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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마냥 푸르고, 따갑고, 눈이 아프다. 높디높은 건물들이 영양을 받지 못한 갈대처럼 비쩍비쩍 늘어선 서울 거리. 이제 봄이 지나고 곧 여름이 올 때다. 벌레도 우짖지 않는 종로에는 여느 때처럼 자동차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고 있다. 도로 가를 걷고 있던 A는, 고개를 숙이고 땅을 바라보며 걸었다. 병원에서 데이 근무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이다. 간호사 특유의 8교대 근무 중 데이는 아침 6시부터 오후 3시까지 근무하는 것이다. 새벽부터 일어나 첫차를 타고 출근한 후, 여덟 시간의 근무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막 근무를 시작한 신규인 A는, 미처 업무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일은 힘들고, 선배들은 계속 꾸짖고 있다. 마땅히 해야 할 충고라고 해도, 좋은 말로 할 수도 있을 텐데 왜 굳이 머리를 쥐어박으며, 환자들 앞에서 화를 내는지, 눈에는 눈물이 고일 것만 같다. 그래서 A는 계속 땅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가, 땅만 바라보던 탓에 앞서오던 다른 사람과 부딪혔다. 훌쩍 키가 큰, A 또래인 2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가 사랑스러운 여자는, 하늘이 뚝뚝 듣어날 듯 연하늘빛 미니스커트에 높은 굽의 하얀 뮬을 신고 있다. 뮬을 장식하고 있는 노오란 벨벳 리본을 내려다보며, A는 당황해하며 사과하였다.

“죄, 죄송합니다.”

꼭 실수를 저지른 후에 선배에게 혼나는 것처럼, 허둥거리며 고개를 더 깊숙이 숙였다. 벨벳 리본이 눈 안으로 뛰어들어 올것만 같다. 막 부딪혔던 여자가, 갈색 눈동자를 크게 뜨고 입술을 벌렸다. 올봄에 유행하는 장밋빛이 칠해진 입술.

“너, A 아니니?”
“에?”

A는 고개를 들었다. 다정한 웃음이 A를 반겼다. 아래만 바라보고 있어서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중학교 때 너무나도 친하게 지냈던 친구다. 그것도 벌써 십 년 전의 이야기다. 심지어 화장실까지 손을 잡고 같이 갔다. 물론 화장실 안의 같은 칸까지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B 아니야?”
“어어, 나야, 나야! 너무 반갑다! 뭐하고 지내?”

손을 맞잡고, 마치 중학생으로 돌아간 것처럼 둘은 팔짝팔짝 뛰었다. 이렇게 순수하게 기뻤던 것이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좀더 이야기하고 싶다. 이 기쁨을 더 오래 유지하고 싶다. 누가 먼저 제안했는지도 모르게, 둘은 자연스레 가까운 카페로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커피를 주문하고, 케이크를 가운데에 둔 채 둘은 씨익 하고 미소를 교환했다.

“뭐하고 지내?”

아무렇지도 않게, B가 먼저 말을 꺼냈다. A는 잠시 머뭇거렸다.

“병원에서 일해. 간호사야.”
“아, 간호사. 요전에 우리 언니가 아이를 낳았는데, 신생아실 간호사가 정말 불친절하다고 하더라.”

아무렇지도 않게 B는 웃었다. 꼼꼼하게 칠한 화장 너머로 땀 한 방울도 비치지 않는다. 방금 전까지 아주아주 친하고 가깝게 느껴졌던 친구가 순간적으로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투명한 유리벽이 두껍게 가로놓인 것처럼. A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검은 눈이 맑게 회색으로 떠오르더니, 눈물이 툭하고 떨어진다.

“불친절할 수밖에 없어, 신생아실이 얼마나 힘든데! 불친절한걸 보고 잘했다고 하는게 아니야. 사람은 진짜 모자라고, 아기는 도움을 필요로 하고, 처음엔 사람을 돕자고 시작한 이 일이 너무 힘들어. 실수 하나라도 하면 안되는 이 일이 너무 힘겨워. 하나 잘못할 때마다 내가 정말, 일 년 선배 이 년 선배에게 이년 저년 욕을 듣고 뺨까지 맞으면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힘들고 힘들어서 바로 그만둬버리고 싶어, 도망가고 싶어. 그렇지만 여기서 도망가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

중학교 때에, 지금은 몇백년전처럼 느껴지는 그때에도 흥분했을 때에 총알처럼 빠르게 튀어나오는 A의 말을 다 알아듣는 것은 B 밖에 없었다. B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커피 메이커에서 새까만 커피가 흘러나오듯, 멈추지않고 쏟아져나오는 A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데도 말하지 못하고, 좋은 병원에 취직했으니 자랑스럽다 우리 딸 하고 흐뭇해하는 어머니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병원에 적응하지 못하는 동안 친구들과도 멀어졌다. 불평하는 환자들, 화내는 보호자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A는 울었다. A가 좀 진정한 후에, B가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래, 알겠다. 간호사들도 힘들겠구나.”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에 있겠냐만은, 그렇지 뭐.”

붉어진 눈으로 싱긋, 웃었다. 말하고 나니 좀 괜찮아진 모양이다. B가 말을 꺼냈다.

“저기, 너 간호사가 의사와 환자 사이에 끼인 데다가, 선배들 사이에도 끼어 있고, 실습도 하고, 많이 배우는데 다들 그냥 잡역부나 보조자, 심부름꾼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잖아.”
“그렇게까지 말했나? 그런 느낌이긴 해. 무슨 섹시한 마스코트 같은 건 줄 알아.”
“응.”

B는 완벽하게 둥근 치즈 케이크를 쿡쿡 포크로 찌르면서, 희미하게 웃음지었다.

“A, 너 말야. 세탁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세탁사?”

A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탁부 아니야? 청소부처럼. ‘부’자가 뒤에 붙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기껏해야 빨래하는 일 아니냐고 반문하는 A에게 B가 말해주었다.

“세탁사란 말야.”

세탁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세탁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세탁사 면허가 생겼다. 4년 교육을 받고 국가 고시를 받아 따는 면허를 필요로 하는 직업이다. 4년간 교육에는, 세탁에 쓰이는 약품들에 대해 배우는 약품학, 세탁에 쓰이는 약품이 각종 직물에 일으키는 화학 변화에 대한 실용화학, 좀더 자세한 실용화학 2, 가정용 세탁기, 공업용 세탁기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에 관한 실용기기학, 재봉틀을 사용한 실용 봉제학, 거대한 세탁소에서 실제 세탁을 실습하는 300시간 간의 실습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실습에 물론 기계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손세탁이다. 실습을 거쳐 면허를 받게 되는 학생의 대부분은 손이 하얗게 부풀어 있거나, 거칠어져있거나, 이미 껍질이 벗겨져 있다.

이 세탁사는 세탁을 어떻게 하는가. 하얀 나일론 옷에, 아니면 면 옷에 포도주스가 묻었을 때, 어떤 약물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잘 알고 있다. 아주 잘 알고 있다. 그 약물이 어떠한 약리적 반응을 일으켜 더러움을 지우게 되는지 또한 이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세탁에 대해 잘 모른다. 세탁은 정밀한 기구와 약품, 섬세한 손놀림, 오랜 시간의 교육을 필요로 하는 과학이다. 허나 세탁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다. ‘세탁사’ 라는 호칭 자체도 잘 모르며, 아무렇지도 않게 세탁부라고 호칭한다. 단순히 기술자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당장 너도 세탁사에 대해 잘 모르잖아? 자기 일이 아니니까 관심이 없는거지. 넌 사람들이 간호사에 대해 잘 알아주길 바라고 있는 거잖아? 그럼 다른 방법으로 홍보하든가 해야하는거지. 그렇게 불평하는 거로 끝나지 말고.”
“….”

세탁사라는 직업은 들어본 적도 없다. 그렇지만 듣고 보니 어쩐지 간호사와 비슷한 것 같다. 특히나 백여시간을 넘는 필수적인 실습과, 소독약을 너무 많이 발라 일어나는 손 피부를 생각하며 A양은 어쩐지 세탁사들에게 미안해졌다.

“정말 몰랐어, 미안하네.”
“농담이야.”
“응?”

B는 깔깔깔, 큰 소리로 웃었다. 하얀색 니트 위로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금목걸이가 반짝 하고 빛났다.

“세탁사같은 직업, 아직은 없어. 금방 생길지도 모르지만 말야.”
“….”

A는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B는 그전부터 이런저런 농담을 자주 하는 아이였긴 했으나,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간호도 고대부터 사람들이 해왔던 일이라며? 세탁도 마찬가지야. 계속 사람들이 해오던 일이라구. 학문이 될지도 모르잖아. 전문직이 될 수도 있지.”
“그래도 너무한 거 아냐? 너 요새 무슨 일 하는데?”

B는 달처럼 둥글고 매끄러워 보이는 케이크를 포크로 뚜욱 하고 갈랐다. 큰 쪽을 A 쪽으로 조금 밀어 주고서, 남은 조각을 반으로 갈라 입으로 가져갔다. 답답하게 A가 한숨을 쉬었다. 빨리 말해주지 않을 거야? 하는 무언의 재촉에 B가 대답했다.

“나, 요 앞에 세탁소에 취직했어.”

A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에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중학교 때에는 분명히 전교 10등 안에 들던 B다. 입고 있는 옷을 보고선 이 근처의 잘 나가는 회사에 다니고 있겠거니 했다.

“나름대로 많이 알아야 하는 일이다? 무시하지 않을거지?”

직업에 귀천 같은 건 없다고 하잖아, 하고 덧붙이지 않아도 좋다. A는 벌떡 일어나서, B를 꼬옥 껴안았다. 내게 너무나도 소중한 이 친구.

내일은 웃으면서 병원에 출근하자. 오늘은 울만큼 울었으니까. A는 B에게 인사하고, 케이크와 커피 두 잔 값을 계산하고 카페를 나섰다. 여전히 맑은 햇빛이, 따갑지 않고 그저 반가웠다.


+

제 홈페이지에 한번 올렸던 글입니다. ^^;
계속 글을 읽기만 하다 이번에 용기내어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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