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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계인 Z와 이계인 A가 만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된 건 영화관에서
'케이 펙스(K-PAX)'란 영화를 본지 얼마 안된 어느 날 오후였다. 여기
서 그 영화를 모르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소개를 하자면, 어느날 뉴욕
에서 자기가 외계 행성 '케이 펙스' 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주장하는
'프롯(prot)'이란 인물이 나타나고, 그가 맨하탄 정신병원으로 끌려
와서 닥터 파웰 이라는 의사에게 진료를 받기 시작하면서 부터 일
어난 이야기를 그린 영화이다. 이보다 더 자세한 진술은 영화관람에
방해가 될테니 자제하겠다. 암튼, 나는 그 영화를 상당히 재밌게 보
았고 그덕에 한창 외계인이며, 외계문명이며, 외계인의 지구방문이
며,를 생각하던 터라 주위를 보는 눈도 상당히 예민해져 있었다.
지금 여기 어딘가에도 외계인이 방문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주의깊게 사소한 일도 놓치지 않고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외계인 Z와 이계인 A의 만남도 볼 수 있었다.(내가 그들에게
알파벳 대문자 이름을 붙여 놓은 것은 내가 그들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일 뿐, 특별한 의미는 없다.) 그들은 아주 천연덕스럽게도
사람들이 가득한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들의 얘기는 이러했다.

Z : 반갑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요?
A : 저도 반갑습니다. 오늘은 만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오늘도
만나게 되는군요.
Z : 사실 나는 이번에 지구에 왔을 때, 이렇게 흥미로운 경험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지구인이 아닌, 우리가 속한
우주에 근거하지 않은 분을 만나게 되리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
지요.
A : 저도 마찬가집니다. 이곳 시간으로 15000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분을 지구에서 만나게 되리라곤 예상치 못했지요. 아무리
같은 우주에 사는 분이라고는 하지만 지구인들 속에서 지구인이
아닌 사람을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덕분에 이 세계
에 대한 더욱 흥미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Z : 사실 제가 사는 별에도 가끔 이 우주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 다녀갔다는 기록은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보통,
우리들에게 그것은 공상에 가까운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우주가 얼마나 다양한 생명을 품고 있는지를 알
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사람도 사실은
다른 세계가 아닌 우리 우주 어딘가에서 온 사람이라고 생각되
기 쉽상입니다.
A :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질 것입니다. 제가 사는 곳에선 이계
로의 여행은 상당히 일반화된 상식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같은 세계에 속하지만 멀리 떨어진 어느 곳에서 사람이 찾아
온다'는 개념은 익숙하질 않지요. 우리는 이계여행에만 너무나
집중해 왔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가 속한 세계를 탐험하는데
있어선 미숙한 것이 사실입니다.
Z : 우리는 어쩌면 비슷한 문제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는지
도 모르겠습니다. 이 곳 지구인들에게야, 외계에서 온 사람이
든, 이계에서 온 사람이든,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할지도 모릅니
다. 지구인들은 우주여행이든 이계여행이든 둘 다 아직 미숙
한 수준이니까요. 이들은 아직 '전체'를 고려하기에 충분할 만
큼 성숙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같이 어느 한 쪽의
여행이 일반화 될 정도로 성숙된 문화를 가진 사람들에겐
서로가 가진 정보의 교류를 통해서 미숙한 다른 부분을 보완
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그 점에 있어서는 우리쪽
에서 더 배울 점이 많으리라고 봅니다.
A : 저도 동감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그쪽이 더 배울 점이 많
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우리도 많은 것을 배워야겠지요. 다만,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속한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은 이 세
계의 그것과 너무나 다르다는 문제입니다. 저같은 경우 이 세계
가 아닌 제 3의 세계로 여행하게 된다면, 역시 또 다른 법칙에
적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지요. 아시다시피 '이계'란 무한할
정도로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우주를 여행하는 것이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다만 서로
가 속한 세계간의 교류를 통해서 첫걸음을 띄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번 지구여행을 마친 뒤엔 여러분이 사시는 그 행성
으로의 계간여행의 통로를 개척해 볼까 생각중입니다.
Z : 오, 그 문제라면 굳이 그러실 필요 없이 저와 함께 제 행성
으로 가시는 게 어떨까요? 여기서 우리 행성까지 이동하는데
시간은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을 데리고 함께 이동하
는 게 가능합니다. 지금이라도 함께 구경을 해보시지 않으시겠
습니까?
A : 저야 두말할 필요가 없지요! 데려가 주신다면 영광이겠습니다.
Z : 그럼 지체하실 것 없이 지금 같이 가도록 하시지요.
A : 알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죠.

  A의 말이 끝났을 즈음, 그 둘의 모습은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
고 없었다. 그리고 그 둘이 사라지는 모습을 본 것은 나뿐이었기에
(참으로 절묘한 타이밍에 그들은 사라졌다!) 주인과 알바생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마 나중에야 눈치채고는 '돈 안내고 도망쳤다'
며 화를 내며 욕을 해댈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그들의 만남을 우연
인지 필연인지 지켜보고 난 뒤에 새삼 들었던 의문은, '과연 그들은
내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몰랐을까?' 는 것이었다. 어쩌
면 그들은 알면서도 일부러 날 가만 놔뒀을지도 모른다. 아니, 달
리 생각하면, 그들의 이야기를 누가 듣는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
가 안되었기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라, 만일 마지막 순간
그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그들이 앞서 한
얘기는 RPG를 하고 있거나 미친 두 사람의 헛소리에 지나지 않
는다고 생각하기 쉽상이지 않겠는가? 아니, 아마, 그만큼의 신경
조차 쓰지 않고 무슨 말을 하든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쳤을
확률이 크리라.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기에도 지쳐 있기 때문이
다.

그들을 그렇게 만난 뒤, 나는 문득 '과연 우리, 이 세계의 지구라
불리우는 행성에 사는 우리는 대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지구에서도 동아시아라 불리우는 지역에서도 대한민국이라
불리우는 나라에서 스스로를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에 불과하다. 나는 우주여행이며 계간이동은 커녕, 해외여행
한 번 못 가본 사람에 불과하다. 이 행성엔 수많은 국경이 쳐져 있고
그 국경 하나를 넘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절차가 존재하고, 넘지도 못
하는 경우가 많다.. 문득 '자유롭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자유가 주
어졌음을 말하는 것일까?' 하는 철학적인 물음을 떠올리며 나는 자
리에 누울 수 밖에 없었다. 내일이면 제과제빵 무료교육받으러 나가
는 첫 날이기 때문이다. 아침일찍부터 하기 때문에 일찍 자둬야 한
다. 잘 배워서 빵집에라도 취직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외계인이니, 이계인이니,는 그때까진 한동안 안녕이다!!'
는 말을 떠올리면서.

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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