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검은 망토에 빨간 뿔을 가진 존재가 나타난다면, 나는 당신이 진실해질 것을 권하고 싶다. 모범적인 생활과 투철한 희생정신 따위는 개나 줘버려라. 그냥 당신의 그 습관적인 거짓말만 고치면 될 것이다. 다만

그게 생각보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날 전기장판이 고장 나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 짜증을 내고 있었다. 창문 밖으로 창백한 달빛만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는 와중에 어둠에 깔린 방에 더 짙은 어둠이 나타났다. 귀신이라고 하기에도 뭣 하고 유령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그런 존재였다. 소리를 지를까 말을 걸어볼까 못 본 척 잠을 청할까 기절을 할까 허둥거리는 동시에 고민을 하는데 그 존재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하이.”
반사적으로 하이, 하고 맞장구 칠 뻔 했다. 하이라니. 외국 사람인가? 하지만 나는 외국 사람이 검은 망토를 입고 머리에 빨간 뿔이 달렸다는 소리는 듣지 못하였다. 난 앞에 서있는 어둠을 자세히 보기 위해 눈에 힘을 줘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눈에 힘을 주든 동공을 확대시키든 망원경을 가져오든 그 존재를 현실적으로 뚜렷이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어보였다.
“거짓말 하지 마.”
“어, 에. 네?”
세 번 한 것 같지만 분명 한 번 대답한 것이다. 내 앞에 존재는 계속 말을 이었다.
“거짓말 세 번 하면, 죽는다. 세 번 기회 준다. 거짓말 세 번 하는 순간 죽는다.”
...뭐라 딱히 대꾸할 말이 없다. 하지만 이 괴상하고 어이없는 상황 속에서 나는 엄청난 공포를 느꼈고, 내 앞의 존재가 하는 말대로 하지 않는다면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확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어둠 보다 더 짙은 어둠이었던 그 존재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난 멍하니 한참을 서 있다가, 몸을 부르르 떨고는 생각했다.

아 씨. 전기장판.





다음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냥 밤을 샌 것이다. 대충 씻고 옷을 입고 집을 나왔다.
회사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갔다. 어젯밤 일어났던 이상한 일과 피로가 겹쳐 나는 정말 미쳐버릴 것 같은 짜증을 억누르고 있었다. 터질 듯한 머리를 버스 표지판에 기대고 애꿎은 침만 바닥에 뱉고 있었다.
“저기, K대 정류장으로 가려면 무슨 버스를 타야 되요?”
짧게 머리를 자른 20대 청년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K대라면 이 정류장에서 가지 않는다. 두 블록 정도 걸어간 다음 거기서 타야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설명해줄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냥 웅얼거리며 흘리듯 대답했다.
“몰라요.”
청년은 안절부절 못하며 표지판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정말 귀찮은.......
순간 나는 소름이 온 몸을 쫘악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거짓말 세 번 하면, 죽는다.’
어제 그 존재가 했던 말. 나는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어제 그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 찰나, 오른쪽 손등에 무엇인가 불룩 튀어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Ⅰ'
손등엔 1을 뜻하는 그리스글자가 서서히 떠오르더니 곧 오래된 흉터처럼 선명하게 새겨졌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느껴졌다. 이제 한 번 거짓말을 했다는 뜻인가. 제길. 이건 거짓말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사소한 거잖아!
하지만 내 속마음을 그 존재가 알아줄 지 의문이다. 눈에 눈물이 콰악 맺혔다. 난 정말 진흙 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기분으로 회사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덜컹이는 버스 안에서 정말 우울한 기분으로 서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 건드렸다.

“후와. 놀래라. 야. 그냥 툭 건드렸을 뿐인데 왜 그렇게 살벌하게 돌아봐?”
....... 회사 동기다.
“으응. 안녕.”
난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아 대충 얼버무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녀석은 끈질기게 말을 걸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없어.”
“.......”


.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없어.
무슨 일 있어?
없어.
있어?
없어.
없어. 없어. 없어. 없어.

난 급하게 오른쪽 손등을 바라보았다. 으윽. 어느새 손등엔 2를 뜻하는 그리스글자 Ⅱ가 새겨져있었다. 으아아악! 돌아버리겠다. 무슨 일 있냐고 묻기에 그냥 없다고 대답했는데. 아아. 빌어먹을!
“야이 개자식아!”
난 두 손으로 녀석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순식간에 버스 안에 사람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하였다.
“야야야. 으으윽. 왜 이래? 너 진짜 무슨 일 있어? 으윽. 이것 좀 놔.”
“이이이익!”
난 한참이나 녀석을 들었다가, 회사 앞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야 내려주었다.
“후우, 후우. 에라이. 별 미친새끼 다 보겠네.”
녀석은 욕을 내뱉으며 재빨리 버스에서 내렸다. 나는 천천히 버스에서 내린 뒤 멀어져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른손을 꽈악 움켜쥐었다.




정말이지 벌써 두 번이다. 이제 한 번만 더 거짓말을 한다면, 나는 죽어버리겠지. 제길!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찾아오는 거야? 이 세상에 나보다 거짓말 많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아니. 아마 전 세계의 90퍼센트의 인구는 나보다 더 거짓말을 많이 할 거야. 이건 불공평하다고. 그 이상한 존재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야?
투덜거리다보니 어느새 회사에 도착했다. 과연 이런 기분으로 일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짜증과 피로와 걱정이 실 뭉치처럼 엉키고 엉키고 꼬여 정말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난 엘리베이터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고 가만히 서있었다. 머릿속에 모기 한 마리가 들어온 것 같다.
“띵동.”
도착을 알리는 신호음이 들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나는 하얗고 깨끗한 복도를 지나 반듯한 직사각형 모양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짙은 화장을 한 젊은 여직원이 날 올려다보며 인사했다.
“어.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좋은 아침!”

난 습관적으로 대답했다.

“좋은 아침.”




















......







JINS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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