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자, . 이제 그만 진정하십시오. 꿈틀거리면 꿈틀거릴수록 더 아프기만 할 뿐입니다. 제가 지은 매듭은 쉽게 풀리지 않더라고요. , 아마도 치열하게 연습을 한 탓이겠지요. 몸으로 익힌 실력이 어디 가나요? 그렇죠. 맞습니다. 때로는 포기가 더 현명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그럼, 잘 행동하여 주셨으므로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주위 풍경을 감상하실 수 있게 눈가리개를 풀어 드리지요. 기막힌 풍경에 가슴이 뻥 하고 뚫리실 겁니다.

  어떻습니까. 절경이지요? 혹시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음⋯⋯ 충고 하나를 드리자면, 그렇게 절 노려보시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조금이라도, 조금만이라도 더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제 말을 허투루 들으시면 분명히 후회하실 겁니다.

  네. 고맙습니다. 사실, 지금부터 이야기 하나를 들려 드릴 참인데 가만히 잘 들어주시면 좋지요. 이것은 그저 제 이야기입니다만 제법 흥미로우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야기가 꽤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혹시 그렇더라도 지루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말을 길게 하는 편이 당신에게는 좋을 겁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만큼은 이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으실 수 있을 테니까요.

  무슨 말이냐고요? 그건 나중에 알게 되실 겁니다. 일단은 이야기를 먼저 들어 보시지요. , 참고로 이 이야기는 여태껏 어느 누구한테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않을 그런 이야기입니다. 영광이시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비록 재갈을 물고 손발이 묶여 있어도 그 의자만큼은 편안하시지요? 방금 제가 가져온 이 의자보다 몇 배는 더 비싼 거랍니다. 똑같은 브랜드이지만 그게 더 고급 라인이라고나 할까요. 이 정도면 손님 대접은 나쁘지 않은 편이지요? 아이고⋯⋯ 오늘 손님 모시느라 힘들었는데 앉으니까 좀 낫네요. 바람도 보드랍게 불어 시원하고 말이지요. , 어쨌든.

  ‘부모란 존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단순히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부모 따위의 자격을 얻는다고 보십니까? 당연히 그건 말도 안 되는 겁니다. 막말로, ‘자격시험같은 걸 실시해서 통과한 사람만이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탈락한 사람은 아이를 낳을 자격이 안 되는 것이지요.

  왜 이런 소리를 하냐고요? 복잡한 이유는 없습니다. 단순하지요. 부모란 작자들은 저를 낳고 몇 개월 데리고 있다가 주저 없이, 그 작자들은 아니라고 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지요. 아무튼, 아무런 주저 없이 저를 미친 듯이 고맙게도 길바닥이 아닌 입양 기관에 내던졌습니다. 바로 그때가 부모로부터 영원히 탈출한 순간이 됐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코미디는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숨만 붙어 있는 셈이었던 저에게 누군가가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생식 능력에 문제가 있어 직접 출산은 하지 못하지만 어쭙잖은 부모란 타이틀은 가지고 싶은 새로운 두 작자들이었지요. 제가 비록 어리고 어렸지만 어쨌든 제 의사와는 상관없이 필요도 없는 부모밑으로 또 들어가게 됐습니다. 당연히 갓난아이 때의 감정을 기억하진 못하지요. 그래도 분명히 그때 저는 속으로나마 격렬히 저항했을 겁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순간입니까?

  뉴스나 영화나 뭐 드라마 같은 것들을 보면 보통 입양을 한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슬슬 본색을 드러내면서 학대를 시작합니다. 아니 그렇잖아요? 작고 연약해서 대항하지도 못할 때나 괴롭히고 죽여 버리지 저처럼 십몇 년 묵혔다가 시작하는 경우는 잘 없잖아요?

  어렸을 때 그러니까,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 저는 두 번째 작자들에게 완전히 속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찍이 자기네들과 제가 입양 가족으로서 만났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지요. 그러고는 또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효진아, 엄마와 아빠는 그 누구보다도 우리 효진이를 아끼고 사랑한단다. 우리는 하늘의 별이 될 때까지 아니지, 영원히 한 가족으로 함께 할 거란다.

  제가 중학교에 들어가자 마침내 일이 터졌습니다. 불임 부부였던 이 작자들이 친자식을 잉태해 버린 것이지요. 자기네들 딴엔 기적을 이룬 겁니다. 그들은 당연하게도 바로 그때부터 저에 대한 멸시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중학생쯤 되면 뭡니까? 사춘기에 뭐에 온갖 변화를 겪는 시기이지 않습니까? 그런 때에 저는 제 자신을 살필 수가 없었습니다. 살피기는커녕 그저 편히 숨을 쉬려고 애쓰기만 했습니다.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처음엔 그래도 간단한 집안일부터 시키더군요. 애새끼 하나에 어른 둘이 바짝 붙어 있고 저는 혼자서 여기저기 청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해야 할 일에 빨래가 추가됐지요. 점점 집에 있는 시간보다 학교에 있는 시간이 더 편해졌습니다. 그다음엔 밥을 좀 차리라고 하더군요. 물론 갖가지 요리를 모두 제가 만든 건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제가 직접 만든 요리의 가짓수는 점점 늘어났습니다. 요리를 하고 밥을 차리면 뭡니까? 설거지가 나오지요? 애새끼가 먹은 것까지 말입니다. 저는 슬슬 학교에 지각하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뭐, 그 지랄 하기 전까지는 공부를 좀 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는데 도대체가 면학 분위기 조성이 안 되지 않았겠습니까? 공부는 무슨. 학교에서 쉬기 바빴지요. 주말에는 정말 숨 쉴 틈조차 없어졌습니다. 저는 너무 힘들었고 누구라도 말할 사람이 필요했는데도 꾹 참고 버텼습니다. 그저 그래야 하는 줄 알았지요. 딱히 갈 곳도 없었고 말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한 학년이 높아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뭘 의미하겠습니까. 저는 이미 부모란 존재들에게 자식이 아닌 노예같은 존재로 조종당하고 있었고 중학교 일 학년 담임 선생으로부터는 철저한 무관심 속에 버려졌던 것이지요. 그 선생은 단 한 번도 저에게 다가온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지옥이 돼 버린 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미성년자였던 제가 뭘 단독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었지요. 그 작자들이 저를 파양하지 않는 이상 탈출 방법은 없어 보였습니다. 또 솔직히 어린 나이 탓이었는지는 몰라도 법적인 내용에 깊이 들어가니까 뭐가 뭔지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단순하게, 어린 중학생답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습니다. 진작에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고요? 철저히 혼자로 지내다 보니까 이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겁니다. 친구 말입니까? 친구는 무슨. 친구가 왜 필요합니까? ‘친구라는 관계는 어차피 이런저런 이유로 멀어지게 마련입니다. 쓸데없는 데 힘을 뺄 필요가 없지요. 귀찮기만 할 뿐입니다.

  아무튼 도움을 구하기로 한 저는 이 학년 담임 선생에게 찾아갔습니다. 개인적인 일로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이었지요. 그 선생은 제 이야기를 듣더니 조만간 본인이 그 작자들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보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랬지요. 보름 정도가 지난 날 저녁 지옥의 집으로 또 돌아온, 자신을 제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저를 한참을 경멸의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제 왼쪽 뺨을 갈겼습니다. 제 몸에 처음으로 손을 대던 그 순간 저에게 각인된 것은 뺨을 맞은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직전에 그 눈빛, 저를 강렬히 혐오하는 바로 그 눈빛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제 머릿속은 단 한 가지로만 가득 채워져 갔습니다.

  그 두 눈이 멀어 영영 나를 볼 수 없었으면 좋겠다.

 

  이런⋯⋯ 눈을 감고 계시네요. 제가 충고를 드리지 않았나요? 조금이라도 더 풍경을 눈에 담으라고 말입니다. 혹시, 졸리신 건 아니겠지요? 아니면 제 얘기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지루하던가요. . 두 개가 다 똑같은 말인가? 어쨌든 뭐라도 상관없다고 쿨하게 말씀드리고 싶지만 그렇게는 못 하겠습니다. 움직이지 마시고, 부지런히 절경을 머릿속에 새기시면서 제 이야기를 잘 들어주십시오.

  잠시 끊어가는 김에 말입니다. 이 얘기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제 앞으로의 계획에 관한 겁니다. 아직 구체적으로 세운 건 아니에요. 다만, 뭔가 재미있고 나름대로 의미도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생각난 겁니다. 일종의 실험같은 건데요. 간단합니다. 복잡하지 않아요.

  자, 보세요. 여기 한 부모가 자식을 애지중지 키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자식새끼가 봉사가 돼서 나타납니다. , 봉사는 시각 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지요? ‘봉사시각 장애인으로 정정하겠습니다. 그래서 아무튼 자식새끼가 시각 장애인이 돼서 나타납니다. 부모 작자들은 과연 어떻게 할까요? 가엾은 자식새끼에 대한 사랑이 더 늘어날까요 아니면 확 줄어들까요? 궁금하시지요? 저만 그런가요?

  자, . 진정하십시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꿈틀꿈틀하면 할수록 아프기만 하다니까요. 아니, 왜 그렇게 두려운 표정을 보이십니까? 세상일을 너무 일차원적으로만 보지 마세요. 나뭇가지가 일자로 하나로만 뻗지는 않잖아요. 이야기처럼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가잖아요. 그러니까 제 말은, 앞으로 여러 가지 일들이 생길 수 있다 뭐 그런 말입니다. 지레짐작하지 마시지요.

  음⋯⋯ 제가 어디까지 말씀드렸나요? ! 생각났습니다. ‘영영 나를 볼 수 없었으면거기까지네요. 그럼, 본론으로 되돌아가 볼까요?

 

  뭐든 처음이 어렵지 막상 시작해서 몸에 익숙해지면 그다음엔 할 만하잖아요? 자신을 제 아버지라고 우기는 사람 그러니까, 기를 에 악할 그리고 사내 을 조합한 양악남도 그랬습니다. 원래 이름이요? 잊어버렸습니다. 아니, 잊어버릴 겁니다. 아무튼 양악남도 그랬다 이 말입니다. 뺨 한 대 때리더니 손맛을 알았는지 주먹으로도 치고, 또 발로도 까고⋯⋯. 근데 얼굴은 최대한 안 건드리더라고요. 대신에 옷 입으면 가려지는 몸 쪽을 주로 때렸습니다. 그렇지요. 멍청이는 아니었습니다.

  ‘양악녀는 뭘 하고 있었냐고요? 그러게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 작자가 더 나쁜 새낍니다. 단 한 번이라도 말린 적이 없거든요. 지랄 맞은 부부 일심동체였지요. 저는 그렇게 계속 얻어맞기만 하다가는 언젠가 몸 일부분을 아예 못 쓰게 되거나 어쩌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긴 싫더라고요. 그렇게 죽어 버리면 너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경찰서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양악의 무관심이 큰 도움이 되었지요. 그날이 개교기념일이었나 어쨌든 무슨 이유에선가 학교에 안 가는 날이었는데 등교하는 척하고 경찰서로 간 겁니다. 근데 하필 그때쯤엔 애새끼가 아파 저를 향한 구타가 잠시 드물 때여서 상처나 멍 자국이 적당히 아문 곳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그렇게 타이밍 잡기가 쉽지 않아서 강행할 수밖에 없었지요.

  경찰서로 간 저는 했던 말을 하고 또 하고⋯⋯.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경찰 한 명이 또 오더니 저를 경찰서 어딘가로 데려가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달라는 겁니다. , 또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는 다시 처음부터 말했습니다. 사실 자세할 것도 없었지요. 그냥 양악남이 때리고 양악녀는 애새끼를 안은 채 자릴 피하고 주워 온 자식새끼는 맞는다는 내용이 단데. 그 경찰은 제 이야기를 듣고 잠시 뒤에 자기는 부모님을 만나 볼 테니 경찰서에서 기다리라고 하더라고요.

  늦은 오후였던가, 아무튼 해가 질 즈음이었습니다. 제가 앉아 있던 자리로 그들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경찰, 양악남 그리고 애새끼를 안은 양악녀. 저는 온몸에 금이 가서 쪼개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직도 그 느낌이 생생하네요. 어떻긴 뭐가 어떻습니까? 굉장히 불쾌하지요.

  곧이어 양악의 연극이 시작되었습니다. 마치 저를 아끼는 사람처럼, 마치 저에게 진심 어린 사과라도 하는 것처럼 가짜로 다가와서 저를 붙잡고 울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요.

  아빠가 미안해.

  아니야, 엄마가 미안해.

  역겨웠습니다. 토악질할 것 같았지요. 거기다 애새끼는 뭘 안다고 같이 우는지. 난장판이 따로 없었습니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경찰이 상황 설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구구절절 아주 그냥 개소리만 늘어놓더군요. 짜증나게 일일이 말할 것도 없이 짧게 요약하자면, ‘부모님은 어찌 됐건 제 몸에 손을 댔던 행동을 후회하고 있고 다시는 그런 일로 저에게 상처 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진짜 웃기지 않습니까? 대체 누가 누구랑 약속을 했다는 건지. 저는 경찰서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뿐인데 말이지요. 당시 양악과 경찰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었는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저 병신들과 또 엮였다는 사실만을 알아챘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상황을 파악해 보았지요. 답은 바로 나왔습니다. 경찰은 아니구나. 얘네도 결국 똑같은 놈들이구나. 그때부터는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았습니다. 멍청하게도 플랜 비따윈 없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허무하게 저는 양악을 뒤따라 경찰서에서 나가고 있었습니다. ? 도망이라도 가지 왜 따라갔냐고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땐 마치 보이지 않는 투명한 줄에 묶여 끌려가는 것 같았거든요. 도대체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 모르기도 했고 말이지요.

  투명한 줄에 묶인 채로 차에 실린 저는 보았습니다. 모든 좌석의 문이 닫히고 차에 시동이 걸리기 직전, 룸 미러를 통해 그것을 보았습니다. 양악남의 그 눈빛을요. 분명히 차 안은 어두웠지만 저는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개를 숙이고 속으로 되뇌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그 두 눈이 멀어 영원히 나를 볼 수 없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속으로 계속 되뇌고 있는데 양악녀가 말했습니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니?

  저는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또 되뇌기 시작했습니다.

  당신 또한 두 눈이 멀어 영원히 나를 볼 수 없었으면 좋겠다.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밖에는 없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부터, 양악은 저를 교묘히 대했습니다. 다른 시선을 의식하고 계산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다시는 학교에 지각하는 일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지각하지 않게끔 일을 조정해서 시켰다는 말입니다.

  구타는 더 은밀해졌습니다. , 얼굴 쪽을 피하고 옷으로 가려지는 몸 쪽 위주로 때리는 건 변함없었지만 그때부터는 팔과 다리까지 피하고 온전히 몸통만 노리더군요. 몸통만 계속 맞으면 어떤 느낌인지 아십니까? 통증은 말할 것도 없고 숨도 막히고 어지러우며 토악질까지 몇 번씩 하게 되지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양악은 저의 얼굴과 팔과 다리를 못 해하는 대신에 정신적인 부분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욕지거리는 기본 중의 기본이고 마치 저를 해충 대하듯이 했으며 무엇보다, 끊임없이 저에게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너는 이러려고 태어난 거야. 다른 이유는 없어.

  이런 말 같지도 않은 말도 계속 또 계속 들으면 진짜처럼 믿어지게 됩니다. 아니, 진짜라니까요? 괜한 의심하지 마시고 제 이야기를 계속 들으십시오. 설마, 딴생각이라도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아무튼 그렇게 벌레처럼 지내다가 대망의 감금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날도 저는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치우지 않으면 온 집 안이 더러워진다는 소리를 계속 들으면서요. 아마도 그땐 진짜 그런 줄 알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반복적인 세뇌의 힘은 엄청나거든요. 어쨌든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실수로 스탠드 조명을 넘어뜨린 겁니다. 근데 이게 하필 애새끼를 향해 쓰러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쓰러지는 조명에 맞은 애새끼도 넘어졌지요. 하지만 그게 다였습니다. 조명 갓만 살짝 찌그러졌을 뿐, 애새끼는 멀쩡했다 이 말입니다. , 이마가 조금 벌게졌던 거 같긴 한데 아무튼 피 한 방울 안 났었거든요.

  진짜 많이 맞았습니다. 그 자리에서도, 창고 겸 제 방으로 끌려가는 도중에도, 방 한구석에서도. 그리고 이번부터는 양악녀에게도 맞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찰지게 제 뺨을 갈겼던 기억이 납니다. 양악남과 똑같은 그 눈빛과 함께요. 그런 뒤에 양악은 동시에 그 혐오의 눈빛으로 절 한참을 노려보다가 방 밖으로 나갔습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이제 눈이 먼다.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들려왔습니다.

  당신은 이제 눈이 먼다. 당신은 이제 눈이 먼다.

  이어 방 안 전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다른 목소리로 방 안이 가득 채워졌습니다. 그리고 또한, 제 내면도 그 목소리들로 온전히 채워졌습니다.

  당신은 이제 눈이 먼다.

  당신은 이제 눈이 먼다.

  당신은 이제 눈이 먼다.

  당신은 이제⋯⋯.

  모든 곳에 채워진 뒤에도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런 공간에서 사흘 동안인가 갇혀 있었습니다. 양악이 방에서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저는 방문을 열어 보려고 했는데 열리지 않더라고요. 자물쇠를 달아 버린 것 같았습니다. 목소리 때문에 못질하는 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틀째 새벽이 됐을 때는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았습니다. 생리 현상까지 한계에 다다랐던 겁니다. 저는 다시 죽도록 맞더라도 일단 여기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리쳤습니다. 마구대고 소리 질렀지요. 그런데, 제 목소리가 그 목소리에 묻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분명히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 뒤부터는 어땠겠습니까? 버려진 동물처럼 꼴이 말이 아닌 채로 방문을 두드리기만 했지요. 힘이 닿는 데까지 말입니다.

  하루가 더 지났을까, 목소리는 여전했고 아마도⋯⋯ 방 안의 악취가 집 안 곳곳까지 퍼진 상태였겠지요. 방문은 끊임없이 그렇다고 또 크지도 않게 덜거덩거리고 말입니다. 그런데 잠시 뒤 목소리가 잦아들면서 양악의 대화가 들렸습니다.

  정말 할 수 있겠어?

  안 하면 어쩔 건데. 이러다 애까지 우리 셋 다 미쳐 버릴지도 몰라. 내 말대로만 하면 돼.

  그런 뒤에 목소리는 다시 점점 커져서 원래대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는 목소리가 아주 편안하게 들리더군요. 게다가 여러 다른 목소리들 중에서 꽤 낯익은 목소리도 찾아냈지요. 왜 녹음해서 듣는 내 목소리지만 내 목소리 같지 않은 그 목소리 말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마치 제가 언젠가 그 말을 수없이 반복이라도 했던 것처럼 멈춤 없이 계속 들렸습니다. ‘당신은 이제 눈이 먼다고요.

  한두 시간쯤 지났을까요? 갑자기 목소리가 멈추더니 자물쇠 푸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어 방문이 열리고 양악녀가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온갖 인상을 다 쓰고 말이지요. 양악녀는 저를 한 번 대충 보고 방 안을 훑어보더니 잠시 나갔다가 양손에 걸레와 휴지와 물티슈와 쓰레기봉투 따위를 잔뜩 들고 다시 들어왔습니다. 그러고는 그 눈빛을 한 채로 말했습니다.

  방에 이거 다 치워. 이 버러지 같은 새끼야.

  양악녀는 더럽혀진 저에게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더러워진 방을 치우라고 말했지요. 그 눈빛을 한 채로요. 저기, 보통은 있잖아요. 뭔가를 말할 때 머릿속에 그게 떠오름과 동시에 입으로 말하잖아요. 맞지요? 근데 그때 그 말을 들은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심장인가 명치인가 아무튼 그 근처에서 뭔가 타오르는 느낌이 나더니, 뭔가가 식도를 타고 쭉 올라와서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이지요.

  당신은 이제 눈이 먼다.

 

  양악녀는 양손으로 두 눈을 덮고 고개를 숙인 채 꿈틀대고 있었습니다. 들릴 듯 말 듯한 신음 소리와 함께 말입니다. 이내 양악녀는 얼굴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눈을 떴지요. 양악녀의 두 눈동자는 완전히 초점을 잃고 풀어져 있었습니다. 양악녀는 두 손으로 자신의 앞을 마구 더듬거리면서 말했습니다.

  여보. 여보. 갑자기 앞이 안 보여. 여보.

  양악남이 곧바로 방으로 뛰어 들어오면서 말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뭐가 안 보인다는 거야.

  솔직히 이때, 누가 제일 놀랐겠습니까? 바로 접니다. .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니, 왜냐고요? , 제 말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양악의 모든 눈이 멀어 영원히 저를 볼 수 없었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간절히 바랐을지언정, 그리고 당신은 이제 눈이 먼다는 휘몰아치는 메아리를 들었을지언정 제가 실제로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아까 말했듯이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입으로 나간 게 아니라 뭐랄까, 목소리가 저를 매개체 삼아 안에서 밖으로 튀어 나갔다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제 의지와는 아무 관계 없이 일이 벌어졌다 이 말이지요. 또 믿을 수 없게도 그것이 실제에 그대로 반영이 되었고요. 어떻습니까? 제일 놀랄 만하지 않습니까?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저는 놀라서 고스란히 얼어붙어 버렸고 양악남은 양악녀에게 무슨 말이냐며 똑바로 말하라고 채근하고 양악녀는 그저 벌벌 떠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잠시 뒤 양악녀가 이를 딱딱거리면서 겨우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앞이⋯⋯ 안 보인다니까⋯⋯ 앞이⋯⋯.

  양악남은 최대한 침착하려 노력하면서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제게도 말했습니다.

  ⋯⋯일단 병원으로 가자. 별거 아닐 거야. 그리고 너 이 새끼. 옷만 대충 갈아입고 은성이랑 은성이 짐 챙겨서 따라와. 입 닥치고 그림자처럼. 뭐하고 서 있어 이 새끼야, 움직여.

  저는 얇은 겉옷만 겨우 걸치고 애새끼와 애새끼 짐을 챙겨서 양악을 따라나섰습니다. 양악녀는 여전히 벌벌 떨고 있었고 그런 양악녀를 양악남은 자동차 조수석에 조심스레 태웠습니다. 그때 저는 애새끼를 카 시트에 태웠지요. 양악남이 운전석으로 가면서 말했습니다.

  야. 뭘 쳐다보고 있어. 네가 은성이 봐야 할 것 아냐. 생각을 좀 처 하라고. 이 망할 씨⋯⋯.

  이렇게 저와 그들은 자동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가는 길에 저는 제 자신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면서 생각했습니다.

  진짜⋯⋯ 라고? 진짜로 눈이 먼다고? 영영⋯⋯ 나를, 영원히 나를 보지 못한다고?

  제가 믿기 어려운 사실에 다가가고 있을 때 양악녀가 입을 열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 쟤가 말했어⋯⋯ 당신은 눈이 먼다고⋯⋯ 나한테 그렇게 말했어⋯⋯.

  여보, 정신 차려. 그게 무슨 말이야. 도대체 무슨 얘길 하는 거야.

  바로 그 순간 저는, 제 몸을 둘러싼 불안과 두려움의 장막이 벗겨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완전히 날것이 된 것이지요. 제 온몸이 실체를 잃어버리지 않은 연기같이 변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때, 그것을 보았습니다. 빨간색으로 된 앞좌석의 안전벨트 잠금장치를요.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러고는 말했습니다.

  당신도 이제 눈이 먼다.

  저는 지체 없이 양손으로 두 개의 빨간색 잠금장치를 눌렀습니다. 안전벨트가 풀리면서 거의 동시에 엄청나게 크게 쿵 하는 소리가 났고 하늘에 붕 떠 있는 느낌이 들다가⋯⋯. 그렇지요. 정신을 잃었습니다.

  살아남았습니다. 저 혼자서요. 애새끼한테는 기회를 준 셈이었는데 양악의 자식이라고 부모 따라 가 버렸습니다. , 별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잠금장치를 누를 때도 어떤 희열 같은 걸 느꼈지만 나중에 다 사라졌다는 사실까지 알게 됐을 때는 뭐랄까요, 카타르시스? 아무튼 미칠 듯이 개운했습니다. ? 맞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잘된 일 아닙니까? 또 다른 누군가를 입양해서 지옥으로 데려갈 수도 있었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그나저나 이 절경, 눈에 잘 담고 계신 거겠지요? 시간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는데 이런 멋진 장소를 찾아낸 건 분명히 앞으로 일이 잘 풀릴 거라는 징조이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여기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제 이야기가 모두 끝난 뒤에 직접 알아보셔야 합니다. 제가 미리 다 말해 버리면 재미없잖아요. ⋯⋯ 힌트만 하나 드리자면, 여긴 서해 어딘가입니다.

  네, 압니다. 매우 불충분한 정보라는 거. 그래서 송구스럽습니다. 대신에 앞서 말씀드렸던 제 계획에 관해 이어서 말씀드려도 될까요? , 그럴 줄 알았습니다. 궁금해하실 줄 알았다고요.

  초등학생⋯⋯ 정도면 적당할 거 같습니다. 왜 그 자식새끼말이에요. 초등학생이면 갓난아이처럼 적지도 그렇다고 여드름 올라오는 중학생처럼 많지도 않은 애매하다면 무척이나 애매한 나이를 가지고 있지요. 그래서 무엇보다, 초등학생쯤 되면 입양되기 쉽지 않을 겁니다. 그쯤 되면 새 부모, 새 가정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을 테고 입양을 하는 작자들 역시 초등학생 정도까지 자란 애새끼를 키우는 데 적응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고 우여곡절도 겪을 것이기에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요! 맞습니다. 다 자란 몸집 큰 유기견들이 입양이 잘 안 되는 이유와 비슷합니다. ⋯⋯ 아닌가? , 이러나저러나 상관없지요.

  아무튼 그러니까 제 말은, 정리하면 이런 겁니다. 어느 부부 작자들이 초등학생인 자식새끼를 키우는데 그 자식새끼가 시각 장애인이 된다면 과연 어떻게 할 것인지 궁금하다. 더 깊은 사랑으로 보듬어 줄 것인가, 아니면 다른 집으로 팔려 가기도 애매한 초등학생 자식새끼를 내다 버릴 것인가.

  같이 가볍게 예상을 한번 해볼까요?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 자식인데 어떻게든 치료해 주려고 할 게 분명하다, 이런 예상을 하고 계시지요? , 충분히 피력하실 수 있는 견해이고 존중합니다. 그렇습니다만 제 견해는⋯⋯ 글쎄요, 꼭 제가 직접 경험한 적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실제로 경우를 살펴보다 보면 이런 엿같은 일이 정말로, 참으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진짜라니까요. 보통 본인 바로 옆에만 없다 뿐이지 몇 다리만 거치면 짜잔, 하고 나오게 되어 있지요.

  잠시만요. 지금 시간이⋯⋯ , 이제 곧 일몰을 볼 수 있겠군요. 서해가 일몰 맛집이잖아요. 더군다나 서해 어딘가인 여기에서 만끽할 그 장관은 아름답기 그지없답니다. 이따가 비록 관람 환경은 조금 불편할지언정 자리와 자리 위치만큼은 최고인 이곳에서 멋진 일몰을 실컷 감상하셨으면 합니다. 그때까진 괜찮을 겁니다.

 

  어쨌든 양악과 애새끼는 그렇게 갔습니다. 지금 보시는 것처럼 저는 멀쩡히 살아 있고요. 저는 그때 그걸로 신경 쓸 거리가 전부 싹 사라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지요. 왜냐하면 친악이 나타났거든요. ⋯⋯ 또 짜증이 엄청 나네요. 진짜, 양아치 새끼들 아닙니까? ?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요. 다 죽고 저만 살아남았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가 비록 양자일지언정 법률상으로는 행복한 가족의 일원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재산은 어디로 갑니까. 저한테 오는 겁니다. 저한테. ‘상속권이 있으니까 말이지요. 예전에 지옥 같은 집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을 때와는 집중 정도가 아예 달랐습니다. ‘문제라서 그랬겠지요?

  다만 그땐 제가 미성년자였고 양악이 별도의 유언 없이 죽었으며 아, 그럴 시간이 없었겠군요? 아무튼 또한 양악에게 형제 따윈 없었기 때문에 저는 후견인같은 법정 대리인을 선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되는지 진짜 열심히 알아봤지요. 방법은 일단 법률 사무소로 가서 변호사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학교요? 그만두었지요. ‘검정고시같은 것도 있고 하니까요. 아니, 뭐가 더 급하겠습니까?

  그렇게 제 나름대로 차근차근 일을 진행하고 있을 때, 나타난 겁니다. 그 작자들 바로 친악말이에요. 어떻습니까? 이야기 전개가 제법 드라마틱하지요? 지금 막 드라마에 몰입이 돼서 다음 장면이 궁금하고 주인공의 빡치는 감정에도 이입하고 막 그렇게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친악이 갑자기 나타나서 주장했던 것은 이겁니다.

  ‘친부모인 우리에게 법정 대리인 자격이 있으므로 상속인은 따로 후견인을 선임할 필요가 없다.

  개소리도 이런 개소리가 없지요. 왜인지 설명을 좀 해드리겠습니다. 저는 출생 직후 입양 기관을 통해 입양되었기 때문에 친양자 제도의 적용을 받아 친생부모 아니, 친악과의 친족 및 상속 관계는 입양 시에 모두 끊어졌습니다. 모든 권리는 양악에게로 넘어간 것입니다. 따라서 친악은 동일한 시기에 법정 대리권을 상실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쉽고 간단하게 말하자면, 엄연히 남남인 친악이 난데없이 나타나서 저의 상속 재산을 미성년자였던 제가 성년이 될 때까지 관리하겠다고 나선 겁니다. 진짜 미친놈들 아닙니까? 무슨 양아치 짓을 하려고 해도 대가리가 돌아가야 하지요. 나중에야 알았는데 그 작자들, 빚이 넘쳐흐르고 있었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제 앞에 다시 나타났었던 것입니다. 자식새끼 버린 놈들이 뭐 어디 가겠습니까.

  어쨌든 상황을 파악한 멍청한 친악이 그 뒤에는 따로 저에게 접근하려고 하더군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저를 만나고 싶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말하면서 말이지요.

  우리가 아니, 엄마 아빠가 다 설명할게. 우리 만나자. 꼭 만나고 싶어.

  뭐? 엄마? 아빠? 미친, 어딜 감히⋯⋯. 그때였습니다. 어딘가 멀리서부터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볼륨과 울림이 점점 커지면서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이내 그 목소리는 제 바로 앞에 다가섰고 곧장 제 온몸을 휘감았습니다. 어떤 목소리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 바로 이 목소리를 말하는 것이지요.

  당신은 이제 눈이 먼다.

  해줄 말이 생각나서였을까요? 저는 알겠다고 답했습니다. 그러고는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전화를 끊었지요. 어디 가보고 싶은 데가 있냐고 묻길래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대충 뭔가가 떠올랐고 진짜로 바다가 보고 싶기도 했거든요. 친악은 멋진 바다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자고 들뜬 목소리로 말하면서 토요일 오전 열 시까지 집 앞으로 데리러 가겠다고 덧붙였습니다.

  친악과 제가 향한 곳은 동해의 한 해안 도시였습니다. 친악은 부모 역할극준비를 제대로 한 것 같더군요. ‘단발성 행사인 게 제 눈에는 너무 잘 보였지만요. 친악은 작은 항구 끝 해안가에 있어 바로 앞으로 바다가 보이는 호텔을 예약했고 항구에서 가장 큰 횟집에서 밥을 사주었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려나 했는데 저녁을 다 먹고 식당에서 나올 때까지도 특별한 말은 없더군요.

  저는 친악의 거짓 역할극에 녹아드는 척하면서 끊임없이 기회만 엿보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작자들을 만난 이유가 뭐겠습니까. 가족 상봉? 어처구니없는 말이지요. 맞습니다. 그 한마디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어쨌든 식당에서 나온 친악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밥도 먹었겠다 산책이라도 간단히 하고 들어가자고 말했습니다. 그때, 제 눈에 호텔 옆으로 길게 이어진 방파제가 들어왔지요. 저는 그곳을 가리켰습니다.

  그 항구에는 주말이어도 사람이 별로 없었고 해가 진 항구 끝 방파제에는 더더욱 없었습니다. 친악과 제가 방파제 중간쯤 갔을 때는 한 연인이 빠져나가면서 그곳엔 저와 그 둘만이 남게 되었지요. 친악 중에 친악녀가 헛기침을 여러 번 하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그러면서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둘이서 번갈아 가면서 계속하더군요. ⋯⋯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습니다. 그냥 개소리였던 것만 기억나네요. 더 이상 개소리를 듣기가 버거워졌을 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저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목소리였습니다.

  당신은 이제 눈이 먼다.

  목소리는 긴 방파제를 따라, 파도 소리를 따라, 바닷바람을 따라 저에게 왔습니다. 저는 얼마든지 그 목소리를 그저 제 몸속에 가두어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요. 제 앞에는 저를 분리수거하듯이 내다 버린 친악이 서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향해 마침내 말했습니다.

  당신은 그리고 당신도, 이제 눈이 먼다.

  왜 너무 많이 놀라면 목소리 자체가 아예 안 나오는 경우 있잖아요? 친악이 바로 그렇더군요. 각자가 따로따로 허공에 대고 양팔을 휘젓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가관이었지요. 그러다가⋯⋯.

  저는, 분명히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잡아 주지만 않았을 뿐이지요. 뭐가 좋고 반갑다고 몸에 손을 대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 비약이 너무 심하다고요?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부탁입니다. 제 손으로 직접 안 밀어 버린 것만 해도 저는 아량을 베풀었다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허공에다 양팔을 휘젓기만 하던 친악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기 시작하더니 점점 방파제 가장자리로 다가가는 것이었습니다. 가장자리 너머에는 바로 바다가 접해 있지는 않았지만 그 방파제 하면 생각나는 콘크리트 구조물, 테트라⋯⋯ 아무튼 그것들이 잔뜩 있었지요. 친악은 그냥, 허우적대다가 구조물 사이로 빠져 버린 겁니다. 말씀드렸듯이 저는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고는 얼마 시간이 지난 뒤 119에 신고를 했습니다.

  갑자기 부모님이 방파제 밑으로⋯⋯ 빨리 와 주세요.

  그런데 말이지요. 이 얼마나 의심에서 벗어나기 힘든 상황입니까. 말이야 등대 사진 찍으려고 부모님 뒤에서 떨어져서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라고 하긴 했지만 양악과 애새끼 관련 사건도 있었고 해서 제가 용의선상에서 완벽히 배제되기에는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었지요.

  그런데 그것이 발견된 겁니다. 친악의 유서가요. 이 답 없는 빚쟁이들은 언제고 죽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것들의 유서로 저는 또 살아남았습니다. ‘범죄와 전혀 관련이 없고 삶의 큰 우여곡절을 두 번이나 겪은 그저 불쌍하기만 한 청소년으로서 말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양악과 애새끼가 저세상 갔을 때도 잠깐 살펴볼까요? 그때도 의심을 받을 가능성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블랙박스가 완전히 작살이 난 것 아니겠습니까? 양악과 무엇보다 제가 한 말이 그대로 담겨 있었던 그것이 말이지요.

  아무튼 제가 찾아갔었던 변호사님이 양악과 애새끼 일이 있고 난 뒤에 처리를 잘 도와주셨던 것처럼 친악 일이 있고 난 뒤에도 잘 도와주셨습니다. 변호사님은 저에게는 그저 의인이시지요. 그들은 그저 악인일 뿐이고요.

 

  잠깐. 물 좀 마시겠습니다. 정말 오래간만에 긴 이야기를 하니 목이 타는군요.

  저기, 저만 마신다고 서운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이야기가 끝난 뒤에 필요한 건 모두 다 드릴 거거든요. 물과 그리고 여러 가지⋯⋯. 나중에 만져 보시면 알 겁니다.

  그나저나 이 적막의 바다는 마음에 드십니까? 저는 참으로 좋아합니다. 일단 인간들 목소리가 안 들리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좋아하는 이유는 충분하겠군요.

  아, 그 아까 제가 말씀드린 거 있잖아요. 초등학생. 그거 농담 아니고 진짜 할 겁니다. 오늘을 기점으로 저는 새로운 인생을 살 테니까 그 정도 일은 일도 아니겠지요? 그러니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어느 한 지역을 선정해서 그 지역에 위치한 초등학교를 하나 선택합니다. 학년은 삼사 학년 정도면 될 것 같고요. 그다음 해당 학년의 반을 하나 정하고 그 반의 학급 명단을 확보합니다. 명단 중에서 제일 비싼 집에 사는 학생 한 명을 찾습니다. 그런 뒤에 다음날 이른 아침 그 집 근처에서 기다려서 실제로 그 집에 살고 있는지, 등굣길을 뒤따라가 그 학교 학생이 맞는지 확인 또 확인합니다. 그러고는 수업이 마칠 때쯤까지 커피 한잔하면서 쉽니다. 모름지기 어떤 일을 하든지 여유가 생명 아니겠습니까. 그다음 하교 시간보다 조금 앞서게 학교 근처로 가서 기다립니다. 이제 우리 귀한 학생의 하굣길을 따라나섭니다. 그때까지 조금씩 들리던 그 목소리를 몸에 온전히 담습니다. 언젠가 말을 걸 기회는 한 번은 생길 겁니다. 저를 보십시오. 어디 이게 나쁜 어른 상입니까? 그냥 뭐지 하고 저를 쳐다볼 겁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말할 것이지요.

  넌 이제 눈이 멀 거야.

  그 뒤부터 계속 지켜볼 겁니다. 부모가 자식새끼를 어떻게 하는지를. 또한 즐길 겁니다. ‘이 가면을 벗는 모습을 보면서.

 

  자, 이제 마침내 이야기의 막바지에 다다랐습니다. 조금 말이 길어진 것 같지만 뭐 어떻습니까. 일몰 구경도 잘 하셨잖아요. 맞지요?

  아무튼 저는 그렇게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임무를 마쳤습니다. 중요하면서도 응당히 해야 할 일이었지요. 후회요? 전혀 안 합니다. 저는 그 뒤로 얼마나 홀가분하게 지냈는지 모릅니다. 그 왜,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굉장히 진부한 표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십여 년이 지난 이때에. 그저 평범하게 지내려 노력하고 있었던 저에게.

  ‘당신이 나타난 겁니다. ‘트리거인 바로 당신이 말이지요.

  말씀드렸듯이 저는 할 일을 끝내고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마주 앉은 당신을 보고 말았습니다. 당신을 가리고 있던 사람이 다음 역에 내리는지 문 쪽으로 비켜섰을 때 그때, 저는 당신을 보고 말았습니다.

  처음에 당신은 분명 양악남의 얼굴을 빼닮아 있었습니다. ‘그 혐오하는 눈빛과 똑같은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수많은 감정이 휘몰아쳐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순간, 당신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양악녀의 얼굴과 흡사하게 변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명백히 똑같지는 않았습니다. 당신이 가졌던 고유의 얼굴은 바탕에 깔려 있었거든요. 당신은 저를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하는 듯했습니다.

  은성아. 은성아. 엄마한테 올래? 이리 와, 어서.

  저는 눈을 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호흡을 시도했습니다. 겨우 한 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으면서 다시 눈을 뜨자 이번에 당신은 친악남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순간적으로 친악녀의 얼굴로 바뀌더니 그때부터는 친악남과 친악녀의 얼굴이 계속 번갈아 가며 나타났습니다. 각각의 얼굴의 반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뒤늦게 제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저를 붙잡으며 괜찮냐고 묻고 있는 것을 알았지요. 그때 맞은편에서 네 가지 얼굴의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걱정스러운 눈빛만 보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깨달았지요. 그것은 가짜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 즉시, 당신의 뒤에 있던 유리창에서 바깥 풍경 대신 제 역겨운 지난날들의 시선이 장면 장면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잠시 뒤부터는 혼란에 빠진 사람들이 허우적거리는 장면들이 나타났다 사라져 갔습니다. 무엇보다 기분이 참으로 이상했지요. 이것은 대체 어떤 감정인가 싶었습니다.

  그 답은 굳이 애써서 찾으려고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목소리가 점점 저에게, 십여 년 이상의 공백을 깨고 다가오고 있었거든요. 목소리는 곧 열차 객실을 가득 채울 정도로 커졌습니다.

  당신은 이제 눈이 먼다.

  저는 그때 얼마든지 십여 년 만에 저를 깨우고 각성시킨 당신에게 목소리를 전해 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잠깐 주위를 살피니 정신이 바짝 들더군요. 객실 안에 저희만 있었던 게 아니잖아요. 그렇지요? 그 전에 혼란에 빠진 사람들의 장면을 보긴 했지만 뭘 하든 뭐가 되든 기초를 잘 쌓고 스텝 바이 스텝으로 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생각이 그 순간, 들었습니다.

  아마도 모르셨겠지만 그날 저는 당신의 뒤를 쫓아갔습니다. 첫 추적이라 제법 어설펐을 텐데 어쩜 그렇게 부주의하시던지요. 저는 저를 각성시킨 당신에게 제일 먼저 물론, 순수하게 맨 처음은 아니지만요. 어쨌든 당신에게 제일 먼저 목소리를 전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두 눈이 멀어 다시는 저를 알아보거나 찾아올 수 없도록 말이지요.

  그렇게 저는 당신의 거주지 정보를 통해 당신의 신상을 파악했고 적절한 시기와 장소를 고민했습니다. 시기가 너무 늘어지면 안 될 것 같아서 빠듯하게 정했더니 장소 찾기가 좀 힘들었는데 말씀드렸듯이 개인적으로는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이야기 전개가 조금 부자연스러운 듯도 하지만⋯⋯. , 그래서 트리거인 당신이 아주 중요하고 기념비적인 맨 첫 번째인 것입니다. ‘초등학생은 엄연히 당신 다음입니다. 이것들을 끝내고 그러니까, 기초를 잘 닦고 저는 다시 생각에 잠기겠지요.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의 장면들을 다시금 떠올리면서. 어떤 단계를 밟으면서 앞으로 나아갈지를. ‘클로저(Closer)’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고서. 하하. 멋진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말로 하니까 쑥스럽네요.

  아니, 왜 눈물을 흘리고 그러십니까. 제가 살인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당신의 그 두 눈만, 오로지 그 두 눈만 멀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렸듯이 필요한 건 다 드릴 건데 여기 가방 보이시지요? 나중에 저기 앞에 두고 가겠습니다. 이 안에는 칼도 있고, 물도 있고, 경량 점퍼도 있고⋯⋯ 아무튼 완전한 생존 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서해 어딘가의 한 섬에서 가뿐히빠져나갈 수 있게 도와주는 아주 귀한 것이지요.

  혹시 그렇게 해서 섬에서 나오실 수 있다면,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경찰에 신고를 하든 저에게 복수를 하든 원하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저 그렇게 잔인한 사람 아닙니다. 솔직히 그렇지 않나요?

 

  지금까지 긴 이야기를 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부디 너무 억울해하지 마시길⋯⋯ 저도 이제 당신 때문에 새롭지만 낯선 인생을 살아가게 됐으니까요.

  쓸데없이 말이 더 길어지기 전에 마지막 한마디만 남기고 저는 이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사실, 지금 들리는 목소리도 여태껏 그랬듯이 반말인데 지금 당신한테는 왠지 제 의지대로 존댓말로 바꾸고 싶어졌어요. 아니다. 그냥⋯⋯ 앞으로는 계속 이렇게 예의 바르게, 격식 있게 말해야겠습니다.

 

  당신은 이제 눈이 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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