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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파도 - 퇴고작

2005.09.16 22:4809.16

파    도


다른 세상, 그것은 이 세상 안에 존재한다.
― 폴 엘뤼아르(Paul Eluard)


  허연 이빨에 갈기갈기 찢기는 고기 뼈다귀는 순식간에 피스의 목구멍 안쪽으로 사라졌다. 이미 세 개를 씹어대고도 더 달라고 꼬리를 치며 달려드는 녀석에게 햄스터 인형을 던지자, 한 바퀴 공중돌기를 하고 그것을 물어온다. 잘 했어, 칭찬 대신에 나는 뼈다귀를 하나 더 던져 주었다.  
  흙먼지를 함께 먹어도 되는 걸까. 동물의 위장이란 튼튼하네.
  J는 피스의 등허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J의 초록색으로 칠해진 손톱을 주시했다. 사 주째. 벌써 사 주째인가. J는 피스의 귀를 잡아당기면서 못살게 굴었다. 먹이를 먹다가 성가셔진 피스는 이내 으르렁거렸다.
  귀찮아졌어.
  J는 움찔거리면서도 말은 그렇게 했다. 피스의 귀를 놓으면서 내 허리를 붙잡는 J의 손. 지금 막 피스를 만진 J의 손에서는 개 특유의 냄새가 났다.
  J는 항상 입 속에 자두 맛 사탕을 물고 있었다. 한번은 사탕에 그려진 초승달 형태의 붉은 문양을 가리키며, “이게 바로 센스야, 센스”라고 했다. 어렸을 적엔 자두 맛이 붉은색의 문양에서 나는 것인 줄 알았다고 했다.
  자두 맛을 좋아하는 거야? 그럼 자두를 사먹으면 되잖아.
  가끔.
  J는 몸을 돌려 피스를 매만졌다.
  가끔, 그러니까 열 개 중 한두 개쯤 먹다가 혀를 벨 때가 있어. 다른 건 안 그러는데 이 사탕만 그러더라고.
  나는 J가 벗어둔 청재킷에서 자두 맛 사탕을 꺼내 입에 물었다.
  피와 자두 맛이 섞여 참 독특한 맛이 나. 너도 해 봐.
  J는 몸을 일으켜 입에서 물고 있던 자두 맛 사탕을 혀에 올려놓고 내밀어 보였다. 나는 키득 웃어 보이고 자두 맛 사탕에 혀가 베이도록 열심히 입안에서 굴렸다. J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S에게 당신의 인터뷰 기사가 올라왔음을 알리는 메일을 보냈다. 플라스틱. 인터뷰 내내 나는 S를 플라스틱 같다고 생각했다. S는 10년 전 러시아에서 한국 유학파들이 창단한 모 연극 극단의 대표이면서 유명 연출가였다.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배우로서도 이미 성공한 바 있는 S는 인위적으로 명랑한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면서 때로는 지나치게 자신을 낮췄다.
  자칫 보면 수다스러운 듯하지만, 군더더기 없이 질문이 바라는 내용에 한정해서 답변하는 언담은 과연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관한 내용보다 다음 달에 새롭게 올라가는 연극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가 기울어지는 것은 S 또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암묵적 합의. 이쪽이 원하는 정보를 제공하는 동시에 홍보 효과를 노리는, 서로에게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안이한 흐름. S도 나에게서 플라스틱 냄새를 맡았을까. 아니. 풋내 나는 신입 아마추어 기자에게 사회에서 닳고 닳은 그가 그럴 리는 없었다.
  J는 돌아가지 않고 침대 위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읽고 있었다. 오늘 밤은 돌아가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반바지 밑으로 오른쪽 무릎에 드러난 푸른 멍이 두드러졌다. J는 이미 반 이상 읽은 책을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이 집어던졌다.
  말대답했다고 맞았어.
  뭘로 맞았는데?
  컴퓨터를 끄면서 나는 결국 내 혀가 세 개나 이어서 먹은 자두 맛 사탕에 베이지 않은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상을 집어던지더라고. 덕분에 그 위에 있던 핸드폰이 박살났어.
  니 무릎은 괜찮구?
  더 웃긴 건 자기 손가락을 막 씹어대는 거야. 죽어 버릴 거라면서.
  저런.
  그것보다 다음 주에 바를 매니큐어를 가지고 나오지 못했어. 예쁜 파란색인데.
  한동안 여기 있을 생각이군…….
  J는 이제 곧 열여덟 살이 되는 미용 견습생이다. 평범한 아버지. 평범한 어머니. 또한 지극히 평범한 남동생을 가졌다. J의 가족 구성원 중에 가장 범상치 않은 사람은 J, 한 사람뿐이었다. 자기 손가락을 씹어대며 자해까지 하는 아버지를 내가 평범하다고 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 철도청 공무원이라는 안정된 직업에 아내와 가사분담까지 하는 가정적인 아버지는 요즘 세상에 흔치 않기 때문이다.    
  J를 만난 지 사 주가 되어가고 있었다. 녀석이 나에게 머무를 시간은 삼 주 정도 남았다. J를 처음 만난 것은 그 아이가 일하던 곳에서였다. 견습생이 수습 삼아 자른 머리카락이 성할 리 없었다. 가위질을 어떻게 했는지 기어코 귀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다.
  사과 한마디 없이 묵묵히 서 있는 J 대신에 원장이 뛰쳐나와 요란하게 소란을 떨었다.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나는 원장이 J의 뺨을 내리치는 것을 보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실은 제가 움직여서 그랬어요. 이 아인 잘못 없어요. 그때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부어오른 뺨에 손을 댄 채 J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일주일 뒤쯤, J는 양 손가락에 빨간 매니큐어를 한 채 내 앞에 나타났다.
  회원명단에 있던 전화번호로 연락했지. 기분 상했어?
  그랬다.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비록 초면은 아니지만, 마주치자마자 반말을 아무렇게나 해대는 어린 계집애가 기분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널 만났던 날부터 칠한 거야, 매니큐어. 그때부터 일주일씩, 그러니까 매주 일요일마다 색깔을 바꾸겠어. 빨주노초파남보. 보라색을 칠하고 그 다음 돌아오는 일요일까지 널 만나겠어. 칠 주면 대략 두 달인가. 내 손톱 색깔을 보면 널 만난 지가 얼마나 됐는지 대충 짐작해 볼 수도 있고, 편리하잖아.
  왜 하필 무지개 색깔인데? 혹은, 왜 두 달만 내 옆에 있을 건데? 혹은, 나한테 뭘 바라는 거지? 심지어, 왜 나타났니? 등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은 것은 지금까지 스스로에게 의문으로 남는 것이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누구야?
  있어. 작가.
  이 책 다 읽은 거야?
  아니.
  조금 읽어줄게. 괜찮지?
  마음대로 해.
  ‘계단 위에 있는 작은 거울이 싫어. 지니가 말했다. 얼굴밖에는 비추지 않아. 얼굴을 잘라버리지. 내 입은 너무 크고 양쪽 눈은 너무 붙어 있어. 웃으면 잇몸이 너무 많이 보여. 수잔의 얼굴, 그녀의 개성이 강한 표정과 풀색의 눈은 내 얼굴을 밀어내버렸다. 버나드는 이런 눈을 하고 하얀 바느질감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을 시인이 좋아할 거라고 했다. 심지어는 멍하게 떠도는 로우다의 얼굴조차도 그녀의 수반 속에 띄어놓은 하얀 꽃잎들처럼 완성되어 있다…….’*
  무슨 뜻인지 알고나 읽는 거야?
  이거, 그냥 떠오르는 대로 써버린 책 아니야?
  ……제대로 알고 있네.
  J는 자두 맛 사탕을 입 속에서 계속 꾸물거렸다. 사탕과 이빨이 부딪치는 달그락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맘에 들었어, 울프라는 이 여자. 이름도 늑대라잖아.

  피스는 밤이 되면 짖는다. 낮이라고 해도 옥탑에 배달원 등이 다녀갈 땐 사납게 짖어대는데 그것은 내 손님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햇빛이 지나치게 따사로울 때면 내려다보이는 낯선 행인들을 보면서도 짖어댔다. 신기한 것은 어린 아이들이 놀고 있을 땐 고개를 옥상 난간에 올려놓고 조용히 바라보기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J가 우리 집에 와 있을 때에는 낮이고 밤이고 피스는 늘 조용했다. J를 어린 아이로 간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로 J는 지나치게 동안이었고, 보통 또래들보다 아담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도저히 열여덟 살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만큼 여리고 투명한 살갗, 커다란 눈동자……. 특히 목 위로 짧게 쳐진 더벅머리 커트는 그 아이를 더욱 중성적으로 보이게 했다.
  J는 소리 없이 움직였다. 이 좁은 옥탑 방에서 사각사각 옷감이 부딪치는 소리 정도는 날만도 한데,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어디에 있는지 가늠조차 하기 힘들었다. 단지 서늘한 공기 속에 미미하게 섞인 자두 향기와 눕거나 앉았던 자리에 남은 따스한 체온만이 ‘그 아이가 여기 있었다’는 증거가 되곤 했다.
  문득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서 흰 진돗개인 피스와 놀고 있는 J의 모습을 보면, 왠지 저 곳은 다른 세상같이 느껴졌었다. 어디서부턴가 불어와 내 입술을 매만지는 바람 또한 나는 진짜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젓곤 했다.
  J가 이 옥탑에서 지낸 지 어느덧 닷새가 되어 가고 있었다.            

  〈기사는 잘 읽었습니다. 다이어리를 놓고 가셨더군요. 일찍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메일을 받아 본 후에야 이렇게 연락을 드립니다. 전화를 드릴까 했지만 불편하실 것 같아 메일을 드리는 겁니다. 언제고 저희 극장으로 찾으러 오십시오. 스텝 누구에게든 제 이름을 대면 서재로 안내해 드릴 것입니다.〉
  S로부터 온 답변이었다. 다이어리를 그곳에 두고 온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굳이 찾아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사적인 메모와 일기가 적힌 다이어리이기 때문에 더욱이 찾고 싶지 않았다. 내 글을 읽었을지 모를 낯선 사람과 얼굴을 다시 마주하는 것은 껄끄러운 일이었다. 그쪽에서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려주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나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찾으러 오라는 답변 메일까지 일부러 보내온 S에게 “버려 주십시오.”라고 답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 작품은 취향이 아닙니다.
  정말 얼간이 같은 소리를 했었다. ‘취향’이라니. 문학작품이긴 하지만, 남편이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서 도망간 탓에 마음 아파하는 한 여인의 지고지순한 연애담은 확실히 내 취향이 아니긴 했다. 그렇다곤 해도 이 작품을 극으로 만들어 올리는 제작자이자 연출가인 S에게 있어선 사활이 걸린 중대한 문제였으며, 인터뷰를 하러 간 기자가 아직 올리지도 않은 극에 대하여 취향 운운하는 것은 분명히 말실수 이상이었을 것이다. 확실히 S도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그를 다시 대면하는 것은 여러모로 괴로운 일이었다.
  어차피 대학로라면 다른 인터뷰건 때문이라도 자주 들락거려야 하는 곳이다. 나는 결국 S에게 이번 주말에 찾아가겠노라 메일을 보냈다.    
  J는 건물의 1층과 2층 사이의 계단에 걸려 있던 전신 거울을 떼어 왔다. 거울의 아래쪽에는 ‘한아름 글짓기 학원 기증’이라고 금박으로 박혀 있었다. 항상 지나다니지만 이렇게 자세하게 거울을 들여다 본 적은 일찍이 없었다. 일방적으로, 그리고 적나라하게 비치는 나의 전신을 똑바로 쳐다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춰지는 건 얼굴이면 충분했다. 나머지는 불필요했다.
  도로 갖다 놔. 이거 절도라는 거 알고 있니?
  ‘계단 위에 있는 작은 거울이 싫어…….’ J는 노래를 부르듯이 흥얼거렸다.
  ‘지니가 말했지. 얼굴밖에는 비추지 않아. 얼굴을 잘라버리지.’
  J,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내 입은 너무 크고 양쪽 눈은 너무 붙어 있어. 웃으면 잇몸이 너무 많이 보여.’
  ……버지니아 울프?
  계단 위에 있는 큰 거울이 싫어. J가 말했지. 몸뚱이밖에는 비추지 않아. 발목을 잘라버리지. 내 목은 너무 얇고 양쪽 다리는 너무 말라 있어. 달리면 마치 종이인형이 팔랑거리는 것 같지…….
  나는 J가 아무렇게나 지어 만든 음에 가사를 붙여 부르는 대로 듣고만 있었다. 그 아이에게서 텁텁한 자두 향기가 났다.
  너도 이 거울이 싫었지?  
  J는 거울을 옥상 바닥에 고이 눕혔다. 작게 한숨을 쉬는가 싶더니, 하늘색 운동화를 신은 발로 인정사정없이 거울을 내리밟았다. 우직-
  그럼 깨버리면 되잖아.
  J는 나를 힐끗 올려다보더니 거울 위에서 두 번 점프 했다. 쨍그랑, 쨍그랑-
  그때 J의 파란색 손톱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평소 듣지 못한 소리에 놀라서 선잠을 깬 피스가 시끄럽게 짖었다.
  비켜.
  거울 위에서 방황하는 J를 밀친 다음 나는 슬리퍼를 신은 그대로 거울을 밟았다. 내가 격하게 발을 구를수록 날카로운 소리가 났고 종종 파편이 튀겨 발등에서는 따끔한 느낌이 났다. 모래같이 조각난 거울 편린들은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더는 이것이 J도, 나도 비출 수가 없다. 그렇다.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들은 죽어야 한다.
  자두 맛 사탕을 빨던 J가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이번에는 조금 아픈지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나는 J에게 다가가 입을 맞췄다. 기분 나쁘지 않은 피 비린내가 났다. 피스는 여전히 사납게 짖어대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온통 땀에 젖어 한밤중 깨어났다. 고개를 돌려 쌔근거리며 잠들어 있는 J의 옆모습을 바라보면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J의 젖가슴에 손바닥을 대고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에 비로소 안정이 되었다. 다시 J의 낮은 콧등을 주시했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꿈속에서 나는 쫓기고 있었다. 골목길 모퉁이를 돌면 또다시 같은 곳에 와 있곤 했다. 방망이질 치는 심장으로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담벼락을 가볍게 뛰어넘는 도둑고양이처럼 허공을 내지르고 싶었다. 땀이 흘렀다. 바람은 무심하게 나를 비껴갔다. 그것은 조각조각 결을 내면서 갈라지고 있었다. 그 날카로운 깃에 손가락을 대면 마치 베일 것만 같았다.
  사방에 짙게 깔린 어둠 사이로 발자국 소리는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도망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다리는 붙박은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바로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사마귀처럼 소름이 돋았다. 귓가에 내뿜어지는 더운 입김, 그리고 익숙한 냄새와 그의 목소리.
  ―너에게도 같은 피가 흐르고 있어. 미치기 전에 치료해야만 해.
  달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물줄기가 내 동공을 적셔 왔을 때, 나는 눈부심을 견딜 수 없어 눈을 감아 버렸다.  
  꿈에서 봤던 달빛은 생경했다. 그만큼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시리도록 온통 푸른빛이, 푸른빛만이 그리고 푸른빛으로 머리카락을 자라게 하고…… 잘라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조금 울었던가. 마술처럼 잠이 쏟아지려고 했다.

  “이곳에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스텝에게 안내된 S의 서재에는 영어와 러시아어 원서로 된 전문서적들과 각종 교양, 문학 서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방이 책장이었지만, 무광택 원목의 장식장과 수납장에도 마땅하게 둘 곳이 없는 책들이 쌓여 있었다. 비록 방은 그리 넓지 않고 간소했지만 그것대로 조촐한 분위기가 있었다. 극장 내부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은 조금 놀라운 일이었다.
  손님을 접대할 테이블과 소파는 따로 놓여 있었고 한쪽 구석엔 커다란 흔들의자가 있었다. 그 위에는 영미배우 조셉 체이킨의「배우의 현존」이라는 얇은 책이 책갈피가 끼어진 채 놓여 있었다. 나도 모르게 책을 집어 들고 책갈피가 있는 책장부터 천천히 훑어 내리다가 어느 문구에서 눈길이 멈췄다.  
  “죽은 아이를 배고 있는 임신부처럼, 죽음은 언제나 우리 내부에 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바로 뒤에 S가 서 있었다. 언제 들어온 거냐고 묻는 것도 잊어버린 채 황망하게 책을 내려놓고 꾸벅 인사부터 했다.    
  “릴케가 말한 부분을 읽고 있었지요? 나도 그 부분이 참 좋았어요.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돌아가야 한다면서 바로 다이어리를 돌려달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이미 머그에 커피를 따르고 있는 그에게 감사합니다, 라고 말을 해야 할지 우물쭈물 대고 있었다. 그는 왜 앉지 않고 그대로 서 있느냐 라는 눈빛을 보내왔다. 그때서야 나는 이미 적당한 타이밍을 놓쳐버렸음을 깨달았다. 나에게는 선택권이란 게 없었다.  
  “조셉 체이킨, 아주 좋아해요. 미국의 6, 70년대 배우이자 브레히트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실험극 연출가지요. 잘 못 들어 보셨을 거예요. 실험극이란 특성상, 특히 우리나라에선 활발한 연구 분야가 아니니까요.”
  “이런 면도 있으셨네요. 지금 준비하고 계신 정통 멜로드라마 형식의 극과는 전혀 다른 장르인데요.”
  “인터뷰 때 말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언젠가는 이런 극을 만들어 보고 싶어요. 하지만 제가 제작자도 겸하고 있으니까 관객유치를 고려하지 않으면 힘듭니다. 아무나 브레히트가 될 수는 없어요.”
  이 사람은 왜 나에게 이런 걸 말하고 있는 걸까. 시간이 흐를수록 자리가 몹시 불편해 졌다. 내 머릿속은 적당한 때를 보아서 일어날 생각뿐이었다. 때마침 S는 뒤쪽에 놓아두었던 서류가방에서 낯익은 물건을 하나 꺼냈다. 그 몹쓸 다이어리.
  그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담배를 피워도 되겠습니까, 라고 묻더니 내 표정을 살피고 라이터를 꺼내 바로 불을 붙였다.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나는 다이어리를 집어 들다 말고 S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고맙다는 형식적인 인사는 이미 오래 전에 오간 상태였다.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보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다이어리에 있던 글들, 다 읽어 보았어요. 덮어야지, 덮어야지, 하는데 잘 안 되더군요.”
  그것쯤은 이미 예상했었다. 그렇다곤 해도 마음이 뒤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괜찮다는 의사표시로 조금 웃어 보이고 처음으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아직 무언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연하게 예감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밝혀지기 전에 이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한시라도 빨리 빠져나가고 싶었다.
  “삼촌의 이야기도…… 읽었습니다.”
  그것 또한 이미 예상한 바였다. 이 사람은 무언가 가장 중요한 것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는 왠지 우습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당신과 사귀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은 이미지였어요. 그래서 당신이 다이어리를 놓고 갔을 때 고민이 많이 됐습니다. 그러다 삼촌과의 과거를 알게 되었고…… 저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는 얼굴. 마치 저와 춤을 한 곡 추시겠습니까? 하고 묻는 듯, 담담하면서 별 대수롭지 않은 것을 어서 선택하지 않고 뭐하느냐 라고 다그치는 눈빛. 나 또한 S의 얼굴을 무던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문득, 자두 향기가 몹시 그리워지려고 했다.

  넌 뭣 때문에 그렇게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냐고 묻겠지. 싸우는 원인은 항상 가벼운 거였어. 저번에는 잘못 나온 카드 청구서 때문이었다니까. 난 아버지 카드를 사용한 적이 없었는데 아버지는 내가 쓴 거라고 우겨댔어. 나중에 알고 보니 카드회사의 잘못으로 청구된 요금이었지만 이미 아버지와 또 한바탕을 하고 난 뒤였어. 아버진 그날 밤 칼을 들이댔었어. 그런데 참 웃기지? 그때 잘못 청구된 금액은 겨우 만 오천 원이었거든.
  J는 내 머리를 매만질 때면 평소와는 달리 유독 말이 많았다. J의 일이 끝날 때까지 가게에서 기다린 적도 몇 번 있었지만, 손님에게 그토록 명랑하게 말을 붙이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어느덧 노을이 지고 있었다. 옥상 난간에 걸터앉은 J의 무릎 사이, 그곳에 등을 기대고 앉아 핏빛으로 물든 해를 보는 것은 이제 대단치 않은 일이 되어 버렸다.  
  ……아버지는 감성적으로도 충만하지만 지나치게 감정적인 사람이었어. 예전에 내가 왼손에 붕대를 감고 온 적이 있었지? 주황색 매니큐어를 발랐을 때였을 거야. 미용실도 한동안 나갈 수가 없었어. 아버지와 몸싸움을 하다가 입은 가벼운 찰과상 정도였지만.
  나는 손거울 속에 비치는 J의 보라색 손톱을 주시했다. 뼈마디가 울퉁불퉁하게 나온 하얗고 마른 손. 그리고 마치 죽어버린 것 같은 손톱들. 억양이 거의 없는 J의 말투는 버석버석 소리가 날 만큼 건조했다.  
  아버지는 자신이 젊었을 적에 시를 썼었다고 했어. 가끔은 네가 즐겨 읽는 희곡도 썼다고 했지. 그…… 늑대 이름을 가진 여자 있잖아. 그 여자가 쓴 책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던 건 다 거짓말이야. 그렇게 감성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질색이야. 감성적으로 말을 하는 사람도 질색이고. 앞으로 절대 책 같은 건 읽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는데 너 때문에 조금 읽었던 거야. 내가 학교를 그만둔 것도 왜 그런 건데.
  쳇, 하고 내뱉는 내 작은 짐승의 소리. 나는 그 아이 모르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나한테 감정 같은 건 기대하지 마. 네가 기대할 거라고 생각도 하지 않지만. 나는 사실 너의 그런 무표정한 게 참 좋았거든. 나도 무표정하니까.
  우리가 함께한 시간만큼 J의 커팅 솜씨는 많이 늘어 있었다. 어깨 위로 짧아진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마무리를 해주는 J의 속삭임에 나는 온 정신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너도 글 같은 건 쓰지 마. 감정 같은 거, 그런 거 가져서 뭐하니?
  그때 J의 무릎은…… 안락하고 따뜻했다.    

  아무에게도 말을 해선 안 돼. 그래야 치료가 된단다.
  삼촌은 내 옷을 벗기기 전에 그런 말을 하곤 했었다. 삼촌이 운영하던 작은 미술입시학원에서 학원생들이 돌아가고 난 뒤 단 둘이 남아 작업을 하곤 했다. 나 역시 삼촌이 가르치던 초등부 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 삼촌은 날 그리기 전에 항상 ‘치료’라는 말을 사용했다.  
  삼촌은 나의 선생님이기도 했으므로, 그가 지시하는 대로 따르는 것에 익숙했고 한편으로 능숙하기까지 했다. 사람들이 귀가해서 아무도 없는 작업실. 흥건하게 고여 있는 물감 특유의 기름 냄새는 혼잡스럽게 내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너에게도 같은 피가 흐르고 있어. 미치기 전에 치료해야만 해.
  삼촌이 한 번 그랬던 것처럼 나도 미칠 수도 있다는 두려움, 그리고 삼촌이 하는 이런 일련의 행태들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안 된다는 불안은 언제나 양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정말 치료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의구심은 애초부터 터무니없었다. 무작정 삼촌을 믿을 수 있을 만큼, 혹은 싫다고 거부할 수 있는 선택권이란 공중에서만 부유했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나쁜 짓이라는 것을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무엇보다 나는 너무 어렸다.  
  좁은 나의 그곳을 쑤시고 들어오는 삼촌의 손가락은 언제나 고통을 수반했다. 신음소리를 내는 것은 부끄러웠다. 아프다는 말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삼촌은 그 일을 마칠 때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그림을 완성하고 나면 사랑한다며 울먹거리곤 했다. 비록 나에게 하는 말인지 그림 속의 나에게 하는 말인지 지금까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여덟 살인 나에게도 ‘사랑’이라는 어휘는 묘한 구속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마녀의 주문처럼. 혹은 저주처럼.  
  삼촌은 케이크를 사들고 굳게 잠긴 현관문 앞에서 기다리곤 했다. 초등 고등부가 되자 미술 학원을 관두었던 내가 피아노 학원에서 돌아오는 시간이 언제인지 그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 시각이 부모님이 직장에서 돌아오기 한 시간 전이라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었고, 나 또한 그때에 맞춰 찾아오는 삼촌을 묵인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길들여진 일종의 습관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가 불을 질렀다나요. 집안사람들이 모두 큰 화상을 입었다는데, 잘 모르겠어요. 일도 잘 안 나왔던 데다가 연락도 안 되고. 어디 믿을 수가 있어야죠.  
  밤이 되면 피스는 예전처럼 짖어댄다. 보라색 손톱을 한 지 정확하게 일주일째가 되던 날 J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옥탑 방에서 감돌던 미세한 자두 향기는 현실을 비껴내 버리듯 산산이 분해되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것은 J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은 착각 때문이었다. 착각이라고 하기보다는 환각에 가까운 비현실감이었다.
  ―이토록, 혼자였다니.
  이토록, 혼자였다니.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아버지의 거의 잘려나갈 것 같은 손가락을 봤을 때야 눈물이 났어. 아니…… 쏟아졌어. 죽는다는 것을 왜 그렇게 손쉽게 생각하는 걸까. 사람 돌아버리는 건 한순간이지만 적어도 그건 아니잖아. 저 혼자 사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서로의 가슴에 칼질을 해놓고 애정을 구걸해. 그 순간 내가 아예 태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어. 하지만, 이미 시작된 건 어쩔 수가 없는 거잖아…….

  어느 무덥던 여름 날, 나는 열세 살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그대로 걸스카우트 유니폼을 갈아입지 않고 가방에서 교과서만 풀었다.
  방문이 열리고 삼촌이 들어오는 소리, 그리고 찰칵. 소리가 나는 곳을 돌아보지 않았다. 연달아 들리는 찰칵, 찰칵, 셔터는 쉼 없이 돌아가고, 나는 부모님이 돌아오시기 전까지 언제나처럼 삼촌에게 말 한마디 붙이지 않았다.
  카메라가 필름이 위잉 하고 돌아가는 소리를 내뱉었을 때에야 삼촌은 거실로 나가서 TV를 켰다. 얼마 후 물을 마시기 위해 부엌으로 갔을 때 소파 너머로 보이는 삼촌의 어깨는 미세한 흐느낌과 함께 들썩거리고 있었다. TV에서는 유명 연예인들이 나오는 코미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들어가기 전까지 삼촌의 결혼은 세 번 무산되었고 정신질환을 두 번 더 앓았다. 삼촌이 재발된 정신병으로 통원 치료를 받자 그 사실을 알아낸 학부형들이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선생에게 자기 자식을 맡길 수 없다며 거센 항의를 했다. 결국 삼촌은 오 년이 넘게 운영해 왔던 학원을 완전한 타인에게 인수해야만 했다.
  두 번째로 증상이 나타났을 때 어머니의 형제들이 삼촌을 정신병동으로 내몰았다. 반년 여 동안 강제로 입원을 했던 삼촌은 퇴원 후 우리 집에 들르겠다는 연락을 취했다. 나는 회사에 있던 아버지로부터 모든 통장과 귀금속을 숨기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삼촌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시 반년쯤 지났을까. 갑자기 애가 둘이나 딸린 연상의 이혼녀를 데리고 나타난 삼촌은 지하 단칸방을 얻어 조용히 지냈다. 네 식구는 마치 무덤에서 사는 것처럼 침묵했다.
  그 모든 일과가 지나갈 때까지 한 달에 두어 번씩 발신을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삼촌의 결혼식 전후로, 걸스카우트 유니폼을 입은 그때의 사진들이 도착했다는 것은, 적어도 S와의 일이 있기 전까진 나 이외에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오후 해질 무렵 나는 옥탑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사진을 지져 태워버렸다. 그리고 S에게 전화를 걸어 만날 약속을 정했다. S의 목소리엔 애정에서 나오는 반가움보다 의례적이면서 즉흥적인 기쁨이 묻어났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어느 후미진 모텔에서 그와 동침하고픈 욕망을 느꼈다. 후일 사랑한다는 말이 효력을 발휘하기 전에 그와 짐승같이 뒹굴고 싶었다. 바람에 젖어든 눈시울만큼 노을 진 하늘이 붉게 타올랐다.
  나는 피스를 껴안고 콘크리트 바닥에 누웠다. 조금 뒤에 달이 뜨면 그 푸른빛을 온몸으로 받아낼 것이었다. 마술처럼 잠이 쏟아지려고 했다. ▣


* 버지니아 울프, 「파도」
제이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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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이 05.09.16 22:52 댓글 수정 삭제
    일전에 쓴 소설을 퇴고하였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거울을 찾아 제가 올린 소설을 보니, 처음에 썼던 '파도'였더군요. 지인들에게 더 지적을 받고, 이리저리 고심 끝에 퇴고를 몇 번 하였지만 역시 만족스럽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퇴고 전의 소설보다는 좀더 정리된 느낌이라고 주변에서 고맙게 말씀해주셔서 거울에도 올리고 갑니다. 가볍게 읽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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