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그의 선택

2021.12.02 11:5512.02

 

 

최정수는 자신이 직접 계약한 집에서 살기로 한다. 이 집을 ‘집1’이라고 부르자. 이유는 ‘비(非)의도적 쓰레기’ 때문이다. 집1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비의도적 쓰레기가 나타나는 집을 ‘집2’로 정해두고 이야기를 진행해보자.

 

정수는 새로 구한 직장 때문에 이 동네로 이사 왔다. 주소 표지판을 가리면 전에 살던 동네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닮은 도시의 서민 동네다. 어차피 잠만 잘 곳이니 직장에서 가깝고 저렴한 걸 우선으로 했다. 정규직이 된 덕분에 전세 대출을 받아 계약할 수 있었다. 월세가 나가지 않는 것 말고는 좋다고 말하기 힘든 집이다. 계단 세 칸을 올라가는 화장실이 부엌에 있는 반지하 단칸방이다. 벽지며 장판이 누런데 주인아줌마는 전셋집이니까 알아서 하라고 했다. 당연히 정수는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그냥 살기로 마음먹었다.

 

정수가 집1과 집2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 건 한 달 전 퇴근길에서 시작되었다. 그날 SNS로 동네시장 인근 편의점에서 폐기 예정 도시락을 천 원에 판다는 걸 알았다. 놓칠 수 없는 기회다. 퇴근하자마자 편의점에 간 정수는 운 좋게 남은 도시락을 샀다. 도시락을 사고 집에 돌아가면서 길을 좀 헤맸다. 시장 근처에 좁은 골목이 많고 아직 동네 지리에 익숙하지 않아서다. 묘한 분위기의 좁은 골목을 지나자 갑자기 넓은 대로변이 나왔다. ‘어, 이거 어디 영화 같은 데서 본 것 같은 느낌인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집1로 향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집1은 없었다. 이럴 수가! 분명 양옆의 건물은 똑같았다. 녹색 기와를 얹은 빨간 벽돌집이 왼쪽, 오른쪽은 지붕을 태양광 패널로 다 덮은 녹슨 대문의 이층집이다. 그리고 그사이에 반지하 포함 삼 층짜리 구닥다리 다세대주택이 정수의 집1인데……. 그 자리에는 깔끔한 원룸 건물이 있는 게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다. 잘못 찾아왔을까? 그럴 리 없다. 알츠하이머도 아닌 30대 청년이 한 달이나 오간 자기 집골목을 헷갈린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때 뒤에서 “301호 총각, 뭐해?” 한다. 돌아보니 주인아줌마다. 아줌마는 맞은편 빌라 주차장에 놓인 평상에서 책을 읽고 있다. 손에 든 책은 테드 창의 SF 단편집 ‘숨’이다. 정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한다.

“공동현관 비밀번호 까먹었어? #12346#이잖아. 5 아니고 6. 아휴, 쓸모도 없는 거 그냥 적어서 붙여놓을까 봐.” 정수가 고개를 꾸벅하자 주인아줌마는 볼일 다 봤다는 듯 책에 집중한다. 정수는 공동현관문을 열고 엘리베이터를 타고-전엔 없었다!- 301호 앞으로 간다. 집1의 비밀번호인 정수의 생년월일 조합 6자리를 누르자 띠리링- 문이 열린다.

원룸 안은 하얗고 깔끔하다. 조금 좁은 감이 있었지만 필요한 모든 것들이 다 갖춰져 있고 전부 새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확인해야 한다. 서랍과 옷장을 열어본다. 전부 정수의 물건이다. 책장을 살핀다. 모두 정수의 책이다. 정신이 멍해진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20분 정도 깨끗한 침대-너무 좋다!-에 앉아 고민하던 정수가 결론을 내린다. ‘그래, 이 집에서 그냥 살자.’ 어느 모로 봐도 집1보다 낫다. 포기하거나 거절할 이유도 없고 방법도 없다. 어차피 이 자리에 있던 집1은 없어졌으니 돌아갈 곳 자체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얼마간은 집2에서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것’이 나타났다. 한밤중이었다. 자고 있던 정수가 인기척을 느껴 깼다. 가로등 불빛이 넘어와 하얀 벽에 뚜렷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벽 앞에서 뭔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림자는 아니었다. 창틀 그림자는 고정된 채 벽에 있었으니까. 움직이는 것은, 정확히 꼼지락대고 있는 것은 사람 손이었다. ‘저거 손이야!?’ 정수가 마음속으로 외쳤다.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 허공에 나타난 손은 그 자체로 평범했다. 손가락이 다섯 개였고 정수의 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마 그럴 것이다. 도저히 가까이 가서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침대에 누워 본 것으로 판단하자면 그렇다.

손은 분명한 제스처 몇 가지를 취했다. 먼저 주변을 더듬었다. 하지만 허공이라 아무것도 만지지 못했다. 다음은 좀 소름 끼치는데 정수를 향해 인사하듯 손을 흔들어댔다. 하마터면 정수도 같이 손을 흔들 뻔했다. 그리고는 포기한 듯 잠시 늘어져 있었다. 허공의 어떤 구멍에서 손만 나와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저긴 말 그대로 허공이다. 허공에 구멍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멈춰있던 손은 갑자기 가위바위보를 몇 번 하더니 다시 바이바이~ 흔들고 슥 사라졌다. 사라지는 그 찰나에 옅은 빛이 나오는 구멍이 보였다가 없어졌다. 그리고는 정적…. 허공의 손이 어떤 소리를 내진 않았으니 전부터도 조용했지만, 그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자 원룸 안에 죽음 같은 고요가 찾아왔다.

 

다음 날 출근한 정수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자기가 어제 본 건 뭘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신 이상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정신은 멀쩡하다. 모순되는 두 사실이 격렬하게 부딪혔고 정수는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었다.

며칠 후 SNS에 지난번처럼 폐기 도시락 염가 판매 글이 올라왔다. 정수는 퇴근길에 시장 편의점에 들러 도시락을 샀고, 역시나 묘한 분위기의 좁은 골목을 지나 집에 왔다. 그리고 다시 혼란에 빠졌다. 원룸은 온데간데없고 최초에 정수가 계약했던 다세대주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대체…….’

“반지하 총각, 그 도시락이 저녁이야?”

돌아보니 주인아줌마가 평상에 앉아있다. 이번에도 책을 보고 있는데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다. 정수는 ‘여전히 SF를 좋아하시는구나.’라고 속으로 생각한다. “그런 거 먹으면 몸축날 텐데…. 빨리 장가가야겠어.” 아줌마의 농에 정수가 적당히 미소로 맞장구치며 집으로 들어간다. 반지하다. 비밀번호는 같다. 문을 열자 반지하 특유의 습기 내음이 코로 훅 들어온다. 정수가 서랍과 옷장과 책장을 살핀다. 모두 정수의 물건이다. 허허허.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이날부터 정수는 집1(반지하)과 집2(원룸)를 구분한 다음, 이 둘에 대해 추측해본다. 하지만 모르겠다. 혹시 진짜 정신 이상인 걸까?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묘한 골목이 퍼뜩 떠오른다. 시장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지나쳤던 골목…. 저번에도 거길 통과하자 집이 바뀌었고 이번에도 그렇다. 생각에 여기에 미친 정수가 급히 시장으로 향한다. 편의점 앞에서부터 집까지 같은 경로로 온다. 그러나 집은 그대로 집1이다. 그 골목이 열쇠 아닌가? 어쩌면 하루 한 번이라는 제한이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낮과 밤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정수는 방에 배를 깔고 엎드려 휴대폰 메모장에 확인할 사항들을 꼼꼼히 적어본다.

약 일주일간 테스트를 했고 대략적인 결과가 나왔다. 오후 6시부터 8시 사이 그 골목을 통과하면 집이 바뀐다. 한번 바뀌면 그날엔 다시 바뀌지 않는다. 집 이외에는 모든 것이 전과 같다. 통장 잔고의 일 원짜리부터 주인아줌마의 SF 취향까지. 이제 정수는 반지하 단칸방과 풀옵션 신축 원룸 중 골라서 잘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정수는 신축 원룸인 집2를 택했다. 처음에는 ‘허공손’-명칭을 이렇게 정했다-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진지하게 십여 분간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상관없다’다. 허공손은 멍청하게 움직였을 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다. 애초에 집을 구할 때 연쇄살인범의 범행 장소였거나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거나 누군가 급사해서 말도 안 되게 저렴한 가격으로 나온 물건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정수다. 그러니 쾌적한 원룸에 가끔 등장하는 무해한 허공손은 무시하며 지낼 수 있다.

 

얼마간은 집2에서 평화롭게 지냈다. 집1로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자꾸 쓰레기가 나타나는 것이다. 비의도적 쓰레기다. 정수가 먹지 않은 과자봉지, 음료수 페트병, 맥주캔 따위. 정수가 퇴근하고 오면 집안 곳곳에 그것들이 있다. 혹시나 쓰레기에 힌트가 있을까 해서 살펴봤지만 전부 처음 보는 브랜드의 과자봉지나 맥주캔이었다. 인터넷에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다. 이것들은 대체 무엇이며 어디서 오는 것일까?

가끔은 자다 깨도 생겨날 때가 있다. 혹시 허공손.... 그놈 짓일까? 며칠간 비의도적 쓰레기에 시달린 정수가 웹캠을 방에 켜놓고 출근했다. 어쩌면 (얼굴을 모르는) 옆집 사람이나 주인아줌마가 몰래 와서 버리고 간 것일 수도 있다. 그편이 차라리 낫다. 현실의 물리법칙내지는 법률을 적용해 해결할 수 있으니까.

안타깝게도 범인은 정수의 능력 바깥에 있었다. 웹캠에는 비의도적 쓰레기가 발생하는 순간이 녹화되지 않았다. 쓰레기가 나타나기 얼마 전부터 화면이 왜곡되면서 노이즈로 가득해졌다가, 정상으로 돌아오면 쓰레기가 뿅-하고 나타나는 식이다. 증거라고 내밀기 곤란한 영상이다. 범인의 모습이나 원인이 기록되어있지 않으니 말이다.

쓰레기 생기는 순간을 직접 겪긴 있다. 세탁기에 빨래를 넣으려고 웅크리고 있는데 등에 뭔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재빨리 몸을 돌려 보니 정수의 등 위 허공에서 종이컵과 간식용 소시지 포장비닐이 생겨나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지난번 허공손처럼 사라질 때 순간적으로 빛이 보였다. 그리고 남은 것은 정수의 등을 스치고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들이다.

정수는 화가 났다. 쾌적한 원룸 생활을 방해하는 비의도적 쓰레기라니! 하지만 곧 특유의 침착함을 발휘한다. 해결할 방도가 없는 일에 분노해봤자 본인만 손해라는 게 정수의 지론이다. 찬찬히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고 분석한 다음 그에 맞는 대책을 세우면 된다. 먼저 다행스러운 점(좋은 점이 아니다!)은 최악의 쓰레기는 아니란 거다. 화장실에서 사용한 휴지나 탐폰 같은 물건이 나타난 적은 없다. 덕분에 방이나 가구에 심각한 오염이 발생하지 않았다. 주워서 버리면 그만인 것들이다. 그렇다면 쾌적한 원룸 생활을 위해 이 쓰레기들을 참아야 할까? 그렇다고 말하긴 어렵다. 랜덤하게 발생하는 쓰레기가 ‘쾌적’을 박살 내고 마음속 인내와 평화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 어떤 식으로 나타날지 모르는 쓰레기만 제외하면 깨끗한 원룸.

앉아있으면 우울하고 눈뜨면 나가고 싶은 반지하.

둘 중 어느 게 더 나을까? 고민스럽다. 결론을 내리는 게 어려워 고민하다 정수는 집2 침대에서 잠이 든다.

 

잠이 든 정수가 눈을 뜬다. 지난번 허공손을 봤을 때처럼 인기척을 느껴서다. 가만히 눈을 떠서 방안을 살핀다. 이번엔 싱크대 옆 허공에 뭔가가 떠 있다. ‘무슨 쓰레기지?’ 하지만 그건 늘 보던 그런 쓰레기가 아니다. 방이 어두워 정확히 무엇인지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것은 얼핏 공처럼 보였는데 그렇다고 완벽한 원형은 아니었다. 각도를 살짝 바꿔보니 계란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표면에 주름이 진 듯하고 뭔가가 삐져나와 있다. 허공손과 비의도적 쓰레기를 겪은 후부터 이런 현상이 더는 무섭지 않다. 께름직할 뿐이지. 하지만 지금의 정수는 호기심 때문에 께름직한 것도 잊고 작은 사과만 한 그것의 옆으로 다가간다. 어둠이 눈에 익었고 바로 옆에서 볼 수 있으니 많은 것들이 명확해졌다. 그것은 공도 달걀도 사과도 아니었다. 그것은 얇고 쭈글거리며 표면에 잔털이 난 물체였다.

그것을 진지하게 관찰한 정수가 내린 결론은 고환이다. ‘설마!’이건 뭔가 너무 기묘하다. 하지만 허공손을 떠올리니까 허공고환도 안될 건 없지 읺은가? 란 생각이 든다. 근데 정말이냐고? 믿을 수가 없다. 정수는 허공손 때는 감히 하지 않았던 행동을 한다. 손을 뻗어 고환으로 추정되는 그 물체를 만져보는 것이다. ‘이러면 확실히 알게 되겠지.’ 정수가 손으로 그것을 만져본다. 물컹하면서 약간 서늘한 느낌이다. 정수의 터치에 고환이 반응한다. 순간 정수의 머리털이 삐쭉 선다! 확실하다. 이것은 진짜 고환이다. 살아있는 고환! 으아악!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다. 남은 삶 동안 누군가의 고환을 만져볼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런데 어째서 내 집 허공에 고환이 덜렁 나타난단 말인가! 그것을 또 만지기까지 하고! 정수는 혐오와 분노에 휩싸여 고환을 때린다. 주먹으로 내리치려다 본능적으로 손바닥으로 바꿔 때린다. 누굴 죽일 수도 있는 일이니까 주먹은 안된다. 이건 남자들끼리의 불문율이다. 허공고환은 정수의 분노에 확실히 반응한다. 부르르 떨며 고통을 느끼더니 그대로 사라진다. 순간적인 섬광과 함께.

 

다음날 정수는 미련 없이 집1로 결정하고 퇴근길에 묘한 골목으로 향한다. 허공손이나 비의도적 쓰레기까지는 고민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이건... 이건 정말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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