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그녀에게 말 걸기

2003.10.04 20:5510.04

2003. 5/4




나는 병원에서 가져온 그녀의 챠트를 대략 훑어 보았다. <과거> 거기에 적힌 그녀

의 생애는 평범했다. 지금 나를 바라보는 바로 그 표정만큼 특징없는 삶.  늘 그렇듯

그녀는 나에게 새로운 인사를 보낸다. 그녀의 웃음은 반응에 가깝다. <현재> 세월

이 가져다주는 노곤함이 배여든 복잡한 감정을 획득하기 이전에,  그녀는 심장마비

를 일으켰다. 주위의 적절한 조치로 그녀의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했지만, 혈류가 일

시적으로 중단되어 야기된 산소결핍으로 인하여 뇌손상이 일어났다. 의사들이 진단

한 뇌손상의 주요 증상은 영구적인 순행성 기억상실증(anterograde amnesia)이었

다. 간단히 말해  그녀는 새로운 기억을 형성할 수 없다. 그래..이것이 바로 내가 확

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다른 것에는  관심도 없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로 인해 그녀가 획득한 <특별함- 누군가는 그녀가 현재

를 잃었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는 흰 가운을 벗는다. 그리고 그녀에게 인사를 한다. 늘 밝은 표정으로 그녀도 나

에게 인사를 한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나는 별 일 아니란 듯이 그녀에게 나의

얼마 남지 않은 삶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녀는 내가 시한부 인생이란 것에 놀라고,

곧 나를 동정하여 눈물을 흘린다. 이런 순진하고 풍부한 감정들이 그녀의 장점이다.

아직도 남을 위하여 울 수 있다니. 그녀의 얼굴을 적신 눈물이 그녀의 발치에 떨어

질 때 즈음하여 그녀는 다시 평온한 얼굴로 돌아간다. 그녀는 자신의 눈물의 의미를

알고 있을까? 나는 다시 한번 나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해준다. 그리고 그녀는 새로

이 슬퍼한다. 진심으로.


나는 생각한다. 이 순간의 모든 인간 중에서 그녀는 가장 영원에 근접한 존재가 아닐

까. 그녀가 자신이 새로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을, 새로운 슬픔을 느낀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을까? 슬퍼하지 않는 그녀는 슬퍼하는 그녀를 알지 못한다.

자신의 젖은 얼굴에 의아해 하는 그녀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울고 있는 그녀는

울고 있지 않은 그녀를 상상할 수 없다. 평행선 처럼, 그 둘은 결코 만날 수 없다.

슬퍼하는 그녀와 그렇지 않은 그녀가 있을 뿐이다. 눈물이 바닥에 떨어지는 그

순간 동안에 일어나는 <무한한 소외>...

역설적인 얘기다, 순간 속에서만 영원이 완성된다는 것은. 하지만 그녀는 자신

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로 통합해줄, 자신이 필멸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

게 해줄 연결고리를 잃어버렸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개체란 환상에 불과

하다. 그렇지만 <반복>이란 개념으로는 그녀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항상 새로

운 경험을 하는 그녀에게 반복이야 말로 이해할 수 없는 얘기다. 오로지 <영원>만

이 그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잃은 것은 사소한 것이다. 자신의 슬픔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

는 것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도, 자신조차 자신이 슬퍼한다는 것을 알 수 없다

는 것도. 인간 내부의 분리와 소외, 무지는 숙명에 가까운 것이 아니던가.  



나는 그녀에게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알린다. 그녀가 입원하고 계속해

서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좀더 자세하게 말하면 그녀가 입원하고 나서

그녀의 집 지하에서 그녀의 가족과 친구들 몇 몇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뇌손상 전에

일어난 일들만을 기억하는 그녀로서는 그네들의 죽음은 항상 새로운 것이다. 애통함

과 분노하는 그녀가 거기서 탄생한다. 이러한 그녀에게 혐의를 가지고 수사를 한다

는 것은 바보 같은 짓.. 알리바이라는 것도 소용이 없다. 그녀에게 알리바이란 불

확실하다기 보다는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찰서에서는 곧 그녀를 병원

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내가 3일 동안이나 그 사실을 알려 줬음에도 불구하

고 그녀는 항상 신선한 경악과 분노를 머금는다. 그 모습에 참지 못하고 나는 그 범

인이 나라는 것을 털어놓고 만다. 영원히 나를 증오하는 그녀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소용없는 일이란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녀가 다시 평안을 되찾기 전에, 얼마후 내가

그녀를 죽일 것이라는 것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알려준다. 그렇게 해서 그녀가 <과

거>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막아보려고 한다. <순간>에서 먼지처럼 피어오르

는 그녀의 영원한 자아들을 동경과 원망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렇게 <찰나적 영원>

을 목격하는 순간에는 나의 쾌락으로 물든 죄책감 따위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가스먼지에서 새로운 별이 탄생하듯이 나는 그녀들의 탄생과 죽음을 <너무도 무상

하게 길고 긴> <순간>을 통해서 엿보는 것이다.



나는 병원에서 가져온 그녀의 챠트를 대략 훑어 보았다. <과거> 거기에 적힌 그녀

의 생애는 평범했다. 지금 나를 바라보는 바로 그 표정만큼 특징없는 삶.

늘 그렇듯 그녀는 나에게 새로운 인사를 보낸다. 그녀의 웃음은 반응에 가깝다.

그런 그녀를 보며 다시 한번 나는 그녀의 슬픔에게 말을 건다.    

          

마침
moode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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