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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협회에서 온 남자

2010.11.18 02:2211.18

그 짓을 마칠 즈음 벨소리가 울렸다. 나는 바짝 긴장하여 인터폰 화면에 떠오른 남자의 인상착의를 주의 깊게 살폈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숨을 고른 다음, 목소리를 가다듬고 나서 수화기를 들었다. (그 짓의 막바지에 나는 무슨 약 먹은 사람처럼 흥분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하긴 누군들 안 그럴까?)
“누구세요?”
화면 너머에서 꼼지락거리던 남자의 움직임이 순간 굳었다. 나는 그런 남자의 반응, 표정, 동작 하나 놓칠세라 신경을 곤두세웠다. 어쩐지 남자가 나보다 더 긴장해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쭈뼛거림이 조악한 화면을 통해서도 똑똑히 전해져 왔다.
“이렇게 불숙 찾아와서 죄송합니다만…, 저기 혹시…, 일을 보는 중이신가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서 최대한 침착하게 응수했다.
“아, 예, 지금 재택근무 중이기는 한데…, 그런데 누구세요?”
남자는 불안하게 좌우를 돌아보다가, 남이 들으면 안 된다는 듯 인터폰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가 얼굴을 너무 바짝 들이민 탓에 화면이 까맣게 가려졌다. 나는 그가 실제로 내게 얼굴을 디밀기라도 한 양 몸을 뒤로 뺐다.
“저는 ‘협회’에서 나왔습니다.”
“협회요?”
내가 무슨 협회에 들었던가?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짚이는 게 없었다.
“무슨 협회에서 오셨죠?”
“아, 저기…, 놀라시게 하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만…, 다 알고 왔습니다. 긴히 말씀드릴 게 있는데 좀 들어가도 될까요? 아주 잠깐이면 되는데……. 틀림없이 도움이 되실 겁니다.”
나는 수화기를 든 채로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 그토록 많은 생각을 한 건 처음일 것이다. 이미 다 알고 있다라…. 그렇다면 열어줘야 하는 게 아닐까? 뭘 알고 있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알고 있다는데 안 열어주고 아니라고 빡빡 우기는 것도 지금 내 입장에서 바람직한 처사는 아닌 것 같다. 결국 나는 그를 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그냥은 아니다. 저런 수상한 인간을 집에 들이는데, 혹시 모르니 채비는 해 둬야지. 나는 그에게 30분 뒤에 다시 오면 안 되겠느냐고 했다. 그러자 그는 다 이해한다는 듯 순순히 그러겠노라 하고는 화면에서 사라져 버렸다. 대체 뭘 이해한다는 걸까. 좀 이상하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하던 걸 마무리하고, 그녀에게는 사과한 후에 침대 아래에 숨게 한 다음, 모든 걸 깔끔하게 정리하고 의심 갈 만한 것은 모조리 치워두었다. 그리고 그가 강도나 사기꾼일 것에 대비하여 약간의 준비까지 마쳤다.
정확히 30분 뒤, 그가 돌아와 초인종을 누르자 나는 문을 열어 주었다. 이때 나는 말끔히 복장을 갖춰 입은 뒤였다. 그는 주뼛대며 자기가 혹시 너무 일찍 온 것은 아니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면 금방이라도 굽실굽실 사과할 기세였다. 나는 딱 맞춰 왔으니 걱정 말라고 안심시키며 그를 안으로 들였다.
조금 큰 듯싶은 쓰리버튼 감색 양복을 입고서 소파에 앉아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며 여기저기 쳐다보는 그의 모습은, 일단은 영락없는 촌뜨기였다. 나는 그에게 아메리카노를 드시겠냐, 에스프레소를 드시겠냐, 아니면 라떼를 드시겠냐고 굳이 물었다. 그는 격하게 고민하다가 에스프레소로 달라고 했다. 나는 원액 커피 포장을 까고 작은 잔에다 따른 다음 그대로 그에게 내주었다. 그는 잔에 담긴 진한 색의 끈적이는 액체를 보고 잠깐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았으나, 곧 커피에 대한 아무런 칭찬도, 불평도 없이 다만 구겨진 얼굴로 홀짝홀짝 들이켰다. 나는 우유를 잔뜩 넣은 라떼가 담긴 잔을 들어 올리다가 미처 닦지 못한 립스틱 자국을 발견하고는 손가락으로 슬쩍 문질러 지웠다. 땀을 닦으며 태연한 척 물었다.
“그래, 무슨 협회에서 오셨다고요?”
그는 벌써 목구멍으로 넘겨버린 커피의 쓴 맛이 아직도 입안을 맴도는지 천박스럽게 입맛을 쩍쩍 다셨다.
“공식적인 이름은 없습니다. 뭐, 대외적으로는요.”
“그렇다면 대내적으로는?”
“아, 그건…, 선생님께서는 아직 가입을 안 하셨으니까요.”
“내가 꼭 가입을 해야 하는 건가요?”
“오해는 마십시오. 저희는 가입을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하시든 안 하시든 그거야 전적으로 선생님 마음이죠. 그래도 하시는 게 여러모로 좋으실 겁니다.”
“어째섭니까?”
“네? 에, 뭐…, 여러모로 도움이 될 테니까요…….”
“그러니까 대관절 무슨 협회고, 대관절 무슨 도움을 주겠다는 건데요?”
남자는 커피를 약 1cc정도 들이키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가 다시 폈다. 그는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다가, 꺼진 티브이에 비친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고, 다시 커피를 1cc정도 들이킨 다음, 이 모든 행동을 한 번 더 반복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 선생님께서 하시는……일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베란다에 죽 늘어선 화분들을 힐끗 보았다.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고자 애써야 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데요?”
“글쎄요, 이를테면…, 그러니까…뭐, 어쨌든 떳떳한 일을 하시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 그러니까 제 말은, 아직은 떳떳한 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오호라.”
나는 녀석이 눈치 채지 못하게 코로 천천히 심호흡을 하면서 괜히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한담?’
우리는 한동안 매우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묻기로 했다. 여차하면…, 하는 생각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어디까지 알고 있죠? 아니, 어디까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물론 전부 답니다.”
“그렇다면 내가 ‘불법적인 일’을 하고 있고…, 그러면 그쪽은 나를 협박하러 오신 거로군요?”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내가 만반의 준비랍시고 짜 놓은 시나리오를 곱씹기 시작했다. 그에 이르는 가장 자연스럽고 효과적인 경로와 동선을 따지면서. 남자가 손사래를 쳤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해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저 가입 권유를 하러 온 거니까요.”
“난 그런 협회가 있다는 얘긴 처음 들었는데. 아니, 사실 아직도 무슨 협횐지 모르겠군요. 본래 협회란 게 이름으로 반 먹고 들어가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 이름도 없는 협회라니 하는 소립니다.”
“대외적으로만 없을 뿐이죠.”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해합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으니까요.”
“그럼 당신도 회원이란 말입니까?”
이 말에 그는 묘한 웃음을 흘렸다.
“물론이죠. 지금은 협회 사무실 직원이기도 합니다. 직원 모두 기본적으로는 회원이에요.”
그의 말이 전부 믿기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흥미가 생기기는 했다. 좀 더 묻기로 했다.
“그럼 현재 회원은 얼마나 됩니까?”
남자는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이미 아무 의미 없어진 무언가를 상기하려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대략 2000명쯤 될 겁니다.”
나는 ‘농담이 지나치시군.’하고 말해 주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지. 이 자식 아무래도 진짜 사기꾼인가 보다.
“그거 참 대단하군요. 국내만 따진 건데도 그렇습니까?”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굉장히 해맑은 웃음이라서 나는 놀랐고, 또 불쾌해졌다.
“하시는 일에 대해 굉장한 특권의식을 가지신 것 같군요. 아, 죄송합니다.”
돌연 그가 정색했다.
“놀리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제가 감히 어찌……. 제가 웃은 건 저 역시 그렇기 때문입니다. 자기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다는 건 좋은 거죠.”
그러고는 다시 밝게 웃었다.
“국외까지야 어쩌겠어요? 하기는 사실 우리도 지부나 마찬가지니까요. 총회가 있기는 합니다만, 거진 다 지부에서 하는 거지 딱히 영향력도 없고 하는 일도 없습니다…….”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였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금세 후회하는 기색을 보였다. 나는 이 다양한 표정의 변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하긴, 그 정도도 못 되면 협회라 할 수 없겠지…….”
얼마간 침묵이 이어졌다.
남자는 이제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하나 고심하는 것 같았다. 덜떨어진 놈 같으니. 뭐 이런 녀석을 보내서……. 협회라는 데도 참 알 만하군. 그가 입을 열려고 하기에 나는 선수를 쳤다.
“서로 바쁜 사람들이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거기 가입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이득이 있는 겁니까?”
“아, 이득이요. 이득이야 많지요. 가령 선생님께서는 얼마 전에 곤경에, 그러니까……절체절명의 상황에 빠지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때 그…….”
분명 있었다. 그땐 정말이지 다 끝장나는 줄만 알았지. 한데 그건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를 텐데……. 그런 것까지 다 알고 있다는 말인가? 설마 협회란 데가 진짜로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벌컥 화가 났다. 그렇다면 동종 업종에 종사한다는 이놈들은 당시 내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단지 내가 회원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걸 지켜보고만 있었다는 건가? ……아니지, 아니야. 그런 데가 진짜 있을 리가 없지. 그냥 한번 해 본 말일 테다. 나는 혹 내가 너무 티 나는 얼굴을 하지나 않았는지 새삼 걱정이 됐다.
“……때도 도움을 드릴 수가 있겠지요…….”
남자는 자신이 없어졌는지 말꼬리를 흐렸다. 아무래도 내 표정의 변화가 꽤나 극단적이었나 보다. 씁쓸한 얼굴로 아직 입 안에 남은 말을 녹이며 고개를 푹 숙이는 그가 어쩐지 측은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아닌 척 짐짓 놀라워했다.
“아니, 당신네들 힘이 그렇게나 막강하다는 겁니까? 에이, 그래도 그건 힘들 거 같은데…….”
“뭐, 그게, 그러니까…, 뭐, 우리가 손댈 수 없을 만큼 망가진 상황이라면야 아무래도 힘들겠지만…, 그렇지만 가능한 선에서는 분명히 도움을 드릴 수가 있을 겁니다.” 그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예를 들면요?”
“왜, 얼마 전에 그런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무슨 일이요?”
“그, 왜, 저기, 북한산에서……아니, 별로 좋은 예는 아닌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그의 얼굴이 더 흐려졌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갑자기 밝아졌다.
“물론 합법적인 해결이라면, 협회 차원에서 충분히 도울 수 있습니다.”
“‘합법적’이라면?”
“금전적인 도움을 말하는 겁니다. 그거라면 가능한 선에서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 참, 지나치게 현실적인 답변이다. 이거 너무 디테일한데. 위험해.
“흐음, 불법적인 일에 대한 합법적인 해결에의 보장이라……. ‘가능한 선’에서라…….”
“그뿐만이 아닙니다. 저희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유용한 정보를 드릴 수도 있고요.”
“그럼 그거, 혹시 일할 때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건가요?”
“물론이죠! 저희는 회원 간 중개도 해 드리니까요.”
그는 금세 자신만만해졌다. 나도 이건 좀 구미가 당긴다. 물론 협회가 진짜라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원칙적으로 이 일이란 게, (어차피 내게는 취미에 불과하지만)천상 아마추어로 시작해서 혼자 힘으로 경험을 쌓고 그렇게 성장해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인데, 선배들의 노하우를 제공받을 수 있다니 나로서는 당연히 구미가 동할 수밖에. 하지만…….
“그런데 당신들 정말 문제없는 거 맞아요? 그렇게 덩어리가 돼 버리면 조만간 수면에 떠오를 수밖에 없을 거 같은데…….”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회원 모두 철저히 함구하니까요.”
그의 잔이 비었기에 나는 그의 눈앞에서 커피 원액을 하나 까 잔에다 부어 주었다. 그는 자기 앞에 놓인 잔을 심각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정말 문제가 된 적이 없습니까? 한 번도?”
내 물음에 남자가 얼굴을 들고서 단호히 말했다. “한 번도. 단 한 번도요.” 그리고 이어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이런 게 있다고 설마 누가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선생님도 믿지 않으시잖아요. 아니, 지금은 믿으시죠?”
글쎄,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는 내 커다란 머그잔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면서 계속 말했다.
“우리는 역사가 깊습니다. 저 옛날부터 존재해왔죠. 저 위로는 지배자들로부터 저 아래 노예에 이르기까지 우리 회원들은 성별, 신분, 나이를 불문하고 언제, 어디서나 있어왔습니다. 뭐, 지금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어디서 갑자기 뚝 떨어진 사람 취급을 하면서 혀를 차고 요란을 떨지만, 사실 우리는 쭉 있어왔지요. 우리를 조롱하거나 딱하게 생각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쭉 말입니다. 그 정도인데 하물며 협회야 오죽하겠습니까? 사람들이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사실은 저 유서 깊다는 프리메이슨보다도 오래됐지요.”
“프… 뭐요?”
“아, 그런 게 있어요. 비밀결사라면서 온갖 냄새 풍기는 건 다 흘리고 다니는 칠칠치 못한 것들이 있습니다.”
이 자식 뭐라는 거야? 나는 좀 짜증이 났다. 아마 그도 내 표정에서 그걸 읽어낸 모양이다. 그가 황급히 말을 돌렸는데, 이마에는 어느새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어쨌든 가입하시면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제가 장담, 아니 보증하겠습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고급 정보와 정보망을 가지고 세련되게 일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그건 참 많이 당기긴 한다. 구질구질한 영세업자 같은 작업환경이긴 했으니까. 시작부터 입때껏 말이지. 뭐, 어디까지나 협회가 진짜라는 전제하에서 말이지만.
“그쪽 말을 종합해 보니 무슨 노조 같기도 하고…….”
“뭐, 회원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측면에서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죠.”
남자는 한시름 놓았는지 빙그레 웃었다. 진한 커피액에 얼룩진 누런 앞니가 보였다.
“그럼 회비도 있겠군요?”
내 말에 그의 표정이 다시 무겁게 변했다. 그는 처음 봤을 때처럼 쭈뼛거리기 시작했다.
“그, 무리가 가실 정도는 아닐 겁니다…….”
역시 있다는 거로군. 이런 걸로 한몫 잡으려는 녀석들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어디에나, 우리처럼. 잠깐, 그렇다면 일단 협회라는 데가 진짜로 있기는 있다는 얘긴데……. 어떤 형태로 있는지가 문제겠지만.
“그 정도 일을 해주는 협회라면 회비도 꽤 비쌀 거 같은데…….”
“협회에서는 그걸 회비가 아니라 ‘상납’이라고 하죠.”
“상납? 왠지 좀 강제적인 느낌이 드는군요.”
그는 한층 수심이 깊어진 얼굴로 절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회비’보다 민주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 어째서요?”
“뭐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개 회비라는 건 일정한 금액을 걷는다든가, 아니면 회원이 자발적으로, 자율적으로 내든가 둘 중 하나겠죠. 한데 후자의 경우엔 집단 이기주의가 발생할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나라 국민성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런 식으로는 아마 협회 유지도 힘들걸요? 감투에 눈먼 교활한 인간들만이 한몫 챙기려는 음흉한 목적으로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게 뻔하죠. 그러면 전자는 어떨까요? 일괄적인 회비 징수는 공평하긴 해도 공정하진 못합니다. 회원 각자의 상황이 다 다르니까요. ‘상납’이란, 회원 각자의 상황에 걸맞게 납부하는 제도입니다. 그에 대한 신뢰할 만한 조사도 매년 이뤄지고 있고요. 그야말로 민주적이죠. 물론 그렇게 상납된 금액은 운영비의 용도로만 순수하게 쓰입니다. 혹시 그걸 우려하고 계신 거라면…, 우리 협회의 운영은 아주 투명하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년 그걸 공개하고 있습니다. 한 점 의혹 없이 말이죠.”
그는 다시 의기양양해져 있었다. 이것만큼은 자신 있다는 듯.
“그럼 나는 얼마나 내야 되는 겁니까?”
남자는 주머니에서 안경과 수첩을 꺼내더니 안경은 쓰고, 수첩은 펼쳐서 여기저기 뒤적거리다가 한 곳에서 멈췄다. 그는 눈으로 글자를 하나하나 더듬었다.
“선생님의 직업과 소득 수준대로라면…….”
“지금 백숩니다만.”
“네?”
남자는 놀랐는지 안경알 위로 눈을 치켜떴다.
“선생님께서는 분명 이 일을 취미로만 하…….”
“뭐, 지금은 본의 아니게 본업이 됐죠. 일은 그만둔 지 꽤 됐어요. 덕분에 이 꼴이지. 말 나온 김에 물읍시다. 이걸 본업으로 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긴 있어요? 암만 머리를 굴려 봐도 돈 나올 구석은 없어 보이는데…….”
“아, 그, 글쎄요. 뭐, 본업으로 삼는 사람이야 상당수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회원들의 생계 문제까지는 저희 소관이 아니니까요. 우리가 그런 성격의 협회는 분명 아니지요.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야 충분히 있습니다. 선생님도 대충 아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절대 협회 차원에서 권고하지는 않습니다. 협회는 오히려 그것을 지양하는 입장이죠. 그나저나 이거 참, 제가 실례했습니다. 정보가 틀렸나 보네요. 저…, 오해하실 까봐서 말씀드리는 건데, 저희 정보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다 제 불찰이죠. 아직도 이렇게 수첩을 들고 다니다 보니…….”
그는 수첩을 들어 보이며 멋쩍게 웃었는데, 한편으로는 자존심에 입은 상처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몸부림치는 것 같아 안쓰러웠고, 또 한편으로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대상을 향해 분개하고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 같아 의아스러웠다.
“요즘 스마트폰이니 뭐니 해서 다들 실시간으로 정보를 주고받는 것 같던데, 그래서인지 매번의 정보에 대해 사실 확인이 엄격치가 못한 것 같습니다. 인간이란 참, 기계가 정교해져갈수록 허술해져가는 존재인 것 같지 않아요? 저는 그래서 기계가 싫습니다. 뭐, 제가 워낙 기계치인 까닭도 있지만요. 어쨌든 죄송합니다.”
그는 슬픈 얼굴로 수첩의 그 면을 뜯어 박박 찢었다.
“저는 지금 수입이 거의 없습니다. 그나마 모아둔 돈이 있어 겨우 살고 있는 거죠. 그런 내가 상납을 해야 한다면…….”
그가 돌연 상체를 내밀고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면…, 수입이 전혀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전혀’는 아니고…, ‘거의’죠. 뭐, 그게 그거지만.”
“그렇지만 선생님은 전문직으로…,”
“다시 할 수 없을 거요. 다시 할 생각도 없고.”
“하지만…,”
그는 포로에게 강한 동정심을 느끼는 전향 권고 심문관처럼 나를 설득하고자 무던히 애썼다. 나는 그런 그에게서 어떤 절박한 무언가가 서서히 드러남을 감지하고 있었다.
“좋아요. 그렇다고 칩시다. 상납에 대해 다시 말해 봐요.”
이 말에 그의 얼굴이 급격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당장에 조금 어려우시다고 해도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상납’은 매우 민주적인 방식이고, 어디까지나 회원분의 소득수준에 맞게 청구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현금이 많이 부족하신 경우에는…, 현물로도 받고 있으니까요.”
“‘현물’이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강제 집행으로서의 ‘압류’와는 다르니까요.”
“그럼 뭔데요?”
사내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빛나는 눈으로 내게 신호를 보냈다. 다 알고 있으면서, 라고 말하는 듯한 그런 얼굴이었다.
“설마…,”
그는 내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그렇습니다. ‘수확물’말입니다.”하고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다 안다는 양 눈을 지그시 감고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아 얼마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것은 놀라움이라기보다는, 분노라는 큰 정서적 폭발에 앞선 반동적 공백의 상태에 가까운 것이었다. 도저히 침해받을 수 없고, 또 침해받지도 않으리라 생각했던 나만의 민감한 영역을 향해 탐욕의 손길을 뻗치려드는 폭력의 기운. 그것을 나는 어렴풋이 예감한 것이다. 이놈(혹은 이놈들) 속셈이 이건가?
침묵이 계속되자, 남자 역시 뭔가 잘못되었다고 깨닫기 시작한 것 같다. 그는 입을 굳게 닫고서, 자기를 쏘아보는 내 시선을 조용히 맞받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돌이킬 기회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는 내게 눈을 고정한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
“물론 강제적인 것은 아닙니다. 협회와 회원 간의 조정도 충분히 가능하고요. 더구나 선생님이시라면 그렇게 우려하실 필요는 없으실 것 같은데요…….”
“그 말인즉슨, 가입하는 대신에 내게……일을 하라는 겁니까?”
“아, 그런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내 눈치를 신중하게 살폈다. “선생님이시라면 그 어느 쪽도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아까하곤 말이 다르군요. 돈을 원하는 겁니까, 수확물을 원하는 겁니까?”
“둘 다지요. 선생님께서는 양방향으로 모두 능력이 있으시니까요. 우리 협회는, 그렇습니다, 우리는 선생님 같은 회원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협회 운영에 있어 정말 큰 도움이 될 테니까요. 이를테면 윈-윈 게임인 거죠.”
“좋아요. 그렇다면 수확물은 얼마나 상납하면 되겠습니까? 월에 한 번? 분기별? 아니면 1년 단위로? 나도 내 능력이 어느 정돈지 모르겠군요. 누구랑 비교해 본 적도 없고……. 그리고 나는 정기적으로 수확하는 타입도 아니라서.”
“지금 말씀하신 상황대로라면…, 연 6대 4정도면 될 겁니다.”
“뭐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6대 4라니. 말도 안 된다. 더구나 이 녀석들 이 정도로 자신 있게 말한다는 건…, 앞으로 나를 철저히 모니터링하겠다는 뜻일 테다. 결국 나를 하청업자로 부리시겠다? ……물론 협회가 진짜라는 전제하에서지만.
“다시 말씀드리지만 조정이 충분히 가능한 부분입니다. 또 선생님께서 다시 일을 시작하신다면, 현물 상납은 최저 9대 1정도로까지 조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는 당장 이 녀석 턱을 날려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말이지 가공할 인내심을 발휘하여 꾹 참았다.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앉히자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협회란 게 진짜 있을 리는 없고…, 나에 대한 정보를 우연히 입수하고 사기를 치는 거라기엔 태도가 조금 이상하다.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걸까? 조직? 기관? 뭐가 됐든 나한테 좋은 상황은 아니다. 전자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등쳐먹으려 들 테고, 후자라면……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하지만 이 녀석의 안이한 태도를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은 또 별로 없어 보인다. 이 자식, 정말 뭘 알고 있기는 한 걸까? 그저 떠버리 사기꾼에 불과한데, 내가 홀딱 속아 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놈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좋습니다. 한데 이렇게 중요하고 민감한 얘기를 하자니…, 그 뭐랄까…, 좋아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내 ‘수확물’이 어디 있을 거 같습니까?”
남자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은 몹시 시무룩해진 채였다. 그가 시들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아직 못 믿으시는 거군요?”
그는 이제까지 내게 쏟아 부은 열정과 노력이 모두 허사였음을 깨닫고 허망해하는 것 같았다. 그는 간혹 나를 원망하는 것도 같고 저 자신을 원망하는 것도 같은 표정을 허무 속에 떠올렸다.
“그렇다고 갑자기 그렇게 다운되실 것까지야……. 글쎄요, 못 믿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내 입장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 아닙니까?”
그제야 그는 약간 밝아진 태도로 손을 들어 화분을 가리켰다.
“저는 저게 의심스럽군요. 하지만 저것뿐이 아니겠죠. 아마 여러 곳에 있겠죠? 가입은 늦으셨지만, 그래도 선생님은 프로니까요.”
나는 뜨끔했다. 정말 뭘 알긴 아는 것 같은데……. 음, 뭐, 이제는 상관없지만.
“내가 프로라고요? 돈 버는 법도 모르는데?”
“협회는 가입권유를 하느냐 마느냐 여부를 대상이 프로냐 아마추어냐의 기준으로 따집니다.”
“그러면 왜 여태 안 찾아왔습니까? 왜 이제 와서…….”
그는 내 당연한 질문에 매우 당황하는 것 같았다. 한심하다. 가입을 따내러 다닌다는 놈이 그 정도도 생각을 않고 다니다니. 진짠지 가짠지는 몰라도 그 협회라는 데, 덜떨어진 녀석들만 득실대는 곳일 게 안 봐도 뻔하다.
“……확인할 필요가 있었으니까요. 선생님께서 중간에 그만두실지 어찌 알겠습니까? 중간에 겁을 먹고서, 또는 싫증을 느끼고서, 아니면 종교에 귀의하면서 그만두는 사람들이 꽤 있어요. 그런 담력으로 여태 용케 해왔구나 싶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일 순 없죠. 중간에 그만두고 새사람이 되겠다고 하기라도 하면 협회로서는 골치가 이만저만 아픈 게 아닙니다. 협회가 제일 고심하는 부분이기도 하죠. 상납 문제도 있고요. 선생님께 제안이 이제야 들어간 것은 선생님의 성향을 조금 더 두고 봐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저희도 신중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거 영광이군요.”
나를 인정해 준다니 어쨌든 고맙기는 하다. 얼만 전에야 안 거지만, 사실 나는 뼛속까지 이쪽 세계 사람이거든.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것 같다. 어쩌면, 너희들보다도 더 그럴지 모르고.
“저,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는 머뭇거렸다. “아마 저를……형편없는 놈이라고 생각하시겠죠.”
정답이다.
“부끄럽지만 제 첫 가입권유가 바로 선생님입니다. 협회의 권유로 일하게 된 뒤 교육을 받고 나서 처음으로 현장에 투입되는 거거든요. 제가 버벅댄다고 느끼셨다면…, 아마 그래서 그런 걸 겁니다. 그래도 교육은 꽤 좋은 성적으로 마쳤는데, 이게 정말 쉽지가 않네요. 이론이랑은 완전히 달라요. 교육대로라면 지금쯤 흔쾌히 가입 서약을 받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런 말씀 드리면 선생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왠지 선생님이 남 같지가 않습니다. 가입 대상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선생님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그렇게 느꼈어요. 여러모로 저와 닮으신 점이 많은 것 같아요. 혹시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느끼지 않으셨는지요? ……이런 말을 하자니 부끄럽네요. 어쨌든 저는 그래서 더 선생님이 가입을 해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하하…….”
그는 정말로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심지어 말하는 도중에 몸을 비비 꼬기까지 했다. 나는 그를 남 같지 않게 느끼기는커녕, 걷잡을 수 없을 만치 혐오만 치솟는 걸 느꼈다. 뭐? 내가 저랑 닮았다고?
“그런가? 잘 모르겠는데……. 내가 댁에 대해 뭘 알아야 말이죠. 당신 말 대로라면, 그쪽은 나를 잘 알지만 나는 그쪽을 모르는 셈이잖아요?”
나는 아마 정색을 하고 말했을 것이다. 남자는 금세 침울해졌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났는지 말했다.
“혹시……여기, 여자분이 있지 않습니까?”
“뭐라고요?”
“아뇨, 확실해요. 처음 들어올 때부터 알았죠. 냄새가 나요. 향수 냄새요. 화장품 냄새도……. 이건 내가 좋아하는 냄새예요. 아마…,” 그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 그의 목 위에 떠올라 있었다. “아마 제가 갑자기 찾아와서 놀라신 모양이지요?”
“……무슨 소립니까? 여태까지 날 지켜봤다면서요. 그러면 알고 있을 거 아닙니까?”
“아닙니다. 최근에는 아니에요. 서류작업 문제도 있고, 최근에는 사무실에서만 일했거든요. 그렇지만 알 수 있어요. 확실해요. 이건 내가 잘 아는, 제일 좋아하는 향수 냄새예요. 제 옛 여자 몇이 이걸 썼죠. 분명 매력적인 여성분이겠죠? 아, 저도 뵙고 싶네요. 보세요, 선생님과 저는 여자 취향까지 비슷하잖아요? 우린 분명히 닮았어요.”
아, 화가 난다. 이런 개자식.
“음,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한없이 기쁜 표정으로 바뀌었다.
“좋아요. 맘에 드는군요. 가입하기로 합시다. 그럼 ‘상납’은 당신이 제안한 대로 하지요.”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요.”
그는 날아갈 듯이 기뻐하면서 관련 서류를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얼핏 그의 가방에서 금속으로 된 뭔가를 본 것 같았다. 그가 꺼낸 서류는 총 열 장이었다.
“여기다 사인만 하시면 됩니다.”
어찌나 기뻐하는지 그는 이제 거의 숨을 헐떡이는 지경이었다.
“아니, 아닙니다. 이렇게 중요한 서류에 사인이라니요. 협회가 지부라고 했죠? 아마 서구에서 들어온 거라 그쪽 식으로 하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에서 공신력 있는 증명이란 사인이 아니라 도장으로 이뤄지는 겁니다. 잠깐 기다려요. 인감도장을 가지고 오지요.”
“그러시겠습니까? 그래주시면 저야 고맙죠. 첫 계약을 그렇게 제대로 해 간다면 저야말로 좋은 거니까요.”
그는 몹시 달뜬 목소리로 새가 노래하듯이 짹짹댔다.
나는 침실로 가서 그걸 꺼냈다. 그러고는 일부러 크게 소리쳐 말했다.
“그리고 말예요! 아까 위급한 상황에 도움을 준다는 그거 말인데, 그러면 일종의 보험의 개념으로 생각해도 되겠군요!”
저쪽에서도 소리쳤다.
“아, 보험과는 다릅니다! 어디까지나 회원 당사자만의 문제니까요!”
내가 빼꼼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자 그가 빙그레 웃으며 소리를 낮춰 말했다.
“대신 상조 역할 정도는 해줍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혼자 지내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협회 차원에서 적극 도와주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현재 혼자시죠? 독신은 아니시지만.”
나는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거 다행이군요. 그런데 그쪽은 어때요, 가족이 있어요?”
그는 또 배시시 수줍게 웃고는 탁자 위에 놓인 서류로 시선을 깔고서 나지막이 말했다.
“노모가 계십니다만…, 친척도 친구도 사실상 없는 거나 마찬가지죠…….”
“이거 참 몹쓸 직업병이죠.” 내가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걱정은 안 해요. 협회에서 특별히 우리 모자 모두를 도와주기로 했거든요. 제가 협회에서 일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협회는 참 고마운 곳이에요. 그리고 아까 말씀 못 드렸지만 불미스러운 일을 당할 시에는…….”
그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내가 도끼로 두개골을 찍었으니까.
뼛속에 콱 박힌 도끼를 뽑아내자 뇌 조각 일부가 딸려 나왔다. 남자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벌려진 틈으로 뇌수와 핏물이 벌컥벌컥 쏟아져 나왔다. 몸이 꿈틀거렸다.
젠장. 카펫 버렸네.
어차피 버린 카펫, 침까지 퉤 뱉고는 피가 퍼지는 남자의 주위로 신문지를 뭉텅뭉텅 깔았다. 피가 스며들어 금방 검게 물들었다. 남자는 미처 눈도 감지 못하고 엉덩이를 쳐든 채 엎어져 있었다. 아직 살아 있는지 뭐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의 얼굴로 귀를 가져갔다.
“뭐? 뭐라고? 안 들려. 크게 말해.”
들릴 듯 말 듯 꺼져가는 말소리를 모두 주워듣고 나는 일어섰다.
“좆까. 씨발 새끼.”
그러곤 도끼를 내리쳤다. 남자의 목이 뎅강 떨어져 나와 데굴데굴 굴러갔다. 얼굴은 끝없이 굴러갈 것만 같았다. 그러다 커다란 화분에 부딪혀 멈춰 섰다.
제 무덤 제가 아는군.
나는 놈을 토막토막 썰어 작은 조각은 화분에 묻고, 그러기에 곤란한 큰 조각은 봉투에 담아 액체가 비어져 흐르지 않게 정성껏 포장했다. 이건 나중에 갖다 버릴 것이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내버렸다가 발견되면 골치 아파질 수 있는 머리는 가장 큰 화분에다가 세심하게 묻었다. 화분에는 사과나무가 심어져 있다. 로하스 사과나무. 아름답고 탐스러운 열매를 맺게 하려면 그에 합당한 양질의 비료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쓰레기나 다름없는 이 녀석의 머리가 제발 악영향이나 끼치지 않았으면……. 나의 간절한 바람이다.

일을 마치고 나서도 나는 계속 씩씩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여느 때와 같은 그런 흥분은 아니다. 분노였다. 녀석의 불경한 피로 집안이 온통 엉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철저한 준비 없이 처리해 버린 까닭이다. 이거, 치우려면 고생 좀 하겠는데. 그 고생을 떠올리자 울컥해졌다. 이 더러운 기분을 어찌해야 좋을까? 하기는 단지 집안의 더러움 때문만은 아닐 테다. 어쨌든 나는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아니, 절실했다.
나는 침실로 갔다. 침대 밑을 들여다보았다. 어둠 속에 휘둥그레 뜬 허연 눈이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여자를 거기서 끌어냈다. 여자는 공포에 질린 눈을 희번덕거리며 발버둥을 쳤지만, 어림없다. 꽁꽁 묶어놨으니까. 여자를 침대 위로 끌어올렸다. 침대는 비닐로 꼼꼼히 포장돼 있다. 침대 뿐 아니라 벽이며 천장이며 죄다. 여기가 내 작업실이다. 그런데 막상 여자를 보니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아껴 쓰려 했는데……. 별안간 다시 화가 치솟는다. 이게 다 그놈 때문이다. 덜떨어진 사기꾼 새끼! 문뜩 놈이 말한 ‘냄새’가 떠올랐다. 그래서 킁킁거리고 맡아보니, ……과연 난다. 나도 모르게 이 냄새에 끌린 걸까? 그 머저리 자식이 나보다 내 취향을 더 잘 알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자존심에 깊디깊은 상처를 입었다. 기분이 아까보다 한층 더러워졌다. 여자야, 제발 나를 흥분시켜 줘. 나는 톱과 칼을 쥔 양팔을 들어올렸다. 앙상한 날개 같은 그림자가 여자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

며칠 뒤, 초인종이 울렸다.
나는 작업복을 입은 채 인터폰으로 가서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화면 앞에 서 있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마지못해 수화기를 들었다.
“누구세요?”
남자는 화면을 향해 히죽 웃어 보이고는 말했다.
“협회에서 나왔습니다.”
이런, 젠장.
문뜩 이전에 왔던 남자가 죽기 직전에 한 말이 떠올랐다.

“……복수를……당신은……죽을 거예요……”

아아, 이제 어쩐다?

나는 문을 열어 주었다.
댓글 4
  • No Profile
    엄길윤 10.11.18 05:17 댓글 수정 삭제
    헉!! 주인공이 무슨 일을 하는 건지 또 어떤 협회인지 대충은 감이 왔지만, 흥미를 느끼며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왜 중간에 끊긴 건가요?ㅜ,ㅜ
  • No Profile
    마그마 10.11.18 16:24 댓글 수정 삭제
    아, 죄송합니다. 저게 끝이에요... ^^;;
  • No Profile
    비슷한 컨셉을 하나 생각하던 게 있었는데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좀 뒤에 유사제품(?)이 하나 올라오더라도 이해를 ^.^;;;
  • No Profile
    개념초월 10.11.20 10:48 댓글 수정 삭제
    와...

    설마 혹시 이런 느낌을 조금은 갖고있었는데

    마지막 쯤에 급격히 성격이 변하네요

    재밋게읽었습니다.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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