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복이 쌓인 눈이 뽀득거리는 소음을 내뱉으며 무너졌다. 차디찬 공기에 뿜어지는 입김, 공중으로 비죽비죽 새는 한 사람분의 온기. 폐부까지 시리게 파고드는 칼바람에 몸을 바르르 떨면서도 은람은 삽을 머리끝까지 치켜들었다.
퍽. 또 하나의 눈사람이 형체를 잃고 무너져 쓰러졌다. 머리도, 몸통도, 가늘게 꼽힌 나뭇가지도. 전부 뒤섞여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희게 부서지는 회백색의 눈더미가, 하늘에서 보송보송 멈출 생각도 하지 않는 눈송이와 썩 어울렸다. ⋯오늘은 이걸로 열세 명째다. 짙푸르게 서리가 어린 삽의 머리 부분을 슥 털어낸 뒤, 은람은 목도리를 단단히 여몄다. 이제 집으로 향할 차례. 고요한 걸음의 궤도마다 남는 흰 발자국을 더 흰 눈발이 덮어 없앴다. 집을 향하여 발을 옮기면 어깨 너머로 백색의 밤이 눈을 치뜨고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를 만큼 뜨거운 수돗물이 세면대를 한가득 채운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뿌옇게 물들며 수그러든 시선. 손을 일렁이는 웅덩이에 담그면 발갛고 또 무뎌진 손끝에 감각이 느리게 돌아온다. 이제는 익숙한 일이었다. 걸린 수건에 손을 성의 없이 닦아낸 뒤, 은람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따뜻하게 끓인 캐모마일 차. 푹신한 이불과 몇 겹의 담요에 깊숙이 몸을 뉘면 눈이 천천히 감긴다. 짙은 수마가 몰려와 길게 하품하던 은람은 눈덩이로 들어찬 듯이 묵직한 팔다리를 끌어안고 꿈 없는 잠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눈을 뜬다. 또 다른 고요하고 불온한 밤이었다. 창밖으로는 백색 소음마저 집어삼킨 눈발, 그저 평안한 나날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그가 아는 현실의 것들과는 너무나도 달라서⋯. 허나 이는 아침 식사 이후의 일임을. 따뜻한 된장국과 밥, 김 한 봉지. 꼭꼭 씹어 삼키면 젖은 종잇조각처럼 척척하게 목구멍에 달라붙는다. 유약한 온기가 남는 식도와 미적지근한 몸뚱어리, 전부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한 감각이기에 반가웠다. 간단히 설거지 후 옷을 껴입으면 켜켜이 쌓여가는 체온에 비장히 삽을 움켜쥔다. 아침 해가 막 떠오르는 미명이었다.
-이백 년 전까지만 해도 세상은 따스한 곳이었다고 한다. 햇살이 내리쬐는 대로 온기가 머리를 짓찧고, 삶의 음정을 가득히 노래하는 녹음이 짙푸른, 그런. 유릿가루처럼 바스러지는 윤슬은 바다 위에서 떠다니며 눈부시게 생명을 안아 드는 낙원이 이 세계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얼어붙기 시작한 세상은 끝끝내 입을 다물고 말아서⋯⋯. 드넓은 대지 위에 주인 없는 눈사람이 생겨난 것도, 사람들이 고요한 잠을 자기 시작한 것도, 이쯤일 테다. 인류는 더는 꿈을 꾸지 않았고 표정 없는 눈사람들은 어디서든 볼 수 있었다. 이것은 새로운 인류세라 불린다.
어느 순간부터 귓속말로, 수군거림으로, 소리 없는 세상에 도는 유일한 문장이 있다. 수 없는 눈사람들이, 꿈 없이 잠드는 사람들이 이 세계를 얼어붙게 만들고 있다고. 사람들이 다시 꿈을 꾸면, 세상의 모든 눈사람이 그 말간 낯을 가지고 녹아 없어지면 언젠가는 모든 것이 좋았던 시절로 돌아갈 것이라고⋯⋯.
고로, 이 세상에는 눈사람 살인 청부업이라는 새로운 직이 생겼다.
아, 서론이 길었나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눈사람 킬러, 편은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