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0/4
대략 3~4만원대의 흔하디 흔한 향수와 파트리크 쥐스킨트 책 향수.
친구는 그 책에다 이렇게 쓴다.
'나를 기억해줘.'
난 거기서 두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첫째..녀석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둘째..곧 그 사람을 포기할 것이다.
늘 자신의 감정이 고통을 지나, 고통을 모방한 조각으로 흩어지리라는
것을 예감할 때쯤이면 이런 것들을 준비하니까.
곧 그애 생일이 다가와. 그때까지만 맡아줘.
그렇게 말하고는 녀석은 내 자취방에서 떠났다.
아, 곤란한걸.
녀석이 남기고 가는 것들은 항상 문제를 일으키니까.
그리고 한참이 지났지만, 녀석은 그것들을 찾으러 오지 않았다.
녀석이 다른 여자에게 열중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나도 굳이 그것들을 돌려주려 하지 않았다.
향수는 책상 어딘가에 처박아 두고, 책은 한참 재미있게 읽었다.
그것은 환상적이고 매혹적인 이야기였다.
나는 꽤 오랫동안 , 잠이 들기 전에 그 이야기들에 대해 생각했고
감탄했고, 의심했다. 나는 최고의 향기를 찾는 주인공에게 매혹당한
것인가, 아니면 그 향기를 얻기 위해 소녀를 죽이는 살인자에게
매혹당한 것인가? 무의미하다 무의미하다...그렇게 되뇌이고
잠을 청한다. 냄새도 없고 기억도 못할 그런 꿈을 꾸기 위해.
단절에 가까운 밤. 다음 날을 위한 꿈. 눈을 뜨면 거울을 보고
학교에 간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잠을 청하러 집에 온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의미를 가진 나의 자취방에 그녀가
나타났다. 향수병에서 기어나와서는 우렁각시처럼 내 방을
청소하고, 밥을 해 놓고, 내가 끄적거려놓은 무의미한 욕설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내가 올 때쯤..다시 향수병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아무리 내가 둔감하다고 해도, 그녀가 남기는 강렬한 흔적을 눈치채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두운 방, 불을 켜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밤, 가득찬 그녀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결국, 나는 그녀가 미처 자신의 향수병으로 되돌아가, 마개를 닫기
전에, 그것을 낚아채어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말했지.
내 곁에 있어줘.
그렇게 시작했다. 우리는.
그 뒤의 일들에 대해서는 장황한 묘사가 무의미하다. 자, 당신의
기억을 헤집어라. 진실은 아니더라도 끔찍히 행복한 순간들이
분명 한 두개 정도는 있을 것이다. 기억보다 아래에 있는 것들.
후각이란 그런 것들을 환기시키는데 지독히도 강한 힘을 가진다.
곰팡내 나는 책냄새도 누군가에게는 , 그의 마음속에 두텁게
쌓인 세월들을 걷어내고, 얼굴들을 먼지처럼 피어오르게 하고
이름붙일 수 없는 감정들에 무릎을 꿇게 만드는, 그런 것일 수 있다.
하물며 그녀는.. 향기였다. 우리의 날들은 '향수'였다.
그러므로 나는 감히 말한다. 우리는 당신보다 더 아름다웠노라고.
하지만 점점 그녀가 내 곁에 있는 시간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조금 더 일찍 나를 떠났다. 소유는 사랑의 커다란 부분이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왜 이렇게 일찍 가는거지? 조금만 더 있어줘.
그러나 그녀는 그냥 고개를 흔들뿐..
나는 창문을 모두 닫고, 방문을 걸어잠그고, 공기가 통할 수 있는
모든 부분에 녹색테이프를 붙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이윽고
사라졌다. 내가 질식해 죽기도 전에.
나는 죽음을 각오했는데. 그런데도 넌 나를 떠났어.
분노에 가득차서 나는 방문을 걷어차고 나왔다.
세상 어디에 있든지 찾아내고 말겠어.
내가 너를 기억하는 한. 그 기억들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한.
바깥의 신선하고 찬 공기가 나의 혼란된 정신을 가라앉혔다.
달도, 별도 없는 밤이었다. 잠들어 있는 것들을 밀어제끼며
바람이 조금씩 불기 시작했다. 나는 그 바람에 섞인 그녀의
향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믿을 수 없을만큼 쉽사리. 나는 차마 뒤돌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내 방안에 있었다. 거기서 나를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내 초라하고 앙상한 뒷모습을. 그녀의 눈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그녀는 나를 떠났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그녀를 떠나 보낸것이다...아니 이렇게 말해야 하나.
내가 그녀를 버린 것이다...라고?)
길을 걷다 보면 쉽사리 그녀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그럴때면, 싸구려 향수를 샀던 내 친구를 미워해야 할지 고마워해야 할지
나는 모르겠다.
마침.
*이것은 01년도에 썼던 <K와 소녀> 시리즈의 '향수소녀'편을 고쳐 쓴 것입니다.
대략 3~4만원대의 흔하디 흔한 향수와 파트리크 쥐스킨트 책 향수.
친구는 그 책에다 이렇게 쓴다.
'나를 기억해줘.'
난 거기서 두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첫째..녀석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둘째..곧 그 사람을 포기할 것이다.
늘 자신의 감정이 고통을 지나, 고통을 모방한 조각으로 흩어지리라는
것을 예감할 때쯤이면 이런 것들을 준비하니까.
곧 그애 생일이 다가와. 그때까지만 맡아줘.
그렇게 말하고는 녀석은 내 자취방에서 떠났다.
아, 곤란한걸.
녀석이 남기고 가는 것들은 항상 문제를 일으키니까.
그리고 한참이 지났지만, 녀석은 그것들을 찾으러 오지 않았다.
녀석이 다른 여자에게 열중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나도 굳이 그것들을 돌려주려 하지 않았다.
향수는 책상 어딘가에 처박아 두고, 책은 한참 재미있게 읽었다.
그것은 환상적이고 매혹적인 이야기였다.
나는 꽤 오랫동안 , 잠이 들기 전에 그 이야기들에 대해 생각했고
감탄했고, 의심했다. 나는 최고의 향기를 찾는 주인공에게 매혹당한
것인가, 아니면 그 향기를 얻기 위해 소녀를 죽이는 살인자에게
매혹당한 것인가? 무의미하다 무의미하다...그렇게 되뇌이고
잠을 청한다. 냄새도 없고 기억도 못할 그런 꿈을 꾸기 위해.
단절에 가까운 밤. 다음 날을 위한 꿈. 눈을 뜨면 거울을 보고
학교에 간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잠을 청하러 집에 온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의미를 가진 나의 자취방에 그녀가
나타났다. 향수병에서 기어나와서는 우렁각시처럼 내 방을
청소하고, 밥을 해 놓고, 내가 끄적거려놓은 무의미한 욕설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내가 올 때쯤..다시 향수병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아무리 내가 둔감하다고 해도, 그녀가 남기는 강렬한 흔적을 눈치채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두운 방, 불을 켜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밤, 가득찬 그녀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결국, 나는 그녀가 미처 자신의 향수병으로 되돌아가, 마개를 닫기
전에, 그것을 낚아채어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말했지.
내 곁에 있어줘.
그렇게 시작했다. 우리는.
그 뒤의 일들에 대해서는 장황한 묘사가 무의미하다. 자, 당신의
기억을 헤집어라. 진실은 아니더라도 끔찍히 행복한 순간들이
분명 한 두개 정도는 있을 것이다. 기억보다 아래에 있는 것들.
후각이란 그런 것들을 환기시키는데 지독히도 강한 힘을 가진다.
곰팡내 나는 책냄새도 누군가에게는 , 그의 마음속에 두텁게
쌓인 세월들을 걷어내고, 얼굴들을 먼지처럼 피어오르게 하고
이름붙일 수 없는 감정들에 무릎을 꿇게 만드는, 그런 것일 수 있다.
하물며 그녀는.. 향기였다. 우리의 날들은 '향수'였다.
그러므로 나는 감히 말한다. 우리는 당신보다 더 아름다웠노라고.
하지만 점점 그녀가 내 곁에 있는 시간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조금 더 일찍 나를 떠났다. 소유는 사랑의 커다란 부분이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왜 이렇게 일찍 가는거지? 조금만 더 있어줘.
그러나 그녀는 그냥 고개를 흔들뿐..
나는 창문을 모두 닫고, 방문을 걸어잠그고, 공기가 통할 수 있는
모든 부분에 녹색테이프를 붙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이윽고
사라졌다. 내가 질식해 죽기도 전에.
나는 죽음을 각오했는데. 그런데도 넌 나를 떠났어.
분노에 가득차서 나는 방문을 걷어차고 나왔다.
세상 어디에 있든지 찾아내고 말겠어.
내가 너를 기억하는 한. 그 기억들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한.
바깥의 신선하고 찬 공기가 나의 혼란된 정신을 가라앉혔다.
달도, 별도 없는 밤이었다. 잠들어 있는 것들을 밀어제끼며
바람이 조금씩 불기 시작했다. 나는 그 바람에 섞인 그녀의
향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믿을 수 없을만큼 쉽사리. 나는 차마 뒤돌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내 방안에 있었다. 거기서 나를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내 초라하고 앙상한 뒷모습을. 그녀의 눈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그녀는 나를 떠났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그녀를 떠나 보낸것이다...아니 이렇게 말해야 하나.
내가 그녀를 버린 것이다...라고?)
길을 걷다 보면 쉽사리 그녀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그럴때면, 싸구려 향수를 샀던 내 친구를 미워해야 할지 고마워해야 할지
나는 모르겠다.
마침.
*이것은 01년도에 썼던 <K와 소녀> 시리즈의 '향수소녀'편을 고쳐 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