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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극복

2015.06.30 02:1106.30

  긴 가뭄이 구름을 다 어디로 출장 보냈나 보다. 겨우 십분 남짓 걷는 동안 땀이 났다. 땀 냄새가 나면 어쩌지? 사내는 여자 친구 집에, 알랑의 방에 땀 냄새 풀풀 풍기며 들어가게 될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딱히 수가 없었다. 어딘가 그늘에서 땀을 식히고 가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그녀의 집 건물이 드리운 그늘이었다.
  경비실의 굵은 뿔테 안경을 쓴 아저씨가 사내를 쳐다보았다. 괜스레 얼굴이 따가웠다. 매번 여기에 올 때면 마주치는 남자는 전부 알랑의 아버지 같고 여자는 어머니 같았다. 표정으로 윽박지르고 추궁해 오곤 했다. 네 이놈! 여긴 무슨 일로 왔느냐? 물론, 알랑의 집에서 보았던 가족사진에 저 경비 아저씨를 닮은 사람은 없었다. 예비 장인어른이 아니라 그냥 경비 아저씨일 뿐이니 사내는 그냥 수상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않으면 된다.
  2. 1. 0. 1. 숫자를 누르고 호출 단추를 누르자 곧바로 문이 열렸다. 로비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때마침 알랑의 메시지가 휴대전화에 도착했다.
  어디까지 왔어?
  로비야.
  잠시 후 도착한 엘리베이터는 사내를 21층 높은 곳까지 순식간에 옮겨 놓았다.
  2101호의 초인종을 누르자 알랑보다 그녀가 기르는 강아지가 먼저 반응을 보였다. 왈! 멍! 철제 현관문 너머에서 강아지를 진정시키려는 알랑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티슈야, 조용히 해.”
  현관문이 열리고 알랑이 얼굴을 내밀었다.
  “들어와.”
  “응.”
  사내는 괜히 2102호와 2103호를 한 번씩 쳐다보고서야 알랑의 집에 들어갔다.
  “근데 강아지 쟤는 나 두세 번 봤으면서도 또 짖네.”
  “무서워서 그래. 덩치 큰 남자 무서워하거든.”
  알랑은 사내에게 설명하다가 아직 짖고 있는 강아지를 쳐다보고,
  “티슈야, 조용히 하랬지!”
  하고 낮지만 위엄이 있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리고는 다시 사내를 향해 말했다.
  “오빠, 거기 어디 앉아 있어. 화장 좀 할게.”
  “응.”
  다행히 알랑은 사내의 땀 냄새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사내는 알랑의 가족사진을 외면하듯 고개를 살짝 숙인 채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의자 등받이에 속옷이 걸쳐져 있었다. 치우기 마땅치 않아 보여서 사내는 일단 방바닥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러고서 한숨 돌리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강아지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리 와 봐.”
  짐짓 웃으며 손짓해 봤지만 그게 강아지를 더 놀라게 해 버렸다. 강아지가 두어 번 짖고는 자기 보금자리 쪽으로 후다닥 달려 도망갔다. 건넛방의 알랑이 꾸짖듯 말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티슈!”
  잠시 후 강아지는 다시 사내에게 도전해 왔다. 알랑의 방 앞에까지 와서 사내를 경계했다.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린 채 외면하고 있지만 사내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다. 사내가 손바닥을 펼쳤다.
  “이리와 봐.”
  그러자 강아지가 또 도망가 버렸다. 이번에는 자기 보금자리까지 후다닥 물러나서는 거기서 짖어 댔다. 결국, 알랑이 다시 나서야 했다.
  “티슈야. 조용히 좀 해.”
  그녀가 강아지를 얼러 놓고 사내에게 뭔가를 가져다주었다.
  “주지는 말고 가지고 있어 봐.”
  “이게 뭔데?”
  “껌 같은 건데, 그냥 간식.”
  “호오. 엄청나게 좋아하나 봐. 와서 눈치 보고 있네?”
  강아지가 보금자리를 박차고 나와 사내의 앞에서 웅크리고 서 있었다. 강아지의 시선이 간식에 꽂혀 있었다.
  “오빠. 손 달라고 해 봐.”
  해 볼 필요도 없었다. 강아지는 사내가 시키기도 전에 앞발을 들어 내밀었다.
  “다른 손도 달라 해 봐.”
  강아지가 다른 쪽 앞발을 내밀었다. 알랑의 도움을 받아 강아지를 앉히고 누이고 엎디고 구르게 할 수 있었다. 예쁜 짓도 시켰다. 처음으로 강아지의 배를 긁어 볼 수 있었다.
  “무섭다고 막 짖을 땐 언제고 먹을 거 앞에서 무너지네. 이놈의 강아지.”
  잘했다고 간식을 던져주니 그걸 자기 보금자리로 물고 가서 씹어 먹기 시작했다. 그 꼴을 보다가 한마디 하니 알랑은,
  “할머니 개랬잖아. 강아지 아니야. 그리고 아직 오빠를 무서워하는 거 맞아. 다만 먹을 것에 대한 욕망이 순간적으로 뛰어넘게 한 거지.”
  하고 정정해 주었다.
  “그런가? 그리고 나한테는 작고 귀여우면 다 강아지야.”
  사내는 그녀의 말에 곧바로 수긍하지는 않았다. 배까지 드러내고 애교를 부려 댔는데 아직 무서워하는 거라니. 하지만 곧 그녀의 말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금세 간식을 해치운 강아지가 사내에게 달려와서는 또 짖어 댔다. 
  그렇게 가까이 오지도 멀리 가지도 않고 짖기만 하는 꼴을 보고 있으니 조금씩 심통이 쌓이기 시작했다. 겁을 내는 게 아니라 그냥 싫은 것은 아닐까. 아직 가족들에게 인사도 못 드렸는데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한테 먼저 거절당한 기분이었다.
  사내는 불쑥 팔을 뻗어 강아지를 안아 올렸다. 괘씸한 김에 안은 채 쓰다듬어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예상을 뛰어넘은 강아지의 반응에 곧바로 놓아 줄 수밖에 없었다. 겁에 질린 강아지의 몸부림이 너무 심했다. 낑낑거리며 비명 같은 소리도 냈다. 사내의 손에서 벗어난 강아지는 바닥에 오줌까지 지렸다. 강아지는 자기 보금자리 쪽으로 가서 와들와들 떨어 댔다.
  “알랑아. 얘가 지금 무서워서 오줌 싼 건가?”
  알랑이 와서 방바닥과 강아지를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그녀는 강아지를 안아 올리더니,
  “아이구, 우리 티슈 무서웠어요?”
  하며 달래기 시작했다.
  사내는 알랑이 시키는 대로 강아지 소변을 닦고 바닥을 청소했다. 그는 청소하는 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 참, 왜 무서워하면서도 굳이 나한테 왔지? 그냥 멀리 있으면 되는데 왜 굳이 와서 무서워했지?”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알랑은 화장을 마무리하러 건넛방에 갔고 그녀가 보금자리 쪽에 내려놓은 강아지만 알랑의 방 문턱에까지 와서 사내를 지긋이 쳐다보고 있었다. 강아지는 당연히,
  “내가 무서우니까 오히려 더 보러 오는 거니?”
  라는 사내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동안 물끄러미 강아지를 쳐다보던 사내가 피식 웃었다.
  “네가 나보다 훨씬 낫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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