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신을 죽인 날

2022.03.04 20:0003.04

 

있잖아 정말로 신이 있을까?”

길을 걷던 중, 돌연히 태석이가 나한테 질문을 던졌다.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던 나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글쎄다, 있을 수도 있지만 없을 수도 있고. 하지만 난 기본적으로 무신론자라서.”

나는 철저하게 이과 감성을 지닌 사람이기에 마법 같은 초자연 현상은 기본적으로 안 믿는 파다. 물론 이 세상에는 과학적으로 설명 불가능 한 것들이 산재해 있지만 어디까지나 원리를 못 찾았을 뿐, 결코 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난 믿어, 왜냐하면 본 적 있거든.”

?”

신을.”

신을 본 적 있다고?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분명 해외 특종일터. 분명 꿈이라도 꾼 거겠지. 만화나 영화에 푹 빠져 남들 이상의 상상력을 지닌 태석이는 분명 너무 몰두한 나머지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못 하게 된 거다. 난 농담이라도 주고받는 마냥, 그에게 맞장구를 쳐주었다.

신이라니 어떤 신인데? 예수님? 아니면 부처님? 혹시 무함마드?”

글쎄, 모르겠어. 어느 종교에도 속하지 않은 신일지도. 하지만 이제 와서 어떤 신이었는지는 알 수 없을 거야. 왜냐하면 이미 죽었으니까.”

신이 죽었다고 단정짓는 태석. 신이 죽다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물론 예수님도 생전에 십자가에 박혀 죽은 적이 있지만, 그 이전에 이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겠지. 나는 태석의 이야기를 적당히 흘러들을 생각이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지난주에 말이야, 길을 지나가다가 어떤 지렁이를 발견했어.”

지렁이?”

장마철이 끝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길가에 지렁이를 발견하는 것도 그리 이상하지 않다.

근데 햇빛이 쨍쨍해서 그 지렁이는 말라 죽어가고 있었어. 하지만 지렁이는 꽤나 유익한 생물이잖아? 지렁이의 배설물은 토양을 비옥하게 해줘서 농사 짓는데 많은 도움을 줘. 적어도 나보단 살 가치가 있어. 그래서 그늘진 흙이 있는 쪽으로 옮겨줬지.”

지렁이는 꽤 유익한 생물이었구나. 나 같으면 징그러워서 그냥 무시했을 것을, 잘도 그걸 손으로 집어 옮겨줄 생각을 했군.

그랬더니 그 지렁이의 몸이 빛나기 시작하더니,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어.”

?”

갑자기 이야기가 껑충 뛰었다. 역시 영화를 많이 봐서 몽유병이라도 걸린 걸까?

지렁이의 모습이었던 사람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 되지만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였는데 나보고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했어. 자신은 천계에서 추방된 몸이라 인간계로 오게 되었는데, 처음으로 도와줬던 사람이 나래. 그래서 나한테 보답을 하고 싶대. 그러더니, 나에게 손을 내밀고 빛이 되어 사라졌어.”

결국 증거는 없다는 말인가. 묘하게 구체적인 걸 보아 꽤나 그럴듯한 내용으로 들렸다.

역시 그건 죽은 걸까?”

나한테 물어봐도 모른다고.”

우리들은 작별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태석이가 말했던 지렁이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한 신. 그게 정말로 사실인지 거짓인지 나한테 증명할 방법은 없다. 나는 샤워를 마치고 취침 준비를 했다. 침대에 누워, 오늘 있었던 일을 되새기며 차분하게 눈을 감았다.

 

“....”

으음...”

“...인간이여.”

, ?”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 나는 화들짝 잠에서 깼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공간은 익숙한 방이 아닌 안개로 자욱한 낯설고 으스스하기 짝이 없는 공간이었다.

잘 들으세요 인간이여.”

...누구야?”

들은 적이 없는 낯선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여성의 목소리 같으면서도 감미롭고 청량한 목소리였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해당 목소리의 주인을 찾으려 했지만 어떤 생명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고 고독만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나한테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는 듯했다.

잘 들으세요 인간이여. 지금 이 세계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할 지도 모릅니다.”

최악?”

신의 힘은 인간이 갖기에는 과분한 능력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 신의 힘이 인간한테 주어진 상태입니다.”

인간한테 신의 힘이 주어졌다고?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 나는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걸까? 낮에 태석이랑 나누었던 이야기의 영향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

인간이여, 부디 주의하십시오. 손쓸 방도가 없어지기 전에, 신의 힘을 얻은 인간을 제지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목소리는 마지막까지 무언가를 전하려고 했지만 소리가 점점 희미해지더니 낯선 공간은 형체가 일그러져 나는 어디론가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따르릉 울리는 알람 시계에 반응을 하며 나는 눈을 떴다.

뭐였지 방금?”

이상한 꿈이었다. 하지만 기상과 동시에 내가 꾸었던 꿈의 내용은 머릿속에서 거의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꿈 같은 건 어차피 환상에 불과하니까. 깊게 파고들어봤자 의미 같은 건 없다. 나는 적당히 세수를 하고 교복을 차려 입고 집에서 나와 학교로 향했다. 그 이상한 꿈 때문인지 식욕이 없어져 아침 식사는 그냥 걸렀다. 배가 고프면 쉬는 시간에 빵이라도 사 먹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교실에 도착했다. 반에는 아이들이 몇 명, 수다를 떨고 있거나 자습 중이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태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녀석, 오늘은 늦네?”

태석이네 집은 버스를 몇 번이고 갈아타야 학교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그래서 언제나 꼭두새벽에 기상하여 다른 학생들보다 일찍 학교에 오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이나 매점이라도 간 것일까, 하고 그의 자리를 확인했지만 가방이나 필기도구도 없는 걸 보아 아직 등교하지 않은 건 확실했다.

오전 810, 예비 종이 울리면서 담임 교사가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출석부를 펼치며 출석을 체크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태석의 이름을 부를 차례가 되었다.

“...추지태, 하진호...”

그때, 마찰음이 들리며 교실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한태석.”

!”

교사가 이름을 호명함과 동시에 태석이가 교실 안에 들어오며 대답했다. 잠자코 출석 체크를 듣고 있던 아이들의 시선은 태석을 향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한태석, 아슬아슬하게 지각은 면했네. 다음부턴 좀 더 일찍 와라.”

, 선생님.”

출석체크가 끝남과 동시에, 아이들은 1교시를 기다리며 자습을 했다. 교사가 반을 떠나고 나는 태석한테 다가가서 조용히 말을 건넸다.

, 너 오늘 웬일로 늦게 왔냐?”

한 번 시험해본 거야. 과연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하며 교실에 들어올 수 있는지.”

시험했다고? 언제부터 이 녀석은 그런 쓸데없는 일을 시도하게 된 걸까? 그러다가 내신에 지장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려고?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태석을 비웃고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그러자 태석은 다른 아이들에겐 들리지 않을 만한 가느다란 목소리로 나에게 어떤 사실을 고했다.

나 말이야, 시계나 스마트폰을 보지 않고 현재 시각을 알 수 있게 되었어. 그게 얼마나 정확한지 확인하기 위해 한 번 시도해 본 거지.”

“...?”

의미불명한 소리를 하는 태석을, 나는 못 들은 채 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시작에 불과했다. 앞으로 일어나게 될 무시무시한 사건에 비하면 별 볼일 없었던 사소한 일이었으니까.

 

점심 시간, 종이 울리며 아이들은 일제히 교실 밖으로 나갔다. 몇몇 아이들은 자습을 하거나 도시락을 먹기 위해 교실에 남았지만 나나 태석은 다른 아이들처럼 식당으로 가기 위해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자 태석은 나한테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다.

미안, 나 오늘 볼일이 있어서 점심은 패스할게.”

? .”

교실에 늦게 도착하지 않나, 점심을 패스하지 않나, 오늘따라 태석의 상태는 굉장히 묘했다. 결국 혼자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가려 했지만 아침에 꾸었던 꿈 탓인지, 아직도 속이 울렁거렸다. 그래서 나도 태석이처럼 오늘 점심은 그냥 넘기기로 정했다. 1시간의 점심 시간 동안 교실에서 오늘 배운 수업을 복습할지, 아니면 도서관에서 책이나 읽으며 시간을 때울지, 두 가지밖에 택할 수 없었지만 나는 기분 전환도 할 겸 운동장에서 산책을 하기로 결심했다. 운동장을 두 바퀴 정도 돌았을 무렵, 매점에 가서 음료수를 사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중, 뒷골목에 여러 학생들이 모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교복에 붙어있는 명찰의 색을 보아하니 상급생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태석이 다리를 뻗으며 꼿꼿하게 서있었다.

, 한태석. 오늘은 넉넉하게 가져왔겠지?”

상급생 무리 중 한 명이 태석한테 질문했다. 아무래도 이 상황은 흔히들 말하는 학교폭력의 일종인 삥뜯기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학교에선 운동부 소속의 질 나쁜 상급생들이 이따금씩 하급생들을 협박해 돈을 빼앗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지만, 이렇게 실제 현장을 목격하게 되는 건 거의 처음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이 당사자가 되는 경우는 더더욱.

좋은 말 할 때 내놔. 걱정 마, 다음번에 돌려줄 때 배로 갚을 테니까.”

다른 상급생이 가세해서 태석한테 돈을 요구했다. 이런 것이 용납되면 안 된다. 하지만 내가 대체 뭘 할 수 있겠는가? 교사한테 일러 바친다고 해도 증거가 없고 역으로 내가 다음 협박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자신의 친구조차 구할 수 없는 무력감에 나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태석의 표정은, 이런 상황에서도 침묵을 유지한 채 태연해 보였다.

, 내 말 안 들려? 빨리 내놓지 못해? 10원에 한 대니까 그런 줄 알아!?”

. 시시해. 이런 걸 할 시간이 있으면 공부를 하든가 운동 연습이라도 하지 그래요?”

주제를 모른 채 상급생들에게 도발하는 태석이었다. 태석이가 자신들의 뜻대로 행동해주지 않아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급생 중 한 명은 태석의 안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럴 터였다. 상급생의 주먹은 태석의 안면에 닿기까지 불과 1mm 정도를 남기고 그대로 공중에 멈춰 섰다. 상급생들은 믿기지 않는 광경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 뭐해?”

..몰라!? 손이 안 움직여!”

손이 공중에서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아, 식은 땀을 흘리며 신경이 곤두선 상급생은 곧이어 손목이 360도 방향으로 비틀려지면서 속박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악!!!!”

고통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상급생. 참혹한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상급생들은 공포에 질려 그를 남긴 채 그 자리를 재빨리 벗어났다. 오직 태석만 그대로 남은 채, 바닥에 뒹굴면서 다른 손으로 비틀려진 손목을 붙잡고 절규하는 상급생을 비웃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대체?”

나는 온몸이 전율했다.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도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나는 꿈이라도 꾼 것일까? 아니면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 혼란 속에 빠지던 찰나, 슬슬 지겨워진 태석이가 자리를 떠나려고 하자 나는 황급히 모습을 숨겼다. 그리고 점심 시간의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려 나도 서둘러 교실로 돌아갔다.

교실로 돌아온 태석의 모습은 여태까지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그런 점이 오히려 더욱 소름 끼치기 짝이 없었다. 상급생의 손목을 비틀었던 그 초자연 현상은 대체 뭐였을까? 수업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도 느낄 새도 없이 어느덧 하교종이 쳤다. 이렇게 시간이 빨리 흐른 것은 여름 방학 이후로 처음이었다. 평소 같으면 기분 좋게 하교했을 텐데, 이번에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을 예감이었다. 나는 태석에게 볼일이 있다고 전하며 그를 먼저 보낸 뒤 몰래 뒤따라갔다.

태석이 향한 곳은 1층에 있는 빈 미술실이었다. 신축공사로 인해, 해당 미술실은 텅 비어있었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 이곳으로 갈 이유는 없었다. 태석은 미술실 안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고, 곧이어 어떤 후배 여학생이 들어왔다.

혹시 절 부르셨나요?”

그래, 마침 잘 왔어. 할 얘기가 있어서 말이야.”

모르는 여학생과 이야기를 나누는 태석, 나는 그들의 대화를 제대로 듣기 위해 미술실 문 바로 옆에 숨을 죽이며 서 있었다.

있잖아? 나랑 사귀지 않을래?”

? 갑자기 그런 얘기는 좀...”

갑작스러운 태석의 고백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인 여학생, 그나저나 태석이가 이렇게 대담한 녀석이었던가? 연애와는 담을 쌓은 철저한 모태솔로 아웃사이더라고만 생각했는데, 내가 모르는 태석의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태석은 곤란해하는 여학생을 보고도 오히려 히죽거리며 다음 말을 이어갔다.

딱히 네 의견은 아무래도 좋아. 애초에 너한테 선택의 여지를 줄 생각은 없으니까.”

? 대체 그게 무슨...”

여학생이 말을 끝낼 틈도 주지 않은 채, 태석은 정신을 집중하며 그녀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그러더니 여학생은 몸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은 마냥, 상하의를 벗기 시작하더니 바닥을 향해 엎드렸다. 태석은 속옷차림이 된 채, 추태를 보이는 여학생을 내려다보며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부터 넌 내 노예야. 그러니까 내 명령은 무조건 따라야 해. 명령에 거스른다면 알지?”

...주인님.”

태석도 상의를 벗기 시작하더니 둘은 무언가 특정한 행위를 시작하려 했다. 나는 도저히 맨정신으로 지켜볼 수 없어 다급히 자리를 떠났다. 복도임에도 불구하고, 주변 교사나 학생들의 시선도 무시한 채 그저 달려나갈 뿐이었다. 그리고 간신히 나는 집에 도착했다.

난 아무것도 못 봤어...! 아무것도 못 봤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벌벌 떨면서 나는 자기 암시를 걸었다. 그건 정말로 내가 알던 한태석인 맞는 걸까? 내가 알던 한태석은 가끔 엉뚱한 발언을 하긴 하지만 불량한 성격과는 거리가 먼 별 다른 사고를 치지 않은 그럭저럭 모범 학생에 속한다. 하지만 방금 보았던 태석은 마치 사람이 360도 돌변한 것처럼 방탕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침대에 처박혀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른 지 체감을 못한 채, 나는 잠의 유혹에 빨려 들어갔다.

 

“...이여.”

또 그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나는 다시 눈을 떠 이번에야 말로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방향감각조차 알 수 없는 안개로 자욱한 이곳에서 이 행위가 얼마나 의미 있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냥 이대로 포기하고 잠에서 깨어나길 기다렸지만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이여 저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닐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 언제 어디서든 만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심상은 언제든지 저에게 흘러 들어오기 때문에 굳이 소리를 내서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대체 뭐야...?

그리고 당신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들어줄 수 있습니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인 것도 모자라 부탁을 하고 싶다고?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인 거지? 나는 혼란 속에서 지난번 꿈에서 들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분명 인간한테 신의 힘이 주어졌다고...

맞습니다. 당신도 그 광경을 목격했을 겁니다.”

설마 태석이가...?”

학교에서 보았던 초능력을 사용하는 듯한 태석은 실은 신의 힘을 사용하는 거라고? 그런 거라면 어느 정도 설명은 되겠지만 대체 어디서 그런 힘을 얻었는 지가 미지수다. 그러고보니 어제 태석이랑 얘기했을 때 분명...

‘...그 지렁이의 몸이 빛나기 시작하더니,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어.’

지렁이에서 사람의 모습이 된 건 신이었다...?”

짐작하신 대로입니다. 그자는 중죄를 지어 천계에서 추방된 저희들과 같은 신입니다. 그러나 그자는 모습을 숨긴 채 지상을 떠돌아다녀 한 인간에게 신의 힘을 줘버렸습니다. 아마 자신을 추방한 천계를 향한 복수겠죠. 신은 기본적으로 지상에 간섭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니까요. 신의 힘은 워낙 방대하고 강력하기에 인간은 쉽게 도취되어 자아를 잃어버리고 욕망에 먹혀 들어가고 맙니다.”

그렇게 된 거였나...!?”

직접 들어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으니 난 이 신이라 추정되는 목소리가 하는 이야기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사태를 파악한 나를 알아차린 신은 단도직입적으로 결론부터 말했다.

그러니 사태가 최악의 방향으로 가기 전에 그 자를 막아주세요.”

잠깐만요! 막으라고 해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고요! 애초에 전 평범한 인간이고 상대가 될 리가 없는데...!”

그 자를 막기 위해서는 신을 죽이는 도구가 필요합니다. 예전에 모든 것에 면역이 생긴 신을 죽였던 유일한 물건이.”

신을 죽이는 도구...? 그건 대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저번과 달리 꿈의 내용이 생생했다. 그 신은 신을 죽이는 도구가 있으면 이 사태를 해결할 지도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미처 듣지 없었다. 이왕이면 제대로 알려주지 신 주제에 쪼잔하긴. 남한테 자기일이나 떠넘기고 말이야.

하는 수 없이 나는 교복을 대충 입고 학교로 향했다. 어제 본 태석이가 신경 쓰였지만 이제 와서 별 수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도착. 하지만 어째서인지 학교 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시간을 착각해서 수업이 이미 시작되었나? 하고 스마트폰을 확인해 보니 오전 754, 늘 등교하는 시간과 별 다름없었다. 미심쩍었지만 나는 별 수 없이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믿기지 않는 광경에 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책상에 앉아있는 아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바닥에 엎어진 채 꿈쩍도 않았기 때문이다.

...뭐하는 거야?”

난 아이들의 반응을 기다렸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 채 계속 서 있던 나에게 그 녀석이 말을 걸어왔다.

뭐해 계속 서 있기만 하고, 자리에 가서 앉지 그래?”

나는 목소리가 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 앞에는 교탁 위에 앉아있는 태석이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그에게 물었다.

너 뭐하는 거야?”

내 능력을 시험해 보려고. 얼마나 인간을 자유자제로 조종할 수 있는지 확인하려고. 일종의 생태 탐구려나?”

태연하기 짝이 없는 뻔뻔스러운 얼굴을 하며 태석이는 시선을 바닥에 엎드려 있는 학생들에게 향했다. 그는 학생 한 명을 가리키더니 어떤 명령을 내렸다.

, 옷을 벗어. 그리고 옆에 걔를 죽을 때까지 패버려.”

“....”

지목된 학생은 옷을 벗더니 옆에 있던 학생의 둔부를 주먹으로 찍어 누르고 코피가 터질 때까지 안면을 인정사정없이 구타했다. 참혹한 처우에도 불구하고 피해 학생은 반항할 기력도 없이 무력하게 폭행당할 뿐이었다.

하하하하 재밌어. 걸작인데? 너도 여기와서 구경해봐.”

아무런 죄악감도 느끼지 않은 채 희열에 넘치는 태석. 나는 더 이상 이 녀석을 내 친구였던 태석이랑 동일인물로 볼 수 없었다.

뭐해? 의자에 앉기 불편해? 그렇다면 널 위해 특등석을 준비해줄게. 넌 내 소중한 친구니까.”

...집어치워! 이런 걸 해서 대체 어디가 즐거운 거야!?”

뭐야 기분 잡치게. 모처럼 얻은 힘이니까 마음껏 사용하는 게 인간의 도리 아니겠어?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거면 너도 다른 애들처럼 바닥에 엎드려 있어.”

궤변을 늘어놓고 나를 향해 손을 내미는 태석. 하지만 난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서 재빨리 교실을 빠져나와 복도를 달려 학교 밖으로 도망쳤다. 아마 세계적인 마라톤 선수와 필적하는 속도로 달린 걸로 체감되지만 목숨이 위기인 상황에서 사람은 누구나 한계 이상의 잠재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지금이 무진장 큰일이라는 상황이란 것이다.

하아...하아...”

속력에 체력이 따라가지 못 해 숨이 차 운동장에 있는 쉼터에서 쉬면서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시간은 촉박하다. 이대로 태석이가 마음대로 힘을 휘두르는 걸 방치할 수 없다. 하지만 뭘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는 걸까?

그 자를 막기 위해서는 신을 죽이는 도구가 필요합니다.’

신을 죽이는 도구. 확실히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게 구체적으로 뭘 말하는 건지 제대로 듣지 못 했어. 다시 집에 가서 꿈을 꾸면 알 수 있을려나? 하지만 그런 시간을 유예할 틈도 없다. 혹시 신화를 조사하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스마트폰을 통해 검색한 결과, 기독교의 예수님은 십자가형을 당해 죽었다고 들었는데 교회에서 훔쳐오지 않는 이상 그렇게 큰 십자가를 학생인 내가 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부처님은 병에 걸려 죽은 거라 딱히 쓸 만한 도구가 연상되지 않고, 그리스 신화에선...기본적으로 신들은 불사신이다. 절체절명의 상황이다. 신이 죽는 상황이 있었던가? 신의 죽음, 신들의 죽음, 혹시...?

나는 스마트폰에서 예전에 했던 게임에서 들은 라그나로크라는 단어를 검색했다. 이는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세계 종말의 날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라그나로크가 일어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발두르라는 신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그 신이 죽게 된 건 겨우살이에 몸이 찔렸기 때문이다. 연약한 겨우살이를 아무것도 죽일 수 없다며 전혀 경계하지 않았던 것이 허점이 되어 로키의 계략에 걸려버린 것이었다.

혹시 겨우살이를 이용하면...?”

나는 주위 나무를 둘러보았지만 겨우살이를 발견하는 건 그리 쉽지 않았다. 애초에 평소에 살면서 겨우살이 같은 걸 의식한 적 없으니 막상 필요할 때 찾지 못하는 건 당연지사였다.

이쪽입니다.”

다시 꿈에서 들은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나뭇가지에 달라붙은 잎사귀 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저게 겨우살이인가...?”

나는 손을 뻗어 나뭇가지에서 겨우살이를 떼어냈다. 만져보니 정말로 연약하기 짝이 없어서 이걸로 도저히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가 망설이는 사이 신의 목소리가 다시 나한테 말을 고했다.

그걸 사용해서 그자를 막으십시오.”

꿈에서 들은 대로라면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대화는 성립할 수 있다고 하니 나는 마음속으로 되물었다.

사용하는 건 둘째치고 처음부터 겨우살이라고 말하면 좋았을 텐데요!?”

신은 인간한테 크게 간섭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간접적으로 유도하는 수밖에 없죠.”

상당히 귀찮은 일에 말려들어 버렸군. 아무튼 이 겨우살이가 신을 죽이는 도구라면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을 모색하는 수밖에 없다.

이 겨우살이는 어떻게 사용하면 좋죠?”

모든 것은 운명이 정하는 대로 움직일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겨우살이를 가지고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면 그만입니다.”

또 애매모호한 표현을 쓰고 있군. 나는 복잡한 심경에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별 수 없이 겨우살이를 가지고 다시 교실로 돌아갔다. 하지만 도착하기 전, 학생과 교사들의 무리가 행렬을 이루며 나란히 서서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걸 목격했다. 나도 숨죽여 그들 뒤를 따라갔고 다다르게 된 곳은 체육관이었다.

뭘 하려는 거지...?”

학생과 교사들은 의식이 날아가 버린 건지 눈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태석이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서있었다. 나는 군중들 속에 몸을 숨겨 접근할 타이밍을 노렸지만 그런 책략은 단숨에 파훼되고 말았다.

숨어있지 말고 나오지 그래? 너 말야.”

태석은 손가락으로 날 가리켰다. 나는 잠자코 겨우살이를 눈에 띄지 않게 뒤에 숨기고 앞에 나왔다.

뭐야...”

뭐긴 뭐야, 이제부터 내가 재밌는 걸 보여줄게. 학생과 교사들이 물불 가리지 않고 서로가 죽고 죽이는 광경이 보고싶어? 아니면 단체로 난교 파티라도 벌이는 게 재밌을까?”

이 녀석은 완전히 미쳤다. 이런 게 정말로 재밌는 걸까? 모든 걸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전지전능의 힘을 손에 넣은 인간은 밑도 끝도 없이 타락해버리고 마는 건가? 이 이상 이 녀서석이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등 뒤의 겨우살이를 붙잡은 손을 더욱 움켜쥐고 나는 깊은 고뇌에 빠졌지만...

모든 것은 운명이 정하는 대로 움직일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겨우살이를 가지고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면 그만입니다.’

운명. 여러 신화를 보면 아무리 전지전능한 신들도 운명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이 겨우살이로 태석을 막을 수 있을지도 결국 운명이 이끄는 대로 흘러갈 지도 모른다. 나는 등 뒤에 숨겨놨던 겨우살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뭐야 그 쓰레기는? 나한테 줄 선물이야?”

신을 죽이는 도구야.”

어이없는 표정으로 태석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내가 뭘 하려는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나는 잠자코 손에 들고 있던 겨우살이를 태석을 향해 있는 힘껏 던졌다. 혹시 신화처럼 칼이나 창으로 변하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기대감도 있었지만 딱히 그런 조짐은 없어 보였다. 안면에 겨우살이를 정통으로 맞은 태석이었지만 큰 타격은 없었다.

역시 실패인가?’

체념하던 순간, 태석의 상태가 약간 이상해진 것 같았다.

뭐야 갑자기 힘이 빠지는 거 같아.”

태석은 가슴을 움켜쥐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이 이상현상에 눈을 떼지 못 하다가 내가 던졌던 겨우살이가 태석의 몸을 감싸는 걸 알아차렸다. 겨우살이는 태석의 기력을 빼앗는지 갈수록 크기가 커져갔고 태석은 점점 몸이 야위어지며 비틀어졌다.

...이건? 태석아!”

나는 급변한 태석의 모습에 놀라며 그의 몸을 흔들었지만 반응은 없었다. 그리고 태석이 의식불명에 빠진 탓인가, 멍하게 서 있었던 다른 사람들도 차례차례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은 나도 기억이 애매하다. 구급대원들이 오고 사람들이 병원에 실려가고 경찰 조사가 이루어지는 등, 여러모로 분주했고, 나도 약간의 사정청취를 마친 뒤 집으로 돌아갔다. 이 사태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나도 망설였지만 결국 제대로 대답하진 못 했다. 태석을 감싸던 겨우살이도 어느샌가 모습을 감췄다. 그건 환상이었던 걸까? 만약 환상이라면 이 모든 사태가 다 꿈이었으면 좋을 텐데. 나는 침대에 누워 다시 잠에 들었다.

 

인간이여 들리시나요.”

또 그 목소리다. 이 목소리를 듣는 건 이번에야 말로 마지막이라고 믿고 싶다.

당신은 휼륭하게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이젠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태석이는 어떻게 됐죠?”

그 자는 인간의 신분으로 신의 힘을 지나치게 남용했습니다. 이미 이전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기에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렸습니다.”

원래대로 돌아오기는 글러먹었다는 건가. 착잡한 기분이다.

이젠 볼일은 끝난 거지?”

, 당분간은 괜찮겠죠.”

그럼 잘 있으라고. 그리고 다음에 또 일이 터지면 나 말고 딴 사람한테 부탁해.”

작별을 고하고 나는 잠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주말이라서 학교에 갈 일은 없다. 그 사건은 세간에 어떻게 알려졌을까? 여러 낭설들이 오가겠지만 신의 힘을 사용했다라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사실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겠지. 나는 우울한 기분을 환기시키기 위해 산책하러 밖에 나왔다. 그리고 지나가던 중 길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발견했다. 그리고 여러가지 생각이 오고 가며 나는 지렁이를 손으로 집어 그늘진 곳에 옮겨줬다. 아무래도 이 지렁이는 그냥 평범한 지렁이인 모양이다.

신을 도와준 결과가 저거였나?”

태석이는 확실히 신이 되었다. 하지만 결국은 인간,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 한계를 맞이해 추락할 뿐이었다. 신의 장난에 말려든 불쌍한 인간인가 아니면 신에게 다가서려 한 어리석은 인간의 말로인 건가.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날, 나는 신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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