다. 그는 손을 뻗어 술병을 잡은 뒤 그냥 들이켰다. 후끈한 기운이 머리 끝까지 뻗치고 난 다음에야 그녀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었다.

"꿈을 다루는 건 어느 정도 연습이 필요해. 우리 같은 마법사들은 쉽게 서너달 정도 연습하면 꿈을 다룰 수 있게 돼."
"그럼 저도 될까요?"

마법사는 쉽게 할 수 있다는 말에 갑자기 눈을 반짝이는 티나를 보며 발듸문드는 다시금 술생각이 났다. 이번엔 독한 것이 필요했다. 그는 다시금 손을 뻗어 술병을 잡았다. 그리고 들이켰다. 순간 목이 타는 고통과 함께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정말 독한 술이었다. 그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고 티나는 만세를 외쳤다. 발듸문드는 문득 티나가 자신의 밑으로 왔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를 상상하려다 급히 머리속을 비웠다. 더 없이 끔찍한 일이 예상되었다.

"그래서요? 그래서요? 마스터의 꿈 속은 어땠나요?"
만세를 충분히 외친 다음에 티나는 독촉했고 발은 포기하는 심정으로 말을 이었다.
"구룬헤프의 꿈 속은 세번째 탑 안이었어. 21층이었지."
"네? 거긴 우리 학파가 쓰는 곳이잖아요?"
"그러니까 안정적이라는 거지. 보통 꿈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 들의 꿈 속의 배경은 뒤죽박죽에 수시로 바꿔. 한 번은 수 백번이나 배경이 바뀌는 걸 본 적도 있어. 구른헤프는 거기서 거대한 괴물을 물치고 있었지.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난처해하고 있었지."
"어떤 괴물이길래요?" 드래곤? 타라스크?"

발은 '바로 너다!'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이 어리고 순진한 아이가 상처를 받을까 그럴 수 없었다. 타나 때문에 매일같이 골치를 썩던 구른헤프의 잠재의식 속엔 티나가 감당하지 못할 괴물로 자라나고 있었다. 그럴 법도 했다. 티나를 쫓아내고 싶었겠지만 티나의 재능을 쫓아내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운 것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단지 사고를 칠 때마다 꾸중만 내릴 뿐이니 - 그 꾸중이 효과가 있었다면 그의 잠재의식 속에서 티나가 괴물로 자라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 꽤나 속이 탔을 것이다.
구른헤프는 자신이 아는 모든 주문을 거대한 티나에게 퍼붓고 있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티나는 발랄하게 마스터를 끝없이 외치며 주위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었다. 꾸중이 소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해석한 발듸문드는 대신 거대한 티나를 물리치고 구른헤프를 꿈에서 깨어나게 했다. 이런 내용을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발은 적당히 괴물을 꾸며내어 구른헤프가 고전하는 것을 자신이 도와줬다고 티나에게 말해주었다. 티나는 그대로 믿는 것 같았다. 사실 꿈 속의 일을 아는 사람은 발듸문드와 당사자인 구른헤프 밖에 없으니 어떤 이야기를 지어내도 믿었을 것이다. 아니 티나는 아무렇게나 말햇어도 믿었을 것이다.
발은 간신히 이야기를 본 궤도에 올려놓았다.

"드림스케이프가 위험한 이유는 세가지다. 첫째, 남의 꿈에 들어간다는 것. 둘째, 육체를 가지고 들어간다는 것. 셋째, 대상이 꿈에서 깨어나면 시전자는 무조건 대상의 옆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

티나는 역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드림스케이프 주문 자체의 효과가 남의 꿈에 육체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시전자나 대상이 목숨을 잃는 다거나 혹은 정신이 분열된다는 등의 부작용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주문 시전 후에 악마가 소환된다는가 하는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티나로선 위험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말도 안돼요. 그럼 주문의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됬다는 뜻이 잖아요."

발은 잠시 고민한 다음에 말을 꺼냈다.

"주문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야. 다만 주문의 효과과 가저오는 결과가 위험한 거지. 먼저 남의 꿈 속으로 들어간 다는 건 원소계로 들어가는 것과 똑같아. 불의 원소계에 화염방어주문을 걸지 않고 들어가면 바로 타죽고 말지. 꿈 속의 세상을 아까전에도 말했듯이 모든 것이 뒤죽박죽으로 섞여있어. 한마디로 혼돈이지. 초원이 갑자기 용암바다로 바뀔 수도 있고 옆에 있던 토끼가 괴물로 변해서 나를 덮칠 수도 있어."
"아, 예측할 수 없다는 거군요."
"그래. 뭐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 그리고 가장 위험한 이유는 바로 꿈의 주인인 대상과 마주칠수도 있기 때문이야."
"어째서죠?"

발듸문드는 양손으로 둥그런 원을 그렸다. 그의 손 끝에선 하얀 기운이 뻗어나와 허공에 원이 생겼다. 그리고 그는 원 안에 조악한 솜씨로 사람을 그렸다. 간단히 동그라미에 선을 그어 표현한 사람에 티나는 까르르 웃었다. 마법사가 마법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것은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다. 마법이 전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며 마법사는 단지 마나를 다루는 사람에 불과하다. 당연히 예능적 재능이 있을 리 없었다. 발듸문드는 얼굴을 가볍게 붉히며 헛기침을 했고 티나는 웃음을 그쳤지만 계속 웃음이 나오는지 어깨를 들썩였다.

"사람은 자신의 정신을 벗어나지 못하고 거기에 머물 수 밖에 없지. 차원학적으로 생각한다면 정신이라는 것은 한정된 아주 작은 차원인데 그 안의 공간은 무한해. 그리고 정신의 주체인 사람은 그 안에서 절대적인 위치에 서있어. 한마디로 주인인 셈이야."
"신들이랑 비슷하네요."

타니도 정신연령이 낮은 것이지 바보는 아니었다. 발듸문드는 나름대로 흡족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계속했다.

"정신은 대상의 절대적인 공간이야. 그런데 타인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면 어떨까? 그 것도 허락도 없이 무단으로."
"아주 화를 내겠죠. 저도 제가 쓰는 방에 본 적도 없는 사람이 있다면 화가 날꺼에요."

  발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한 비유였지만 그만큼 맞는 비유도 없었다.

"보통 꿈에서의 대상은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의식적인 존재지만 꿈 속에서 전능성을 가지기 때문에 비이성적인 상태야. 한마디로 본능에 충실한 단순한 존재지. 대부분 꿈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대상은 침입자의 변명 따위는 듣지 않아. 바로 모든 것을 침입자에게 적대적으로 만들어 버리지. 그렇게 되면 침입자는 생애 가장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거야. 아까 구른헤프 같은 경우는 그가 마법사라서 꿈을 어느 정도 다루고 꿈이라는 사실도 어느 정도 깨달은 상황이야. 그래서 내가 그의 꿈에 들어가도 멀쩡히 돌아올 수 있었던 거야. 그래도 불쾌함 정도는 느끼게 돼. 구른헤프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꽤나 불쾌했을 꺼야. 어디까지나 정신과 꿈은 자신만의 공간이니까."

티나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꿈 속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해야되죠? 막 공격만 당한다면 들어가기도 싫어질텐데."
"좋은 질문이야. 꿈 속에 들어간 시전자는 기본적으로 관찰자적 입장을 취해야만 돼. 개입하더라도 조언자나 꿈 속의 존재, 그러니까 대상 자신이 만든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어야지. 쉬운 일은 아니야."
"꿈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위험다는 건 알겠어요. 그럼 육체를 가지고 들어간다는 게 왜 위험하죠?"

발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티나는 의외로 예리한 질문을 던졌고 사실 속으로 적지 않게 당황스러웠다. 그녀에게 설명하는 위험은 이미 전에 생각해보고 정리한 것이었지만 막상 남 앞에서 설명하자니 막연한 부분도 있었다. 마지막에 티나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도 순간적으로 떠올린 것이었다.

"꿈은 완벽히 정신적인 공간이지. 뭐든지 마음대로 되는 곳이니까. 그런데 시전자는 육체를 가지고 들어가. 거기서 문제가 발생하게 되지. 육체를 가지고 들어가기 때문에 시전자는 꿈 속의 상황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 가령 상처를 입는다면 시전자는 현실에 돌아와도 그 상처를 지닌체로 돌아오게 되."
"어째서죠? 꿈 속이라면 전부다 환상이잖아요."
"물질은 정신에 영향을 주는게 아주 어렵지만 정신이 물질에 영향을 주는 것은 쉬운 일이야."

티나는 발듸문드의 설명만으로 부족한지 고개를 가옷했다. 결국 발듸문드는 고개르 젓고 설명을 덧붙였다.

"꿈 속의 세상은 네 말대로 전부 환상이지. 그건 모두 꿈이지 때문이야. 배경이나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나 모두 꿈의 것이고 대상이 만들어낸 허상이지. 그렇기 때문에 서로에게 영향을 미처도 환상이기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뭔가 반응이나 결과가 있어 보이는 건 꿈의 주인인 대상이 그렇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대상의 무의식에서 그런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야. 꿈 속의 법칙 또한 주인인 대상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다만 아주 힘들 뿐이지. 그런데 드림스캐이프로 들어간 시전자는 꿈 속의 것이 아니야. 외부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꿈 속의 것에 영향을 받으면 그건 곧 현실이 되버려."
"꿈이 전부 환상이라면 시전자가 '이건 환상이다. 허상이다.' 라고 생각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을 수도 있잖아요?"

전과 마찬가지로 예리한 질문이었지만 발은 바로 답할 수 있었다. 그도 한 번 생각해본 가정이고 실제로 실험해본 적도 있었다.

"아니 그건 불가능해. 시전자는 꿈 속에 무단침입한 불청객이지 주인이 아니거든. 어떤 식으로든 시전자는 꿈의 주인의 의지를 거스르는 건 불가능해. 대상이 시전자를 변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해. 꿈에 속한 것이 아니거든. 대신 꿈 속의 법칙이라는 건 주인인 대상도 바꾸기 아주 힘든 것이고 사실 상 꿈 속의 모든 것을 규율하지. 대상도 스스로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서 바꾸지 않는 이상은 자기도 그 법칙에 종속되고. 엄밀히 말하면 그 법칙이란 건 대상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대상이 주인이긴 해도 법칙 내에서 활동할 뿐이야. 그 자신도 법칙에 대해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거지. 불청객인 시전자도 마찬가지야. 주인인 대상을 거스를 순 있어도 법칙을 거스르진 못해."
"와, 그걸 어떻게 다 알고 있어요? 다 실험해 본거에요?"

발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말로하지만 시험할 당시에는 목숨을 내걸고 한 짓이었다. 문득 티나가 그 위험을 알면 조금이라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티나는 이제 완전히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의 꿈 속에 들어간다는 게 왜 위험한지도 알겠고 육체를 가지고 들어간다는 것도 왜 위험한지 알겠어요. 근데 그렇게 위험한데도 왜 주문을 육체를 가지고 들어가게 만든거죠?"
"그건 스승님께서 원하신 결과였기 때문이야. 단순히 정신만 이어지는 거라면 마인드링크(Mindlink - 시전자와 대상의 마음이 이어진다. 둘은 서로 생각하는 것을 즉시 알게 된다.) 주문이 있고, 꿈을 보는 거라면 씨드림(Seedream - 대상의 꿈을 엿본다. 단 대상의 꿈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주문이 있지. 그런데 스승님은 그 정도엔 만족하지 못하신 거야."
"그럼 마지막 질문이에요. 세번 째 이유, 대상이 깨어나면 시전자는 대상의 옆에 즉시 나타난다. 이게 도대체 왜 위험하다는 거죠?"

세번 째 위험은 사실 발듸문드가 말하려고한 목적이었다. 그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티나의 몸에 남색 로브를 덮어 주었다. 남색 로브는 그녀가 속한 학파의 일원들이 입는 로브였다. 평소에 자주 봐왔던 것인데 정작 만드려고 하니 정확한 모습이 생각나지 않아 대충 만든 것이었다. 티나는 여태껏 하늘하늘한 얇은 속옷 하나만을 입고 있었다. 발듸문드는 뭔가를 말하려다 먼저 티나의 머리에 꿀밤을 한대 먹이고 말았다. 티나가 작게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쌌다.

"드림스케이프 스크롤 하나가 어디로 갔나 싶었더니 네가 훔처갔었구나. 못된 것."
"히잉. 정말 꿈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궁금했단 말이에요."

발은 꿀밤을 한 대 먹였다. 빰이라도 한 대 걷어 올려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타 학파의 사람이니 잘못했다 하더라고 마구 구박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잔뜩 성이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 꿈 안에 들어온거냐? 그 것도 속옷 한 장만 달랑입고. 시전자는 꿈  속에서 아무 것도 못 만든단 말이다. 그리고 나도."

뒷말은 황급히 끊었다. '남자란 말이아.' 라고 계속 말했다간 자신의 품위가 떨어질 것이었다. 열 다섯 살이라고 해도 티나는 여자였고 얇은 속옷 한 장은 남자로서의 본능을 충분히 흔들리게 만들 수 있었다. 발듸문드가 참은 것은 자신의 꿈 속이기 때문이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때론 주인을 무섭게 만들기도 했고 자신이 딱 그 꼴이었다. 그리고 슬슬 자신이 깨어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있다. 지금 당장 티나가 주문을 해체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티나는 울먹이며 대답했다.

"한 번 당신의 마음을 알고 싶었어요. 하지만 물어볼 수도 없고. 그래서."

발듸문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티나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수 없었다. 순간 배경을 유지하던 정신력도 흐트러졌다. 그의 연구실이 살아있는 것처럼 심하게 요동쳤다. 티나는 비명을 지르며 발듸문드에게 안겼고 그는 엉겹결에 티나를 안았다. 간신히 정신을 다잡아 연구실을 고정시키고 품 안에 안긴 티나를 내려다 봤다. 티나는 눈물이 그윽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순간 심장이 심하게 요동친다고 생각했고 정말로 그랬다. 요동은 점점 커지더니 연구실을 뒤흔들 정도로 커졌다. 이제 꿈에서 깨어날 때였다.



발듸문드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연구실이 아니라 침실이었다. 그리고.

"까악!!"

그의 옆 공간에서 티나 갑자기 나타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요란한 소리에 침실 문너머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고 꿈에서 처럼 다시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손을 쓰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스승님!! 무슨 일 입니까?"

제자인 조나단이었다. 조나단은 한 손에 완드를 들고 있었다. 침입자가 들어온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침실 안을 살핀 조나단은 당연히 티나를 볼 수 있었다. 그 것도 얇은 속옷만 입고 정신을 잃은 티나를 말이다. 조나단은 경악을 금치못하며 발듸문드를 봤다. 어떻게 된 일이냐는 시선에 발듸문드는 변명하려 했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경악의 침묵 속에서 티나는 칭얼댔다.

"발듸문드. 나빠요. 아프다구요."

따당. 조나단의 손에서 완드가 떨어졌다. 곧 그가 스승을 바라보는 시선은 경악에서 실망으로 바꿨다. 발듸문드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말했다.

"구른헤프를 불러와라."

조나단은 한참 동안 실망한 눈빛을 보내다 사라졌다. 발듸문드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이제 곧 탑 전체로 자신이 열 다섯 밖에 안되는 티나를 침대로 끌여들였다는 소문이 퍼져 나갈 것이 분명했다. 그는 원망어린 시선으로 티나를 처다봤다. 드림스캐이프로 발듸문드의 꿈 속에 있었던 티나는 밤을 센 탓에 세상모르게 잠을 자고 있었다. 발듸문드는 이불을 덮어주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예상대로 발듸문드는 온갖 악소문과 청문회에 시달렸다. 가까스로 누명을 벗을 수 있었지만 이미 나빠진 평판은 다시 회복될 수 없었다. 발듸문드는 결국 주문의 효과를 바꾸고 말았다.

드림스케이프(Dreamscape) - 시전자는 육체를 가지고 대상의 꿈 속으로 들어간다. 대상이 꿈에서 깨어나면 시전자는 원래 있던 곳으로 즉시 돌아가게 된다.

이전의 드림스케이프 스크롤은 모조리 파기해버렸고 새로 만든 드림스케이프 스크롤은 자신만이 열 수 있는 금고 속에 처박에 놓았다. 그리고 다시는 꺼내보지 않았다.


주: 드림스케이프는 D&D 3.5룰에서 나오는 에픽 스팰입니다. 효과는 소설 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시전자가 육체를 가지고 대상의 꿈 속으로 들어갑니다. 나머지는 제가 만들어낸 부분입니다.
gor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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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 단편 [뱀파이어] 침입1 異衆燐 2006.03.31 0
1873 단편 나무늘보 어처구니 2006.07.11 0
단편 드림스케이프(Dreamscape)1 gordon 2005.09.03 0
1871 단편 다이어트환상곡2 liberte 2010.07.04 0
1870 단편 Cliche 빈군 2010.03.25 0
1869 단편 [고양이] 용은 우리 마음속에 정희자 2008.03.23 0
1868 단편 내가 환타지세계에 살게 된다면1 루나 2003.09.19 0
1867 단편 마치 좀비처럼 2011.09.09 0
1866 단편 <font color="blue"><b>뱀파이어 앤솔러지에 들어갈 단편 공모합니다.</b></font> mirror 2006.01.19 0
1865 단편 아르실의 마녀 포가튼엘프 2006.08.17 0
1864 단편 내 딸의 탄생설화에 관하여7 dcdc 2008.06.19 0
1863 단편 악어는 악어대로 그곳에 김효 2013.03.10 0
1862 단편 복수 : 한양 성 살인방화사건의 전말과 현재 마뱀 2011.08.09 0
1861 단편 어느 그믐2 미소짓는독사 2006.01.1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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