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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별빛 우산

2006.11.14 01:2111.14

별빛 우산

"엘--. 엘---. 이 애는 또 어딜 싸돌아다닌담."

위버부인이 국자를 든 채로 집주변을 돌며 소리를 높이자, 리츠숲의 고요함이 새들과 함께 날아 올라갔다. 오늘은 여덟 아이르 만에 돌아오는 『눈물의 날』이다. 눈물의 날은 붉은 산 아래 리츠숲, 레븐숲, 커핀숲, 윈들숲.....등 열다섯 숲 속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날이다. 성(聖) 리타공주의 날도 파란 태양의 날도 모두 중요한 날이지만 눈물의 날은 여덟 아이르 만에 돌아오기에 어떤 날보다 귀하고 귀한 날이다. 80 아이르를 산 노인도 살아 10번 밖에 경험할 수 없는 소중한 날. 그렇다고 해서 성 리타공주의 날처럼 마을처녀들이 예쁜 옷을 만들기 위해서 며칠 동안 밤새워 바느질을 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파란 태양의 날처럼 며칠 전부터 푸짐한 먹을거리와 화려한 축제의 준비로 고생하고 그 뒤에는 후유증으로 며칠 동안 헤롱헤롱거리지 않아도 된다. 단지 모든 숲의 사람들이 리츠강으로 나와 조용히 기도하면 되는 그런 조용하고 경건한 날이다. 물론 준비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난뱅이 한스의 집에도 2개나 있는 물건이기에 특별한 준비는 필요 없다고 보면 된다.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준비물을 챙겨 한 자리에 모여 기도한다는 것이다. 아주 늙은 노인의 노쇠나 어린 소녀의 유희에 대한 갈망으로 인한 건망증이 아닌 다음에야 잊어버릴 리 없는 간단한 사항들이다.

"이 애가 나가면 꼬박 한 나절을 놀다 들어오니....,원. 오늘이 눈물의 날인 걸 알고는 있는 걸까. 준비물이라도 챙겨갔으면 걱정할 필요도 없으련만, 그럴 리가 없지. 그 애가 어미 말은 죽으라고 안 듣는 보통 말썽꾸러기가 아닌 것은 리츠숲, 아니 붉은 산 아래 모든 사람이 알고 있을 테니. 눈물의 날 행사가 시작하기 전에 집에 와야 할 텐데."

시간은 흘러 밤이 왔다. 리츠강으로 나온 열다섯 숲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 손에 준비물을 들고 리츠강 옆에 주욱 나란히 길게 늘어섰다. 그 행렬의 가운데 맥주 상자로 쌓아올린 조촐한 단상에 한 노인이 올라섰다. 단상에 올라선 붉은 산의 사람 중 83 아이르를 살아 가장 나이가 많은 윈들숲의 람 장로가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부터 눈물의 날 행사를 시작하기로 하겠습니다. 모든 붉은 산의 주민 여러분은 준비물을 꺼내 펼쳐주십시오."

"파라-. 파라-. 파-파-. 팡-팡-팡-."

모든 사람들이 별빛 우산을 꺼내 펼쳤다. 리츠강의 양쪽 강변에 수천의 별빛 우산들이 늘어섰다. 그리고 한 동안 모두 말없이 밤하늘만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였으나 그 고요함은 풀 위를 걷는 귀뚜라미의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얼마를 기다리던 중, 람 장로가 나지막이 지금쯤이겠구만..하고 혼잣말을 하자 밤하늘의 붉은 달의 왼쪽 구석이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람 장로가 노인 특유의 탁하고 정든 목소리로 말을 했다. 다른 모든 이들은 별빛 우산을 든 채, 눈을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남겨진 사람들이 떠난 사람들에게 말을 올립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당신들의 눈물을 보는 것은 남겨진 사람들로서 가슴 아픕니다. 여덟 아이르 동안 당신들이 저희를 보며 쌓아온 눈물에 저희도 마음이 아픕니다."

람 장로의 말이 시작되자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가 붉은 달을 향하기 시작했다. 붉은 달의 왼쪽 반이 어둠 뒤로 사라졌다.

"떠나간 사람들의 아쉬움과 안타까움과 슬픔은 남겨진 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부디  여기 남겨진 사람들을 보아 눈물을 거두시고 축복을 내려 주소서."

곧 남겨진 붉은 달의 반도 어둠에 잡아 먹혔다. 언제나 밤의 붉은 숲을 밝히던 붉은 달이 사라진 것이다. 그 대신 떠나간 사람들의 눈물만큼 붉은 달이 조각나고, 조각들은 하늘로 퍼져 수 만개의 별이 되어 온 세상에 별빛의 비를 내리고 있었다.

"와, 너무 아름다워."

리츠강에서 모든 사람들이 별빛 우산을 들고 기도를 올리고 있을 때, 엘은 붉은 산의 꼭대기에 있었다. 엘은 붉은 달이 은은하게 밝혀주는 밤의 리츠숲을 사랑해서 자주 붉은 산의 꼭대기에 올라가 밤의 리츠숲을 보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붉은 달이 사라지고 세상이 어둠에 잠기더니 수만 개의 별이 하늘을 뒤덮은 것이다.

"엄마가 눈물의 날에는 별빛 우산을 꼭 가지고 가야한다고 했는데, 아무 필요 없는 거였잖아? 비가 내리는 것도 아니고 말야. 저렇게 별들이 아름답기만 한데... 와아, 너무 예쁘다."

엘은 수많은 별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밤하늘을 계속 바라보았다.

붉은 달이 완전히 사라지고 떠나간 자들의 눈물들이 하늘을 뒤덮자 람 장로의 말이 조금 빨라졌다.

"여기 한 사람도 빠짐없이 붉은 산의 남겨진 사람들이 모여서 떠난 사람들에게 기원하노니, 눈물을 거둬주십시오. 그 눈물의 비로 대지가 슬픔에 젖었습니다. 언젠가 저희들도 밤하늘에 눈물 한 방울이 될 것 인즉, 남겨진 자로서 떠난 당신들의 삶만큼 사랑만큼 기쁨만큼 행복해질 것을 약속합니다. 부디 슬픔을 거둬주십시오. 당신의 가족, 친척, 친구가 모두 여기에 모여 기원합니다. 우리들의 기도를 들으신다면 부디 붉은 달을 돌려주십시오."

서서히 붉은 달의 왼쪽 끝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그 주변부터 눈물들이 거두어졌다. 모든 사람들은 하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씩 눈물들이 사라져갔고, 마지막 오른쪽의 아쉬움 많은 어떤 이의 눈물마저 들어가자 언제나의 붉은 달이 돌아왔다. 모든 사람들은 기뻐하며 박수를 쳤다.

"이번 눈물의 날에도 떠나간 자들은 우리들, 남겨진 자들을 위해 눈물을 거두어 붉은 달을 돌려주셨습니다. 모든 붉은 산의 주민 여러분들, 더 이상 떠나간 자들의 눈물을 더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오직 사랑과 행복으로 살아가십시오. 눈물의 날 행사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람장로의 마지막 말이었다.

"파라-. 파라-. 파-파-. 팡-팡-팡-."

사람들이 별빛 우산을 접고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얼마 전 남편을 잃은 지스부인은 떠나간 자에 대한 기억으로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당연히 많은 이들이 그녀를 위로하며 그녀의 앞을 인도했다. 그 모습은 모든 이들에게 경건함과 숭고함이 내려와 오늘 밤만은 떠나간 자를 기억하며 남겨진 자로서 살아가야 할 방향을 확고히 해주는 돛을 단 배들의 항해와도 같았다.

"휴우-"

위버부인이 별빛 우산을 접고 한숨을 쉬었다. 곁에 있던 방앗간의 카퍼부인이 물었다.

"아니, 위버부인의 한숨이야 자주 봐왔지만 이번 것은 좀 틀리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또 엘인가요?"

"말한 것도 없이 엘이죠. 이 애가 아침부터 어딜 나가서 놀고 있는지 오늘같이 중요한 날에도 아직까지 안 왔다니까요. 눈물의 날에는 꼭 별빛우산을 챙기고 리츠강으로 나와야 된다고 그렇게 말했었는데. 혹시나 엘 때문에 떠나간 분들이 붉은 달을 돌려주지 않을까 걱정했었답니다."

"그럴 리 있나요. 엘이 말썽꾸러기지만 착한 애인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이에요. 너무 놀아버려서 깜빡 잊어버렸겠죠. 아마 그 애 나름대로 눈물들을 보며 기도했을 거예요."

"그랬으면 다행이겠지만..... 혹시 놀다가 지쳐서 집에 돌아와 씻지도 않고 침대 위에서 자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그거대로 괜찮지 않아요? 엘의 아버지도 하늘에게 그렇게 건강하게 자란 딸을 보며 눈물을 거두셨을 것 같은데요."

위버부인의 입가에 슬픈 미소가 그려졌으나, 그것은 이내 기쁨의 미소로 바뀌었다.

"듣고 보니 그렇군요. 그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죠."

위버부인은 별빛우산 2개를 들고서 집으로 발을 옮겼다. 위버부인뿐 아니라 붉은 산의 모든 사람들이 붉은 달이 밝혀주는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떠나간 자들의 눈물로 적셔진 대지는 붉은 달의 가호 아래 놓여 온 세상의 남겨진 자들에게 축복과 안녕이 전해졌다. 그리고 한 소녀가 별빛의 비에 몸을 흠뻑 적신 채, 붉은 달이 밝혀주는 붉은 산의 꼭대기에서 리츠숲으로 돌아오는 오솔길을 경쾌한 몸놀림으로 빙글빙글 돌면서 춤추며 내려오고 있었다.

<끝>

아시모프의 나이트폴에 대한 오마쥬를 쓸려고 했으나 결과물은 전혀 그렇지 않은 듯 해서 마음이 아픕니다.OTL


댓글 1
  • No Profile
    날개 06.11.16 23:03 댓글 수정 삭제
    나이트폴을 읽지 않아서 오마쥬면은 잘 모르겠네요. 기회가 되면 나이트폴을 꼭 읽어봐야겠어요.^^ 별빛 우산이라는 게 참 멋진 것 같아요. 특히 머릿속에서 상상된 이미지는 환상적이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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