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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하얀 나그네

2006.11.23 02:5111.23

하얀 나그네

0.

<죽음>이라는 이름의 거인이 있었다. 그 거인은 광채 없이 검은 몸을 누이거나 쭈그려 앉은 채, 무료한 시선을 이곳저곳에 보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무료함이 온 몸에 차오르면, 천천히 분할을 시작한다. 자신의 의지만으로 손끝하나 움직이지 않고 자신의 신체를 조각낸다. 마치 숨을 쉬듯이.
그 조각들은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다.
어느 조각은 점점이 분해 되다가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로 변화하여 공기 중에 떠다녔다.
어느 조각은 숲 속의 뒤틀린 나무들 사이를 떠돌다가 나무의 일부로 변화하여 단단하게 뿌리박았다.
어느 조각은 돌멩이로 변화했다가, 어느 날 불에 달구어져 강철이 되었고, 검이 되고 도끼가 되었다.
문득 <죽음>도끼가 나무꾼의 손에 쥐어져 <죽음>나무를 찍는 사태가 발생해도,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다. 가끔 서로의 육체가 희미한 기억을 떠올려 반사적으로 놀래도, 그 것은 작은 떨림으로 그칠 뿐이었다.
심지어 어느 조각은 인간의 모습으로 변화하여, 나그네처럼 찾아와서 마을에 머물기도 하고, 어느 인간과 싸우기도 하고, 어느 인간과 결혼식을 올리기까지도 했다.
그렇게 그 거인은 세계의 모든 곳에 퍼져있었다. 그리고 아무 예고도 없이 다시 육체를 불러 모은다. 십이만 년 만에 달라붙은 조각의 틈새는 붉은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거인은 육체의 틈새에 아랑곳 않고 십이만 년 만에 거대하고 육중한 몸을 끌고 움직였다.
어느 한 여자가 죽음을 초월했기에.

1.

북풍이 불며 어둠이 내려앉는다. 총 합해서 일곱 명인 그들은 바람 부는 날씨를 불평했다. 자신이 쓰고 있는 가면까지 찡그릴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그들은 결국 아무 말 없이 대열을 정리했다. 앞장선 남자가 하나, 상여를 멘 남자가 넷, 뒤에서 잡귀를 내쫓는 사람과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한 명씩.
하나같이 눈, 코, 입 중 하나가 뒤틀려서 우스꽝스러운 가면들이었지만 장례식장에서는 기괴한 분위기만 더해주었다. 빨간 바탕에 검은 세로 줄무늬가 들어간 상복을 입은 그들은 사실 날씨를 불평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단지 일주일 동안 다섯 번이나 장례를 치르는 현상에 익숙하지 않아 무엇에 화를 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것뿐이었다.
어여차-!
나무를 정교하게 잘라 만든 상여를 들어올리는 순간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문득 구경하던 사람들 중, 화난 표정의 가면을 쓴 소년이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면 대신 방한용 마스크를 쓴 나그네여인이 소년의 눈에 들어왔다. 검은 염색 도료로 칠해진 마스크는 눈만 간신히 보이고, 얼굴 전체를 덮고 있기에 그녀의 맨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입 부근에 산소통이 불툭 튀어나왔고, 그 오른쪽에 연통 같은 것이 연결되어있었다. 그 끝에는 끼릭하고 돌릴 수 있는 마개와 공기조절밸브가 달려있는데도 가벼운 느낌이었다. 그리고 아코디언처럼 홈이 파인, 손목 두께 정도의 고무호스가 왼쪽으로 빙 돌아서 가슴의 공기흡입기에 연결되어 가끔 쉬이익-!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를 냈다.
소년은 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비웃는 표정의 가면을 쓴 소녀가 나그네를 조심스럽게 흘겨보았다. 소녀의 시선이 흰 보따리에서 머물렀다가, 흰 옷을 스쳐 지나가 검은 마스크를 향했다. 가면의 비틀어진 입술이 어둠에 잠겼다가 다시 드러났다. 소녀는 한 번인가 여관에서 그녀의 맨얼굴을 본 적이 있다. 식사 중이었던 그녀는 차갑고 매서우면서도 아름다웠다. 이른 아침 저 멀리에 극광(極光)이 떠있을 때, 눈보라가 가늘게 불기 시작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우는 표정의 가면을 쓴 남자가 상여에서 시선을 돌렸다가 마스크를 쓴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남자의 가면 너머 눈동자에 두려움이 물큰 배어들었다. 나무를 깎아 만든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그 여인의 금속성 마스크는 너무 눈에 띄었다.
나그네 여인은 자신을 향한 시선과 불편한 침묵의 정체도 알고 있었다. 불안과 의심이 점철된 시선으로 가득 찬 거리를 느끼지 못할 리가 있을까.
첫 번째 자살한 시체가 발견되고, 또 두 번째 장례식 때만 해도 아무도 이상한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모두 슬픔을 공유할 뿐이었다. 바로 다음날, 세 번째 장례식을 치르게 되자 사람들은 하나 둘 이것이 자연적인 자살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고, 네 번째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는 모두 공포에 질렸다. 그리고 오늘은 모두 의심을 공유하고 있었다. 아니, 단 한 사람 나그네를 제외하고 말이다. 나그네는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마을에 주거하는 모든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참가했다. 이 마을의 전통이긴 했지만 행인들이 보기에는 꺼림칙한 관습이었다. 어떤 표정의 가면이든 죽은 사람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어떻든 간에 적어도 지금은 아무도 죽은 이를 비웃지 못했다. 가면을 쓰고 늘어서 있는 이들의 대다수는 자신에게 올 죽음의 공포를, 극소수는 피살자에게 가해진 죽음의 슬픔을 느꼈다. 각자의 공포와 슬픔을 의심이라는 형태로 승화시켜 나그네에게 쏘아 보냈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나그네를 살인자로 의심하고 있지만, 정작 나그네 여인만이 누가 이 마을에 죽음을 던져 넣었는지 알았다.
나그네는 몸을 돌려 여관으로 들어갔다. 사람들 사이에서 안도의 한숨이 돌았다. 다만, 비웃는 가면을 쓴 소녀만이 나그네의 모습을 계속 뒤쫓았다.

2.

나그네의 짐은 보잘 것 없었다. 항상 들고 다니는 보따리 두 개와 흰 자작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제외하면 헐렁한 배낭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짐을 다 챙기자마자 문을 열고 나갔다. 복도 끝의 내려가는 계단에는 장례식장의 꺼림칙한 어둠이 고여 있었다. 나그네는 무심코 걷다가 어둠 안에 어릿거리는 무언가를 보았다. 비웃음을 띈 얼굴이었다. 나그네는 멈칫하고 살펴봤다. 누군가가 서있는 듯했지만 어둠에 파묻혀서 잘 안 보였다.
어둠사이에서 손이 올라와 턱 끝을 쥔다. 나그네는 알아챘다. 가면이었다. 어둠으로 감춘 단단한 이질감이 손가락의 살갗과 대조를 이뤘다.
소녀는 천천히 가면을 벗고 막아서듯 나그네 앞에 서 있었다.
“나에게 볼일이 있니?”
예상 외로 부드러운 목소리에 소녀는 흠칫했다. 소녀는 계속 아무 말이 없었다. 도저히 말을 꺼낼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그네는 무시하고 지나가기로 하고, 소녀를 지나치려고 했다. 그러자 소녀는 나그네의 소매 끝을 붙잡았다. 뒤돌아 본 나그네는 발걸음을 멈췄다. 나그네의 눈동자에는, 소녀의 수동적인 난폭함이 웅크린 얼굴, 파멸에의 소극적인 열망이 꽉 찬 눈동자…… 그리고 그 눈동자에서 떨어지고 있는 눈물방울이 그대로 반사됐다. 친구가 가르쳐 준 말이 떠올랐다. 저 것은 증오라고.

3.

나그네는 뒤통수에 있는 마스크의 밸브를 돌렸다. 그러자 쿠힉! 하는 소리와 함께 증기가 빠져나갔다. 나그네는 마스크를 벗었다. 아무리 차가워도, 진짜 공기를 한 모금 마시고 싶어진 것이다.
엉클어진 검은 머리카락사이로 흰 얼굴이 드러났다. 슬픔을 정제한 듯한 나그네의 표정을 소녀는 애써 외면했다.
소녀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나흘전이었다.

그 날 소녀의 아버지는 여관에 볼일이 있었다. 무슨 볼일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자신이 아버지를 졸라서 따라나섰다는 것은 분명히 기억했다.
그 날은 평소보다 춥고, 눈이 많이 내렸다.
기억나는 것은 아버지의 손과 어깨, 그의 옆얼굴. 무슨 길을 어떻게 갔었는지는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단지 아버지를 올려보며 발걸음을 옮겼을 뿐이었다.
그리고 여관의 1층의 식당에서 그녀를 보았다.
풀뿌리를 끓인 시커먼 국을 떠먹고 있던, 나그네의 얼굴이 너무 아름다워서 소녀는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그네가 소녀의 시선을 알아채려는 찰라, 아버지가 소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밑에서 올려다 본 아버지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그는 흉한 것을 봤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여관주인과 얘기를 마저 나누었다. 소녀가 다시 나그네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나그네는 다시 국그릇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소녀가 나갈 때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녀를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봤다.

소녀는 갑자기 기억이 더 떠올랐다.

여관을 찾아간 이유는 여관주인의 아들 때문이었다.
전날 아침에 여관 주인의 아들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곧잘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키가 언제 크냐고 웃던 청년이었다. 그는 손님들이 쓰지 않는 작은 욕조에 쓰러져 있었다. 소녀의 머리위에 올리던 그 손목이 그어진 채로. 여관 주인은 쉬쉬했지만 소문을 막기에는 마을이 너무 좁았다.
문을 나서면서 아버지는 혀를 몇 번 찼을 뿐이었다. 그는 서둘러 여관에서 멀어지고 싶어 했지만, 소녀는 그 곳에 더 머물고 싶었다. 소녀의 눈앞에 나그네의 얼굴이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녀는 점점 멀어지는 문을 힐끗 힐끗 뒤돌아 봤다. 갑자기 나그네가 문을 열고 나왔을 때 소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소녀의 아버지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을 때 나그네는 이미 빠른 걸음으로 언덕위의 나무 사이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여기서 기다리렴.”
“아, 아빠……”
“금방 돌아올게.”
그가 거짓말을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소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소녀는 깨닫지 못했지만 눈을 감고 있던 시간은 매우 짧았다.
결국 언덕 너머에서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와, 그 날 저녁 여관으로 돌아간 나그네의 영상이 소녀의 눈 위에 떠올랐다. 그 영상은 꽤나 따가웠나 보다. 소녀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렀기 때문이다.
“따라와요.”
소녀가 뒤돌아 걷기 시작하자 나그네는 그 뒤를 따랐다.
바로 옆에서 보고 깨달았지만, 소녀의 발걸음은 매우 딱딱하게 굳어 있고 불안해 보였다. 그래서 나그네는 소녀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어 주었다. 소녀는 흠칫거렸지만 조금 나아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표정은 그대로 껍데기를 쓴 것처럼 바뀌지 않았다. 소녀는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가면의 끈을 풀어 목에 걸었다. 그러자 괴상한 목걸이가 만들어졌다.
끄더덩, 끄더덩… 계단을 내려가면서 어귀가 어긋나는 소리가 불길하게 울렸다. 실내는 썩은 고목처럼 어두웠다. 어찌나 음침했던지 술과 물에 절어서 변색하고 뒤틀린 나무판자들은 비명을 지르는 시체처럼 보였다.
나그네는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지만 소녀는 거침없이 걸어갔다. 소녀가 문을 열자, 나그네는 재빨리 마스크를 착용했다. 좁은 마을인 만큼 웬만한 소음에 잠이 깨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그네는 살며시 밖으로 나갔다. 텅 빈 마을을 상상했던 나그네를 비웃듯 장례식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가면을 뒤집어 쓴 사람들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나그네는 흠칫 놀랐지만 소녀는 마치 눈앞의 광경이 보이지도 않는 듯이 휘적휘적 마을 사람들 옆을 지나갔다. 진흙바닥 위에 소녀의 구두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나그네는 그 뒤를 따라가다가 소녀가 보여준 자신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소녀는 장례식의 일정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상여가 있던 자리의 중심에는 향이 여러 개 놓여져 마약을 피워 올렸다. 마약에 취해 모두 무아지경에 빠진 상태였다. 가면을 쓰고 있어도 흐늘흐늘한 몸동작은 넋이 나가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뒤에서 툭 치면 그대로 고꾸라질 것 같았다.
소녀가 멀리 어둠 저편에 걸어가는 것을 깨닫고 나그네도 빠르게 발을 옮겼다.

4.

소녀가 안내한 장소는 마을 외진 곳의 언덕에 모셔진 신나무였다. 북국의 마을에는 꼭 한 그루씩 있는 천 년 묵은 나무들로, 전문가가 아니면 원래 무슨 나무였는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이곳의 고목도 마찬가지로, 둥치가 집 한 채 넓이가 될 만큼 늙었으며, 오랜 세월 태양의 궤적을 보여주듯 온 몸을 꼬았으며, 출생을 잊은 듯 어떤 종인지 분간하기도 불가했다.
소녀는 그 나무를 한없이 지켜보았다. 약간 지겨워진 나그네는 고개를 돌려 가시나무 숲 너머의 마을을 내려봤다. 불빛이 없어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밤하늘보다 마을이 더 어두웠다.
나그네는 다시 소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기겁했다. 소녀는 신나무의 뿌리를 빼내겠다는 듯이 땅을 파기 시작했다. 어디에 숨겨놨었는지 소녀의 손에는 적당한 크기의 삽이 쥐여져 있었다.
나그네는 말려야 할지, 아니면 방관해야 할지 짧게 고민하다가, 타협안을 채택했다.
“뭐 하는 거니?”
나그네의 질문에 잠시 멈칫했던 소녀는 나그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무심한 눈길로 땅을 팠다. 목에 걸린 가면이 덜렁거렸다.
“도와주실래요?”
나그네는 방관하기로 했다.
털썩 주저앉을 법도 했지만 나그네는 차가운 땅보다는 서 있는 것이 더 익숙했다. 그리고 얼마 후, 소녀가 와보라는 손짓을 보냈다. 땀을 꽤 많이 흘렸다. 나그네는 무료한 동작으로 걸어 가 구덩이를 내려보았다. 나그네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싸늘함을 느꼈다. 깊은 어둠과 망각의 심연에서 삐져나온 듯한 손이 차가운 흙을 뚫고 솟아있었다.
나그네는 허리를 숙여 그 손을 자세히 보았다. 시체의 손이었다. 나그네는 안도했다. 소녀는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원래 시체는 거의 다 여기에 묻어요. 종교적인 의미가 있기도 하고, 글쎄 사실은 모르겠어요. 그냥 옛날부터 그러니까 이러는 거죠. 음식을 먹는 것도 옛날부터 사람들이 음식을 먹어왔으니까 따라서 먹다가 습관이 되고, 자는 것도 습관이 되고, 장례식도, 가면을 쓰는 것도…….
소녀는 목에 걸고 있던 가면의 끈을 풀어서 구덩이 안쪽으로 놓듯이 던져 넣었다. 가면은 적당한 위치에 툭 떨어졌다. 기묘하게도 계단에서 보았던, 소녀가 손을 막 뻗은 모습과 겹쳐 보였다.
이 사람은 원래 마을에서 제일 돈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똑똑하기도 했지요. 하긴 그렇게 많은 돈을 벌었으니까. 나한테 생전 처음 보는 사탕 같은 것을 쥐여주고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했던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어제 죽었어요.
나그네는 떨리는 손으로 가면을 치우려고 했다. 소녀가 그녀의 손을 막았다. 멀리서 음악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상여가 가까워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문득 마약 기운이 물큰 다가왔다. 속이 역겨워졌다. 미량의 마약 때문에 몸의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5.

여관에 돌아온 나그네는 난로부터 피우기 시작했다. 장작이 곳곳에 널린 북부였다. 나그네는 거침없는 동작으로 불쏘시개를 쑤셔 넣었다. 소녀는 천천히 눈 더미를 주전자에 담고 힐끗 나그네를 쳐다봤다. 주전자를 난로 위에 올려놓은 소녀는 의자를 꺼내 앉았다. 나그네는 이불을 둘러쓰고 맞은편에 앉았다. 마약이든 추위든, 남국에 살던 나그네에게는 익숙지 않은 것들이었다.
나그네는 약초를 질겅질겅 씹으며 방안을 새삼 둘러봤다. 끈적끈적하게 벽에 달라붙은 흔적들, 군데군데 불에 그슬린 바닥과 나무의 틈새 사이로 비명처럼 올라오는 냉기들, 창문 너머로 오는 것은 뿌연 공기뿐. 나그네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에 익숙해지려면 한참 걸리겠어.”
“……그런가요.”
목소리가 부드러워지고, 표정도 처음보다는 풀어진 듯했다. 여전히 생선뼈처럼 딱딱하고 무표정했지만 말이다. 소녀는 칙칙한 금발의 끝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나그네는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였니?”


소녀의 표정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숨긴 가면을 재빨리 쓴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나그네는 도저히 그 이름을 맞출 수 없는 가면이었다.
“그 남자의 마지막 모습을 내가 봤어. 그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 말해줄까?”
소녀의 입술이 떨렸다. 소녀는 메마른 나무처럼 탁하고 불안정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각자의 가면은 꼭 챙겨야 해요. 가면은 여러 개가 있지만 어쨌든 모두 소중해요. 신분증과 비슷한 거죠. 아까 땅에 묻혔는데, 찾아야겠어요. 그것을 좀 도와주세요.”
주전자의 물이 다 끓었는지 삐이익! 하는 소리가 울렸다. 나그네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전자의 증기에 손을 갖다대며 말했다.
“나한테 도와달라고?”
소녀는 그림자처럼 다가가 나그네의 보따리를 건드렸다. 당황한 와중에 나온 행동이었다. 나그네는 보따리를 끌어당기며 몸을 돌렸다. 소녀는 어깨를 움츠렸지만 나그네의 표정에 매서운 기운이 없었기에 용기를 내어 말했다.
“왜 못 건드리게 하는 거죠?”
“……위험하니까.”
“뭐가 위험한 거죠?”
소녀의 심장이 쾅쾅 울리기 시작했다.
“칼날이 날카로우니까? 독이 묻으니까? 방안에 있으면서도 어깨에 메고 있을 정도로 숨겨야 할 그런 무기에요?”
소녀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했다. 이제 저 나그네의 차분한 표정을 차차 일그러지겠지. 다섯 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였고, 그보다 더 많은 살인을 해봤을 저 여자에게 나쯤은 무력하고 허약한 존재로 보이겠지. 곧 살인마의 본색을 드러내며 저 두 보따리 중 하나를 끌러서 나를 죽여 없앨 무기를 꺼낼 거야. 하지만 난 눈을 감지 않겠어. 내가 원한 거니까…….
하지만 나그네는 여전히 차분한 표정이었다.
“따라와 보렴.”
소녀는 피식 비웃음을 띄며 문을 여는 나그네의 등을 바라봤다. 바깥공기가 볼에 닿자, 소녀는 자신이 눈물을 흘렸음을 깨달았다.

6.

나그네는 3층 베란다의 사다리를 타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지붕에는 눈이 얕게 쌓였다.
날 떨어뜨려서 죽이려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그네가 들고 있는 보따리는 시체를 유폐하기 위한 장비일지도 모른다. 소녀는 지붕 위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올라가자 나그네를 찾았다.
흉흉한 얼굴과 초조한 모습을 기대했던 소녀는 실망했다. 나그네는 마치 남국의 사람들처럼 명상을 하는 자세를 취했다. 익숙해 보였다. 가까이 간 소녀는 그녀가 정말로 명상에 빠져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나그네는 눈을 감고 입술은 가볍게 다물었다. 얼굴은 하얗고 차갑지만 생기가 돌았다. 소녀는 문득 나그네가 맨얼굴임을 깨달았다. 깜짝 놀란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나그네의 얼굴에 손을 갖다댔다. 아니, 갖다대려고 했다.

소녀는 자신의 손이 나그네의 어깨를 지나치는 순간 느려졌다는 것을 자각했다. 온몸으로 느리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느려졌다. 소녀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보다 더 긴 시간을 지금 이 순간 보내고 있다고 느꼈다. 이성은 그럴 리가 없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모든 감각은 그렇다고 조용히 속삭였다.
잠을 자기 위해 자리에 누우면 언제인지 모르게 눈을 감고 만다. 그처럼 소녀 또한, 자신도 모르는 새에 바뀐 시야를 보았다. 자연스럽게 소녀는 어깨와 팔꿈치와 손끝을 통해서 나그네와 시야를 공유했다.
어렸을 적 단 한 번만 본 극광이 장엄하게 터졌다. 회색 흙바닥과, 검거나 회갈색을 띄는 고목들, 불에 타다 만 장작들, 깜부기불들이 모두 날아가고 선명하고 깨끗한 빛만이 출렁이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조용히 앉아 있는 ‘무엇’을 보았다. 소녀가 자세히 보려고 하자 순식간에 확대되어 그 모습이 보였다. 새까만 덩어리에 짙은 빨간 색의 지렁이가 꿈틀댔다. 소녀는 섬뜩하여 고개를 돌리려고 했으나 시야가 바뀌지 않았다. 계속 보니 지렁이가 아니라, 굵고 가는 줄무늬가 새겨진 새까만 몸뚱이였다. 어깨와 등에 듬성듬성 돋아난 돌기에서 색색의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극광과는 달리 명확하게 구분되는 색상이 뻗어나가다 둥글둥글 말리고 부딪히다가 스러졌다. 선명한 색들이 오히려 위험해 보였다.
중독적인 환각이야. 나그네의 목소리가 울렸다.
시야가 옆으로 이동해 그 아래 펼쳐진 하얀 계곡이 보였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까마득한 거리였다. 녹는 것과 어는 것을 병행중인 눈들은 마치 짐승의 등처럼 흐물거리다가 꼿꼿해지기도 하고, 딱딱하게 굳은 곳이 있는가 하면 어떤 곳은 미세한 떨림을 지속하기도 했다.
그리고 점점 작아졌다. 모든 것이 작아지면서……. 아니, 멀어지고 있던 것이다. 거인도, 눈으로 뒤덮인 산과 계곡들에서도 멀어지고 점점 눈이 드문드문 해지더니 시체의 이마 같은 땅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신나무가 보이고, 7명의 장례꾼들은 땅을 파다가 나온 가면에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상여는 정교해서 꼭 닫혀 있다. 파장분위기의 장례식과 가면을 벗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나그네의 눈꺼풀이 살짝 들리고, 소녀의 손끝도 떨어졌다. 새벽의 하늘은 보랏빛이었다. 소녀는 한참이나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야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깨달았다. 소녀는 자신의 어깨에 얇게 쌓인 눈을 털었다. 손이 떨렸다.
나그네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나는 부단히도 존재가 멈춘다는 것이 두려웠어. 세상이라는 강물은 계속 흘러가는데, 나만 돌멩이처럼 가라앉아 강물의 흐름도, 그 끝도 보지 못 한다는 것이……. 그러나 어느 순간, 어느 누구도 강물의 끝을 보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강물은 영원히 이어지니까.”
나그네는 계속해서 내뱉다가 잠시 숨을 멈췄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죽는 것이 무섭다.”
맞다. 소녀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열리지 않는 입으로 수백 번, 수천 번 긍정했다. 사실은 죽는 것이 두렵다고, 사실은 살고 싶었노라고. 소녀는 깨달았다.
현기증에 소녀는 비틀거렸다. 다시 나그네에게 손을 뻗치려다가 그만 지붕에 쌓인 눈에 발이 미끄러졌다. 숨소리도 못 내고 떨어져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다. 나그네는 새벽 공기를 마시며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그 공기 속에 밴 장례식의 냄새에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근처에 쓰러진 청동향로에서 마약의 잔향이 흩어졌다. 땅바닥에서 시체가 뱉는 한숨처럼 차가운 공기가 올라왔다. 어쩌면 실제로 시체가 내뱉는지도 모른다. 소녀의 머리에서 피가 번져 땅바닥을 까맣게 적셨다. 소녀의 얼굴과 몸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다만 그 둘을 잇는 목이 꺾여 있을 뿐이었다. 간밤에 내린 눈이 녹아서 땅바닥은 약간 축축했다. 그럼에도 땅은 여전히 메말랐던지, 소녀의 피라도 필요했나보다.

7.

소녀의 가족은 이제 없을 텐데, 과연 누가 그녀의 장례식에서 슬퍼해줄까? 제대로 장례식을 치러주기나 할까? 아니면 이제 소녀는 저승에서 아버지와 만날 수 있는 것일까? 저승이란 것이 있을까? 죽으면 정말로 단지 어둠과 무의식, 망각뿐인 걸까? 내가 밉지 않았을까? 나를 원망하지 않았을까? 소녀는 떨어진 순간 얼마나 놀랐을까. 아프지 않았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머리가 깨지고 그 사이로 피와 함께 흙이 섞이는 순간에 괴로웠을까. 무서웠을까. 차츰차츰 눈을 감았을까. 아니면 상황을 이해한 순간 잠들듯이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을까. 파랗게 변하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지붕에서 후두둑 떨어지고 있는 눈을 보면서 죽음을 실감했을까. 대체 얼마나 섬뜩한 마음으로 식어가는 자신을 견뎌야 했을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소녀는 즉사했다.
나그네는 얼어버린 것처럼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거인을 보고 있었다. 모든 조각들이 다시 뭉쳐져 <죽음>이 거인으로 되돌아간 지금, 세계는 가장 죽음이 메마른 순간이었다. 소녀도, 소녀의 아버지도 거인의 조각이었음을 나그네는 직감한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죽음>의 마지막 조각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깨달음의 불꽃으로 새하얗게 탈색됐다.

얼마 후, 마을 사람들은 나그네가 머리에 쓰던 흉측한 검은 금속을 발견했다. 그들은 그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다른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발자국도 없었다.
블루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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