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아버지의 시간

2014.02.02 23:5702.02

 

 

“성외 소식입니다. 월면 거주지 아리스타쿠스의 인종폭동이 사그러들지 않고 있는 가운데 루나정부는 경찰력을 추가 투입해서 아리스타쿠스의 시위대를 구획별로 분리 진압할 것임을 천명했습니다. 한편 인근에 위치한 헤로도투스 크레이터의 시민들 역시 이 폭동의 여파가 미치지 않을까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다음 소식입니다. 성간 항행 프로젝트 타키온계획에 투입되었던 1차 건설대가 오늘 임무를 마치고 최장 15광년의 항해에서……”

 

앤드류는 화상모니터가 켜져 있는 거실을 빠져 나와 창문을 열고 테라스로 몸을 옮겼다. 케이프 항 멀리 건너편으로 공군기지가 눈에 들어왔다. 시야는 좋았고, 날씨는 화창했다. 잔물결 하나 없는 대서양의 푸른색이 시원 한 바람과 함께 앤드류에게 밀려들어왔다. 한참동안 사내는 푸른 하늘과 더 푸른 바다와 그 위를 오가는 요트들을 바라보았다. 며칠 간 내린 비 때문에 즐길 수 없었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제기랄.

뜬금없는 욕이 찌푸린 얼굴에서 터져나왔다. 앤드류는 반사적으로 코를 훌쩍이고는 다시 송신모듈을 꺼내서 들어온 문자를 확인 했다. 아침에만 수십번을 들여다 본 것 같았다. 하지만 문자는 새로 오지 않고 있었다.

 

‘아리스타쿠스 건으로 임무변경 철회되었음. 미안하네 C.

 

어젯밤에 들어온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앤드류는 눈을 들고 희미하게 대낮의 하늘에 모습을 드러낸 달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망할 것들. 폭동이라니. 페이드를 통해 어제 이미 충분한 사안을 전달 받은 뒤였지만 저절로 이가 악물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건설 엔지니어가 현재 지원할 수 있는 인원배당은 모두 끝난 지 오래였다. 그리고 자신이 갈 수 있는 선택지를 바꿀 수 있는 기회는 이번 한 번뿐이었다는 것도 앤드류는 익히 알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들! 인종차별이 문제란 말인가? 너희들은 기압벽과 크레이터 사이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잖아. 게다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고향별도 있고 말이다. 달 옆에 보이는 희미한 육각형이 새삼스레 앤드류의 시선을 끌었다.

 

 

“미안해 앤드류,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이번에 서류를 겨우 빼 내서 들어간 건데 말이지. 그저께부터 아리스타쿠스의 형편이 말이 아니야. 추가 돔 건설확장은 아예 물 건너 간 셈이야. 이미 크레이터 자치회에서 확장 반대를 공약으로 민심을 달래는 중이야.

 

“지금 그게 말이 돼? 이미 연방의 허가까지 난 상황인데.

 

“앤드류, 이번 일은 인종폭동이라기보다는 님비(NIMBY)현상에 가까워. 자신들의 구획이 건설로 일시 폐쇄되는 것을 원하는 월면주민은 아무도 없어. 그리고 선거철이 바로 내년이야. 지금 와서 어떻게 할 수는 없다고.

 

“…코니, 나 말고 존을 좀 생각해 줘. 난 사실 그리 가도 괜찮아. 하지만 지금 이렇게 되면 존은 어떻게 되라고?

 

“로라에게 연락을 다시 해 보는 건 어때?

 

“코니! 당신도 잘 알잖아!

 

어젯밤에 나눈 대화는 결국 이 더러운 놈 어쩌고라는 육두문자로 끝나버렸지만 그게 치기어린 짓이었다는 건 앤드류도 알고 있었다. 코니 페이드는 자신의 맡은 일을 충실히 했을 뿐이었고, 앤드류 자신에게도 의리를 지킨 셈이었다. 사실, 그만큼 자신의 음양으로 챙겨준 상관은 만나기 힘들었다. 그리고 존에게도 그녀는 상상 이상의 친절을 베풀어 주었으니.

 

“아빠, 출근 안 해요?

 

인상을 쓰고 있던 앤드류의 뒤에 어느 새 존이 서 있었다. 검은 머리의 꼬마는 다 큰 성인인 양 팔짱을 끼고 뚱하게 서 있는 아버지를 감시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앤드류는 재빨리 인상을 풀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비번이야. 코니가 연락할거다. 그나저나 넌 학교 안 가니?

 

“가정학습이예요. 코니가 왜요?

존은 착한 아이였지만, 자신이 알고 싶은 건 집요하게 물어보는 성격이었다. 앤드류는 커다란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기가 귀찮다는 듯이 앙탈을 부렸지만 그건 부자간에 통하는 어리광의 일종이었고, 그제서야 앤드류는 입에 씩 하고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다.

 

“뭔가 다른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존이 앤드류의 손을 두 손으로 치우고 아빠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소년의 눈은 반짝거리고 있었다. 앞니빠진 잇몸을 드러내고 소년은 환하게 웃어보였다.

 

“우주로 가요?

 

“아마도.

 

“나도?

 

“아니. 아직 모르겠는데.

소년의 웃던 얼굴이 삽시간에 쪼그라들자 앤드류의 미소도 달콤함에서 씁쓸함으로 바뀌고 있었다. 아리스타쿠스라면 같이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어떤 결정이 내려올 지 알 수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차선책, Plan-B는 원하지 않았다. 그 일은 존의 존재가 아예 고려되지 않는 부류였다.

 

갑자기 앤드류의 손에 들려있던 송신모듈로 전화가 들어왔다. 앤드류는 자기도 모르게 존을바라봤고, 존 역시 앤드류를 보고는 입을 막고 가만히 서 있었다. 아이는 아빠가 전화를 받으면서 뭔가 심각한 말투로 짧게 이야기하는 것과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내 앤드류가 전화를 끊고 아들을 쳐다보자 존은 고개를 쭉 빼고 아버지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코니가 뭐라고 했어요?

 

“코니가 아니구나. 공군기지에서 오라는구나.

 

“공군기지? 우주로 가는 거예요?

 

“글쎄다. 일단은 이야기를 들어봐야지.

앤드류는 아들과 함께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쨌건, 아빠는 가 봐야겠다. 무슨 일인지는 들어보면 알겠지.

 

“우주로 가는 걸 거야!

아들이 주먹을 들어보이며 눈을 찡그리자, 앤드류 역시 주먹을 들어올려 아들의 주먹에 갖다 대었다. 아들에게 미소를 보이고 떠났다가 우울한 얼굴로 돌아오지 않기만을 속으로 바라면서.

 

 

(2)

 

“앤드류 대건 성 중위.

 

“예.

공군기지에서 그가 마주한 사람은 항공공병감이었다. 이외의 계급인 사람이 그를 불러낸 것도 놀라웠지만 그가 자신의 근무 이관신청서를 보면서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앤드류에게 생소한 김장감을 불어넣고 있었다. 마치 자신에 대한 욕지거리라도 신청서에 써 있는지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기면서 서류를 보던 항공공병감은 마침내 서류를 내려놓고는 앤드류를 쳐다보았다.

 

“아리스타쿠스로 근무지 변경신청을 냈었나.

 

“예,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이 따듯한 플로리다에서 잘 놀아놓고 정작 원거리 업무가 시작되니까 달로 파견지를 변경해 달라고?

항공공병감은 굳이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이미 지원서를 쓸 때부터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코니를 거치지 않고 직접 인사결정권자와 독대해서 말을 하려니 앤드류는 입이 바싹 말랐다. 최대한 논리적으로 말을 하려고 했지만 몇 번이고 말을 더듬었다.

 

“시……실제로 원거리 우주원정을 가 본 적도 없을 뿐더러, 제게는 부양해야 할 가, 가족이 있습니다.

 

“자네에게 들어간 예산이 얼마인지 생각이나 해 보고 하는 소리인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매섭게 노려보는 공병감의 목소리는 사냥개의 그르렁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광속(亞光速) 항해훈련을 받은 건설장교가 몇이나 될 거라고 생각하나? 우리가 왜 자네에게 공짜로 관사를 주고 지금까지 생활비를 준다고 생각하지? 그냥 자네가 유람삼아 우주를 떠 다니라고 대 주는 돈이 아니란 말일세! 알고 있나!

 

“예! 공병감님.

앤드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상방으로 들고 차려자세를 취했다. 공병감의 신랄한 힐난은 군기와 관계없이 계속 매섭게 들이쳤다.

 

“매 분기 받는 그 정도 훈련이면 이미 태양계를 몇 백번은 돌았을거다! 그리고 자네는 그렇게 살라고 점 찍힌 사나이야! 그리고 자네 아들은……”

갑자기 흥분하던 공병감의 혀가 오히려 더듬거리자 앤드류는 슬쩍 곁눈질로 공병감을 쳐다봤다. 공병감은 입을 닫더니 묵묵하게 앤드류의 서류를 보면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흰 머리가 듬성듬성 난 대머리를 손으로 긁던 상관은 아까와는 전혀 다른 어조로 혼잣말처럼 앤드류에게 말을 걸었다.

 

“후, 젠장. 나도 애가 있으니 뭣 때문에 귀관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지 않네. 아광속 항해……언젠가는 수면위로 떠오를 문제지. 하지만 지금 우리에겐 전해진 옵션이 별로 없어. 자넨 희귀자원이고, 개인적인 호불호를 충분하게 반영해 줄만한 여유가 지금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단 말이야.

 

“공병감님.

앤드류가 자신을 얻어 뭔가 한마디를 하려 하자 공병감은 한손으론 여전히 머리를 감싸쥐고는 다른 손을 들어서 앤드류의 말을 막았다. 서류상으로도 충분히 질린 꼴을 봤다는 듯한 몸짓이었다.

 

“이 문제는 어차피 두 달 정도 남았지. 아리스타쿠스는 물 건너 갔으니 자네가 시리우스 성계로 갈 건 확실하네만 나중에 이야기하지. 사실, 오늘 자넬 부른 건 이 문제에 대해서 가장 적합한 조언자를 불렀기 때문이네.

앤드류는 절망감이 공병감의 책상에서 자신에게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체험하는 중이었다. 이미 윗선에서 발령지를 정해 놓았다면 자신의 지금 발언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 이런 상황에 무슨 조언이란 말인가? 탁상공론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과 존의 인생이 풍비박산 나는 꼴을 지금 앤드류는 목도하는 중이었다. 가슴 속의 분노가 목구멍으로 슬슬 밀려 나오는 중이었다. 주먹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공병감님. 지금 이 문제는 따로 조언자가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판단됩니다.

 

“아니, 내 생각으로는 자네 상황에 대해 가장 적합한 조언을 해 줄 것 같네.

 

“어떤 엿 같은 놈도 내 삶에 대해 조언을 해 줄 수 없단 말이오!

공병감은 슬쩍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별다른 모욕감 같은 것이 들어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공병감의 입이 조용히 열렸다.

 

“프랜시스 성, 그가 조언을 해 줘도 엿 같을까?

앤드류의 가슴속 불꽃이 삽시간에 사그라들었다.

 

----------

 

코니가 따듯한 커피를 한 잔 앤드류에게 건네 주었다. 앤드류는 고맙다는 말을 건네며 창문을 통해 비행기들과 우주선이 내리는 케이프 케너베럴의 활주로와 발사대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앤드류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건성이라는 것을 코니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앤드류의 눈은 초점을 잃은 채로 멍하니 하늘 한 구석에 고정된 채였다. 코니는 그 곳을 슬쩍 바라보았다. 여전히 떠 있는 낮달과 그 옆에 있는 육각형의 선이었다. 코니는 테이블에 걸쳐 앉았고 늘씬한 허리과 육감적인 허벅지가 앤드류의 앞에 들어오게 만들었다. 하지만 앤드류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조차 없었다.

 

“앤디, 기분이 어때?

코니는 슬쩍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앤드류는 무표정한 표정으로 커피만을 훌쩍거리고 있었다.

 

“아리스타쿠스 건은 그렇더라도……오늘은 잊지 못할 뉴스가 있는 날이네.

 

“아,

건성인 앤드류의 대답에 코니는 슬쩍 쓴웃음을 지었다. 커피색 피부의 미인은 애써서 자신의 후임병에게 닥친 기이한 상황을 이해시키려는 중이었다.

 

“잊고 있었던 아버지 아니야? 다시 살아서 뵙게 되니까 얼마나 좋아?

 

“무덤에서 튀어나온 것 같아.

 

“앤디!

그제서야 앤드류의 초점이 코니에게 향했다.

“이건 축하할 일이 아니야. 내 저주의 시작이지. 그리고 그게 실제가 되어서 나와 존 앞에 떨어진거야.

 

“앤디 무슨 말을……”

 

“난 아버지 얼굴이 가물가물해, 일곱살인가 여덟 살인가 되었을 때 나가셨어. 어머니가 나를 혼자 키웠지. 좀 더 자라니까 아버지는 영웅이라고 하더군. 저 구멍으로 시리우스별을 향해 갔다고 말이야. 망할놈의 타키온 계획 말이지.

 앤드류의 눈이 가리키는 것은 달이 아니라 달 옆의 육각형이었다. 타키온 게이트, 입자를 고정해서 아광속으로 우주선을 밀어 넣는 광속터널. 그 터널은 현재 시리우스 별까지 연결 구간이 형성되어 있었다. 타키온 터널은 계속 ‘노선확장을 시도하는 중이었고 그 구간의 건설은 우주항공국의 건설장교들이 맡아서 하는 중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들어갔을 때였어. 갑자기 담임이 나를 항공운행과로 밀어넣더군. 난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는데 말이야.

코니는 앤드류의 말을 묵묵히 들으면서 커피를 흔들었다. 앤드류는 자신의 후임이긴 해도 나이는 두 살이 많았다. 늘 과묵하던 건설장교가 이렇게 많은 말을 지껄이는 걸 듣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하지만 지금 앤드류의 말을 끊으면 이 삼십 대의 홀아비는 스트레스 때문에 신경 어딘가가 나가버릴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임이 그 때 처음 말해줬어. 나는 내 아버지를 따라야 한다고. 그때서야 내가 무료로 학교를 다니고 있고, 생활비를 아버지가 부쳐주는 것이 아니라 국고에서 지원된다는 것을 알았지. 뭐, 아버지가 멀리서 부쳐준다고 하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군. 어쨌거나 난 아버지에 이어 건설장교가 되어서 아광속 항해를 해야 한다고 하더란 말이지. 엘할라스-기빈 법에 의해서 말이야.

범세계적 사명을 띄고 지구 외 행성으로 가는 인종에 대한 상대론적 이론과 문화 간극을 줄이기 위한 특별법, 가칭 엘할라스-기빈 법. 코니는 케이블에서 내려와 앤드류의 뺨을 만졌다. 앤드류의 눈에 그제서야 초점이 돌아왔다. 코니의 검은 눈동자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앤디, 몰랐던 거 아니잖아. 그렇지?

앤디는 말없이 코니를 쳐다보았다.

 

“언젠가 돌아오실 거라는 것, 알았잖아. 그렇지?

 

“…응.

겨우 내뱉는 긍정의 소리, 코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자기도 힘들겠지만 지금 다시 돌아온 분도 결코 쉽지 않아. 무슨 말인지 알고 있는거지? 앤디. 아버지를 다시 만나야 해. 그래야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말씀드릴 수 있어. 존을 보여드려.

앤드류의 고개도 그제서야 끄덕거리기 시작했다. 코니는 슬며시 일어서며 앤드류의 핏기없는 입술에 입을 맞췄다. 끄응하는 신음소리가 앤드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코니는 환하게 웃으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 이제 내려가서 모셔 와. 당신 집으로 가 있어. 지금쯤이면 기압적응이 되셨을 거야.

 

 

(3)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앤드류는 아버지와 말을 거의 섞지 않았다. 프랜시스 역시 아들과 말을 섞으려 하지 않았다. 흘끗 앤드류는 운전을 하면서 조수석에 앉은 프랜시스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기나 긴 우주여행을 막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고 젊어 보였다. 아니, 너무나도 젊어보였다. 프랜시스 성의 나이는 올해 예순 둘이었다. 하지만 육안으로 보이는 프랜시스의 나이는 앤드류와 그리 큰 차이가 나 보이지 않았다.

시간의 간극이 만들어 낸 단절보다 시간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부자의 유사한 용모가 오히려 대화를 앗아가고 있었다. 흘끗 앤드류를 쳐다 본 프랜시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별로 늙지 않은 것 같아서 어색하지?

 

“아, 그…….

 

“아광속으로 15광년, 현장에서 3년, 그리고 다시 아광속으로 귀환. 지구 시간 상으로야 삼십 오년의 세월이 지난 것은 맞아. 하지만……”

 

“그 정도는 알아요. 우주선에서는 시간이 더디게 갔겠죠.

 

“그래, 그거지. 너도 알잖아. 내 동료들도 지금 딱 내 상황이지.

 

아버지에게는 길어봤자 5년에서 2-3년이 더 흘렀을 것이다. 아광속 항해 중에는 수면으로 대부분을 보내고, 순번교대를 했어도 두 세 차례 외에는 없었을 테니. 앤드류는 운전에 집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오늘 아침부터 점심나절이 지난 지금까지 머릿속이 한 번도 정리되지가 않았다. 그나마 운전할 정신이라도 차리게 된 건 코니와의 짧은 대화 덕분이었다.

 

“그 흑인 장교. 멋지던데? 아는 사이야?

흘끗 앤드류는 아버지를 쳐다보았지만 프랜시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말을 이었다.

 

“쉽게 결혼할 타입은 아니던데, 매력적이긴 하더라고.

앤드류는 핸들을 꽉 잡고 무슨 대답을 해야 할 지 머릿속에서 대답을 선정하는 중이었다.

 

“코니는 제 상관입니다. 전 아들이 하나 있어요. 존이라고 지금 일곱 살이죠.

 

“아, 그렇지. 그래, 내가 떠났을 때 네 나이가 그랬을 거야. 부인은 집에 있니?

 

“아뇨. 별거 중이예요.

 

“아, 그래? 미안. 몰랐지 뭐냐.

 

“아뇨. 당연히 모르시는거죠. 그게……”

프랜시스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앤드류는 그나마 로라와의 관계를 프랜시스가 더 이상 채근하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쪽의 일은 깊게 생각하지 않는 유형의 남자일지도 몰랐다. 단순하게 아버지를 머릿속에서 정리하자 오히려 감정이 더 불편해졌다. 앤드류는 프랜시스의 머리를 흘끗 바라보았다. 백발이 된 아버지와 이런 대화를 했다면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되었을지도 몰랐다.

 

오랜만에 만난 대학교 선배와 섹스 이야기를 나누는 기분이군. 앤드류의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렀을 때, 이미 두 사람을 태운 전기차는 앤드류의 관사에 도착한 뒤였다.

 

“공군 관사는 예나 지금이나 성냥갑인 건 마찬가지네.

프랜시스의 투덜거림과 함께 두 사람이 타에서 내릴 때 위의 층계에서 쿠당탕 거리며 뭔가 굴러떨어지듯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머리가 작은 발과 동시에 차고로 불쑥 들어왔다.

“아빠! 우주로 가게 되었어요?

 

앤드류와 프랜시스는 거의 동시에 고개를 존에게로 돌렸고, 활짝 웃으면서 내려오던 존은 순간 꼭두각시처럼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춰선 채 멍하니 눈을 크게 뜨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앤드류는 자기도 모르게 심호흡을 했다.

 

“존, 할아버지 보고 싶어했지?

 

---------

 

 

앤드류의 우려와는 반대로, 프랜시스와 존은 곧 살가워졌다. 아버지와 용모 차가 별로 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존에게는 어색함보다는 당연한 것 같아보였다. 프랜시스 역시 웃음을 지어보이며 손자와 묘하게 죽이 잘 맞아보였다.

 

“할아버지는 그럼 시리우스에서 뭘 한 거죠?

 

“타키온 터널의 프레임을 만들었지. 지구로 따지면 터널을 공사하고 있었던 거야.

 

“멋진데!

 

“그래! 할아버지는 달부터 시리우스까지 붕붕붕 우주의 굴을 팠지! 멋지지? 우주의 다른 곳까지 뻗어나가서, 눈 깜짝할 사이에 다른 별까지 가게 만드는 거야.

 

“다른 별에 가면 뭘 하는데요?

 

“별을 개척하는 거지. 예전 탐험가들이 배를 타고 다녔던 것처럼.

존은 작은 눈을 번쩍번쩍 빛내며 주먹을 꽉 쥐었다.

 

“탐험! 좋아요! 할아버지 혼자 그걸 다 한 거예요?

프랜시스는 씩하니 웃음을 지어보였다. 앤드류와 똑 같은 웃음이었다.

 

“아니, 내 동료들이 있지. 핸더슨, 코플리. 젠센. 모두 같이 돌아왔어. 끝내주는 놈들이거든!

 

“다음에는 저도 가게 해 주세요! 우주!

 

“좋아! 내가 책임지고 보내주지! 먼저 네 아버지가 가고, 그 다음에 너도 가는거야!

 

“아버지. 먼 길을 오셨는데 좀 쉬시죠. 어차피 다음 주부터는 BOQ로 들어가신다면서요.

앤드류가 말을 끊자 프랜시스는 흘끗 아들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랜시스는 우주터니멀에서 받은 통신모듈을 앤드류에게 보여주었다.

 

“이걸 주더구나. 내 동료들에게 전화를 걸 수 있겠지? 아주 살가운 친구들이지. 내가 먼저 전화를 쓸 수 있다는 걸 보여줄 거야. 여전히 살렘 바(BAR)는 문을 열었나?

 

DNA코드를 아시면 바로 등록할 수 있어요. 살렘 바는 이제 해군 직영이예요.

 

“오, 젠장, 그 치들이 맥주에 바닷물이나 안 섞으면 좋겠는데. 이 날만을 기다렸단 말이지!

 

프랜시스는 아들에게 한쪽 눈을 찡긋거리더니 통신모듈을 다시 품에 넣고 천천히 바다 쪽의 테라스로 발을 옮겼다. 존은 앤드류를 보더니 히죽 웃어보였다. 앤드류도 존을 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존, 할아버지가 와서 좋아?

 

“응! 우주에서 왔잖아! 아빠도 곧 가고 나도 가고!

앤드류의 입에서 서서히 미소가 지워졌다. 존은 멀뚱히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고, 앤드류의 통신모듈이 깜박거리며 새로운 문자를 토해냈다. 입체로 반짝이는 문자열이 거실의 모니터를 통해 송출되고 있었다.

 

-         시리우스행 2번대 다음 달에 출발예정. 최선을 다해 방책을 찾겠음. C

 

거실의 문자와 테라스에서 동료들에게 전화를 걸면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동시에 눈에 들어왔다. 앤드류는 자신의 머리를 뒤로 쓸어 올렸다. 머릿속에 얽혀 있는 사슬을 풀어 줄 열쇠는 아무래도 찾지 못할 성 싶었다. 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앤드류는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신음을 낮게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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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어때?

코니의 말에 앤드류는 반사적으로 눈썹을 찌푸렸다.   

 

“매일 술판을 벌이느라 정신 없어. 무슨 야전군 캠프인 줄 알아.

 

“앤디, 너무 까칠하게 반응하지 마. 그 분들은 삼십 년을 떠나 있었어.

 

“엿이나 먹으라고 해.

코니의 눈이 찡그려지더니 입으로 손을 막았다. 앤드류는 고개를 저어서 손가락을 뿌리치고 계속 말을 이었다.

 

“실제적으로 아버지가 우주에서 보낸 시간은 오 년쯤이야. 내가 공군에 입대해서 달에 왕복한 횟수만 해도 그 정도는 넘어. 그리고는 어느 날 턱 하니 나타나서 아버지 행세라니! 말이 좋아 아버지지 하는 짓거리 보면...

 

“앤디!

코니의 화난 눈동자를 보자 앤드류는 알겠다는 듯 손을 흔들고는 창 바깥을 쳐다보았다. 다시 타키온 게이트로 출발하게 될 우주선의 연료탱크 부분이 정비창으로 거대한 화물 캐터필러에 실려 이동 중이었다. 앤드류의 표정은 금새 어두워졌다.

 

“코니, 공병감에게서 다른 말 있었어?

 

“미안해.

 

“아냐. 자기가 미안해 할 건 아니지. 원래 내 임무니까.

앤드류는 우주선 격납고 너머의 하늘을 쳐다보았다. 푸른 바다 위로 보이는 저녁 달 너머로 번쩍이는 게이트의 조명들이 환하게 드러났다. 마치 달이 여기 있소 라고 외치는 네온사인처럼 보였다.

 

“로라가 왜 떠나갔냐고 묻더군. 아버지가.

 

“뭐라고 했어?

 

“그냥 있는 대로 말했지. 아버지는 어깨만 한번 끄덕였을 뿐이야. 이해 못하겠다던가?

 

“그럴 수도 있지.

앤드류가 고개를 훽 돌려서 코니를 노려보았다.

 

“자기 남편이 언젠가는 멀리 떠나서 살아생전에 못 볼 거라는 사실. 자기 아들도 똑 같은 운명이 될 거라는 걸 아는 여자가 제정신으로 남아 있겠어? 아버지는 이해 못하겠지. 엘할라스-기빈 법이 생기자마자 나가셨으니까. 내 어머니는……”

앤드류는 손을 죽 펴고 자신의 감정이 손바닥에 보인다는 듯 한참을 보더니 흥분을 줄였다.

 

“내 어머니가 특이한 분이셨던 거야.

 

“그나저나 존은 어떻게 할 거야?

코니의 물음에 앤드류의 표정은 더 울적해졌다. 마치 잊고 있던 장례식을 새삼 기억해 낸 듯한 표정이었다.

 

“방법이 없는 거지? 공병감도 그렇고?

 

“당신이 프랜시스 성 중령이 지금까지 맡아서 일했던 시리우스-베타 구간의 공사를 맡아서 하게 될 거야. 실제적인 건 로봇모듈이 책임을 질 테니까 안전상의 위험은 없어. 수당이나 승진도 확실한 보장이 된다고 했고 존은……방법이 없으면 유아사관학교로 가야겠지.

 

“당신은? 코니, 당신은 가능하지 않아?

 

“후견인은 될 수 있지만 동거인은 규정상 불가능해. 혈연관계라면 몰라도 말이야. 알잖아.

앤드류는 코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다. 매일 반복되는 훈련은 오히려 강도가 줄어들었고 정식으로 출국 허가서도 떨어질 예정이었다. 한 달 뒤, 앤드류는 창 밖의 거대한 철기둥을 타고 달 옆의 터널로 반짝 하며 사라질 것이다. 다시는 코니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존의 장성한 얼굴이 어느 순간 나타나겠지. 나와 아버지처럼.

 순간, 앤드류의 얼굴이 번쩍 들렸다. 코니는 화들짝 놀라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앤드류가 무엇을 생각하는 지 깨달았다. 앤드류의 입이 먼저 열렸다.

 

“혈연관계?

 

 

4)   

BOQ의 도어락은 해제되어 있었다. 애초에 잠그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앤드류가 맨 처음 BOQ에 들어갔을 때 맡은 냄새는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쉰내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소파에 앉았을 때 본 것은 접시하나 놓을 자리가 없이 탁자에 가득 쌓아 올린 각국의 맥주들이었다. 마치 사람이 아니라 효모와 알코올로 기동되는 로봇인 양 보였다.

 

“여기까지 웬 일이냐?

프랜시스는 슬쩍 웃고 있었다. 제정신일 때 나오는 미소가 아니라는 건 앤드류가 더 잘 알고 있었다. 프랜시스와 앤드류는 거울처럼 같은 얼굴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취한 얼굴은 더 불쾌했다.

“아버지에게 할 말이 있어요.

 

“그래, 뭔데?

 

“제가 이번에 시리우스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대신해서 말이죠.

프랜시스의 슬쩍 풀어진 눈이 앤드류의 눈을 쳐다보았다. 앤드류는 자신이 저런 식으로 쳐다보았을 때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기분이 나빴을까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프랜시스의 입이 열렸다.

 

“그래서 기분이 나빠? 내 대신 가게 되어서?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딱 그 말툰데? 가족의 일을 계승하는 게 싫어? 우주공병대라는 건 그럴 가치가 있는 직업이라고.

앤드류의 입이 찌그러졌다. 맥주캔을 엄지와 검지로 흔드는 프랜시스의 머리 위에 우주정거장에서 찍은 무중력 상태의 사진들이 있었다. 이번에 같이 내려온 전우들인 양 싶었다. 모두 앤드류의 나이또래였고 겁 없고, 자신만만한 얼굴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걱정이 없어보였고 근심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사진 아래쪽에 맥주를 까닥거리는 아버지의 얼굴도 다르지 않았다.

 

“네 이야기를 들었어. 젠센이 알아냈더라고. 달로 임무지 변경 신청을 냈다며? 아니, 우주 공병이 타키온 터널 같은 곳으로 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 젊은 시절에는 뭐든 부딪혀서 이겨내야 하는 거야. 그걸 이겨내지 못하면 평생 쉬운 일만 골라 다니는 법이라고!

  

“달 문제는 어차피 끝난 일이예요. 난 존을 데리고 살아야 했다고요!

참을성 있게 대답하는 앤드류의 얼굴을 보던 프랜시스의 눈꼬리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난 네가 없었냐? 내 친구들도 마찬가지야. 코플리도 아이가 있었고 젠센은 신혼이었어! 사내에겐 가정과 사회 중에 사회가 우선이야. 진급누락이라도 되어 봐야 직성이 풀리겠냐? 왜 네 나이에 그걸 이해 못하지?

 

“아버지는 저하고 대체 얼마나 나이가 차이 난다고 그러는 거죠?

갑자기 욱하고 터져 나오는 앤드류의 말에 프랜시스의 인상이 확 뒤집혔다.

 

“뭐?

 

“남의 인생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면서 갑자기 튀어나와 설교냐고!

프랜시스의 눈이 퉁방울처럼 커졌다.

 

“이거 아주 엉망으로 컸구먼?

 

“네가 키워준 줄 알아? 난 엄마하고 같이 살았다고! 대체 당신이 내게 뭘 해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같은 자세로 주먹을 잡고 상대방의 얼굴을 향해 체중을 싣기 직전이었다. 그 때, 방 안의 화면이 크게 점멸하더니 동시에 프랜시스의 통신모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공군본부]라는 시그널이 화면 가득 크게 비추자 앤드류와 프랜시스의 동작은 동시에 멈추었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프랜시스가 스위치를 넣자마자 피곤한 얼굴의 당직사령이 부자를 알아보고 경례를 올렸다.

 

“두 분께서 같이 계시는 줄 몰랐습니다.

 

“무슨 일인가 소위.

 

“지금 프랜시스 중령님을 모시고 오라는 명령입니다. 급합니다.

 

“사령부라면 이미 오후에 보고를 끝냈어. 난 아들과 할 말이 남아있는데.

소위의 표정이 당혹스럽게 바뀌었다.

 

“사령부가 아니라 헌병대입니다. 잠시 확인을 부탁드린다고 현장으로 모셔오라는군요.

프랜시스와 앤드류는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느 정도 진정된 앤드류가 고개를 끄덕이자 프랜시스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위에게 고개를 돌렸다.

 

“알았네. 지금 가 보도록 하지.

프랜시스는 앤드류를 쳐다 보지도 않은 채 서둘러 BOQ를 빠져나갔다. 아버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통신모듈도 다시 꺼지자, 앤드류는 풀썩 주저앉은 채 탁자에 놓인 맥주캔을 하나 아무렇게나 집었다. 아들은 크네 한숨을 쉬더니 입으로 맥주캔을 가져갔지만 남아 있는 건 한방울도 없었다. 사내는 맥주캔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고개를 숙였다. 조금 뒤 사내는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죽여 울기 시작했다.

 

 

(5)

 

제이슨 코플리 소령의 장례식은 우주공병뿐 아니라 근처의 해군본부와 공군의 관계자들도 참석한, 나름대로 격식있는 규모로 치러졌다. 매스컴이 그나마 크게 다루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앤드류는 흘끗 관 옆에 서 있는 정복차림의 핸더슨 소령과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며칠간 BOQ를 들어오지 않은 아버지는 수염이 까맣게 올라와 있었다. 면도를 하지 않고 어디서 뭐했는지조차 몰랐다는 생각이 들자 앤드류는 기분이 편치 않았다.

 

“자기도 있었군.

 

어느 새 공군 정복을 입은 코니가 옆에 서 있었다. 코니는 선그라스를 낀 채로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앤드류는 고개를 끄덕였다.

 

“코니, 이게 무슨 일이야? 나도 어저께 보고를 받고 온 거라고. 아버지에게는 먼저 전갈이 온 것 같았지만.

 

“코플리 소령은 자살했어. 우주항해용 마취캡슐을 보드카랑 같이 마셨지. 한 100광년은 가도 깨지 않을만한 양을 한꺼번에 먹었대나 봐.

 

“끔찍하군. 왜? 저 젊은 사람이.

앤드류는 ‘젊은’이라는 말을 자기가 내뱉으면서도 무척이나 어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앞에 서 있던 아버지의 입술이 굳게 닫히더니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눈을 가렸다.

 

“가족들이 모두 만나기를 거부했대.

 

“맙소사. 무슨 소리야?

 

“코플리는 딸만 둘이야. 두 사람은 이상혈청으로 공군 징집대상이 아니었어. 둘은 엘할라스-기빈 법의 대상자가 아니야. 지금 뉴욕과 시애틀에서 따로 살고 있어.

 

“오 이런, 세상에.

코니의 눈동자가 선그라스 뒤에서 앤드류의 놀라는 표정을 향했다.

 

“두 딸은 코플리 소령이 누군지도 몰랐대. 알고 싶지도 않다고 했던 모양이야.

앤드류는 건너편의 아버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앤드류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슬쩍 들었고, 프랜시스도 고개를 슬쩍 끄덕거렸다. 코니는 물끄러미 두 부자의 행동을 보더니 앤드류에게 은밀히 속삭였다.

 

“시리우스행 이륙이 더 당겨질지도 몰라.

 

“뭐?

 

“이번 사건으로 매스컴이 다시 들쑤시기 전에 이륙을 시도할 지도 모른다는 거지. 아리스타쿠스는 이제 소강기에 접어들었어. 우주 항공군에 대한 뉴스거리가 없는 상황인데 이런 식으로 빌미를 주기 싫은 거야. 아마 일주일 안쪽으로 당겨질 수도 있어.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그 때, 한 명의 사내가 두 사람의 사이로 불쑥 비집고 들어왔다. 앤드류와 코니가 뒤를 돌아보자 공군정복을 입은 사내가 두 사람을 보며 지친듯한 얼굴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깎지 않아 덥수룩한 턱수염의 사내는 코니를 돌아보았다.

“코니 페이드 대위, 미안하지만 내 아들을 잠깐 빌려가고 싶네. 가족문제라서 말이야. 괜찮겠지?

프랜시스였다.

 

----------

 

“미안하다. 술에 취해서 그렇게 말한 거야.

장례식은 파하고, 부자는 묘지에 남았다. 정복을 입은 두 사내는 마치 같은 벤치에 앉아 같은 자세로 다리를 꼰 채 하늘을 쳐다보았다.  마치 판토마임을 연기하는 두 명의 배우들 같았다. 입을 먼저 연 프랜시스의 말에 앤드류도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저도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까짓 거 잊어버리자. 뭐 대수라고.

 

“코플리 소령님 유가족은 안 왔군요.

 

“지 아비도 아니라는데 오겠냐. 엿이나 먹으라고 해.

 

“젠센 중령님은 어디 가셨죠?

 

“병원에 있어.

 

“예?

앤드류가 멍한 표정으로 프랜시스를 쳐다보자 프랜시스는 웃는지 화내는지 모를 표정으로 앤드류를 쳐다보았다.

 

“상담치료를 받는 중이야. 마누라가 이누이트 족 출신하고 결혼을 했대. 지금 북극에 가 있다는거야. 사실혼 관계가 너무 오래 되어서 젠센은 민법상 권리도 없다는데?

 

“언제부터 살았는데요?

 

“젠센이 우주선을 타자마자.

프랜시스가 앤드류를 보면서 피식 웃었고, 앤드류도 같이 웃었다. 내가 수염을 길렀다면 아버지도 아마 거울을 보는 기분이겠지? 앤드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프랜시스가 말을 이었다.

 

“넌 정말 나를 닮았구나.

 

“엄마도 그랬어요.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쳐다본 채 침묵을 지켰고, 먼저 고개를 돌린 쪽은 프랜시스였다. 말을 건 것은 앤드류가 먼저였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시는군요.

 

“응.

 

“왜요.

 

“…겁이 나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제가 열 두살 때였죠.

깊은 한숨이 프랜시스의 입에서 새어 나왔지만, 앤드류는 이외로 말이 편하게 나오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에 대한 부분을 이야기해 보는 것은 코니 외에는 프랜시스가 처음이었다.

 

“학교 기숙사에서 살았어요. 저는 공군 자산이라고 하더군요. 공군에 입대하고 나서야 다른 곳을 나갈 수 있었어요. 로라도 그 때 만났지만……지금은 존 밖에 없어요.

앤드류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

“…아버지하고요.

 

프랜시스는 멍하니 하늘을 쳐다봤고, 앤드류는 해야 할 말을 겨우 꺼냈다.

“아버지.

 

“응?

 

“존을 봐 주세요. 제가 다녀 올 때까지요. 이제 일주일 뒤면 출발이라고 했거든요.

 

“일주일 뒤? 그렇게나 빨리? 존은 알아?

 

“아직 말 하지 못했어요.

아버지와 아들은 말없이 같은 자세로 의자에 앉아 다시 하늘을 쳐다봤다. 곧 아들이 다시 아버지를 쳐다보았고, 아버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먼저 내민 것은 아들이었고, 아버지는 손을 마주잡았다. 얼핏 봐서는 형제의 교감이었다.

 

(6)

 

“앤디의 마지막 밤을 위해서!

프랜시스의 즐겁기 그지없어 보이는 얼굴과 덩달아 펀치를 들고 소리치는 아들 존의 모습을 보면서 앤드류는 이게 내일 모래면 영원히 못 볼 아들과 아버지를 위한 자리인가 의구심 마저 들었다. 코니의 웃는 얼굴마저 가증스러워 보였다. 어차피 부른 사람도 없었지만 코니와 프랜시스, 존이 기획했다는 ‘환송식은 앤드류의 가슴을 먹먹하면서도 쓸쓸하게 만들었다.

 

“내일 모래면 떠나는구나, 내 아들!

뭐가 그리도 좋은지 프랜시스는 웃고 있었다. 대신 가 줘서 좋습니까 아버지. 앤드류는 그 말이 목 울대까지 튀어나왔지만 존의 웃는 얼굴을 보자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손자의 보호자가 될 것이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할아버지는 굉장히 오랫동안 손자의 보호자가 되어 줄 것이다. 아버지만큼이나 오랫동안. 그 생각이 앤드류의 가슴을 그나마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코니, 당신은 우리 앤디가 올 때까지 기다려 주겠지?

 

“물론이죠!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된 다음에도 기다릴 거예요. 얼마나 좋아요! 그때는 영계를 만나는 건데!

 

“이 아가씨 정말 맘에 들어. 앤디! 이 친구 정말 맘에 든다고!

 

“아버지, 코니, 그만해요.

앤드류는 칵테일을 단숨에 들이켜고 맥주까지 들이켰다. 존을 위한 거야. 아버지와 존을 위한 거야. 얼굴이 빨개진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본 존이 웃으면서 두 사람을 손가락질했다. 앤드류는 웃으면서 존을 끌어안았다.

 

“아들, 아빠가 우주로 가서 좋아?

 

“응, 아빠. 잘 갔다 와.

모인 사람 모두가 같이 웃었다. 프랜시스가 가장 크게 웃었고, 앤드류는 싱긋 미소만 지어보였다. 앤드류를 향해 프랜시스가 맥주캔을 뻗었고, 아들은 손을 뻗어 아버지와 건배를 했다. 30년 만에, 부자는 처음으로 건배라는 것을 해 보았다. 그리고 이게 마지막이겠군. 앤드류의 머릿속엔 그 생각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었다.

 

----------

깨질 것 같은 머리를 움켜쥐고 사내가 고개를 든 것은 아침이었다. 어젯밤의 광란의 흔적은

깨끗하게 치워진 채였다. 이 정신으로 내일까지 술이 깰 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많이 마신 것도 아닌데 기분이 더할나위 없이 사나웠다. 오늘까지는 공군본부에 가서 마지막 확인서를 제출해야 했다. 프랜시스가 존을 학교에 데리고 간 듯 둘 다 보이지 않았다. 사내는 무의식 적으로 거실의 화상모니터를 켰다. 익숙한 공군기지의 풍경이 뉴스화면에 잡히고 있었다. 사내는 시큰한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뉴스의 지문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순간, 사내의 눈이 갑자기 커 지고 화면의 날짜를 쳐다보았다. 앤드류는 재빨리 손에 잡히는 대로 바지를 꺼내 입고는 부리나케 차고로 달려갔다. 화상모니터에는 수증기가 풍겨 나오는 시리우스 왕복선의 카운트가 나오는 중이었다.

 

----------

 

앤드류가 뛰어든 곳은 항공공병감의 사무실이었다. 마치 들소처럼 문이 열리자 마자 튀어 들어온 그는 나란히 서 있는 공병감과 코니 페이드의 모습을 발견하고 우뚝 서서 손으로 두 사람을 가리켰다.

 

“지금 이게 뭔 짓인지 설명해 봐요. 저기 떠나는 우주선은 뭐고 난 지금 어떻게 된 거죠?

 

“진정하게 앤드류 대건 성 중위. 일순간에 이야기하기는 복잡하군.

 

-시리우스 2번대 카운트 다운 360부터 시작합니다. 360,359,358-

 구내 스피커의 울림이 이어지자 앤드류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짜며 두 사람을 연달아 쳐다보았고, 공병감은 어디론가 열심히 수화기를 돌리는 중이었다. 코니는 두 손을 펼치고 앤드류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앤드류 기다려요. 어차피 당신은 못 타요.

앤드류는 번쩍이는 눈으로 코니를 쳐다보고 으르렁거렸다.

 

“이게 무슨 엿 같은 경우죠? 난 그럼 어떻게 되는 거요. 임무가 바뀐 건가?

 

“아리스타쿠스 사태가 소강되면 갈 수 있을 거에요. 전망이 그렇게 나왔으니까.

앤드류는 그제서야 예전처럼 코니를 쳐다보았다. 바깥에 보이는 발사대에서 연기가 본격적으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앤드류는 창문을 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 무슨 일인지 하나도 갈피를 못 잡겠어요. 내가 얼마나 오래 누워있던 거지? 아버지는 어디 간 거고?

“지금 연결 되었네. 화상으로 가능한가? 좋아.

공병감의 뒷벽에 있던 화상 모니터가 점멸되더니 한 사내의 얼굴이 크게 들어왔다. 프랜시스 성이었다. 사내는 묘한 제복과 함께 꽉 끼는 헬멧을 끼고 있었다. 앤드류의 표정이 갑자기 딱딱한 밀랍처럼 굳어버렸다.

 

5분전 녹화된 영상이네.

공병감의 말은 앤드류의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프랜시스가 히죽 웃으면서 앤드류에게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안녕, 앤디? 좋은 아침이 되었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겠지만 말이야.

 

“코니, 이게 뭐야?

코니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코니 대신 프랜시스가 알아들었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앤디, 네가 이걸 깨어나서 볼 때쯤 되면 아마 나는 시리우스 2번대의 좌석 안에 있을거다. 솔직히 짜증났거든. 난 아직 젊은 데다가 앞날도 창창한데 어울리지도 않는 할아버지 노릇이라니. 솔직히 아들은 몰라도 할아버지는 예상 못했거든.

 

“코니, 이게 무슨 이야기야?

앤드류가 눈을 부라리며 코니와 공병감을 쳐다보았지만 두 사람은 모두 심각한 표정이었다. 공병감이 먼저 입을 열었다.

 

“프랜시스 중령이 먼저 제안한 걸세. 코플리의 장례식이 끝나자 마자 나한테 달려왔어.

 

“앤드류, 당신은 딱 34시간분의 항행약을 알코올과 같이 섭취했어요. 엄밀히 말하자면 불법이지만 저하고 공병감님이 눈을 감은 거죠.

공병감이 코니를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앤드류는 자신의 머리칼을 잡고 두 사람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왜 말씀을 안 해 주셨습니까?

앤드류의 말에 대답을 한 것은 코니였다.

 

“중령님의 부탁이었어요. 안 그러면 당신이 갈 거라고.

아직 숙취가 깨지도 않은 상황이어서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공병감과 코니는 마치 연극을 하는 사람들처럼 제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대사만을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화면에 크게 보이는 아버지의 얼굴은 어느 샌간 웃음이 거둬지고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프랜시스는 화면 너머 앤드류를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미안하다. 너와 네 엄마에게.

갑자기 아픈 눈 사이로 시큰한 감각이 들어왔다. 사내의 가슴이 찡 하니 울렸다.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 대면한 상황이 아닌 스크린을 통해 울려퍼졌다.

 

“미안하다. 앤디, 정말 미안하구나. 난 우주 공병이라는 게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그건……아버지로써 우주공병이 자랑스럽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런데 왠지 실패한 것 같아.

부옇게 화면이 흐려졌다. 앤디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아버지의 웃는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계속 웃으면서 화면을 피했다. 부끄러움, 사내가 자식에게 갖는 부끄러움을 젊은 아버지가 늙은 아들에게 보이는 중이었다.

 

-20, 19, 18, 17……-

 

 

“좋은 아버지로 돌아와서 너를 보게 되기를 원했다만……그건 네가 존에게 해 줘야 할 일인 것 같다. 난 아버지 노릇도 사실 안 어울려. 할아버지 노릇도 못 할 거야.

 

“예?

앤드류는 갑자기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코니는 눈을 깜박이더니 천천히 회의장을 빠져나갔고, 공병감은 대머리를 버릇처럼 쓰다듬고 있었다.

 

“앤디, 종신지원이다. 내 인생과 타키온 터널은 계속 함께 할 거야. 몇 백년의 시간이 지날지 알 수 없지만 이게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느낌이 드는구나. 이러다가 내가 향수병이 도지면 다시 돌아갈 날이 올 수도 있겠지. 내 이름을 전해다오. 존과 존의 아이들에게. 내가 돌아갔을 때 길을 잃지 않도록. 내가 누구인지 알려줘. 그게 없으면 무서울 것 같아.

 

-10초, 9, 8, 7, 6……-

 

“아버지!

프랜시스가 카메라를 쳐다보았다.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존에게 보여주던 그 얼굴이었다. 살짝 눈가에 빛나는 것이 보였다. 앤드류의 입이 벙긋거렸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졌다. 프랜시스의 입이 열렸다.

 

“…사랑한다. 앤디.

 

“아빠!

- 제로.

 

그 때였다. 공병감실의 현황판이 붉은 색으로 점멸되었다. 시리우스행 2번대 발진 이라는 글씨가 강렬한 흰색으로 붉은 바탕 위에서 빛났다. 구궁거리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 발사대에서 흑색의 거대한 철기둥이 하늘로 솟아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앤디는 강화 유리에 붙어서 불기둥을 발에 배 달고 힘차게 솟구치는 로켓을 바라보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한 달 전만 하더라도 절대로 입에서 나오지 않던 호칭을 부르면서 사내는 울기 시작했다. 공병감이 다가와서 울고 있는 사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사내의 울음소리는 곧 진동처럼 밀려오는 로켓의 소리에 묻혔다. 어느 샌가 파란 하늘을 가운데를 뚫으며 붉은 꼬리를 휘감는 로켓은 기세 좋게 방향을 바꾸었다. 낮에 비치는 하얀 달과, 그 옆의 육각형 터널의 붉은 조명이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달 밑 파란 하늘 아래 바람 한 점 없는 잔잔한 바닷가와 푸른 언덕과 화려한 마천루들의 선이 이어졌다.

 

나들이하기에 좋은 날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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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A. 천공의 도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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