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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착각, 온실속의 화초

2014.01.18 17:5301.18

오늘도 여지없이 서점에 들렀다. 아이는 실내놀이터에 들어간 지 이미 오래다. 들어가는 아이에게 이런저런 주의를 시키기 위해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아이는 놀이터의 문이 열리기 무섭게 뛰쳐들어가서는 엄마가 있는지 없는지도 상관없이 뛰어놀기 시작했다. 늘 있는 일이었다. 무엇이 그리도 신이 나는지 여기만 오면 계산을 하기도 전부터 잔뜩 들떠 있다가 계산을 마치고 문이 열리면 아이는 엄마는 나 몰라라 냅다 뛰어들어가곤 했다.

일주일에 두 번, 겸사겸사 마트에 들러 아이를 실내놀이터에서 놀도록 풀어놓고 내가 하는 일은 서점에 들러 책을 읽는 것이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사기도 한다. 나는 오늘도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서점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녀 본다.
그러다 문득 음악 코너에서 발이 멈췄다.
옛 생각이 떠올랐다. 한때는 음악을 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기세 좋게 뜻이 맞는 친구와 어울려 다니던 때도 있었다. 분명 그때는 그 일이 내 사명인 것처럼 여겨졌고 그래서 기필코 그 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던 때였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물론 행복하지만 나는 그저 남편을 기다리며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를 돌보는 것이 전부인 삶을 살고 있었다.
내 나이 벌써 서른셋.
아직 젊다고 할 수 있는 나이이지만 과연 백 세 시대라는 이 시대에서 남은 칠십 년을 지금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어째서 그날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늘 방문하는 늘 같은 서점이었다. 늘 지나치던 음악 코너였다. 온갖 악보들이 즐비한 그 책장 앞에서 그날따라 왜 발이 멈췄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를 만나기 위해서였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음악 코너 앞에서 한참 옛 생각을 하던 나는 문득 서점 한쪽의 시디 코너를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무수히 많은 음악 시디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꿈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그 꿈을 흐지부지 잊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저 시디 중에 내 이름이 새겨진 것이 있지 않을까?
"어?"
나는 온갖 상념에 젖어 구석구석 훑어보다가 낯익은 누군가를 발견했다.
분명 그였다. 한참 꿈에 부풀어 있던 그때,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함께였던 그다.
"김성현?"
반가웠다. 고개를 돌리고 나를 바라본 성현은 역시 나처럼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수?"
"그래, 나 지수야. 세상 참 좁다. 어쩜 이렇게 다시 만나니?"
옛 생각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 역시 올해로 서른셋일 거다. 그것을 증명하듯 말끔한 머리 모양이라든가 단정하게 차려입은 정장은 예전의 그와는 무척 다른 모습이었다.
"너 많이 변했구나?"
나는 웃었다. 예전의 그는 늘 개성 넘치는 소년이었다. 정말로 지금의 그와 예전의 그는 무척 달랐다. 성현이 웃었다.
"그래. 넌 여전히 그대로구나?"
"에이 설마 많이 늙었지."
성현이 피식 웃었다.
"아냐. 넌 예전 그대로야."
모처럼의 새로움이었다. 늘 같은 마트, 늘 같은 서점, 늘 같은 놀이터, 늘 같은 집, 늘 같은 사람들만 만나다가 이렇게 만난 새로운 사람은 어쩐지 신선한 느낌이었다.
"여기서 뭐 해?"
성현이 물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오늘따라 옛 생각이 나서 살펴보는데 너를 발견했어. 아마 널 만나려고 그랬나 봐."
"그래? 하긴, 나도 시장조사를 좀 해볼까 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별 생각 없이 들어온 건데…. 오늘 우리가 만날 운명이었나 보다."
운명? 운명이라는 단어가 주는 묘한 여운에 그저 기분이 좋았다.
"결혼은 했니?"
나는 아줌마가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금방 무안해졌다. 그보다 더 나은 질문이 있었을 텐데 대뜸 결혼이라니, 그가 오해라도 하면 어쩌려고….
성현이 웃었다.
"아직"
"어? 왜 아직이야? 너 정도면 금방 갈 줄 알았는데?"
성현은 웃기만 했다. 왜 웃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성현이 되물었다.
"너는?"
"아, 나는 했지. 아이가 벌써 다섯 살이야. 저기 놀이터에서 놀고 있어."
나는 서점에서도 잘 보이는 실내놀이터를 가리켰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잠시 바라보는가 싶었다.
"아아…. 그렇구나."
무심하기 짝이 없는 말투. 겉모습은 좀 변했을지 몰라도 역시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럼 아무 일도 안 하고 살림만 하는 거야?"
되돌아온 질문에 문득 쥐구멍이 찾고 싶어졌다. 자신감 넘치는 그의 두 눈이 나를 향해 외치는 것 같았다.
'그 꿈 다 포기한 거야?'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으응, 살림하고 애 키우고 다들 사는 것처럼 사는 거지. 너는?"
나는 재빨리 화살을 그에게로 돌리고 싶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음악 하지."
"와! 가수 하는 거야?"
순간 텔레비전에서 한 번도 그를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무척이나 실례되는 질문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미 질문은 떠난 뒤였다.
"그건 아냐. 작곡해. 음악 만들어서 가수들한테 파는 거야."
"그건 더 대단한 거 아냐?"
그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돈이면 안되는 게 없어."
"에이, 그래도 실력이 없으면 돈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잖아?"
"그런가?"
그가 조금 씁쓸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가 금세 표정을 환하게 바꾸더니 물었다.
"커피 마실래?"
"어?"
나는 잠시 실내 놀이터를 바라보았다. 아이가 어디 있는지 눈으로 찾아보았다. 아이는 땀을 흘려가며 트램펄린 위에서 정신없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연신 까르르 웃는 모양이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아이 때문에 안되나?"
그가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냐. 우리 애는 놀이터에 한번 들어가면 세상모르고 세 시간은 너끈히 놀아. 아직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으니까 괜찮아."
"그래? 그럼 저기에 커피숍 있던데 가자. 내가 살게."
"응."
나는 다시 한 번 놀이터의 아이를 살피고 그를 따랐다.




 그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최근 뜨고 있는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걸그룹의 음악을 그가 만들었다고 했다. 이전에 다른 남자그룹도 그가 만든 음악으로 데뷔해서 지금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한다. 그가 오늘 서점에 들렀던 이유는 자신이 만든 노래로 데뷔한 새 그룹의 반응이 어떤지 알아보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런 쪽에 관심이 없어 잘은 모르지만, 남편이 좋아하는 걸그룹에 대한 이야기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가 들어도 노래는 상당히 좋아 보였다.
"그 노래 정말 좋던데?"
"들어봤어?"
"응 남편이 그 걸그룹 팬이야. 네가 만들었다던 그 노래를 듣고 단박에 반했다던데?"
성현이 피식 웃었다.
"옷 벗고 춤추는 게 좋은 거겠지."
"아냐 아냐 정말로 노래가 좋다고 했어. 차에서 매일 듣는걸?"
"뭐 그렇다면 감사하지."
어딘지 모르게 그가 불편해 보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왜 음악 하지 않았어?"
"어?"
나는 당황했다. 내가 왜 음악을 그만뒀지? 딱히 이유는 없었다. 지금 굳이 이유를 말하라면 댈 수는 있었다.
"돈이 없어서."
그가 멀뚱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시선이 못 견디게 싫었다. 그는 제법 잘사는 집의 외아들이었다. 나는 딸 넷의 맏이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도 딱히 이유는 될 수 없었다. 내가 흔히 눈물질질짜는 드라마들이 그러하듯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다던가 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저 평범하게 대학에 다니다가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한 것뿐이다. 조금 일찍 결혼하긴 했지만, 그것 역시 집에서 입이나 덜자는 식의 의미도 아니었다. 나는 정말로 남편을 사랑했고 그가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너무 어려 안된다고, 대학 졸업하고 사회생활 좀 하다가 해도 되지 않느냐고 부모님이 치맛자락을 붙들고 만류하셨지만 내가 한 것은 짐 싸들고 그의 자취방에 쳐들어간 것이었다. 그렇게 사위가 되었기 때문에 한동안 왕래는 없었으나 지금은 사위 중 가장 귀염받는 사위가 되었다. 내 남편은 귀한 딸을 훔쳐갔다는 죄책감 때문에 무던히도 애를 썼고 그것이 이제는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딱히 이유가 될 수 없었다. 내 남편은 가난한 집의 고아나 다름없는 외아들이었고 나 역시 그저 그런 집의 네 자매 중 맏이였지만 내가 의지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거다. 그런데 나는 왜 음악을 하지 않았을까?
"너 노래 정말 잘했는데…."
그가 커피를 마시며 옛일을 떠올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나도 저절로 옛일을 떠올렸다.




그는 엄마 친구 아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절친한 친구였던 엄마와 성현의 엄마는 결혼 후에도 둘도 없는 사이를 유지했다. 각자 만난 남편의 처지에 상황은 좀 달라졌지만 그래도 둘의 우정은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엄마와 엄마 친구는 둘 다 음대 출신이었다. 우리 외가 사정에 어떻게 엄마가 그 비싼 레슨비와 음대등록금을 마련했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음대 출신이었다.
엄마는 지금의 나처럼 살림했다. 모든 꿈을 접고 아빠 뒷바라지에만 전념했으며 딸 넷을 번듯하게 키우는데 온 신경을 쏟았다.
엄마 친구는 아들 하나만을 낳고는 음악학원을 운영했다. 돈 많은 남편 덕에 제법 번듯한 학원을 차렸고 거기에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기를 다 가르쳤다. 나는 엄마와 엄마 친구의 사이좋음 덕분에 그 학원에서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사실 내 피아노 실력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열심히 다닌 덕분에 체르니까지는 칠 수 있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이상은 별로 재미가 없었고 흥미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 원장님의 방침에 나는 더는 체르니를 치지 않고 이것저것 다양한 음악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다 어떤 악보를 보았다.
제목은 장미. 가사를 가만히 읽어보았다. 그것은 엄마가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였다. 성악을 전공했다던 엄마가 다른 노래를 부르는 것은 본 적이 없지만, 이 노래만은 설거지하면서 혹은 청소를 하면서 늘 흥얼거렸기에 엄마의 목소리가 저절로 떠올랐다.
몇 번인가 피아노를 연습하다 보니 엄마의 모습까지 떠올랐고 그러다 보니 저절로 내 입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지수는 정말 목소리가 곱구나?"
언제 오셨는지 원장님이 와서 듣고 있었다. 엄마 친구인 원장님은 늘 나를 칭찬하셨다. 나는 그게 엄마와의 친분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내가 잘해서 그런 것인지는 몰랐다. 확실한 한가지는 칭찬을 받으면 기분이 좋다는 거였다. 피아노 칠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 들은 칭찬은 어쩐지 더욱 기분이 좋았다.
"아예 이 길로 나가는 게 어떻겠니?"
비록 겨우 중학교 일 학년의 나이였지만 원장님의 표정은 정말로 진지해 보였다. 나는 고민했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우리 집은 그냥저냥 먹고사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집이었다. 그리고 어린 나이였지만 성악을 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아마 엄마가 성악을 전공하고도 그 전공을 살리지 않은 것도 그래서일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살며시 미소 짓는 것뿐이었다.
 "한 번 더 해볼래?"
원장님은 내게 노래를 다시 해보길 권유했다. 나는 또 칭찬이 받고 싶었고 그래서 노래했다. 원장님은 정말로 기쁜 얼굴로 활짝 웃으시며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아마 그때부터였던가 보다. 원장님은 나를 집으로 자주 불러들이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난생처음 보는 사람을 인사시키셨다.
"이제부터 너에게 노래를 가르쳐주실 거야."
"노래요?"
"그래."
원장님은 정말 기쁘게 웃으셨다. 정말로 유명한, 말을 바꾸자면 정말로 비싼 성악교수였다는 것은 뒤늦게 알았다. 하지만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노래하는 것은 무척이나 즐거웠다. 피아노를 칠 때와는 달리 정말로 행복해지는 느낌이었다. 두 눈을 감고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다 보면 사방이 고요해지고 오직 세상에 나 혼자만 남아 있는 느낌이었다. 음악에 따라 때로는 찬란한 꽃밭이었고 어떨 때는 어둠이 깔린 바다 위 이기도 했다. 그 신기함을 나는 잊을 수 없었고 그래서 아무 거리낌 없이 순순히 레슨을 받았다.

그때 옆에서 반주했던 사람이 바로 성현이었다. 원장님의 외동아들. 학원에서도 몇 번 본적이 있었다. 음악학원을 운영하는 어머니와 음대 교수직을 맡고 계신 아버지를 둔 덕분에 그는 걸음마보다도 피아노를 먼저 배웠다고 했다.
처음엔 사실 그의 존재 자체를 잘 몰랐다. 그저 내가 노래를 하는 것만이 기쁠 뿐이었다.
"너무 혼자만의 세계에 빠지지 마."
한참 정신없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음악이 멈추더니 선생님께서 주의를 시키셨다. 나는 무슨 소린지 몰랐다.
"아카펠라를 하는 것은 아니잖니? 반주를 잘 들어봐. 거기에 귀를 기울여."
내가 한 행동이 어디가 잘못된 것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선생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와는 다른 어떤 느낌이 전신을 휘감았다. 그저 나 혼자 좋다고 노래를 부를 때와 달리 반주에 귀를 기울이면서부터 내가 피아노를 치던 때는 알지 못했던 무언가가 그의 피아노 소리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정말로…. 피아노를 잘 쳤다. 그 후로는 이따금 실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기도 했는데 반짝이는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창가에서 까만 그랜드 피아노에 앉아 열정적으로 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하찮은 존재가 되는 느낌이었다.

"너 정말 예쁜 거 아니?"
그가 내게 가장 처음 건넨 말이었다. 나는 아마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냐하면, 그가 큰 소리로 웃으며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노래 할 때 말이야. 대체 뭐라고 생각한 거야?"
나는 더 크게 당황하여 얼굴을 붉혔을 것이다. 그는 한참이나 큰 소리로 웃더니 난생처음 듣는 어떤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잘 들어봐."
잔잔하게 퍼지기 시작하는 피아노 소리가 열정적으로 바뀌더니 그의 목소리가 레슨실을 가득 채웠다. 내 목소리완 다른 어떤 힘이 그의 목소리에는 있었다. 두 눈을 감고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정말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태어나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펴 보인 적이 없던 나는 그런 그가 정말 신기했고 정말 존경스러워 보였다.
"어때?"
"어…. 뭐가?"
"노래 말이야."
"정말 잘하던데?"
"아니, 이 노래 어때? 내가 만든 건데 괜찮아?"
나는 깜짝 놀랐다. 겨우 중학교 일 학년이 만들었다고 하기엔 어린 내가 듣기에도 노래는 제법 괜찮았다.
"너…. 대단하구나?"
그가 씩 웃었다. 환한 태양 같은 그 자신감이 정말 부러웠다.
"너 나랑 듀엣 하지 않을래?"
"뭐?"
나는 무슨 소린가 싶었다. 듀엣?
"나는 가수가 될 거야. 원래는 혼자 할 생각이었거든. 근데 너랑 하면 더 좋을 것 같아. 나 혼자 하면 대한민국이 끝이겠지만 너랑 하면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어때?"
나는 지금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는 그걸 다른 의미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너도 딴따라니 뭐니 그런 소릴 하려는 건 아니지?"
"딴따라?"
"그래. 너도 대중가수를 하찮게 보는 그런류의 사람인 거냐? 우리 엄마나 아빠처럼?"
"아닌데…."
"그래? 그럼 나랑 같이 하는 거다."
"으응…."
물은 그렇게 엎질러졌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었다. 그와 함께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그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듣다 보면 흡사 내가 정말로 톱가수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상당히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두었고 자신감이 충만했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나는 나도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전화벨 소리가 상념을 깨웠다. 번호를 보니 놀이터였다. 동시에 시계를 확인해보니 벌써 아이가 놀이터에 들어간 지 네 시간이 넘어버렸다. 아마 놀다 지친 아이가 엄마를 찾은 모양이었다.
"나, 이만 가봐야 할 거 같아."
"너무 오래 잡고 있었나 보네. 미안해."
"아냐 오랜만에 만나 옛날 이야기해서 좋았어."
나는 진심이었다. 그를 만나 오랜만에 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은 마치 그때 그 시절, 그의 충만했던 자신감을 조금은 나누어 받아 자신감이 넘쳐 있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행복하긴 했지만 뭔가 내가 보잘것없는 사람이라 여겨지던 이때에 그것은 굉장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휴대폰 좀 줘봐."
"내 것?"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뒤늦게 그가 전화번호를 저장하려는 것임을 알았다. 그는 내 휴대전화로 자신의 것에 전화하더니 금세 끊고 내게 내밀었다.
"또 연락해도 될까?"
"그럼!"
나는 자신만만하게 외쳤다가 후회했다. 어찌 되었건 그는 사회인이다. 그리도 나는 전업주부다. 전업주부에게 한가한 시간은 사회인이 가장 바쁠 시간이다.
"저기, 나는 낮에만 시간이 나는데…."
그는 그런 것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씩 웃었다.
"작곡가라는 거 때때로 백수 같을 때가 있기도 해. 그리고 다행히 지금이 그때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나는 다시 환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그럼 다음에 또 보자."
그는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집에 돌아오자 나도 모르게 노래가 흥얼거려졌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장미. 그 노래가 끊임없이 생각났다.
"당신 뭐 좋은 일 있어?"
"응. 어릴 때 친구를 오늘 만났거든."
"어릴 때 친구?"
"응. 함께 가수가 되자고 의기투합했었다던 그 친구."
"아 그때 그 친구?"
남편은 성현에 대해 알고 있었다. 내가 가장 꿈많았을 그 시기를 남편이 왜 모르겠는가? 남편이 피식 웃었다.
"그러다 바람 나는 거 아냐?"
나는 들고 있던 국자를 휘둘렀다.
"헛소리하면 맞는다!"
"어이쿠 마님, 그것만은 제발!"
남편은 과장된 행동으로 바닥에 엎드려 빌었다. 아이는 그것을 보고 뭐가 그리 신난지 배꼽을 잡고 쓰러져 웃기 시작했다.




성현을 만나 모처럼 붕 뜬 기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꿈많은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서 나는 한동안 구름을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어디야?
"응. 전에 그 커피숍이야."
남편을 출근시키고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분주히 청소하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성현이었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전화를 받았고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여기야."
나는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 그는 전보다 더 말끔해진 차림으로 나를 보고 웃으며 다가와 앉았다.
"일찍 왔네?"
"나 때문에 일부러 나온 거야?"
"어? 그건 아니고 원래 화요일은 매일 여기 와. 화, 목요일에 아이를 놀이터에서 놀게 해주려고 오거든."
"동네 놀이터는?"
"워낙 큰애들이 많다 보니까 애가 치이는 거 같아서. 저기는 키제한이 있어서 너무 큰 애들은 못 들어오거든."
"아아…."
우리는 다시 웃음꽃을 피웠다. 그와 함께 옛이야기를 하는 것은 무척이나 즐거웠다. 꿈많았던 소녀를 내 안에서 재발견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기쁜 일이었다.
갑자기 그가 심각한 표정을 했다.
"너 가수 하지 않을래?"
"뭐?"
"내가 밀어줄게. 한번 해봐. 네 실력 정말 아까워."
나는 까르르 웃었다. 소리가 너무 컸는지 사방에서 시선이 쏟아졌다. 나는 얼른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쿡쿡 소리 내 웃었다.
"여전하네? 기분따라 주위 시선 의식 안 하고 막 되는대로 행동했다가 민망해하는 거."
나는 씩 웃으며 혀를 날름했다. 아주 오랜만에 해보는 행동에 나는 순간, 또 민망해졌다.
"근데 왜 웃었어? 너 설마 안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도 집에 티비 있어. 요즘 데뷔하는 가수들이 전부 미성년이라는 거 잘 알고 있거든?"
"그거야 아이돌이나 그렇지. 정말로 음악성으로 승부하면 나이 몇 살 깎고 데뷔할 수 있어. 또 돈이면 안 되는 것도 없고."
또 돈타령, 그가 언제부터 저렇게 되었을까?
"아무리 돈이 있음 뭐하니? 실력이 없는데."
"너는 너를 너무 모르는구나?"
"아니야 나는 나를 너무 잘 알아. 세상에는 나보다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노래 잘하는 가수들을 줄줄 읊었다. 대부분 내가 좋아하는 가수들로 대중음악이랑은 좀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가 피식 웃었다.
"여전히 그 사람들을 좋아하는구나?"
"뭐?"
"다행이야. 아직 취향이 바뀌지 않은 것 같아서."
그가 작은 꾸러미를 내밀었다. 곱게 포장된 예쁜 선물상자를 앞에 두고 나는 잠시 당황했다. 내가 이런 선물을 받아본 게 언제더라?
"사라 브라이트만이야. 너 그 사람이 부르는 노래 듣는 거 좋아했잖아."
아…. 예전의 내가 그랬었지…. 나는 새삼 새로운 사실을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어리둥절했다.
"안 풀어볼 거야?"
"응? 아, 아냐! 지금 풀어볼게!"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처음 사라 브라이트만의 노래를 듣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던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오페라의 유령. 실황중계를 그저 지나가다가 전자제품점의 티브이 속에서 보았을 뿐이었다.
"뭐해?"
"응? 아 노래가 들려서."
나는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내 귀를 사로잡은 음악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있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시끄러운 거리. 자동차 소음이 가득하고 오가는 사람들의 소음이 가득한 그 길거리에서 나는 그녀를 처음 보았다. 쇼윈도 너머 텔레비전 속이었지만 나는 그녀의 노래가 끝나기 전까지 움직일 수 없었다. 이후로 나는 그녀의 모든 노래를 찾아냈고 모든 음반을 사모았다.
아, 그 음반들이 다 어디 있더라…. 나는 그때 열정적으로 사모았던 그 음반들을 몇 번인가 이사하면서 잃어버린 것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한때는 정말 소중하기 짝이 없었는데 어쩌다 그렇게 된 걸까?
"넌 그 사람 노래만 들으면 완전히 딴사람이 됐었어. 그렇게 좋아?"
"응. 노래라는게 사람을 울릴 수 있다는 거, 난 이 사람 때문에 알았어."
"너도 그렇게 될 수 있어."
그가 또 말했다. 나는 피식 웃었다.
"너무 비행기 태우지 마. 나 낙하산 없다?"
그가 정색했다.
"그들은 전부 어린 시절부터 노래 하나만을 갈고 닦은 사람이야. 장담하는데 네가 그랬으면 지금쯤 사라 브라이트만 찍어 눌렀을걸?"
"야, 사라 브라이트만이 와서 듣고 명예훼손으로 고소할라."
나는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진지한 얼굴이었다.
"아냐. 지금도 가망 있어. 너 담배 안 피지?"
"당연하지."
"술도 안 먹잖아."
"어떻게 알아?"
"목소리만 들어보면 알아. 조금만 더 갈고 닦고 연습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하지만 나이가…."
"너 아직도 예뻐."
순간 당황스러웠다. 그가 피식 웃었다. 아마 내 얼굴이 붉어진 모양이었다.
"뭐야? 남편이 그런 말도 안 해줘?"
"얘는? 결혼하고 그런 말 해 주는 사람이 어디 있니? 다 그냥 그렇게 사는 거지."
"그래?"
그가 웃었다.

그는 너무나도 진지하게 두 시간을 오직 나를 데뷔시키는 계획에 관해 이야기했다. 마치 그 옛날 자신이 가수가 되기 위해서 세워두었던 계획을 내게 말할 때처럼 열정적이었고 정말 진지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어쩌면 정말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또 시간이 흘러버렸다.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기 시작했다. 놀이터였다.
"나 이제 가봐야겠다."
"아아 그래. 어서 가봐. 목요일에 또 온댔지?"
"어? 아. 응."
"그럼 그때 보자."
그가 활짝 웃더니 또 멀어졌다. 그는 여전히 자신감이 넘치는 그런 사람이었다. 서서히 나 역시 그의 자신감에 물들기 시작했는지 나는 또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가수가 되는 나. 내 이름이 새겨진 음반이 발매되고 사람들은 내 노래를 들으면서 눈물 흘린다.
"또 무슨 생각해?"
"응? 아. 그 친구가 나더러 다시 음악 해보래."
남편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개그 프로그램에서 과장되게 놀라는, 딱 그 표정이었다.
"뭐야? 놀리는 거야?"
"당신이 설마 무대에서 그런 옷 입고 춤추겠다는 거야?"
남편은 분명 걸그룹을 떠올린 게 틀림없었다. 나는 그의 팔을 꼬집었다.
"이 엉큼한 늑대님! 가수 하면 꼭 그런 걸그룹밖에 없는 줄 아세요?"
"아니 늑대라니! 나는 지극히 건전한 삼십 대 삼촌 팬일 뿐이야!"
"그러세요? 뮤직비디오 볼 때 침이나 흘리지 마세요!"
"뭐야 질투하는 거야?"
"흥"
나는 팽 고개를 돌려버렸다. 남편이 피식 웃더니 나를 끌어안았다.
"바보냐? 그건 관상용이야. 관상용. 그 차이를 몰라?"
"그래도 싫다 뭐."
"삐친 거야 삐순이?"
그가 음흉한 미소를 짓는가 싶더니 입을 맞췄다. 여전히 부드럽고 따뜻한 입술이었다. 나는 두 눈을 감고 그 따뜻함에 행복함을 느꼈다.
"안돼애!"
두다다다 뜀박질 소리가 들리더니 질투쟁이 아이가 달려와 나와 남편 사이에 끼어들었다. 남편은 일그러진 얼굴로 잠시 아쉬운 듯 내 눈을 바라보더니 금세 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곤 아이를 뒤집더니 사정없이 배를 간질였다.
"동생 가지고 싶다면서 왜 이렇게 방해를 하냐 너는!"
"꺄하하하"
나는 얼굴을 붉혔다. 아이는 아는지 모르는지 까르르 웃으며 좋아 죽는 얼굴이었다.




다시 만난 그는 또 내게 꾸러미를 하나 내밀었다. 이번엔 제법 큼직한 쇼핑백이었다.
"가방이야."
"가방?"
"응."
그의 시선이 내 낡은 가방 위에 머물렀다. 남편이 아직 학생이던 시절, 내가 무작정 짐을 싸들고 그의 자취방에 쳐들어갔던 그때, 그가 몇 달간 담배를 끊어가며 모은 돈으로 사준 가방이었다. 당연히 십 년쯤 되었으니 낡아빠졌고 군데군데 헤지기까지 했지만 내겐 소중한 가방이었다.
"안 받을 거야?"
하지만 난 그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기쁜 얼굴로 그 가방을 받았고 꺼내보았다. 거리에 흔하게 깔린 갈색 가방, 마트 가방 코너에서도 쉽게 볼 수 있던 그런 가방. 나는 당연히 그런 가방의 하나인 줄 알고 환하게 웃으며 받았다.
"고마워."
그의 표정이 밝아지는 듯했다. 내 반응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니까 명품 가방 하나는 있어야 할 거야. 동창회 같은데 갈 때 들고 가."
"명품...백?"
"응. 샤x가방이야."
"샤...x?"
내가 명품을 즐기진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명품 중에서도 명품이라고 불린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남편이 직장 동료가 아내의 사치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불평을 토할 때 주워들었다면서 말해주어 알고 있는 거였다. 그때 들은 바로는 이 가방은 도저히 엄두도 낼 수 없을 만큼 비싼, 그런 종류의 가방이었다.
"나…. 나 이런 거 부담스러워서 못 들고 다녀."
나는 다시 쇼핑백에 담아서는 그에게 내밀었다.
"왜? 나 그 정도 가방쯤은 충분히 살 수 있어. 저작권료가 만만찮거든.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말고 받아."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내가 부담스러운데…. 나는 도무지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어떤 변명으로 가방을 도로 물려야 할지 아무리 고민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자꾸만 망설이는 나를 보며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가방도 많이 낡았던데 계속 그 가방만 들고 다녔잖아. 이참에 하나 바꿔."
낡은 가방으로 시선이 옮겨갔다. 옆자리에 내려놓은 그 가방은 남편이 정말 힘겹게 모은 돈으로 사준 가방이었다. 겨우 몇만 원짜리 시장 표였지만 그때 당시 우리에게 그 돈은 엄두도 낼 수 없을 만큼 큰 금액이었다.
"남편이 사준 거야. 학생 때. 이 가방 사려고 담배를 여섯 달을 참았대. 용돈도 거의 안 쓰다시피 하고 밥도 친구들한테 얻어먹고 다녔다고 그랬어. 내겐 이 가방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거야. 너무 낡았다고 나쁘게만 보지 말아줘."
그의 인상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쨌든 난 그거 환불할 생각 없어. 버리든지 말든지 이제 네게 넘어갔으니까 네가 알아서 해."
그는 뭐가 그렇게 불쾌했는지 그대로 커피숍을 떠나버렸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다. 여기저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떤 여자는 테이블 위의 쇼핑백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나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그 가방은 쇼핑백 채로 장롱 깊숙이 자리 잡았다. 인터넷을 통해 진짜 가격을 알게 되자마자 나는 결심했다. 다음에 만나면 그에게 가방을 꼭 돌려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그가 화가 나서 다시는 나오지 않으면 어쩌지? 그간 딱히 약속을 잡은 적은 두 번째로 만나던 딱 그날뿐이었다. 화요일과 목요일. 버릇처럼 향하던 마트에 가면 늘 그가 있었다. 다음에도 그곳에 가면 그가 있을까? 혹시 나오지 않으면 어쩌지?
사소하기 짝이 없는 일로 고민하던 나는 결국 전화기를 들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고 청소까지 끝마치고, 조용하고 평화롭기 짝이 없는 집에서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통화버튼을 눌렀다.
-지수야! 네가 웬일이야? 먼저 전화를 다 주고?
그의 목소리는 무척 밝아 보였다. 나는 내심 안심하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저 그 가방, 너무 비싸. 나는 그런 거 겁나서 들고 다니지도 못해. 정 사주고 싶으면 다른 거 안될까? 마트에 가면 가방 많잖아."
-그게 그렇게 부담스러웠어? 너 그렇게 사는 거야?
뭐? 뭔가 간질간질했다. 뭐지? 조금 더 생각하면 그게 뭔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당장은 가방을 돌려주는 게 급했다. 몇백만 원짜리 가방이라니…. 나는 가방을 신줏단지 모시듯 들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다음 주 화요일에…. 커피숍에 와 줄 거야?"
그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그게 걱정이었던 거야?
"응. 너 화내면서 갔잖아. 나는 다시 네가 오지 않으면 어쩌나 싶어서…."
-그럴 리가 없잖아. 거기 가야 널 볼 수 있는데.
또 묘한 느낌이 나를 간지럽혔다. 뭐지? 대체 이 속 시원하게 풀리지 않는 묘한 느낌은?
-갈 거야. 걱정하지 마.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됐지?
"응? 아…. 응."
-그럼 그날 보자. 예쁘게 하고 나와.
그가 먼저 달칵 전화를 끊었다. 나는 한참 핸드폰을 손에 들고 고민했다. 뭐지? 코끝을 간질이는 알 수 없는 느낌의 정체는?

금요일이 되고 정신없는 주말이 지나고 다시 월요일이 지나고 화요일이 될 때까지도 나는 그 느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그대로 간질간질, 나를 괴롭히는 느낌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나는 다시 마트로 향했다.

그는 약속을 지켰다. 늘 앉아 있던 그 자리에 그가 음악을 들으며 앉아 있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쇼핑백을 올려놓았다.
"미안해. 네 정성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나는 정말 그런 거 겁나서 못 들고 다녀서 그래."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너무 내 생각만 했나 봐."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쇼핑백을 들어 자기 옆자리로 옮겨놓은 그가 이어폰 하나를 빼고 내밀었다.
"들어볼래?"
"뭔데?"
"들어보면 알아."
나는 그의 짓궂은 표정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뭐 소리 크게 틀어놓고 그런 거 아냐?"
"아냐 아냐 넌 나를 그렇게밖에 안보냐?"
나는 피식 웃었다.
"나도 농담이야. 설마 네가 서른 먹도록 아직도 그런 장난 하겠니?"
그가 환하게 웃었다. 나는 이어폰을 받아 귀에 꽂았다. 그리고 잠시 멍해 있었다.
"잘 들어봐. 그게 네 목소리야."
그것은 내가 한참 꿈을 키우던 그때 그와 함께 만들었던 녹음테이프였다.
"본가에 가서 창고를 한참 뒤졌어. 그리고 겨우 찾았지. 보관을 엉망으로 해놔서 테이프가 좀 늘어지고 그랬길래 내가 손 좀 보긴 했는데 그래도 정말 최소한으로 했어. 네 목소리를 최대한 살리고 싶었거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내 반응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내 목소리를 듣고 충실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다.





나는 그와 종종 노래하는 것을 녹음하곤 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는 기록이 중요하다면서 나와 함께 자신이 만든 곡을 연주하고 노래할 때는 늘 녹음을 했다. 그와 나 사이에 주고받은 사소한 대화들까지 함께 녹음되어 있었지만, 그보다도 다시 듣는 어린 시절의 노래하는 내 목소리는 내 기억 속과 달랐다.
나는 사라 브라이트만의 노래를 처음 들었던 그때처럼 몸을 떨면서 눈물을 흘렸다.
"어때? 내 말이 맞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 목소리가 저랬던가? 내 목소리가 이렇게 곱고 아름다운 소리였던가?
"거봐. 내 말이 맞다니까? 만약 네가 그때부터 쉬지 않고 갈고 닦았더라면 사라 브라이트만? 흥이지. 우습게 제쳤을걸?"
"하지만…."
"왜 그렇게 자신감이 없어? 좀 자신감을 가져봐. 너는 충분히 해낼 수 있어."
나는 또다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삐쭉 솟아올랐던 싹 하나가 순식간에 거대한 나무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꿈. 그것을 나도 가질 수 있을까? 과연 그 꿈을 현실로 끌어낼 수 있을까?
"내가 도와줄게. 너의 실력에 내 능력이라면 못할 것도 없어. 어때?"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또 그의 자신감에 전염된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늘 자신감이 충만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그 자신감을 전염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었다.
그가 환하게 웃었다. 그 이후로 이어진 것은 지난번보다 더욱더 구체적인 나를 가수로 만드는 계획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의 계획을 듣고 있노라니 나는 벌써 내가 세계적인 가수가 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늘도 헤어질 시간은 오고 말았다. 나는 놀이터에서 온 전화를 받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내가 바래다줄게."
"어? 안 그래도 괜찮아. 너 바쁘잖아."
"아냐. 너 매일 택시 타고 다니잖아."
그건 어떻게 알았지? 그는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시선을 회피하더니 말했다.
"주차장에서 나오는데 택시를 기다리는 걸 봤어. 택시보단 나을 거야. 내가 바래다줄게."
그도 마트에서 볼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늘 아이를 데리고 나온 후 장을 본 다음에 집에 간다. 그걸 어찌 본 걸까?
"아냐, 안 그래도 돼."
"가방을 받지 않는 건 네가 그간 살림만 하다 보니 그래서 그런다고 치자. 근데 이런 것도 거절하는 거야? 너 어느새 그런 여자가 된 거야?"
또 코끝을 간질이는 묘한 느낌이 와 닿았다. 성현과 만나 다시 꿈을 키우면서 나는 다시 엄마, 아내가 아닌 지수가 된 것 같았다. 그래서 행복했는데 이따금 그가 내뱉는 말들은 자꾸만 내 코끝을 간질였다. 문제라면 나는 그게 뭔지 도무지 알아낼 수 없다는 거였다.
"싫으면 됐어!"
그가 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는 어쩐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가방을 돌려줬을 때도 순순히 받아준 그였다. 차로 바래다주는 정도는 상관없는 일 아니던가?
"아냐. 미안해. 네 차 타고 갈게."
그는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또 묘하게 코끝을 간질이는 뭔가가 있었다. 속 시원히 긁고 싶었지만 긁어도 긁어도 풀리지 않는 그 간지러움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얼마후에 풀리고 말았다.

제법 묵직한 장바구니였지만 내가 들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한사코 그걸 들어다 주겠다고 따라 엘리베이터를 탔다. 문을 열고 잘 가라고 인사를 하자 그가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할래?"
그는 사뭇 진지해 보였다. 나는 아이에게 잠시 집에서 기다리라 말하고 문을 닫았다. 조용한 공간. 앞집은 맞벌이하느라 이 시간이면 늘 비어 있어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이따금 엘리베이터가 띵띵 울리는 것을 빼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쌀쌀하고 적막한 공간에서 그가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사랑해."
나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가 뭐라고 한 거지?
"나 옛날부터 너 좋아했어. 남편하고 사이도 안 좋잖아. 이혼하라고는 않을게. 아이도 있는데 그건 어려울 거란 걸 잘 알아. 하지만 날 거부하진 말아줘. 그냥 지금처럼 일주일에 두 번씩 얼굴만 봐도 괜찮아. 응?"
나는 여전히 멍해 있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가?
그가 또 무언가를 한참 망설이는가 싶더니 갑자기 키스했다. 나는 깜짝 놀라 그의 따귀라도 때려주려 했지만, 그는 환하게 웃더니 냉큼 계단으로 도망갔다.
"그럼 목요일에 보자!"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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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몰도비아 14.01.18 17:55 댓글

    회원가입하자마자 이렇게 쓱 글 하나 던져놔도 되는건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사이트가 있는줄 알게 되다니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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