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아마릴리스호Amaryllis

캐리 본Carrie Vaughn


『라이트스피드 매거진Lightspeed Magazine』 2010년 6월호

2011년 휴고단편상 최종후보

http://www.lightspeedmagazine.com/fiction/amaryllis/


나는 어머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어머니가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임신을 하려고 삽입물을 제거할 만큼 정신이 나간 어머니에게 고마워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아이를 절대 데리고 있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내내 알고 있었으면서도, 낙태를 할 수 없을 때까지 임신 사실을 숨길 만큼 정신이 나갔다는 말이다. 어머니가 모든 것을 잃으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머니 때문에 가족들이 모든 것을 잃으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어머니가 왜 가족을 걱정하지 않았는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가족이 어머니가 한 일을 알았을 때, 위원회가 가족을 나눠 흩어지게 만들었을 때, 그러니까 어머니 때문에 가족이 산산이 깨졌을 때 가족들이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했다.

어머니는 내게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을까?

#

문제는 모두 할당량이었다.

니나가 말했다. “저기 북쪽에서는 양식장을 쓴대요. 앞바다에 고정시켜서요. 직경은 15미터인데, 자원을 절반만 써도 단백질이 두 배는 더 나오고, 야생개체에는 두 번 다시 손대지 않아도 될 거래요. 우린 할당량을 두 배로 늘릴 수 있어요.”

나는 니나의 말을 흘려듣고 있었다. 우리는 잠시 쉬고 있었고, 니나는 아마릴리스호 뱃머리 난간에 나와 함께 앉아 원대한 계획을 들려줬다.

바람이 돛을 팽팽하게 잡아끌어 유리섬유 선체가 소리 없이 파도를 가르며 부드럽게 나아갔다. 우리 뒤에서는 개럿과 썬이 물고기로 가득한 그물을 끌어올렸다. 아마릴리스호는 우아하고 날씬한 9미터짜리 배로 꼭 알맞은 선실과 화물칸을 갖추고 있었다. 골동품이지만 항해에 딱 맞았다. 아마릴리스호는 훌륭한 어선이었고 선원들도 훌륭했다. 최고였다.

니나가 애원했다. “마리—”

나는 한숨을 쉬고 눈을 떴다. “그 얘긴 이제 그만해. 그렇게 쉽게 할당량을 두 배로 할 순 없어.”

“하지만 인가만 받으면—”

“지금도 잘 하고 있다는 생각 안 드니?” 우리 선원은 실력이 좋아서, 우리는 모두 잘 먹었고 할당량을 초과하지도 않았다. 현재를 망치는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풍파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니나의 큰 갈색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내 말은 틀렸다. 나는 니나가 정말로 무엇을 바라는지 알고 있었는데, 현상 유지는 그것과 거리가 멀었으니까.

“바로 그거예요. 우리는 지금까지 몇 년 동안이나 우리 할당량을 잘 채우면서 모두 건강하게 지내왔잖아요. 정말 한번 해볼만하다고 생각해요. 요청만이라도 해볼 수 있잖아요?”

아니, 사실 나는 우리가 그럴 자격이 되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 책임감이 가치 있는지 잘 모르겠다. 난 이름을 떨치고 싶지 않았다. 니나도 이름을 떨치고 싶다기보다, 그저 아이를 원할 뿐이었다.

“어쨌든 우리 손을 벗어난 문제야.” 나는 니나의 강렬한 표정을 견딜 수 없어서 눈을 돌렸다.

니나는 난간에서 벌떡 일어나 아마릴리스호 좌현에서 그물을 끌어올리는 개럿과 썬에게로 쿵쾅거리며 걸어갔다. 니나는 아기를 원하기에는 나이가 어렸다. 나긋나긋했고, 건강했고, 빛이 났으며, 갑판을 맨발로 뛰어다니고, 햇빛에 색이 바랜 머리카락이 갈색 머리카락 사이에서 반짝였다. 아니, 사실 니나는 나이가 충분했다. 우리 집에 칠 년 동안 있었고, 이제 스무 살이었다. 벌써 그렇게 됐나.

“우왓!” 썬이 외쳤다. 물이 첨벙거렸고 그물에 걸린 뭔가가 선체를 치며 쿵하는 소리가 났다. 썬이 넓은 구릿빛 근육질 등을 구부려 뱃전에 몸을 걸치며 물속으로 다시 미끄러지는 그물에 매달렸다. 강건한 몸집인 썬 옆에 있던 자그마한 니나가 그에게 손을 뻗었다. 내가 달려가 둘의 바지 허리띠를 잡고 버텼다. 개럿이 갈고리 장대를 그물에 걸었다. 우리는 힘을 합해 그물을 갑판에 끌어올렸다. 크고 무겁고 팔팔한 물고기가 잡혔다.

우리에게는 집어기가 — 고철과 나무로 만든 커다란 부표가 — 두 개 있어서 해변에서 8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설치해두었다.

무리 짓는 어류들이 집어기에 모이면 우리는 물고기를 잡았다. 대개 고등어, 정어리, 은대구, 와이팅whiting이 잡혔다. 가끔 상어나 청새치가 그물에 걸리기도 하지만 풀어준다. 희귀종인 데다가 우리 할당량을 넘기 때문이었다. 매끈거리는 작은 은빛 물고기 한 무더기 가운데 몸부림치는 유난히 커다란 물고기를 보고 바로 그 상어나 청새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물고기는 분명 니나만큼 컸지만 — 썬과 니나가 끌려갈 만했다 — 생김새가 달랐다. 날씬하고 유선형으로 헤엄을 잘 치게 생겼다. 다른 물고기처럼 은빛이었다.

니나가 물었다. “이게 뭐예요?”

“다랑어.” 나는 다른 것들을 다 제외하고 나서 대답했다. 이 물고기는 생전 처음 봤다. “참다랑어 같아.”

“참다랑어는 30년 동안 잡히지 않았어.” 개럿이 말했다. 텁수룩한 검은 머리카락에 반다나를 둘렀지만 땀이 얼굴로 떨어졌다.

나는 넋을 잃고 그 단백질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물고기 옆구리에 손을 대고 씰룩거리는 근육을 느꼈다. “아마 되돌아왔나 봐.”

생각해보면 우리 인간이 그동안 다랑어의 먹이를 계속 잡아왔던 것이다. 예전에는 다랑어가 고등어만큼 많이 집어기에 모였다. 하지만 오랫동안 다랑어를 본 적 없어서 모두 다랑어가 사라졌다고 믿었다.

“다시 풀어주자.” 내가 말하자 다른 선원들이 그물을 뱃전으로 들어 올리는 일을 도와주었다. 네 명이 모두 힘을 합쳐 다랑어를 마침내 배 밖으로 미끄러뜨리자 잡은 물고기도 절반쯤 딸려 가 은색 비늘 물결이 수면에 부딪히며 반짝거렸다. 하지만 괜찮았다. 할당량을 넘는 것보다 할당량에 모자라는 것이 나았다.

다랑어가 꼬리를 첨벙이더니 급히 달아났다. 우리는 남은 물고기들을 거둬 배를 집으로 행했다.

#

캘리포니안호 선원들은 지난 계절에 깃발을 받았고, 누구나 볼 수 있게 어선 돛대 꼭대기에 그 붉은색과 초록색 무늬 깃발을 — 능력과 생식력을 — 휘날렸다. 캘리포니안호의 엘시는 예정일이 몇 주 남지 않았다. 엘시는 임신을 확인하자마자 뱃일을 그만두었고 집에 머물며 소중히 보호받았다. 가끔 산처럼 부른 배 위에 두 손을 가볍게 얹고서 자기 가족의 어선이 도착하는 모습을 반기러 나왔다. 니나는 엘시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엘시는 적어도 니나가 사춘기가 끝나고 자신도 산처럼 부른 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린 이후로는 처음 본 임산부였을 것이다.

지금 석양을 받으며 청동상처럼 선 엘시는 배가 무거워 약간 젖히고 선 모습이 바람에 기운 선박 같았다.

우리는 돛을 내리고 중량측정소 옆에 있는 잔교로 배를 저어갔다. 니나는 뱃머리에 매달려, 캘리포니안호 갑판에 서있는 선장에게 손 흔드는 엘시를 바라봤다. 탄탄하고 당당하며 선장에게 필요한 조건을 다 갖춘 캘리포니안호의 선장도 엘시에게 손을 흔들었다. 캘리포니안호는 벌써 정박장에 계류하고, 어획물 무게를 재고, 모든 정리를 마쳤다. 니나가 그 완벽한 삶의 전형을 보며 한숨 쉬었지만, 아무도 니나가 일을 돕지 않는다고 소리치지 않았다. 이럴 때는 니나가 꿈에서 깰 때까지 계속 꿈꾸게 내버려 두는 것이 가장 좋았다.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 아마릴리스호 선원들이 나무상자들을 항만근로자에게 넘겨주자 그가 우리 어획물을 중량측정소로 날랐다. 중량측정소 너머에는 가공처리소가 있어 육지 노동반이 생선을 훈제하고 통조림으로 만들고 내륙 지방으로 운송했다. 뉴 오션사이드 공동체에서는 전 지역에 필요한 단백질 중 60퍼센트를 공급했고 이것이 우리의 자랑거리이자 존재 이유였다. 뉴 오션사이드 내에서도 어업반 열 팀이 가장 긍지 높았다. 일을 잘 하고 할당량을 잘 맞추는 고기잡이가 이 사회 전체를 매끄럽게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나는 아마릴리스호를 소유하고 그 일에 몸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이었다.

아마릴리스호를 계류한 뒤 동료들과 함께 부두로 올라가니 앤더스가 측정장으로 일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일주일 동안 일한 게 헛수고가 될지도 모르겠다.

어머니가 삽입물을 제거해서 가족을 산산조각 낸 것은 35년 전이었다. 앤더스 같은 사람에게는 어제 있었던 일과 다름없었다.

이 노인은 우리가 초조하게 기다리던 40분 동안 우리 어획물 무게를 재고 숫자를 더한 뒤 발표했다. “할당량에서 25킬로그램 초과했어.”

할당제는 개체수를 많이 유지하고 어류남획, 어종감소, 궁극적으로 기아를 예방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위원회는 우리가 잡을 수 있는 만큼이 아니라 우리가 필요한 만큼 할당량을 정했다. 할당량을 초과하면 — 다른 사람보다 많이 필요한 척하면 — 위원회, 공동체, 어류 자원에 무례를 범하는 셈이었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거의 주저앉을 뻔했다. 나는 할당량을 정확히 지켰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앤더스를 노려봤다. 건장한 선원인 개럿과 썬도 칙칙한 회색 튜닉과 권한을 걸친 측정장 앞에서는 그를 무력하게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가끔 내가 어떤 짓을 해도 안 될 것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항상 “딱 알맞은” 선을 어떻게든 너무 넘었다. 나는 대개 측정장의 심사를 받아들이고 물러나지만, 오늘은, 다랑어와 6킬로그램은 되는 물고기를 놓아준 오늘은 너무 지나쳤다.

내가 말했다. “장난해요? 25킬로그램이라뇨?”

“그러게 말이다.” 앤더스가 대답하며 뒤에 걸린 칠판에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벌점을 써넣었다. “너처럼 경험 많은 선장이라면 좀 더 잘 알아야지.”

앤더스는 늘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게 쓰레기라고 말하며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그럼 뭐 초과분을 배 밖으로 던지기라도 할까요? 우리는 25킬로그램을 먹을 수 있어요. 가축한테 먹여도 되고요.”

“걱정 안 해도 초과분은 누군가 먹을 거야. 하지만 기록에는 남지.” 그러고 나서 앤더스는 우리가 나중에 와서 공개 기록을 고칠 것이라 생각이라도 한 듯 자기 필기판에 벌점을 기입했다.

“다음 주에는 뱃일 안 나가는 게 낫겠네요, 네?” 내가 말했다.

측정장은 얼굴을 찌푸리며 외면했다. 아무리 몇몇 사람이 인정하려 들지 않아도, 초과분 25킬로그램은 — 초과분이 있기나 하면 — 다른 어업반의 부족분을 채우는 데 쓸 테고 다음 주에도 우리 생선이 이번 주 어획량만큼은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니나가 원했듯이 할당량을 늘리면 초과분을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니, 그러면 부족분을 걱정할 테고, 니나가 원하는 아기는커녕 우리 가족을 먹일 돈도 벌지 못할까 걱정할지도 모른다.

초과분에 벌을 주지 않으면 모든 사람들이 물고기를 더 많이 잡고 아기를 더 많이 낳을 텐데,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입은 많고, 음식은 부족하고, 재난에서 살아남을 회복력은 없고, 온갖 질병과 굶주림이 뒤따를 것이다. 나는 대몰락 이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여주는 그런 사진을 기록보관소에서 본 적 있다.

더도 말고 딱 알맞게. 절제. 하지만 신께 맹세코 나는 내 기록을 깨끗하게 하려고 생선 25킬로그램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다 됐어. 수고했네, 마리 선장.” 앤더스가 내 눈빛을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내게 등을 돌렸다.

우리가 떠날 때 니나가 문간에서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니나를 뒤에서 밀며 아마릴리스호로 돌아가 배를 정리할 준비를 했다.

아마릴리스호를 정박장으로 저어가며 개럿이 투덜댔다. “아마릴리스호 저울은 그렇게 어긋나지 않았어. 끽해야 5킬로그램? 25킬로그램이나 틀리진 않아.”

썬이 말했다. “앤더스가 받침에 발을 올리고 속인 거야. 틀림없어. 앤더스가 저울 담당일 때만 기준에서 벗어나는 거 알아?”

우리 모두 다 알고 있었다.

니나가 물었다. “그거 정말이에요? 대체 왜 그러는데요?” 순진한 니나.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뭔가가 우리를 짓누르는 듯했다.

“네? 뭐예요?” 니나가 말했다.

그 일은 아무도 입에 담지 않는 그런 일이었고, 니나는 너무 어려 몰랐다. 다른 사람들은 나와 계약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니나는 아니었다.

나는 선원들에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앤더스가 우릴 속였다는 걸 절대 증명할 수 없을 테니까 싸워봤자 소용없어. 우리는 우리 일이나 하면 돼.”

썬이 말했다. “벌점이 많으면 우리 가족을 해산할 텐데.”

그게 걱정이지?

니나가 물었다. “벌점을 얼마나 받아야 그렇게 돼요? 앤더스가 그렇게 할 순 없겠죠?”

개럿이 미소 지으며 분위기를 바꾸려 애썼다. 개럿은 내가 어선을 물려받은 뒤 처음으로 계약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함께 많은 일을 헤쳐 왔다. “우린 그저 앤더스의 일정을 확인해서 다른 사람이 일할 때 오면 되는 거야.”

하지만 대개 일정이라는 것이 없었다. 어선이 들어오면 아무나 담당했던 것이다. 앤더스가 단지 우리 측정에 농간을 부리려고 계속 우리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게 돼도 놀라지는 않으리라.

아마릴리스호가 정박장으로 미끄러져 가자 나는 개럿과 썬에게 배를 계류하는 일을 맡겼다. 나는 뱃전에 등을 기대고 앉아 두 팔을 쭉 뻗으며 돛대를 올려보았다. 니나가 곁에 앉아 주먹을 꼭 쥐고 입술을 앙다물고 있었다. 엘시와 캘리포니안호의 선장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니나에게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이를 얻으려면 다른 가족에 들어가는 편이 더 좋을 거야. 캘리포니안호 같은.”

“저를 쫓아내시려는 거예요?” 니나가 말했다.

나는 똑바로 앉아 니나의 어깨를 감싸 끌어안았다. 니나가 위쪽 버나디노에서 내게 왔을 때는 서투른 열세 살 꼬마였다. 우리 가족에는 자리가 하나 있었고 나는 기꺼이 니나를 가족으로 맞았다. 니나는 똑똑하고 열성적인 사람으로 자랐다. 니나는 내가 은퇴하고 나면 내 자리를 맡아 아마릴리스호를 물려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니나에게 말을 하지 않았지만.

“아냐. 절대로 그런 거 아냐.” 니나도 곧 내게 팔을 두르고 꼭 껴안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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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오아시스였다. 그렇게 만들려고 열심히 일했다. 나는 어선을 물려받고서 가족을 한 사람씩 모았다. 뱃일을 하는 개럿과 썬, 가사를 맡은 통통하고 부산스런 다코타, 그녀가 데려온 재주꾼 제이제이, 마지막으로 우리가 키우게 된 니나까지. 우리는 어업권을 할당받았고, 그 후 토지를 배정받았다. 10년 동안 재배하고 일하고 땀 흘리고 보살피고 살아남자 집이 훌륭해졌다.

우리는 부두 위에 있는 언덕 측면을 파 들어가 햇볕에 말린 벽돌로 집을 지었다. 오후 햇살을 받으면 벽이 금빛으로 빛났다. 집 일부가 언덕에서 튀어나와 있어 담처럼 정원과 우물을 보호했다. 길이 집 주위를 돌아 안마당으로 이어졌다. 납작한 셰일을 주워 경작지 둘레에 길을 깔았고, 우물 안쪽에도 붙여 샘터로 만들었다. 작은 샘이지만 노천에 민물이 있다는 것만 해도 호화스러웠다. 언덕 위에는 풍력 발전기와 태양전지판도 있었다.

자기 방을 원하면 누구나 혼자 쓸 수 있었지만 썬만 마당 건너편 언덕을 파 들어간 별채 독방을 썼다. 다코타와 제이제이와 니나는 가장 큰 방에 돗짚자리를 깔고 지냈다. 개럿과 나는 작은 방에서 한 침대를 썼다. 건물이 아닌 곳은 다 정원이었다. 우리는 오렌지와 레몬을 가꿨는데 이 과일나무는 부엌에 그림자도 드리워주었다. 좁은 땅에다 옥수수, 토마토, 해바라기, 깍지콩, 완두콩, 당근, 무, 고추, 후추 등 우리가 키울 수 있는 식물은 다 길렀다. 민트와 바질 화분도 하나씩 있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우리는 자급자족했고 돈은 아마릴리스호를 개조하거나 우리가 많이 얻을 수 없는 쌀과 꿀, 혹은 천이나 밧줄 같은 특산물을 사거나 하는 데 사용했다. 다코타는 병아리를 구할 수 있으면 다음 계절에 닭을 키우고 싶어 했다.

나는 언제나 우리 집을 앤더스 같은 사람들 앞에 내보이고 싶었다. 나는 언제나 노력했다. 나는 짐이 아니었다.

우리 선원들이 집에 도착했다. 제이제이는 이미 저녁을 준비해뒀다. 다코타와 제이제이는 처음에 가사를 공평하게 나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잡일을 서로 바꾸어 — 비료 뒤섞기와 빨래 널기, 풍력 발전기 수리와 부엌 청소 — 제이제이가 부엌과 생활공간을 모두 맡고 다코타가 정원과 정비를 모두 맡게 되었다.

제이제이가 내 음식을 — 오늘 저녁은 훈제 고등어와 채소였다 — 나눠 줄 때 떠오른 동정 어린 표정을 보아하니 누군가가 벌써 그에게 오늘 내가 측정장과 말싸움을 벌였다고 말해준 듯했다. 아마 제이제이나 다코타가 내게 오늘 하루는 어땠냐고 무심코 묻지 않도록 누군가가 일러뒀을 것이다.

나는 밖으로 나가 평소보다 오래 집을 둘러봤다. 뭔가 문제가 있을까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내 마음이 편해지도록 하는 일로, 우리가 이룬 모든 것을 내 두 눈으로 확인해보고 풍력 발전기 기둥을 손으로 만져보고 레몬나무 잎사귀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어보며, 아무 것도 사라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확인했다. 의식 같은 일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이불 아래에서 개럿을 꼭 껴안아 살갗을 맞대고 서로 편안함을 주고받으며 침대 위쪽에 열린 채광창에서 들어오는 따뜻한 공기를 느끼고 있었다.

“오늘 일진 사납지?” 개럿이 말했다.

“배랑 선원이 무사히 집에 돌아왔는데 절대 나쁘다고 할 순 없지.” 내가 대답했다. 하지만 목소리에는 기운이 없었다.

개럿이 손을 내 허리께로 옮기며 나를 자기 몸으로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우리 다리가 서로 감겼다. 불안이 가라앉았다.

개럿이 말했다. “니나 말대로, 우린 더 많은 걸 할 수 있어. 식구가 늘어나도 괜찮아. 만약 우리가 위원회에—”

“정말 일이 잘 풀릴 것 같아? 모두들 다른 선장을 찾아 가는 게 나을 거야.”

개럿이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내게 입맞춤했다. 잠시 후 우리는 둘 다 미소 짓고 있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랑 잘 못 지내서 여기 오게 된 거 당신도 알잖아. 하지만 당신 덕분에 우리들은 오히려 멀쩡해 보여.”

나는 짐짓 화난 체 개럿의 품 안에서 몸을 배배 꼬며 킥킥 웃었다.

“선원들이, 가족들이 아무리 많아도 아기가 없으면 아무 소용없어.” 개럿이 말했다.

“난 아기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늘 싸우는 게 지겨울 뿐이야.” 내가 말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부모, 식구, 심지어 위원회와 다투는 일은 정상이었다. 하지만 내가 알지도 못하는 어머니와 아직도 싸우고 있는 느낌이 든다니 불공평했다.

#

다음날, 니나와 함께 아마릴리스호를 청소하러 내려가며 나는 니나가 나를 피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내려 애썼다.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아니, 보지 않는 척 하고 있을 뿐 사실 계속 나를 힐끗거리고 있었다. 내 시선을 피하는 니나를 보자 소름이 살짝 돋았다. 니나는 뭔가 꾸미고 있었다. 비밀을 감추고 있었다.

엘시가 부두에서 걸어 올라오는 모습이 또 눈에 들어왔다. 100미터 가까이 떨어져 있었지만 그 실루엣은 엘시가 틀림없었다. 니나는 거기에 정신이 팔려 하던 일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엘시가 그렇게 흥미로워?” 나는 웃으며 농담처럼 말을 건넸다.

니나는 나와 말을 해도 좋을지 재는 듯 곁눈질했다. 그러더니 한숨을 쉬었다. “임신하면 어떨지 궁금해요. 궁금하지 않으세요?”

잠시 생각해보니 흥미롭다기보다 두려웠다. 승인 깃발이 머리위에서 펄럭이고 있더라도 별의별 일들이 틀어질 수 있었다. 니나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별로.”

“마리, 어쩜 그렇게…… 그렇게 무관심할 수 있어요?”

“난 어쩔 수 없는 일을 걱정하느라 애쓰지는 않을 거거든. 게다가 육지에 머무르면서 기다리느니 선장이 훨씬 나아.”

내가 니나를 지나쳐 아마릴리스호로 걸어가자 니나가 머리를 숙이고 따라왔다.

우리는 갑판을 씻어내고 어구를 점검하고 선실을 청소하고 재고 목록을 작성하고 수리가 필요한 장비를 모았다. 장비를 집으로 가져가서 며칠 동안 손본 후에 항해에 다시 나설 것이다. 니나는 아침 내내 말이 없었고, 나는 니나가 입술을 깨물며 머리를 숙이고 일하는 모습을 계속 스쳐보며 무엇을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는지 궁금해 했다. 니나가 무엇을 숨기는지.

알고 보니 니나는 용기를 북돋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남은 그물 뭉치를 니나에게 건네고 되돌아가서 해치와 선실이 잘 잠겼는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배에서 내리러 돌아가니 니나가 부두 가장자리에 걸어앉아 다리를 대롱거리고 있었다. 니나는 10년은 어려 보여 다시 아이가 된 듯, 내가 처음 니나를 처음 봤을 때로 되돌아간 듯했다.

내가 의아해 눈썹을 치켜 올리며 니나를 쳐다보자 니나가 말했다. “썬한테 왜 앤더스가 마리를 싫어하는지 물어봤어요. 왜 다른 선장들이 마리한테 거의 말 걸지 않는지도.”

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겠다. 썬이 — 사무적이고 실용적인 사람이다 — 조심성 없이 니나에게 이야기해준 것이었다. 그리고 니나는 충격을 받았고.

나는 미소 지으며 뱃전에 앉아 니나와 마주보았다. “넌 여기 오래 있었으니까 혼자 알아낼 거라고 생각했어.”

“전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건 알았지만 그게 뭔지 알 수 없었어요. 전혀요.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안 하니까요. 하지만…… 마리 어머니는 어떻게 됐어요. 그 가족들은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는데 나도 기억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러 이야기를 한데 모으고 추측도 좀 했다. 들은 이야기도 이야기해준 사람들의 추측이 섞여 있었다. 그 사람들은 내가 내 주제를 정확히 파악하길 바랐다.

“어머니 가족들은 전 지역으로 흩어진 거 같아. 열 명이 있었는데, 내가 생기기 전까지는 크고 잘 나가는 가족이었지. 그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나도 몰라. 나는 뉴 오션사이드로 보내졌고 전대 아마릴리스호 가족들이 날 길러줬어. 나중에 지크와 앤이 은퇴해서 도기 공방을 열러 해안을 따라 내려갔고, 난 배를 물려받아 우리 가족을 꾸리기 시작했지. 해피엔딩이야.”

“그럼 마리 어머니는, 불임 시술을 받게 됐나요? 마리가 태어나고 나서 말이에요.”

“그랬다고 생각해. 말했듯이 나도 정말 몰라.”

“마리 생각엔 어머니가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을 거 같아요?”

“그런 생각은 안 했을 거라고 봐. 어머니가 아기를 원했다 하더라도, 아기를 얻지는 않았잖아? 어쩌면 그냥 잠시 임신해보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니나가 생각에 잠겨 다리를 흔들며 선체에 밀려오는 잔물결을 바라보는 모습에 나는 불안해졌다. 뭔가를 말해야했다.

“그런 일을 저지를 생각은 않는 게 좋아. 우리 가족은 흩어지고 집도 빼앗기고 아마릴리스호도—”

“아, 아니에요.” 니나가 고개를 재빨리 저으며 거세게 부정했다. “절대 안 그래요. 절대 그런 일 없을 거예요.”

“좋아.” 나는 안심했다. 나는 니나를 믿었고 니나가 그러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 가족들도 어머니가 그런 일을 벌이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부두로 건너뛰었다. 우리는 장비를 챙겨 자루와 양동이를 어깨에 걸고 집으로 걸어 올라갔다.

반쯤 왔을 때 니나가 말했다. “마리 어머니 때문에 우리가 깃발을 얻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하죠? 제게 그 말을 하고 싶었군요.”

“맞아.” 나는 곧 할 일에 집중하며 호흡이 거칠어지지 않게 했다.

“하지만 그 일 때문에 마리 됨됨이가, 마리가 하는 일이 바뀌는 건 아니에요.”

“나이든 사람들은 아직도 내게 분풀이해.”

“불공평해요.” 니나가 말했다. 니나는 이렇게 불평하기엔 나이가 많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 사실을 알았으니 다른 가족을 찾으러 가고 싶은지 결정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

“떠나고 싶으면, 그래도 괜찮아. 네가 가면 어느 집이든 좋아할 거야.” 내가 말했다.

“아뇨, 싫어요. 여기 있을 거예요. 그런 일이 있었더라도, 마리는 마리예요.”

그 말에 나는 짐을 내팽개치고 니나를 껴안을 뻔했다. 잠시 더 걷자 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물었다. “아기 아빠로 생각해 둔 사람이 있니? 만약의 이야기지만.”

니나는 딸기처럼 새빨개지더니 얼굴을 돌렸다. 나는 싱긋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된 일이었구나.

안마당에서 개럿이 우리를 보고 인사할 때까지 니나는 얼굴이 붉었다. 니나는 개럿을 피해 작업장에 짐을 내려놓으러 달려갔다.

개럿은 니나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쟤 왜 저래?”

“니나다운 니나지.”

#

아마릴리스호의 다음 항해는 아무 문제없었다. 우리는 예상보다 빨리 할당량을 채워서 한나절은 쉴 수 있었다. 우리는 인적 없는 바닷가에 정박한 뒤, 수영하고 갑판에 누워 일광욕하고 제이제이가 싸준 오렌지와 말린 고등어를 모조리 먹어 치웠다. 즐거운 날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 되돌아가 저울과 마주해야 할 터였다. 나는 우리 어획물을 아마릴리스호의 저울로 세 번 측정했고 세 번 다 다른 무게가 나왔지만, 서로 5킬로그램도 차이가 나지 않은 데다가 할당량에는 10킬로그램이나 모자랐다. 그래봤자 소용없겠지만. 배를 저어 측정소 정박장으로 들어가 보니 앤더스가 또 측정장을 맡고 있었다. 나는 돛을 올리고 뱃머리를 돌려 다시는 돌아오지 말까 생각했다. 이렇게 완벽한 항해를 끝내고서 앤더스 얼굴을 보기는 싫었다. 니나 말이 맞았다. 이 한 사람이 거짓 초과분과 벌점으로 우리를 망하게 할 수 있다니 불공평했다.

우리는 말없이 아마릴리스호를 부두에 계류하고 화물을 날랐다. 나는 어떻게든 앤더스를 쳐다보지 않으려 힘썼는데 그 때문에 앤더스 눈에는 내게 잘못이 있는 듯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내가 완벽하더라도 앤더스가 나를 유죄로 생각할 것이라 이미 확신했다.

앤더스의 찡그린 얼굴은 의기양양했고, 눈길은 날카로웠다. 할당량에서 25킬로그램 초과했다는 말이 벌써 들리는 듯했다. 자꾸 이런 식이면 자네 어업권 취소를 고려해야겠네, 이렇게 말하리라. 그러면 난 앤더스에게 주먹을 날릴 것이다. 나는 내가 앤더스에게 주먹을 날릴 것 같으면 말려달라고 개럿에게 말하려 했다. 하지만 개럿은 내가 정말 그렇게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듯 이미 우리 둘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늙은 측정장이 우리 가족을 부순다면 난 앤더스를 죽일 것이다. 살인이 내 존재라는 죄악보다 더 나쁘기나 할까?

앤더스가 우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시간을 끌다 입을 열었다. “이번엔 30킬로그램 초과야. 그래도 자넨 이 일을 잘 한다고 생각하지.”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앤더스에게 달려드는 상상을 했다. 지금 내가 잃을 것이 뭐 있겠는가?

“감사를 요청합니다.” 니나가 썬, 개럿, 나를 지나쳐 찌푸린 얼굴로 손을 허리에 얹고 측정장 앞에 나섰다.

“뭐라고?” 앤더스가 물었다.

“감사요. 전 이 저울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니까 저흰 감사를 요청하고 싶어요. 그렇죠?” 니나가 나를 쳐다봤다.

앤더스에게 주먹을 날리는 사태보다는 감사가 더 나을 것이다. 나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말했다. “네, 맞아요, 저흰 감사를 요청합니다.”

이후 두 시간 동안 중량측정소는 난리가 났다. 앤더스는 이의를 제기하며 우리에게 고함지르고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썬을 위원회 사무실로 보내 감독관을 호출했다. 썬은 얌전히 굴지 않았고 위원회에서는 썬을 무시할 수 없었다. 소박한 회색 옷을 입은 원로 위원 준과 에이브가 짜증이 난 얼굴로 도착했다.

“뭐가 불만인가?” 준이 물었다.

모두 내가 대답하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불만 없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다. 처음엔 그러고 싶었다. 싸우지 말자, 풍파를 일으키지 말자. 왜냐하면 나에겐 쓰레기만한 가치밖에 없을지도 모르니까. 아니면 어머니가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어머니는 여기 없지 않은가?

그렇지만 니나는 순수한 갈색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이 일은 니나를 위한 일이었다.

나는 완전히 공정한 사무적 표정을 띠고 준과 에이브에게 말했다. 이것은 내 문제가 아니라 직무, 할당량, 공정함의 문제였다.

“앤더스 측정장은 저희가 오는 것을 보고 저울 눈금을 조정합니다.”

나는 준과 에이브가 내가 아닌 앤더스에게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내는 모습에 놀랐다. 앤더스는 입을 열어 더듬거리며 변명하려 했지만 할 말이 없었다.

#

위원회에서 앤더스가 저울을 조작한 사실을 확증했다. 위원회에서는 앤더스의 배급량에서 일부를 떼어 우리에게 배상해주려 했다.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우리 가족에 필요한 돈, 음식, 보급품을 골라 추가로 받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우리는 풍력 발전기를 하나 더 세우는 것과 우물을 하나 더 신청하는 것을 검토했었다. 그러는 대신 나는 위원회가 거두려는 벌금을 공동체 기금으로 사용하도록 맡겼다. 나는 단지 아마릴리스호가 공정하게 대우받기를 원했다.

그리고 또 다른 청원을 내기 위해 위원회와 만나고 싶었다.

다음날 아침 개럿이 위원회 사무실까지 따라와 주었다.

“감사를 요청하는 일은 내가 생각해냈어야 했는데.” 내가 말했다.

“니나는 당신과 달리 위원회를 두려워하지 않잖아. 아니, 예전의 당신과는 달리.” 개럿이 말했다.

“아냐, 난—” 하지만 개럿이 맞았기 때문에 말을 그만뒀다.

개럿이 내 손을 꼭 쥐었다. 미소는 명랑했으며 눈빛은 따뜻했다. 개럿은 모든 일이 유쾌한 듯 보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안심했고 기진맥진했고 어지러웠고 부끄러웠다. 대체로 안심했지만.

우리 가족, 아마릴리스호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개럿은 내게 한참 입 맞추고 나서는 내가 위원회와 만나는 동안 바깥에서 기다렸다.

개인용 칠판, 기입용지, 할당량 목록이 죽 놓인 긴 테이블 뒤에는 준과 다른 위원 다섯 명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는 위원들 맞은편에 홀로 앉아 두 손으로 무릎을 꽉 쥐고 다리를 떨지 않으려 애썼다. 위원회처럼 당당하고 자신 있게 보이려 애썼다. 한줄기 바람이 열린 창으로 들어와 콘크리트로 된 방을 서늘하게 식혔다.

준이 정중한 인사를 한 뒤 물었다. “청원이 있다고?”

“저희는 — 아마릴리스호 선원들은 — 할당량 인상을 요청합니다. 조금만요.”

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이미 그 문제를 검토했고 인상을 허가할 생각이네. 적절한가?”

무엇으로 적절하다는 것일까? 배상으로? 사죄로? 입이 마르고 혀가 굳었다. 눈물을 흘리고 싶어 눈이 따끔거렸지만 눈물을 흘리면 기회가 날아갈 것이다. 내 존재가 그랬듯이.

겨우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할당량이 늘어나면 저흰 식구 한 명을 더 부양할 수 있습니다.”

오만한 말이었지만 내가 예의 차릴 이유는 없었다.

위원회는 나를 벌주거나, 말 한마디 없이 나를 쫓아내거나, 자원이 부족해 모든 이에게 고루 돌아가지 않는 이런 때 내가 지나치게 많은 것을 바란다며 잔소리하거나 할 수 있었다. 확장하려 힘쓰기보다는 우리에게 있는 것을 유지하기가 더욱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확장은 오만이었다. 우리는 그저 현상을 유지해야 했다. 하지만 위원회는 아무 말도 없었다. 위원회는 내 말에 놀라지도 않은 듯 보였다.

긴 회색 머리카락을 땋아 어깨에 늘어뜨리고 따뜻함과 맵시를 겸해 니트로 된 숄을 걸쳐 굉장히 기품 있어 보이는 준이 발치에 놓인 가방에 손을 뻗어, 포개진 천 조각을 꺼내더니 테이블에 놓고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손을 뻗으면 마지막 찰나에 준이 그것을 낚아채 버릴 것 같아 아직 두려웠다. 그것을 펼쳤을 때 빨간색과 녹색 무늬가 아니라 다른 색깔이면 어쩌나 두려워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손을 떨면서도 그것을 펼쳤다. 주먹으로 깃발을 꽉 쥐었다. 아무도 깃발을 빼앗지 못하리라.

“하고 싶은 말이 더 남았나?” 준이 물었다.

“아닙니다.” 나는 겨우 속삭였다. 일어나 위원들 한 명 한 명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깃발을 가슴에 품고 방에서 나왔다.

#

개럿과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의견을 나눴다. 다른 선원들이 안마당에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코타는 머리를 땋아 올리고 치마와 튜닉을 입고 있었고, 제이제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고, 썬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웃통을 벗고 두 손을 허리에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니나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나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이를 앙다물어 웃음을 참아 표정을 숨기려 애썼다. 나는 깃발을 등 뒤로 숨기고 있었다. 내 빈손은 개럿이 잡고 있었다.

마침내 니나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요? 어떻게 됐어요? 뭐래요?”

지금이야말로 놀랄 만한 소식을 전할 때였다. 나는 깃발을 꺼내 가족들이 볼 수 있도록 높이 들었다. 그러자 아, 나는 우리 가족이 이렇게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고기처럼 입을 떡 벌린 광경은 처음 봤다.

니나가 정신을 차리고 크게 웃으며 내게 달려와 내 품에 몸을 던졌다. 우리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그러고서 우리는 모두 부둥켜안았고, 다코타는 벌써부터 아기 침대가 필요하다는 둥 기저귀 만들 천이 있어야 한다는 둥 돈을 모을 시간이 아홉 달밖에 없다는 둥 걱정하기 시작했다.

나는 침착함을 되찾아 니나를 내 몸에서 떼어내 니나의 눈을 보며 깃발을 두 손에 안겨줬다. 니나는 처음에 불이라도 집은 듯 몸을 빼며 깃발을 떨어뜨릴 뻔 했다. 그래서 나는 니나의 손가락을 오므려 깃발을 감싸고 꼭 쥐었다.

내가 말했다. “이건 네 거야. 네가 이걸 받아줬으면 좋겠어.” 나는 개럿을 흘긋 보며 확인했다. 물론 개럿은 계속 미소 짓고 있었다.

니나는 나를 바라보며 내가 그랬던 것처럼 깃발을 품에 안았다. “하지만…… 마리. 이건 마리가…….” 니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나도 울음을 터뜨리며 니나를 끌어당겨 꼭 껴안자 니나가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마리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아요?”

사실 나는 이미 내가 엄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작가 인터뷰:

이 이야기에서 그려진 미래는 어디서 떠올리셨나요?

처음엔 원양을 항해하는 주인공들이 바닷가에서 살아간다는 구상에서 출발했어요. 이 주인공들을 집어넣을 세계를 찾아야만 했고, 아포칼립스 이후의post-apocalyptic 긍정적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생각했습니다. 그건 문명을 파괴하는 재앙이 일어났지만 인류가 기술을 모두 잃어버리지는 않고(전 실제로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최소한 이 지역에서는 성공적이고 지속 가능한 사회를 세울 수 있었던 세계예요. 우리 문화와는 달라 보이지만 완전히 이질적이지도 않죠.

이 구상을 파올로 바치갈루피(Paolo Bacigalupi, SF작가. 장편소설 데뷔작 『The Windup Girl』은 2010년 존 캠벨기념상, 로커스상, 콤튼크룩상, 휴고상, 네뷸러상을 받았다.)에게 들려주고 이런 사회를 세우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이야기해보니, 그는 사회공학 대 기술공학이라는 개념을 떠올렸어요. 그건 우리가 다루는 문제가 대부분 실제로는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린 기술 문제는 해결할 수 있어요. 그 사회적 관점, 사회적 기대가 문제가 되는 거죠.

그러자 분만에 관한 사고방식이 우리와 꽤 다른 세계가 떠올랐죠. 지속 가능성은 과잉 생산을 피해야만 달성할 수 있고, 이것은 아이를 가지는 일에도 적용됩니다.


지속 가능한 미래를 계획할 방법을 개발해야한다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 SF가 효과적인 도구라고 생각하나요?

글쎄요, 전 우리가 이런 문제들을 풀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보는 사고 실험을 수행하는 데 SF가 아주 효과적인 도구라고 생각해요. 정말로 이 사고 실험을 지속 가능한 미래를 어떻게 설계하는지 보여주는 청사진으로 보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이야기란 보통 해결책보다 갈등과 문제에 초점을 맞추니까요. 전 교훈 담긴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그런 관점을 꿰뚫어 보지 않고 완전히 무시하는 점이 걱정입니다.


이 이야기에 그려진 극단적 수단이 필요하지 않으려면 정부가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전 정부가 실제로 얼마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다시 사회공학 문제로 되돌아가요.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이 사람들이 만드는 공동체는 바뀌어야만 할 텐데 그건 법률로 어쩔 수 없죠.


어느 시점에 이 이야기에서처럼 “가족 계획”이 “공동체 계획”으로 바뀐다고 생각하나요? 그리고 그 티핑 포인트(급격한 변화의 시작점)가 얼마나 남았다고 생각하나요?

남용되는 말이 있는데 “아이를 한 명 키우려면 온 마을이 나서야 한다”는 말이죠. 전 그런 티핑 포인트에 우리가 상당히 근접했다고 생각해요. 오늘날 굉장히 많은 가정 문제가 중대한 정치적 주제니까요. 결혼을 어떻게 정의할지,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시킬지, 낙태가 적법한지, 강력한 성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한지 등등. 이 영역은 과거에 쉬쉬 숨기거나 당연하게 받아들였지만 이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고, 그 영역을 둘러싼 상반되는 철학들이 크고 때로는 폭력적이기도 한 대립을 일으키고 있어요.

바로 이 점에서 전 정부가 이런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지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들의 근본적인 믿음을 다루기 때문이에요. 신이 아이를 열아홉 명 낳으라고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그런 생활방식이 대규모로는 지속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납득시킬까요? 공동체는 그 생활방식이 자원을 터무니없이 고갈시킨다고 본다는 사실을?

실제 티핑 포인트는 개인, 핵가족 대부분이 더 이상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얻을 수 없을 때 올 거예요. 어떤 공동체 내의 가족들 한 그룹이 서로 연결되어 생존을 위해 서로 의존할 때죠. 한 개인이 결정을 내리면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끼치게 될 때입니다.

지금 현재는, 적어도 산업화된 세계에서는 원한다면 경제적으로 성공한 가족이나 개인이 공동체와 꽤 떨어져서 살 수 있어요. 하지만 자원이 급감한다면 변화가 일어날 거예요.


이 이야기의 주제 중 하나는 “모성”과 모녀 관계의 복합적 특성입니다. 실제로 모성에 관한 경험이 — 딸로써, 어머니로써, 스승으로써 — 주인공들의 그러한 관점에 녹아들어있나요?

글쎄요, 이야기에 들어간 경험 대부분은 생물 체내 시계가 없는 듯한 여성, 지난 10여 년 동안 또래 집단이 아이를 많이 가진 데 솔직히 꽤 당황한 30대 후반 아이 없는 여성으로써의 제 경험이에요. 요즘은 아이를 원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낳으려고 노력하는 그 원동력과 친해지려 하고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이 새로운 가족들과 나눌 이야기가 없거든요. 이런 이유도 있어서 전 제 작품에서 그러한 환경에서는 분만에 관한 사고방식이 어떻게 변할지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분만이란 누구나 거의 자연스럽게 하는 일이라기보다 신중하게 지켜야할 특권이라고 믿을 때가 올까요?

그건 저와 제 친구들 같은 사람에게는 웃기는 이야기죠. 차를 운전할 때는 운전면허가 있어야 하지만 아이는 누구든 언제든 낳을 수 있죠. 만약 그럴 상황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그런 상황이 되면 절대 안 되겠죠. 그러면 엄청나게 큰 정치적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겁니다. 아주 재미있죠?

그래서 여성이 실제로 아이를 낳지 않아도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이 이야기에서 핵심적입니다. 모성 자체의 정의가 이런 상황에서는 변하게 될 겁니다. 마리는 가족의 어머니고, 그 자체로 곧바로 인정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마리의 가족은 완전히 한 피붙이예요.


이 이야기에는 고차원적 기술과 저차원적 기술이 섞여 있습니다. 이를테면 강제적으로 피임 수술을 하면서도 햇볕에 말린 벽돌로 집을 만들죠. 미래의 저차원적 기술 세계를 설득력 있게 그릴 때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저는 자원과 관련한 아포칼립스가 곧바로 기술을 산업화 이전 수준으로 되돌리지 않으리라 가정했어요. 사람들은 여전히 여러 현대 기술을 — 태양발전, 풍력발전 등을 — 보유하고 있죠.

햇볕에 말린 벽돌은 흥미로운 본보기입니다. 서부와 남서부에서는 이 벽돌이 전혀 저차원적 기술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아주 흔하죠. 그쪽 환경에 잘 맞고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고 재료를 구하기 쉽기 때문에 널리 사용돼요. 풍력도 마찬가지에요. 풍력은 오래 전부터 있었고 쉽게 이용할 수 있어요. 사람들은 석탄과 석유가 없을 때 가장 먼저 풍력에 의존할 거예요.

제 예상에 의료 기술은 사람들이 최대한 매달릴 그런 기술입니다. 또한 현대적 어업과 통조림 기술 지식도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전 생존하기 위해 서로 분명히 단결하며 생존에 필요한 중요 기술들을 지키고 발전시키고 후대로 전하면서도, 생존 때문에 생활 방식이 상당히 저차원적으로 머무는 공동체를 그려내고 싶었습니다.

이런 생활 방식은 현재도 다양한 곳에서 찾아볼 수 있어요. 배전망에 연결하지 않고 태양발전이나 풍력발전을 이용하는 집이나 산업화된 농업과 연관된 문제를 피하려고 식품을 직접 기르는 집이 많죠. 전 그러한 운동을 가져와 공동체 전체에 외삽하려 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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