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외계인] 부름

2007.02.28 21:0802.28

어째서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평범하게 고등학교를 다니던 평범한 학생인 그는, 얼마 전 학교를 그만두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더 이상 거기에 있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반항아라 불리우는 몇몇 다른 이처럼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거나, 교복을 줄이거나 하지 않는 얌전한 그였다. 독서부에서 책을 읽고, 평균 정도의 성적을 유지하는 평범한 학생. 아니, 지금은 이미 학생이 아니지.

눈에 뜨이지 않게 사는 것이 편하다. 출판사에서 증정받은 문제집을 주려는 선생님의 호의도 반갑지 않다.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며 푼돈이라도 내놓으라 하는 옆반 깡패의 적의도 귀찮다. 그렇다고 해서 그 깡패 녀석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고 싶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 건 무시하면 된다. 그저 오가는 길에 그 깡패놈이 눈에 띄기 전에 피해 다니는 정도로, 관심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멀쩡하게 학교 잘 다니던 아들이 고등학교를 그만두겠다는 데에 찬성할 부모님은 없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반대했으나 그의 강력한 고집에 부딪혀 포기하셨다. 그건 그가 처음으로 일관시킨 그의 뜻이었다. 그렇게 소리없이 그는 1학년을 마치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마치 전학간 것처럼.

그래서, 그는 말짱한 유월 대낮에 - 교복을 입고 초등학교 운동장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왜 쪼그리고 앉았냐고 물어본다면, “거기에 의자가 없어서.” 하고 대답할 것이다. 교복을 입고 있는 이유는 다른 옷이 없어서다. 부모님이 더 이상 옷을 사주지 않는데다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아니니 옷이 나올 데가 없다. 매정하게 몸은 쑥쑥 커버려서, 교복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런 걸 물어보는 사람은 없다. 교실 창문 너머로 흐물흐물 가나다를 읽는 초등학생의 목소리가 들려올 뿐이다. 거기에 있는 이유를 설명하려면 좀 복잡하다. 누군가, 아니 무언가 어젯밤 그를 불렀기 때문이다. 「이밤이 지나고 해가 가장 높이 뜰 때에 ㅇㅇ초등학교 운동장에 오라」고. 무엇이 불렀는지는 모른다. 그건 꼭 집 전체에 울려펴지는 확성기 같았다. 월요일마다 아침 조례를 할 때 교장이 교실에 있는 아이들에게 뭔가를 전달하기 위해 쓰는, 우웅 우웅 소리를 내는 그것처럼 말이다.

그는 깎지않은 손톱으로 바닥을 긁어본다. 처음에는 곧 찾아올 무언가에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금방 알려주기 위해 운동장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시간을 착각했는지, 장소를 착각했는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이제 곧인가, 하고 그는 시계를 보았다. 그것이 올 때까지 7분. 고등학교 입학 기념으로 아버지가 사주신 시계의 유리판에는 가는 실금이 있다. 아버지가 그에게 고등학교를 졸업하라고 하며 집어던져서다. 시계를 보는 데에는 지장이 없고, 다른 시계를 살만한 여력이 있는것도 아니라서, 아니 그보다 습관적으로 그걸 그대로 차고 다녔다. 바닥에 있는 흙과 먼지 부스러기가 손톱 사이에 낀다. 털어보려 해도 잘 되지 않는다. 휴, 하고 그는 한숨을 쉬었다.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만한 무언가를 찾아보고 싶었다. 매일매일 학교에 가는 평범한 고등학생이 아니라, 무언가 특별한 것이 되고 싶었다. 일단 평범한 학생을 그만두었다고 해서, 바로 마법사가 찾아와서 내 제자로 들어와라 하고 말하는 것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숨겨진 마법사 핏줄의 유일한 계승자로, 또는 멸망해가는 왕국의 왕자로 밝혀지는 걸 꿈꿔보던 것도 중학생 때까지 이야기다. 그러나 무언가가 분명히, 자신을 찾아와 줄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자신에게 찾아올 무언가를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 자퇴한 지 반년이 지나, 검정고시를 볼 수 있는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아 공부해야 할 이 즈음에 - 그것으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다. 머릿속으로 울리는 그것이, 자신을 부르러.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신을 원하며.

명문대 입학이 기대되는 인재라고 하는, 전교 1등인 은선이도 아니고 주먹이 좀 세다고 깝치고 다니는 옆반 현승이도 아닌, 김근호를.

5분 남았다. 구겨진 교복 바짓단에 든 모래를 털어내며 근호는 어젯밤 일을 다시 떠올렸다. 새벽근무인지 어머니는 일찌감치 자고 있었다. 작지않은 그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펴질 때, 어디서 들려오는건지 근호는 애써 찾지 않았다. 아버지는 출장중이고, 어머니는 왠만해선 깨지 않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두근두근 떨리는 가슴을 안고 물을 마시러 부엌에 갔을 때, 화장실 불이 켜져 있는 걸 보긴 했다. 엄마가 까먹고 켜놓은 것 같아서 불을 끄고, 물을 마시고 도로 방으로 돌아왔다. 그 소리가 집 전체에 울린 건지 근호에게만 들린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근호의 부모님은 맞벌이다. 간호사로 일하는 어머니의 근무 시간은 이삼일마다 계속 바뀌었다. 어느 날 새벽에 나가고 어느 날 저녁에 나가는지 근호는 거의 신경쓰지 않았다. 아침에 학교에 가기 전, 식탁에 놓인 지폐를 발견하면 아 새벽 근무구나 했을 뿐이다. 빨래는 쌓이고 쌓여서 일주일에 한번씩 몰아서 하거나, 세탁소에 맡기거나 했다. 아버지는 회사에 다니면서 밤 5시면 꼬박꼬박 들어와 근호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는 특별히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았다. 외제차를 타고 다니며 비싼 과외를 할 수 있는 부잣집은 아니지만, 매일 밥을 굶거나 하는 가난한 집도 아니었다. 평범한 집에 사는 평범한 가족의 평범한 아들. 그게 근호였다. 특별할 건 아무것도 없는 남자아이.

가끔은 어떤 옷을 입을지, 어떤 걸 먹을지, 어떤 학교에 갈지, 그런 걸 고민하는 어머니가 싫고 부담스러웠다. 대충 아무거나 먹고 아무거나 걸쳐입으면 될 것 같은데, 시시콜콜 참견하는 것도 싫고 툭하면 빨래나 설거지를 자신에게 미루는 것도 싫었다. 엄마라기보다 형처럼, 가끔 어머니는 어린애처럼 굴 때가 있었다. 새벽 한시에 퇴근해서 들어와서 고등학생 아들을 깨우며 “야, 나 콜라 먹고 싶으니까 나가서 사와!” 하고 발로 걷어찬다. 함께 게임기로 게임을 하며 노는 엄마가 좋을 때도 있고, 엄마의 일을 떠맡기는 게 싫을 때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엄마는 엄마였다. 일찍 퇴근해서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는 아버지보다 3교대 근무로 바쁜 엄마와 더 친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평범한 엄마였다고 생각한다. 불평하면서도 엄마는 설거지도, 밀린 빨래도 슥슥 해치웠고, 아버지 몰래 근호에게 용돈을 찔러주기도 했다. 지금 그가 그럭저럭 지내고 있을 수 있는 것도, 실은 어머니 덕분이다. 어머니가 근호를 지탱하고 있는 건지, 근호가 어머니를 지탱하고 있는 건지 잘 알 수 없지만. 그는, 어머니에게 꽤 의존하고 있었고 학교를 그만둔 후엔 그 의존도가 더 심해졌다.

학교도 다니지 않는 주제에 집안일도 하지 않는다고 매일 혼났지만, 하지 않던 일이 손에 닿는 건 아니었다. 빨래가 쌓여도 설거지가 쌓여도 그저 그렇게 두곤 했다. 오늘, 기대하던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면 뭐라도 좋으니 설거지는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겠지 하고 근호는 피식 웃었다. 점점 더 기대감이 커져갔다. 하늘은 맑고 땡볕이 내리쬐고 있다. 더운 여름날, 공기가 통하지 않는 교복바지라 더 더웠다. 다리에 땀이 차고 있다.

3분 남았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는 수학시험처럼, 시간은 한없이 느리게 흐른다.

이제 앞으로, 10초.
교문 너머로, 누군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지각한 초등학생인가 하고 힐긋 보았다. 실은 저것이 그 ‘무언가’가 아닌가 해서 보았다. 그는 눈을 깜빡였다. 눈에 띄는 하얀 바지에 옅은 연두색 반팔 윗도리는- 엄마다. 새벽에 없더니 이른 오후에 퇴근했나보다. 벌써 그럴 시간이 되었나. 병원에서 옷도 갈아입지 않고 바로 왔는지, 다급하게 뛰어오고 있다. 아, 엄마도 어제 들었구나-하고 근호는 깨달았다.

“근호야!”

엄마 입에서 자기 이름이 터져나온다. 아주 짧은 순간, 근호는 망설였다. 지금 뛰쳐나갈지 말지,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젯밤 자신에게 말하던 그 목소리를 믿어야 하는지 엄마에게 가야 하는지. 그 순간 하늘에서 빛이 내려왔다.

압도적인 존재감과 함께, 눈부신 빛의 기둥이 운동장 한가운데에 내리꽂혔다. 바람도 불지 않았다. 세상이 멈춘 것 같다.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고, 눈이 부셔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근호는 막 일어나서 달리려다 만 엉거주춤한 자세로, 슬며시 눈을 떴다.

초등학교 운동장도, 거기 있던 철봉도 미끄럼틀도 그대로 있다. 아무도 없다.

“엄마! 엄마를 돌려줘!”
뒤늦게 외쳐도, 이미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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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이제부터 이계로 가서 마법을 사용하며 전투를..(...)

'외계인' 이라고 하는데, 꼭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싶어서요.  알수없는 외계의 거대한 힘 하고 끄적였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 많이 벗어난 것 같아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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