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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태풍의 눈 아래

2021.07.16 23:1707.16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본 적 있는가? 아마도 기억하기 힘들 것이다. 수 십 억년 동안 강과 바다, 대지에 있는 수분이 말라가면서 구름이 되어 다시 내려오는 선순환, 그것이 인간의 역사를 시작하게 만들었으리라. 물이 수증기가 되어 다시 물이 되는 과정을 하나의 패턴으로 구성한다면 구름은 중간지점에 흐릿하게 웅크리고 있을 것이며, 중년의 내 모습은 흡사 빗방울을 모으는 먹구름 모양이다.

 

나와 아내, 동생 내외, 어머니가 함께 모여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는 기약 없는 약속을 유산으로 남긴 채 아버지는 3년 전 잿빛 구름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셨다. 지금도 때때로 기억나는 1분 남짓 어머니의 울부짖음이 담긴 통화에서 시작된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변신(變身)은 이제 흐릿하게 기억할 뿐이다. 고대 그리스인은 사람은 죽으면 별이 된다고 믿었지만 별이 되기 이전에 구름이 되는 것이 먼저이다. 고대에도 화장(火葬)은 존재하였고, 제물을 바칠 때에는 제관은 하늘을 향해 불을 피우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상념을 하다가 보면 매번 하루는 저물어가고 또 다른 삶은 이어져간다. 우연인지 몰라도 아버지와의 이별 이후 작은 텃밭에서 주말농장을 일구었다. 주말농장은 시(市)에서 회사를 통해 배정한 물량이라 내가 사는 곳과 거리가 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먼 곳에 위치해 있었다. 뒤늦게 깨달았지만 농사의 핵심은 물 주기인데, 매주 농장에 간다고 하더라도 부족한 건 사실이다. 간간히 내리는 비는 정말 필요했고, 며칠 간 쉴 새 없이 빗방울이 내리면 그렇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여름이 다가오니 비는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빗방울은 평등하여 모든 생명체를 키운다. 일주일 한 번 농사일을 하는 입장에서 잡초로 뒤덮인 밭은 흡사 지옥도를 방불케 했다. 자연스레 농사에 대한 흥미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농사는 버리고 온 자식이 마음에 쓰이듯이 한 주라도 빠지면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드는 마력을 지녔다. 강박적으로 아내와 같이 거의 매주 1년 가까이 농사꾼으로 주말을 보냈다.

 

주말농장의 위치는 신도시 인근이었고, 그로 인해 ‘인디언’이라고 불렸던 미국 원주민의 땅이 당했던 것과 동일한 전철을 밟게 된다. 중학교가 모자라다는 미명 아래 다가오는 지방선거를 위해 시에서는 농장을 철거하는 지침을 내리게 되었다. 한 편으로는 고된 농사에서 쉽게 벗어나게 만드는 deus ex machina에 감사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그런 편의적인 생각을 하는 내가 경멸스러웠다. 시에서 한시적으로 소작농처럼 농사짓는 텃밭이기에 미국 원주민처럼 저항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 무기력에 편승하고 있다는 사실이 또 다른 불편함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나의 밭을 방문했을 때 그간 농사에 대한 노하우를 간간히 전수해주셨던 노부부 내외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입 밖에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근처 편의점에 들러 비타민 음료 2개를 샀다. 부부는 멀리서 내 손에 들린 음료수를 보았는지 은연중에 기다리는 눈치였다. “건강히 잘 지내세요.” “그래요, 멀리서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환하게 웃는 눈가의 주름에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새삼스레 펼쳐보게 된다.

 

의식적이지 않다면 인지하지 못하겠지만 인간은 매 순간 이별을 맞이한다. 하지만 레테의 강물은 구름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되어 반드시 돌아오기 마련이다. 따라서 언제나 새로운 만남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오비디우스처럼 기억되지 못하는 삶이라고 덧없는 것은 아니다. 글로 남긴 이름이라도 언젠가는 책이 바래지면 땔감에서 구름이 될 것이다. 같은 이유로 아버지와의 식사는 이제는 이룰 수 없는 꿈이겠지만, 그와의 만남은 내 남은 삶 동안 마주할 구름의 수만큼 다양한 의미로 남아있다.

 

어릴 적 보았던 처음 비행기를 탔을 때 보았던 수많은 구름들은 늙은 코끼리가 찾아가는 코끼리 무덤인지도 모르나, 삶과 죽음의 극단에 벗어나면 인간이 매 순간 흘리는 모든 피, 땀, 눈물은 구름이 된다. 아버지는 인생의 3분의 2를 선원으로 사셨고, 바다에서 잠드셨다. 줄어들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바닷물이 만드는 구름이 태풍인 것처럼 아버지의 삶은 그와 같았다. 아버지는 구름 한 점 없는 태풍의 눈에 머물고 계신다. 나는 아버지의 삶을 기록할 가장 합리적인 비문을 찾지 못해 죄송스러웠다. “태풍의 눈 아래서 잠들다.”고 비문을 다시 새기면 그는 내게 짠 남국(南國)의 빗방울로 화답해주실까?

 

슬픈열대

"우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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