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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기차 여행

2007.03.19 10:4103.19

한 남자가 짙은 냄새와 함께 기차에 올라탔다. 술 냄새였다. 그는 비틀거리다가 좌석 끝을 쥐고는 겨우 균형을 잡았다. 어째서 역무원은 저런 취객이 대중 교통시설을 이용하도록 방치한 걸까?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곧 문은 닫혔고, 남자는 기차가 출발하기 전에 아무데라도 엉덩이를 붙이겠다는 듯 좌석에 몸을 내던졌다. 바로 내 앞자리였다. 방금 하차한 소녀들의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바로 그 자리. 가까이에서 본 남자의 행색은 초라했고 신발엔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세월보다는 오랜 고생 때문에 생긴 듯한 주름살이 가득했다. 나는 방금전까지 속닥속닥거리다가 가끔은 몸을 흔들며 깔깔 웃던 소녀들을 상기한다. 그리고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네들에 비하면 이 얼마나 추레하고 볼품 없는 동행자란 말인가!

열차가 출발했다. 남자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기차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몸을 흔들 뿐이었다. 나도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창 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침묵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보오."
남자의 목소리는 어눌하다. 나는 여전히 창 밖을 보고 있었다.
"이보오......자우?"
고개를 돌리니 남자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나는 좀 놀라기도 했고 불쾌한 마음도 들어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이렇게 눈을 마주치고 보니 대답을 안 할 도리도 없다.
"네?"
남자는 흐린 눈으로 나를 한동안 보더니,  자신의 낡은 배낭을 뒤져 비닐봉지에 싼 무언가를 꺼냈다. 네모지게 썬 백설기였다.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그 떡을 나에게 건넸다.
“드시소. 그냥 두면 쉬어버릴틴게.”

나는 그 사람의 말투가 굉장히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얼핏 들으면 경상도 말인 것 같기도 하고, 또 다시 생각해보면 전라도 말이나 혹은 충청도 말인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사실은 어디 사투리와도 닮지 않았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별개의 말이었다. 굳이 그 말투와 비슷한 사투리를 만들어 내라면, 서울,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말을 골고루 섞은 뒤 커다란 솥에서 펄펄 끊여내는 수 밖에 없을 것 같았다.
“떡 싫어하요?”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남에게 무엇을 주면서도 주늑이 든 듯한 그 목소리에 문득 측은한 마음이 든다. 방금 이 사람을 피하고 얼굴을 찡그렸던 내 태도도 그에 따라 슬그머니 부끄러워졌다. 나는 조심스레 대답했다.
“아닙니다. 마침 출출한 참이었는데, 감사합니다.”
떡을 받아 들고 보니, 떡에는 누가 크게 베어 문 듯 이빨 자국 같은 것이 있었다. 나는 당황해서 남자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조그맣고 처량한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 내 기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나는 남자를 불쾌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큰 맘 먹고 떡을 베어 물었다. 떡은 반쯤 굳어 있었다.
“맛있습니다. 그런데, 벌써 누가 이 떡을 좀 먹었나 본데요. 여기 잇자국이……”
“끝순이지라.”
“끝순이요?”
“내 개요.”
나는 입 속에 들었던 걸 거의 뱉을 뻔 했다.
“저기, 아저씨……”
“아니, 아니! 이제는 내 개도 아님시!”
남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작게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고것이 원래는 떡을 억수로 좋아했는디, 금일은 뭔가 지 죽을 걸 알았나벼. 애잔케도 딱 한 입 먹더니 불쌍허게 끼갱거리면서 암소리도 않지 않겠소. 고것이……”
나는 억지로 입안에 든 걸 삼켰다.
“저기, 그……끝순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 물건이 내가, 응? 조막만할 때부터 기른 것이요 그게.”
남자는 울음을 참느라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그 노가다판 돌아다니면서, 응? 그냥 남은 밥이나 먹여서 기른 것인데, 이게 용케 못난 주인을 안 버리고 가더란 말요. 일 없을 땐 지하도 같은 데서 사람들 토한 거나 줏어 먹으면서도 붙어 있더란 말이우. 알아 듣겄소?”
“예, 그런데요?”
“그 뭐시냐, 그 텔레비전에 보면은, 그 호강하는 개들 있지 않소. 막 머리에 리본도 매고 말여. 밥도 막 그 자루에 든 거, 고기로 만든 거 먹는단 말시. 근데 끝순이는 사람이 토한 걸 줏어 먹었단 말여!”
“……”
“개새끼가 주인 잘못 만다면 팔자 구긴거여. 애새끼가 부모 잘못 만난 거랑 같지 않소. 나는 그래서 학교 근처도 못갔어라. 응?”
남자의 쭈글쭈글한 눈 끝에 물방울이 맺혔다.
“대체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든지…… 나 말이오, 응, 참말로 힘들게 일했스요. 하루라도 일나가는 거 걸러 본 적 없슈. 근데 왜 이리 팔자가 안 피는 기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도 이제 좀 요령 있게 살아 볼라요!”
“……요령이라면?”
남자는 대단히 비밀스런 말을 전한다는 듯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나에게 바짝 들이댔다. 그의 입에서 쉰내와 술 냄새가 뒤섞여 올라왔다.
“나야 가진 기 몸뚱이밖에 달리 없응께, 몸뚱이를 파는 것이지라. 형씨도 단단히 알아 두시우. 그 뭣이냐, 응, 내가 그 심장을 판단 말여.”
남자의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졌다.
“그 펄떡펄떡 뛰는 거, 형씨도 알제?”
놀란 내가 심장이 아니고 신장이 맞지 않느냐 하니, 남자는 벌개진 얼굴로 손사래를 치며 나에게 눈을 부릅떠 보였다.
“그렇게 크게 말하면 안 된다 안하요!”
“아니, 하지만……”
내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심장이 없으면 죽는걸요.”
“어흐! 큰일 날 소리! 그런 게 아니랑께!”

남자는 거친 목소리로 나에게 심장 매매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람의 심장이란 요상한 물건이라,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다른 물체들과도 대체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예로 밀가루 반죽을 들었다. 심장을 들어낸 뒤, 거기에 사람 주먹만한 밀가루 반죽을 대신 넣으면 기적같이 피가 다시 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지만, 남자의 진지한 태도 때문에 이 사람이 적어도 날 상대로 농담을 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면 돈이 자그마치 1억이요!”
설명을 마치며 남자가 말했다.
“1억이라고, 1억! 형씨는 1억이란 돈을 만져나 보셨시오? 아니제, 응, 그게 쉽게 만질 수 없는 귀한 돈이고 말고. 내가……”
남자가 말을 멈추었다. 너무 무 자르듯 딱 말을 멈추어서, 나는 남자가 갑자기 어디가 불편해진 게 아닌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내가……그걸 할라고 끝순이를 팔았응께…… 차비가. 차비가, 응, 없었다니까는.”
“저기, 제 생각에는 말이지요.” 내가 말했다. “그 수술은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아요.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모르는 소리!” 남자가 화를 냈다.
“그렇게 심장을 판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니까는! 내 이야기 잘 들어 보쇼. 그 왜 잘나가는 사람들 있잖여. 시커먼 양복 입구서, 텔레비전이니 신문이니 나오는 높은 데 기신 양반들 말야! 응? 알제? 그 양반들도 다 소싯적에, 응? 어려울 땐 말씀하자면 다 그렇게 했시요! 이게 몸뚱아리에 다 공핑하게 달린 걸 고맙게 생각해야지. 세상에 공핑하게 타고 난 건 하나도 없응께, 똑같이 심장이라고 다 밑천을 줘가지고 공핑하고 공밍정대한 세상을, 응, 예비했다 이 말이지!”

남자는 길게 트림을 했다. 역겨운 술냄새가 가득 퍼졌다. 어지럽다. 나는 이마를 찡그리며 몸을 등받이 깊숙하게 기댔다. 남자는 게슴츠레 한 눈으로 그런 나를 한 번 보더니,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 또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근데 말여…… 나도 걱정이 하나 있응께.”
“……”
“혹시 이 심장이 말여, 고장이 나지 않았는지 모르겄서.”
남자는 흡사 보물을 쓰다듬듯이 자신의 가슴을 천천히 쓰다듬더니 한층 어두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끝순이랑 헤어질 땐, 응, 개장수한티 넘길 땐 말이지, 마치 금시 멈춰버릴모냥 쿵쿵쿵쿵 뛰더니만, 지금은 또 괜찮다 안하요. 이상허지? 왜 이렇게 미친년 널뛰는모냥 심장이 뛰었다, 안 뛰었다……”
“그거 큰일이군요.”
진심으로 걱정하며 내가 말했다.
“빨리 내리셔서 심장을 파셔야겠네요. 더 고장 나기 전에.”
기차가 섰다. 나는 밖을 내다보았다. 역 이름이 적혀 있어야 할 안내 표지는 텅 비어 있었다. 소리 내어 불러줄 만한 글자는 단 한 개도 없었다.
“다 왔군요.”
“……굶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지.”
남자가 말했다.
“딴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냔 말여.”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남자는 검댕이 덕지덕지 뭍은 얼굴에 흐릿한 미소를 한 번 띄우더니, 떨리는 다리를 질질 끌고 기차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가 내리는 모습을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보지 않으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창 밖에 멈춰져 있던 풍경들도 다시 살아 움직인다. 훤칠한 나무들이 휙휙 뒤로 지나간다. 나지막해서 볼품없지만 아늑해보이는 야산들도 훨훨 날듯 멀어진다.
내가 내릴 역은 아직도 한참이나 남았다. 나는 고만 유쾌해졌다. 그리고는 탈것을 오래 탔을 땐 으레 그랬던 것처럼, 가늘게 떨리는 유리창에 머리를 댄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M.M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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