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폐인

2007.03.18 08:2603.18

아무도 모르는 이름 대신 폐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내가 있었다.


바로 옆집에 사는 이웃조차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나이도 이름도 무엇을 하는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알 기회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 30대 초반, 혹은 중반으로 보이는, 삐쩍 마르고 커다란 안경을 낀 사내는 좀처럼 자신의 집에서 나오는 일이 없었다. 어쩌다 가끔 바깥에서 다른 사람과 마주칠 때에도, 온 몸에서 퀴퀴한 냄새를 풀풀 풍기며 허두재비로 입은 낡은 옷가지를 대충 한 번 추어올리고는, 수염이 빽빽이 돋은 얼굴을 뒤흔들며 황급히 집 안으로 사라져버리곤 했다. 그럴 때의 그의 표정이란, 도수가 높은 잠자리 안경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틀림없이 투덜대고 있을 것 같은 인상이었다. 날씨가 좋으면 좋은대로, 나쁘면 나쁜대로, 그는 늘 무엇인가에 불만스러운 듯한 모습이었다.


외출을 즐기지 않는 성격임은 분명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동네 사람들도 그가 그저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라고만 여겼다. 몇몇 정 많은 - 혹은 참견하기 좋아하는 - 부인네들이 안부를 물을 겸해서 반상회 날짜를 알려주기 위해 대문을 두드렸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짜증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도대체 언제쯤 갈아 입는 건지 의심스러운 낡은 옷가지를 이불처럼 걸치고, 쓰레기장 같은 방구석에서 벌레처럼 기어나오며 퉁명스레 한 마디 던질 뿐이었다. “전 바빠요.” 그리고 문을 쾅 닫아버리는 것이다.



도대체 그렇게 더러운 집 안에서 무얼 하고 사는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사내는 폐인이라고 불리우며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동네의 소년소녀들은 폐인처럼 살지 말라는 잔소리를 따갑게 들어야 했고, 젊은 사람들은 폐인처럼 되지 않기 위해 취업 공부에 열을 올렸으며, 늙은 부모는 타지 생활을 하는 자녀들이 혹시나 폐인처럼 살고 있지 않을까 가슴 졸이며 과도한 보호 본능을 끈적끈적 사방에 뿌려댔다.



폐인이 이사온지 며칠 안 되어 동네는 그를 배척하며 새삼스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단합하였다. 그러나 폐인은 도통 바깥 세상에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따금씩 쓰레기를 버리거나 담배를 사기 위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빼고는 달팽이처럼 집 안에 처박혀 있을 뿐이었고, 심지어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조차 한두 달에 한 번씩 배달시켰다. 그의 대문 앞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라면 박스나 휴지 더미 따위를 볼 때마다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루 종일 집 안에 처박혀 있는 사람이 도대체 무슨 돈을 어떻게 버는 것일까, 혹시나 범죄자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동네 사람들의 의심을 대변하듯이 민중의 지팡이가 몇 번 예의바르게 그의 집 대문을 두드리기도 했다. 경찰이라고 해서 그의 투박한 태도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여하튼 별 문제는 없었던 듯 했다. 몇몇 극성스러운 노인네들이 좀 더 확실하게 조사해달라고 항의를 하기도 했지만 경찰 쪽에서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는 답변만 되풀이될 따름이었다. 그러나 반상회에서 으레 폐인의 이야기가 입에 오르내릴 때면 동네에 사는 젊은 순경조차 이맛살을 찌푸리곤 했다. 고고한 민중의 지팡이들에게도 그다지 마주치고 싶은 인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폐인은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아무리 험한 풍문이 바람처럼 폐인의 집 앞을 휩쓸어도 녹슨 회색빛 철제 대문은 마치 커다란 성벽처럼 그를 보호하고 있는 듯 했다.



도대체 그는 그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 * *

키보드를 두드리다 말고 폐인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며칠 전부터 자꾸만 뱃가죽이 따갑고 가려웠다. 처음에는 단순히 몇 달째 목욕을 하지 않은 탓이라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때가 잔뜩 낀 손톱으로 배를 긁을 때마다 오돌도톨하니 괴상한 느낌이 든다. 체크무늬 남방 위로 배를 벅벅 긁다가 그다지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는지 아예 옷을 젖혀버렸다.



뱃가죽 위로 두드러기 같은 것이 잔뜩 나 있었다.



언뜻 보면 종기 같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종기도 이렇듯 줄을 고르게 맞추어, 그 것도 네모 반듯반듯한 모양으로 나지는 않는다. 마치 그의 배 위에서 캐러멜로 이루어진 군대가 사열식을 하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얼마나 긁어댔는지 빨갛게 달아오른 두드러기들은 마치 붉은 군복을 입은 영국 왕실의 근위병들 같기도 했다.



닳아빠진 셔츠 자락을 내리면서 컴퓨터 자판을 흘끗 넘겨다본다.



키보드 두드러기라고……?



꺼림칙한 표정을 짓던 의사의 말이 생각났다.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왕왕 발생하는 증상이란다. 갈수록 운동을 하지 않고 컴퓨터만 가까이하고 지내는 사람들이 늘다보니까 키보드 비슷한 모양으로 두드러기가 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게 말이 되느냐고 따지자 의사는 어색하게 웃었다. 사랑하면 서로 닮는다잖아요. 그런 거랑 비슷한 거겠죠. 미친 놈. 그걸 말이라고.



하지만 적어도 그가 컴퓨터를 사랑하듯이 가까이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생계를 위한 작업 이외에도 그는 늘 컴퓨터를 가까이 했다. 컴퓨터는 인간처럼 복잡하지 않아서 좋았다. 앙탈을 부릴 줄도, 거짓말을 할 줄도 모른다. 명령하면 절차에 맞게 올바른 결과를 내어준다.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모순적인 인간이 이토록 완벽한 피조물을 제작해놓았다는 사실이 아이러니컬하게 여겨졌다.



늙어죽을 때까지 그는 오로지 컴퓨터와 함께 살아갈 생각이었다. 마음에 맞지도 않는 인간들과 부대끼며 아양을 떨고 살아갈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컴퓨터의 내부는 한없이 복잡하지만 그 이치는 인간과 달리 명쾌하다. 0과 1, 긍정과 부정, 예와 아니오, 진실 아니면 거짓 - 어중간함이란 있을 수 없다. 반대로 아무리 선해보이는 인간이라고 해도 한꺼풀만 벗겨보면 구역질나는 추악한 면이 보일 수 있다. 겉보기에는 그저 그런 인간들도 속내는 짐작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폐인은 그 것이 싫었다.



폐인이라고 불리우기 전부터 그는 누군가를 속이거나 농락하고 등쳐먹는 일 따위는 못하게 생긴 위인이었다. 실없는 농담조차 곧이들었으며, 예의상 보여주는 태도라는 것에 도통 익숙해지지 못했다. 언제 술 한 번 같이 해, 라는 말로 적당히 자리를 때우며 일어나려는 옛 동창을 붙잡고 꼬치꼬치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하려 했던 때도 있었고, 맞선 자리에서 바쁘다며 일어나는 이상형의 뒤를 밟아 사실은 그녀가 남자친구가 있었으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적당히 말을 둘러댔음을 깨닫고 실의에 빠진 적도 있었다. 적어도 그가 겪는 사람 간의 일이란 늘 그런 식이었다. 마치 구멍가게에서 파는 싸구려 과자처럼, 커다랗고 화려한 봉지에 혹했다가 막상 포장을 뜯어보면 맛도 없는 밀가루 덩어리가 채 반조차 차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그 때부터 폐인은 점점 사람들의 웃음에 거부감을 느꼈다. 그가 보기에 사람들의 웃음이란 싸구려 과자의 포장과 똑같은 것이었다. 실실 웃어대며 무언가 어려운 부탁을 한다거나, 아니면 제 속마음을 감추기 위한 방패막이일 뿐이었다. 진실하다고 생각되는 웃음은, 그저 감정을 대변할 뿐, 그 이상의 어떤 의미를 가지진 못했다.



그래서 폐인은 사람 자체에 실망해버렸다. 스스로가 융통성이 없다고 생각해본 적도 있지만, 여하튼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이래저래 많은 것을 따져야 하는 것 자체가 귀찮고 피곤한 일이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컴퓨터와의 질박한 대화가 나았다. 남들은 작업, 혹은 명령이라고 부르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대화였다. 속임도 거짓도 기교도 없는.



타인과 접촉하는 일을 꺼린다고 해서 생계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쓸데없는 관계에 집착하는 인간들보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추상적인 관념에 대해 대단히 독특한 시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것을 글로, 혹은 그림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재능을 연마한 값으로 폐인은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그다지 많은 금액은 아니어도 홀로 살아갈 평생을 지탱하기엔 충분했다.



갑자기 찾아온 이 괴상한 증상만 아니라면 조금 더 행복했을 것이다.



문 바깥에서 그에 대한 어떤 험담이 들려오든 상관없었다. 신경쓰지만 않으면 된다. 그 것이 칼을 들고 자신의 목을 찌를 염려도, 애지중지하는 컴퓨터를 훔쳐갈 일도 없으니까. 그러나 이름조차 괴상한 병이라니. 의사는 별 것 아닌 증상이라고 했지만 어쩐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새삼 너무 불결하게 지냈다는 후회도 들었다. 아무리 컴퓨터가 하잘것없는 육체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완전무결한 반려라고 해도, 스스로를 위해서 조금 더 건강에 신경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은 충분하다. 그러니까 더 큰 병원에 가자. 적어도 믿을만한 곳으로.



폐인은 진정으로 컴퓨터를 사랑했다. 삶 자체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들의 번잡스러운 위선이 싫을 뿐이었다. 순수하기 짝이 없는 반려를 홀로 놔두지 않기 위해, 그는 기꺼이 그토록 싫어하는 외출을 또 한 번 견뎌내기로 결심했다.



*  *  *



폐인이 눈을 뜬 곳은 온통 시야가 새하얗게 가득 찬, 병원의 침대 위였다.



처음에는 꿈을 꾸고 있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10년 전에 구입했던 셔츠와 면바지 대신 하얗고 보들보들한 환자복과 시트가 몸을 감싸고 있었다. 머리도 깨끗하게 감겨져 있었고 지저분한 수염도 누군가 깔끔하게 면도까지 마쳐놓은 상태였다.


온 몸을 콕콕 쑤시는 이질적인 쾌적함에 폐인은 진저리를 쳤다. 차라리 고즈넉한 불결함이 편했다. 차갑고 불편한 청결 대신에 언제나 그의 몸을 감싸던 더러운 분위기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팔다리가 어디로 갔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점점 돌아오는 기억과 함께 꿈이 아니라는 자각이 들었다.



도시에서 가장 큰 병원을 찾아다니다가 길을 잃었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장소를 PDA 안에 저장된 전자 지도만으로 찾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님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마치 예전에 실용 서적 몇 권을 읽은 뒤 과감하게 맞선을 시도해보았던 때의 당혹감과 비슷했다. 한 시간 넘게 길을 헤매었고, 왠지 주위의 사람들의 시선이 버겁게 느껴졌다. 매연으로 가득 찬 공기도 답답했다. 한참 뒤에야 비로소 병원의 커다란 간판을 보고 반색하며 뛰어가다가 신호등을 보지 못했고, 그리고 커다란 트럭이 자신을…….



성난 파도처럼 환통(幻痛)이 그를 덮쳤다.



폐인의 팔다리는 이미 잘려나가고 없었다. 그가 기절해 있는 사이 트럭에 깔려 으깨어진 팔다리를 모두 절단해버린 것이다. 그러지 않았으면 죽었을 거라고 중년의 간호사는 뻐기는 투로 말했다. 연고인을 찾을 수 없어 수술 보증인조차 없는 상황에서 담당 집도의가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지 않았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알 수 없었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좋았다. 팔다리가 없다는 불편함보다 일단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팔다리가 아프다는 것이 신기했고, 또한 그만큼 고통스러웠다.



그 것만 제외하면 폐인이 불편한 것은 별로 없었다.



수술비와 입원비를 어서 지불해달라는 원무과장의 독촉이 듣기 싫어서 현금 카드를 넘겨주며 비밀번호까지 통째로 알려줘 버렸다. 원하는 만큼 돈을 빼가라고 일러두는 대신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개인 병실로 자리를 옮겨 달라고 부탁했다. 원무과장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어쨌든 폐인은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었다.



타인의 도움이 필요할 때 폐인이 턱으로 비상벨을 누르면 그다지 말이 없는, 곧 퇴직을 앞둔 늙은 간호사가 달려와 수발을 들어주었다.



갑작스럽게 병원 신세를 지게 되면서 폐인은 새삼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의사에게 환통, 즉 팬텀 페인(Phantom Pain)의 원인에 대해 듣고 난 뒤였다. 인간의 뇌에는 스스로에 대한 바디 이미지(Body Image)가 무서울 정도로 세밀하게 저장되어 있다고 했다. 몇십 년간 저장된 바디 이미지에 익숙해진 뇌가 갑자기 없어진 팔다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심리적인 마찰을 일으키는 현상이 환통이라는 것이다.



그 때 처음으로 폐인은 의사에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투였다.
“역시 컴퓨터가 인간보다 낫군요. 컴퓨터라면 파일을 수정하면 될테니까요. 아니면 포맷해버리면 그만이고.”



어이가 없었던지 의사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 다음부터는 의사의 순회 진찰도 눈에 띄게 줄어 들었다. 어쩌다 가끔 병실에 들러도 딱히 말을 걸지 않았다. 폐인의 한 마디와, 아직도 뱃가죽에 뚜렷하게 남아 있는 키보드 두드러기를 보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 대략 감을 잡은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폐인도 조금은 어이가 없었다. 별 것 아닌 두드러기를 고치러 갔다가 팔다리가 잘려나가다니, 억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그러나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있다가 잃어버렸을 때의 허전함을 10배로 부풀려 느끼는 정도였다. 팔다리가 있건 없건 컴퓨터는 여전히 집에서 그를 맞이해줄 것이다. 컴퓨터를 다루기엔 좀 불편하겠지만, 빚을 내서라도 장애인용 컴퓨터를 살 생각이었다. 일을 해서 갚으면 된다. 그는 느슨하게 생각했다. 그보다는 홀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컴퓨터가 더욱 걱정이었다.



그런 연유로 다소 조바심을 치며 꺼내었던 두 번째 말은, 비상벨 소리를 듣고 달려온 늙은 간호사가 듣게 되었다.
“내 컴퓨터를 이 곳으로 가져올 수는 없을까요.”



간호학과를 나온 후 40년 가까이 온갖 환자를 돌보며 늙어온 노부인도 이 말에는 혀를 내둘렀다. 자연스럽게 그가 입원해있는 병실 바깥으로 또다시 두드러기처럼 그에 대한 험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젊은 여간호사들은 그가 있는 병실 10m 바깥 복도에서도 소름이 돋는다는 제스처를 취해보였고, 환자들은 개인 병실을 혼자 독차지하고 앉아 있는 폐인에 대해 온갖 험악한 상상을 품었다.



물론 폐인은 단지 팔다리만 잘려나갔을 뿐, 눈과 귀, 정신은 멀쩡했다. 점점 사무적으로 변해가는 노 간호사의 몸짓에서, 이따금씩 빠꼼히 열린 문 바깥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다른 환자들이나 어린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에서 이 곳이 자신이 살던 동네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했다. 인간이 사는 곳이란 장소가 다를지언정 그 속성은 다 비슷하기 마련이다.




폐인은 하루 빨리 퇴원할 날짜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병실만으로는 타인들의 시선을 막아내기가 어려웠다. 컴퓨터도 없는 병실에서 팔다리도 없이 무력하게 누워 있는 나날이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갈 나날만을 기다리는 돼지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언제 병실에 누군가 멋대로 들이닥쳐 수박 겉껍질을 핥는 것마냥 무미건조하고 복잡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맺으려 할까봐 두려웠다. 어서 빨리 더럽지만 따뜻한, 컴퓨터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퇴원 날짜와 집에 있는 컴퓨터만을 그리워하며, 매일 병실 벽에 걸려 있는 달력만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 것이 그가 하루를 보내는 유일한 낙이었다.



*  *  *



마침내 퇴원 날짜가 정해지던 날,
그러나 병원에 불이 났다.



그 날은 폐인을 담당하던 전속 간호사의 퇴직 기념연이 있던 날이기도 했다. 폐인을 제외한 모든 환자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쏟았던 노부인은 병원에서 많은 인망을 얻고 있어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퇴직을 아쉬워했다. 응급실의 인원들을 제외하고, 또한 진료에 필요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두들 함께 어울려 웃으며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었다. 그 날만큼은, 병원 내에서도 폐인의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불행한 일이 있었다면, 만취한 젊은 수간호사가 가스 밸브가 열린 줄도 모른 채 병원 내의 매점에서 담배를 피우다 폭발 사고를 일으켰다는 것과, 그 위급한 와중에 아무도 폐인의 존재를 떠올린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온갖 험담과 따가운 시선에도 의연했던 그였으나 온 몸을 살라먹는 화마(火魔)만큼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팔다리가 없었기에 도망갈 방법조차 없었다. 거대한 불꽃이 천장을 타고 내려와 그의 얼굴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을 때 폐인은 처음으로 타인의 존재를 절실하게 떠올렸다. 끝내 나약해지고 만 스스로의 본능을 저주했을 때, 마치 천장이 그를 핥아먹듯, 불길이 그의 몸을 덮쳐눌렀다.

비명마저, 숨결과 함께 흩어져버렸다.



*  *  *




세 시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화재가 완전히 진압되었다. 검댕으로 시커멓게 얼굴이 그을린 소방관들이 경찰과 함께 화재 현장을 돌아보며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도시의 중심부에서 커다란 탑처럼 자리하여 의학의 위엄을 돋보이던 병원은, 그러나 지금은 타다 만 골조와 시멘트 파편만이 어지럽게 자리하여 실로 애처로웠다. 한때 많은 환자들이 절대적으로 의지하던 공간을 사람들이 바쁘게 밟고 지나간다.



타고 무너져 부스러진 잔해들을 치우던 소방관 하나가 문득 얼굴을 찡그렸다.
“…으… 뭐야, 이거. 희한하게 생겼는데.”



동료의 중얼거림에 몇몇 소방관들과 경찰관들이 눈을 힐끔거렸다. 큼지막한 고깃덩어리 같은 것이 건물이 타고 남은 잿더미 아래에 묻혀 있다가 드러난 것이다. 불에 타고 오그라들어 진물이 줄줄 흐르는 그 것은 타기 전의 생김새가 어떠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경찰관 하나가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시체 아닙니까? 어린애 시체 같은데요.”
“글쎄요. 시체는 시첸데… 퍽 이상하게 생겼는걸.”



구레나룻을 기른 늙수그레한 소방관 하나가 동료에게 핀잔을 던진다.
“아, 불에 타다 만 시체 생긴 게 다 그렇지. 뭘 그렇게 까락까락 따져?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면서.”
“아니, 뭐 그렇긴 한데…….”




처음 시체를 발견한 소방관은 어쩐지 석연치 않은 시선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확실히 사람 시체라고 하기엔 너무나 많은 것이 모자라고 어색했다. 팔다리도 없었고, 머리는 무엇인가에 눌렸는지 넓적한 떡판처럼 변한데다 타다 남은 이빨과 뼛조각들이 마치 테두리처럼 그 주위를 삐뚤빼뚤 사각형 모양으로 감싸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뱃가죽에는 서너 줄의 두드러기, 혹은 종기 같은 것이 줄을 맞춰 튀어올라와 있었고 척추와 연결되어 있는 갈비뼈 한 개는 새까맣게 탄 채 아예 몸 바깥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아마 불에 타죽은 후에도 온갖 잔해들이 녹아 떨어지며 시체를 못 살게 군 모양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시체가 끔찍하게 변할 리가 없었다.



소방관은 살점이 부스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시체를 안아올렸다. 어렴풋하게 인간의 체형을 지니고 있긴 했지만 사람이라기보다는 이건 마치…….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조금 더 세밀하게 살펴보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주위 사람들의 성화에 못 이겨 시체를 대충 포로 감싸 조그마한 수레에 싣는다. 시체는 한 곳에 따로 모아둔 다음에 시립 시체 안치소로 옮겨져 비로소 신원 확인에 들어가게 될 것이었다.



34년을 홀로 살면서 본명보다 폐인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일이 더 많았던 임태희 씨는 그렇게 남들과 다를 것 없는 죽음을 맞이하였다. 평생 동안 누구를 반길 줄도, 초대할 줄도 몰랐던 위인이었으나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다만 그의 영혼이 조금이라도 위안받을 일이 있다면, 마지막 남은 유해가 살아 생전 각별히 아꼈던 컴퓨터와 비슷한 모습으로 변해버렸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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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단편을 하나 써보았습니다.



파스타지에 올라온 거울 단편 전부 읽기 이벤트에 응모하면서 자극받아 쓴 글입니다. 이것저것 다 시도해보았으나 어떤 소재를 쓰든 지지부진하게 글이 길어지고 마는 제 약점을 새롭게 확인했습니다. 문체도 바꿔보고 최대한 짧게, 간결하게 써보려고 노력했는데, 역시 엉망진창인 거 같네요. :-)



거울의 고수 분들께 많은 혹평 부탁드리겠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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