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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악마의 발

2006.11.07 01:3011.07

누이가 죽었다. 그 짐승이 드디어 일을 친 것이다. 누런 이를 드러내며 음탕하게 지껄이던, 숨결조차 메스껍던 나이든 짐승. 수박 한 통 사와 내미는 짐승에게 기가 막힌 어머니가 무슨 일로 누이를 그토록 몹시 때려 죽게 만들었느냐 물으니, 이 물건이 하는 말이 내 누이가 정숙하지 못하여 그리 했다 한다. 나는 중얼거렸다. 죽이고 말 테다, 저 축생만도 못한 물건을 결딴내고 말 테다. 유일하게 내 목소리를 들은 나어린 누이가 불안하게 내 옷자락을 잡는다. 챠도르 밖으로 나온 흰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짐승은 사흘 밤이 지나도록 돌아가지 않았다. 나어린 누이는 새 양을 잡아야 했다. 어린 암놈으로 잡거라 하는 어머니의 말에 내가 몹시 차가운 목소리로 어린양은 고사하고 그 짐승이 매일 마셔대는 물조차 아깝다 했지만, 어머니는 내 말을 못 들은 듯 고개를 돌렸다. 과연 짐승은 많이 먹고 또 많이 마셨다. 언제나 그릇이 비자마자 고함을 질렀기 때문에 나는 누이에게 짐승의 그릇에 언제나 고기를 떨어지지 않게 담아주라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커녕 숨소리조차 듣기 싫었던 까닭이었다. 큰 누이. 내가 가장 사랑했던.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누이는 언제나 자상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누이를 방문했을 때도 누이는 상냥하게 웃으면서, 아무런 걱정 말고 돌아가서 좋은 곳에 장가들라 덕담을 해 주지 않았던가. 나는 나를 보내는 누이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을 추억한다. 하얀 누이의 어깨와, 향긋한 머리칼도 떠올린다. 누이는 여신이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다니!

왜 돌아가지 않느냐고, 집 안에 고기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을 때 내가 물었다. 짐승은 싱글싱글 웃을 뿐 별다른 대답은 않고, 식사가 이제 준비되어서 어쩌냐느니, 내 나어린 누이는 향신료를 너무 아껴 넣는다느니 딴 소리뿐이다. 그에게 대화는 필요 없는 것이었다. 아니, 그에게 대화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든 오직 자신이 할 말만 하는, 상대는 단지 자신의 말을 듣기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실제로 실천하는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 바보 같이! 나는 왜 이 사람에게 말을 걸었던 것일까? 무엇을 기대하고? 나는 집을 박차고 나왔다.

원래 사내란 그런 것이라고, 펄럭이는 챠도르를 추스르며 어머니가 말했다. 이 계절에는 언제나 미친 바람이 불었다. 바로 그 바람이 어머니의 챠도르를 흔들었던 것이다. 바람이 사람을 미치게 하지, 사내의 피를 끓게 해서, 이 계절엔 원래 그런 법이라고 어머니는 또 고쳐 말한다. 나는 입을 삐죽거렸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중얼거리며 어머니가 짊어지고 온 물동이를 잡았다. 부옇게 먼지가 뜬 물이 기름처럼 끈적해 보였다. 전설에 나오는 독수毒水가 이런 모습일까. 이런 탁한 물이 마실 수 있는 식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물도 어머니의 부엌을 거치고 나면 언제나 수정처럼 맑은 물이 된다. 어머니는 그 존재 자체가 마법과도 같았다. 그리고 내 누이들도 그랬다. 바람이, 따갑고 건조한 강풍이 물동이를 든 내 손등을 매섭게 쏘고 지나간다. 괜한 울화가 속에서 일었다. 나는 챠도르 자락을 꼭 쥐고 몸을 움츠린 채 걷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저는 정말로 그 치가 싫어요. 이제 그만 집에서 나가라고 하면 안 되나요? 얘야, 박정하게 굴면 못 쓴다. 하지만 그 치는 다른 부인도 많은데, 왜 하필 이 집에 찾아 들어서는…… 어머니의 눈이 사나워졌다. 힐끗 나를 올려다보고는 이제 그만 하라 한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 새 마을 초입이었다. 어머니가 물동이를 나에게서 뺏어갔다. 사내는 물동이를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머니는 나에게 남부끄러운 이야기를 크게 떠들면 안 된다고 재차 다짐 받고서야 물동이를 짊어진 채 사뿐사뿐 마을 안으로 들어선다. 그 뒷모습이 내 죽은 누이와 너무 닮아서, 나는 그만 눈물이 났다.

집에 돌아와보니 어린 누이가 울고 있었다. 꼭꼭 여미듯 두른 옷자락은 어깨 부분이 심하게 찢어져 있다. 왜 우는지 말하려 하질 않아 나는 누이의 뺨을 쳤다. 바르게 말하지 못해. 누이는 겁먹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더니, 곧이어 다 자기 잘못이었다고 연신 비는 것이었다. 어머니에게 말하면 안돼, 어린 누이는 죽기 직전의 참새처럼 파르르 떨었다. 오빠, 어머니에게 말하면 안돼. 난 아무것도 약속 못해. 어머니가 알면 걱정하셔. 걱정할 일이면 걱정해야지. 누이는 와앙 하고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오빠는 대체 왜 그 모양이야? 왜 그렇게 싸우려고만 들어? 나는 눈에서 불이 날 것만 같았다. 짐승이 그랬구나? 그 짐승이 그랬어?

어린 누이는 그게 아니라고 백 번쯤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게 거짓말인 것을 안다. 큰방으로 들어가자 짐승이 날 맞았다. 길게 누워 포도를 집어먹는 모습이 꼴 보기 싫다. 나태한 맹수, 더러운 탐식자貪食者. 긴 다쉬다쉬 밑으로 삐죽이 나온 발이 시커멓다. 아! 나는 왜 지금까지 몰랐던가? 이 자는 짐승이었던 것이다. 그냥 짐승 같은 인간이 아니고 정말로, 명백한, 확실한, 진짜 짐승.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목덜미를 비집고 삐죽삐죽 나온 검은 털오라기나 뿔처럼 뾰족한 귓바퀴, 손톱처럼 길게 자란 발톱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허술하게 보이는 것이 없었다. 특히, 저 발톱! 몇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심장을 찢었음직하게 두껍고 사나운 저 발톱은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했다. 사막을 횡행하는 악마의 소문은 이미 사람들 사이에서 떠돈 지 오래다. 마을의 몇 명은 그 악마를 직접 보기까지 했다. 어두운 밤, 오아시스 가까운 곳에서. 하지만 그들은 집에서 떨어진 곳에서 돌아다니는 악마를 보았을 뿐이었다. 나는 내 집 큰 방 안에서 악마가 포도를 먹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이미 악마는 우리 집에 와 있었던 것이다.

죽여야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순간 내가 입을 열어 작게 말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안 그랬을 수도 있다. 한가하게 누운 악마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네 성가신 작은 누이는 아직도 앵앵거리고 있느냐, 제대로 밥 하나도 못하는 주제에 말이지. 나는 돌 같은 입술을 움직여 겨우 대답했다. 그렇냐고, 그래서 옷을 찢으셨냐고. 악마는 웃더니, 그 계집이 지 언니처럼 행실이 나빠, 집 안에서는 몰라도 마당까지 챠도르를 벗은 채 나다니는 것을 자신이 보았다 한다. 그리고 그런 것이 바로 계집이 ‘삐뚤게 나가는 일’의 시작이라며 나에게 충고하기까지 했다. 네 큰 누이는 심지어 글까지 알았다고 악마는 분개한다. 조각 조각난 말의 파편이 악마의 입에서 쏟아져, 이미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게 된 나를 사정없이 찔러대는 것만 같았다. 내 사정에 아랑곳없이 악마는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네 누이를 데리고 있을 때, 그렇게 집안 체면을 위해 몇 번이나 충고했는데도 듣지를 않더라. 그리고 그 계집이 애까지 배서……
정신이 확 들었다.
누이가 아이를 가졌었습니까? 악마가 아차 하고 입맛을 다신다. 그리고는 곧 확실한 것은 아니라 하며 말을 더듬는다. 내가 노려보자 그 계집이 아이를 가졌다고 해도 그 아이는 불의不義의 씨앗임이 틀림없었다는 것이다! 악마는 계속해서 말했다. 너도 알고 있지 않으냐, 저번에 네가 우리를 만나러 온지 꼭 석 달 째 되던 달에 그 계집이 갑자기 헛구역질을 하지 않겠느냐 이 말이다. 그 젊은 계집이 헛구역질을 하는데 일이 잘못되어도 여간 잘못된 것이 아니겠느냐 하고. 이미 내 귀에는 악마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제가 다녀간 지 세 달 만에 헛구역질을 했다고요? 악마가 그렇다 수긍한다. 숨이 턱 막혔다. 악마는 제 친동생이 찾아왔는데도 그 와중에 남자를 만나 그 짓을 했다며 나를 충동한다. 나의 화를 돋우기 위한 짓임에 틀림없다. 그의 행동에 틀림없이 나는 화가 났다. 하지만 내가 화가 난 상대는 내 누이가 아니다.

  죽여야 한다.

진땀을 흘리면서 내가 생각했다.

  악마는 죽여야 한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악마를 올라 타고 있었다. 굵게 힘줄이 돋은 내 손은 악마의 목 줄기를 잡아 누른다. 투둑, 굵은 땀이 손등에 몇 방울이나 떨어졌다. 어쩌면 이것은 눈물인가. 악마는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버둥거렸지만, 죽음의 징후만은 확실하다. 나는 컥컥 숨을 쉬려 발버둥을 치는 악마를 내려다보며 짧게 한 마디 했다. 죽어. 어쩐지 유쾌하여 나는 다시 말했다. 죽어. 죽으란 말야. 악마의 눈에 붉은 빛이 돈다. 죽어가는 사람의 눈이어서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악마의 죽음은 인간과 닮았는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악마는 이미 축 늘어진 지 오래다. 맥도 없다. 역겨운 희열에 전신이 스멀스멀 간지럽다. 악마의 몸은 따듯했지만 악취가 났다. 아랫도리를 내려다보니 악마의 배설물로 내 발치가 이미 흥건하다. 번들거리는 내 발톱이 손톱처럼 길다. 그 발톱 때문에, 내 발이, 검고, 차가워 보이는, 짐승의 발처럼 보인다. 이 것은 어찌 된 일인가. 내가 방금 죽인 악마의 발이 어떻게 내 발로 옮겨 왔다는 것일까? 멍하니 악마의 시체 위에 앉아 허공을 보는 내 귀에 찢어지는 비명이 들렸다. 불쌍한 내 어린 누이가 네 등분한 수박을 담은 쟁반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수박의 붉은 과즙이 사방으로 튄다. 박살이 난 수박 조각들 사이로 누이의 발이 보였다. 희다. 희고, 작은…… 누이가 울면서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나를 부르지는 않는다. 섭섭함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별 상관은 없을 것이다. 아버지의 몸에 붙어 있던 악마의 발은 이제 아들에게 넘어왔으니까, 아버지의 죽음은 별 볼일 없는 한 개체의 죽음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제 ‘악마의 발’의 주인은 바로 나다. 울부짖는 어린 누이의 등 뒤로 또 다른 여자가 보인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울고 있지 않다. 창백한 낯으로 길게 늘어진 악마와 나를 번갈아 본다. 미미한 희열이 눈가에 비친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기쁨이다.
희미하게 웃는 어머니의 입술 사이로, 흰 이가 진주처럼 빛났다.
누이와 같은.

chrimhilt
댓글 1
  • No Profile
    날개 06.11.16 12:56 댓글 수정 삭제
    글이 잘 정제가 되어 있는 느낌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아직 한 번 읽고서는 내용 파악이나 의미 파악이 제대로 할 순 없는 듯한.^^ 느낌은 잘 느껴지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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